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淵堂 金昌翕과 설악 永矢庵

2013. 5. 14. 17:20산 이야기

 

 

 

 

    경종 6, 2(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 221(병자)

세제 시강원 진선 김창흡의 졸기

 

세제 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 김창흡(金昌翕)이 졸()하였다.

김창흡의 자()는 자익(子益)이고, ()는 삼연(三淵)인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젊은 날 협기(俠氣)를 드날렸으며 약관(弱冠)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일찍이 장자(莊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황연(怳然)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山水) 사이에 방랑하며 고악부(古樂府)의 시도(詩道)를 창도(唱導)하여 중흥조(中興祖)가 되었다.

또 선가(仙家불가(佛家)에 탐닉하여 오랫동안 스스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가화(家禍)를 당하자 비로소 그 형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학문에 종사하니, 그 견해가 때로 크게 뛰어났다.

만년에는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스스로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르른 곳이라면 또한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괴격(乖激)한 데 가까와 무릇 시론(時論)에 대하여 혹은 팔을 걷어붙이고 장서(長書)를 지어 당로(當路)를 알척(訐斥 흠을 들추어내어 배척함)하되, 말이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의 선조(先祖)를 범하여 자못 처사(處士)로서 의논을 함부로 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헌직(憲職)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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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 3, 2(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 221(병자)

처사 김창흡의 졸기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이 졸()하였다.

김창흡의 자()는 자익(子益)인데,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지기(志氣)가 탁월하여 옛 가시(歌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경(詩經)3백 편에서부터 아래로 성당(盛唐)의 이백(李白두보(杜甫)와 송()나라·()나라의 제가(諸家)에 이르기까지 절중(折中)하지 않은 것이 없어 우뚝하게 가시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가화(家禍 숙종 15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 되었던 일)를 당하고서부터 상복(喪服)을 벗었어도 거적자리에서 자면서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는데, 갑술년( 1694 숙종 20)에 신복(伸復)되자 비로소 상식(常食)을 회복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외침(外寢)에서 거처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성리학(性理學)을 즐겨 읽어서 만년(晩年)에 다시 깊고도 높은 조예(造詣)를 이룩했다.

설악산(雪嶽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신(筵臣)의 말에, ‘그의 높은 풍도(風度)와 절조(節操)는 넉넉히 나약(懦弱)한 사람에게 뜻을 확립시키고, 재리(財利)를 탐내는 자의 마음을 청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있었다.

숙종(肅宗)이 임조(臨朝)하여 오랫동안 차탄(嗟歎)하던 끝에 여러 차례 집의·진선으로 승천(陞遷)시켰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동교(東郊)에서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품질(品秩)을 정경(正卿)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고 내렸다.

 

 

 

 

三淵堂
 

 

김광억 (서울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장)

 

 

편집자 주: 이 글은 2011년 4월 30일에 서울 수운회관에서 개최되었던 안동김씨 대종중 년차 총회에서 행한 기념강연의 내용이다.

 

 

 

    오늘 우리가 대종중이란 이름을 내걸고 이 자리에 모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기의 가까운 조상으로 따지면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조금만 더 길고 넓은 안목으로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모두 한 조상의 자손이요 한 집 식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까닭은 또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전통을 공유하는 이른바 문화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김문의 문화의 핵심 그리고 문화의 정체를 찾아보려는 것이 오늘 강연의 목적이고 그것을 청백에서 찾아보는 것이 그 주제이다.


 

 

    문정공 청음선생은 <고려조에 세운 공은 이미 역사에 실려 있는 바 그 휘황찬란함에 있어서 우리 시조께서 으뜸이요 장씨와 권씨는 그에 비견할 바가 못 된다.

여기에 덧붙여 또한 뛰어난 일이 있으니 곧 우리 김문은 청백의 전통을 팔백년이나 이어오는 일이다(麗代論功在史編煌煌吾祖冠張權一皆無礪還餘事淸白傳家八百年)>라고 읊었다.

 

그는 김문의 전통을 특히 <淸白傳家八百年>이라 하며 자랑스러워 하였다.

청백이란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오직 청렴결백하게 일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청백리 집안은 청빈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게 추구하지 않는 자세이며 특히 의롭지 아니한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거부하는 것이며 의롭지 아니한 방법으로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취하는 것을 경계함을 의미한다.

 

 

    대개 권력과 재물을 취하는 데에는 의롭지 아니한 것이 많고 또한 의롭지 아니한 방법이 개입되기가 쉽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결국 청백은 정정당당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청백은 주자가 강조하였고 중국인의 가정에도 잘 쓰는 구절이다.

그러나 청백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흔한 일도 아니다. 그만큼 그 실천은 어렵다.

 

 

    시조 태사공은 한 고을의 우두머리로서 위로는 국가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이끌며 안동을 충절의 고장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그 분의 청백은 사사로운 감정과 욕심을 넘어서 공익과 공공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철학으로서의 청백이었다.

그때 확립된 문화전통이 천년을 내려오면서 안동을 충절의 고장이 되게 한 것이다.

그렇하기 때문에 청음의 시대에는 청백팔백년이라 하였지만 순조조에 와서는 세간에서는 안동김문을 천년세족(千年世族)이라 칭하였다.

 

청백의 정신은 세조조에 와서 보백당이라고 부르는 정헌공(김계행)에 의하여 전형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사성을 지낸 이 분의 청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특히 당시 국왕의 총애와 존경을 받으며 국사의 자리에 있었던 조카인 학조대사를 벌 준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보백당은 성주향교의 교수라는 한직에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학조대사가 숙부를 뵙고자 성주목에 들렀다. 목사는 대사께서 움직이실 것 없다하고는 사람을 시켜서 보백당 더러 관아로 오라고 전갈을 하였다.

 

    보백당이 거절하자 학조대사는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향교로 숙부를 찾아뵙고 사죄를 청하였다.

그리고 존경하는 숙부께서 한직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숙부에게 어떤 자리를 국왕에게 천거를 할까하고 여쭈었다.

숙부는 대답 대신에 조카인 학조대사를 바지를 걷어 올리게 한 다음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때렸다.

“너는 세 가지 죄를 범했다. 하나는 조카가 되어 숙부를 오라고 한 것이 죄요

둘째는 중이 된 주제에 공무를 담당하는 관아에 들어가 관폐를 끼친 것이 죄이며

세 번째로는 권력으로써 관직을 농락하려 했으니 그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이야기로 보백당의 엄격함과 높은 도덕적 자세를 칭송하지만 우리는 학조대사의 태도 역시 눈여겨 보아야 한다.

국가의 자리에 있는 고승인 조카를 때리는 보백당이나 숙부의 가르침을 깊이 뉘우치며 벌을 받는 학조 역시 비범한 인물인 것이다.

 

 

    보백당은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쳐서 대사성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을 간하다 파직되어 소산 향리로 돌아와 집에 보백당이라는 당호를 써서 걸어 놓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말씀인 <내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은 오직 청백이니라(吾家無寶物寶物唯淸白)>하였다.

 

    말년에 묵계로 터를 옮겨 거기서 운명을 하였는데 임종 시에 소산에 있던 종손자인 삼당공(김영)을 불러서 유계로서 <가전청백 세수공근 효우동목(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을 당부하였다.

참고로 보백당을 향사하는 묵계서원에는 응계(옥고)를 함께 모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세종조의 유일한 청백리였기 때문이다.

그 만큼 보백당의 후손과 안동 유림에서는 청백을 중시하였다.


 

    보백당이 남긴 청백의 철학은 종손자인 삼당에 의하여 전해졌다.

삼당은 조부인 판관공(김계권)을 따라 아우인 서윤공(김번)과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

오늘날 경복궁 서쪽 담을 낀 동네 일대를 장의동이라 하였는데 이를 대대로 터를 삼았기 때문에 흔히 이들 형제의 후예를 장동파라고 부른다.

 

    삼당은 중종17년(1522)에 인왕산의 청풍계곡에 조촐한 초가 정자를 짓고 태고정(上天之理太古之道.漢書/ 西山靜似太古. 唐子)이라 이름하고 주위에는 세 개의 작은 연못을 파고 각각 척금(滌襟: 옷깃 즉 가슴/마음을 씻다), 조심(照心:마음을 비추어 보다), 함벽(涵碧:푸르름을 담그다)이라 이름짓고 이를 즐겼으니 그 내면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삼당이라 자호한 것도 이 세 연못을 이름이다.

관직과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그윽하고 맑은 자연과 준일한 선비들을 벗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10살이나 위인 농암 이현보와는 사마시 동방급제를 하였는데 그 연고로 당대 영남 8대문장가로 칭송받으면서 함께 놀았다.

 

    그의 손자 창균(김기보)은 조모를 모시고 소산으로 돌아와서 퇴계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청송(권호문)과 교유하며 영남8대문장가로서 이름을 높였는데 소산을 안동김문의 중심기지로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후 태고정과 청풍계는 선원이 물려받아 가꾸었고 안동김씨 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들에게 청백의 의미를 감상하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공간으로 존재해 왔다.

 

    우암이 쓴 대명일월(大明日月)과 주희의 말씀인 백세청풍(百世淸風)이 청풍대 바위에 각자되어 있었는데 대명일월은 일제시에 훼손되었고 백세청풍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정주영씨 저택의 터가 되었다.

 


 

 


    삼당의 막내 아우 진사 김순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조정랑과 경상도사를 지냈는데 명종 6년에 편찬한 <국조보감>에 염근한 인물로 초계된 주세붕, 이준경, 이황 등 33명 중에 13번째로 거론된 인물이다.

지금 병산서원 가는 길목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벽 위에 어락정을 짓고 노니는 것을 즐겼다.

 

    그 역시 종조부 보백당의 유훈을 받들어 자식들에게도 청백의 선비전통을 지키도록 교육하였다.

차남 눌재(김생명)는 마곡서원에 봉향되었고 손자 학산(김인상)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사로잡혀 얼굴 가죽을 벗기는 등 차마 묘사하기 어려운 참혹한 고문으로 죽는 순간까지도 의연하게 왜장을 꾸짖었다.


 

    삼당공의 종증손 즉 서윤공의 증손자인 청음(김상헌)은 청백의 정신을 역사에 가장 뚜렷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서윤공의 셋째 손자 극효는 상용 상헌 상관 상복 등의 자식을 두었는데 청백의 기풍으로 훈육을 하였다.

후에 청음은 백부인 김대효에게 입양되었다.

형인 선원(김상용)이 온후하고 다른 의견들을 조정하고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는 행정가로서의 소질이 더 강한 반면 청음은 강직하고 시비가 분명한 학자적 성격이 더 강하였던 것 같다.

 

    청음은 한결같은 곧은 자세로 유명하였다.

집안에서 그 부친과 형들이 농담을 하다가도 청음이 집안에 들어오면 모두들 자세를 고쳐 앉았다고 한다. 그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영의정인 추탄 오윤겸은 청음이 대사헌이 되었다면 그 누구도 탄핵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큰 기대를 표하였고, 한 왕족은 화려하게 지었던 정자의 원기둥을 당장에 도끼로 모나게 깎았다.

그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옳지 않은 언행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질정을 요구하였고 그 자세와 입장이 한결같았으므로 임금 조차 청음이 무슨 말을 하는가에 신경을 쓸 정도였다.


 

    청음은 서인에 속했지만 광해군의 북인정권 하에서 북인이 남인 학자 회재(이언적)와 퇴계(이황)를 문묘에서 삭제하려는 회퇴변척(晦退辨斥)을 주도하자 이에 대항하여 과감히 그 부당성을 강변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또한 인목대비를 폐모서인하려는 광해군의 획책을 저지하다가 인목대비의 오빠인 김제남에게 역적모의의 음모가 덮어 씌어지자 그와 사돈관계에 있었던 청음은 삭탈관작을 당하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지냈다.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었다.

형인 선원이 반정공신이었지만 청음은 논공행상으로 권력 나누어 먹기를 경계하고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할 것, 그리고 비록 폐주라도 국왕을 지낸 분이므로 예로써 대우를 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젊은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 청론(淸論)의 지도자가 되었다.

 

 

    청음은 인조 14년(1636)에 청백리로 선발되었다.

그 해 12월에 청나라가 침입하였으니 곧 병자호란이다.

이 때 척화파의 지도자로서 청음의 행적은 너무나 유명하므로 이 자리에서 새삼 거론하지 않겠다.

그는 소산으로 내려와서 청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증조부의 구택을 청원루라 이름지어 지내다가 다시 학가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불의에 항거하여 지냈던 고사를 따서 동네를 서미동으로 부르고 자신의 거처를 목석거라 이름하고 지냈다.

청음이 청나라로 끌려가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맞선 이야기 역시 새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청의 관리들 조차 그의 정직불굴(正直不屈)의 기개와 정정당당한 자세를 우러러 망가(望哥)라 불렀다. 즉 우러러 볼 만한 어른이라는 뜻이다.

청태종은 그의 절의(節義)에 감동하여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나에게도 저런 신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경탄을 하면서. 청음이 마침내 돌아왔을 때 백성들은 국가의 지주로서 여겼다.

 

임금은 그에게 좌의정을 내렸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나라를 오랑캐에게 내어준 죄인이며 수년을 감옥살이 하는 데에 보냈으니 국정의 경험이 없으니 벼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일년의 봉록을 보냈으나 그는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일을 하지 않았으니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석실에서 영면하여 형인 선원이 묻힌 석실에 묻혔다.

물론 청음은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 조모가 경명군 이침의 손녀로서 왕족이었기 때문에 재산이 있었다.

그러나 청음은 그 재산에서 한 푼을 더 늘리지 않았다.  

청음이라는 호는 자호인지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청음은 대나무와 관계가 있다.

백거이가 쓴 <대나무를 기르며>라는 시에 대나무는 곧고 둥글고 비어있고 마디가 있고 늘 푸르다는 점이 군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 대나무는 맑은 공기와 맑은 토양과 맑은 물에 의하여 자란다.

대나무가 잘 자라면 해가 비치는 한낮에는 맑고 서늘한 그늘 즉 청음(淸陰)을 주고 바람이 불면 맑은 소리 즉 청성(淸聲)을 낸다는 것이다.

문정공 청음은 대나무처럼 곧고 마디 마디가 분명하였으며 백성과 선비들에게는 맑고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었다.

 

우암(송시열)은 청음에게서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 제자로 자칭하면서 청음을 그가 추구하는 대의의 화신으로 존경하였다.

 

    청음의 손자 문곡(김수항)과 우암은 숙종조 서인의 영수였으며 숙종 15년(1689) 장희빈을 지지하는 남인이 일으킨 기사환국에서 유배당하고 그 이듬해 사사되었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자식들에게 벼슬길에 나가지 말 것과 나가더라도 청요직에만 나가라는 훈계를 남겼다. 자식들은 절의의 전통을 고수하며 관료로 나아가는 것을 거절하고 학자로서의 의연함을 지켰다.

 

    갑술환국으로 문곡이 신원복작되었으나 숙종의 출사권고를 그들은 확고하게 거절하였다.

농암(김창협)은 학문의 도량이 크고 수준이 높아서 일찍부터 노론은 물론 소론과 심지어 남인조차 자기편에 영입하여 지도자로 키우려는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다.

숙종이 그에게 연달아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제수하였으나 1708년 졸할 때까지 끝내 사양하였다.

 

    그가 호조참판직을 사양하며 왕에게 올린 상소문은 려한십가문장(麗韓十家文章)에 실릴 만큼 천하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삼연 김창흡 역시 학자로서 일생을 견지하였다.

장남 몽와(김창집)는 결국 “조상의 사당에 고하고 봉공하라”는 국왕의 엄중한 명을 받고서야 관직에 나아가서 마침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영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목호룡과 김일경 등 소론에 의하여 참혹한 죽임을 당했고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그 자리를 파서 못을 만드는 것)의 벌과 함께 그 이름에는 역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극형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김제겸과 손자 김성행까지도 죽임을 당하고 가솔들은 모두 일곱 군으로 나누어 유배되었으니 안동김문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련이었다.

참화가 4대에 걸쳐 벌어진 것은 역사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손들은 억울하고 참혹한 환란을 꿋꿋하게 견디었고 곧은 자세를 견지하였다.

 

    노가재(김창업)는 동몽교관의 직과 국왕의 경연에 나가기를 거절하고 일생을 문학과 예술로써 초야에 묻혀 지냈다.

제겸의 차남인 미호(김원행)는 농암의 손자로 출계하였으므로 참화를 면했다.

그는 석실서원에서 당대 노론의 최고학자로서 지내며 홍대용과 같은 실학파를 길러내면서 국왕과 타협을 하지 않고 일생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길을 들여놓지 않았다.

 

    김문의 자손들은 영조의 어정쩡한 완평책에 맞서서 끝까지 조상의 완전한 신원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세상에 나타났다.

영조는 김수항-김창집-김제겸-김성행에 걸친 4대 조손에게 부조(不祧)를 내리고 일묘사충(一廟四忠)의 편액을 내렸으니 4대에 걸쳐 국불천이 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일이다.

 

    그들은 정조 때 모든 사람들이 홍국영의 충천하는 세도에 굴할 때에도 오히려 그를 경멸하였다.

준평책을 추구한 정조는 이들 김문이야말로 대절이 있고 절의와 문장과 학문과 도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실공히 국가 최고의 가문이라고 극찬하고 마침내 사사로운 권력욕에 사로잡힌 귀족벌열들 틈에서 왕권을 끝까지 지켜주는 신뢰할 유일한 집안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풍고(김조순)의 따님을 세자빈으로 직접 책봉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으니 곧 안동김문이 생명처럼 지켜온 청백의 전통이 낳은 결과였다.

 

비록 안동김문이 다른 권문세가들과의 경쟁과 공격을 누르고 60년간 국정을 지배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지만 세도정치는 오히려 그 이전 면면히 내려오던 즉 청음이 말한 바의 팔백년 내려오던 청백의 전통 때문이었다.

 

 

    이러한 청백의 정신은 보백당의 자손인 구전(김중청)이나 창균(김기보)의 후손인 구제(김계광)에 의해서도 실현되었다.

구전은 임진왜란 때에는 창의를 하였으나 난이 끝나 공훈을 논할 때 공훈록에 오르는 것을 스스로 사양하였고 문과급제 후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대북파의 이이첨이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상소문을 쓸 것을 종용받자 분연히 거절하여 파직되었다.

 

    구제는 청백의 전형인 청빈한 선비의 일생을 살았다.

그 자신 문과급제를 하였고 농암 이현보의 문집간행을 맡았으며 서원 건립의 소두가 되는 등 그 문장과 학식에서 지역 유림의 존경과 명망을 누렸다.

문과급제 후 성균관 직강을 거쳐 풍기 군수를 지냈으나 청렴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남은 것은 초가 한 채 뿐이었고 집안에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서 그를 추모하러 왔던 선비들을 숙연하게 하였다.

 

    그의 어린 딸은 친구인 고산 이유장이 거두어 며느리를 삼았다.

 

청음이 “청백전가팔백년”을 읊은 후 200년이 지나면서도 그 청백의 정신은 이렇게 면면히 이어 실천되어 왔다.

그리고 그 전통은 구한말에 고균(김옥균), 백야(김좌진), 지산(김복한), 오천(김석진), 동농(김가진), 하구(김시현) 등을 거쳐서 비극적인 모습으로 다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들은 세상이 변함에 약간만 타협을 했으면 명예와 관작과 권력과 부를 향유할 수 있었고 그 자식들 역시 출세를 누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택하였다.

백야는 노비문서를 태우고 노비를 해방 시키고 재산을 팔아서 학교를 세웠고 만주벌판에서 독립투쟁에 몸을 바쳤다.

 

    오천 역시 일본이 회유책으로 남작 작위를 수여하자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영남의 파리장서를 퇴계의 후손인 이만손이 우두머리가 되어 했는데 기호의 파리장서는 수북공(김광현)의 자손인 지산이 소두가 되어 이루어졌다.

물론 지산은 몇 차례나 감옥에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고 이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동농은 구한말 관료 중 최고위급 인사로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전세계에 일제에 의한 조선침탈의 불법성을 알리었다.

그는 상해에서 죽었고 이국 땅에 묻혔다.

삼당의 후손인 하구 역시 의열단에 가입하여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고 광복 후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등 일생을 북애공 주손으로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거칠고 힘든 정의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정정당당하고 의로운 일로써 생명을 삼는 철학과 도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동김씨가 삼한 갑족으로서의 명예를 누릴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청백의 전통을 면면히 지켜왔고 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 역할을 담당한 선조를 배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백은 무엇인가? 그것은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철학적 자세를 말한다.

관직에 있건 기업을 하건 학문을 하건 각자 정정당당하게 의롭고 올곧은 자세와 철학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곧 청백이다.

의롭지 못하게 올곧지 않은 생각과 방법으로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유혹을 물리치는 정신과 자세가 청백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신의 생업에 의로써 생각하고 의로써 도모하면 그는 청백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사회적 도덕과 개인의 윤리가 지극히 혼탁해진 세상에 청백을 실천하라는 말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위로는 조상과 아래로는 자손 만대에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률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현실타산적인 오늘날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환언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백은 오늘날 더욱 빛나고 값진 것이며 또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짐작하듯이 청백의 정신은 한 인물이나 그의 자손에게만 전유되는 것이 아니다.

보백당에서 그의 종손자 삼당공과 진사공, 보백당의 증손 구전, 삼당공의 종증손 문정공, 봉화의 구전에서 소산의 구제로, 문정공에서 형인 문충공의 자손 수북공을 거쳐 고균, 백야, 지산, 오천, 동농, 하구 등으로 이어지듯이 청백의 전통은 우리 김문의 모든 성원들 사이에 공유되고 실천되어 왔다.

 

    따라서 자기의 분파적 단위를 넘어서 시조 태사공의 이름 아래 모든 자손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을 거두어들이고 조상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함께 나누고 전하는 노력이 각별한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선원과 청음은 몸은 서울에 살았지만 고향 안동에 대한 각별한 정을 잊지 않았다.

선원은 병자호란 때 순국하였으므로 그 뒤에 안동을 올 수 없었으나 생전에 안동을 찾았고 족인 뿐만 아니라 안동의 타문중과도 돈독한 관계를 지녔다.

그는 전서(篆書)에 뛰어나서 학봉(김성일) 묘비도 써 주었다.

청음은 자주 안동에 내려왔고 조상을 기렸으며 청원루와 서미동 서간사 등으로 족적을 남겼다.

 

    삼연, 풍고, 문간공(김학순), 동농 등을 비롯하여 청음과 선원의 자손은 때때로 안동을 찾아와 그 뿌리에 대한 각별한 정과 회포를 읊고 안동의 족인들을 살폈다.

그러므로 서로를 찾아서 조상의 공덕을 함께 나누고 전하는 마음과 실천 행동이 필요하다.

 

 

    삼연은 문곡이 준비했던 기해보 족보를 꼭 60년이 지난 기해년에 처음으로 간행하면서 서문에 “萬身而一心 千里而一室 且將千年如一日”이라는 말씀을 남겼다.

이 말은 “淸白傳家八百年”이란 말과 더불어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잠언이다.

 

 

    이제 우리는 훌륭한 조상을 자랑하지만 그 자랑에만 그칠 것이 아니다.

과연 조상이 남긴 높은 도덕과 가치를 배우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데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가문의 흥망은 훌륭한 조상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의하지 않고 그 조상의 훌륭함을 현창하고 실천하는 자손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흔히 금관자 서말 옥관자 서말이라 하여 안동김문이 조선조에 관료와 학자를 많이 배출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데 부귀영화란 여름 한철 푸르게 빛나다가 가을이 되면 한갓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에 불과한 것이다. 남는 것은 정신이다.

그 정신이 면면히 후손의 머리와 가슴 속에 흘러 전해질 때 비로소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작은 분파의 틀을 넘어서 시조의 동일한 자손으로서 하나가 되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 됨의 문화적 핵심인 청백의 전통을 오늘날 내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실천하도록 애를 쓰고 있는가를 성찰적으로 다짐해야 한다

 

 

    예기(禮記)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善待問者如撞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 (제대로 도를 구한다는 것은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종을 작게 때리면 종소리는 작게 울릴 것이요 크게 때리면 종소리는 크게 울릴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안목으로 조상의 흔적을 찾고 훌륭한 문화전통을 서로 나누어 살리고 또한 후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안동김문의 명예로운 중흥을 기대하면서 짧은 이야기를 마친다.(안동김씨 대종중 자료)

 

김절행(金絶行)에 대하여
1683년(숙종 9)∼1721년(경종 1).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성중(誠仲)이다. 본관은 안동(安東[新])이다.

상국(相國)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으로, 고조는 이조참판(吏曹參判) 김광현(金光炫)이고, 증조는 수원부사(水原府使)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 김수인(金壽仁)이며, 조부는 진사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 김성우(金盛遇)이다. 부친 부사(府使) 김시보(金時保)와 모친 군수(郡守) 윤항(尹杭)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증 영의정(贈領議政) 어사형(魚史衡)의 딸 함종어씨(咸從魚氏)이다.

가풍(家風)을 이어받아서 성품이 온유하였고,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 모친의 병수발을 드는 모습이 마치 어른과도 같았다. 부모상을 치를 때에는 몸이 상할 정도로 애통함을 표하면서도, 상례(喪禮)에 어긋남이 없었다.

학문에도 독실하여서 사림(士林)들의 칭송을 받았다.

집안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 등과 함께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관직은 동몽교관(童蒙敎官)‧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보은현감(報恩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현감으로 재직 시에 선정(善政)을 베풀고 기근을 구휼하였다.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김이진(金履晉)‧김이점(金履漸)‧김이소(金履泰) 등이다.

 

 

 

 

좋은 글은 남과 나누라.

   책을 읽다가 좋은 뜻을 알게 되면 반드시 함께 공부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알려주어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이 해야 한다.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공은 늙어 흰 머리가 되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총명한 젊은이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흔쾌히 손수 쌓여있는 책을 뒤적여서 옛 사람의 아름다운 일과 뜻이 담긴 말을 찾아 읊조리며 강론하고, 너무너무 기뻐하며 당부해마지 않았다. 내가 한차례 뵐 적마다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곤 했다.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의 남은 풍도를 볼 수가 있었다.

 

讀書識得好義, 必樂告同人, 猶恐不及. 嘐嘐齋金公老白首, 好學不倦. 每逢聰明年少, 必欣然手檢積書, 窮尋古人美事旨言, 諷詠講論, 媚媚不厭, 申申不已. 予每一謁, 虛往實歸, 農巖三淵, 遺風可挹.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농암(農巖)삼연(三淵)이 중국을 그리워하다


농암 선생의 시에,
진황의 만리장성 보지 않고는 / 未見秦皇萬里城
남아의 의기 높아지지 못하리 / 男兒意氣負崢嶸
한호 굽이에 작은 어선 띄워 놓고 / 漢湖一曲漁丹小
도롱이 입고서 홀로 살아가리 / 獨速蓑衣付此生
하였고, 삼연 선생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 왕래 빈번한 만국의 중심부라 / 肩摩轊擊輳萬國
낙타며 코끼리 산악처럼 서 있네 / 嵬駝巨象峙山岳
인생은 시야를 좁혀서는 안 되니 / 人生不可小所見
그를 넓혀야 흉금이 넓어지리 / 大目方令胸肚擴
우리나라는 도 강론키 비좁으니 / 鴨江以東講道窄
사해의 영준들과 추축하기 원일세 / 四海英俊願追逐
두 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우리나라의 표준이 될 뿐 아니라 형제 두 분이 다 이름난 문장으로 밖에서 구할 것이 없었는데도 중국을 끊임없이 사모하였으니, 예로부터 많은 책을 읽고 뜻이 넓어진 분들은 반드시 이런 생각을 갖는 모양이다.
그 아우 가재(稼齋) 선생은 그 백씨(伯氏) 몽와(夢窩) 선생을 따라 중국에 가서 험고(險固)한 산과 융성(隆盛)한 인물과 성지(城池)ㆍ누대(樓臺)ㆍ풍속ㆍ의문(儀文) 등을 두루 보고서 그것을 기록하여 돌아와서는 형제의 시를 모아 《김씨연방집(金氏聯芳集)》을 만들고 절강(浙江)의 선비 양징 영수(楊澄寧水)에게 서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김씨의 문헌이 중국에까지 빛나게 되었다. 영수는 농암 선생의 시를 칭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관후묘(關侯廟) 시를 더욱 칭찬하였다. 관후묘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우거진 사당문 가엔 / 廟貌森牖戶
쓸쓸한 바람만 일어날 뿐 / 窺臨颯有風
단청엔 귀신이 접한 듯한데 / 丹靑鬼神接
보는 이의 눈물은 고금이 같네 / 涕淚古今同
북지는 항복을 부끄러워하고 / 北地着
남양은 국궁을 본받았네 / 南陽效鞠躬
아 충정이 하나 같았으니 / 忠貞恨一槩
두 분을 사당에 함께 모셨네 / 合此竝幽官
일찍이 청음(淸陰) 선생이 수로(水路)로 중국 서울을 갈 적에 제남(濟南)에서 어사(御史) 장연등(張延登)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70년 뒤인 계사년에 증손(曾孫) 가재(稼齋)가 다시 중국에 가서 양징(楊澄)을 만나 교류하였고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를 보았으며, 또 28년 뒤에는 청음 선생의 현손(玄孫) 잠재(潛齋) 익겸 일진(益謙日進)이 중국에 들어가서 치청산인(豸靑山人) 이개 철군(李鍇鐵君)과 만나, 연대(燕臺) 밑에서 서로 노래 부르며 강개(慷慨)해 하였고, 그 뒤 26년에는 청음 선생의 5대(代) 족손(族孫) 양허당(養虛堂) 재행 평중(在行平仲)이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절강의 명사 육비 기잠(陸飛起潛)ㆍ엄성 역암(嚴誠力闇)ㆍ반정균 향조(潘庭筠香祖) 등을 만나 서로 의기 투합(投合)하여 힘 있는 문장을 지으며 질탕(跌宕)하게 논 것은 천하의 성사(盛事)였다.
청음 선생 이후로 1백 40~50년 동안 김씨의 문헌이 우리나라의 으뜸이 된 것은 대대로 중국을 좋아하고 견문을 넓힌 데서 연유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유풍 여운(遺風餘韻)이 오늘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다.


 

[주C-001]농암(農巖) : 조선 숙종(肅宗)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김창협(金昌協)의 호.
[주C-002]삼연(三淵) : 김창흡(金昌翕)의 호. 창협의 동생으로 시문에 뛰어났다.
[주D-001]가재(稼齋) : 김창업(金昌業)의 호. 둘째형 창협, 셋째형 창흡과 함께 도학ㆍ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숙종 38년에 큰형 창집(昌集)이 사은사(謝恩使)로 청(淸) 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그곳의 산천(山川)ㆍ관방(關防)ㆍ사관(寺觀)ㆍ서적(書籍)ㆍ기물(器物) 등을 기록하여 돌아왔다. 또 그림에도 뛰어나서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다.
[주D-002]몽와(夢窩) : 김창집(金昌集)의 호. 숙종 38년에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주D-003]북지(北地) : 촉한 후주(蜀漢後主)의 아들 북지왕(北地王) 심(諶)을 말한다. 촉한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에 의해 항복하게 되자, 그는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옳다면서 항복을 반대하고 소열묘(昭烈廟)에 들어가 통곡하다가 자살하였다.
[주D-004]남양(南陽) : 촉한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그는 자신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그대로, 있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여섯 차례나 중원(中原)을 수복시키려 했으나 끝내 오장원(五丈原)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주D-005]두분 : 북지왕(北地王) 심(諶)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주D-006]청음(淸陰) : 학자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한 김상헌(金尙憲)의 호이다. 그는 인조(仁祖) 때 좌의정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청(淸)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반대하다가 화의가 성립된 뒤에 심양(瀋陽)으로 잡혀가서 3년 간의 억류 생활을 하였다.
[주D-007]이광지(李光地) : 자는 진경(晉卿), 호는 후암(厚菴). 청(淸) 나라 초기의 유명한 성리학자로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냈으며, 《주역통편(周易通編)》ㆍ《홍범설(洪範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D-008]치청산인(豸靑山人) 이개 철군(李鍇鐵君) :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반산(盤山)에 은거하여 치청봉(豸靑峯) 밑에서 농사를 지었다. 저서로는 《함중집(含中集)》이 있다

 

 

 

 

진경산수화

 

 

진경산수화의 전통을 조선성리학에서 찾는 입장은 진경시대라는 용어로 구체화되었다. 진경시대란 문화사적인 시대구분 명칭인데, 이이가 창안한 조선 성리학이 완벽하게 뿌리내린 시대이고,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낸 문화적 절정기라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퇴계에 이르러서이지만, 퇴계 다음 세대인 율곡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창하여 조선성리학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체계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한 학파를 형성하니 이들이 서인이며, 서인의 율곡학파에서는 문화 전반에서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어 송강 정철의 한글가사문학, 간이당 최립의 독특한 한국한문학 형식, 석봉 한호의 조선 고유 서체 등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아직 이에 상응할 화가가 등장하지 못했는데, 결국은 100년 뒤 겸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명이 청에 의해 멸망하자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가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중화의 전통이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조선에는 남아있다는 조선중화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서울 장동에 살고 있던 안동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들인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백악산 아래에 세거하던 서인 문인들이 이른바 ‘백악사단(白岳詞壇)’을 형성하며, 문학에서는 진경시문학(眞景詩文學)을 일으키고, 삼연의 제자였던 겸재 정선이 조선 고유색이 깃든 진경산수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율곡 이래로 조선 고유색을 추구하여온 노론의 사상적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숙종대는 진경문화 초창기, 영조대는 절정기, 정조대는 쇠퇴기라 구분하고, 노론이 조선 중화주의를 시대정신으로 하면서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꿈꾼 것이라 한다.


 

 

 

김창협의 인물성론

                                                     

 1.문제 제기

   18세기 조선조 성리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人物性同異論辨에서 同論의 견해를 견지했던 학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遂庵 權尙夏(1641-1721) 문하의 동론이 그 하나이고 三淵 金昌翕(1653-1722), 杞園 魚有鳳(1672-1717), 陶庵 李縡(1680-1746), 黎湖 朴弼周(1665-1748) 등과 같은 洛下, 즉 서울 및 서울 근교의 동론자들이 다른 하나이다. 이 낙하의 학맥을 洛學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데, 낙학의 학자들은 대체로 서인, 특히 노론 계열에 속하기 때문에 학통으로 보자면 크게 율곡 학파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절충파로 분류되는 것처럼 이들의 학문적 경향은 尤庵 宋時烈(1607-1689), 遂庵 權尙夏, 南塘 韓元震(1682-1727)으로 이어지는 호서 지방의 학자들과는 달랐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栗谷 李珥(1536-1584)의 이론틀을 견지하면서도 율곡의 이론에 배타적으로 집착한 것이 아니라 율곡을 비판적으로 계승, 극복하면서 아울러 退溪 李滉(1501-1570)의 학설을 수용했던 것이다.


   낙학은 農巖 金昌協(1651-1708)에서 근원한다. 18세기 이후 낙학을 이끌어 가던 많은 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연은 그의 동생이었으며, 기원, 여호 등은 농암, 창흡 두 형제의 문하를 드나들었고, 도암 역시 낙학의 학문적 풍토에서 그의 학문을 성숙시켜 나갔다. 도암 문하에서 배웠던 渼湖 金元行(1702-1772)은 농암의 양손자로서 그의 문하에서는 이齋 黃胤錫(1719-1791), 近齋 朴胤源(1734-1799), 寧齋 吳允常 등이 배출되었다. 나아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약했던 梅山 洪直弼(1776-1852)은 근재의 문인이며, 老洲 吳熙常(1763-1833)은 그의 형인 영재에게 배웠다. 그리고 臺山 金邁淳(1776-1840)은 삼연의 현손자이다. 이렇게 보자면 18세기 이후 낙학의 학맥은 농암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농암의 인물성론과 낙학의 인물성동론의 관계가 그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낙학의 인물성론은 동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농암은 낙학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인물성이론자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적어도 낙학의 인물성동론만큼은 농암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낙학의 많은 학자들이 그들 이론의 근원을 농암으로 소급시키고 있듯이 농암의 이론은 낙학의 뿌리이며, 그 낙학의 이론적 핵심에는 인물성동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암의 인물성론은 단순히 인물성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 동론의 요소 내지는 동론의 경향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낙학이 농암에게서 나왔다는 기본 전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관심은 농암을 이론이나 동론 어느 한 편에 귀속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낙학의 동론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농암 인물성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 이 논문의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농암의 인물성론을 분석하고, 나아가 그러한 농암의 견해가 그 이후 낙학의 인물성동론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살피려 한다.


   2.농암 인물성론의 내용 분석

   (1) [上尤齋中庸疑義問目]

    농암이 인물성동이의 문제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것은 [상우재중용의의문목]으로서, {중용} 1장의 주희 주에 대한 의문을 우암에게 문의한 글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각기 부여받은 理를 얻어서 健順 五常의 덕으로 삼으니 이른바 성이다"라는 {중용} 1장의 朱熹 주는 인물성동론의 주요한 논거였다. 그런데 농암은 "이것 ({중용} 1장의 주희 주)은 만물이 생겨남에 각기 五性을 온전히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우암에게 질의를 하면서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답을 한다. 그 이유는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하나의 理를 똑같이 얻어서 생겨나지만, 그 理가 이미 성을 이루게 되면 치우침(偏)과 온전함(全)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암은 벌과 개미(蜂蟻)의 仁과 호랑이와 이리(虎狼)의 義는 오성의 하나일 뿐이라고 구체적인 예를 든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다른 사물들도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천명 자체가 고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에 통함(通)과 막힘(塞)이 있어서, 理도 따라서 편전이 있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이때 농암 이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理로써 말하자면 인의예지의 부여받음이 어찌 사물이 얻어서 온전히 한 바이겠는가?"라는 {맹자} [生之謂性]장의 주희 주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자신의 확고한 입장에 따라서 농암은 {중용} 1장의 주희 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주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말한 것은 만물이 각각 오성을 갖추어서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물이 이 理를 똑같이 얻어서 성이 되는데 성의 조목에 이 다섯 가지가 있다는 말일 뿐이다. 생각컨대 사물은 본래 이 다섯 가지를 온전히 할 수 없고 다섯 이외에 달리 성이 없다. 사람과 사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 하나의 성을 똑같이 하지만 그 통함과 막힘, 치우침과 온전함의 나뉨은 일찍이 없은 적이 없었다. 논할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이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농암이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물은 똑같이 하나의 理를 얻어서 생겨나지만 이미 性이 된 이상 기의 通塞에 따라서 그 성은 偏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물은 오성을 온전히 하고 있지 못하고 기껏해야 오성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농암의 논리 전개 방식은 남당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상우재중용의의문목]만으로 판단하는 한 농암의 인물성론은 異論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글은 그의 나이 28세 때(1678년)에 쓴 것으로 그의 초년 사상을 반영한다. 따라서 이것을 근거로 농암의 인물성론 전체를 규정짓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答閔彦暉]

 

    농암은 47세 때(1697년) 彦暉 閔以升(1649-1698)과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 몇 통을 주고 받았다. 이 편지들의 내용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知覺에 관한 것이지만 性에 관한 언급도 보인다. 언휘는 "性을 말하는 순간 곧 성이 아니다"라는 程子의 말을 '성은 理와 기를 겸했다'라는 자신의 주장의 증거로 삼았다. 이것에 대해 농암은 "어찌 이 설에 매달려, 사람에게는 다시 본연의 성이 없고 성을 논하는 사람은 마땅히 理로써 말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형기에 섞인 연후에 곧 이 성의 참이 될 수 있을까?" 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 말은 사람에게는 본연의 성이 있다는 의미와 성을 理만으로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즉 성을 理만으로 논할 수 있는데, 그 성이 곧 본연의 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본연의 성이란 무엇일까? 농암은 이 인용문에 앞서 정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성은 본래 理이지만 理라하지 않고 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과 사물이 부여 받은 것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부여받은 것을 말하자마자 이미 형기를 겸하므로 다시 理의 본체가 아니다. 그래서 성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기질의 구속됨과 막힘을 이르는 것이 아닐지라도 智愚, 賢不肖가 나뉘어지는 까닭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 - 성의 본체는 비록 선하지만 그것을 성이라고 했으면 이미 형기에 떨어진 것이고 형기의 淸濁粹駁으로 인해 선악이 나뉘어진다. 이것이 비록 성의 본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성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글에 의하면 성은 본래 理이지만 사람과 사물이 부여받은 것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理와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성은 이미 형기 속에 들어온 이후의 것이므로 형기를 겸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理의 본체(또는 성의 본체)가 아니다. 농암이 말하는  본연의 성이란 바로 理의 본체(성의 본체)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형기를 겸한 성은 농암이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한는 기질의 성에 해당한다. 그런데 농암은 이 기질의 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형기의 통색이나 편전이 아니라 형기의 청탁수박을 들고 있다. 성의 본체는 선하지만 형기의 청탁수박으로 인해 선과 악으로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는 이 성은 바로 선악의 성에 해당한다. 선악의 성은 사람 안에서의 차별성(智愚, 賢不肖)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선악의 성과 대립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성의 본체나 본연의 성이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즉 만물 공통의 천명의 성인지 아니면 인간만의 본연의 성인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 구문은  '성은 이와 기를 겸했다'는 주장을 理만으로 성을 말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반박하던 끝에 나왔다는 것만을 지적해 둔다. 다시 말해서 기를 배제하고 理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농암의 의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與權有道再論思辨錄辨]


 1) 幾希에 대한 해석

    숙종으로부터 西溪 朴世堂(1629-1703)의 {思辨錄}을 변파하라는 명을 받은 구溪 權尙游(1656-1724)가 변설을 지어 농암에게 질의를 하자, 농암은 미진한 항목마다 논변을 했다. 이것이 그의 나이 54세 때인 1704년에 이루어진 [여권유도론사변록변]과 [여권유도재론사변록변]이다. 특히 후자에는 인물성론과 관련된 중요한 항목들이 들어 있어 관심을 끈다.

    {맹자}에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소이는 幾希이니 일반인은 그것을 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보존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주희는 '기희'라는 말을 '적다'(少)라고 풀이하고 사람과 금수는 조금 다를 뿐이라고 해석을 한다. 반면에 서계는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해석을 한다. 물론 서계의 이러한 해석은 주희의 해석에 대한 반박이다. 그러데 농암은

생각하건데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기를 똑같이 하고 理를 똑같이 했다. 그  러나 사람은 형기의 바름(正)을 얻어서 그 성을 온전히 할 수 있으나 사물은 형기의 치우침(偏)을 얻어서 그 성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사람과 사물 이 다른 소이는 단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幾希라고 했다. {集註}는 이 뜻을 완전하게 드러냈다. 지금 그 성이 같지 않다고 곧바로 말하면 아마도 기희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주희 주에 의거하여 서계를 비판한다. 물론 농암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원인을 "사람은 형기의 바름을 얻어서 그 성을 온전히 할 수 있으나 사물은 형기의 치우침을 얻어서 그 성을 온전히 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과 사물의 다름에 대한 이러한 해명, 즉 형기의 바름과 치우침에 의거해서 性의 온전함의 여부를 설명하는 것은 인물성이론자들의 전형적인 설명방식이다. 그렇지만 이 글을 곧바로 인물성이론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맹자}의 원문이 이미 사람과 금수의 다름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맹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사람과 금수가 다른 이유를 어떤 형태로든 밝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암의 이 글의 핵심은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밝힌 것 그 자체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농암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 서계의 글을 살펴보자.

사람과 사물이 다른 소이는 오로지 그 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기희이다.- - - 사람과 사물이 그 성을 달리하는 소이는 단지 치우침과 온전함의 차이에 있지  않다. 만약 사람은 그것을 온전히 하기 때문에 홀로 금수와 다르다고 말한다면 저 금수는 모두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성이 똑같을 수 있을까? 맹자가 말한 개, 소의 성을 보면 그렇지 않음이 있을 것이다.

 

    서계는 사람과 사물은 성 자체가 다르다고 보고 있다.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단순히 성의 온전함과 치우침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즉 사람과 사물의 성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농암에 의하면 서계처럼 그 성이 같지 않다고 곧바로 말하면 기희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농암은 서계의 설명방식으로는 기희의 뜻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농암은 기희의 뜻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설명방식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농암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다름이 기희, 즉 적다라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어떤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데 농암의 강조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형기의 편전으로 인한 성의 편전만 없다면 인성과 물성은 같다는 논리가 가능한 셈이다.

 

 

 

 

 

  삼연 ( 三淵 ) 김창흡(金昌翕)의 藝園十趣

 

    <예원의 열가지 즐거움(藝園十趣)〉

 

 

 

< 안동 가문 족보에서 촬영 >

 

 

지은이 소개

 

 

김창흡(金昌翕) (1653년(효종 4) -- 1722년(경종 2)

자: 子益 호 : 洛誦子, 三淵 본관 : 安東 시호 : 文康 .조선 후기의 학자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 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 을 떨쳤다.

삼연은 관직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여러 곳을 유람하며 독서와 그의 사상적 이 론을 펼쳤다.

 

 

 

 

 

예원 예ː원(藝苑·藝園) [명사] ‘예술계’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 예림(藝林).

취 (趣 ) : 취미- 어떤 대상에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끌리고 당기는 멋.

 

 

 

 

1. 崖寺歲暮。風霰交山。夜寒僧眠。孤坐讀    書.

애사세모 풍산교산 야한승면 고좌독서

 

풀이 세모에 산속 절에서/ 눈보라 흩날릴 제/ 밤은 춥고 스님은 잠들고/ 혼자 앉아 책을 읽을 때

 

霰 ( 싸라기 눈 산 ) ( 예시 : 시경에 如彼雨雪 先集維霰 )

 

 

 

2. 春秋暇日。登高遠眺。形神散朗。詩思湧發。

춘추가일 등고원조 형신산랑 시사용발

풀이 봄가을 한가한 날/ 높은 산 올라 멀리 보며/ 몸과 마음이 가뿐하여/ 시상이 솟구쳐 오를 때

 

暇 (겨를 가. 한가로울 가 ) 眺 ( 바라볼 조 )

 

 

3. 掩門花落。卷簾鳥啼。酒瓮乍開。詩句初圓。

엄문화락 권렴조제 주옹사개 시구초원

 

풀이 꽃 지는 시절 문을 닫으니/ 주렴 밖에선 새가 울고/ 술동이를 잠시 열자/ 싯귀조차

처음 생각대로 원만할 때.

 

掩 ( 가릴 엄 ) 瓮 ( 독 옹 ) 乍 ( 잠깐 사 )

 

 

4. 曲水流觴。冠童畢會。一飮一詠。不覺聯篇。

곡수유상 관동필회 일음일영 불각연편

 

풀이 굽이굽이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놓고 /어른 젊은이 한 자리에 다 모여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읊어/ 여러 편의 주옥같은 글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觴 ( 잔 상 )

 

 

유상곡수( 流觴曲水 ): 음력 3 월 삼짓 날 곡수에 잔을 띄워 보내 그 잔이 자기 앞에 돌아오는 동안 시를 읊어 서로 시재 ( 詩才 )를 다툰 일.

引以爲流觴 -曲水 列坐其次 큰 냇가에서 물을 끌어와 굽이치는 물에 잔을 흘려 보내게

曲水를만들어 그 잔이 자신 앞에 이르면 시를 짖고 술을

마시는 이른바 曲水宴을 베풀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서열에 따라 坐定하게 되었다( 蘭 亭 記 -王羲之)

 

 

5. 良夜肅淸。朗月入軒。擊扇誦文。聲氣遒暢。

양야숙청 낭월입헌 격선송문 성기주창

 

풀이 좋은 밤은 고요히 맑은데/ 밝은 달이 방에 비쳐 들어/ 부채를 치며 글을 외우니 /그 소리 가 굳세고 힘이 넘칠 때

 

扇 ( 부채 선 ) 遒 ( 굳셀 주 ) 暢 ( 펼 창 )

 

 

 

6. 經歷山川。馬頓僕怠。據鞍行吟。有作成囊。

경력산천 마돈복태 거안행음 유작성낭

 

一作助 (일작조: 말과 마부의 도움을 받아 즐김 )

풀이 산천을 두루 돌았기에 /말과 종도 지쳤지만/ 안장에 걸터 앉아 길 가며 읊은 게/ 작품 되 어 한 주머니에 가득할 때.

 

頓 ( 꾸벅거릴 돈 ) 僕 ( 마부 복 ) 囊 ( 주머니 낭 )

 

 

7. 入山讀書。課滿歸家。心充氣溢。下筆如神。

입산독서 과만귀가 심충기일 하필여신

 

풀이 산에 들어 책을 읽고/ 목표를 이뤄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충만하고 기운이 넘쳐나 / 필력의 흐름이 신들린 듯 할 때.

 

溢 ( 넘칠 일 )

 

 

8. 良友遠阻。忽然相値。細問所業。勸誦新作。

양우원조 홀연상치 세문소업 권송신작

 

풀이 멀리 막혀 있던 좋은 벗을/ 갑작스레 맞닥뜨려/ 그 간의 학업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새로 지은 새 작품을 외워 보라 권고할 때.

 

阻( 막힐 조 ) 忽 ( 갑자기 홀 ) 상치 : 서로 만남. 맞닥뜨려 만남.

 

 

 

 

 

9. 奇文僻書。聞在交友。送奴乞來。急解包裹。

기문벽서 문재교우 송노걸래 급해포과

 

풀이 기이한 글과 구하기 힘든 책을/ 친구 집에 있단 말을 듣고/ 하인을 보내 빌려와/

묶은 포장을 황급하게 뜯어볼 때.

 

僻 ( 후미질 벽 ) 裹 ( 얽을 과. 묶은 것을 싸다 과 )

 

 

10. 分林隔川。佳友對居。釀酒報熟。寄詩佇和。

분림격천 가우대거 양주보숙 기시저화

 

풀이 숲과 시내 건너편에 /살고 있는 좋은 벗이 /새로 빚은 술이 익었다고 알려오면서/

시를 부쳐 나에게 화답하길 청할 때.

 

隔 ( 사이 뜰 격 ) 釀 ( 빚을 양 ) 佇 (우두커니 저. 기다릴 저 )

                                                            (三淵集 拾遺卷之 二十四에서 )

 

 

 

지은이 소개

 

김창흡(金昌翕) (1653년(효종 4) -- 1722년(경종 2)

자: 子益 호 : 洛誦子, 三淵 본관 : 安東 시호 : 文康 .조선 후기의 학자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삼연은 관직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여러 곳을 유람하며 독서와 그의 사상적 이론을 펼쳤다.

 

 

 

     絶筆詩 壬寅 ( 1722 년 )

 

 

宿願平生在玩心。숙원평생재완심

高明峰下細硏尋。고명봉하세연심

風埃老死東郊外。풍애노사동교외

奇意靑霞永鬱沉。기의청하영울침

 

평생의 소원 마음을 즐기는 것/ 고명봉 아래서 깊게 찾으며 살폈노라/ 풍진 속 동교밖에 늙어 죽으니/ 지녔던 높은 뜻이 영원히 가라앉는구나.

                               <高明峯在百淵 (三淵集卷之十六)에서>

 

 

 

 

 

 

 

김창흡과 7남매 이야기

 

 

미산분교

한칸 교실에 어린이들이 글을 배우던 때

미산 개울에 달이 뜨고

개구리 울음이 환한 달빛보다 더 장엄할 때

김창립의 묘지명을 읽었다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아들

그 묘지명을

아버지는

차마 짓지 못했다

 

 

기사사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김수항은 

 둘째 아들 김창협에게

네가 아우의 묘지명을 지으란 말을 남긴다

 

 

김수항 자녀는 6남1녀이다

 

 

이씨 집으로 출가하여

이씨부인이란 별호가 붙은

외동딸은

 

아마 막내 남동생한테는 손위 누이가 될 테고

다섯 오빠를 두었다

 

 

을사년(1665)에 태어나

신유년(1681)에 별세했다

 

 

셋째 오빠 삼연 김창흡은

<제망매문 祭亡妹文>을 남긴다

 

 

거기 이런 구절이 있다

 

踐雪戴星 奔馳而來 則汝已束殮矣

 

 

김창흡은

여동생이 병세가 위중할 때 멀리 출타중이었고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눈길을 헤치고 별이 뜬 밤에도

말을 달려왔는데

이미 렴이 끝난 중이었다

 

 

이글을 읽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여러 해가 지났다

 

 

임진년

더운 여름날

 

그 여동생을 생각하는 또 다른 시를 만났다

 

 

 

넷째 아들 노가재 김창업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시도 잘 썼다

 

그가 남긴 노가재집엔

<망매기일 亡妹忌日>이란 시가 있다

 

 

水閱雲過三十年

老兄今日尙頑然

何人更識吾心事

臥送寒宵淚似泉

 

 

세월 흘러 삼십년

나는 아직도 미련하게 살아있네

누가 내 마음 헤아릴까

추운 겨울밤 눈물 흐르네

 

 

삼십년 지난 날에도

오빠는 죽은 여동생의 기일을 기억하고

상념에 잠겨 시를 적었다

 

저 여동생이 혹시 글을 남겼는지는 모르나

7남매중 여섯 형제는 모두

창창한 글을 산더미로 후세에 물렸다

 

 

 

 



갈역에서 읊다-김창흡(金昌翕)

月自雪山來(월자설산래) : 설악산에서 내려온 저 달

照吾蓬戶裏(조오봉호리) : 초라한 내 사립문 안 비춘다

容光何闊狹(용광하활협) : 빛을 받아들임에 어찌 넓고 좁을 가릴까

靈府已無滓(영부이무재) : 내 마음엔 이미 아무 찌꺼지도 없는 것을

 

 

 

 

訪俗離山(속리산을 찾아가며)           金昌翕(김창흡)_

방속리산 

 

 

○  ○  ○  ●  ●  ○  ◎

江 南 遊 子 不 知 還 강남 간 나그네 돌아올 줄 모르는데

강남유자부지환

 

●  ●  ○  ○  ●  ●  ◎

古 寺 秋 風 杖 屨 閒 옛 절에 가을바람 불어도 나그네의 행장은 한가롭다.

고사추풍장구한

 

●  ●  ○  ○  ○  ●  ●

笑 別 鷄 龍 餘 興 在 웃으며 계룡산을 작별해도 흥이 남아 있는데

소별계룡여흥재

 

●  ○  ○  ●  ●  ●  ◎

馬 前 猶 有 俗 離 山 말 앞에는 오히려 속리산에 있기 때문이다.

마전유유속리산

 

【 註釋 】遊子 유자(나그네/여행길에 나선 사람), 還 환(돌아오다), 杖 장(지팡이), 屨 구(신/짚이나 삼끈 따위로 엮은 신), 杖屨 장구(지팡이와 짚신/웃어른의 소지품이란 뜻으로 어른에 대한 높임말), 閒 한(한가하다), 餘 여(남다/나머지), 興 흥(일다/흥치), 猶 유(오히려/…같다)

 

構成 및 韻律 】7언 절구로 平起式평기식이며, 韻字는 平聲 ‘刪’ 韻으로 ‘還 ․ 閒 ․ 山’ 이다. (참고 : ○ 평성, ● 측성, ◎ 운자)

 

 

【 作者 】金昌翕김창흡(1653 효종4~1722 경종2) : 조선후기의 학자이며 시인이다.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子益자익, 호는 三淵삼연, 시호는 文康문강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로 김상헌으로부터 이어지는 인왕산 아래 장의동에 세거하여 장동 김씨로 알려진 17세기 최고의 명가 출신이다. 21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산림처사로 지냈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업과 함께 율곡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 후기 가장 영향력이 높은 시인으로 한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죽고 난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 등이 있다.

 

【 評說 】속리산을 찾아가며

 

이 詩는 1673년 작자가 20살을 갓 넘긴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작자는 벼슬길의 靑雲청운보다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흰 구름(白雲)처럼 떠돌며 한평생을 布衣포의로 살았다. 평생을 나그네로 산수를 즐기며 이름난 산과 물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고 한다.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 나그네는 가을바람이 불어도 집으로 돌아갈 줄 몰랐다. 단출한 몸에 여장은 가볍고 한가로울 뿐이다. 산을 좋아하는 작자로서는 계룡산이 좋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말 앞에 속리산이 있으니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었다. 빼어난 경치의 속리산을 찾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갈 일을 염두에나 두었을까?

 

작자는 21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청년시기에 서울 근교인 양평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시단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白嶽백악아래 살 때 집 옆에 洛誦樓낙송루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당시의 이름난 시인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이들이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 ․ 김시보 ․ 김시민 ․ 이하곤, 중인인 이규명 ․ 홍세태 등 당대의 쟁쟁한 시인들이었다. 이들이 함께 모인 곳을 白嶽詩壇백악시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김창흡 형제는 자연스러움과 질박함이라는 고대시의 정신을 배우는 한편 시인이 보고 느낀 眞景진경과 眞情진정을 詩에 담아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眞詩진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아 겸재 정선이 조선 사람이 사는 조선의 산수를 그리게 되는 진경산수화의 출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편, 산수를 좋아하던 작자는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면서 살았고, 수시로 나그네 길에 올라 삼천리강산을 두루 다녔다. 예순이 넘어 설악산과 금강산을 유람하던 작자는 64세 때 함경도로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392수라는 엄청난 분량의 詩로 남겼는데, 이 연작시가 ‘葛驛雜詠’갈역잡영이다. 이 연작시 중에서 김창흡은 자신의 방랑벽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風鞭電屐略靑丘 바람채찍과 우레 나막신으로 조선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풍편전극략청구

北走南翔鵬路周 북으로 달리고 남으로 날아 붕새처럼 구만 리를 다녔다.

북주남상붕루주

收得衰軀歸掩戶 쇠잔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문을 닫으니

수득쇠구귀엄호

不知何物在心頭 그 무슨 물건이 내 마음에 남아 있겠는가?

부지하물재심두

 

* 鞭 편(채찍), 屐 극(나막신), 略 략(다스리다/둘러보다), 靑丘 청구(예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 翔 상(돌아날다/높이 날다), 鵬 붕(붕새), 周 주(두루/돌다), 掩 엄(가리다/닫다)

 

 

일찍이 莊子장자가 鵬붕새는 한번 날면 구만리를 날아오른다고 했듯이 김창흡 자신도 바람을 채찍질하고 우레를 신발삼아 붕새처럼 조선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고 했다.

 

이어서 평양에 이르렀다. 대동강의 練光亭연광정에 올라 벗인 조정만의 詩에 次韻차운하여 오언율시를 지었다. 역대 연광정에서 지은 詩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 중 하나라고 한다. 제목은 ‘밤에 연광정에 올라 조정이의 詩에 차운하다’(夜練光亭次趙定而韻)이다.

 

 

雪岳幽棲客(설악유서객) 설악산 그윽한 곳에 숨어 사는 나그네가

關河又薄遊(관하우박유) 관서에서 또 다시 발길 가는대로 노닌다.

隨身有淸月(수신유청월) 몸을 따르는 맑은 달이 있으니

卜夜在高樓(복야재고루) 밤을 택해 높은 누각에 앉아 있다.

劍舞魚龍靜(검무여룡정) 기생들의 칼춤에 물고기들 조용해지고

杯行星漢流(배행성한류) 술잔을 돌리는데, 하늘의 은하수가 흐른다.

鷄鳴相顧起(계명상고기) 닭이 우는 새벽에 서로 돌아보고 일어나는데

留興木蘭舟(유흥목란주) 흥취는 고운 배에 머물러 둔다.

 

* 關河 관하(함경도 등 관서지역), 薄遊 박유(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을 즐기는 것), 星漢 성한(은하수), 顧 고(돌아보다), 木蘭 목란(木蓮목련을 말함), 木蘭舟목란주(목련으로 만든 배/아름다운 배를 말함)

 

설악산을 은거지로 삼아 숨어살고 있던 작자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유람 길에 올라 대동강에 이르렀다. 달빛이 내 몸을 따르기에 밤에 연광정 높은 누각에 올랐다.

 

기생들이 칼춤(劍舞)을 추자 구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물속의 물고기들도 숨을 죽이는 듯하고, 흥겨운 술판에 술잔을 돌리다 보니 은하수도 이미 기울었다. 새벽 닭 울음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그 餘興여흥은 배에 머물러 둔다고 했다.

1연에서는 凡常범상하고, 2년에서는 仙風선풍이 있고, 3연에서는 豪宕호탕하고, 4연에서는 鬼氣귀기가 있다고 하여 한편의 詩 가운데 네 가지 품격을 고루 갖추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창흡은 김상헌으로부터 아버지인 영의정 김수항으로 이어지는 명문가 출신으로 6형제가 모두 詩文시문에 능한 문장의 대가로 6창(六昌)이라 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들 형제는 영의정 金昌集김창집 ․ 대제학 金昌協김창협 ․ 유학자이며 시인인 金昌翕김창흡 ․ 문인이며 화가인 金昌業김창업 ․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은 金昌緝김창집 ․ 시문에 능했으나 요절한 金昌立김창립 등을 말한다.

 

 

 

 

조선의 메디치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겸 화가, 미켈란젤로(1475∼1564)에 관한 일화다. 그날도 그는 정원에 버려진 목신(牧神; 목축을 관장하는 신) 조각상을, 대리석을 재료로 해서 따라 새기고 있었다. 메디치가 정원에 놓인 진기한 고대 미술품을 복사하고 복원하는 게 그의 일이었던 것. 그때 그의 예술적 후견인으로서 그 대저택에 살게 해준 로렌쪼 대공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이보게, 미켈란젤로.  노인의 이빨은 대개 몇 개는 빠지는 법이라네.”
 
미켈란젤로는 순간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그래, 이것이야.’  그는 로렌쪼 대공이 지나가고 나서 얼른 목신 조각상의 이빨 한 개를 부러뜨렸다. 그랬더니 이빨이 빠진 것으로 보였다.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로렌쪼 일 마니피코(1449∼1492). 그는 1469년부터 20여 년 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가의 권력자였다. 관직은 하나도 맡지 않았다. 그런데도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도시국가 피렌체의 정관계를 쥐락펴락하는 막후 실세였다. 예술에 조예가 깊어 ‘대공’으로 불렸던 그는 젊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곤 자신의 대저택에서 함께 살게 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후원했다.   

메디치 가문 없는 르네상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세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유럽 전역에 걸쳐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던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피렌체가 발상지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힘차게 시동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가의 예술적 후원 덕분이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 대표 화가들이 모두 메디치가의 지원을 받았다.   


척화의 상징에서 최대 관료 집안으로 

조선 땅에도 메디치가에 버금가는 예술 후견인 가문이 있었다. 안동김씨, 반남박씨, 풍양조씨…. 누대에 걸쳐 수도 한양에서 관료생활을 했던 벌열가이자 세도가들이 그들이다.      

벌열가문들의 예술 후원 활동은 한양의 급속한 도시화와 관련 있다. 한양은 17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함께 하루하루 세련되어지고 번창했다. 길은 넓어지고 저잣거리엔 물건들이 넘쳐났다. 서울과 그 근교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던 이들 벌열가문, 즉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자제들은 한양의 도시 문화를 이끌었던 주역이다. 미술과 문학도 그렇게 그들에게서 사랑받았다.  
 
이 가운데 안동김씨는 ‘조선의 메디치가(家)’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16세기 이후 서울에 세거한 안동김씨 가문은 특히 ‘장동 김문(壯洞 金門)’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 최대의 예술 후원 가문으로 평가받는다. 
 
장동 김문은 본거지 안동 소산에서 서울 청풍계((淸風溪: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뒤쪽 계곡)로 이주한 이후 유력 문벌로 성장한 김상용(金尙容 1561∼1637),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형제의 후예를 가리킨다. 
 
장동 김문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순절하고 김상헌이 척화삼학사가 됨으로써 척화와 충의를 상징하는 집안으로 이미지를 굳히며 정계에 무게감을 드러냈다. 이후 장동김씨 문중은 사화로 대변되는 양반 계급의 격렬한 권력투쟁 와중에서 극심한 부침을 겪지만 순조대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대 세도 가문으로 등극한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증손 김창집(金昌集 1648∼1722) 부자는 숙종 때 연이어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영광은 늘 잠시였다. 노론의 핵심인물었던 김수항은 기사환국 때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진도로 유배를 보내져 사사된다. 김창집 역시 부친의 사후 벼슬을 멀리하고 지냈으나 남인이 실권한 갑술환국 이후 관직으로 돌아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다. 하지만 그 역시 신임사화로 죽임을 당하고야 만다.
 
가문은 부활한다. 19세기 초반 순조 때 김창집의 현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임금(순조)의 장인 자리까지 오르면서 장동 김문은 조선 양반 사회 권력 사다리의 최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실경산수에 영혼을 불어넣다

장동김씨 사람들은 권력의 한가운데 있거나, 권력을 멀리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예술을 가까이했다. 메디치가와 같은 그들의 미술 후원 활동을 살펴보자.   
 
우선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김상용은 청풍계에 정자를 지어놓고 글씨와 그림을 즐겨 감상했다. 정자 이름부터가 유유자적하다. 와유암(臥游庵)이다. 당시 대표적 화가 이정과 이징이 그의 사랑을 받았다.  

김상헌도 그림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유명한 그림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번에 달려가 빌려보았을 정도.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정도가 고개지와 미불을 뛰어넘는다고 자부했다. 무엇보다 ‘학예일치’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화단에 끼친 안동김씨의 진짜 위력은 이제부터다. 그들은 단순한 서화를 즐기고 모으는 수준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조류를 탄생시켰다. 
  

진경산수의 시대를 열다

조선 후기, 우리 회화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다. 조선에는 중기까지만 해도 중국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산수를 그려도 이 땅의 산천이 아니라 중국 산수화를 모사한 관념 산수가 지배적이었다.  조선 중기 묵화 속 산수는 우리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라. 그건 우리의 산하가 아니지 않는가. 이런 분위기를 뒤엎고 우리나라 산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자며 등장한 전위 미술이 진경산수(혹은 실경산수)였다.   
 
그 진경산수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서막을 연 것이 안동김씨였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 그는 서예에 두각을 드러냈고 지식인 사회의 대유행했던 금석문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동생 수항이 스승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함께 유배되자 과감히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화천에 들어간 것. 그곳에서 농사지으며 은일했다.
 
은둔의 삶 속에서 멋을 추구했던 그는 주자의 행적을 모방한다.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부르고 경치 좋은 9곳을 평양 출신 문인화가 조세걸(曹世傑)에게 그리게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다. ‘곡운구곡도’에는 생생한 우리 산수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띠집과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 닭 개 소 나귀 등 동물의 행동까지 빠짐없이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 조세걸, <곡운구곡도> ‘곡운구곡도첩’


이 그림을 제작할 때 김수증은 화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 것인지 지도했다. 거울에 반사되듯 사실적으로 그리게 했다는 것.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 이것이야말로 진경산수가 갖는 사실정신의 핵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곡도’는 당시 지식인 사회의 유행이었다. 중국의 주자를 흠모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의 무위구곡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많은 이들이 구곡도를 그렸다. 이 때문에 앞서 율곡이 황해도 해주 석담을 담은 고산구곡을 그리게 했지만, 거기에는 우리 산천을 사생한다는 개념은 없었던 것이다.
 
김수증의 조카 김창협은 ‘곡운구곡도’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서 좋은 그림을 보면 핍진하다고 말하고 또한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과 같다고 한다. 그리는 자가 뜻이 이르는 곳을 따라 대상을 배치해 때로 붓 아래에서 절정의 좋은 경계를 환상처럼 내기 때문이다. 그런즉 선생(김수증)이 산에 있을 때는 각건에 지팡이 짚고 구곡을 노닐었으니 이것이 곧 ‘화경계(쎹境界)요, 산을 나와서는 문 닫고 집에 틀어박혀 그림에서 상상했으니 이것이 곧 ‘진구곡(眞九曲)’이다. 진(眞)과 화(畵))가 어찌 나뉘겠는가? 이 그림을 보는 자들은 마땅히 먼저 이 공안(公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곡운구곡도’를 통해 김수증이 진경산수의 개념을 실천으로 보여줬다면, 조카 김창협은 이렇듯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실제 김창협의 동생 김창업(金昌業 1658∼1721) 등 그의 여섯 형제들이 18세기 조선 화단에서 각각 풍속화와 산수화를 대표해 사실주의를 구현했던 조영석(1686∼1761)은 정선을 후원했다. 조영석은 ‘그림을 보고 그림을 옮겨 그리는 것은 잘못이며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삼연 김창흡은 형인 창업 등 여섯 형제와 함께 백악사단을 만들어 시인 묵객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 여기에 화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시인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등이 가세했던 것이다.   
 
이들 시인과 화가들이 인왕산 아래 모여 서로 교유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삶을 상상해보라. 그들이 있어 겸재는 행복했을 것이고, 예술세계는 풍성해졌을 것이다. 


↑ 겸재 정선, <청풍계도> ‘장동팔경첩’. 
인왕산 동쪽 기슭에 있는 김상용의 별장 청풍계를 그린 것이다.


↑ 겸재 정선, <청휘각도> ‘장동팔경첩’.
청휘각은 김수항의 정자로 인왕산 기슭 옥류동 저택의 후원에 위치했다.


특히 김창흡은 겸재를 대동하고 묵객들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기도 했다. 이때 겸재의 친구로서 금강산 초입의 금화 현감으로 가 있던 이병연도 여행에 동참한다. 이병연은 이때 그린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모아 ‘해악전신첩’이라는 화첩을 만들고 폭마다 제시를 붙인 다음 스승 김창흡에게 보인다. 여기에 김창흡도 글(제사)를 붙인다.  


↑ 겸재 정선, <금강내산총도> ‘해악전신첩’. 
비단에 담채, 49.5 뻂 32. 5㎝, 간송미술관 소장.


↑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총도>에 부친 김창흡의 제사.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해악전신첩’이야말로 진경산수의 정수였다. 그러고 보면 진경산수의 뿌리는 노론이라는 일부 시각이 지나친 것만은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예술 사랑과 후원 활동
 
19세기로 넘어오면 장동김씨 집안 예술적 후원가로는 풍고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빼놓을 수 없다. 김조순은 경화사족 출신 정치인이자 예술가 사상가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다. 김조순은 정조가 키운 친위관료로서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정조는 김조순의 원래 이름 ‘낙정(洛淳)’을 ‘祖淳)‘으로 바꾸어 내리고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줬다. 정조가 곁에 두고 싶어 지방관으로 파견하지 않았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급기야 1780년 정조에 의해 당시 세자 순조의 장인으로 간택되기에 이른다. 
 
김조순은 시서화 및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판소리 공연과 기악 등에 흥미를 느껴 이에 대한 시를 지었고, 거문고를 배웠다. 글씨와 그림에 능해 정조가 그의 글씨를 궁궐 내 부용당(芙蓉堂) 현판에 쓰기도 했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평문을 짓기도 했는데, 조선의 산하를 그린 사실적으로 그린 정선보다는 중국색이 짙은 심사정(沈師正 1707∼1709)을 더 선호했다. 19세기 들어서는 청조 문물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면서 실경산수가 밀려나는 시류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19세기 중후반 안동김씨 중에서 예술 후견인 반열에 오른 이로는 김이도(金履度 1750-1813), 김흥근(金興根, 1796∼1870), 김유근(金유根, 1785∼1840)등이 있다. 
 
김이도는 중인 컬렉터 석농 김광국, 문인 서화가 신위(申緯 1769∼1847)와 어울렸다. 신위는 집안에서 대대로 간직해오던 황공망의 ‘부춘산거도’를 김이도가 간절히 원하자 몰래 주었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헌종 때 안동김씨 세도를 믿고 방자하게 굴어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던 김흥근은 골동서화를 많이 간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김흥근은 당시 이름을 날리던 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3)과 절친했다. 김흥근은 전남 진도에서 서울에 올라온 추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3)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후견인 노릇을 했다. 허련은 김흥근의 서화 수장고 역할을 했던 서울 근교 별장 현대루(玄對樓)에 놀러가 컬렉션을 감상하고 감식해줬다.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신위 권돈인 김정희와 친분을 나누며 서화를 즐겼다. 메디치가와 안동김씨. 둘의 공통점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을 향유하고 지원하는 일은 권력과 부를 지닌 이들의 몫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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