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4) 돌관 안에 그려진 꽃꽃이 그림

2016. 4. 25. 19:03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4) 돌관 안에 그려진 꽃꽃이 그림  | 분재사고려시대

심천(心泉) 2011.03.0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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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4) 돌관 안에 그려진 꽃꽂이 그림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내부 탁본 사진, 개성박물관

돌관의 크기 :  길이 89.5cm, 너비 53cm, 높이 38.5cm. 시기 인물 미상

 

 


<4-1.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화장한 유골을 담은 이 돌관의 내외부의 사면에는 섬세한 장식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돌관의 덮개 가운데는 직경 41cm 정도의 둥근 바탕에 꽃으로 둘러싸인 두 선녀의 비천도가 새겨져 있고, 외부의 사면 벽에는 청룡, 주작, 현무, 백호 등 사신도를 활달한 필치와 정교한 기법으로 생동감 있게 새겨놓았다. 돌관 내부의 넓은 벽면에는 총 6편의 화조도가 각 3개씩 그려져 있고, 좁은 두 면에는 수반화가 새겨져 있다.

 

외부 벽면의 사신도는 무덤 주인의 수호신이며 우주의 방위신(方位神)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고, 돌관 덮개의 비천도는 아마도 사자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의미를 가진 것일 것이다. 결국 돌관의 외부 그림은 사자(死者)에 대한 장례의식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것이고, 내부 벽면의 화조도(花鳥圖)와 수반화(水盤花)는 고구려 벽화의 생활풍속도와 같이 사자(死者)의 생전(生前)의 생활을 보여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의 기능이 돌관 내외부의 그림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앞에서 본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수반화 문양과 마찬가지로 고려인들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 - 망자(亡子)의 길에 반려로 동행해 보낼 만한 이승의 기억, 혹은 저 세상에서도 누리고 싶은 이승의 것들 - 이 화조(花鳥)의 감상이요, 수반 꽃꽂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청자에 나타난 그림이나 문양도 고려인들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고, , 현실에서 가장 사랑하는 정경이자 사물이었던 것이다.


 

   


<4-2.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내부 모란 작약 수반화도>


 

돌관 내부의 좁은 쪽 양면에 새겨진 수반화이다. 개성박물관의 자료가 시기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수반과 꽃꽂이의 번화 번성함의 정도로 미루어 태조왕건 때나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12~13세기)> 때보다 다소 뒤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꽃꽂이의 방식은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수반화처럼 주지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보조지를 두는 삼존 양식이다. 주지는 모란을 보조지는 작약을 심어 주지를 부각하는 동시에 보조지로 변화를 주고 있다. 꽃꽂이의 아름다움의 근본적 특질인 펼쳐가는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고, 그러한 꽃꽂이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는 모란과 작약의 부화번성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수반의 형태는 굽까지는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의 형태와 같으나 몸체는 낮은 화분처럼 훨씬 낮아지면서 넓어져 보다 안정감이 있다. 청자화분에서 본 바와 같이 횡돌대와 종돌대로 화면을 구획하고 그 안에 화문(花紋)을 그려넣어 모란과 작약에 못지 않는 화기(花器)로서의 아름다움을 살려내고 있다.


돌관에까지 새겨넣을 만큼 꽃꽂이를 즐기고 애호했다면 최소한 몇가지 더 다양한 화기(花器)와 분기(盆器)가 출토되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왜 부장품(副葬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고려인들의 부장품에 대한 관념과 부장품(副葬品)의 유형, 종류, 크기 등에 대한 관습 등에 대한 조사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혹시 화분이나 수반이었을 터인데 연구조사자들이 그 용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청자 기물이나 백자기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고려인들은 꽃꽂이에 이런 심미안을 가지고 심취한 이들이었기에 더욱 다앙한 화기(花器)나 분기(盆器)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용도가 분명하지 않거나 예외적 기물(器物)은 화훼나 원예생활의 견지에서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4-3. 록펠러 3세의 한국문화재 컬렉션>


 

한국의 박물관 설명에서는 위 사진의 아래 받침으로 사용된 형태의 기물은 그 자체 단독기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여 화형접시라 불러왔다. 그러나 이 록펠러 3세의 컬렉션을 보면 2개가 한 조가 되는 기물로 아래 것은 받침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위의 것 또한 단순히 그릇()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릇이라면 무슨 용도의 그릇이었을까. 그리고 두 개 한 조로 이루어진 이 기물들은 어디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4-4. 고려 화형명 경북대박물관>


 

이 또한 화형명이라 불리고 있는데 단순한 그릇이었을지, 그릇이었다며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고려인들의 식기의 종류와 형태 용도는 어떠했을지, 위 기물의 경우  다른 용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고려 시대의 그림은 거의 전하지 않는 탓에 그것을 감상할 기회가 거의 없기에,  고려인들의 그림에 대해 편린이나마 감상하고 추측해 볼 수 있도록 이 돌관에 새겨진 그림을 참고로 함께 제시한다.

 

 

< 4-5.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내부 화조문>

 

 

 

< 4-6.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덮개의 그림>>

 


 

< 4-7.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덮개의 그림 부분 확대도>



 

<참조 :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돌관 설명>


이 돌관은 사람이 죽었을 때 화장하여 뼈를 담았던 것이다. 돌관은 점판암으로 만들었으며 그 크기는 길이 89.5cm, 너비 53cm, 높이 38.5cm이고 돌의 두께는 5cm이다. 돌관은 뚜껑돌과 밑돌, 옆의 네 면을 둘러막은 세움돌(4) 등 모두 6개 부분돌들은 각각 하나의 통돌로 되어 있으며 뚜껑돌과 밑돌은 몸체를 이루는 4개의 세움돌보다 약간 크게 만들었다. 돌관 몸체 부분의 조립형식을 보면 4개의 세움돌의 호상 접촉면에 약간의 홈을 파주어 조립하게 만들었다.
 
이 돌관에서 장식무늬조각이 잘 되었다. 돌관은 점관암의 겉면을 반들반들하게 연마한 다음 여기에 다양한 주제의 조각장식을 적용하였다. 뚜껑돌의 가운데 부분에는 평면보다 약간 도드라지게 직경
41cm
정도의 둥그런 구획을 설정하고 뭉게구름 사이로 두 선녀가 머리를 마주 대고 날개옷을 휘날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양을 선새김하였으며 그 옆 4면에는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겨놓았다.
세움돌의 바깥면에는 청룡, 주작, 현무, 백호 등 사신도를 활달한 필치와 정교로운 기법으로 생동하게 새겨놓았다. 그리고 돌관 안쪽면의 넓은 양쪽면에 6(한쪽면에 3개씩)의 꽃나무와 새가 액틀모양의 개별적인 구획을 차지하게 새겨져 있다. 돌관 안쪽면의 좁은 양쪽면에는 아름다운 꽃병에 갖가지 꽃들이 꽂혀 있는 꽃바구니가 새겨져 있다. 바닥돌에는 사선을 서로 엇바꾸어 그어놓았고 별다른 조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