2016. 4. 25. 18:40ㆍ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3)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金銅牡丹水盤花文小壺)의 꽃꽂이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는 금동으로 만든 조그만 항아리에 모란을 수반에 꽃꽂이한 그림을 공교하게 새겨넣은 금속공예품이다. 국립박물관 소장이라 전하나 현재 국립박물관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크기도 확인되지 않는다.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는 고려시대에 종교적 영역이 아닌 세속에서의 꽃꽂이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당대에 꽃꽂이가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증거물이다. (규격을 알면 꽃꽂이가 가능한, 불전에 놓일, 화병용일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나, 병이 아니라 항아리이고 금동제라는 점, 새겨진 그림이 종교적 공경보다는 당대 취미를 반영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장풍군 가곡리 돌관 내부 모란 수반 그림>처럼 당대 귀족들의 꽃꽂이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청자에 연꽃과 모란, 작약 문양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그 화초에 대한 고려인들의 선호와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듯이, 수반화문이 항아리에 그려졌다는 것은 당시 수반화 곧 꽃꽂이가 그 당시 성행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18, 9세기 분재가 성행할 때 조선의 백자 문양으로 다수의 분재 문양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이다.
그 좌우로 또 그것보다 작은 그림이 보이는데 이를 확대하면 다음과 같다.
<3)-2.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 중앙 우측 그림>
<3)-3.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 중앙 좌측그림>
오른쪽의 화기(花器)는 굽이 있고 몸체와 굽의 이음부인 허리가 들어간 형태의 수반으로, 중앙 수반의 형태와 유사하고 꽃은 개화상태가 아니라 봉오리 상태의 모란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왼쪽의 그림은 수반이 아니라 화분, 화분 중에서도 분재분일 것이다. 이런 형태의 분의 경우에는 고려조나 조선조나 대개 석부분재가 아니면 괴석을 올려 놓았다. 상세한 관찰이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이 그림 속의 화분 위의 사물도 삼단의 형태를 취하면서 식물의 형상과는 거리가 있는데 괴석을 올려 놓은 것이 아닐까 한다.
흔히 도자나 서화에 그려진 분기(盆器)나 화기(花器)는 아름다움을 위한 작자의 상상의 산물로 넘겨보아 버리지만 대개 그것들은 실제 사실에서부터 아름답게 미화한 것에까지 걸쳐 있는 것이어서, 사실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바라보면 당대의 미의식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확히 당대의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다음의 유물은 고려 태조 왕건릉에서 발굴된 유뮬이다.
<3)-4. 고려 태조 왕건릉 출토 청자 유물. 북한 개성 고려박물관 소장>
북한의 개성에 있는 고려박물관은 이 유물을 <청자 술잔>으로 설명한다. 이를 청자 술잔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규격의 크기가 확인되어야 한다.
이 청자 기물의 형태를 보면 신통히도 그 형태가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수반과 일치한다. 마치 이 왕건릉 출토 청자기물을 보고 그린 것처럼 (어두워 하나밖에 보이지 않지만) 정면에 보이는 국화 문양까지도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수반의 몸체가 다소 짧으면서 더 넓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반을 바라보는 각도가 상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많다. 마무리하는 상부의 선이 상하 물결선인지 전후 물결선인지 또한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를 그린 각도가 상부여서 확인할 수 없지만 이는 이 둘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꽃꽂이 수반 문양'이 없었다면 이는 크기와 상관 없이 그대로 <청자술잔>으로간주되었을 터이나,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꽃꽂이 수반 문양>을 상세히 관찰한 결과, 태조 왕건릉에서 출토된 위 청자기물은 수반일 가능성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게 되었다.
<3)-5. 개성 고려박물관의 진열전시대>
술잔으로 보기에 의아한 점은 우선 크기가 크다는 점이다. 지름이 아래 벼루 크기의 반 이상에 해당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일반용 벼루에 견주더라도 용기의 크기가 거의 맥주컵 정도로 큰 것인데 왕가의 벼루이니 더 클 가능성이 많다. 둘째 태조 왕건의 능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술잔을 받치는 ‘잔대’가 함께 출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필자는 이 청자 기물의 용도가 술잔이 아닌 수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크기를 확인하여 다른 청자잔탁과 같은 크기여서 술잔으로 규정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수반에 대한 관찰로 고려조 당시의 수반 중에는 청자술잔의 형태와 유사한 수반이 존재했으며 그것이 금동제 항아리에 문양으로 새겨질 만큼 고급의 수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귀중한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려나 조선의 도자나 서화에서 나오는 분기(盆器)나 화기(花器)는 거의 실물로 간주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의 <자수분경사계도> 또한 그대로 당대의 분재를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당시의 분기(盆器)와 화기(花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이 왕건릉에서 출토된 <청자 수반>-혹은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수반-은, 현재 전하고 있는 이제까지의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수반에 추가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귀중한 수반인 동시에, 오늘날까지 전하는 수반 외에도 여러 다양한 수반이 고려시대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또 하나 위의 청자 유물이 수반으로 판명된다면, 우리는 두 유물의 관계를 통해, 최소한 태조 왕건 당대에 상당한 수준의 화기(수반)를 갖추고 또한 매우 높은 수준의 꽃꽂이를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blog.daum.net/gardenofmind/13424965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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