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5) 수덕사(修德寺) 벽화의 야화도(野花圖)와 수화도(水花圖)

2016. 4. 25. 19:21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5) 수덕사 벽화의 야화도(野花圖)와 수화도(水花圖)| 분재사고려시대

심천(心泉) 2011.03.1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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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5) 수덕사(修德寺) 벽화의 야화도(野花圖)와 수화도(水花圖)

 

수덕사(修德寺) 벽화의 일부인 야화도(野花圖) 수화도(水花圖)는 불가(佛家)의 공양화(供養畵)이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고려 31공민왕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 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壁畵) <수화도(水花圖)> <야화도(野花圖)> 1937년부터 실시된 수덕사 대웅전 해체 수리공사 중 발견된 것으로 실물은 6.25 동란으로 파손되고 지금은 그 당시 임천(林泉)이 그린 모사도의 일부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은 이 벽화가 1308(고려 충렬왕 34년)년에 그려진 것임을 알려준다.

 

  수덕사의 <야화도> <수화도>는 고려 시대 꽃꽂이의 압권을 보여준다. 우리는 수덕사의<야화도> <수화도>를 통해 고려시대의 꽃꽂이의 방식, 수준, 화기(花器)들을 그 가장 높은 수준에서 살필 수 있다.

 

 

1)      야화도(野花圖)

 

<5-1. 수덕사 대웅전 벽화 야생화도 모사(국립중앙박물관)>

 

  모란, 작약, 맨드라미, 치자, 들국화 등이 수반에 가득 담겨 있는 그림이다. 이 형태는 꽃꽂이에서는 반구형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모습은 오늘날의 꽃꽂이에 못지 않은 화사함을 지니고 있다. 예술이나 미의식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이나 이념에 따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 한 시대는 각각 그 정점에 이른 미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위 꽃꽂이가 보여준다. 꽃꽂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바치는 사람의 마음 속의 고마움과 기쁨, 대상에 대한 찬양이 잘 드러나 있다.


현세의 권력에 바쳐진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꽃꽂이나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의 꽃꽂이보다 더욱 화사하고 풍성하다. 물론 소재가 벽면이어서 금동이나 보다 예술적 제약이 적었다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수덕사 벽화의 꽃꽂이가 다채로운 수종으로 보다 화사하게 장식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 고려인들의 불심이 그만큼 깊었음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허용할 만큼 고려 시대 권력층의 불심도 매우 깊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수반 꽃꽂이를 통해서 고려인들의 원예생활의 한 면모를 보면서 나머지 원예생활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고, 또 고려청자의 공예 수준이 그 미적 능력에 있어서 어떻게 가능했을 것인지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꽃꽃이를 이루는 식물종이 다채롭다는 것은 <아름답게 펼쳐진 다채로움>이라는 꽃꽂이의 본질과도 관련이 있지만 고려시대에 특유한 화훼 및 분재미의식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2장에서 살피기로 한다.

 

 

2)      수화도(水花圖)

 

<5-2. 수덕사 대웅전 벽화 야생화도 모사(국립중앙박물관)>

 


연꽃, 어송화, 수초 등을 그린 것인데 훼손된 부분으로 말미암아 전체 모습을 상세히 확인할 수 없다. 채색 또한 모사 당시에는 많이 퇴색되어 원래의 상태는 거의 없다.

 

수반의 형태가 현재 전하는 원형 수반이나 사각수반과 달리 화기(花器)로서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고려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다른 청자 기물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공교로움에 필적한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다른 청자 기물들이 다수 출토된 것에 견주어 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수반이나 화분이 출토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조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수월관음도나 관경변상도 등의 불화에서는 화병과 수반 특히 수반에 의한 꽃공양이 주가되고 있는데, 화병보다는 수반이 풍성함과 화사함을 갖추기에 유리한 까닭에, 화초들이 다채롭고 화사할수록 수반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꽃꽂이를 위한 화기(花器)로 화분과 꽃바구니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야화도> <수화도>는 단순히 화공의 상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화가가 정물을 그리듯 존재하는 사물을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첫째 앞의 수월관음도와 달리 이 그림은 정물화에 가까운 것이어서 상상과 변용보다는 사실의 묘사로서의 성격이 더 크고, 둘째로 불전 공양화는 이때로부터 700 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5-3. 남해 금산 보리암 불전의 공양화(供養花)>

 

 

 

<5-4. 여수 향일암 불전의 공양꽃>

 

<남해 금산 보리암>의 불전에는 화병과 수반, 꽃바구니를 활용해 꽃을 공양하고 있고, <여수 향일암>의 불전에는 화분을 활용해 꽃을 공양하고 있어, 화병과 수반, 화분에 따라 어떤 차이가 생기는가를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이와 같은 꽃공양이 있었던 것이고 당시의 화공은 그것을 벽화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 화기(花器)와 꽃꽂이의 형상은 당대의 꽃꽂이 문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위 <금산 보리암> <여수 향일암>의 바구니 꽃공양과 화분 꽃공양은, 앞에서 언급한, 고려시대의 바구니 꽃공양화분 꽃공양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수종 합식에 능숙했으리라 추정되는 고려인들이기에, 또 전반적으로 오늘날보다도 깊었던 불심(佛心)으로 해서, 화분에 의한 꽃공양-오늘날처럼 수반꽃꽂이보다 현격하게 부족해 보이지 랂는 수준의-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리라 생각한다.


해인사 대적광전 벽화에도 꽃바구니 그림이 있는데, 이는< 금산 보리암>의 꽃바구니 공양이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해인사 대적광전이 조선조 성종대에 중건되었으므로, 바구니 꽃공양은 최소한 조선시대 15c초에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 속의 바구니 제작 솜씨가 오늘날의 솜씨에 가까운 것이어서 고려시대에도 대나무 공예가 충분히 발달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고, 또 대나무가 사군자의 하나로 고려에서도 매우 애호하는 수종이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화분과 바구니를 활용한 꽃공양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와 관련한 한문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의 관심과 주의를 기대해 본다.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이 불전(佛前)의 꽃공양에서 우리는 문화와 전통도 경우에 따라서는 생물학적 유전인자처럼 끈질기게 유전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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