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남인 계열 명문가 셋 - 재령 이씨 문중

2013. 7. 25. 17:16잡주머니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랏골,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안동 월곡 마골 일대에 집성 세거하는 재령 이씨는 병자호란 이후 영정시대 어간까지 조선 후기 퇴계 유학의 학문적 계승과 영남 남인의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중추세력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재령 이씨 일파의 영해 입향과 석보 이거 그리고 그 후손들이 이어가는 성취에 대하여 알아본다.


    재령 이씨는 고려 성종때 문하시중을 지낸 李禹稱이 재령을 녹읍으로 받고 재령군에 봉해지면서 경주 이씨에서 분적하여 재령이씨의 시조가 된다. 그 자손들은 대대로 황해도 재령 일대에 자리잡고 살았는데 고려말에 후손 이대봉이 다시 安陵君에 봉해져 안릉 이씨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이대봉의 아우 李小鳳은 상장군으로 공민왕의 부마가 되었다.


    이소봉의 손자 성균진사 李午는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 출사하지 않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남녘땅을 떠돌다가 자미수가 아름다운 경남 함안 모곡리를 숨어살 곳으로 정하고 띠풀로 집을 지어 정착함으로써 재령 이씨 낙남조가 된다. 영남 일대에 거주하는 재령 이씨는 대부분 茅隱 李午의 후예가 된다. 李午는 띠풀로 집을 짓고 숨어살았다 해서 호를 茅隱으로 삼고, 사는 곳을 高麗洞, 붙이는 밭을 高麗田이라 이름하며 은거하였다.


    모은의 손자 李孟賢은 태종의 자 함녕군의 외손녀와 혼인하여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여섯째 아들 李璦가 영해부사로 부임하는 숙부 仲賢을 따라와서 영해고을의 만석장자 진성 백씨 白元貞의 무남 독녀에게 장가를 들어 많은 재산을 물려 받고 영해 나랏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영해 나랏골에 정착한 이애의 손자 雲嶽 李涵(1554-1632)은 임란을 맞아 김천도 찰방을 지내다가 4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장자의 말을 인용하였다하여 과방에서 이름이 빠지고 파직까지 되었다가 선조 36년 다시 의금부도사가 되고, 의령 현감으로 나갔다. 1609년 56세의 나이에 다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난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마흔칸 뜰집을 짓고 명나라 신종황제의 글씨를 집자 탁본하여 ‘충효당’ 이란 현판을 내걸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가문을 일으키는 기대와 염원으로 “내 이제 이 이름을 붙여 놓았으니 너희들은 기필코 그 실질을 채워라”고  당호를 자호하였다 한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는 충효당은 재령 이씨 영해파의 종가로서 우리 나라 정보화 발전의 제1유공자인 전 삼보컴퓨터 창업주 이용태 회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용태 회장은 운악 종가 충효당의 종손이 된다.


    운악 이함은 진성 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時淸, 時亨, 時明, 時成, 時震이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모두 운악 이함의 후예들이다. 운악의 차자 우계 이시형은 무의공 박의장의 사위로 과거 보고 돌아오는 길에 원인모를 병으로 27살에 요절하고, 그 배위 무안 박씨 또한 부군을 따라 순절한다. 장자 청계 이시청은 무의공의 아우 박홍장의 사위가 되었는데 아우가 죽은 후 그도 과거길에 올랐다가 문경 산양 객사에서 37살에 세상을 뜨자, 그 배위 무안 박씨는 대상 때 곡기를 끊어 순절한다. 남편 형제와 부인 종반의 운명이 어이 그리도 비슷할까? 청계의 후손에서는 손자 梅塢  李楷가 효종때 문과에 급제했다.


    셋째 석계 이시명(1590-1674)은 예안 외내 광산 김씨 근시재 김해의 사위가 되었는데 1남 1녀를 낳은 광산 김씨 부인이 요절함에 따라 스승인 경당 장흥효의 딸 정부인 장씨(1598-1680)를 재취로 맞이하여 6남을 더 낳았다. 석계와 그의 아들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그 후예들이 퇴계학통을 계승하면서 재령 이씨가 영남 남인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영해 물편가의 한미한 가문 재령 이씨가 안동권 남인 벌족세력에 편입되어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안동권 벌족들과의 통혼과 학문적 사우관계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載寧 李氏 (寧海派) 系圖

 

-介智-孟賢- -殷輔--時淸-莘逸-       (영해 인량)

                                       -時亨-傅逸           (영해 인량)

                                               -後逸

                                       -時明-尙逸-檼       (영양 석보)

                                               -徽逸            (영해 오촌)

                                               -玄逸             (진보 광덕)

                                                       -

                                                            -女 李泰和-後靖

                                                                -象靖

                                                                -光靖

                                        -嵩逸          (영양 석보)

                                                -靖逸

                                                -隆逸-檼     

                                               -槾       (안동 마골)

                                        -雲逸

                                        -時成-徽逸         (영해 인량)

                                         -時震            (의령 진주동산)

 

            -仲賢

          -季賢

 



     석계 이시명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나, 북인의 반정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경당 장흥효에게서 퇴계 이학을 전수 받고 학자로 이름이 있었다. 병자호란이후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연호를 빌어 숭정처사로 자호하고, 영양 일월산을 수양산에 비한다하여 首比山으로 명명하고 1640년 영해에서 영양 석보로 이거하여 석계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만년에 명나라가 망하자 한때 안동 두솔원 대명동으로 田庄을 옮겼다가 넷째 숭일이 있는 석보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 숭정처사로 추앙을 받았다. 석계는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다 학자로 이름이 있었다.


    석계의 장남 정묵재 李尙逸(1611-1678)은 예안 외내 광산 김씨 근시재 金垓의 외손자로, 풍산 류씨 수암 柳袗의 사위가 되었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단산서원장을 역임하는 등 재령 이씨 七山林의 하나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무자하여 아우 융일의 장자 벽계 李檼을 양자하여 석계종가를 이었다.


    석계의 차남 존재 이휘일(1619-1672)은 13세부터 외조부 경당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여러 해 동안 도산서원장을 지냈으며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나랏골에서 멀지 않는 영해오촌동에 冥棲庵을 짓고, 갈천입구에는 雷澤亭을 지어 소요자적하였다. 저서로는『존재집(存齋集)』『구인략(求仁略)』아우 현일과 공저한『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숙부 時成의 양자가 되었다.


   석계의 3남 갈암 이현일(1627-1704)은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영남의 대표적인 山林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사림의 천거로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배위는 무안 박씨로 무의공 박의장의 손서가 되었으니, 무안 박씨는 백부 청계와 중부 우계에 이어 선대부터 연비가 있었던 집안이다. 갈암은 1666년 영남사림을 대표하여 우암 宋時烈의 기년설, 미수 許穆과 고산 尹善道 등의 자최삼년설까지 날카롭게 비판하는 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여 영남 사림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674년 학행으로 寧陵參奉에 천거되었고, 이듬해 掌樂院主簿․工曹佐郞․司憲府持平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77년 工曹佐郞을 제수 받아 비로소 중앙 정계에 나아가, 이후 1680년 庚申환국때까지 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칩거하면서 1688년 李珥의 四端七情論을 비판한『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1689년 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儒賢으로 천거되어 成均館司業을 비롯하여 吏曹參議․成均館祭主․大司憲을 거쳐 숙종19년 吏曹判書에 올랐는데 임란이후 영남사람으로는 愚伏 鄭經世, 歸巖 李元禎에 이어 세번째가 된다. 1694년 甲戌換局때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5년 뒤에 放歸田里되어, 안동 임하 금양( 現 임하면 금소동, 갈암금양강도지)에 자리잡고 저술과 강학으로 여생을 마쳤다. 寧海 仁山書院에 제향 되었으며.『葛庵集』,『尊周錄』,『新編八陳圖說後』형 휘일과 공저한『洪範衍義』등이 있다. 갈암 종택은 원래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던 것을 1992년 임하댐 수몰로 태실이 있던 영해 인량리로 이건했다.


    갈암의 3남 密庵 李栽(1657-1730)는 중부 휘일과 숙부 숭일에게 수학하여 퇴계학문의 적전을 이었다.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벼슬은 72살에 遺逸로 천거되어 掌樂院主簿에 제수된 것이 고작이었다. 1689년 정국의 요직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 출입을 시작했으며, 1694년 남인의 실각과 함께 아버지가 홍원․종성․광양 등지로 유배되자 배소와 본가를 오가며 봉양하였다. 밀암의 학문은 외손자 大山 李象靖(1711-1781)․小山 李光靖 형제를 거쳐 定齋 柳致明에게 전수되었다. 만년에 부친 葛庵이 후진에게 강학하던 임하 금소와 梧坮에서 후진을 위해 강학을 했다. 또, 평생의 학구생활을 통해서 이황이 편찬한 『朱書節要』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해서로서『朱語要略』등을 저술했는데, 이는 주자의 저작과 어록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의 理氣仁性說이 주자의 정론에 부합함을 밝히고, 나아가 영남학파가 주자의 정통임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밀암선생문집』과 아버지의 유배길을 따라가며 적은 기행일기『창구객일록(蒼狗客日錄)』, 이현일의 상소문과 숙종의 비답(批答)을 모은『성유록(聖諭錄)』 등이 있다.


    석계의 4남 항재 이숭일(1631-1698)은 형 휘일과 현일이 있는 훌륭한 교육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경학 연구와 심성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양 석보로 이거하여 새로 집을 짓고 당호를 恒齋로 하고 바위 언덕에 ‘洗心臺’와 ‘樂飢臺’란 이름을 붙이고 廣麓亭을 지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89년 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掌樂院主簿를 거쳐 의령현감에 제수되자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부임하여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이불자(李佛子)’라 불렸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다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뒷날 불천위로 모시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아버지 석계와 두 형 (존재와 갈암)이 이미 불천위로 모셔진 터라 성사되지 못했다. 저서로『항재집(恒齋集)』이 있다. 영양 석보 두들마을은 석계의 4남 항재의 후손들이 계거하는 마을이다. 소설가 이문열과 한나라당 이재오 최고위원은 이 마을 출신이다.


   석계의 5남 정우재 李靖逸(1635-?)은 통덕랑으로 문집 네권을 남겼고 이밖에 6남 평재 李隆逸, 7남 광록 李雲逸도 형들을 따라 학문과 행검에서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석계의 6남 평재 李隆逸의 장자 벽계 李檼은 백부 정묵재 李尙逸의 양자로 입후되고, 차자 고재 李槾(1669-1734)은 숙부 이현일에게 배워 鄕試에는 거듭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여러 번 실패한 후, 안동의 마골(馬洞)에 振谷亭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만년에 趙顯命․朴文秀의 추천으로 1734년 영희전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에『고재집(顧齋集)』이 있다. 전 산자부장관과 무역협회장을 지낸 이희범은 안동 마골(안동댐 수몰전 월곡면 마동) 출신이다.


    석계 이시명과 그의 네아들, 정묵재 이상일,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 항재 이숭일 그리고 두 손자 밀암 이재와 고재 이만은 재령 이씨 ‘七山林’으로 불리는데, 칠산림중에서 存齋, 葛庵, 顧齋, 密庵이 특히 유명하여 ‘存葛顧密’로 약칭되기도 한다. 재령 이씨는 칠산림 이외에도 석계의 손자항렬에서 수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청계 이시청의 손자 梅塢 李楷가 효종때 문과에 급제한 것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 없었다. 갈암과 밀암은 퇴계의 적전을 이을 정도의 학문적 바탕이 있었지만 노론이 주도하는 과거급제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이후 재령 이씨들은 조선말까지 철저히 소외되어 ‘除李’라는 말까지 등장하였다. 갈암의 투사로서의 행적이 노론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재령 이씨 영해파는 小安東이라 불리는 영해의 한미한 가문에 불과했었지만, 안동권 벌족들과의 끊임없는 통혼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퇴계를 추앙하는 남인의 주요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그들의 세거지 또한 영해 일원에서 청송 진보, 영양 석보, 안동 임하 금소, 오대를 거쳐 안동 마골까지 안동을 향하여 전진하여 왔다. 葛庵과 密庵 부자의 학문은 小退溪로 불리는 大山에게로 전승되어 퇴계의 적전을 이었고, 당쟁이 치열하던 숙종시절에 갈암은 금옹 金學培, 목재 洪汝河, 지촌 金邦杰과 함께 안동 남인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적 인물로 등장함으로써 재령 이씨를 일약 영남 남인세력의 명문가로 발신시킨 인물이다.



이함(李涵) 1554(명종 9, 갑인) ~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재령(載寧). 자는 양원(養源). 영해(寧海) 출생. 창신교위(彰信校尉) 은보(殷輔)의 자.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경상도 도사(都事)․의령현감(宜寧縣監)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司馬榜目


이상일(李尙逸) 1611((광해군 3, 신해) ~ 1678(숙종 4, 무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재령(載寧). 자는 익세(翼世). 호는 정묵재(靜黙齋). 영양(英陽) 석보(石保) 출생. 생원(生員) 시명(時明)의 장자. 외조는 광산(光山) 김해(金垓). 처부(妻父)는 풍산(豊山) 유진(柳袗). 1633년(인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당시 사림(士林)의 대의론(大議論)이 일자 영남 유생의 소두(疏頭)로 추대되었다. 아우 휘일(徽逸)과 함께 ‘순유(醇儒)’로 중망을 받았으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장릉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에 『정묵재집(靜黙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司馬榜目․安東市史


이휘일(李徽逸) 1619(광해군 11, 기미) ~1672(현종 13, 임자)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재령(載寧). 자는 익문(益文). 호는 존재(存齋). 영양(英陽) 석보(石保)에 살았다. 생원 시명(時明)의 제2자로 계부(季父) 승의랑(承議郞) 시성(時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13세 때부터 외조부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자(朱子)․퇴계(退溪)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실천하는데 힘썼다. 한때는 병볍(兵효法종)을 연구하여 효종의 북벌 계획을 돕고자 했으나 왕의 승하로 단념하고,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성리대전(性理大全)』『역학계몽(易學啓蒙)』『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퇴계집(退溪集)』 등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영해(寧海)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존재집(存齋集)』『구인략(求仁略)』『홍범연의(洪範衍義 : 弟 玄逸과 共著)』이 있다. ■참고문헌 : 英陽郡誌․安東市史


이현일(李玄逸) 1627(인조 5, 정묘) ~ 1704(숙종 30, 갑신)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 영양(英陽) 석보(石保) 출생. 진사(進士) 시명(時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걸쳐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칩거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1666년(현종 7) 경상도 지방의 사림(士林)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1674년 학행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고,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77년(숙종 즉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받아 비로소 중앙 정계에 나아가, 이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칩거하면서 1688년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현(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비롯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성균관좨주(成均館祭主)․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책 결정 및 관원의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5년 뒤에 방귀전리(放歸田里)되어, 임하(臨河) 금양(錦陽 : 現 琴韶)에서 원근의 선비들에게 학문을 강설했다. 영해(寧海)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문집 『갈암집(葛庵集)』과 중형 휘일(徽逸)과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등 많은 저서가 전한다.  ■참고문헌 : 仁祖․孝宗․肅宗實錄․國朝人物考


이숭일(李嵩逸) 1631(인조 9, 신미) ~ 1698(숙종 24, 무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 영양(英陽) 석보(石保) 출생. 진사(進士) 시명(時明)의 제4자. 외조는 장흥효(張興孝). 부덕(婦德)이 출중한 어머니, 그리고 형 휘일(徽逸)․현일(玄逸)이 있는 훌륭한 교육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학자로 대성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 연구와 심성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1689년(숙종 15)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의령현감(義寧縣監)에 제수되자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흔쾌히 부임하여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이불자(李佛子)’라 불렸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로 일생을 마쳤으며, 저서로 『항재집(恒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英陽郡誌․安東鄕校誌


 이재(李栽) 1657(효종 8, 정유) ~ 1730(영조 6, 경술)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庵). 판서(判書) 현일(玄逸)의 자. 중부(仲父) 휘일(徽逸)과 숙부(叔父) 숭일(嵩逸)에게 수학했다.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벼슬은 72살에 유일(遺逸)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가 제수된 것이 고작이었다. 1689년(숙종 15) 남인(南人) 정국의 요직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 출입을 시작했으며, 1694년 남인의 실각과 함께 아버지가 홍원(洪原)․종성(鐘城)․광양(光陽) 등지로 유배되자 배소(配所)와 본가를 오가며 봉양하였다. 1704년(숙종 30) 정시한(丁時翰)을 방문, 이기(理氣)․사칠(四七)과 건순오상(健順五常)․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등에 대해 토론하고 동의를 얻었다. 1723년(경종 3) 백부 휘일(徽逸)과 아버지 현일(玄逸) 형제가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를 교정하였다. 학문적 업적과 특징은 가학(家學)의 전통을 계승하여 이황(李滉)의 주리적(主理的)인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점에 있다. 그의 스승들이기도 한 아버지 3형제는 이황의 재전제자(再傳弟子)인 장흥효(張興孝)의 외손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는 아버지 현일의 이발(理發)․이동(理動)의 논리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 기(氣)가 작용하기 전에 이(理)만으로도 일용사위(日用事爲)의 체용(體用)이 갖추어짐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후학들이 이(理) 자체의 능동능정(能動能靜), 혹은 심즉리(心卽理)의 영남 주리설(主理說)을 완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만년에 부친 갈암(葛庵)이 후진에게 강학하던 임하(臨河) 금소(琴韶)와 오대(梧坮)에서 후진을 위해 강학을 했다. 또, 평생의 학구생활을 통해서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朱書節要)』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해서로서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주자대전(朱子大全)』의 간략한 주해서인 『주전집람(朱全集覽)』,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요긴한 말을 뽑아 적은 『주어요략(朱語要略)』 등을 저술했는데, 이는 주자의 저작과 어록(語錄)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의 이기․인성설(理氣仁性說)이 주자의 정론에 부합함을 밝히고, 나아가 영남학파가 주자의 정통임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저작에는 앞서 든 것 외에 『밀암선생문집』과 아버지의 유배길을 따라가며 적은 기행일기 『창구객일록(蒼狗客日錄)』, 현일의 상소문과 숙종의 비답(批答)을 모은 『성유록(聖諭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외손자 이상정(李象靖)․광정(光靖) 형제를 거쳐 유치명(柳致明) - 이진상(李震相) - 곽종석(郭鍾錫)에게 전수되었다. ■참고문헌 : 肅宗․景宗實錄․朝鮮圖書解題


이만(李槾) 1669(현종 10, 기유) ~ 1734(영조 10, 갑인)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재령(載寧). 자는 군직(君直). 호는 고재(顧齋). 융일(隆逸)의 자. 숙부 현일(玄逸)에게 배웠고, 『사서육경(四書六經)』『주자학(朱子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태극도설(太極圖說)』등을 깊이 연구했다. 향시(鄕試)에는 거듭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여러 번 실패한 후, 안동의 묵동(墨洞 : 現 臥龍面 浙江同)에 진곡정(振谷亭)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만년에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의 주선으로 학령(學令)을 새로 만드는 등 안동 지방의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733년 영남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에 의해, 학행이 높아 도내에서 두루 인정받는다는 평가와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 또, 조현명(趙顯命)․박문수(朴文秀)의 추천으로 1734년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예론(禮論)은 ‘옛 뜻을 지키면서도 시의(時宜)에 맞게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국방 등의 실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저서에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宣城誌․安東鄕土誌(宋志香)


이상정(李象靖) 1711(숙종 37, 신묘) ~1781(정종 5, 신축)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시호는 문경(文敬).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 태화(泰和)의 자로 일직(一直) 망호리(望湖里)에서 출생했다. 외조부 이재(李栽)의 문인으로 문장(文章)과 율려(律呂)․산수(算數)에 능통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증광문과에 급제합격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지평(持平)․연일현감(延을日縣監)울 거쳐 예조(禮曹)․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경상도 안동(安東)에서 학술을 강론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문인록(文人錄)에 오른 제자만도 273인이나 되며, 그의 학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영남 유림종사(儒林宗師)로 일컬음을 받았다. 남후(南後)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대산집(大山集)』『약중편제(約中編制)』『사칠설(四七說)』이 있고, 후세들이 편집․간행한 『대산실기(大山實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正祖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