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7. 01:37ㆍ美學 이야기
조희룡/ 畵我一體
바람난 공자 2011.08.02 22:07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은 조선시대 후기의 詩, 書, 畵에 뛰어난 삼절 작가이다. 그는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다. 그는 후배 화가들을 이끌고 문인화의 중심인물이자, 중국 남종화의 이념미를 배제하고,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추사와는 전혀 다른 조선 문인화의 독창적 예술 세계를 열었다.
우봉의 유배
조선 헌종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는 번갈아 가면서 세도정치를 열었다. 그러다가 헌종의 사후에 안동 김씨는 강화도령으로 불리었던 이원범을 데려다가 왕위에 앉히면서, 풍양 조씨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종의 증조였던 진종眞宗의 위패를 어디에 봉안할 것인가는 문제로 풍양 조씨의 핵심 인물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풍양 조씨의 패배로 권돈인은 물론, 그와 친분이 있던 김정희, 오규일吳圭一까지 유배를 당한다. 이때 조희룡은 추사와 같은 계열로 알려져 1851년 63세의 나이에 신안군의 임자도로 유배길에 오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조희룡은 예송禮頌 논쟁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임자도에서 유배생활
임자도에 유배된 조희룡은 유배에 대한 울분을 삭히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의 여유를 찾으면서, 같은 섬에 유배와 있던 회령부사 김태金台와 친분을 쌓았으며, 임자도 청년에게 서화를 가르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조희룡은 자신이 유배생활을 하였던 임자도의 바닷가 움막집에 '만구음관萬鷗唫館' 즉,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집'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그리면서 '황산냉운도', '방운림산수도', '괴석도' 등 임자도의 풍광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완성한다. 임자도는 조희룡이 자신만의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 세계를 집대성한 아주 중요한 곳이다.
화아일체畵我一體
우봉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신념은 '불긍거후不肯車後'이다. 이 말은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으나, 모든 이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우봉은 화론畵論에서 이념보다는 기량을 중시하였으며, 그림 그리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을 중시하여, 추사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하였다.
문인화가 비록 자연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記(책의 기운)만으로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문인화를 양반들의 전유물이나 여가로 하는 장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예술의 장르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생각의 그의 저서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서 말하기를,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손재주이다. 재주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종신토록 배워도 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수예론手藝論과 유희론遊戱論을 강조하였다.
우봉에게 임자도의 유배생활은 고통을 승화시키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시간이었다. 우봉은 유배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의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유배 생활에 적응을 하게 된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 모습을 보면서 인정을 느끼고, 그들이 하는 고기잡이 일이 사대부들이 하는 글공부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섬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우봉은 그림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임자도'라는 그림 속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자신이 즐겨 그렸던 황량한 산과 고목, 만구음관이 모두 한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봉은 스스로 그림 속의 한 사물이 되었고, 그림 속의 존재가 또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니 그림 속의 그림, 즉 화아일체畵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는 느낌을 체험한다. 그가 임자도에서 완성한 괴석도는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괴석 특유의 기이한 격이 드러낫고, 거침없이 격렬하며, 화려한 매화도는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면 우봉이 경험한 화아일체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생각 끝에 얻은 화아일체의 경지란, '사람들은 실제의 돌을 사랑하지만 나는 그림 속의 돌을 사랑한다. 실제의 돌은 외부에 존재하고 그림 속의 돌은 내면에 존재한다. 그런즉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 것이 되고, 내면에 존재하는 참된 것이 된다.'
5. 대표작
조희룡의 모든 시서화의 핵심은 즐거움의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시를 감상함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글을 읽음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즐거움의 추구는 조희룡에 있어서 화두에 해당 된다 할 것이다.
1)홍매도 대련
두 폭으로 마주보게 그린 역작이다. 이 그림은 수천 수만 송이의 홍매화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화려한 매화줄기, 그림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질적 규모감을 갖고 있다. 이 대련은 매화꽃이 그림의 주제인가 줄기가 주인인가에 대해 헷갈린다. 눈을 떼어 멀리서 보면 줄기가 살아 꿈틀거리고 가까이 다가서 보면 붉은 꽃송이들이 천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희룡은 매화그림의 변천과 자신의 위치에 대해 '모두들 단촐하게 몇 송이의 매화만을 그렸으나 '황회계'라는 화가가 수천수만송이가 핀 매화그림으로 발전시켰다. 나의 매화도는 이 범주에 속하고 정확히는 동이수와 나양봉이라는 두 호가 사이에 위치한다.'라는 말로 정리하였다.
조희룡은 매화줄기를 격렬히 요동치는 용의 형성에서 따왔고 꽃은 매소이 마다 소우주인 부처님의 마음을 담아 형상화하였다. 우주로 비상하는 용의 역동성과 모든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천수관음과 같은 부처의 자애로운 마음을 형상화함으로써 철처럼 강한 육신과 500년이 넘는 壽가 세상의 수고로운 이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랐다.
홍매도 대련은 조희룡의 자부심이다. 과거 어느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것으로서 새로움이 창조이다. 홍매도 대련이 주는 닿지 못한 것으로서 새로움의 창조이다. 홍매도 대련이 주는 당혹감과 이질감의 실체는 기존의 것을 모두 수렴하고 자기의 것을 창조해낸 조희룡의 예술세계가 던져주는 새로움으로부터 온 자극이다.
2)유배지 그림
조희룡의 '거친산 찬구름荒山冷雲圖'과 뭉크의 '절규'는 조희룡 자신의 적거지 만구음관에 대한 그림을 두 점 남기고 있다. 유배 초기에 '거친산, 찬구름 그림'(124cmX26cm, 개인소장)을 그렸다. 그는 이 그림에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다. 눈에 보이는 것이란 거친산, 고목,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화가의 육법이라는 것이 어찌 우리를 위해 생긴 것이랴" 하고 써두었다. 화법에 매임없이 마음껏 휘둘렀다는 뜻이다. 임자도 유배기간 중에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조희룡이 갖고 있던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림 전체가 공포에 휩싸여 있다. 피할 수 없는 무서움이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다. 위안이라면 조희룡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집뿐이다.
조희룡의 '거친산 찬구름 그림'을 보는 느낌은 서양화가 뭉크의 '절규'(1893)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흡사하다. 이 작품에 대해 뭉크는 "어느날 해질녘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족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다리 아래로는 강줄기가 돌아나가고 있었다...... 구름이 핏빛으로 물들어 올랐다. 그때 나는 하나의 절규가 자연을 꿰뚫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나는 절규를 들었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두 화가의 공통적 정서가 그림에서 묻어나온다.
3)물가 구름집 겨울(淄雲館冬日-치운관동일)
마음의 평온을 찾은 유배 후기에는 "물가 구름집 겨울'(淄雲館 冬日, 22.0X27.6cm)을 그렸다. 방운림산수도(彷雲林 山水圖)라고도 한다. '운림 예찬'이라는 사람의 산수화 기법을 모방하여 그렸다는 뜻이다. 피마준과 미점을 사용하여 표현된 산과 낮은 언덕, 간단하게 처리된 가옥의 모습은 전형적인 남종화 풍을 보여주고 있다. 간결한 필치로 쓸슬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다. 앞에 두 그루의 큰 나무를 세워 근경을 이루고 있으며 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있다.
하천하나에 양쪽 언덕구도에 나무와 초옥을 배치하였다. 근경의 나무와 촐옥, 중견의 강, 원경의 나지막한 산으로 특징 지어진다. 이러한 산수도는 중국에서 원말에 예찬에 의하여 그 전통이 확립된 아래 청나라 시대에는 문인을 중심으로 하여 그려졌다. 조희룡의 이 그림은 중간의 강이 생략되어 원경의 산과 근경의 나무와 초옥이 겹치게 그려져 있다. 또 이 당시의 예찬식 산수도에는 초옥뒤에 대나무가 의도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 특이하다.
황산냉운도의 위기감과는 달리 이 그림에서는 평화감이 풍겨나온다. 이러한 마음의 안정은 그가 유배 2년째부터 얻은 것으로 보아 1852년 겨울에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치운관 겨울'은 현재 임자면 이흑암리에서 확인된 만구음관의 위치와 가옥구조, 나무형태, 주위 경치, 지형이 놀랄만큼 닮아 있다. 나무 두 그루는 팽나무이며 지금은 늙어 없어지고 말았다. 진경산수화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4)천하의 노동하는 사람을 위하여(慰天下之勞人)'과 추사의 '난을 그리지 않았다(不作蘭圖)'
조희룡과 추사 김정희는 경쟁 대립관계의 있었다. 두 사람이 나이 차이는 세 살 터울로 추사가 형뻘이다.
조희룡의 그림과 추사의 그림은 지향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청나라의 시서화 일치라는 화법을 도입한 점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예원의 세계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공통점은 거기까지였다.
중앙무대에서 호라동하던 조희룡은 창조를 강조하였고 유배중이던 추사는 극기를 강조하여하였다. 조희룡은 봄날의 연분홍 매화를 그렸고 추사는 겨울을 이겨내는 솔의 푸름을 그렸다.
추사는 10여년의 귀양생활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는 '시련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보게 되었고 그의 예술 작품에 이를 형상화하였다. 제주도에서 의제 겨울 속 추위에 떨고 있으며 세한도를 그리고 있던 추사의 눈에 조희룡 일파의 작품들은 온실 속에서 자라는 장다리꽃으로 보였다. 제주 유배시절 추사는 그의 아들 김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희룡과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쏘아댔었다. 비밀스러운 겨울비평에 그의 심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치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畵法)이 있다면 그 화법 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과 같은 이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氣)가 없기 때문이다."
조희룡은 이러한 추사란의 외골성과 엄혹성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난은 구김살 없이 성정하는 그윽한 아름다움이었다. 간송미술관 소장 조희룡의 묵란도 화제에 그의 이러한 생각이 과장하게 표현되어있다. '20년 동안이나 난을 치지 못하다가 우연히 그렸다'는 추사 부작란(不作蘭)의 과장법과 조희룡이 마치 반발하듯이 써놓은 '부작란을 조롱하는 과장법'이 멋있게 대조된다. 당대 예원을 주도하던 양웅의 진검승부라 할 수 있다.
"난초가 반이나 피었네. 화분의 보살핌 덕에 물난리라고는 모르네, 말라서 비틀림도 겁내지 않네. 연지물 남았기에 난초 그려 구경하세. 묵보배를 빼내듯이 주보배를 감싸듯이 몇 번이나 병든 잎을 도려냈나. 새줄기 쭉쭉 푸른 비취가 돋아 오르듯 봄의 꽃모습을 그려내지. 추위가 어떻던가는 못 그린다네. 가을 길가 들난초 묶음이야 난초라는 이름 뿐. 다섯 푼 값도 못되고 말고."
추사란을 평가절한 한 것이다. 부작란과 같이 말라비틀어진 가을 들난초의 아름다움은 특수한 아름다움이었지 보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조희룡의 난은 거울을 바투어 흐트러지지 않은 단아한 연인의 보편적 아름다움이었다. 조희룡의 난에는 '분노하는 기운으로는 대를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는 난을 그린다'는 즐거움이 있으며 집착을 깨며 희열을 느끼는 따스한 봄날의 열린 유희가 있는 것이다.
blog.daum.net/dark-n-light/255 소창대명(小窓大明)
기타 자료 : www.homun.or.kr/honam/sboard3/upload/spb3_board3_hpds/1/호남문화연구45.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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