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5. 17:33ㆍ잡주머니
내 고향 소개: 신동아 2001년 3월호에서 발췌
[한국의 명가 명택 6] | ||
의성김씨 종택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내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 오는 수난을 겪었다. 또 비범한 인물들을 배출한 내앞 종택의 산실(産室)은 이문열의 소설 소재로 등장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
||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 ||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종택을 찾아간다.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30리를 올라가다 보면 국도 연변 좌측에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그 기와집들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정신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강렬함이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직언(直言) 정신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기백을 가리킨다. 내앞 종택은 그 기백과 의리 때문에 조선시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와 종택 뜰에 말을 매는 일대 사건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안동지역 인근에서 회자되는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담은,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과도하게 명심한 나머지 자나깨나 모나지 않기 위해서 박박 기는 삶을 전부로 알고 있는 범부들의 처세 요령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원이 다른 처세이자 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에 전해오는 선비정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동문화의 특징을 간단하게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성싶다. |
||
명문 종택의 고장 | ||
한국의 문화지도에서 안동이라는 지방을 찾아보면 ‘양반문화’라는 코드가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양반 선비들의 문화가 현재까지도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 안동 일대다. |
||
‘택리지’의 4대 길지 | ||
그런가 하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년)은 조선에서 양반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경북 예안(禮安)의 퇴계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陶山)·하회·내앞·닭실을 꼽았다. |
||
경상도와 전라도 인심론 | ||
셋째, 인심을 보자. 오늘날까지도 인심은 매우 민감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중환은 평안도, 경상도만 빼놓고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인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고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인심이 사납거나 멍청하거나 간사한 지역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경상도 지역을 더욱 좁혀보면 안동 일대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
||
냇물가에서 살아가기 | ||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제시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네 가지 조건을 이상적으로 갖춘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계거(溪居)’다. 계거란 냇가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바닷가 옆에서 사는 해거(海居)보다는 강 옆에서 사는 강거(江居)가 낫고, 강거보다는 냇가에서 사는 계거를 더 높게 쳤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계거를 이상적인 입지조건으로 인식하였다. |
||
종택의 비보 풍수 | ||
의성김씨 내앞 종택의 풍수적인 여러 조건은 별로 흠잡을 것이 없으나, 한 가지 수구(水口)가 너무 넓게 터져 있다는 점이 거슬린다. 수구는 좌청룡, 우백호의 사이의 벌어진 공간으로 통상 이 공간을 통해 출입하는 물의 통로를 가리킨다. 이것이 너무 넓으면 마을이나 집터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수구가 엉성하고 열려 있으면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주장한다. |
||
오룡지가(五龍之家)의 명문 | ||
내앞 의성김씨들이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다. 일제 강점기에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에도 명택의 사례로 완사명월형에 자리잡은 오자등과택이 소개되고 있다.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
||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 ||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
내앞 집안의 독립투사들 | ||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무려 100여 명에 달하고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문명(文名)이 높은 집안이다. 그러나 이들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청계가 후손들에게 ‘벼슬은 정2품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
||
인물을 낳은 방 ‘산실(産室)’ | ||
풍수 좌향으로 계좌(癸坐)를 놓은 의성김씨 종택의 구조에서 필자의 흥미를 끄는 부분이 하나 있다. ‘산실(産室)’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방이다. 사랑채에서 안채가 거의 겹쳐지는 지점에 있는 방이다.
|
경북 안동 鶴峯 金誠一 종택 退溪학풍 이어온 항일독립운동 명문가 |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학봉 김성일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
||
최근 미국의 어느 동양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의 유교문화권 국가들 중에서 유교문화적 요소를 아직까지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 다음으로 일본이고 그 뒤를 중국이 따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인가? 충청이나 호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영남지방을 꼽을 수 있고, 더 범위를 좁히자면 안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의 존재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안동 일대에 이처럼 유교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퇴계 선생의 영향이 크다.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시킨 인물로 볼 수 있는 퇴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속의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이 꼽힌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퇴계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거의가 서애·학봉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양대 제자는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담당했던 셈이다. 또 학봉집안과 서애집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집안의 고택으로는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학봉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집안에 명성을 떨치는 종택이 두 채나 있는 셈이다. 서애집안도 그렇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의 집이었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은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다. 물론 한집안에 종택이 여러 개가 있는 예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살았던 대종택이 있고,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파종택(派宗宅, 소종택)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종택과 파종택 모두가 세간에 회자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학봉과 서애집안은 대종택과 파종택이 동등한 비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동 금계마을에 자리잡은 파종택인 학봉종택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그리고 종택이 지닌 품격으로나 안동을 대표하는 고택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선비다. 임금 앞에서도 할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
||
중앙선 철로가 바뀐 사연 | ||
학봉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중앙선 철도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 그것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
||
영남학풍의 교두보 대곡서원 | ||
서원과 누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원에서 토론했던 주제가 주로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누정의 주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두 지역의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성싶다.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사색의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고 물산(物産)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풍요로움과 함수관계가 있는 문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
||
퇴계학통의 正脈 | ||
학봉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퇴계학통의 정맥(正脈)을 학봉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봉이 한 번 받았고, 그 다음으로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이 다시 이어받았다. 퇴계학통을 한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은 영남사회에서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
||
왜경에게 무릎꿇린 치욕 | ||
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지녔던 권위는 대단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보자.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 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
||
파락호로 위장해 | ||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
||
千年不敗之地의 땅 검재 | ||
이제 학봉고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거기서 안동 시내쪽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의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金溪)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순수 우리말 표현은 ‘검재’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
||
조선후기의 상류층 주택 | ||
학봉종택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이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을 모두 합쳐 90여 칸, 2000평 대지의 규모다. |
||
양자로 종손 잇기 작전 | ||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전체 문중사람들이 100리나 떨어진 지례의 생가에 가서 간청하였다. 아예 생가 인근마을에 집을 한 채 얻어 10명씩 조를 짜 생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했다.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7개월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끈질긴 설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문중사람들은 보종을 위해서는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던 것이다. |
||
존중받는 종부의 권위 | ||
실제로 학봉종가에서 종부의 권위는 존중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종가 사당에 설차례를 지낸 후 이루어지는 신년 세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배는 종가 안채의 마루에서 이루어진다. 학봉의 후손들 가운데 나이든 연장자 100여 명이 종가에 찾아와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대개 60, 70대의 갓 쓴 노인들이, 그중에는 종부보다 20년 연상인 노인들도 나이에 상관없이 정초에는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물론 종부도 같이 절을 하는 맞세배 형식이지만, 100여 명의 갓을 쓴 노인들이 대청마루에 줄 맞추어 앉아서 종부 한 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학봉종택에서는 대대로 내려온다. |
||
학봉후손들의 종손 키우기 | ||
―집안사람들 이야기로는 보종계(保宗契)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보종계가 어떤 계입니까? |
||
1000명 이상 참여하는 집안 행사 | ||
5세 때 양자로 들어간 김종성의 장남은 김형호(金亨淏·21)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서울의 생부 집에서 살면서 양부(김종길)집을 왔다갔다 했지만, 대학만큼은 안동에 내려와 안동대학 국학부에 재학하고 있다. 일종의 종손수업을 위해서 서울이 아닌 안동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종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임을 알 수 있다.
|
'잡주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웅이 된 한국말 / 중앙일보 기사 外 (0) | 2013.07.25 |
---|---|
범고래의 돌고래 사냥 / 서울신문 기사 (0) | 2013.07.25 |
안동 남인 계열 명문가 셋 - 재령 이씨 문중 (0) | 2013.07.25 |
퇴계 가의 혼맥 (0) | 2013.07.25 |
아름다운 후진/ 아름다운 멈춤 / 아름다운 항의 (0) | 201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