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4. 17:16ㆍ산 이야기
매화는 꽃 중의 一品(일품)으로 만물이 소생하기 전
흰 눈 속에 홀로 피어 봄을 알린다하여 雪中梅(설중매)로 불리워 졌다.
그 굳건한 정신은 예부터「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을 팔지 아니 한다."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 나가는 이러한 선비정신의 표본이 梅月堂 金時習 (매월당 김시습)이 아닐까 한다.
김시습은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아직 돌도 되지 않았던 어느날, 이웃에 살고 있던 최치운(崔致雲)이라는 학자가
아기인 김시습에게 문장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 버렸다 한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두 살 되든 해 "꽃이 난간 앞에서 웃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고"."花笑檻前聲未聽" 읖자 병풍에 꽃을 가리키고,
"새가 숲에서 우는데 눈물은 보이지 않네"."鳥啼林下淚雜看"하자 병풍에 새를 보고 웅얼거렸다 한다.
그리고 세 살 되어 말을 배워서 시는 어떻게 짓느냐고 묻자
외할아버지가 일곱자를 이어서 평측과 대우와 입운을 갖추면 된다고 하니
첫 자를 달라고 하여 春자를 불러주니
"새 오두막에 봄비가 오자 기운이 열리는 구나" 春雨新幕氣運開 이어서
"복사꽃은 붉고 버들가지는 푸른데 삼촌이 저무는구나" 兆紅柳緣三春幕 라고 읊었다.
"구슬을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의 이슬일세" 珠貫靑針松葉露 등등 거침이 없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당시의 재상 허조(許稠)는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김시습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해 보았다.
“너는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 수 지어 보아라.”
허조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보였다.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천재적인 표현인가! 너는 과연 신동이로다.”
재상 허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란 싯귀를 주니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 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라고 댓귀를 지으니 비단 50필을 하사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또한 세자(문종), 세손(단종)을 가리키면서 "저 두 사람이 너의 임금이 될 것이다. 잘 기억해 두어라 했다."
이로부터 그가 천재라는 소문이 송도에 퍼지게 되었으며,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는 칭호를 받아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김시습의 나이 21세 되던 해 봄. 서울로부터 오는 사람이 있어 세조 쿠데타의 슬픈 소식을 전했다.
김시습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더니 사흘만에 크게 통곡하고, 공부하던 책을 모조리 불사르며,
그리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중의 이름은 설잠(雪岑)이라 지었다.
연연해 있던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면서도 수염은 깍지 않았다.
"머리를 깍은 것은 세상을 피하고자 함이요, 수염을 남긴 것은 장부임을 나타내고자"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그의 긴 방랑이 시작된다.
"푸른 벼랑 일만 길에 단풍잎은 붉은데 / 나그네 바람처럼 지팡이 짚고 길 떠나네"
라고 노래했지만 당시의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훗날, 당시의 심정을 "높은 벼슬에 오를 마음은 적어만 가고 / 구름과 숲 속을 노닐 생각만 가득했으니 / 오로지 세상을 잊어버릴 생각 뿐"이라 했다.
신숙주가 김시습이 서울에 왔단 말을 듣고 술에 취하게 한 다음에 자기의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었다.
술이 깨자, 신숙주가 그의 손을 잡고 "열경(매월당의 자)은 어찌하여 한마디도 말을 아니 하오?"하니 김시습이 입을 다물고 옷깃을 끊어 버리고 돌아갔다 한다.
술을 마시고 길을 가다가 당시 영의정이 된 정창손을 보고 "저 놈은 꺼져야 마땅하다!"고 소리를 지를 정도가 되었다.
서거정에게도 그랬고 신숙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이 높은 대신을 욕보였기 때문에 죄를 주어야 된다고 했지만
"이 사람을 죄 준다면 두고두고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질 것이오"라고 거절했다.
미친 체하고 기괴한 행동을 하여도 친구들은 그의 속마음을 인정해준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세조의 일등 공신 한명회의 압구정(갈매기와 벗삼아 자연에 묻히겠다고 이름을 지었다)
현판시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청춘엔 사직을 붙들었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 에
김시습은 부(扶)자를 위(危)자로 고치고,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놓고 갔다.
즉, 靑春危社稷 白首汚江湖
"청춘엔 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다."했으니 실로 기막힌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양반 자제들이 그의 학문이 높음을 알고 글 배우기를 청하면
반드시 김매고 농사 짓는 힘든 일을 시키는 까닭에 끝까지 학업을 전해 받은 사람이 적었다.
농민의 고통을 함께 하고자 했음이리라.
<해동이적>은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에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김시습이 일찍이 설악산에서 은거하는데,
강릉 사람 최연이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왔다.
김시습이 그들의 인물됨을 살펴보니, 최연이 제일 쓸 만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최연만을 제자로 삼았다.
최연은 오세암에서 매월당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최연은 자나깨나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밤중에 어쩌다 잠이 깨어 눈을 떠보면 스승이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최연은 김시습이 한밤중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끝에 드디어 하루는 스승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김시습은 골짜기 하나와 능선 하나를 넘어 넓은 바위가 있는 데로 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길 나눴다.
그런데 김시습은 최연이 몰래 숨어서 엿본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너를 제자로 삼을 만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물러가라." 최연이 백배사죄했으나, 김시습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양부사였던 유자한이 그를 존경해 때때로 음식과 의복을 보내주었으며, 벼슬 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자 김시습은 "자신의 넋을 떨어뜨리고 세상을 살기보다는 소요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년 뒤에나 나의 본래의 뜻을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울화병」이란 시에서 그는
십년을 떠돌며 산과 물에 노닐었더니
독기 품은 비와 연기가 번번히 몸을 괴롭히네
이슬을 맞으며 강 마을에 잠들면 바람은 병 속을 도려내고
바위틈엔 별빛 비쳐 싸늘한 기운 몸에 스미네
보이는 거라곤 두 귀밑에 해마다 늘어나는 흰 터럭이고
알지 못하는 새, 두 눈썹엔 주름만
차츰 늘어가는구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지만 당시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밤은 언제 새려는가? 이 밤도 기어이 동터오는가? / 뭇별은 빛을 잃고 칠성만 남았네"
라고 동터오는 새벽을 알렸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도 처참했다.
그가 그리던 꿈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선가(仙家)에서는 그가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선도(仙道)를 닦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선가서(仙家書)인 <해동이적(海東異跡)>과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자세히 쓰여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시습에게 선도를 가르친 사람은 김고운(金孤雲)이다.
김고운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본명히 설현이었으며 그는 지리산에 들렀다가 권청(權淸) 진인(眞人)을 만났다.
이 권진인이 설현을 선도에 입문시켰다.
그후 설현은 명오스님의 지도에 따라 8년 동안 수행하여 득도(得道)했다.
설현은 득도하자 곧 선계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도(道)를 전수해줄 제자를 만나지 못해 인연이 닿는 사람을 기다렸다.
이 때 이름을 김고운으로 고쳤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분을 맺었으나 누구도 그의 참모습을 몰랐다.
김고운은 매월당에게 도를 전한 뒤에 선계(仙界)로 올라갔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김시습은 도(道)를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유명한 이인(異人)들이다.
정희량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까지 지냈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될 줄 알고 종적을 감췄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곳은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 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다 3년 동안 묻어둬라.
그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그가 원한대로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다.
관을 뜯고 보니, 김시습의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산 사람이지 시신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모두들 그가 성불(成佛)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이 죽어서 3년이 지난 뒤에도 시신은 산 사람과 똑같았는데 얘기는,
이율곡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도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론 매월당 김시습이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세암은 선계(仙界)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라 한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설악산 유람기.(152)
하촌. 류재호. (제1편)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유불(儒佛)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으며.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ㅡ1493)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 법명 설잠(雪岑:눈덮인 산봉우리)
은 1453년 계유정난때 생육신(金時習.元昊.李孟專.趙旅.成聃壽.南孝溫)의 한사람으로 속세를 떠나 은거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
를 지킨 신하다 ..
매월당이 무인년(세조3년)봄 금강산을 유람하며 신계사(新戒寺)의 지료(智了). 발연암(鉢淵庵)의 축명(竺明). 표훈사(表訓寺)의
지희(智熙). 장안사(長安寺)의 조징(祖澄). 유점사(楡岾寺)의 석명(釋明). 성불암(成佛庵)의 성통(性通). 미타암(彌陀庵)의 해봉
(解逢). 대송라암(大松蘿庵)의 성호(性湖). 원적암(元寂庵)의 계능(戒能)등. 고승들을 만나며 교우하고. 설악산에 들어와 거처를
정한후.설악산 유람길에 채비랍시고 술만 한병 꿰차고 혼자 마등령(馬登嶺)을 넘어 천불동으로 가는길에 낙상하여 발목을 다쳐
오도가도 못하자 인적도 드믈고하여 매월당은 심메꾼들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서 에멜무지로 [두둑시라봤다] 하고 외쳤다.
두둑시라는 산삼이 무더기로 있는 곳이란뜻의 설악일때의 방언이다. 두어번 외쳐보았으나 메아리 이외는 기척이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돌이 구르는 소리와 함께 한떼의 산적들이 득달하는 것이었다. 산삼을 빼앗으려고 몰려온 것들이다.
"어렵쇼, 이 늙정이는 또 뭣인고. 중두아니구 아닌것두 아니구,빨래두아니구 걸레두아니구..."
타래머리를 한 햇내기 하나가 바윗등에 의지해 있는 매월당을 보고 허방을 짚었다는 투로 지껄이고 있었다.
매월당은 실소를 하였다. "그놈이 아가리 한번 바르구나. 네말대로 긴 것도 아니고 아닌것도 아니고 그냥 설잠이니라."
그러자 키가 처마에 닿게 장하고 몸집도 큰놈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묻지 않아도 우두머리였다.
"아렇게 뵙자올줄은 몰랐습니다.이놈은 권금성(權金城)에 굴을 둔 산주(山主) 놈이 올시다. 하고 일어났다가 절을 하더니.
이것들은 뭣들하고 자빠졌는 게냐 대인께 어서 문안 드리거라. 하며 뒤를 돌아보며 눈을 한번 부라린다음 다시 꿇어앉는 것이었다.
권금성은 노루목 맞은편의 산봉우리를 두른 돌성으로. 한2백년전 원(元) 나라가 쳐들어올때 권씨와 김씨가 권솔을 이끌고 피난했던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들었다. '그럼 작자는 권가아니면 김갈러니' '아니올시다. 이놈은 영평 마가이옵고 이름은 호골(虎骨)이라고합죠.' 마씨(麻氏)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변성명일 터이므로 매월당은 그자의 생김새를 찬찬이뜯어보니 상판은 양푼에떠서 솔려놓은 도토리 묵처럼 검고 너부죽한데.수령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물렁한 데가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우두머리가 걸친 윗도리는 통짜 돼지가죽으로 지은 피갑(皮甲)과 비슷한 것이었고. 신발은 갖바치가 녹비로 공들여 만든 목화를 신었는데. 그 허우대에 더도덜도 아니게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아무렇건 작자는 외설악의 산주고 나는 내설악의 산주로. 이렇게 산주끼리 만났으니 그대로 말수가 없는데. 술병이 저 지경이 됐으니 장히 섭섭하네그려.' 듣자오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놈이 수령이긴 하오나 어찌 감히 맞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작자는 나를 어떻게 알았던고?. 대인을 모른대서야 어찌 사내라고 할깝쇼. 산 밑에서 나는 소리는 산에서도 듣기 말련인데.
실인 즉슨 접때도 고을 아전것들이 등짐을 지고 오르는것을 털려고 했으나 대인께 올리는 공양이라 하기에 그친 적이 있었더이다.
"그렇다면 산주끼리는 이미 동맹(同盟)이 있었네그려." 이놈이 기구한 놈이라 도와는 못 드릴망정 설마하니 딴전이야 보겠습니까.
'허지만 지금은 돕게' '이리 뫼시어라' 우두머리는 제 등을 돌려대면서 명령하였다. 매월당은 우두머리의 등에 업혀서 돌아왔다.
당시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은 가까운 친구로 매월당이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아전을 시켜 등짐으로 설악산으로 올려 보냈다.
술은 물론이고 종이와 붓 등 일절 올려 보냈는데 이 봉물(封物)이 매월당에게 가는것을알고 산적들은 절대 손을 대지않었다.
날이 해동하자 매월당은 양양 현감인 유자한을 찿아 보기로하고 길을떠났다 어려서는 선후배로 한동네서살고 늙어서는 관.민 간으로 한 고을에서 살게된 끈질긴 인연이었다. 유자한은 매월당을 반겨하며 뜰에서 내려와 맞아들였다. 얼마만이었던가.얼마만인지는 이루 헤아리기가 번거로워서 서로가 그만두었다. 유자한은 연 사흘에 걸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첫날은 객사옆에 있는
태평루(太平樓)에서. 이튼날은 고구려의 잔읍이기도한 옛 동산현(洞山縣) 지경의 관란정(觀瀾亭)에서. 그 다음날은 온종일 말을 달려 청초호(靑草湖)로 옮기고. 청초호와 영랑호(永朗湖)에서 녹초가 되도록 선유(船遊)를 하며 깨고 취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술에취해 객사에 들은 매월당 방에 유자한이 소동라 라고하는 기녀를 들여보내 천침을 들게했다.
매월당은 술에 덜취한데다 시심이 잠을 쫒는 바람에 늦도록 홍초를 끄지 않었다.
매월당은 기녀와 둘이서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법도 하였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시로써 문답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부드럽게 물었다. "너도 시(詩)를 좀 알렸다.?" "시 시(詩)자는 모르고 때시(時)자는 아와요" 소동라는 긴치 않은 물음에 편치 않은 대답인양 부드럽지 않게 대꾸했다. "때를 안다것다. 그래 무슨때를 알더냐.?" 매월당은 웃으면서 물었다.
"천 첩이야 돈 벌때를 .돈쓸때를 알면됐지 무슨때를알아서 뭘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느때인고.? 지금은 홍초를 끄고 주무실때올시다. 소동라는 그러면서 슬며시 일어나 앉더니 스스럼없이 홍초를 껐다. [이글은 약 500 여년전 설악산 유람기다.]
淸閑子 金時習 - 仙道
청한자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신동(神童)으로 태어나, 나이 5세에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나라의 큰 재목으로 쓰이기로 결정되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다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5세’ 또는 ‘김5세’라고만 불렀다. 설악산의 ‘오세암’은 바로 김시습이 지어 공부했던 암자이다.
청한자 김시습은 태어나면서부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곳 우리민족 고유의 도(道)인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 전수자인 영해박씨(寧海朴氏) 가문의 종사(宗嗣))에게서 특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정통적이고 체계적인 수업을 받았다.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고운(孤雲) 최치원, 고려의 강감찬과 곽여 등도 영해 박씨 가문의 종사에게서 수업을 받은 사람들이다.
청한자 김시습은 서울 반궁(泮宮, 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던 날 밤 같은 마을에 살던 영해 박씨들은 그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가보니, 과연 아기가 태어나 있었다고 한다.
아기는 총명하여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저절로 글을 알고, 3세가 되자 시(詩)를 자유로이 지었는데,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며 이런 시(詩)를 지었다.
우레 소리도 없는데 어인 천둥인가. 無雨雷聲何處動
노란 구름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지네. 黃雲片片四方分
그리고 5세에는 문리(文理)를 깨달았으며, 《중용中庸》《대학大學》에도 통달하였다. 그러자 이름난 정승 허조(許稠)가 찾아와 말을 시켰다.
“내 늙었으니, 늙을 노(老)자로 시를 지어 보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
김시습의 즉각적인 시작(詩作)에 허 정승은 연발 무릎을 치며 ‘신동(神童)’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세종대왕이 대궐로 불러 시험하셨다.
“동자의 학문은 마치 백학(白鶴)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을 추는 것 같구나.”
“어진 임금님의 덕(德)은 마치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노는 것 같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이 기뻐하시며 비단 50필을 하사 하시고, 그 집에 일러 아이의 재덕(才德)을 감춰 기르라 하시며, 장차 크게 쓰겠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김시습이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세종대왕과 문종이 잇달아 세상을 뜨시니, 어린 단종이 나이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니, 이때 김시습의 나이는 21세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단종의 손위(遜位)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대성통곡하며 모든 책을 불태워 버리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사건은 김시습의 생애에서 숙명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아직 세파에 때가 묻지 않은 21세라는 그의 나이는 불의(不義)에 의해 정도(正道)가 무너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시습은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어 주었다. 이에 후대 사람들은 살벌하고 무서운 시대에 두려움 없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준 절의(節義)를 높이 사서, 김시습을 생육신(生六臣)으로 추대하였다.
김시습은 또 단종이 암살되자 계룡산 동학사에 몇몇이 모여 남몰래 제사를 모시고, 절의(節義)를 지켜 영원히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일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갑자기 충격적인 일을 당하자, 나는 생각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뜻을 실행할 수 있는데도 물러나 자기 몸만을 깨끗히 하여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다면,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 뜻을 실행 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제 한 몸이나 깨끗이 하는 것이 나으리라.’
이렇게 세속을 떠난 김시습은 한동안 영해 박씨들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나중에 설현(偰賢)을 만나 한계산(寒溪山)에서 연단법(煉丹法)을 수련하게 된다. 설현은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권진인(權眞人)으로부터 도(道)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권진인은 김시습의 사조(師祖)가 된다.
김시습은 설현에게 선도(仙道)를 배운지 1년 만에 단(丹)을 이루었으며,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9년을 수련하여 득도하였다.
또한 김시습은 10여 년에 걸쳐 신라의 화랑들처럼 전국 국토순례(國土巡禮)를 하였다. 그리고 경주 금오산에서 7년 동안 묻혀 저술에 몰두하였으니,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였다.
《금오신화》는 부정한 현실체제에 합류할 수 없었던 그의 이상(理想)과 그동안 전국을 순례하면서 얻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영감(靈感)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이렇게 7년 동안 《금오신화》를 완성한 김시습은 그것을 석실(石室) 속에 감춰두며 이렇게 말했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금오신화》를 바로 발표하지 못하고 ‘때’를 기다려야만 했을까?
조선시대는 주자학(朱子學)을 숭상하고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은 왕조였다. 그러므로 유교 이외의 사상(思想)은 모두 이단(異端)으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영영 매장당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금오신화》를 집필하였지만, 그 작품 속에 들어있는 선도사상(仙道思想) 때문에 바로 발표하지 못하고 ‘때’를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선도(仙道)의 특성 자체가 밀의적(密意的) 비전성(秘傳性)을 띠는 데다가, 조선조의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청한자 김시습은 자신의 진면목을 두꺼운 베일 속에 감추었다.
김시습은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였으며, 와서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나무나 돌로 치려하고, 활을 당겨 쏘려고도 하며 그 성의를 시험하였다. 또 비단옷을 입는 집의 자제라도 반드시 일을 시켰다.
그리고 산에 살면서 나그네를 만나면 서울에서 자기를 어떻게 평하더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욕하고 나무란다.” 하면 반드시 얼굴에 기뻐하는 빛을 지었고, 만일 “거짓 미친 체하고, 속에는 딴 마음이 있어 그런다.” 하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찡그리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벼슬도 하지 않았던 청한자 김시습이 누더기에 패랭이를 쓰고 14세 연상의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타고 가는 가마에 거침없이 다가가 서거정의 호를 부르며 수작을 하였다.
“강중(剛中)은 편안한가?”
그러면 대제학 서거정이 가마를 세우고 김시습과 한참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 40세 연상인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와도 허물없이 친구로 지내는가 하면 김수온(1410~1481), 서거정(1420~1488), 홍윤성(1425~1475) 등 모두 나이 많은 고관대작들이 김시습(1435~1493)을 깍듯하게 대접하며 상석(上席)에 앉혔다고 한다.
이는 김시습이 5세 신동(神童)이라거나, 유불도에 통달한 학자 내지 도인(道人)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도(正道)를 수행(修行)하는 힘, 즉 기세(氣勢)에서 항상 청한자 김시습이 여타의 인물들보다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청한자 김시습은 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신동이자 천재였지만, 세조가 불의로 왕위를 찬탈하자 서책을 모두 불사르고 관직에 나가기를 거침없이 접었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이 몰살당했을 때도, 김시습만이 홀로 두려움 없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굽힐 줄 모르는 굳센 기세(氣勢)를 가졌던 청한자 김시습은 승려의 신분으로서 운명할 때에도 선도(仙道)의 시해선(尸解仙)으로서 마지막 삶을 끝마무리 하였다.
시해선(尸解仙)은 바로 지상선(地上仙)이었으니, 그로 인해 청한자 김시습이 조선시대 선도(仙道)의 비조(鼻祖)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운명할 때 승려의 신분으로 마땅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해야 했으나, 그는 이렇게 유언하였다.
“내가 죽거든 화장(火葬) 하지 말고, 땅에 묻으라.”
그래서 절 옆에 임시로 묻었다가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그 빈소를 여니, 얼굴이나 모든 것이 생시 모습 그대로였다. 바로 선도(仙道)의 시해선(尸解仙)이 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율곡 이이(李珥)는 이렇게 말하였다.
“필경 외도(外道=仙道)를 닦은 때문에, 죽었어도 살았을 때처럼 모습이 그런 것이다.”
수락산 매월정
많이 좋아진 다리를 바라보며
다시 산행 길에 오르고 싶은 마음에
지난 봄에 수락산 매월정에 올라 매월당 김시습을 만났던 추억을 떠 올린다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 중 한분으로
수락산에 터를 잡고 스스로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칭한 김시습
김시습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고,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의 저자
1471년 성종이 즉위하자
37살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와 수락산근처 폭천정사에서 10여년을 지낸다.
천재성과는 달리 생은 한없이 곤궁했고 고독으로 점철된 방랑의 노정이었다.
김시습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선각자적 삶이 가장 많이 녹아있는 곳이 바로 수락산이다.
11년간 머물면서 불의에 대항했고,
서슴없이 파계할 정도로 열렬한 사랑도 했으며,
두 사람은 수락산 곳곳을 함께 다니며 사랑의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만큼 질투의 신 역시 그를 좌시하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자신의 반쪽을 보낸 김시습으로서는 파계까지 감행하며 사랑했던 여인,
시에 실려 있듯 여한 없이 누린 사랑을 잊을 수 없었고 기어코 상기의 시를 남긴다.
그리고 그 시를 슬며시 금오신화에 삽입한다
또, 김시습의 성품과 인간관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다
벽에 붙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글을 보게 되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돕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이 시를 보고 그는 선뜻 붓을 들어
'부'(扶) 자를 '망'(亡)자로, '와'(臥) 자를 '오'(汚) 자로 고쳐 버렸으니 ....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수락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녹음 짙은 산 속에는
고뇌에 찬 모습으로 걷고 있는 김시습의 모습이...
수락산을 떠돌며 열애를 했었다는 김시습의 순수한 인간적인 삶이
산바람에 섞이어 느릿느릿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의 글을 보고 행복한 산행에 흠뻑 빠졌다
내 마음을 살며시 김시습의 삶 곁에 놓아 본다.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산하나 넘고 나면 또 산하나 푸르네
마음에 집착 없거늘 어찌 육체의 종이 되며
도는 본래 이름할 수 없거늘 어찌 이름을 붙이리
간밤의 안개 촉촉한데 산새들은 지저귀고
봄바람 살랑이니 들꽃이 환하네
지팡이 짚고 돌아가는 길 일천 봉우리 고요하고
푸른 절벽에 어지런 안개 느지막이 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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