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일화

2016. 8. 9. 09:14산 이야기



      

율곡의 일화

 

 

율곡과 꿈

 

〈 차    례 〉

1. 율곡을 배던 때의 꿈

2. 율곡을 낳을 때의 꿈

3. 율곡의 어린 때의 꿈

4. 율곡이 별세할 때 부인의 꿈

 

율곡에게는 처음 태어날 적부터 마지막 별세하는 때까지 꿈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1. 율곡을 배던 때의 꿈

어머니 사임당이 율곡을 밸 적에, 꿈에 동햇가에 이르렀더니 한 선녀가 있어 바다 속으로부터 살빛이 백옥같이 흰 옥동자 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것이었다.

이런 꿈을 꾸고 율곡을 배었다는 것인데, 그 때 율곡의 어머님이 어디서 살았던지 는 자세하지 않으나, 지금껏 그 집안에서나 또 그 고장에서 전하기로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라는 곳에서 살았었고, 거기서 율곡을 배었다는 것이다.(봉평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2. 율곡을 낳을 때의 꿈

율곡이 12월 26일 새벽 인시(寅時: 지금의 새벽 4시 쯤)에 강릉 북평촌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났는데, 낳는 날 밤에도 어머님 사임당의 꿈에 어디서 난데없는 검은 용이 동해 바다로부터 날아오더니, 사임당의 자는 방 처마밑 문 머리에 서려 있는 것이었다.

그 꿈을 깨어나자 곧 율곡을 낳았으므로, 아기 이름을 '현룡(見龍: 용이 나타남)'이라고 불렀고, 또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 용꿈을 꾼 방)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율곡행장)


3. 율곡의 어린 때의 꿈

여기 율곡 자신이 어릴 적에 꾼 이상한 꿈이 있다.

율곡이 꿈에 하느님을 뵈었더니, 금 글자로 쓴 첩지 하나를 주는데, 열어보니 거기에는 이상한 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용은 새벽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오히려 젖어 있고,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풀이 저절로 향기롭다.

 

 원시(原詩)

 

龍歸曉洞雲猶濕  麝過春山草自香

용귀효동운유습  사과춘산초자향

 

율곡이 꿈에 얻은 이 시가 무엇을 말함인지 알 길이 없었는데, 뒷날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야 모두들 그것이 바로 율곡을 가리킴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용이 돌아간다'는 것이나 '사향노루가 지나간다'는 것은 모두 다 율곡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요, 또 '구름이 젖어 있다'는 것이나 '풀이 향기롭다'는 것들은 역시 율곡의 끼친 업적이나 명성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이 어려서 쓰던 벼루가 지금 강릉 오죽헌에 그대로 전하는데, 더구나 그 벼루 밑바닥에는 뒷날 정조 대왕이 친히 노래를 짓고, 또 친히 글씨를 써서 새겨 놓은 것이 있거니와, 그 글귀 속에 옛날 율곡이 꿈에 얻은 시 구절을 인용하기까지 했음을 본다. (율곡 별집 권5)

정조대왕의 글(벼루에 새김)

 

무원(주자)의 못에 적셔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품이여!

용(율곡)은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 구름(명성)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에 남았구나!

 

원시(原詩)

 

涵무池 象孔石 普厥施

함무지 상공석 보궐시

龍歸洞 雲潑墨 文在玆

용귀동 운발묵 문재자

 

* 무원 : 주자 선대의 고향으로, 주자의 학문을 말함.



4. 율곡이 별세할 때 부인의 꿈

큰 인물이 날 적에 꿈이 있었으니, 어찌 세상을 마지막 떠날 적에 꿈이 없을 것이랴.

율곡은 정월 16일 한창 추울 적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전날 밤 부인 노씨의 꿈에 검은 용이 율곡의 침방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율곡 연보)

 

 

 

율곡의 인품과 성격

 

〈 차    례 〉

1. 대사헌 율곡의 솔선수범

2. 맡은 일에 신명을 다하는 율곡

3. 소곤거리는 일이 없었던 율곡

4. 사람을 버리지 않았던 율곡

5. 글을 열 줄씩 읽었던 율곡

6. 샘물 근수를 맞춘 율곡

7. 율곡과 풍랑

8. 율곡과 화석정

9. 율곡과 송 구봉의 우정

10. 율곡의 죽음과 도인들의 기도



 1. 대사헌 율곡의 솔선수범(내탓이오)

율곡이 46세 때의 일이었다.

6월에 사헌부 大司憲이 되어 취임 첫 무렵에,

"도헌(都憲: 대사헌)이란 나라의 중요한 직임(職任)으로서,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데 그 책임이 있다"

하고서 옛글에 자기 의견을 보태어 풍속을 바로잡는 행동 강령 50여 조항을 써서 길거리에 내다 붙였다.

그래서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읽고 외우게 함으로써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스스로 기강을 범하는 이가 없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의 대요(大要)로 말하면, 유교의 오륜 조항을 기조로 한 것으로, 다만 첫 번 범한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고, 두 번째 범하는 사람에게는 명령하고, 세 번째 범하는 사람은 죄를 다스렸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따랐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백성들이 서로 말하되,

" 이 어른이 부임한 뒤로는 모든 관청에서 부정한 일이 죄다 없어졌고, 또 길을 갈 때에도 서로 모두 공경하며 인사들을 정중히 한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노파가 자기 딸이 불효하다고 고소한 일이 있었다.

이때 율곡은 두 모녀를 한꺼번에 불러놓고,

"나 같은 사람이 대사헌이 되었기 때문에 풍속이 이같이 나빠졌나 보다."

하고, 인륜이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예(例)를 들어서 자세히 타이르자, 그들은 감격해서 같이 붙들고 울면서 서로 뉘우치고 돌아가 옛날같이 서로 사랑하는 모녀가 되었다고 한다. (율곡 연보)



2. 맡은 일에 신명을 다하는 율곡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국(一國)의 재상, 명사, 선비, 심지어는 취직을 청하는 이들까지 겹쳐서 어떻게나 방문객이 많은지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하고, 어떤 때는 밤이 깊어서야 겨우 저녁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본 아우 옥산(玉山)이 형님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사람 접견하는 것을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말했다. 그 때 율곡은,

"만일 손님 접견하는 것을 꺼리기로 본다면, 아예 석담(石潭) 같은 데 그대로 엎디어 살 일이지, 서울에 와서 벼슬할 필요가 뭐 있겠니. 내가 이제 이조판서로서 인물을 전형하는 자리에 앉았는데, 남을 만나보고 저울질한 다음에 라야 쓸 것 아니냐.

이 자리는 손님 싫어하는 사람으로서는 안 되는 자리야. 또 과거 보는 사람은 결국 벼슬 구하는 사람인데, 벼슬 구하는 사람을 안 만나 보기로 한다면 본시 아무도 안 만나야 될 것 아닌가. 내가 괴롭더라도 그 사람을 친히 만나 보고 난 다음에 그 재주를 따라 각각 그 자리에 써야 할 것이니, 백 명이 와도 다 만나 봐야지."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이름을 낱낱이 잡책에 적어 넣고 참고하는 것이었고, 혹시는 그 이름들을 창가에 써 붙여놓고 전형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율곡전서 권38 부록)



3. 소곤거리는 일이 없었던 율곡

홍 귀상, 홍 치상 형제는 율곡에게 친척도 되고, 문하생이기도 했다.

그들의 평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우리 형제가 어려서부터 율곡 선생을 모시고 그 아래서 글을 배우고 자랐지마는, 평소에 한 번도 남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일에 처하고 마음가지는 것을 마땅히 저 청천백일같이 해서 누구나 환히 보고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셨던 만큼, 과연 표리가 같은 분이었다."

는 것이다. (율곡 별집 권40)

 


4. 사람을 버리지 않았던 율곡

율곡의 서모 쪽에 따른 나이 어린 소년 하나가 집에 와서 늘 놀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율곡의 서재 안에 있는 무슨 귀중한 물건 하나를 훔쳐 간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율곡의 자제들이 그를 당장에 내쫓아 버리고 말았다.
한 열흘쯤 지나서다. 율곡이 그 소년을 다시 불러 와서 옛날대로 접해주는 것이었다.

자제들은

"어째서 그 따위 도둑질하는 놈을 다시 불러들입니까?"

하고 항의했다.

그 때 율곡은,

"그 동안에 제 잘못을 회개했을 것이다. 사람을 영영 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진심으로 감복했다. (율곡 전서 권38 부록)



5. 글을 열 줄씩 읽었던 율곡

율곡과 우계 성혼이 서로 대화한 말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계 : "나는 책을 읽을 때 일곱 여덟 줄쯤 한꺼번에 읽을 수가 있소."

율곡 : "나는 한꺼번에 겨우 여남은 줄밖에는 못 읽소."



6. 샘물 근수를 맞춘 율곡

율곡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중들과 같이 오고 가며 불교을 연구해 보려던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율곡이 산 속 청렬(淸冽)한 샘물 가에서,

"대개 맑은 물이란 근수가 무겁게 나가고, 궂은 물은 보기에는 흐리터분해서 무거워 뵈지마는 실상은 맑은 물보다 근수가 덜 나가는 것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 그와 함께 다니며 그 이야기를 들었던 일학(一學)이란 중이 뒷날 오대산에 있으면서, 자기 제자들에게 옛날 이야기 삼아 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지로 실험해 본 결과 과연 그렇더라는 것이다. (잡 기)



7. 율곡과 풍랑

율곡이 어느 때 우계 성혼과 함께 화석정 아래서 배를 띄우고 선유(船遊)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불어 와서 배가 심히 요동하며 풍랑이 일어 뱃전을 치는데, 율곡은 태연히 앉아 시상(詩想)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우계는 몹시 겁을 내며 율곡을 향해서,

"어떻게 급한 때는 급한 대로 처변(處變)하는 방도를 써야 할 것 아니오."

하자, 율곡은 웃으며,

"우리 두 사람이 어찌 물에 빠져 죽기야 하겠소."

하는 것이었다. 얼마 있다가 풍랑도 잔잔해졌다고 한다. (윤 선거의 노서기문(魯西記聞))



8. 율곡과 화석정

파주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은 율곡이 시를 짓거나 사색에 잠기곤 하던 곳이었다.
이 정자에 대해서는 임진란 적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곡은 임진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장차 그 같은 전쟁이 일어나 임금이  북으로 피난 갈 것까지를 미리 알았기 때문에, 평소부터 이 정자에다가 밤낮 없이 기름을 먹여서 어떠한 폭우 속에서도 훨훨 잘 타게 해 두었던 것이, 마침내 임진란을 만나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난이 일어나자 4월 30일에 임금이 도성을 벗어나서 북으로 의주를 향해 갈 적에, 비는 쏟아지고 날은 어두워지자 임진강을 건널 길이 없던 차에, 율곡이 일찍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미리 화석정 기둥마다 기름을 먹여 두었다가 거기에 불을 지르면 그 불빛으로 강을 잘 건너갈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화석정에다 불을 절러 그 불빛으로 앞길을 찾아 첫날 밤 고생을 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다만 율곡을 예언가로까지 높이 받들려고 하는 후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사실인즉, 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 성룡이 쓴 《징비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나루를 건너 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붙여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에까지 비치오 길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선조 수정실록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적혀 있다.

그러므로 불을 태운 것은 화석정이 아니고 나룻가에 있던 옛 승청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실지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



9. 율곡과 송 구봉의 우정

율곡의 친구 중에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이른바 서자(庶子)출신이라서 사회적으로 활약하지 못하긴 했으나 학문과 인격이 탁월하여 우리 역사상에서 높은 칭찬을 받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한 분이었다.

어떤 분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만일 제갈 공명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거든 송 구봉을 보아라. 그가 바로 제갈 공명같은 인물이니라."

하였을 정도였으며, 전해오는 말에도 " 임진왜란을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달 만에 평란(平亂)하였으리라."라고 하였으니, 비범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당시의 양반 자제들은 송구봉이 서자(庶子)라 하여 사귀기를 꺼렸지만, 율곡은 항상 그의 앞에서는 몸을 삼가며 존중해주었는데 그것은 송 구봉이 서자임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훌륭하고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이런 송 구봉의 재주를 널리 알리고자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율곡은

"여보게, 이번 과거에 나하고 함께 가서 보세. 자네가 과거를 보지 않으면 나도 그만두겠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송 구봉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여 안 본다고 하였으나 결국은 율곡의 우정을 소중히 여겨 같이 응시하였다.

율곡이 장원 급제를 하자 주변의 선비들이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때 율곡은 친구인 송 구봉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나보다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뛰어납니다. 물어볼 것이 있으면 이 사람에게 보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송 구봉은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율곡은 내 친구 이기는 하지만 스승과 같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권하는 일이니 감히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해 주었다.

송 구봉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후로 송 구봉의 이름은 널리 세상에 알려졌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친구와의 우정을 말할 때에는 율곡과 송 구봉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런데 율곡의 〈서자 허통: 서자들을 등용하는 일〉에 대한 사상 때문에 율곡을 뛰어난 혁명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생각한 송 구봉이 어느 날, 율곡에게 자식의 혼인을 청했다.

그러자 율곡은 송 구봉에게,

"벗은 옳거니와, 혼인은 어렵네."

하고 대답했다. 송 구봉은 율곡에게서 혼인에 대하여 거절을 당하자 담담히 웃으며,

"율곡도 역시 속인을 못 면했군!"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율곡으로서도 항상 인륜이 근본을 따져서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 왔던 만큼 족히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마는, 국법이 정식으로 고쳐지기 전에는 역시 어떤 혼란을 가져올 것을 생각하고 실행에까지는 옮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0. 율곡의 죽음과 도인들의 기도

율곡은 49세 되는 해 정월 16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전 보름날 밤이었다.

서울 어떤 선비가 강릉 지방으로 여행하는 길이었는데, 해는 어두워지고 길을 잘못 들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섰는데, 어떤 나무꾼에게 길을 물었더니 이 언덕을 넘어가면 어떤 양반의 집이 하나 있으니 거기 가서 쉬고 가라는 것이었다.

선비는 나무꾼의 말대로 그 언덕을 넘어갔더니 과연 거기에는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외딴 집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동자가 나와 맞는 것이었다. 동자는 선비와 문답한 뒤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후에 도로 나와 선비를 들어오라고 했다.

선비가 안으로 들어갔더니 방에는 어떤 늙은이가 다 떨어진 의관을 바로잡으며,

"오늘밤에 무슨 긴요한 일이 있어 여러 가지 서로 불편하기는 하지마는, 그렇다고 이 밤중에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부득이 손님을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소. 그런 줄 알고, 얼마 뒤에 이 방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손님은 입 한 번 떼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이윽고 어떤 중 한 분과 또 다른 촌학구 한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만나 역시 서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다만 주인이 동자를 시켜 정화수 맑은 물 한 그릇을 떠오게 하여 소반 위에 놓고, 서로 둘러앉아 무엇인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약 한 시간 동안이나 주문을 외우며 정성을 드린 뒤에 주인이 다시 동자를 밖으로 내어보내어 하늘에서 무슨 이상한 일이 있나 없나를 지켜보게 하였다.
이윽고 동자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더니,

"이제 막 동쪽에 있는 큰 별 하나가 빛을 내면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하고, 하늘에 이상이 있는 것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서로 놀라 탄식하며,

"천수(天壽)가 다한 것을 어찌하는 방법이 없군!"

하더니, 두 사람은 실색한 얼굴로 일어서 어디론지 가 버리고 주인도 슬픈 생각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손님은 비로소 주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주인은 그제야 손님을 향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서울에 계신 율곡 선생을 위해서 다만 몇 해 몇 달이나마 수를 좀 연장시켜 보려고 경문을 읽고 기도를 올린 것이나, 별이 떨어지고야 말았으니 이 시각에 아마 서울에서는 율곡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오."

하는 것이었다.
그 때의 주인과 촌학구가 누구였는지 는 알 길이 없고, 다만 그 중은 금단대사였다고 한다.

선비는 하룻밤 동안 참으로 이상한 집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이상한 광경을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더니, 과연 그 날 16일 새벽에 율곡이 세상을 떠났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원명의 동야휘집(東野彙輯))

 

 

 

율곡의 청빈한 삶

 

〈 차    례 〉

1. 반찬 없는 밥

2. 쌀 선물을 받지 않음

3. 율곡과 대장간

4. 쇠고기를 먹지 않음

5. 집을 팔아 형제와 나눔

6. 율곡의 별세와 가난

 

율곡은 우리 역사상 청빈한 관리(淸白吏)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학문과 인품의 명성이 워낙 크다보니 청빈한 삶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의 청빈했던 이야기가 많이 나와 귀감이 되고 있다.

교우인 우계 성혼이 삼사의 탄핵을 받은 율곡을 변론하는 상소문에서 말하길, "율곡은 시국을 구제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신의 살림은 염두에 두지 않고 일생을 그렇게 변함없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했으니 그 생활이 어떠하였는지는 저절로 짐작할 수 있다.



1. 반찬 없는 밥

율곡이 벼슬을 사양하고, 잠깐 파주로 물러나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최 황이란 이가 율곡을 방문하여 겸상을 차려서 밥을 먹는데, 반찬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최 황은 젓가락을 들고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한 마디 했다.

"이렇게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숫는대서야..."

이 말을 들은 율곡은 웃으며,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맛이 있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속담에 있는 '시장이 반찬이지.' 하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최 준의 창랑우언(滄浪寓言))



2. 쌀 선물을 받지 않음

율곡이 해주 석담에서 살 때였다.

언제나 점심에는 밥을 먹지 않았다.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죽도 끓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재령(載寧) 군수가 선생에게 쌀을 보내 드렸다.
더구나 그 군수는 최 립이란 이로서, 율곡이 어릴 적 사귄 사람이었다.

그러나 율곡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자제들은 양식이 끊어졌던 차에 어디서 쌀 선물이 들어오므로 대단히 반가웠는데, 율곡은 두말도 않고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기며 묻자, 율곡은 그들을 향해서,

"국법에 장물(臟物)을 주고받는 죄는 아주 엄격한 것이다. 우리나라 수령들이 나라 곡식 아닌 다음에야 따로 무슨 곡식이 있을 것이냐.
 수령들이라 할지라도 제 개인의 곡식을 주는 다음에야 어찌 안 받을 것이 있겠냐마는, 이 최 군수는 제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응당 나라 곡식을 보내 주는 것일 테니 내가 어찌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대로 시장한 채 견디며 사는 것이지!"

하는 것이었다. (율곡전서 권38 잡록 중)



3. 율곡과 대장간

율곡이 해주에서 살던 동안의 일이었다. 대장간을 차려 가지고 호미를 만들어 그것을 팔아서 양식을 사 먹었다.

이것에 대해서 뒷날 백사 이 항복 선생은 최 유해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근세에 와서 모재 김 안국 선생이 여주에 물러나 있을 적에 친히 추수를 거두러 다니며, 마당에 한 알이라도 흘리지 못하게 하며, 이게 모두 하늘이 주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율곡 선생도 해주에서 대장간을 일으켜서 호미를 만들어 팔아 그것으로 양식을 바꾸었던 것이니, 이같이 의(義)에 해당한 일은 큰 인물도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던 것인가 생각합니다."

하고 써 보낸 것이 있다.



4. 쇠고기를 먹지 않음

율곡 선생은 평소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국법에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사람들이 소를 부려서 실컷 그 힘을 뽑아 쓰고, 또 그 고기마저 먹는다는 것은 결코 어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조정에서 <쇠고기 못 먹게 하는 법령>을 내리자, 율곡은 득의한 듯이,

"국법으로까지 이같이 금하는 일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 된다."

하고, 그로부터는 비록 제사라 할지라도 쇠고기는 쓰지 아니했다. (율곡별집 권3)

5. 집을 팔아 형제와 나눔

율곡은 자기만이 가난하게 산 것이 아니라, 모든 형제가 다 가난했던 모양이다.

율곡이 가장 나은 편이었는데, 그나마도 처가 덕택을 상당히 보았던 것이다.

장인 되는 노 경린 공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서 율곡에게 준 것이 있었는데, 율곡은 형제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 끼니를 잇지 못하는 형편임을 알고, 자기 혼자 그 집을 지니고 태연히 있을 수 없어 마침내 그 집을 팔아 가지고, 그 돈으로 베를 사서 골고루 분배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집 한 채도 없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형제가 먹건 굶건 같이 사는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죽도 끓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조 익의 포저집(浦渚集))



6. 율곡의 별세와 가난

율곡 선생은 생전에 일국(一國)을 뒤흔드는 높은 명성을 가진 큰 인물이었지만, 가정 생활은 이와 대조적으로 매우 군색하게 지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남의 집에 세를 내어 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관직에 나가지 않을 때는 처가의 도움과 친구인 우계 성혼의 배려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그것은 선생이 오직 나라를 위하는 생각뿐이어서, 집안 일은 돌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난했던 가정 형편은 선생이 별세하던 날 여실히 드러났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당장, 집안에는 모아 놓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옷도 마련해 놓은 것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수의(壽衣)를 빌려 와서 염습을 했다고 한다.

또 그 뒤에는 처자들이 집이 없어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의지할 곳이 없고, 얼고 주림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을 보고, 친구들과 유림의 선비들이 돈을 모아서 율곡의 가족들을 위하여 서울에 집 한 칸을 마련해 준 일이 있었다. (이 정귀의 율곡 선생 시장(諡狀))

 

(이 글은 노산 이은상님의 '사임당과 율곡'에서 인용하였습니다.)


www.yulgok.co.kr/life/story.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