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1) 수월관음

2016. 4. 25. 18:21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1.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1) 수월관음 | 분재사고려시대

심천(心泉) 2011.02.24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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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 복원

 

조사 수집한 고려시대의 화분과 고화기(古花器)들을 바탕으로 고려 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의 복원을 시도해 본다. 고려 시대 분재 및 원예 생활의 복원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시각(視覺) 자료인데, 고려의 서화가 원래 전하는 유물이 드물 뿐만 아니라, 분재와 관련한 시각자료는 더욱 드물어서, 미흡하나마 몇 가지 불화(佛畵)와 벽화(壁畵), 고려시대 기물(器物)과 돌관 내부의 벽화 그리고 자수분경사계도를 바탕으로 복원해야 한다.  

이것들만으로는 복원이라 할 만한 정도의 복원이 어렵지만 당시 중국의 분재 관련 서화를 참조하면 어느 정도 최소한의 윤곽은 복원해 볼 수 있다. 청자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송나라와는 긴밀한 문화적 수수관계가 있었고-고려 시대 정홍진의 묵죽화는 북송의 묵죽화 대가인 문동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할 만큼 송의 문물을 익히 알고 있었다.-, 원나라와는 정치적 복속관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긴밀한 무역 관계에 있었기에- 1323(고려 충숙왕대)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원나라 무역선의 경우에서 보듯이-분재와 관련한 중국측 서화는 고려시대 분재의 복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보다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문헌자료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인데, 우선 시각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먼저 복원하고 이를 차차 문헌 자료로 보완해 가기로 한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생활의 특징은 <꽃꽂이에 대한 심취>, <이수종(異樹種) 합식(合植) 및 다양한 화기(花器)에 심은 이수종의 혼합 진열 감상>, <규방 여인의 분재> 등이다. 이 이상의 특질들이 앞으로의 조사 연구로 밝혀지기 바란다.

 

 

1. 꽃꽂이에 대한 심취(心醉)

각종 자료를 통해 보면 고려인들은 <꽃꽂이>를 무척 사랑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꽃꽂이에 손색이 없는 수준에 일찌감치 도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종다양한 꽃들을 화사하게 펼쳐내는 꽃꽂이의 특질 자체가 <이수종 합식>이나 <혼합 진열 감상>을 선호하는 고려인들의 미의식에 맞아 떨어졌고, 불전에 공양화(供養花)를 바치는 불교의 관습이 고려인들의 깊은 불심(佛心)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꽃꽂이는 더욱더 선호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인들이 심취했던 <꽃꽂이>를 불화(佛畵)와 벽화(壁畵), 금동항아리, 돌관, 옥제가화 순으로 살펴 본다.

 

1)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란 제목은 하늘의 달이 모든 물에 비추이듯이 부처님(관음보살)의 자비는 모든 중생들에 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려인들은 <수월관음도>란 동일한 제목 하에 유사한 내용의 많은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종교적 신앙을 표출하기 위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서화는 현재 극히 소수가 전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무덤의 벽화 몇 점과 불화가 있을 뿐이다. 그 예술적 가치로 하여 세계적으로 정평이 있는 고려의 불화(佛畵) 160 점 정도인데, 그 중의 백미(白眉)현재 세계적으로 39점이 남아있는 월관음도이다. 학계에 보고된 불화 160 여종 중, 일본에 130여 점, 한국에 10여 점, 미국과 유럽에 20여 점이 있다. 고려의 유물이 본국인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이 전하는 것은 고려말 왜구들의 약탈에 기인한 것이다. 일제하 특히 1910년 전후하여 반출된 것도 상당수일 것이다.

 

고려인들의 꽃 및 꽃꽂이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미의식은 고려말의 수월관음도에서도 나타난다. 수월관음도에서 우리는 수반에 담긴 형태의 꽃꽂이를 통해 당시 꽃꽂이에 관련한 미의식을 유추해 볼 수 있고, 정병(淨甁)에 꽂힌 버드나무를 통해 당대인들의 불교 신앙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정병의 형태상 특질을 이해할 수 있다.

수월관음도들은 양식상 큰 점에서 비슷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가지기 때문에 조사 연구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만을 골라, 전체 그림과 아울러 해당 작품의 부분도를 제시한다.

 

1-1) 수월관음도 비단에 색, 142.0 × 61.5 cm 고려 후기. 승려 혜허작 일본 센소지(천초사(淺草寺)  소장

 

 

 

이 그림의 왼쪽 아래 부분에 꽃다발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를 확대하면 다음과 같다.

 

 

  

 

사실적으로 연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여러 장의 연잎을 모아 만든 수반 형태에 모란 등 연꽃 외의 다양한 꽃들을 모아 꽃다발을 펼쳐내고 있으니 이는 필시 꽃꽂이의 형상이다. 일경일화 형태로 한 줄기에 한 송이의 연꽃만을 그린 경우가 더 많지만 수월관음도에는 대부분 이와 같이 수반 형태의 꽃다발이 나타나고 있다.

수월관음도는 종교적 상상이 주제여서 이 부분의 일차적 의도는 관음보살의 현신(現身)에 그 신성과 존엄을 찬양하는 의미로 각종 꽃들이 물밑에서 솟아오르느 것으로 종교적 상상을 그린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상상은 당시 화가의 현실생활에서의 경험-수반을 이용한 꽃꽂이와 공양화의 경험-이 암암리에 반영되고 있다. 사실상 위의 꽃다발은 화공이 수반 위의 꽃꽂이를 의식하며 그린 것이다. 따라서 그 아래 나무등걸 같이 생긴 것은 수반의 하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꽃잎의 세부를 묘사하고 있는 필치가 놀랍다. 꽃잎의 묘사가 이와 같이 사실적으로 세밀한 것을 보면 좌측에 그려진 선재동자의 모습도 당대 고려인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종 이상의 꽃을 섞어 그리고 있는데 꽃꽂이가 여러 꽃을 섞어 구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고려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꽃꽂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1-2) 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일본 단잔진사(談山神社)


 

 

역시 이 그림의 왼쪽 아래에도 꽃 그림이 있다. 이를 확대해 본다.

 

 

 

 

확대한 부분도의 중앙에 두 개의 꽃 그림이 나타나는데 왼쪽은 한 개의 연꽃 봉오리를 그린 것이나 오른쪽 그림의 경우 솟아오른 줄기 판 위에 수반인 듯한 화기(火器)가 보이고 그 위에서 여러 송이의 꽃봉오리들이 펼쳐져 있다. 이렇게 되면 수면에서 솟아 바깥으로 구부러진 줄기 형상의 것들은 여기서는 수반(水盤)이 놓이는 화대(花臺)격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도 무엇인가에 올려놓고 보는, 올려놓고 바치는, 곧 정성을 들여 아름다운 일습의 형태를 갖추어 바라보는 고려인들의 심미안이 숨어 있다.

수월관음도의 연꽃이나 꽃들을 관음불의 도력(道力)으로 수면에 피어 오른 꽃이라 보든지, 아니면 좌측 인물인 선재동자가 바치는 공양화로 보든지 간에 - 많은 경우 연꽃은 연화화생(蓮花化生)의 뜻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는 고려 시대에 성행했던 당대의 <꽃꽂이 미의식>이 은연 중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 서구방필 수월관음도 1323 165.5cm x 101.5cm 일본 스미토모가 소장

다음의 그림은 위에서 행한 분석이 타당한 것임을 결정적으로 증거한다.

 

  

 

수월관음도는 거의 대부분 선재동자가 진리를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기나긴 여행을 하다가 보타락가 산에 계시는 관음보살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거의 유사한 내용과 양식을 갖는다. 보타락가산은 중국 영파부의 바닷가에 솟아 있는 산으로 부처님이 현신한 몇 군데 산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산은 온갖 보배로 꾸며졌고 매우 청정하여 많은 성현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전해진다. 물가에는 기암 괴석과 보물들이 있고,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인자한 모습의 보살이 속이 훤히 비치는 엷은 비단으로 된 천의(天衣)에 감싸여 반가(半跏)한 자세로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기암괴석과 청죽(靑竹)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버들잎이 꽂혀 있는 정병이 놓여 있다.

 

먼저 이 그림에서 <수반 꽃꽂이> 이외에 고려 원예와 관련된 사실을 살펴본다.

1) 고려인들이 기암괴석과 청죽(靑竹)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인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부처(여기서는 관음불)를 높이고, 공양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임괴석과 대나무에 대한 선호는 조선조로 계승된다.

- 여기에 나타난 기암괴석은 고려시대 <자수분경사계도>에 그려진 석부 분재의 존재 이유와 당대의 선호를 설명해 준다.

2) 꽃꽂이로 대표되는 화사한(혹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과 기암괴석과 대나무(사군자)로 나타나는 정신적인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미의식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3) 정병에 꽂은 버드나무는 종교적 신앙이 표출되는 꽂꽂이 형식이었다.

이 그림의 좌측 중간에서 정병과 버드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병과 버드나무의 모습은 거의 모든 수월관음도에서 나타나지만 그림의 화면이 어둡거나 사진의 해상도가 떨어져서 자세히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은 그 모습을 뚜렷이 보여준다.

다음은 그 확대도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를 가진 정병의 용도가 무엇이고 왜 그 많은 정병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정병이 대접 위에 놓여 있다. 정병이 나타나는 수월관음도에서 대개는 정병만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에서는 정병을 대접 위에 올려 넣은 채로 그리고 있다. 화병이나 화분에서 하부의 장식성이나 화대(花臺)를 중시하는 고려인들의 미의식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의식이 조선조 후기의 기명절지도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버드나무는 부처의 자비라는 불교적 의미를 가지는 한편 청자의 포류수금문에서 한가로운 정취를 나타나는 소재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고려인들이 사랑했던 수종이다.



<참고>

정병(淨甁)은 부처에 대한 차 공양을 위해 찻물을 담아 보관하거나 이동하는 데 쓰거나,  의식(儀式) 장소를 청정한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물을 뿌릴 때 사용하는 물병이다.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 등으로 불리는데 향로와 더불어 중요한 공양구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범천, 천수관음보살, 수월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지물(持物) 혹은 도상(圖像)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입수구와 출수구가 분리되어 있는 이 병의 기원은 인도 등의 남방에 있으며 처음의 제작 목적은 더운 낮에도 물을 시원한 상태로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관음불의 그림에 버드나무(楊柳)를 그리는 것은, 그래서 이 그림을 양류관음도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인도 바이샬리 지방에서 역병이 유행할 때 관음불이 나타나 버드나무 가지와 정수(淨水)를 손에 들고, 병마를 없애는 주문을 외워 구제했다는 내용의 <청관음경(請觀音經)>에 근거한다.

4) 당시 고려인들도 대나무를 선호했다.

그림 오른쪽의 기암괴석의 좌측에 있는 두 줄기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수월관음도에 괴석이 그려지고 그 괴석에 더하여 대나무가 그려지는데 고려는 왕건릉의 벽화에도 소나무 매화 대나무가 나타날 정도로 이미 사군자를 선호하고 있었고 사군자가 정착되어가는 시기였다.

 

 

 

위 그림은 서구방이 그린 위의 수월관음도 왼쪽 하부를 확대한 부분도이다.

2-2 그림이 수반의 꽃꽂이라는 설명이 억지가 아님이 여기에서 확인된다. 좌측 그림은 분명히 서로 다른 각종의 꽃과 잎으로 반구형 꽃다발을 이루고 있어 꽃꽂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래서 그것을 받치고 있는 부분은 수반으로 보아야 것이다. 단지 수면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표현하기 위해 상상적 변용이 가해진 것이다. 최소한 화공은 당대의 수반 꽃꽂이를 의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렸을 것이다. 수덕사 수반화의 수반과 달리 수반의 상부가 수렴형이 아니라 발산형인데 수반은 단지 그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추단의 근거는 <3. 금동모란수반화문소호>에서 언급한다. 당시 청자도예의 수준과 미의식으로는 충분히 제작 가능한 형태였을 것이다.

 

이 부분 확대도를 통해 우리가 추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5) 고려시대는 종교적 예배 대상을 그리는 불화(佛畵), 수반꽃꽂이를 변용해서 그려넣을 만큼 수반 꽃꽂이는 성행하였고 또 그것을 매우 사랑하고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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