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절과 심역

2016. 5. 17. 11:33들꽃다회



       소강절과 심역(1)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  siminsori@siminsori.com
승인 2016.04.27  23:55:41
  
▲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북송대의 소옹(邵雍, 1011-1077)은 호가 요부(堯夫)인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요임금의 남자’라는 뜻에서 스스로 지은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신화시대를 지나고 인치(人治)의 시작이 요임금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박근혜의 남자’라느니, ‘왕의 남자’라느니 하지 않는가? 아님 요임금의 벗이란 뜻일지도.


   그의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그는 38세부터 낙양의 이천에서 살았다. 장재(張載), 이정(二程 : 程顥, 程頤), 사마광(司馬光) 등과 이웃하고 교류하며 살았다. 그는 거처를 ‘편안히 즐기는 움막’이라는 뜻에서 안락와(安樂窩)라 이름 하였고, 스스로 안락선생이라 하였다. 때에 따라 밭 갈고 씨뿌려 농사를 지어서 겨우 의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으며 45세에 이르러 제자들의 권유로 결혼하였고 47세에 아들 백온(伯溫)을 낳았다. 자치통감을 편찬하고 보한림학사의 지위에 이른 사마광은 소강절보다 8살 아래인데 서로 호형호제하였고, 그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하였다. 봄이면 함께 나들이를 가곤 하였는데, 소옹은 작은 마차를 타고 다녔다. 소옹의 마차가 미처 도착하지 않으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사마광의 소옹에 대한 이런 시가 있다. 「높은 덕을 가진 이 오래 기다려도 오지 않네」라는 시에서 “숲속 높은 집 바라보기 이미 오래, 꽃길 너머 작은 수레 아직도 오지 않네(林端高閣望已久 花外小車猶未來)”라는 시이다.


   소옹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학의 대가이며 수학자였다. 그는 수(數)로써 만사 만물을 밝힌 대학자였으며, 그 학문이 계승되지 않아 오늘날 그의 학문이 올바르게 평가되지 않음은 안타까울 뿐이다. 소위 역학이 상수역과 의리역으로 나뉘는데 상수역에서도 상역(象易)과 수역(數易)으로 나뉘기도 하며 소옹은 수역자에 가깝다.

정확히는 심역(心易)이라 하여 말글이 생기기 이전의 역, 즉 선천역으로 복희가 괘를 그린 획괘(劃卦)의 본 뜻을 깨달은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청말 민국 초에 민주화 운동가로 유명한 역학자 항신재(杭辛齋)는 “수로 말미암아 마음이 생긴다(數由生心)”고 하였다. 정확한 말이고 여기에 주역의 참진리와 더불어 인생의 철학이 다 들어 있다. 천하만사는 수이다. “재수가 있다, 없다”, “운수가 있다, 없다”, “아홉수를 조심하라” 등이 이에 해당하는 말이다.


   당송팔대가 중 한사람인 송대의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소강절보다 4살 위인데 한림원 학사를 지낸 이로 소옹을 만난 적이 없는데도 그를 황제에게 천거하였다. 소옹은 황제의 부름(詔命)이 세 번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구양수는 아들 비(歐陽棐)가 일이 있어 낙양에 가게 되자 아들에게 “낙양에는 소요부가 있는데, 나는 유독 그를 알지 못한다. 너는 나를 위해 그를 만나 뵙도록 하여라”고 하였고, 비는 소옹을 만났다. 소옹은 비에게 자신의 이력을 소상히 알려 준다.

비와 이별할 때 “그대는 이 말을 잊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어린 비는 소옹의 ‘잊지 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20년 후 비는 태상(太常)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고 소옹의 시호에 관한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비는 소옹이 부탁한 것이 여기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옹은 구양비의 앞날과 함께 20년 후에 있을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위 북송오자(北宋五子 :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중 가장 연장자인데 다른 유가들과는 같지 않았다. 스스로 유학자임을 밝히기도 하였으며 유가의 법도를 지키되 유가들이 고수하는 명분이라든지 예법의 구속에는 초연하였고, 엄격함도 싫어했으며 도가의 정신도 함께 하였으나 도가적 방임은 따르지 않았다.

엄격한 유가의 관점에서 보면 도가에 가깝고,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도인이었다. 물론 불교에 대한 식견 또한 깊었으며 오직 천명이라는 경지에 다다른 위인이었다. 이정 중에 형인 명도선생이 이천보다는 성정이 호방하였는데 명도는 소옹을 평하기를 “요부는 흉중에 자유로움과 광활함을 함께 품었으니, 마치 공중의 누각과 같이 사방팔방으로 두루 통하였다”고 하였다.


   소옹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후학들은 그의 역학을 단순한 술가(術家)로 점(算命學)에 뛰어난 사람정도로 평가하는데, 그의 학문은 그런 수준과는 차원을 달리한 대학자였다. 현대 중국의 대학자 고회민은 소옹의 역학연구의 경지를 “64괘 괘사를 지은 문왕과 공자-역의 완성은 3성인 즉 복희, 문왕, 공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함-이후로 비견할 사람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주 문·무왕 시대에 이르러 역학이 천도사상에서 인도사상으로 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점을 통해 인간의 삶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자에 이르러 철학사상을 겸하면서 유가와 도가로 나뉘는 중국철학의 시원이요 군경지수(群經之首)의 지위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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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절과 심역(2)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  siminsori@siminsori.com

승인 2016.05.03  23:26:50

  
▲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소강절어느 날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즐거워하지 않다가 “2년이 되지 않아 남쪽의 선비가 재상이 될 것인데 세상이 이로부터 시끄러워질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세상이 장차 다스려지려 하면 땅의 기운이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게 되고 장차 어지러워지려 하면 남으로부터 북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제 남방의 땅기운이 올라왔다. 새는 기운을 먼저 얻는 동물이다”고 하였다.

   이는 왕안석이 등용되어 청묘법 등 신법에 의한 개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사마광 등 구법당과의 대립 등으로 정치가 혼란에 빠질 것을 예견했던 것으로 황종희가 지은 『송원학안 · 소옹전』에 실린 얘기이다.


   또 소강절이 어느 날 저녁 아들 소백온(邵伯溫)과 함께 있는데 유시(酉時)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은 한번, 다음은 다섯 번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이웃집 사람이 들어와 물건을 빌리러 왔다고 하였다.

소강절이 그를 아무 말 못하게 하고 아들 백온에게 이 사람이 무슨 물건을 빌리러 왔는지 점을 치도록 하였다. 처음 한번 두드린 것은 일수(一數)로 건괘(乾卦☰)에 속하고 상괘로 하며, 다음은 다섯이니 오수(五數)로 손괘(巽卦☴)에 속하여 하괘로 하였으며, 유시는 12시진에서 열 번째라 십수(十數)로 하여 1+5+10을 하니, 16에 해당하여 6으로 나누니 남은 수가 4라, 사효(四爻)가 변괘가 된다.


   결국 천풍구괘(天風姤 ䷫) 사효가 변하여 중풍손괘(重風巽 ䷸)가 되었고 가운데 호괘라 하여 건괘(乾卦)가 거듭 나온다. 백온이 이 괘상을 살펴서 건금(乾은 오행에서 금(金)에 속함)이 셋이요, 손목(巽은 오행상 木에 속함)이 둘이므로 “이는 금목(金木)으로 된 물건이며, 또 건(☰) 금은 짧은 것이고 손(☴) 목은 긴 것(金短木長)이므로 이는 기물(器物)이니 빌리러 온 물건은 호미입니다”고 백온이 점단하였다.

이에 소강절이 이르기를 “호미가 아니라 반드시 도끼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물으니 과연 도끼를 빌리러 온 것이었다. 중국의 호미는 자루가 아주 길다.


   소백온의 점단에 대해 소강절은 “수(數)를 추리함에 있어서 반드시 먼저 그 이치를 밝혀야 한다. 괘만으로 추리한다면 호미라 해도 되나, 이치로 추리한다면 저녁 늦게 호미를 쓸 일이 있겠느냐? 땔감을 만들기 위해 도끼가 필요한 것이겠지”라고 설명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치’를 추론하는 심역의 요체가 됨을 밝힌 것이다.

이는 그가 지었다는 『매화역수(梅花易數)』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가 지었다기보다는 소강절의 점법과 점례를 모아 후학들이 소강절에 가탁하여 찬한 책이라 함이 맞을 것이다.


   몇년 전 선배 모씨에게 이 매화역수 점법을 가르쳐 줬는데, 그 후 어떤 지인이 자녀문제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것을 듣고 점단하여 제시해 주고 큰돈을 사례비로 받았다고 하며, 필자에게도 권하길 “요놈의 자본주의가 많이 잘못되어 있으니 아무나 점쳐주지 말고 큰 대가를 지불한 자에게만 점을 치라, 그래야 권위가 선다”며 ‘이는 본보기’라며 충고해 준 적이 있다.

소강절은 대가를 받고 점을 친 적이 없지만 오늘날은 권위와 돈이 정비례하는 세상인지라 그 선배는 늘 필자에게 실속 있는 삶을 살 것을 충고해 준다. 어쩜 그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강절이 점을 치는 이유는 점술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점을 통하여 역의 진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역에는 삼역이라 하여 쉽고 간단하다는 이간(易簡), 그리고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의 원리가 있는데, 변역 즉, 변하고 바뀌는 것은 유형적(有形的)인 만물이고, 불역 즉, 변하지 않는 것은 만물을 변하게 하는 무형(無形)적 원리이다.

   변하는 만물은 모두가 유한한 존재로서 모두 명운(命運)에 따라 변하고 그 수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운과 수가 작용하여 드러나게 되고, 그 기미와 징조로서 미리 아는 것이다. 이를 『역 · 계사전』에서는 ‘신묘함으로서 미래를 알고, 지혜로써 지나간 일을 갈무리한다(神以知來 知以藏往)’고 하고 있다. 이 명수(命數)의 원리를 탐구하고 헤아리는 학문이 곧 역의 상수(象數) 원리이다. 소강절은 상수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사람의 명수는 물론 동물 · 식물 · 기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명수로 성립 되며, 수(數) 즉, 이 명수를 점복을 통하여 증명하고자 점을 쳤던 것이다.


   그런 그가 운명하기 전 장재(橫渠)가 문병을 와서 명(命)에 대해서 논하자 말하길 “나는 천명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만 세속에서 말하는 명이라면 나는 모른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가 점복을 한 것은 천하의 만사 · 만물이 모두 수(數)에 의해 길흉이 정해지고 결정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는 선천역 즉 “역학은 심법(心法)이다. 만물의 변화와 인간만사는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 까닭으로 괘의 도(圖)는 모두 중(中) 즉, 태극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던 것이다. 중용에서 희노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것(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 중(中)이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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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대별 구분
작은별--+|2006.05.09 15:39 |조회 721|신고

   철학의 시대별 구분은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철학은 BC 5~6C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문화권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철학이다. 그러나 중세의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당시의 문헌들 대부분은 소실되었기 때문에 초기 고대철학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명확히 알기는 힘들다. 오늘날 고대철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대부분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고대철학 중에서 아테네의 몰락 이후부터 중세가 시작될 때까지를 헬레니즘 시기라고 부른다. AD 4C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12~13C에 르네상스가 시작될 때까지의 시기를 중세라고 부른다. 이 시기동안 인류의 지적 발달은 1000년 이상 퇴보하게 된다. 오직 논리학만이 허용되었을 뿐 모든 자원과 인력은 기독교의 체계화와 세력확장에 투입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의해 아랍권에서 보존되었던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유럽에 다시 소개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이 시기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를 근대철학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칸트 이후의 철학을 현대철학으로 분류한다.


  철학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누는 방법 이외에, 철학의 관심영역이 바뀌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구분범에 따르면, 고대부터 르네상스를 포함하여 중세에 이르기까지를 존재론의 시대로 구분한다. 그리고 17C에 데카르트에 의해 인식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이후 상당한 기간동안 철학자들은 앎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19c말에서 20C초에 걸쳐 프레게, 무어, 러셀 등에 의해 철학자들의 관심은 언어의 문제로 바뀌고(언어적 전환) 이 경향이 20C를 지배하게 된다. 인식적 전환과 언어적 전환 사이에 독일을 중심으로 한 특이한 철학적 경향이 등장한다. 칸트 이후 피히테, 쉘링, 헤겔 등에 의해 전개된 독일관념론과 헤겔의 영향을 강력히 받은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은 철학의 주류에서 벗어난 이단아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분법은 로티가 제안한 것으로, 그는 앞으로의 철학이 문예비평의 성격을 강하게 띨 것이고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양철학, 특히 중국철학의 시대별 구분은 대체로 왕조를 기준으로 정해진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 등이 활동했던 춘추전국시대를 일반적으로 선진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중국철학의 기본적인 경전들이 성립하게 된다. 맹자와 순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했지만, 맹자 계열이 유학의 정통이 되고, 순자 계열은 후에 법가로 발전한다. 이 시기에는 많은 사상들이 경합을 벌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묵가, 명가, 전쟁가 등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중국철학의 맥이 한동안 끊긴 이후에 한 왕조에서 선진시대 문헌을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음양가 등이 출현한다. 위진 시기에는 도가에 종교적 색채가 더해지면서 현학가가 성립한다. 송대에 이르러 주렴계, 장횡거, 소강절, 정명도, 정이천 북송5자에 의해 유가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재해석을 기초로 하여, 남송 시기에 주희는 유가, 불가, 도가를 종합하여 성리학 체계를 구성한다. 명대 말에 이르면 왕양명에 의해 양명학이 성립한다. 청대에 들어와서는 한족에 대한 문화적 탄압의 일환으로 고증학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말기에 이르러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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