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같이 빼어난 天才화가, 古藍 田琦 / 손영호의 문인화탐방 5

2016. 5. 9. 03:27美學 이야기



       고람(古藍) 전기(田琦), 손영호의 문인화탐방 5| ◐ 이야기방 ◑

월암 | 조회 121 |추천 1 | 2011.08.07. 17:22


(아트앤씨 7월호)

 

봄꽃같이 빼어난 天才화가, 古藍 田琦

 

 

   古藍 田琦는 빼어난 文人畵家이자 書畵鑑識家이며, 書畵거래를 중개하는 요즘의 畵廊 주인이기도 했다. 나이 서른에 夭折했지만 그가 보여준 藝術魂은 봄꽃 같이 찬란하였고, 당시의 수 많은 藝術人들은 그의 才能을 사랑하였다. 그가 남긴 ‘溪山苞茂圖’는 담백한 文人畵의 絶頂을 보여준다.

 

1825년에 태어난 고람(古藍) 전기(田琦)는 서른이라는 이른 나이로 요절(夭折)했지만, 조선후기의 빼어난 문인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중인(中人) 신분의 지식인이었으나 그의 출생지가 어느 곳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고, 학문과 서화를 어떻게 깨쳤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아직까지는 확실한 것이 없다.

 

스무살 무렵부터 생계(生計)의 방편으로 약포(藥鋪)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약포주인은 거의 의원(醫員)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전기는 의학(醫學)에 대한 조예(造詣)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약포 개업은 당시 중인 지식인으로 가깝게 지냈던 주위의 의관(醫官) 친구들이 병든 노모를 모시는 어려운 형편의 전기 내외를 위해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거처하던 집의 당호(堂號)를 이초당(二草堂)이라 했는데, 이곳은 그가 영업하는 약방이자 그의 서화작업실이고, 요즘의 화랑(畵廊) 역할까지 한 곳이다. 전기는 당시 서화감식가로서의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숱한 사람들이 그에게 서화 감식을 부탁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서화의 거래중개와 가격흥정 및 판매까지 관여했다고 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으나 총명했던 전기는 아마도 독학으로 학문과 서화를 연마했을 것이고,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학다식했던 그의 재능은 당시 상류사회의 주도적인 문예그룹을 형성하던 중인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당시 묵장(墨場)의 영수로 알려진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과도 교유하면서 그의 재예(才藝)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조희룡은 36살이나 연하인 전기를 시문과 서화의 벗으로 대했다. 전기는 조희룡이 중심이 되어 중인 지식인들이 시문과 서화로 우정을 나누던 ‘벽오사(碧梧社)’라는 모임의 맹원으로도 참여했다.

 

전기의 그림은 특히 원나라 예찬(倪瓚)의 화풍을 따른 것이 많다. 그러나 당당하고 빠르고 스스럼없는 그의 화풍은 원대(元代) 특유의 화풍인 ‘황한하고 고적함’ 대신, ‘맑고 깨끗한’ 그만의 화풍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기의 창작태도는 충실함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는 인물, 산수, 화조 등 화목(畵目)도 다양하고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작품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는 화려한 그림이다. 순백의 화려함 속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초옥의 선비를 찾아가고 있는 광경이다. 그림 오른쪽의 ‘역매인형초옥적중(亦梅仁兄草屋笛中)’이란 글귀에서 역관(譯官)이자 서화애호가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을 찾아가는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온 다음해인 1849년, 당시 중인(中人) 서화계의 인재들이 그림과 글씨로 추사의 품평(品評)을 받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전기는 ‘추강심처도(秋江深處圖)라는 그림을 내었다. 이 그림에 조희룡이 써 준 화제(畵題)를 보면, “고람(古藍)을 알게 된 뒤로는 막대 끌고 산 구경 다시 안 가네. 열 손가락이 봉우리 무더기와 같아 구름 안개 바야흐로 한없이 흐르네”라는 내용이다. 조희룡은 전기의 재능에 한없는 찬사(讚辭)를 보낸 것이다. 또한 전기는 이때 추사의 그림 평(評)들을 모두 받아적어서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화평집(畵評集)인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다.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는 전기 그림의 절정이다. 호(毫)가 닳아서 갈라진 독필(禿筆)로 휘두르듯 빠른 속도로 그린 풍경은 담백한 서정(抒情)을 저절로 일으킨다. 갈필로 거리낌없이 써놓은 그림 왼쪽의 낙관(落款) 글씨 또한 그림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낙관 내용으로 보아 그린 시기가 한참 더운 음력 7월인데,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주는 청량감(淸凉感)을 이 그림에서 느끼게 된다. 또 말미에 ‘독좌(獨坐)’라고 써 놓았다. 혼자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시원하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화에 대한 재능이 널리 알려진 전기는 헌종 임금의 명을 받아 연꽃을 그리기도 하고 궁중시회에 참가하여 수선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1854년, 전기는 서른살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보여준 재능은 주위의 예림지기(藝林知己)들에게 무한한 감명을 주었다. 조희룡의 ‘우해악암고(又海嶽庵稿)’ ‘전고람(田古藍)’편에서 그를 기리는 시(詩) 한수를 소개한다.

 

“젊은 나이에 빼어난 자태, 가슴 속에 벌써 오악이 우뚝하네. 연운공양이 지금 어떠한지, 그대의 그림속 사람이 되고 싶다네.(英妙之年俊逸身 胸中五岳已嶙峋 煙雲供養今何似 願作藍田畵裡人)”



평소에도 조희룡은 전기의 그림 속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뛰어난 전기의 그림과 함께 자신도 영원하고 싶다는 소망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전기의 그림이 영원할 것이라는 극찬이었다.

 

(月庵 孫榮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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