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빠니샤드 / 인도철학사 임성택 교수

2013. 7. 27. 10:12경전 이야기

 

 

 

인도철학사 강의안 3

- 우빠니샤드 -

 

 

 1. 우빠니샤드의 의의

  우빠니샤드(Upaniṣad, 奧義書)는 베다에 대한 일련의 주석 문헌군을 일컫는 말로 슈루띠(Śruti) 즉 계시서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우빠니샤드란 Upa(근접하여) ni(가까이) ṣad(앉다)의 뜻으로 “가까이 앉는다”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가까이 앉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뜻으로부터 “스승으로부터 받은 것”, “비밀스럽고 신비한 가르침” 등으로도 확대되었다.  

 

  우빠니샤드는 대체로 108종이 있다고 말해진다. 그 중에서 상까라(Śaṅkara, A.D. 8세기)가 주석한 10여종이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1) 이들 주요 우빠니샤드는 대략 B.C. 8-6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대를 매기는 것은 쉽지 않다. 초기의 것들은 불교가 일어나기 이전의 시대에 속하지만 어떤 것들은 붓다가 출현한 이후에 성립된 것이 분명하다. 특히 상까라가 주석했던 몇몇 우빠니샤드는 불교가 발생한 이후인 B.C. 400년 혹은 B.C. 300년대에 속한다.

 

  흔히 우빠니샤드는 베단따(Veda-anta) 즉 베다의 끝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우빠니샤드가 베다의 궁극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빠니샤드는 이후 발생한 여러 종파 혹은 학파들이 의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불교를 포함하여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유형의 종교적․철학적 가르침은 우빠니샤드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다와 브라흐마나의 찬가들이 종교적 실천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았던 반면에, 우빠니샤드는 본격적인 철학적 사색과 거기에서 얻어진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우빠니샤드는 그 이전 시대에 논의되었던 단편적 사상들을 종합․지양하는 가운데 실재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보여준다. 후대의 인도철학사에 미친 영향력에 있어서 우빠니샤드에 비견할 만한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빠니샤드는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체계적인 철학이 아니며 한 시대에 귀속시킬 수 있는 문헌도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관심은 뚜렷하게 드러나며 목적의 통일성 역시 분명하다. 즉 어떤 고정된 철학 이론이나 독단적인 신학체계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바탕으로 지난 시대의 정신적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고, 그러한 속에서 내면의 평온과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 대표적인 2가지 해석

  우빠니샤드가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단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양한 주석가들이 출현하여 그들 자신의 견해를 우빠니샤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으며 또한 거기에서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전거를 구했다. 우빠니샤드의 내용적 방대함과 함축적 특성은 후대의 주석가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종교적 취향에 따라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까라(Śaṅkara, A.D. 8세기)의 불이론(不二論, advaita)을 통해 우빠니사드에 접근해 들어간다. 상까라에 따르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은 변화하는 현상계의 밑바닥에 놓인 존재로서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는다. 더불어 개개인의 내면에 자리하는 주체적 자아로서의 아뜨만 역시 불변의 실재이다. 불이론 즉 아드바이따(Advaita)란 바로 이 2가지 실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까라는 인간의 속박과 고통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무지는 실재에 대한 통찰 즉 梵我一如의 인식을 통해 극복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실재에 대한 통찰이 치유적 성격을 지닌다고 믿었다. 태어남과 죽음은 마야(幻, māya)와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가 극복될 때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을 넘어선 초월적 삶을 누리게 된다. 해탈이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성취되는 梵我一如의 지고한 의식상태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헌신의 가르침이 우빠니샤드에서 나오는 논리적 필연임에도 불구하고 상까라가 이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불만을 제기한다. 특히 라마누자(Rāmānuja, AD.11세기)는 상까라의 불이론이 인간과 신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인간과 신 사이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보전시켜 주는 방식으로 우빠니샤드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몰입하였다.  

 

  라마누자는 브라흐만을 인격적 유일신인 이슈와라(Īśvara)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우주의 창조주이자 유지자이며 파괴자인 신의 일부로 존재한다. 실재의 경험이란 개체적 자아가 스스로의 의식을 지닌 채 궁극적 실재와 단일성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상태는 수행자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이슈와라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라마누자에게서 신과 세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śarīri-śarira-samvandha)로 규정된다. 한편 신과 인간의 관계는 주관자(ādhāra)와 피주관자(ādheya), 주인(śeṣin)과 종(śeṣa), 실체(viśeṣya)와 속성(viśeṣaṇa), 본질(prakārī)과 양태(prakāra), 전체(aṁśī)와 부분(aṁśsa)의 관계로 설명된다.

 

  라마누자에 따르면 궁극의 해탈을 위해 인간은 신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신성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을 얻게 되며, 또한 무지와 이기심과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해탈을 성취한 자아는 그 자신의 개체성과 의식을 보존하면서 신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최고의 희열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

 

  이상의 2가지 사상은 우빠니샤드에 대한 대조적인 해석의 전형적 사례이다. 이들 양자는 베단따(Veda-anta)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중세 이후 오늘날에까지 인도의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현재 힌두교도의 80%는 이 베단따의 추종자들로 간주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빠니샤드의 영향력이 과연 어떠한지 다시 한번 가름해 볼 수 있다.

 

 3. 우빠니샤드의 주요 내용

  * 일원적 사고의 확립

  베다 문헌에 묘사되었던 특수한 성격의 신들은 현상세계에 머물러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경과하면서 베다와 브라흐마나 문헌에는 세계의 통일적 원리에 대한 사유가 움트기 시작한다. 우주적 질서를 의미하는 리따(Ṛta) 개념이라든가 모든 신들이 하나로 엮어내는 단일신교적 관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사고 경향은 우빠니샤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유한한 현상세계의 신들에 대해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철학적 사유의 목표는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단 하나의 근원적 실재였다. 그것은 브라흐마나 문헌의 브라흐만(Brahman) 개념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격성이 배제된 원리로서의 브라흐만 개념은 궁극의 실재가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고의 진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梵我一如(tad tvam asi, aham brahma asmi)’로 표현되는 우빠니샤드의 일원론은 이러한 과정을 걸쳐 확립된 고대 인도인의 형이상학적 정열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야쟈발끼야여, 신은 몇이오?  ..... (중략) .....

  삼백 셋이오. 그리고 삼천 셋이오.  ...... (중략) .....

  그대는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럼 더 정확하게 몇인지 아시오?  ...... (중략) .....

  하나요.

  아주 훌륭하오.

  그러면 삼백 셋의 신들과 삼천 셋의 신들은 도대체 어떤 신들을 말하는 것이오?  

   ...... (중략) .....

  그 신들은 밖으로 표출된 모습을 말하는 것일 뿐이오.

   ..... (중략) .....

  그것은 지혜와 환희의 브라흐만,

  그가 바로 제주(祭主)의 궁극적인 목적지요,

  그가 바로 그를 아는 자의 안식처라오. (Bṛhadāraṇyaka-Upa., iii.9.1.-28.)

 

  그 잡히지 않으며

  태어난 가문이 없고

  계급도 없으며

  눈, 귀도 없으며

  손발도 없이

  영원하며 ....... (중략) .....

  어디든 존재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그를

  현명한 사람은 어디에서든 보리라. (Muṇḍaka-Upa., i.1.6.)

 

 * 주체적 관점의 부각  

  우빠니샤드 문헌이 이루어 낸 철학적 업적은 브라흐만에 대한 우주론적인 사변을 넘어 궁극의 실재를 주체적 관점에서 파악했다는 점이다. 즉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이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의 실재라는 관점 아래에서 탐색해 들어갔다. 이와 같은 탐구의 방향 전환은 종래의 외향적 우주론적 사변으로부터 내향적인 자기 성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각된 인간의 참된 자아를 우빠니샤드에서는 아뜨만(Ātman)이라고 불렀다.2)    

 

  우빠니샤드에 이르러 비로소 주목되기 시작한 참된 자아, 즉 아뜨만은 어떠한 차별성이나 개별성도 내용으로 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자아이다. 또한 이 아트만은 다름 아닌 브라흐만으로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아뜨만에 대한 사유는 외향적인 우주론적 사변과 내향적인 자기성찰이 궁극에 이르러 하나로 회통되는 드라마틱한 과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즉 브라흐만은 우주의 아트만이요 아트만은 인간에 내재하는 있는 브라흐만으로 양자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개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적 존재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바로 이러한 ‘梵我一如(tad tvam asi, aham brahma asmi)’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최고의 지혜(jñāna)이다.

 

    진실로 이 세계는 브라흐만이니,

    세상은 브라흐만에서부터 생겨나고,

    다시 그 브라흐만으로 돌아가며,

    그 안에서 움직이노라.

      ........ (중략) .....

    이것은 심장 속에 있는 자아로서,

    [작기로 말할 것 같으면] 쌀알보다 작고

    좁쌀보다 작으며 겨자씨보다도 작다.

    이것은 내 심장 속에 있는 나의 자아로서,

    [크기로 말할 것 같으면] 대지보다도 크고

    허공보다도 크고 하늘보다도 크며

    이들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도 크다

      ...... (중략) .....

    그 존재가 바로 나의 아뜨만,

    내 중심에 머무는 자,

    바로 브라흐만이다 (Chāndogya-Upa., iii.14.1.-4.)

 

  * 욕구 초월적 경향

  베다의 종교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제사 의례와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점은 그들의 종교 관념이 고차적인 형태로 승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들의 사고가 기쁨으로 가득 찬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베다의 사유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낙천적 경향을 띠었다. 베다인에게서 신은 두려움의 대상임과 동시에 믿음과 의지의 대상이었고, 지상에서의 삶은 신의 은혜로 베풀어진 감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빠니샤드 시대에 접어들면서 부각된 영적인 삶에 대한 갈망은 근심과 걱정이 없는 경박한 즐거움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우빠니샤드에서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도덕적 변화와 초월적 삶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본다. 현세의 삶은 자기 완성의 수단이 되며 세속적인 즐거움의 추구는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한다. 우빠니샤드의 성인들은 세속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수행되는 제사 의례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예컨대 『까타 우빠니샤드(Kaṭha-Upaniṣad)』에는 “재물에 눈이 어두운 미혹한 이에게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있을 뿐 다른 세상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의 지배 아래에 떨어질 것이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우빠니샤드의 금욕주의적․염세적 태도를 엿보게 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즐거움의 추구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을 넘어선 영원한 세계야말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우빠니샤드에서는 형식적인 제사가 인간에게 해탈을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해탈은 오로지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에 의거한 참다운 종교적 삶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완성이란 바깥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빠니샤드는 제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들에 따르면 제식은 인간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삶 자체가 곧 제사이다.

 

  참된 제사는 곧 사람이다.

  사람이 태어난 후 첫 24년은 아침의 제사와 같다.   .

   ...... (중략) .......

  그 다음의 44년은 중천의 제사이다.  

    ....... (중략) .......

  그 다음의 48년은 저녁의 제사이다.  

    ....... (중략) .......

  사람이 먹고 마시고 기분 좋게 느끼는 것,

  이것은 우빠나다(upasada) 제사 의식과 같다.

  사람이 웃고 먹고 성적인 결합을 행할 때,

  그것은 찬양이요,

  찬양을 기술한 성전과 같다.

  고행․시주․예배․불살생․진리를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가 제사에 바치는 헌금(ḍakṣina)이다. (Chāndogya-Upa., iii.16.1.-17.4.)

 

 * 자아에 대한 분석의 경향

  브라흐만과 아뜨만 양자는 현상적 존재의 이면에 자리하는 불변의 초월적 실재이다. 이들은 감각의 눈을 통해서는 결코 지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범아일여 즉 브라흐만과 아뜨만이 동일하다는 깨달음은 단순한 감각 영역의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경문은 ‘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집요한 반성적 사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비로소 자아와 우주의 본질에 관한 통합적 사유가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다가갈 수도 없고,

   말로도 들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것,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실로 그것은 앎과 알지 못함을 초월하니,

   우리는 그것을 오로지 선인들로부터 들었을 뿐이다.(Kena-Upaniṣad I.3.-4.)

  이러한 사유의 귀결로서 따이띠리야우빠니샤드(Taitirīya-Upaniṣad, ii.2.1.-7.1.)에서는 자아를 5가지 단계로 나누어 분석한다. 이것을 빤쨔꼬샤와다(Pañcakośavāda, 五藏說)라고 부는데, 이것은 자아의 상태를 육체적 차원에서부터 궁극적 차원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이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변화하는 현상적 자아 안에서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 머무는 궁극의 실재에 관한 통합적 조망을 얻게 된다.  

 

  ① 안나마야꼬샤(annamayakośa); 물질(food, material)로 이루어진 자아를 말한다. 음식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음식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생겨나서는 음식에 의해 살아가고, 다시 생이 끝날 때에는 음식으로 돌아간다.” 이 문구는 가장 낮은 차원의 자아로서 육신 혹은 그것을 지탱해 주는 음식이 바로 자아라고 여기는 유물론적인 자아관을 반영한다.

 

  ② 쁘라나마야꼬샤(prāṇamayakośa); 호흡(breath)은 만물에 생기를 부여하는 원천 즉 목숨(life)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로 생명이 자아라는 관점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자아는 앞에서 언급한 음식으로 이루어진 자아 속에 머문다. 음식을 먹는 까닭은 곧 목숨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③ 마노마야꼬샤(manasmayakośa); 세 번째는 마음(mind)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이것은 마음이 바로 자아라는 관점으로, 이것에 따른다면 마음은 목숨보다 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호흡으로 이루어진 자아 속에 머물고 있다.  

 

  ④ 비즈냐나마야꼬샤(vijñānamayakośa); 네 번째는 지성(understanding)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이는 정신 현상 속에 내재하는 지성의 주체가 바로 자아라는 관점으로, 이 역시 앞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 속에 머물고 있다.

 

  ⑤ 아난다마야꼬샤(ānandamayakośa); 다섯 번째는 환희(Bliss)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이것은 지성을 초월한 자아로서 지성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또한 그 안에 어떠한 또 다른 자아도 갖지 않는 궁극적인 존재(sat)이다. 이것은 지성과 마음 그리고 생명과 육신의 토대이다. 이것에 대한 앎은 그 무엇에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 진리(cit)이며, 존재 자체의 충만한 환희(ānanda)이다.

 

  한편 만두끼야(Māṇḍūkya-Upaniṣad, 2-7) 등에서는 자아를 일련의 의식적 상태에 배대하여 4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즉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주체적 자아인 아뜨만은 동일한 실재이지만, 현상 세계에 관여된 한에서 아뜨만은 4가지 다른 상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의식 상태의 각성위(Jāgarita-sthāna, 覺醒位), 꿈꾸는 상태의 몽면위(Svapna-sthāna, 夢面位), 꿈도 없는 상태의 숙면위(Suṣupta-sthāna, 宿面位), 모든 차별적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제사위(Caturtha-sthāna, 第四位)가 그것이다.

 

 ① Jāgarita-sthāna(覺醒位); 일상의 깨어 있는 상태에서 거친 경험을 통해 확인하곤 하는 자아가 이 단계에 속한다. 이 상태에서는 육신에 대한 의존이 현저하며 자아는 외계 대상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인식한다. 이 단계의 의식은 자신과 타인의 구분을 전제로 성립되는 약육강식의 현실 세계를 반영한다.  

 

  ② Svapna-sthāna(夢面位); 꿈꾸는 의식 상태로서의 자아가 이 단계에 속한다. 이 단계에서의 자아는 육신에 한정되지 않으며 꿈이라는 미세한 체험의 주체가 된다. 이 경지는 육신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태로 언급되기도 한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며 내면적인 욕구나 의지가 가식 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③ Suṣupta-sthāna(宿面位); 온갖 차별상이 완전히 사라진 통일적 의식의 상태로서 오로지 자아 그 자체만이 존재할 뿐인 경지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일체의 경험이 종식된 상태이기 때문에 일상의 인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아만이 홀로 빛나는 상태로 묘사되기도 한다.  

 

  ④ Caturtha-sthāna(第四位); 개별적 자아마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서 차별적인 세계가 한데 융합된 영원․평화․지복의 상태이다. 이 단계는 일상적 의식을 완전히 넘어선 초월적 경지이다. 이 상태는 어떠한 차별적 징표도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만 ‘네 번째 단계’ 즉 ‘뚜리야(turīya)’라고 부른다.

 

 * 실재에 대한 체험과 직관의 강조

 우빠니샤드는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지성(buddhi, understanding)이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표상으로 전환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께나우빠니샤드(Kena-Upaniṣad)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은 거기에 이르지 못하며, 언설이나 마음도 또한 닿지 못한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이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른다.(ii.3.)” 인간의 지성은 주․객에 대한 구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실재를 파악하기에 적절한 인식 수단이 되지 못한다.

 

  아뜨만은 객관적으로 나타날 수 없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것을 비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인식 주관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브리하다라냐까우빠니샤드(Bṛhadāraṇyaka-Upaniṣad)에는 “보이지 않으나 보는 것, 들리지 않으나 듣는 것, 지각되지 않으나 지각하는 것, 알려지지 않으나 아는 것(iii.7.23.)”이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인식의 주체로서의 아뜨만은 결코 대상화되지 않으며, 특히 자만과 자의식에 오염된 지성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까타우빠니샤드(katha-Upaniṣad)에서는 “학식에 의하여 아뜨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며, 비범한 재능이나 책에서 배우는 지식에 의해 그것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ii.23.)”고 언급한다. 우리는 사물의 차별적 모습에 근거한 지성을 뛰어 넘을 때라야 비로소 궁극의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 즉 챤도기야우빠니샤드(Chāndogya-Upaniṣad)에서 기술하듯이, “들리지 않는 자가 들리게 되고, 지각되지 않는 자가 지각되며, 알려지지 않는 자가 알려지게 되는 것(vi.13.)”을 체험할 수 있다.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차원의 능력이 요구된다. 요가는 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길이다. 지견(darśana)은 해탈의 원인이 아니며,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힐 때 비로소 실재를 파악하는 지혜(prajñā, viveka-khyātir)가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의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을 넘어선 체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 후대의 학파들에 끼친 영향

  우빠니샤드는 후대의 힌두 육파철학에서 구체화 한 사상들의 단초를 제공한다. 세계의 기원과 발생을 브라흐만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보는 견해(轉變說, pariṇāmavāda), 브라흐만이 가상적으로 드러나 보인 것일 뿐이라는 견해(假現說, vivartavādā) 등이 그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브라흐만이 모든 것의 배후에 혹은 그 속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한편 후자에서는 현상의 모든 것이 환영에 불과하며 오로지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태초에 세상은 Sat 그뿐이었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략) .......

   그것이 생각하였다.

   “내가 다수가 되리라. 내가 번식하리라.”

   그것은 곧 불을 유출하였다.

   그 불이 생각하였다.

   “내가 다수가 되리라. 내가 번식하리라.”

   그 불은 물을 유출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땀흘릴 때에는 불로부터 물이 낳아지는 것이다.

   그 물이 생각하였다.

   “내가 다수가 되리라. 내가 번식하리라.”

   그것은 곧 음식을 유출하였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먹을 것이 많아지는 것이다...... (중략) .......

   다시 그러한 Sat가 생각하였다.

   “내가 이들 세 가지 존재에 생명의 자아로서 들어가 명칭과 형태로 전개되리라. 이 세 가지로써 삼중의 복합체로 만들어지리라.”

   그리하여 그 존재는 그들 세 가지에 생명의 자아로서 들어와 이 세상의 온갖 명칭과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삼중의 복합체를 만들었도다.”  (Chāndogya-Upaniṣad vi.2.1.-3.3.)

 

  인용된 경문은 세계의 기원과 발생을 브라흐만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보는 전변설(pariṇāmavāda)의 전형이 된다. 이러한 사고는 현상세계의 전개 과정과 현실의 차별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데에 용이한 점이 인정된다. 그러나 궁극의 실재에 대한 즉각적인 체험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난점을 지닌다. 후대의 정통 힌두 학파들 중에서 상키야(Sāṇkhya), 요가(Yoga),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sika) 학파가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였다.

 

  한편 이와 대조되는 가현설(vivartavādā)에 따르면, 세계는 브라흐만이라는 유일한 실재의 환영(幻, māya)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실세계의 차별적 모습은 그러한 실제가 가상적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무지를 제거하여 환영을 걷어내고 나면 언제든지 궁극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래의 경구는 그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상까라(Śaṅkara, A.D. 8세기)를 필두로 하는 베단따(Advaita-Vedānta) 학파가 이 입장에 동조하였다.

 

   총명한 아들아, 동쪽으로 흐르는 강들은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흐르는 강들은 서쪽으로 가니,

   그들은 바다에서 나와서 바다 그 자체로 가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들은 개별적 의식을 가지고서

   ‘나는 이 강’ ‘나는 저 강’이라는 의식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존재로부터 나온 이 세상 모든 것도

   ‘우리가 그 존재로부터 나왔다’고 깨닫지 못한다...... (중략) .......

   그 아주 미세한 존재, 그것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아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곧 진리이다. 그 존재가 곧 아뜨만이다.

   그것은 바로 너이다.   (Chāndogya-Upaniṣad vi.10.1.-3.)

 

5. 우빠니샤드의 윤리적 지표

 우빠니샤드의 윤리적 지표는 신과의 합일을 염두에 둔다. 인간은 자기 속에 내재한 무한자를 느끼며 그 속에서 안식을 구하려 한다. “새들이 자신의 둥지를 튼 나무에 안식하듯이, 모두는 최고의 아뜨만 속에서 안식하느니라. (Praśna-Upaniṣad, vi.7)”이라든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브라흐만을 알게 되면 그는 브라흐만 그 자체가 된다.....   죄악을 건너고, 아뜨만과 아뜨만이 아닌 것이 얽힌 마음의 매듭을 풀고서, 불멸을 얻는다(Muṇḍaka-Upaniṣad, iii.2.9.)”는 구절은 우빠니샤드의 궁극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준다.

 

  우빠니샤드의 윤리적 이상은 최고아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 최고아란 이기심과 아집으로 가득한 경험적인 자아가 아니라, 모든 속박과 이기적인 모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의 심원한 본성을 말한다. 동물적인 자아의 욕망과 정념, 이기심에 뿌리를 둔 온갖 바람과 야망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경박하고 천박한 차원에 머물게 한다. 이들은 삶을 속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최고아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감각과 본능을 제어하고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아뜨만을 마차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육신을 마차로 알라.

    지성을 마부로 알고 마음을 고삐로 알라.

    현인들은 감관을 말이라 하고, 그들의 대상을 길이라 하며,  

    아뜨만을 일컬어 마음[의 고삐]에 결합된

    감관을 누리는 자라고 말한다.

    만일 지성인 마부가 마차를 제대로 몰지 못하여

    마음인 고삐가 불안정하게 되면

    그 조정을 받는 감각들은

    각기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지성인 마부가

    마차를 잘 몰아

    항상 마음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그의 말인 감각들은

    마부가 길을 잘 들인 말처럼

    항상 절도 있게 된다.

    ...... (중략).....

    그는 목적지에 도달하여

    이 고통스러운 탄생과 죽음의 쳇바퀴 속으로

    다시 내려오지 않게 된다. (katha-Upaniṣad, i.3.3-9.)

   

 6. 우빠니샤드에 대한 평가

  우빠니샤드는 현상 세계의 상대적 실재성 및 궁극적 존재의 유일성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는 원리에 대한 통찰은 우빠니샤드의 철학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약점으로 지적된다. 우빠니샤드는 통합적 안목에서 철학의 중심 개념들에 접근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빠니샤드의 종교 관념은 특정한 숭배 의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한 관대한 태도는 구시대의 미신적 관습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우빠니샤드는 일체의 현상을 통합주의적 안목에서 바라보았고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브라흐마나의 제식주의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따라서 우빠니샤드에는 고유의 금욕주의적․초월주의적 색채도 존재하지만 구례의 관행에 대한 타협의 경향도 여전히 나타난다.  

 

  우빠니샤드는 보편적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했으며 사성제 계급제도를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명확한 문제의식의 결여로 인해 그것을 일부 수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우빠니샤드는 외적인 권위와 형식주의의 속박에서 개인을 해방시키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며 오히려 전통적인 가치를 고착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한 측면이 없지 않다.

 

  우빠니샤드에는 상호 모순된 관념들이 혼재한다. 베다 이래의 다신론적 경향과 고유의 일원론적 경향, 금욕주의와 제식주의, 보편적 구원의 이상과 카스트 제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보수적 입장에 의한 종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소들은 계급적 지배 질서를 더욱 강화하고 피지배 계급의 속박을 굳히는 사태를 야기했다. 바로 이점은 이후 전개된 유물론․자이나․불교 등의 격심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참고문헌

  권오민 지음, 『인도철학과 불교』, 서울: 민족사, 2004.

  길희성 지음, 『인도철학사』, 서울: 민음사, 1989.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 총4권, 서울: 한길사, 1999.

  이재숙 옮김, 『우파니샤드』 총2권, 서울: 한길사, 1996.

  Surendranath Dasgupta,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1-5,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S. Radhakrishnan,  The Principal Upanisads,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68.


1) 예컨대 케나(Kena), 쁘라슈나(Praśna), 문다까(Muṇḍaka), 따이띠리야(Taitirīya), 아이따레야(Aitareya), 브리하드아란야까(Bṛhadāraṇyaka), 찬도기야(Chāndogya) 우빠니샤드 등이 거기에 속한다.

2) 아트만(我, ātman, √an, 숨을 쉬다, √at, 움직이다, √vā, 불다); 자아,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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