鷺山 이은상과 설악

2013. 5. 14. 17:25산 이야기

 

 

 

설악산이여!

                     이은상


설악산이여!
이 밤만 지나면
나는 당신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의 품속을 벗어나
티끌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마지막 애닯은 한말씀
애원과 기도를 드립니다.

설악산이여!
내가 여기와
흐르는 물 마셔 피가 되었고
푸성귀 먹어 살과 뼈되고
향기론 바람 내 호흡되어
이제는 내가 당신이요
당신이 나인걸 믿고 갑니다.

설악산이여!
내가 사는 동안
무슨 슬픔이 또 있으리이오.
아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통분할 일이 겹칠적이면
언제나 사랑의 세례를 받으려
당신만을 찾으리이다.


 


 

■ 영겁의 세월에도 마르지 않는다 


◇ 운무가 드리운 설악의 아침빛. 사진 성동규

 

   인간이란 존재로서 설악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떤 어구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다만 “억!”하는 외마디 비명만 머리를 스쳐갈 뿐,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 절경을 표현해낼 수 있겠습니까. 시대의 걸출한 문장가가 그 준엄한 산세와 장쾌한 광경을 아무리 잘 표현해낸다 해도, 그것은 인간의 머리를 거친 문장일 뿐. 설악을 표현하는 데는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그만큼 설악은 특별하고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설악을 이야기함에 있어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조시인인 노산 이은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7년,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산악인의 100자 선서'를 제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는 산을 사랑하고 즐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1930년대에 설악을 기행하고 남긴 기행문이 있으니, <노산문선> 중에 수록된 '설악행각'이 그것입니다. 이 '설악행각'과 비교하여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것만한 설악유람기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설악행각'은 설악에 관한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산도 설악에 관하여 어떤 문구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허나 그러면서도 그가 굳이 '설악행각'이라는 유람기를 남긴 이유는 다음 문장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저렇듯한 영구 명승으로서 사람마다의 근참은 그만두고라도, 조그마한 유기 일편조차 우리에게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네의 산악 순례에 대한 열성이 이렇게도 엷구나, 우리네의 산악 순례를 위한 여유가 이렇게도 없구나'하는 장탄과 아울러 얼른 이 '기회'에 대답하고 나선 것도 한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있기에 우리는 그가 걸었던 유람길을 따라가보고자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최고 중의 최고로 삼는 산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선인의 발자취를 좇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 노산 행각, 세월은 길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노산이 설악을 유람한 10일 간의 여정을 다 따라가고 싶지만 우리의 사정이 허락지 않습니다. 그 사정이란 것이 그가 설악 행각을 시작한 십이선녀탕계곡과 장수대 부근이 지난 수해로 인해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첫째요, 대승령에서 흑선동계곡을 지나는 구간이 국립공원특별보호구라 하여 출입이 불가함이 둘째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러저러한 사정은 핑계일 뿐, 지금을 사는 우리네의 바쁜 일상이 걸림돌인 것도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여하튼 우리가 기점으로 삼은 곳은 노산의 설악 행각 6일째 코스에 해당하는 백담사입니다.

  

   노산의 '설악행각'에 따르면 백담사의 전신은 지금의 장수대 부근에 있었던 한계사였다고 합니다. 그 사찰이 세월을 거치며, 무수히 명칭이 바뀌고 자리도 여러 번 옮기다가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지금의 백담사 자리인 것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백담계곡의 계류(谿流)를 봤을 때 그리 모자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만, 노산은 이 백담에 대해 '고작 자리 잡은 곳이 이 곳인가'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시작점으로 들어왔기에 만족할만 했지만, 내설악의 명승을 이미 둘러보고 온 노산의 눈에는 썩 성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 설악에서 가장 영구한 역사를 지닌 암자라는
봉정암은 괴암 기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당시 노산은 설악을 찾으며 길을 안내해 줄 현지 '심마니'와 곰, 산돼지 같은 짐승들로부터 보호해 줄 포수들을 대동하여 15명 정도의 '원정대'를 꾸려 움직였습니다. 탐방로가 나있지 않은 시절이라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되니, 세월의 차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은 것인지요. 그러나 아무리 세월의 힘이 무섭다한들 설악의 수려한 풍경까지 변하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까이로는 수렴동, 멀리로는 청봉 아래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물들이 그 사실들을 증명해 줍니다. 설악 곳곳의 봉우리에서부터 내려오는 물들이 합쳐지는 계곡의 끝자락. 그 모든 수량을 담아내기 위해 광활한 돌밭에 자리 잡고 흐르는 맑은 물을 끼고 길을 오르고 있으니 이미 설악의 진경이 시작된 것을 알겠습니다.

 

   계곡소리, 새소리에 취해 한시간여쯤 걸었을 무렵, 먼곳에서부터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려오니 바로 영시암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입니다. 영시암! 영원히 명세한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산 중 고요한 수도의 장이자, 아름다운 설악 절경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시암을 지나 조금만 오르면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만, 우린 노산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수렴동으로 향합니다. 노산에 의하면 '금강산의 만폭동'과 같은 곳이라 수석(水石)이 최고라 하던 수렴동! '난석의 등성이를 춤추듯이 뛰어 넘으며…기승스럽고 기절차게 소리를 지르며 터져나오는 물이 대연을 이루어, 발길을 막습니다'라고 말했던 수렴동. 하지만 지금 이 등산로는 너무도 길이 잘 닦이어 노산의 감흥까지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발끝의 길만 보고 오르다보니 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 바도 없고, 잘 만든 철제다리로 훌쩍 건너뛰니 물이 발길을 막을 일도 없습니다. 세월이 바꾼 것이 있다면 이정도의 차이겠지요. 과연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길의 어느 부분을 노산이 밟아보기는 했을는지. 어쨌든 그가 택해 오른 이 길이 지금 많은 현대인들이 즐겨 오르는 길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 설악을 금강이라 부를 순 없으니


   수렴동대피소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본격적으로 수렴동계곡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곳부터는 가면 갈수록 놀라운 길, 왜 세간에서 설악이 금강을 닮았다고 이야기하는지를 절절히 깨닫는 대목입니다. 금강에서 보고 놀랐던 옥빛의 물이 또한 이곳에 고스란히 있고, 그 물들을 굽이치고 쏟아지게 하는 바위도 설악은 전부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이 이럴진대 어찌 금강만이 한반도의 진산이라 하겠습니까. 이 형상을 보니 그가 '눕고 앉은 곳이 다 강산'인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설악을 찾은 연유를 알겠습니다. 이 시대에는 남북이 갈리어 금강은 '그리운 금강산'이 되어 향수를 자극하지마는 언젠가 금강과 설악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금강이 설악을 시기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구태여 덧붙이자면 지금 오르는 이 길은 금강의 구룡폭을 빼다 박았다 하겠습니다. 남한에 있는 무수한 산들도 제각기 생긴 형상이 다르거늘 어찌하여 이 설악은 금강을 닮았겠습니까. 오랜 옛날부터 유명세를 타며 인기를 높인 금강을 견제하여, 설악의 바위들이 조화라도 부린 것일까요. 금강의 옥빛 물과 바위들에 비교해보매, 더 걸출하면 걸출하였지 전혀 뒤지지 않으니 과연 설악이 명산임에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지금 한창 새로 구축 중인 목재 다리에서 바라보는 정경이 안타까운 심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무리 설악이 금강을 닮았다 한들 설악은 설악으로서 존재하거늘, 왜 신식 구조물에서 바라보는 정경들이 모두 금강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설악이 실제로 금강의 모습을 따라했다 한들, 그 의도는 금강의 아름다움을 넘으려 한 것이었을 진대 작금 사람들은 그 청아한 풍경을 금강과 판박이로 만들고 있으니, 설악이 설악임을 잃을까 하는 우려도 생겨납니다.

 

 

   한걸음, 한풍경 지날 때마다 '악!'하는 감탄을 거듭 느끼며 오르다 보니,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정면으로는 어디서 떨어지는 것인지 가늠도 하기 힘든 높은 곳에서 물이 쏟아지고, 좌편으로도 끝을 찾아보기 힘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립니다. 이 웅장하고도 장엄한 풍경에 감탄을 발하고 나서야 이곳이 그 유명한 쌍폭인줄 알겠습니다. 비로소 여기까지 오며 발길을 멈추고 담았던 각각의 폭포들이 용손폭, 용아폭이었음을 깨닫게 되니, 노산처럼 안내인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안내인의 존재가 얼마나 중한지도 알겠습니다. 또한 노산의 말에 따르면 정면의 '웅폭'을 넘어 청봉곡으로 들어가면 십이폭의 절경이 펼쳐진다 하나, 노산은 숙박이 불가해 가지 못하였고 우리는 탐방로가 막혀있어 오르지 못하니 이 또한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좌폭의 골짜기인 풍정곡으로 올라갑니다.


   노산은 이 골짜기를 오르며 방원폭을 비롯하여 구곡담을 보았다고 했으나, 우리가 오르는 길은 점차 물길의 흔적도 찾기 힘들어지고 마냥 올라가는 길일 뿐입니다. 높은 곳으로 오르매 길이 험해지고 점차 바람이 거세어지며, 어느새 봉정암에 다다릅니다. 이곳 봉정암은 노산이 다음날 일찍 대청봉에 이르기 위해 하루를 묵었던 장소입니다. 그 시절은 이곳이 대청봉에서 가장 가까운 숙박 장소였겠으나 우리는 조금 더 올라가면 소청산장이 있고, 대청봉 바로 아래 중청산장도 있으니 그때에 비하면 설악을 오름이 얼마나 쉬운 일일까요.

 

 


■ 악천의 청봉에서 아쉬움을 달래네


   봉정암에서 소청을 오르는 길은 무척 험하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주 고된 길입니다. 다행히 해가 지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쉬어가며 올라 소청산장을 지나 소청봉으로 발걸음을 이어갑니다. 봉정암 부근에서는 잠시 잦아들었던 바람이 산장 위부터는 광풍이 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듭니다. 이어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고산지대의 황량초원! 바위틈을 비집고 나올 정도로 생명력 강한 풀들도 바람을 이기지 못해 납작 엎드려 포복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풀이름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태생이 다른 종자들인데, 어찌 저리도 같은 배에서 난 자식들처럼 비슷한 키재기를 하고 있을까요. 암벽과 바람 그리고 풀. 이 대자연이 만들어 낸 별천지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중청으로 올라갑니다.

   

   중청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을 타고 넘어온 구름이 짙은 운무를 만들어 냅니다. 노산은 이 청봉을 오르며 멀리 동해바다와 낙산, 양양, 강릉 등지를 바라보며 '저기는 인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대자연 속에서 번뇌를 느꼈다는데, 이 운무와 바람 앞에서는 이 한몸 사리기에도 힘이 듭니다. 청봉의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이고, 심한 바람이 운무를 계속 몰고 오는지 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요한 산정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 울리고 별 감흥을 느낄 새도 없이 잠에 빠져 듭니다.

    이른 아침, 대청봉을 오르려는 사람들의 분주함에 눈을 떴으나 안개에 잠긴 설악은 진경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청머리에 중청머리에 그리고 저 아래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에도 가득히 안개옷이 입혀져 보이는 바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 대청 너머로 솟아오른 해가 구름에 가리며 달처럼 은은하게 비치는 신비한 정경을 깔아주어 그나마 위안을 삼습니다. 기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서겠다는 각오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펼쳐지는 풍경을 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대청봉에서의 허탈함보다 이런 신비를 보고 내려가니, 여기까지 오른 보람이 있다 하겠습니다.

 

   노산의 유기에 따르면 그는 대청에서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간 후, 가야동계곡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길을 따르자니 왔던 길을 다시 되짚는 길이라 자칫 지루할 것이 염려되었으나 천하 강산에 한번 봤다고 지루한 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라올 때는 오름짓에 지쳐 보지 못했던 자연풍광들을 접하게 되니, 백담사에서 스쳐보았던 고은 선생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본 그꽃'이란 말뜻을 알겠습니다.

  

   봉정암에 들러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시고 이제 오세암으로 향해 갑니다. 이 길에서부터 물이 다시금 작은 계곡을 이루어 정겨운 기분마저 듭니다. 겨우 하루만에 다시 만난 계류일진 대 이리 반가울 수가 있겠습니까. 발걸음마저 가벼워져 금세 가야동계곡과 합수되는 지점에 이릅니다. 노산은 이 합수점에서 물길을 따라 가야동으로 들어간 것으로 사료되나, 지금은 그 길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여 가야동계곡을 건너 오르막과 내리막이 무수히 반복되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참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입니다. 잠시 만났던 계곡은 다시 사라지고, 머리 위로는 온통 수풀과 암봉에 가려 경관을 보기도 딱한 상황이니 그저 땀을 훔치며 열심히 걸을 수밖에요.

  

   지루한 길을 한시간 반여 걸어가다보니 심신의 피로가 더욱 심합니다. 바람마저 불지 않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구간에서 지쳤을 때쯤, 가까운 곳에서 타종소리가 들려오니 오세암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용기백배하여 다리에 힘을 주어 가다보니 이내 오세암에 도착하게 됩니다.

 

 


■ 기이한 절벽 암봉들아,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는 반나절만에 도착한 오세암이건만 노산은 이곳에서 다시 하루를 묵으며 늦가을 밤의 정취에 취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의 행로를 좇아감에 있어 노산처럼 여유로운 일정으로 설악 진경 하나하나에 풍미를 남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의 급한 일정은 자연을 느끼는 일마저 쉽사리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세암에서 주는 점심 공양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길을 재촉해야하는 걸음걸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갈길이 급하다 하여도 오세암 만경대를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산이 이르기를 '이곳에 올라야 오세암이 실로 암자터로는 조선 제일임을 알 수 있다'하였고, '사방으로는 내설악 연산이 행여 빠질세라 서로 다투어 보이는 절승한 경관'이라 표현했던 곳을 어찌 지나치겠습니까. 30여분 암벽을 잡고 올라 만경대에 도착하니 과연 노산이 '오늘까지 다니면서 보는 경치는 너무 가까이서 혹은 너무 멀리서 본 것이언만, 이 만경대에 올라서는, 꼭 적당한 거리에다 두고 보는 최호한 조망 지점인줄 알겠습니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오세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었다가 이제 마등령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이 길 또한 가야동에서 오세암으로 이르던 길처럼 지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청봉 다음으로 가장 높은 봉'이라고 노산이 표현했던 마등령을 오르는 길이다보니, 내리막도 전혀 없는 오름의 연속이라 더욱 힘에 부칩니다. 여기서 노산이 어찌하여 마등령을 청봉 다음으로 높다하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실상 그는 대청봉을 오를 때에도 소청, 중청, 대청이라 하지 않고 '청봉'이라 불렀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그렇다면 설악의 모든 청봉(대청, 중청, 소청, 귀때기청)을 하나로 묶어보매, 과연 1326.7m('설악행각'에는 1327m)인 마등령이 저 내설악의 안산을 제외하고는 두 번째 높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등령(마척령)으로 오를수록 햇빛은 점차 사라지고 온통 구름과 안개 그리고 바람에 포위 당하였습니다. 대청봉에서부터 줄기쳐 나온 공룡능선의 종착점인 이 마등령은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수령이 되는 지점으로, 지금까지는 내설악을 유람한 것이요, 이제부터 외설악의 '기승스러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외 설악을 가르는 분수령이 날씨마저 갈라 놓았는지 잔뜩 끼인 운무가 바로 눈앞의 암봉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함이 안타깝습니다.

  

    령을 내려서며 노산이 보았다던 장엄하고 화려하며, 미묘하고 유심한 광경들을 찾아보려 애쓰지만 이 흐린 시계에서는 무엇이 보인다 해도 그와 같은 감흥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비한 형상의 암봉을 본다 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괴한 형상의 암봉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니 그 암봉도 내게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문득 생깁니다. 이것이 시인 김춘수의 '꽃'이 떠오르는 대목 아니겠습니까.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소 나에게 와 꽃(의미)이 되어 주거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데 아무리 절정을 자랑하는 암봉인들 내게 어떤 의미를 주겠습니까.
  

   '설악행각'에 따르면 이 부근에서 노산의 길과 현재의 탐방로가 확연히 길이 나눠집니다. 그것은 노산이 '설악 동곡의 계수를 만나 내려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갔다는' 기록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내려오던 산에서 다시 올랐냐하는 것은 바로 와선대와 비선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의 탐방로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비선과 와선을 차례대로 보며 하산할 수 있지만, 당시의 길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모양입니다.


 

   외설악을 잔뜩 품고 있던 구름은 결국 한차례 장대비를 쏟아내고, 그 길을 하염없이 내려오는 우리도 몹시 고됩니다. 신선들도 이런 날엔 가만히 거처에서 잠을 자는지 날아다니는 신선도 없고, 누워있는 신선도 딱히 만나지 못합니다. 어두컴컴해지는 길을 따라 지금은 완전 '인간세계'로 변모한 신흥사 방면으로 내려오며 이틀째 밤을 보냅니다.

 

 

 


◇ 옥빛 물살 흐르는 계곡, 높이 솟은 기이한 암봉.
이 모든 것이 금강에 견주어 하나 빠지지 않는다

 

 

 

■ 변해도 변치 않을, 그대 이름은 설악


   밤새 내린 비는 변덕일 뿐이었다는 듯이 설악동 아래 날씨는 맑기 그지없습니다. 설악의 봉우리들에는 흐린 연무가 끼어 먼 곳을 보는듯 답답하지만 땅위의 햇볕은 따갑게 내리쬡니다. 이제 노산 '설악행각'의 마지막인 계조암으로 향하는 날입니다.

 
    울산바위 밑 계조암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나 노산이 석양에 비껴 보았다는 토왕성폭포는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울산바위마저 흐릿하여 멀리 자리합니다. 그리고 울산바위만큼이나 유명한 흔들바위를 이곳에서 보게 됩니다. 노산이 '금강이 가진 온갖 것을 다 가진 설악으로, 하마터면 동석 하나가 빠질뻔 하였지만, 기어이 여기에 와서 동석까지 있고야 만 것은 유쾌한 일입니다'라고 했던 동석이 곧 흔들바위입니다. 한 사람이 흔드나 만 사람이 흔드나 꼭 같이 흔들린다 하여 흔들바위인 이 거암은 이제 많은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 장소로 남았을 뿐, 구태여 흔들어보려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래서인지 이 동석 또한 흔들린 적 없이 항시 요모양으로 존재하였다는 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노산이 유랑했던 10일간의 설악행각은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노산은 신흥사로 내려가 설악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지난 유랑을 돌아본 바 있습니다.


   '설악산이여. 나는 당신의 품속을 벗어나, 이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당신 품속에서 흐르는 그 영원한 생명의 법유는 내 피가 되고, 내 살이 되고, 또 내 뼈가 되어, 내가 사는 동안에는 당신이 곧 나요, 내가 곧 당신임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먼 후일 내 영혼에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을 때, 나는 다시 당신의 품속을 찾아와 지고지애의 세례를 받고 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우리도 3일간의 설악행각을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옛날과 같지 않게 지금의 설악은 세속에 찌든 곳도 많아 온전히 그 품에 안기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짧은 설악기행으로 탈속의 기쁨을 느낀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회색빛 건물과 공기를 마주하며 인간의 삶을 살아야겠지만, 언제고 다시 설악으로 돌아올 수 있음이 그런 삶도 버틸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설악, 다시 언제 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설악, 기어이 다시 찾게 될 이곳입니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노산 이전부터 노산 이후에도 그래왔듯이.


 

 

 

노산의 산악 저서

 

 

 

                                산찾아 물따라-노산 이은상 1966년 박영사출판

 

 

    며칠전 저녁 *형님의 한통의 전화~~~

 "~~~~ 거미야! 내가 구하고 있는 책이 있는데...최남선님의 '설악기행'이란 책과 이은상님의 '설악행각'이란 책 알어?"

"...모르겠는데요...ㅠ,.ㅠ;"

"혹시 알까해서...^^"

 

   전화를 끊고...얼떨결에 대답은 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설악행각'이란 제목보다...집에 있는 이은상님의 '노산산행기'에서 언듯 본거 같기도 하다.

그래서 책장에서 '노산 산행기'를 펼쳐보니...ㅋㅋㅋ

 

  

  한국산악회에서 '한국산악문고집'이라는 시리즈로 1970년대에 몇권을 발행하고 중단됐다.

 그 첫번째가 노산 이은상님의 '노산 산행기'이다.

 

   

 

 

    여기에 '설악행각', '한라산등척기', '해외산악계 순방기'...요렇게 세 단원으로 구성되고 그 첫번째에 '설악행각'이 실려있었다.

 또한 갑자기 봇물터지듯...나는 생각이 노산 이은상님의 '산찾아 물따라'라는 책에도 '설악행각'이 실려있었다는게 생각났다.

 늙으면 죽어야지~~~ㅋㅋㅋ 예전의 총명하던(?) 내머리에 이젠 연탄재하나가 떡~허니 들어있다.

    그래서 급히 *형님께 전화를 드리고...저녁에 다시한번 노산 이은상님의 '산찾아 물따라'를 집어들어 읽어본다.

 

 

 

 

    노산 이은상님(1903~1982)

 시조에 능하시고 여러곳의 교수를 지내시고 특히 등산에 관심이 많으셨나보다...

 우리나라 등산역사를 살펴보면 태동기라 할수있는 초기에 이분의 영향은 매우 컷던거 같다.

 

    머릿말을 보면 저자 자신이 이런말을 한다.

'지나간 내 생애의 반 이상의 시간을 강산순례에 바쳤고, 또 내 문학작품의 반 이상이 강산순례에서 얻어진것들이다...

   강산순례는 내게 있어서 한갓 위안이나 교훈이 아니라 거의 생리화된 종교이기도 하다.

내 지식과 사상과 인간성이 온통 거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은 세 단원으로 되어있다.

 

   [산찾아 물따라]는 1933년 설악산을 탐방하여 설악행각을 쓴지 30년 후에 강원도 동해안일대를 탐방하고 적은 글이고...

   [피어린 육백리]는 열흘동안 휴전선 155마일...육백리를 돌아보고 쓴글이고...

   [설악 행각]은 1933년 열흘동안 12선녀탕(탕숫골)~계조굴에 이르기까지 설악산을 온몸으로 느끼며 적은 산행기이다.

 

   1966년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그동안의 옛산행기를 모아 출판한것이다.

 

 다시 펼쳐보니...엽서도 끼어있다...ㅋㅋㅋ

 

  

  

 

   예전에 읽었지만...그때는 정말 수박겉핥기식으로 쭉~~~쭉 나갔던거 같다. 도통 기억나는게 없으니...ㅋㅋㅋ

 이 기회에 다시 음미하며 읽어보니...이건 정말 전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산행기임에 틀림없다고 감히 말한다.

 

    서구의 산악문학작품중...최고로 친다는 가스통 레뷔파의 '별빛과 폭풍설'도 비교불가이다...

 왜?

    전세계를 통틀어 그 어떤 산행기에서도...중간중간 그 풍광을 흠뻑 느끼며...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산행기가 없기때문이다.

    여기 '설악 행각'에서는 이은상님이 중간중간 멋진 계곡과 바위, 풀, 바람, 비를 느끼며 그 궁극의 아름다움을 시조로써 완성한다.

 

   1930~40년대에 서구의 산악인들이 알프스의 첨봉을 오른것이나 1933년 이은상님이 길도없는 설악산을 오른것이나...

단지 그 등반기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지의 봉우리를 오르는 두려움과 위험, 힘듬은...매 한가지였을 것이다.

   허나 서구 그네들에겐 투쟁과 처절함만 있을뿐...'설악 행각'에서 보여지는 힘들면서도 잃지않는 여유, 멋, 풍류, 거대한 자연에 대한

순리등은 찾아볼수없다...바로 그 차이가 많은걸 생각하게 한다.

 

   1933년 노산 이은상님이 춘천~인제를 거쳐 지금의 남교리 탕숫골(12선녀탕)으로 하여 한계고성, 옥녀폭, 대승폭, 대승령에 오르고...

아마 흑선동으로 내려와 백담사를 거쳐 봉정암에 도착하고 중청, 대청에 오르게 된다.

이후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와 오세암을 거쳐 마등령, 와선대, 비선대, 신흥사, 계조굴에 이르는 열흘간의 일정으로 설악산을 탐방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것은 지금이야 인터넷정보시대이니 앉아서 뭐? 그럼... 클릭몇번으로 정보를 찾아 내것으로 만들수 있겠지만...

그 당시엔 순전히 자기가 읽은 책에서만 그 정보를 제것으로 만들수 있었을것인즉...이은상님이 설악을 구석구석 겪으면서 만나는

사찰, 바위등 그 유래와 얽힌 전설등에 대해서 거침없는 정보를 쏟아내는걸 보면 그 박식함에 대해 고개가 절루 숙여진다.

 

 

   [지리실,구융소,설악문,승폭,칠음대,구선대,치마바위,못재,조탁암,삼각봉,삼선봉,학서암,범바위,양반바위,송곳봉,구유소,점심청,삼수렴,

방원폭,운주봉,하청봉,장경암,장경바윗골,와룡여흘,천왕폭,짐대봉]...

이 열거한 것들이 모두 설악에 있다고 한다. 이름이 바뀌고 혹은 아쉽게도 없어지고했겠지만

그 당시 약초꾼, 포수, 스님들등 제한적인 인원만 설악에 들었을텐데...그 이름이 다 있고 아는이가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덧붙여...이은상님은 [설악]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청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우리가 아는것과 다른 그 분만의 독특한 해석을 내놓으신다.

여튼 설악에 관심있는 산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설악 이름의 유래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華山)이는 모두 설악산을 부를는 이름입니다.
설악산은 설뫼라고 불리는데 따로 사계절을 비유하는 것은 아니고 겨울철에 눈이 오면 중추에나 눈이 녹는다는 얘기에서 사시사철 눈이 덮혀있다고 해서 설악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설악의 먕칭에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서는 설악을 영산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으니, 신라 때부터 설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설악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눈이 일찍 오고 오래도록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가위부터 쌓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 비로소 녹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 「동국여지승람」

둘째,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의 색깔이 눈같이 하얗기 때문에 설악이라고 이름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셋째, 신성한 산이라는 의미의 우리 고어가 변해서 설악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고어로 신성, 숭고, 고결, 생명을 뜻하는 ‘설악’의 ‘설(雪)’은 신성함을 의미하는 음역이니 곧 생명의 발상지로 숭상했다는 뜻도 있으며, 옛날부터 내려온 숭산(嵩山)사상의 연유이다.

고려말 강원도 안염사(安廉使, 도지사)로 있던 안축(安軸)이 영랑호에 와서 설악산을 바라보며 이곳 경관을 읊은 시중에 “모운반권산여화(暮雲半捲山如畵)”란 귀절이 있는데, 이는 “저문날 구름이 반쯤 걷히니 산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구나”라는 뜻이다.

산을 평하는 글에 “金剛秀而不雄 智異雄而不秀 雪嶽秀而雄”이라는 문구가 있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나 수려하지 못한데 비해 설악산은 수려한데다가 웅장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설악산은 삼국사기에는 ‘雪嶽’, ‘雪華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인제군지에는 ‘寒溪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문헌비고에는 ‘극히 높고 험한 산으로 중추에 눈이 내리면 그 다음해 여름에 가서야 눈이 녹으므로 설악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했고,



여류시인 금원여사(錦園女使)가 쓴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설악산 돌은 눈과 같이 희므로 설악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했는가 하면,



노산 이은상 선생은 설악산은 본래 ‘살뫼’였는데 한자로 쓰다보니 ‘설악’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살뫼’의 ‘살’은‘설’의 음역으로 신성숭고 청결(神聖崇高 淸潔)이라고 풀이했다,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등반훈련대 10명 조난사고사


1960년대 많은 산악인들이 설악산을 찾기 시작하면서 설악산에서의 조난사고는 계속 이어졌다.
1965년 7월 10일에 에코클럽의 이원상이, 7월 16일에는 같은 클럽의 김정규가 비선대 건널목 같은

자리에서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였다.

 

1967년 1월 하순에는 소청봉에서 서울의대예과 1년 이모군이 동사하였고,

1968년 10월 26일에는 가톨릭의대 산악부원 7명이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조난을 당하였다.

 

1969년 2월 14일에는 다음해 해외원정을 위해 대청봉과 죽음의 계곡에서 동계 훈련을 하던 한국산악회

이희성 대장을 비롯한 10명의 대원이 눈사태로 조난을 당했다. 또 1976년 2월 16일 대한산악연맹 히말라야

등반 동기 훈련 중에 설악골 범바위 밑에서 최수남 전재운 송준성이 눈사태로 조난을 당하였으며, 토왕성

폭포 빙벽을 오르다 추락하여 조난을 당하는 일도 가끔 발생했다.

 

이기섭은 속초에서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는데다 산악회 회장이라서 설악산 조난사고가 나면 꼭 설악동

으로 달려가곤 했다. 70년대 설악산 적십자구조대를 창설했던 유창서씨는 산악인이 조난사고로 사망하면

이기섭 박사가 쫓아와서 사망진단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야만 시신을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기섭은 또 조난사고 소식을 들으면 직접 구조활동에도 참가

하였다. 이기섭은 74년 청룡봉사상 수상 소감에서 1969년에 비룡폭포에서 조난된 여학생 2명을 낚시로

건져냈을 때 가슴이 아팠다고 나중에 회고하였다. 산악인들도 설악산에서 다치면 꼭 이기섭의원을 찾았다.

같은 산악인이라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산악인 이기섭의 가슴에 큰 아픔의 상처로 남은 사건은 1969년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등반훈련대 조난사고,

소위 10동지 조난 사고였다. 죽은 산악인들은 신흥사 보제루 앞에서 열린 훈련 발대식에서 이기섭이 직접

참여하여 무사히 훈련을 마치라고 격려하고 일일이 등을 다독거려주고 굳은 악수를 건네 준 친동생, 친아들

같은 대원들이었다.

 

그리고 조난을 당했다는 비보를 가장 먼저 전해 듣고 설악동으로 쫓아간 사람도 바로 그였으며, 보름 동안

설악동에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구조활동에 매달렸지만 싸늘하게 돌아온 주검을 마지막으로 사망확인한

의사도 그였다. 구조활동을 마치고 모두들 철수한 상황에서 설악산 자락 노루목 언덕에 직접 시신을 묻고

애통해 했던 사람도 그였다.  


이기섭은 그들을 설악산 산기슭에 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 속에 묻고 평생의 아픔으로 간직하였다.

이기섭은 1993년 설악산에서 작고한 산악인을 추모하는 [산악인의 문]을 세우는 소공원 현장에서 1969년

사고 당시의 기억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은 당시의 조난사고와 구조활동 전말을 정리한 글이다.

1969년 2월 14일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등반을 위한 훈련을 하고 있던 한국산악회(韓國山岳會,

회장 이은상) 대원 10명이 계곡을 덮은 거대한 눈사태로 사고를 당한, 우리나라 등반사상 최대의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한국산악회는 1970년도에 본격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원정등반을 하기로 계획하고, 2월 6일부터

설악산에서 훈련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2월 6일 신흥사 보제루에서 대원 18명은 한국산악회장 이은상,

설악산악회장 이기섭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결단식을 갖고, 1조 3명씩 A. B. C. D조로 나누고

나머지 6명은 본부조(E조)로 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비선대를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들어간 훈련대는 12일에 A조(한덕정, 정현식, 이인정), D조(구인모, 오동석,

강신영), E조(전담, 이재인) 8명과 그 외 촬영차 동행한 국립영화제작소 박태규 등 9명은 주봉인 대청봉

정상에 캠프를 설치하였고, B조(박은명, 변명수, 박명수), C조(오준보, 이만수, 김종찬), E조(대장 이희성,

부대장 김동기, 부대장 남궁기, 임경식) 10명은 죽음의 계곡에 8인용 본부천막과 3인용 천막 2개를 쳐서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였다.

 

죽음의 계곡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B조, C조, E조는 13일 빙폭 훈련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14일 새벽

계곡을 덮은 거대한 눈사태에 묻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들의 훈련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

일행과 같이 산에 올랐던 국립영화제작소 박태규가 A, D조가 있던 대청봉에서 하산하면서 13일 오전 10시

이곳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B, C조 대원들은 빙폭 등반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4일 정상에 있던 A, D조 대원들이 훈련교대와 식량보급을 받기 위해 베이스캠프가 있는 죽음의

계곡에 도착했을 때, 거기 있어야 할 대원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높이 약 20m 가량의 눈이

계곡을 덮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도 눈사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폭포엔 얼어붙은 로프와 붉은 자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청봉에서 내려온 A, D조 대원들은 B, C조 대원들이 혹시 양폭산장에 대피 중이 아닌가 생각하고 내려가

보았으나 이곳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식량 보급을 받을 길이 없어진 대원들은 비상식량을 꺼내 먹으면서 15, 16일 양일 동안 일대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허사였고 계속 내리는 폭설로 천불동계곡마저 눈사태로 묻혀 죽음의 계곡 베이스캠프에는

갈 길마저 막혀 버렸다.

 

할 수 없이 8명의 대원들은 구조를 요청하고자 17일 오전 8시 양폭산장을 출발하여 오후 3시10분

신흥사에 도착하여 설악산악회장 이기섭에게 사태를 알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준수 속초경찰서장 지휘하에 경찰 구조대를 편성하여 밤에 설악동에 도착했다.

18일에는 한국산악회 구조대(대장 변완철)와 육군 1619부대 구조대(대장 마숙도 중위)가 도착했다.

구조대는 19일 와선대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20일 귀면암까지 전진했으나, 계속된 폭설로 구조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22일 다시 구조 활동을 재개하고, 23일에는 미군 헬리콥터로 대청봉과 중청봉 중간 지점에 착륙하여

죽음의 계곡으로 접근하려고 했으나 눈사태의 위험으로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계속되는 폭설과

강풍으로 구조 활동은 계속 지연되었다.

 

25일에는 천종근 강원도 경찰국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군·경·민 합동 지휘본부가 새로 설치되어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재개되었다. 26일에는 드디어 죽음의 계곡 현장에 도착하였고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27일에는 그들의 유품이 발견되기 시작하였고 3월 1일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하여 3월 3일까지

10구의 시체가 모두 발굴되었다.

 

시체는 대원들이 결단식을 했던 신흥사 보제루로 옮겨져 3월 5일 합동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설악산 입구 노루목 묘지에 안장 되었다. 대장 이회성은 현역 군인인 관계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부대장 김동기 교수도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러므로 노루목 묘지 2개의 봉분에는 시신없이 유품만

매장되어 있다.

 

 

 

 

▒ 조난자 명단(10명)


▶ 이희성, 43세, 대장, 육사교수(중령)
▶ 김동기, 39세, 부대장, 서울대 공대 교수
▶ 남궁기, 40세, 부대장, 한국전력
▶ 변명수, 24세, 서울대 문리대
▶ 이만수, 22세, 에코클럽
▶ 오준보, 24세, 연세대
▶ 임경식, 29세, 아카데미사진연구소
▶ 박은명, 23세, 육군본부
▶ 김종철, 21세, 연세대 수학과 2년
▶ 박명수, 21세, 서울대 문리대 4년

 

 

☞ 자료출처 / 속초문화원 발간, 2006년에서

 

 

▼ 아래의 동영상은 당시 대한 뉴우스에 소개된 영상자료이다.

 

 

 

▒ [설악산 죽음의 계곡 10동지 조난사고]에 대하여..


1. 발생개요
가. 일시 : 1969. 2. 14
나. 장소 : 강원도 설악산 죽음의 계곡
다. 원인 : 1970년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설악산「죽음의 계곡」서 등반 훈련기간에

              계곡의 막영지에서 취침중 눈사태를 당하여 전원(10명)이 사망한 사고임.

 

2. 피해현황 : 10명(사망 10명)

 

3. 경과 및 조치내용

 

가. 경과과정


○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등산가들이 포함된 이 등반대는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등반 훈련중이었다.


○ 등반대원들은 지난 4일 23명이 함께 서울을 출발 5일 신흥사에 도착 6일 결단식이 끝나자 이○○씨와,

김○○씨(한국산악회 이사)는 서울로 떠나고 나머지 21명이 6일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6일과

7일 이틀동안 주왕성 폭포에서 빙벽훈련을 하고 8일 천불동 계곡에서 오른쪽 계곡을 타고 9일 양폭에

정착했다.


○ 실종된 대원들은 일행중 본부조, B조, C조 및 훈련지도 조원들로 지난 12일 하오 훈련대원들이 정상인

대청봉에 오르고 있는 동안 바로 밑[죽음의 계곡]에 캠핑하고 있었는데 14일 하오 2시쯤 훈련대원들이

약속대로 이들과 합류하려 했으나 계곡은 눈  사태로 덮여 자취를 찾지 못했다. 이 일대는 13일 아침이후

폭설이 계속 내려 3m에 이르게 되었으며 골짜기마다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조난사실은 17일 하오

3시경 일행중 8명이 하산하여 속초경찰서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다.


○ 생환자들은 17일 하오 3시 10분 천불동 계곡의 양폭산장을 비상탈출 설악관광촌에 무사히 하산했다.

생환자들에 의하면 조난자들의 캠프가 있었던 사고지점은 해발 900m, 대청봉(해발1,708m)에서 내려오는

첫 번째 훈련캠프 장소였다. 이 지점은 100m의 빙폭이 90°의  가파른 경사를 이루어 양쪽산에서 좁은

계곡으로 쏟아져내린 눈더미(1월 30일 내린 눈)가 30이상 쌓인 곳이다. 조난 당한 10명은 바로 그 빙폭

밑에서 전진캠프〔C3〕를 치고 훈련 중이었다. 조난시간은 13일 낮 12시 30분 이후 14일 하오 2시까지의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고 있다. 15일 마지막으로 정상을 떠나 양폭산장을 내려온 이들 훈련지도조는

조난자들의 훈련장소에 눈사태가 일어나 30m이상의 눈이 양쪽산에서 밀려 내려오고 있음을 보았다.

이들은 빙폭에 걸린 거대한 눈덩이들도 곧 눈사태로 변할 위험이 있음을 보고 조난자들이 양폭산장에

미리 하산했을 것으로 믿고 돌아왔다. 그러나 양폭산장에는 이들이 돌아와 있지 않았다.

 

 

나. 인명구조활동


○ 속초경찰서 현지 경찰과 설악산악회장이 이○○박사가 있는 현지 구조대 50여명은 17일 하오 4시

속초를 떠나 8시간 30분 동안 12㎞를 강행군, 이날 밤 12시경에야 설악산 아래까지 도착했다.


○ 속초 경찰서에서는 18일 상오 다시 주민 50여명을 동원, 육군 9993부대 대원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출동시키는 한편 설악동 종합주차장에 헬리곱터가 내릴 수 있도록 눈을 다졌다.


○ 한국산악회측은 설악산 일대에 휘몰아치고 있는 눈보라 때문에 육로를 통한 구조작업은 불가능

하다고 결론짓고 육군, 공군, 치안국 및 미8군에 헬리곱터를 동원 구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 구조대는 설악산 파출소에 수색본부를 설치 군․경 및 향토예비군 50여명의 지원을 받아 구조방법을

강구했으나 계속되는 눈보라와 눈사태로 조난지점에의 접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 공군당국은 조난현장을 항공기에 의한 공중수색이 당시로는 거의 불가능하여 지상구조 작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구조전망을 밝힘에 따라 지상 구조대의 끈질긴 구조작업 끝에 3월 3일에야

조난자 사체 10구를 인양할 수 있었다.

 

 

4. 문제점 및 대책


가. 문제점
1) 훈련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위험을 예상하고도 미처 캠프를 이동치 못한 점.
2) 눈사태와 눈보라 등의 기상변화에 적응치 못한 점.
3) 공격팀과 지원팀의 협조부족.
4) 집단이동 했다는 점.

 

나. 대  책
1) 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의 양은 어마어마하여 천막이나 산장정도는 보호막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밤일 경우는 눈사태를 발견하고 대피할 여유마저 없음으로 위험이 예상되면 지체없이

안전한 곳으로 막영지를 옮겨야 한다.


2) 폭설이 내릴 경우 눈사태의 위험은 아주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사전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3) 계획의 수립에서 구성, 운행까지 충분한「팀 워크」가 이루어지는 등 협조운행이 필수적이다.


4) 일행 중 베테랑급이라는 K모씨 등이 미리 하산하는 등 경험이 없는 멤버들이 계곡에서

그것도 10명이나 집단 막영했다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 같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5. 눈사태의 예방과 대응


○ 예방이 최선
눈사태에 관한 조난사고 통계에 의하면 약 43% 정도가 당사자의   부주의가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눈사태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눈의 특성과 위험요소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눈의 종류, 침전, 순환과정과 기   온과 바람에 의한 변화과정, 사태지형과 사태가능 경사도, 사태유형과

적설량, 사태지형에서의 행동방법, 사태지형의 정보 등에 대   한 지식과 경험을 숙지해둔다면 사태를

예방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오르고자 하는 산의 등산로 중 사태지형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는 것도 사태예방의 방편이다.

또한 현지주 민과 오래된 산장 관리인 등은 사태지형에 대한 좋은 정보제공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은 학술적인 측면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사태 지형에 대한 지식에 밝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사태로 인한 사망자의 80%는 대부분 산소부족으로 인한 질식사이며, 때로는 골절상, 동상을

수반하기도 한다.

 

사태로 매몰되는 눈의 깊이는 6~10m까 지 되기도 하지만 약 1m정도의 깊이에 묻혀 사망하기도 한다.
눈사태에 묻혔다가 구출된 생환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매몰된 순간부터 구출되기까지 숨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가 멎기 직전에 취해야 할 조처이다. 양손을 가슴과 얼굴쪽으로 엇갈리게 감싸 눈속에

묻혔을 경우에도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란 실제상황에 직면하였을 때는 그리 쉽지 않다. 눈속에 묻혔을 경우 안간힘을

써서 체력을 소모하기보다는 느긋한 자세로 구조를 기다리는 편이 생존의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은

몇몇 생환자들의 체험담이기도 하다. 몇 미터의 눈 밑에서도 구조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소리를 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 10동지 하관 : 1969년 3월 5일 설악산 노루목 장지에서 하관을 하고 있는 모습.

슬픔을 억누르는 몇몇 유가족들과 신문기자, 진행요원 등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하관작업을 하고 있다. 이날 서울에서도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 신흥사로 가는 운구행렬 : 설악산 신흥사로 시신을 옮기고 있는 모습.

조난한 10동지의 관 위에는 한국산악회의 대형 회기가 덮여있다.

 

 

 

▲ 10동지 시신 발굴 작업 : 1969년 2월 죽음의 계곡에서 시신을 발굴하고 있는 경찰구조대 대원들.

구조대원들의 머리 위로 쌓여있는 눈이 당시의 적설량을 말해주고 있으며 침낭 속에 들어있는

시신이 잠을 자다가 봉변을 당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 설악산 10동지 시신 하산 작업 : 1969년 2월 제1차 해외원정등반 준비훈련단에 참가했다가 눈사태로

죽음을 맞은 10동지의 시신을 신흥사로 운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가장 큰 눈사태로 인한

조난사건이라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되어 경찰과 사진기자들이 운구행렬 주위를 따라붙고 있다.

 

 

 

▲ 10동지 조난의 현장 : 일명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하여 목숨을 잃은 10동지가 묻힌 현장.

표시된 부분의 눈이 무너져 내려 10동지가 막영하던 텐트와 설동을 덮쳤다.(임석제 사진)

 

 

 

▲ 죽음의 계곡등반 : 제1차 해외원정 등반 준비훈련단에 참가한 대원들이 죽음의 계곡을 오르고 있다.

이들중 10명은 죽음의 계곡에서 막영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임경식 사진)

 

 

 

▲ 조난한 임경식 대원의 마지막 모습 : 1969년 2월 제1차 해외원정등반 준비훈련단에 참가했던

임경식 대원이 조난지였던 일명 죽음의 계곡(안내피골)에서 막영을 위해 설동을 파고 들어가 앉아있다.

임경식 대원의 머리 윗부분에 스노우홀이라는 영문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제1차 해외원정등반

훈련대의 기념 페넌트가 걸려있다(임경식 사진)

 

 

 

☞ [자료 출처 : 글 - 서울산악조난구조대( http://www.alpinerescue.or.kr/ )
                       사진 - 한국산악회(
http://www.cac.or.kr/ )]

 

 

 

 

 

 

설악산 국립공원 연혁

 

 


  설악산은 한반도의 태백산맥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동해에 임하고 서쪽은 산악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북위 38°5′25″ 동경 128°34′43″ 에 입지하고 있어 행정구역상 강원도 속초시, 양양군, 인제군 및 고성군에 걸쳐 있다.

  설악산의 서쪽을 내설악, 우리 속초시가 해당되는 동쪽을 외설악, 그리고 남쪽을 남설악으로 부르고 있으나 설악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주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 산천조에서는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고 『호동서락기』에서는 “산봉우리가 줄을 지어 솟았고 암석의 색깔이 모두 눈같이 하얗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으며 한국학자 이은상 선생은 “설악의 설은 고어 ‘ㅅ뫼’의 음역자에 불과하며 ‘ㅅ’이란 것은 엄숙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지명 혹은 산천명으로 쓰인 곳은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한 경우이다. 즉 설악은 ‘ㅅ’의 음역으로서 신산 성역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설악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명칭유래의 설악산은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며 산세가 웅장하고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식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따라 1965년 11월 5일 천연기념물(천연보호구역) 제171호로 지정되었으며 1982년에는 UNESCO의 인간과 생활권계획에 따라 우리나라 유일의 생물권 보존지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설악 명칭의 고구(考究)   /    鷺山

 



   얼른 동창(東窓)을 열고 내다보는 눈앞에, 밤새도록 비 부어내리던 검은 구름은 북악(北岳)을 넘어 먼 하늘로 흩어지고, 암흑(闇黑)과 음침(陰沈)을 뻐기고 솟아오르는 동방(東方)의 광명(光明)이 정수(庭樹)의 잎잎으로 진주(眞珠)의 찬가(讚歌)를 부르는 9월 30일2)은, 내 설악(雪嶽) 행각(行脚)의 제1일입니다. 

   오전 8시, 강원도 인제(麟蹄)행 자동차(自動車)에 몸을 던져 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동차가 굴기를 시작하기 전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될, 한가지 중대(重大)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산악(山岳)에 대한 서론적(緖論的) 지식(知識) 내지 설악(雪嶽)에 대한 근본적(根本的) 구명(究明)입니다. 

   본시 인류(人類) 전체(全體)의 문화(文化)가 산악(山岳)의 계통(系統)과 아울러 그 분포(分布) 성장(成長)을 같이한 것이어니와, 그 중에서도 더욱이 조선 겨레는 그 고대(古代)의 여러 부족이 이미 백두산(白頭山)을 근거(根據)로 한 천제(天帝)의 대왕국(大王國)이 개조(開肇)3)됨을 비롯으로하여, 동하(東下)하는 줄기로, 또는 서하(西下)하는 갈래로, 오직 산맥(山脈)을 따라 내리며, 군데군데서 그 문화(文化)를 짓고짓고 하였습니다. 

한국 역사(歷史), 한국 문화(文化)를 연구(硏究)하는 학도(學徒)의 눈으로서 보면 반도(半島)의 산악(山岳) 하천(河川)처럼 흥미(興味) 깊은 것이 다시없을  것입니다. 
   시(詩)와 문학(文學)이 적힌 곳을 따로 어디서 찾는 것보다 산악(山岳) 내지 국토(國土) 그것이 그대로 한국의 시(詩)요 문학(文學)이며, 역사(歷史)와 철학(哲學)을 달리 어디서 뒤지는 것보다 산악(山岳) 내지 국토(國土) 그것이 또한 그대로 역사(歷史)요 철학(哲學)인줄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오진(誤診), 편협(偏狹), 의혹(疑惑)을 자랑으로 삼는 하품나는 서적(書籍)의 사(死) 문자(文字)에 비겨서는 공명(公明), 정대(正大), 요확(瞭確)4)을 그 자랑으로 삼는 기운찬 산악(山岳) 내지 국토(國土)의 활(活) 문자(文字)는 너무나 그 값이 고귀(高貴)한 줄을 깨달을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족(震族)의 신앙(信仰), 예술(藝術) 내지 모든 생활(生活)이 오직 산악(山岳)을 중심(中心)으로 하고 열렸으며, 퍼졌으며, 또한 거기에서 그 유적(遺跡)을 찾게 되는 줄을 생각하는 기대(基臺) 위에서 다시 설악(雪岳)을 논의(論議)하여야 하겠습니다. 

대개 이 설악이 문적(文籍)에 보인 것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 적힌 것이 가장 오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산명(山名)의 자면(字面)에 있어서는 설악(雪岳), 설산(雪山), 설화산(雪華山) 등 자못 수종(數種)으로 쓰이어 있음을 봅니다. 

   무론(毋論)5) ‘설악(雪岳)’ 이외(以外)에 설산(雪山)이라 설화산(雪華山)이라 쓰인 것은 사암(寺菴)6)의 창중건기(創重健記)등 승가(僧家)의 기록(記錄)에서만 보이는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여기에서 그 산명(山名)의 한자(漢字) 기록(記錄)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을 통(通)하여 보는 다른 고증(考證)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반도(半島)의 산악(山岳) 명(名)으로 ‘설(雪)’자를 얻은 것이 다만 여기 이 산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북부(北部) 백두(白頭) 대간(大幹)에 있어서 황초령(黃草嶺)이 북주(北走)하여 ‘설한령(雪寒嶺)’을 이루었고, 동부(東部) 백두(白頭) 대간(大幹)에 있어서는 박달령(朴達嶺)이 남하(南下)하여 평강(平康) 북(北)의 분수령(分水嶺)에 이르는 맡에 궁예(弓裔) 고도(古都)7)를 남(南)에다 두고 ‘설운령(雪雲嶺)’이 있으며, 또한 석인(昔人)8)의 축성(築城) 방호(防胡)의 험산(險山)인 ‘설함령(雪含嶺)’이 있고, 다시 강원도(江原道) 이천(伊川)9)의 진산(鎭山)에도 쓰이었고, 또 함경도(咸鏡道) 길주(吉州) 서(西)에도 동명(同名)의 산(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남(漢南)의 칠보산(七寶山) 간지(幹枝)에 있어서는 곡둔현(曲屯峴)의 일지(一支)에 건지(乾止), 대덕(大德)을 지나 ‘설성산(雪城山)10)’이 있고, 한북(漢北)의 분수령(分水嶺) 간지(幹枝)에 있어서는 양주(楊洲) 서남(西南)의 홍복산(弘福山) 일지(一支)가 서북(西北)으로 뻗어가다가, 파주(坡州), 적성(積城)으로 갈리는 산맥에 ‘설마치(雪馬峙)’가 있으니, 여람(與覽)11)에 의하면, 이와 동명(同名)이 한성(漢城) 남산(南山)(목멱산(木覓山))에도 있어, ‘재산남자(在山南者)를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재산동자(在山東者)를 소설마(小雪馬)라 한다’하였습니다. 
또한 저 호남(湖南)의 장안(長安) 간지(幹枝)에 있어서도 옥과(玉果)의 진산을 ‘설산(雪山)’이라 하는 등, 그 수 자못 많고, 그 이름 또한 광포(廣布)된 줄을 알 것입니다. 

   반도(半島)의 산악(山岳) 명(名) 내지 지역 명칭은 실로 흥미 있는 연구 자료입니다. 

그 변천(變遷) 또는 와오(訛誤)의 재미스러운 경로(經路)를 보살필 때나, 또는 그 표피(表皮)를 슬쩍 들치고서 적라(赤裸)한 그 속알맹이의 본색(本色)을 들여다볼 때에, 받는 그 기쁨과 쾌(快)함은, 반드시 전문가(專門家)에게만 속(屬)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무엇보다도 깊은 흥미와 또 엄격(嚴格)한 태도(態度)로 포착(捕捉) 해부(解剖)하지 않으면 안 될 막중한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설악(雪岳)’의 ‘설(雪)’ 그것입니다. 

   이 ‘설악’이라는 ‘설’자의 유래에 대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12)이나 문헌비고(文獻備考)13) 등은  중추시설(仲秋始雪), 지하내소(至夏乃消), 고명언(故名焉)14) 이라하였고, 금원여사(錦園女史)15)는 그의 호동서락(湖東西洛)에 석백여설(石白如雪), 고명설악(故名雪嶽)16) 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이 양자(兩者)가 다 이미 써놓은 ‘설(雪)’자에 이유를 붙이자고 붙인, 일종(一種)의 전회(傳會)에 불과(不過)함이요, 본시부터 그 까닭에 ‘설’자로써 이름지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고산준령(高山峻嶺) 치고 동절(冬節)에 눈 오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며, 또한 눈 없는 남방(南方)에는 무슨 이유(理由)로 ‘설’자 산이 생겼습니까. 

그러므로 ‘다설(多雪)’의 이유라 함이 결코 그 연유(緣由)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 설악산의 석색(石色)은 다청다갈(多靑多褐)이매, ‘석백(石白)’의 이유라 함도 한낱 공연(空然)한 말임이 분명(分明)합니다. 

   그러면 설악의 ‘설’은 무슨 때문으로 얻은 명자(名字)며 무엇을 의미(意味)함이냐 할 것입니다.  
무론(毋論) 이 ‘설(雪)’은 우리 고어(古語)의 ‘’에 대한 음역자(音譯字)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이란 것은 거기에 가장 중대차엄숙(重大且嚴肅)한1)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 바, 그것이 지명 혹은 산천 명호(名號)로 쓰인 것에는 그 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반도(半島) 산천의 명칭과 ‘’과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먼저 잠깐 이 ‘’의 의미에 대한 구명(究明)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말 가운데서 가장 허구(許久)한 역사를 통하여 겨레 전체가 그 정신적 입각(立脚)과 또는 이상을 오로지 ‘광명(光明)’ 일점(一點)에 두고서, 그 생활, 신념, 교의(敎義)의 가장 크고 가장 힘찬 표어로 이 ‘’이란 말을 보배로이 지녀온 것입니다. 
이 ‘’은 ‘생명’의 절대 긍정, 절대 유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 범유의 활동상을 총칭하여 가로되 ‘산다’ 즉 ‘생활한다’하는 것과 그것을 명사로 말할 때 ‘살음’ ‘삶’이라 하고 그 ‘사’는 사실의 표시요 요건인 ‘호흡’을 ‘숨’이라 하는 이 모든 말이 ‘’이란 어근에서 나온 것이겠습니다. 
또한 그 ‘살’고 있는 주체를 일러 ‘사람’이라 하고, 이 ‘사람’이 그 ‘삶’을 향유보지(享有保持)하기 위하여 ‘숨’쉬는 것과 함께 절대 필요한 양식을 또한 ‘’, (남방(南方)에서는 ‘’)이라 하며, 그 ‘’로써 만든 음식을 먹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술’(匙)이라 하고, 그리하여 다시 그 ‘삶’(생명, 영혼)을 담아가진 그 형식 즉 신체의 ‘외육(外肉)’을 ‘’이라 하고, ‘내담(內膽)’을 ‘슬개’ ‘쓸개’(‘슬’은 ‘’의 전음(轉音)) 등, 이러한 우리말의 연락(連絡)과 계통을 보아, 이 ‘’이란 것이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의 대표적 근본적인 말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또한 인생 생활의 방법 또는 태도의 가장 고품(高品) 상승(上乘)인 영혼의 향기 즉 정의, 강의(剛毅) 등의 총칭이라 할만한 ‘슬기’란 말도 한 가지 이 ‘’에서 파생된 말이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서광(曙光)을 던져 활동을 개시하게 하는 ‘여명’을 ‘벽’이라 하고, 그 진행을 ‘’라 하고, 그 방향의 ‘동(東)’을 ‘’또는 ‘시’라 하며, 효성(曉星)을 ‘별’ ‘별’ 이라는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의 연원(淵源), 천류(泉流)를 ‘샘'이라 함이, 다 이 ’‘이란 동어근(同語根)을 가진 말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란 것은 ‘생명, 생활, 호흡, 인간, 양미(糧米), 담(膽), 육(肉), 용기, 여명, 원천)’ 등을 전부 포함한 일(一) 어근(語根)이라 할것입니다. 

   여기서 이와같은 동일 계통의 한국어를 찾아내어 열거하자면, 그 번루(煩累)를 거둘 길이 없거니와, 그 말의 신성성을 불교에 가져가 비추어볼 것이면, ‘사리(舍利)’란 인도어도 주의에 치(値)할만한 말이겠습니다. 
    그것이 본시로 지극히 청정한 생명의 신비적 표시물(表示物)이자 ‘영골(靈骨)’이라 역(譯)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사리불(舍利佛)’을 ‘신자(身子)’라고 한역(漢譯)함 같은것은 실로 흥미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米)로써 사리(舍利)를 대용(代用)함 같은 예(例)는 여래(如來) 재세시(在世時)로부터 현금(現今)까지 통유(通有)한 일인만큼 ‘사리(舍利)’ ‘골(骨)’ ‘육신’ ‘미(米)’ 등을 동일히 존상(尊尙)하고 신성시하자, 또한 그 어계(語系)의 부합함을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하간 이 ‘설악’의 ‘설(雪)’이란 것은 결국 신성을 의미하는 ‘’의 음역인 것임만은 개의(介疑)할 것 없는 일이라 봅니다. 
즉 우리말로 ‘뫼’라 하던 것을 한자로 쓸 때에 ‘설악산’이라 한 것이요, 그것이 다시 불교도의 손에 의하여 석존(釋尊) 수도처(修道處)인 ‘설산(雪山)’의 명(名)으로도 쓰인바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악의 ‘설(雪)’이 신성을 표시하는 우리 고어의 ‘’에 대한 음역자라 함은 위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한번 더 우리 반도의 산악 또 하천의 명호(名號)와 ‘’과의 관계를 좀더 고찰함과 아울러 ‘설(雪)’과 ‘’과의 관계도 더 분명히 해볼까 합니다. 
이 ‘’의 역자(譯字)로는 그 류(類)가 심히 많음을 보게 됩니다마는, 대강 그 예를 열거하건 대 이러합니다. 

   제주도의 산명(山名)에 ‘사을악(沙乙岳)’(혹작(或作) 사라악(沙羅岳))이란 것, 단천(端川) 동(東)에 있는 ‘사을포(斜乙浦)’란 것, 그 원(源)을 묘향산(妙香山)에 둔 안주(安州)의 살수(薩水)(금(今) 청천강(淸川江))란 것 등은 무론(毋論) 한자음 그대로가 ‘’이매, 더 논할 것이 없거니와, 이 ‘’이란 것을 ‘전(箭)’이란 한자로 바꾸어 쓴 것으로 적지 않으니, 청풍(淸風)의 ‘전산(箭山)’이며 경성(京城) 동(東)의 ‘전교(箭郊)’며 또는 문천(文川) 동(東)과 평산(平山) 동(東)과 영평(永平) 남(南)에는 ‘전탄(箭灘)’이 있으며, 또한 ‘살고디’란 이름도 ‘전곶(箭串)’이라고만 쓰인 것이 아니라, 양구(楊口) 동(東)에는 ‘사리곶(沙里串)’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은 ‘미(米)’자로도 번역되어 영유(永柔)의 진산(鎭山)은 미산(米産)(혹작 미두산(米豆山))이라 하거니와, 내 관견(管見)으로는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 벽동(碧潼) 남(南)의 최고 험산(險山)인 ‘삼일산(三日山)’ 등도 ‘사흘’ 즉 ‘’의 역자(譯字)로 볼만한 것입니다. 
또한 남양(南陽) 동(東)에 있는 ‘사라산(舍羅山)’이란 것도 무론(毋論) 이것의 역자려니와 이 남양에는 도명(島名)으로도 ‘수흘(愁訖)’, ‘소홀(召忽)’ 등의 ‘술’ ‘솔’ 같은 것도 실상은 ‘’의 전음(轉音)에 불과한 줄을 알 것입니다. 

   이제 다시 그 전음된 자의 류(類)로 영평(永平)의 ‘수일산(水日山)’이나 배천(白川)2)과 영천(永川)에 있는 ‘시천(匙川)’ 같은 것은 주의할 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천(漣川) 남(南)의 ‘차탄(車灘)’, 하동(河東) 북(北)의 ‘차점(車岾)’, 괴산(槐山)과 보은(報恩)의 ‘차의현(車衣峴)’이며 능성(綾城)의 ‘차의천(車衣川)’이며 내지 금성(金城), 함흥(咸興), 양주(楊洲), 공주(公州) 등에 있는 ‘차유령(車踰領)’이나 또한 과천(果川)의 ‘수리산(修理山)’이며 그 밖에 임실(任實), 장수(長水), 서천(舒川), 화성(和城) 등에 있는 ‘영취산(靈鷲山)’과 언양(彦陽)의 ‘취성산(鷲城山)’, 양산(梁山)의 ‘취서산(鷲栖山)’, 중화(中和)의 ‘운취산(雲鷲山)’, 한산(韓山)의 ‘취봉산(鷲峰山)’, 고폐(高敝)의 ‘취령산(鷲嶺山)’ 등이 ‘차(車)’나 ‘차의(車衣)’나 ‘차유(車踰)’나 ‘수리(修理)’나 ‘취(鷲)’나 다 결국은 우리말의 ‘수리’ 즉 ‘’의 전음임에는 합일(合一)함을 볼 것입니다. 

   다시 ‘솔’로 전음된 자(字)를 보면, 상주(尙州)의 낙동강(洛東江) 상류를 따로 ‘송탄(松灘)’ 또는 ‘송라탄(松羅灘)’이라 함이든지, 개성(開城)의 ‘송악(松岳)’을 위시하여 연풍(延豊)의 ‘송현(松峴)’, 의주(義州)의 ‘송산(松山)’, 강진(康津)의 ‘송계(松溪)’ 기타 홍원(洪原), 해금강(海金剛), 보령(保寧)에 있는 ‘송도(松島)’ 등 ‘솔’로써 이름 얻은 곳도 심히 많거니와, 한가지 이 ‘송도’에 관하여는 혹 학자까지도 해금강(海金剛)의 ‘송도(松島)’를 일본인의 명명(命名)이라고 단언한 것을 보았습니다마는, 명종(明宗) 시(時)의 임동천(林東川) 억령(億齡)3)의 시(詩)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인 소명설(所名說)의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을뿐더러, 이 이름이 오히려 ‘’의 전음으로 남아 끼쳐진 자임을 알 것입니다. 

   이 밖에도 나로서는 경주(慶州)의 ‘치술령(鵄述嶺)’이나 고산(高山), 풍기(豊基) 등처(等處)에 있는 ‘두솔산(兜率山)’ 등이 다 ‘술’ ‘솔’ 즉 ‘’의 대역(對譯)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여기에 총괄적으로 ‘’의 대역자를 열거하건대, 
설(雪), 사을(沙乙), 사을(斜乙), 살(薩), 전(箭), 사리(沙里), 미(米), 삼일(三日), 사라(舍羅), 수흘(愁訖), 소홀(召忽), 수라(水羅), 시(匙), 차(車), 차의(車衣), 차유(車踰), 수리(修理), 취(鷲), 송라(松羅), 송(松), 치술(鵄述), 두솔(兜率) 등입니다. 

   더욱이 ‘설(雪)’이 ‘’의 역자임을 증좌(證左)하기에 호개(好個) 일례(一例)가 있음을 보는 것은 강계(江界)의 ‘설한령(雪寒嶺)’을 승람(勝覽)4)에는 ‘설열한령(薛列罕嶺)’이라고 쓰고, 그 주(註)에 ‘설한령즉차령(雪寒嶺卽此嶺)’5)이라 한 것입니다. 

    ‘설(雪) ’자가 명명(命名) 본시로부터 ‘설(雪)’이란 한자 그것에 의의가 있은 것이면 다시 달리 전해질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마는, 그것이 본시 우리 고어의 ‘’이란 것을 대역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혹은 ‘설열(薛列)’이라 혹은 ‘설(雪)’이라 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향하는 저 강원도(江原道) 인제(麟蹄)의 ‘설악산(雪嶽山)’이란 것도, 이러한 여러 가지의 고증(考證)에 비추어보아 ‘뫼’이던 것임이 분명한 동시에, 그 이름이 웅변(雄辯)하고 있는 만큼, 신산(神山) 성역임을 알 것입니다. 

   다만 ‘설(雪)’은 ‘’이란 것을 대역함에 있어서 될 수있는 대로 한자 그것으로라도 그 신성, 결백, 숭고함을 표시하고자 구태어 ‘설(雪)’ 자를 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명산(名山)으로 하여 이 설악(雪嶽)과 더불어 관동(關東)의 쌍벽(雙璧)이라 할 금강산(金剛山)의 고호(古號)도 ‘상악(霜岳)’(서리뫼)이라 하였으니, 이도 또한 우리 고구(考究)에 의하면, 역시 ‘뫼’로 될 것임이 무론이여니와, 오직 그 신역(神域)임에는 금강(金剛)과 설악(雪岳)이 다 일치한 존재이었던줄을 알면 그만일 것입니다


   이마큼 설악(雪岳)은, 신성한 존재인 동시에,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문화 내지 역사와의 긴밀(緊密) 차(且) 엄숙(嚴肅)한 관계를 가진, 한국 마음의 한 개 표상(表象)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고인(古人)과 같이 융숭(隆崇)한 경배심(敬拜心), 그 엄숙(嚴肅)한 남무심(南無心)으로는 커녕, 단순한 자연미(自然美)의 애호심(愛好心)만으로도 설악 관성(觀省)하는 이가 태무(殆無)하여진 오늘의 현상(現狀)임을 생각하며, 그 까닭이야 어디 있든지간에 민연(憫然)한 마음을 금(禁)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옮긴이 주)

1)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에서는 설악산(雪岳山)과 한계산(寒溪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인제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이 지도에는 세가지 경로로 표시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는 지금의 조침령을 넘는 길, 오색령(지금의 한계령)을 넘는 길, 그리고 미시파령(지금의 미시령)을 넘어 목우재로 지나는 길이다. 

미시령과 오색령 사이에 설악산이 있고, 오색령과 조침령 사이에 한계산이 있다. 

지금은 설악산과 한계산을 합하여 설악산(雪嶽山)으로 부른다. 

본문에서는 옛 지명은 ‘설악(雪岳)’으로 현재의 지명은 ‘설악(雪嶽)’으로 구분하였다.

2) 1933년 9월 30일 - 한국산악문고(1975년 한국산악회 발행) 1권 노산산행기 <설악행각>편 참조
3) 열리기 시작하다. 
4) 명료하고 정확함
5) 말할 필요도 없이. = 물론(勿論), 무론(無論) 
6) 절과 암자들 
7) 강원도 철원(鐵原)을 말함. 철원·평강 북쪽의 설운령은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된 안변군(安邊郡)에 있다. 
8) 옛 사람 
9) 북한의 강원도 북서부에 있는 지역으로 남쪽은 철원군, 동쪽은 평강군, 서쪽은 황해북도 신계군·토산군, 북쪽은 판교군과 접해 있다. 
10) 이천시 설성면과 장호원읍의 경계에 있는 산. 건지산과 대덕산은 이천시와 용인시의 경계에 있다. 
11) 1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4) “한 가을에서부터 눈이 와서 이듬해 여름에 가서야 녹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 한국산악문고(1975년 한국산악회 발행) 1권 노산산행기 <설악행각>편 
15) 금원(錦園, 1817~?) 조선 헌종 때의 여류시인으로 열네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에 올라 유람기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남겼다. 
16) “돌 빛이 눈같이 희기 때문에 설악이라 하였다.” - 한국산악문고 1권 노산산행기 <설악행각>편 


 

 

 

 

 

이용대 기자 칼럼   /    시인과 산악인의 삶을 함께 산 노산 이은상

 


 

노산(鷺山) 이은상이 서거한지 올해로 30주년이다. 그가 12년 동안 최장수 한국산악회장을 역임하며 '노산시대'를 이끌어 온 일은,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산악운동을 펼쳐온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도 여러 산악인들에게 회자되는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를 작사한 장본인이 노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않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 1969년 2월 설악산 10동지 눈사태 조난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으로 눈 쌓인 설악산을 오르던 노산 이은상. ‘해오라기 나는 산’이라는 그의 호처럼 노산은 평생을 고고한 시조시인으로, 산악인으로 살았다.

100자로 제정된 이 선서는 1967년 노산이 한국산악회장 취임 첫해에 제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조시인이자 사학자로서의 노산을 기억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전통이 오래된 한국산악회의 수장으로서의 노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노산하면 연상되는 것은 온 국민이 애창하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바위고개' '사우' '봄 처녀' '고향생각' '옛 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으로, 대부분의 국민들도 이것만을 기억 할 뿐이다. 그의 시가 한국민의 애창가곡으로 작사된 것은 이밖에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노산은 시조시인으로 생전에 약 2000여 수의 작품을 쏟아냈으며, 고유한 전통의 시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 시조의 한 유형을 완성한 현대시조 부흥의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 그의 시가 가곡의 가사로 쓰여 우리문화사에 남다른 위치를 가진다.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 남긴 노산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분단의 아픔, 통일염원, 우국지사추모 등 사회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있다. 사학자요 수필가인 그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설악행각' '묘향산기행' '한라산등척기' '해외 산악계 순방기'와 같은 기행문학의 압권이라 할 만한 글들을 남겼다. 이렇듯 국토순례기행문과 이충무공 일대기와 같은 선열의 전기를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노산의 일부작품들은 노산의 산시(山詩)에 매료된 스위스 문필가 쎄화가 불어로 번역을 하고 영국인 뺀느가 '천왕봉 찬가(the song of Chun Wang)외 여러 편의 시를 영역하여 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인으로서의 노산이 남긴 업적은 필자의 졸견으로 평가하기엔 그 세계가 너무나 깊고 넓다. 그는 일제수난기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한글사랑 때문에 조선어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죄 아닌 죄 값을 치루며 옥고를 겪었다. 그가 옥중생활 중에 들려준 구수한 음담패설은 동료들의 지루한 옥중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한다.

그는 암울한 일제치하와 격변하는 해방정국. 6.25전란. 5.16혁명 등 격동의 시대를 문인으로 살았지만 군사독재정권 협력이 흠이 되기도 했다. 그의 고향 경남마산에서 과거사의 시비가 일어 '노산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어찌 한 점 그늘이 없겠는가.

그의 말년은 한국등산계의 발전을 위해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방점을 찍는다. 지난해 필자는 노산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한국산악회의 '노산 산악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필자는 그분 재임 중 회지편집위원을 맡아 일한 것이 인연의 끈이 되었다.

그분의 등산관은 요산요수에 바탕을 둔 자연애호가 중심이었다. 시인 묵객들의 자연관을 지닌 그는 산을 사랑하는 자연탐사적인 성격의 등산관을 지니고 있었다. 서구 근대등산의 바탕이 된 알피니즘의 행동양식인 눈과 얼음이 덮인 고봉의 곤란성에 도전하는 서구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 한국근대등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김정태는 그의 자서전<등산50년(登山50年)>에서, 민세 안재홍의<백두산 등척기(白頭山 登陟記)>.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와<조선의 산수(朝鮮의 山水)>. 노산의<묘향산 유기(妙香山 遊記)>와 <설악행각(雪嶽行脚)>. <한라산 등척기(漢拏山 登陟記)> 등은 조선시대의 유산기와 달리 우리의 명산을 구석구석 탐사하는 학술적 구명의 탐사등산기라고 평했다. 산과 관련된 답사기는 등산의 대중보급에 기여를 했으니, 이런 형태의 등산을 한국근대등산을 발아시킨 등산의 선구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알프스 고봉에서 본격적인 등산 활동이 시작되기 전 알피니즘의 여명기에 자연과학자인 아가시, 포브스, 틴들과 같은 학자들이 빙하와 지질연구를 위해 탐사활동을 하며 산에 올랐고, 과학자뿐만 아니라 괴테, 바이런, 워즈워스, 러스킨, 쉘리, 레슬리 스티븐과 같은 문인들이 알프스의 산들을 답사하며 산을 찬미하는 저술을 펴낸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한다.

몽블랑등정을 제안 근대등산의 계기를 마련했던 소쉬르와 같은 학자도<알프스여행기>를 펴내 사람들의 관심을 산으로 끌어드린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성인 영국의 스티븐은 <유럽의 놀이터(The playground of Europe)>와 같은 명저를 저술하여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고봉으로 몰려오게 한다.

한국근대등산의 발아가 된 노산의 산행기들

노산은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척박한 산악문화의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산악도서출간에 힘을 기울였다. 1968년 월보 <산>을 창간하여 현재 지령 44년 통권225호를 기록하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산악문고> 6권을 문고판으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발간했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산악도서가 없던 시절 국내 산악인들의 지적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한국산악문고>는 <노산 산행기(鷺山 山行記)>(이은상·1975년). <별빛과 폭풍설>(가스통 레뷔파·김경호역·1975년). <산악소사전(山岳小事典)>(김원모·1975년>의 발간에 이어, <등산50년(登山 50年)>(김정태·1976년). <8000m의 위와 아래>(헬만 불·이종호역·1976년). <암벽등반기술>(백영웅·1976년). <산정수정(山情水情)>(이영희·1977년) 등이 나왔다.

그는 1969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등산전문지<등산>(현 월간 산)이 재정난으로 폐간위기를 맞자 그와 친교가 돈독한 사회명사들의 모임인 '신우회(信友會)'가 인수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이 잡지는 조선일보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가교역할을 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69년 2월에 있었다. 해외원정 등반훈련대의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발생한 국내최초의 눈사태 사고다. 이 사고로 10명의 젊은 대원이 눈 속에 매몰된 채 최후를 맞는다. 현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도 훈련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사람이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고 구조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으며, 산악회는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정적으로 회무를 집행해온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고, 조직의 책임자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를 했지만 2년 후 그는 회장직에 재추대된다.

같은 해 노산은 한국산악회의 국제적인 위상과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국제산악연맹(UIAA)의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여 회원국이 된다. 국제산악연맹 가입은 눈사태사고로 10명의 대원을 잃은 후 더욱 분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국내활동에 한정되었던 산악회의 시각을 국제무대로 확대해 희생자의 유지를 기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구미(歐美) 선진국가의 대표적인 산악회를 탐방하여 국제적인 견문을 넓힌다. 회의 운영과 활동상황, 도서출간 현황 등을 살펴보고 정보를 교류한다. 1973년부터 시작된 각국 산악단체 탐방 행보는 프랑스 산악회(1874년 창립)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스 국립스키 등산학교, 등산의 국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스웨덴산악회(1923년). 정통성과 폐쇄성을 함께 지닌 채 운영되고 있는 영국 알파인클럽(AC. 1857년 세계 최초로 창립)과 영국등반협회(BMC.1946년), 등산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아메리칸 알파인클럽(AAC. 1902년)과 '미국의 자연은 미국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외치며 환경보존운동을 펼치는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 등을 탐방하여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견문을 넓힌다. 당시 그가 각국에서 교환해온 귀중한 자료와 도서들은 한국산악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선진등산강국의 등반기술을 습득하기위하여 경제여건상 해외진출이 어렵던 시기 등산선진국 프랑스의 국립 스키 등산학교(ENSA)에 회원을 파견하여 체계화된 설빙벽 등반기술을 전수받아 국내에 보급한다. 당초 이 계획은 노산이 회장재임시 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일이 무산되자 이민재 회장에게로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각급 등산교육기관에서 기초기술로 활용하고 있는 '프렌치 테크닉'이 그 당시 도입된 기술이다.

그는 히말라야 고산등반에도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여 1977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에 이어, 1978년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등반은 한국의 히말라야등반 개척기에 있었던 두 번째의 성과로 기록된다. 당시 이 등반대의 대장을 맡아 등정을 성공시킨 장본인이 현 산악회장 전병구다.

죽는 날까지 산악문화 위해 노력했던 이은상

한국산악회는 1945년 조국이 광복되던 해에 사회단체로는 진단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정부에 등록된 단체로 엄연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35년 동안 임의단체 취급을 받아왔다. 조직의 틀을 다지고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해 1980년 사단법인화한다. 당시 단체의 법인화등록이 어려운 시기에 노산 회장의 끈질긴 집념이 이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그는 체계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등산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여 수년간 지도자급 산악인들을 양성하는데 진력한다.

1982년에는 그가 와병 중에 국고지원금을 받아 파견한 마칼루(8463m)학술원정대의 등정 낭보를 병상에서 전해 듣고 기뻐하다가 4개월 후 영면한다. 노산은 회장재임 12년 동안 등산인구 저변확대와 산악지도자 배출을 위한 등산교육, 해외 선진등반기술 도입, 산악문화 활성화를 위한 산악도서 발간, 산악회의 국제기구 가입, 히말라야 고산원정, 산악회의 법인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산은 평생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지만 생애의 후반부는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가 회장 자리에 앉아 학문의 높이만큼 산의 높이를 쌓아나간 세월은 12년(1967~70, 1973~82년)이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 산악회 수장으로 만년설에 쌓아올린 성과는 8463m의 마칼루다. 노산은 30년 전에 갔으나,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 성목(成木)으로 자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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