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분재 및 원예생활의 복원1. 꽃꽂이에 대한 심취 6) 해인사 꽃바구니 벽화와 옥제(玉製) 가화(假花)

2016. 4. 25. 19:29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고려시대 분재 및 원예생활의 복원 1. 꽃꽂이에 대한 심취 6) 해인사 꽃바 | 분재사고려시대

심천(心泉) 2011.03.25 23:18

      

고려 시대 분재 및 원예생활의 복원

 

6) 해인사 꽃바구니 벽화와 옥제(玉製) 가화(假花)

 

신라 제40애장왕 3(802)에 창건된 해인사에는 꽃꽂이와 관련한 두 자료가 있다. 그 하나가 <바구니를 활용한 꽃꽂이(籃花) 벽화>, 또 하나는 <옥제가화(玉製假花)>이다. 신라시대 창건 시에는 주 건물이 비로전(毘盧殿)이라는 2층 건물이었으나, 조선 1488(성종 19) 인수대비, 인혜대비의 지원으로 학조(學祖)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런 사실로 하여 위 두 꽃꽂이 벽화 자료가 고려시대로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필자는 좀더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꽃꽂이를 다룬 대부분의 자료가 이를 고려시대의 것으로 간주하여 서술하고 있어 이 자리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그러나 <꽃바구니 벽화>의 제작 시기는 구체적 근거에 바탕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6-1) 해인사 꽃바구니 벽화

꽃바구니 벽화는 한자로 대바구니 ()자를 써서 남화(籃花)라 하고 대적광전의 꽃바구니 벽화를 남화(籃花) 벽화(壁畵)로 지칭하기도 한다.

 

 

  

<6-1. 해인사 꽃바구니(남화) 벽화>

 


앞 절에서 위 <금산 보리암> <여수 향일암>의 바구니 꽃공양과 화분 꽃공양을 언급하면서, 고려시대의 바구니 꽃공양화분 꽃공양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벽화의 제작 시기를 고려로 확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바구니까지를 화기로 사용한 고려시대의 다양한 방식의 꽃꽂이를 상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최소한 조선시대 15c초에는 바구니 꽃공양의 존재를 확정할 수 있다.

 

화분에 의한 꽃공양은 역사적으로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화병보다 먼저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어 - 꽃꽂이에 대한 미의식이 예민했던 고려인에게 수반에 의한 꽃꽂이보다는 덜 선호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 고려시대에도 화분에 의한 꽃 공양 또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많다. 화분에 의한 꽃공양은 고려 시대의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되어야 할 것인바 역사학자와 한문학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위 꽃꽂이는 고려 시대의 꽃꽂이에 비하면 상당히 담백한 느낌을 준다. 역시 모란이 주 소재가 되고 있지만 많은 꽃을 번화하게 펼쳐내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충분히 부여하여 개개의 꽃송이가 지닌 아름다움을 충분히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말쑥하고 깨끗하면서도 작수자 내면의 기품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은 대바구니가 가진 소탈, 담백함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시대를 달리한 조선조의 미의식의 반영인지, 아니면 고려인들이 지닌 또다른 미의식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데 그 관건은 1차적으로 이 벽화의 제작 시기에 달려 있다. 문헌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다면 조선조 꽃꽂이의 양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바구니 꽃꽂이 벽화의 특이한 점은 당대의 꽃꽂이 취미 외에도 당시의 수석 감상 취미를 보여준다는 사실에 있는데 이 수석 감상 방식 및 수석을 담고 있는 분재분의 형태에 대한 시대적 고찰도 위 벽화의 시대를 확정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 벽화를 통해 당시 수석 감상 방식의 특징을 살펴본다.

꽃바구니 공양이 주된 것이어서 수석은 그 크기를 작은 것으로 선택한 것일 터이고, 수석은 아래 부분의 두께가 상당히 두터워서 화분 바닥에 내려놓은 채 화분에 기댄 모습으로 감상하고 있다..

 

수석까지 불전에 바치는 공양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수석 감상이 당시에 일반화되어 있었다

② 나무를 곁들인 석부가 아닌 수석만을 감상하는 방식이 존재했다.

③ 수석 감상용 화분은 다른 화분보다 높이가 낮긴 하지만 오늘날의 얕은 평분이나 수반보다 높아서 수석 높이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불전 공양용 벽화의 소재로 그려진 것이라면 당대의 수석으로는 상당한 수준을 가진 것일 터인데) 돌을 부각하기 위한 별 다른 기교 없이 단순히 화분에 수석을 담아 보는 담백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수석의 부각을 위한 특별한 좌대가 없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당대의 수석 감상은 별 장식적 기교 없이 수석 그대로를 감상하는 방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한편 화분을 수석과 아울러 감상하는 방식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리하게 한다. 위 꽃바구니 벽화의 제작 시기 확정은 이런 수석 감상 방식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분재 취미와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특히 수석 취미인들의 조사 연구를 기대해 본다.

 

수석의 감상을 위해 사용된 위 화분은 팔각문양분인데 조선의 실제 분재분과 그림 속의 분재분을  살펴가노라면 이 분재분의 시대를 확정지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통해 이 꽃바구니 벽화의 시대를 확정할 가능성도 기대해 볼 수 있다.

 

 

6-2) 옥제(玉製) 가화(假花)

- 삼채자기(三彩瓷器) 화반(花盤)과 옥화(玉花)-높이 36cm, 조선시대

(해인사 성보박물관 유물검색 화면에 의하면 이 옥제가화고려 명종 15(1184)에 제작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같은 성보박물관의 전자도록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 명종 15년에 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명종 15년이면 1559년으로 375년의 차이가 있는데 둘 중 하나는 착오일 것이다. 기존의 연구논문들은 고려 명종조 제작으로 보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전자도록이 착오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6-2. 해인사 옥제(玉製) 가화(假花)>>

 

부처님께 꽃 공양을 한 장엄물(莊嚴物)이다. 삼채자기 화반에 옥으로 만든 꽃으로 구성되어 있다. 꽃은 꽃잎과 꽃술이 아주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삼채자기로 보아 청대의 유물로 생각되어지나, 『해인사지』에는 조선 명종(明宗) 15에 옥을 갈아서 가화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명대사의 유품이라는 설도 있다.

(이상 해인사 성보박물관의 설명)

 

   해인사 옥제가화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고려 1184 (명종 15)의 기록 그리고 조선조에 가화(假花)가 전래된 방식과 고려 및 조선의 옥공예(玉工藝)에 대해 조사 연구해야 어느 시기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나, 필자는 해인사지의 기록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 옥제가화는 고려시기의 작품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12세기말이면 고려청자의 전성기였으니 다른 공예 수준도 더불어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이고, 불심이 깊고 꽃꽂이에 심취한 고려인들이 꽃을 바칠 수 없는 시기에 대비하여 옥돌을 깎아 불전에 공양물로 바쳤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수반이 삼채자기여서 청대의 유물로 보아 조선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으나, 이는 이 부분 관련 해인사지 기록만을 오류 -그것도 수 백년의 시차(時差)를 범하고 있는 오류 - 로 보는 불합리하고 무리한 판단이다.

 

필자는 애초에는 수반도 청자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것이었을 것이나, 조선조 말 어느 무렵 관리상의 부주의로 수반을 깨뜨리는 불상사(혹은 불법적 유출 가능성)가 있었고 이로 인해 수반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하는 사태가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대체해야 한다면 수반이 파괴된 그 당시에 유통되던 수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리상의 소홀로 인한 꽃꽂이 수반 파손과 파손 수반 대체 문제는 해인사지의 기록 대상이 될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혹은 그 기록을 피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다음과 같은 감상 관찰에 근거한 것이다. <옥제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섬세한 세공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옥제가화에 견주어 수반의 형태나 문양, 색상이 그 수준에 있어 <옥제가화>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고려의 화분이나 꽃꽂이 수반은 화목(花木)에서 화분이나 수반 그리고 화대까지 일습을 갖추어 공앙하거나 감상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현재의 옥제가화는 화대도 없고 그 진열도 화대를 대신하는 관경변상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불교적 양식의 기대(器臺)도 없이 진열되고 있다. 셋째 상부의 옥으로 만든 꽃은 세부에 있어서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공교롭게 만들어졌으나 수반은 비사실적인 양식화한 소박한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어 전혀 호응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 넷째 옥제가화가 국내 작품이라면 이는 조선조의 도자문화적 특성보다 고려조 도자문화적 특성 및 미의식에 부합하는 섬세한 세부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화목(花木)이 잎은 모란에 가깝고 꽃은 작약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두 수종 모두 고려인들이 선호하던 화목이다(모란꽃에는 노란색도 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추론한 결과 현재의 수반은 과거의 본래 수반을 대체한 것으로, 이를 대체해야 할 만한 불상사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게 된 것이다. 수반을 깨뜨린 시기가 청나라의 삼채자기가 유통되는 조선조 말이었을 터이니, 당연히 옥제가화 본래의 청자수반 만한 기물은 구할 수가 없었고, 옥제가화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다채로운 색감에  호응하는 수반을 찾다 보니 청나라에서 들어온 삼채자기를 구했을 것이나, 옥제가화와는 상당한 수준 차이가 있고 또 옥제가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미의식과 양식적 경향과는 커다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수반을 깨뜨리고 다시 구입한 시기는 아마도 조서 도자가 그 자리를 메울 수 없을 만큼 우리의 도자공예가 이미 완연히 기울어진 때였을 것이다.)

 

이로써 유독 해인사지의 다른 기록은 모두 인정하면서 유독 옥제가화 제작 시기에 관한 기록만을 오류로 간주하는 편의상의 잘못을 벗어나는 한편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채색자기를 쓰지 않았다는 도자사(陶磁史)의 사실에도 부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일반적 견지에서 볼 때도, 일단 불교의 배척을 국시로 한 조선시대보다는, 고려인들의 지극한 불심이 고려인들의 꽃꽂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높은 공예 수준을 통해 이와 같은 옥제(玉製) 공양화를 낳은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높을 것이다.

 

불전(佛前) 바치는 공양화이든 연회에 쓰는 꽃꽂이이든 꽃은 언제나 지속적으로 필요했지만, 꽃이 계절에 따라 늘상 있을 수도 없고 지고 마는 데서 사람들은 불편을 느꼈을 것이다. 불편을 해소할 필요에서 궁궐에서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가화(假花) 만들어 쓰게 된다. 그러므로 가화(假花) 가화를 만드는 소재의 생산이 가능해진 시기부터 이미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매우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는 궁중에 꽃을 꽂거나 관리하는 관직으로 ‘압화사, 권화사, 인화담원, 설화주사, 화주궁관 등’을 두었고, 궁중 연회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의 책봉식과 같은 모든 궁중 의식에서 꽃을 장식하는 것이 하나의 절차로 집행되었다.   시기의 꽃은 화병이나 수반 등에 꽂는 외에 머리나 등에 다양한 장신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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