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암자순례 12부작] 1 ~ 5부 오산 사성암 ~ 가야산 백련암 外

2017. 3. 29. 19:40차 이야기

 

     제3부 누락 ㅡ> 지리산 구층암 동영상으로 대신하였음.  ......

                          *** 구층암 동영상 마지막 부분 다음 회 예고편에 영취산 서운암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다큐멘터리 암자순례 12부작] 중에서 제3부 동영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임.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제1부 오산 사성암




게시일: 2013. 6. 18.


저걸, 어떻게 지었을까  고즈넉한 늦겨울 산사 구례 오산 '사성암'

2005년 02월 23일(수) 00:00

   겨울산사는 언제나 고즈넉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등반객이나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유명 사찰은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맛보기 힘들지만 깊은 산속 암자는 다르다.
겨울의 막바지 남도의 깊은 산사에 들러 새봄의 희망을 차분하게 다져보는 것은 어떨까.  

   엊그제 쌓였던 눈이 조용히 녹아흐르는 지리산 자락.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오산은 높이 531m의 아담한 산이다. 구례하면 지리산, 섬진강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리산과 섬진강의 큰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오산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산의 오(鰲)자는 자라 오자다. 이 이름의 유래는 몇가지 속설이 있다. 중국 전설속에 자라가 등에 지고 다닌다는 바다속 큰산이 오산이라는 것.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오산을 자라가 섬진강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자라를 가리키는 鰲(자라 오)자를 이름에 붙였다는 설이다.【 그런가 하면 산의 정상이 벼랑이어서 ‘벼랑 뫼’로 불리던 것이 ‘별뫼’가 되고 이것을 한자로 적는 과정서 자라鱉(별)자를 썼는데 어느 때부터 그 뜻과 모양이 비슷한 鰲(오)자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

   오산에 오르는 길은 등산로와 차도가 있다. 죽마리 각금마을로 접어들면 조그마한 등산로가 나온다. 넉넉히 1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사성암 팻말이 있는 곳부터는 찻길이 나있어 자동차로 오를 수 있다.【 편하게 갈 요량으로 찻길로 갔더니 차로는 오를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좁고 진창인데다 덜녹은 눈이 길을 덮고 있다.
휴!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언제 저기까지…” 하는 마음이지만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따복따복 한 걸음 한걸음 보태본다. 산행 시작 15분께 가뿐 숨을 돌리려고 멈춰서 뒤를 보면 거기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뒤통수의 조망이 발길을 틀어 잡는다. 그 강이 있어 비로소 너른 들판이 있고 그 들판에 기대어 사람들의 마을이 있다. 이 길이 지루하지 않고 오붓한 것은 섬진강과 지리산 덕이다. 】

  【 그렇게 쉬엄쉬엄 한 걸음마다 산보며 강보며 하늘보며 걷는다. 어느새 땀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 사성암 오르는 길은 유난히 경사가 급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코끝이 땅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 하다. 거기에 하얀 눈을 이불삼아 덮고 있으니 비료포대 하나만 있으면 내려가는 길은 신날 것 같다는 상상도 해본다. 굽이 굽이 모롱이를 몇개 돌아 얼추 1시간 정도면 사성암에 닿는다. 사성암이 있는 곳은 531m이고 그 남동쪽으로 약 200m정도 더 오르면 정상(542m)이다.
갑자기 앞이 툭 터지며 환하게 경물이 변한다. 동네 뒷산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오른 산에서 이렇게 멋드러진 풍경을 대할 줄 몰랐다. 길게 굽이쳐 흘러가는 섬진강과 흰 눈에 덮인 지리산이 눈 앞에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는 산. 그래서 산은 꼭 높은 것 만이 제 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사성암(四聖庵)은 백제 성왕(544년) 연기조사가 세운 이래 원래 오산암이라 불리다 원효·의상·도선·진각 네 성인이 이곳에서 수도했다 해서 사성암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사성암은 여느 절과는 달리 넓은 마당이 없다. 대신 가파르게 올라가는 돌계단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좁은 돌계단 옆에는 1m높이의 돌담이 쌓여져 있고 돌담위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저마다 소원을 기원하면 이름을 적어놓은 기와가 가지런히 포개져 있다. 【언뜻 보니 】 건강과 소원성취를 비는 염원을 담은 내용들이다.
깍아지른 듯한 벼랑에 붙여 지은 약사전이 마치 중국의 3개 석굴중 하나인 둔황의 모가오쿠를 하나 떼어다 붙여놓은 것 같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전각에 오르니 법당의 안쪽 암벽에 약사여래불을 새긴 암각화가 보인다. 원효대사가 수행중 손톱으로 긁어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약사전에서 내려다보니 곡성에서 구례구역을 지나 동쪽으로 확 꺾어져 흐르는 섬진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을 지나 산신각 왼편에 한 사람이 수도하기 알맞은 크기의 자연굴이 뚫어져 있다. 굴을 관통해 지나가면 터가 나온다. 이 터에 서면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 차일봉이 병풍을 두른듯이 둘러 싸고 있으며 그 아래 너른 벌판 한가운데 구례읍내가 손바닥만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옆에 바위틈이 조금 벌어져 있어 한쪽은 좌선대요, 또 한쪽은 우선대다. 원효스님과 도선스님께서 앉아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큰 스님의 인연터라 일년에 세 번 이곳을 찾아 이 바위 사이를 세번 뛰어넘으면 소원성취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 이름이 뜀틀바위다.【 신선이 베를 짠 흔적인 씨줄 날줄이 바위 위에 그어져 있다는 신선대, 연기선사가 아미타불 마애불로 되었다는 관음대, 화엄사를 향해 절하는 곳이라는 배석대, 향불을 피워놓은 향로대, 바람이 센 곳이라서 풍월대, 붉은 색 바위벽으로 이루어진 괘불대,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반성한다는 낙조대, 바위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평풍대, 하늘을 우러른다는 앙천대 등이 ‘오산 12대’를 이루고 있다. 오산을 이렇게 사성암 주위로 ‘오산 12대’라 부르는 깎아지른 벼랑이 즐비해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

   사성암 총무스님인 진공(眞空) 스님이 설법한 “불교란 곧 나를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스며든다. “사물을 볼 때 나를 넣고 보기 때문에 욕심과 오만과 악함이 생기는 것이라”며 “나를 버리는 것이 수행의 첫 출발”이라는 말씀처럼 새봄엔 나를 버리고 마음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




바위벽에 매달린 사성암 '아슬아슬'

봄 정취 물씬한 구례 오산의 숨은 명소
09.04.14 10:01l최종 업데이트 09.04.14 16:35l
변종만(whda2002)           


 섬진강 풍경 1
 섬진강 풍경 1

                                    ⓒ 변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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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섬진강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섬진강은 강물의 양을 늘리며 긴 잠에서 깨어난다. 이때쯤이면 어머니의 속 깊은 정이 느껴지는 섬진강을 끼고돌며 봄의 전령사인 매실나무, 산수유나무, 벚나무가 번갈아 꽃 대궐을 만들어 놓는다.

 섬진강 풍경 2
 섬진강 풍경 2

                                            ⓒ 변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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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중순경에는 광양 청매실농원의 매화, 3월 말경에는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꽃, 4월 초순경에는 하동에서 구례까지 경남과 전남을 어우르는 섬진강변과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낸다.

따뜻한 봄바람에 꽃 축제의 화사함이 더해지니 봄 마중 나온 사람들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들뜬 마음으로는 작은 사찰이나 큰길에서 조금 외돌아진 여행지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 여행지가 바로 전남 구례군 문척면 오산 정상에 있는 사성암이다.

 사성암
 사성암
                                                ⓒ 변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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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성암(전남문화재자료 제33호)은 구경거리가 많은데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명소다. 드라마 '토지'에서 주인공 길상과 서희가 불공을 드리던 도솔암의 촬영지였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적다.

크기가 작은 데다 사찰에서 100여m 거리의 주차장까지 차로 오를 수 있어 섬진강변을 오가는 길에 잠깐만 짬을 내면 된다. 다만 경사가 급한 산꼭대기에 있어 오르는 동안 사람 대신 차가 신음소리를 낸다. 여유를 누리려는 사람들은 도농상설체험장이 있는 각금마을에서 시작되는 오산 등산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사성암의 아름다운 모습을 말할 수 없다. 제비집처럼 가파른 바위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성암을 보고나서야 '오산을 오르지 않으면 후회하고 두 번 다시 가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역사가 오래된 사찰답게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 중요한 것을 다 갖추고 있어 위엄과 품위가 느껴진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과 구례읍의 풍경도 일품이다. 자라 오(鰲)자를 쓴 오산이라는 산의 이름도 이곳의 생김새가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의 물을 자라가 먹고 있는 모습이어서 붙여졌다. 

암자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오산에 있어 원래는 오산암이었는데 '원효, 의상, 도선, 진각'이 수도한 후 4대 성인이 수도했던 곳이라 하여 사성암으로 불린다.

사성암 풍경

( 1 / 10 )

ⓒ 변종만


   주차장 끝에 있는 돌탑을 지나면 100여m 거리에 사성암이 숨어있다. 바위벽을 병풍 삼은 암자들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만들어 논 세상이 새롭다. 넓은 마당 대신 허리높이의 돌계단이 이어지고, 양옆의 돌담 위에 이름과 소원을 적어놓은 기와들이 눈길을 끈다.

기둥 세 개에 의지한 채 바위벽에 매달린 약사전은 97년 이후 법당까지 흙을 채워 절벽을 메우고 공사가 끝난 다음 다시 흙을 파내는 고생 끝에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만든 암자다. 구불구불 돌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25m의 암벽에 조각된 마애여래입상(전남문화재 제222호)이 자비로운 미소로 맞이한다. 선정에 든 원효 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입상은 음각으로 놀라울 만큼 선이 뚜렷하다.

약사전에서 지장전으로 가는 길의 언덕에 수령이 800년도 더 된 귀목나무가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지장전의 돌담에도 소원을 적은 기왓장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주지스님이 묵는 작은 암자 옆 바위도 기도를 하는 장소다. 소원을 빌면서 바위의 빈틈에 올려놓은 동전들이 이색적이다. 기왓장에 소원을 적었건 바위틈에 동전을 올려놓았건 소원이 모두 이뤄질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지장전 위에 뜀바위로도 불리는 소원바위가 서있다. 이 바위에 하동으로 뗏목을 팔러갔던 남편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를 잃은 설움에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활공장에서 이륙한 패러글라이딩들이 하늘을 수놓는 모습도 멋지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돌아서면 큰 바위 사이로 아담한 산신각이 나타난다. 산신각 옆의 바위틈이 도선국사가 좌선하던 도선굴의 입구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어두운데 중간쯤에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수행에 정진했을 도선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도선굴의 출구가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어 밖으로 나오면 구례읍, 섬진강,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올망졸망한 집들이 넓은 들판에 둘러싸여 있는 구례읍, 큰 물줄기를 만들며 S자로 휘감아 도는 섬진강, 그런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꼬리를 무는 지리산의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도선굴에서 깨달음을 얻고 딴 세상에 온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인 오산 정상은 등산로인 활공장에서 5분여 거리에 있다.

사성암을 나와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을 품은 봄철여행 1번지 섬진강변을 달리노라면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은빛물결이 다음에 또 만나자고 손짓한다.


여행 정보
*도로안내
①통영ㆍ대전고속도로 함양JC → 88고속도로 남원IC → 19번 국도. → 밤재터널 →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
②호남고속도로 전주IC → 남원 → 19번 국도 → 밤재터널 →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
③호남고속도로 곡성IC → 곡성읍 → 17번 국도 →  구례 구역 → 18번 국도 →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
④남해고속도로 하동IC → 하동읍 → 19번 국도 → 간전삼거리 좌회전 → 861번 지방도 →  죽마리 → 사성암

*Tip자료
①사성암 입장료 : 2,000원(주차료 없음)
②전화 : 사성암 061)781-5463, 구례군청문화관광과 061)780-2450
③사이트 : 구례군청문화관광(http://www.gurye.go.kr/culture)-관광명소-유명사찰-사성암
④주의사항 : 사성암 주차장까지 가파른 산길이 이어져 안전운전이 필수
⑤주변 볼거리 : 구례 산수유마을ㆍ화엄사ㆍ천은사, 하동 화개장터ㆍ최 참판 댁ㆍ쌍계사, 광양 청매실농원
⑥먹거리 : 재첩국, 참게탕, 은어회, 산채정식
⑦장터 : 구례장-3ㆍ8일, 화개장-1ㆍ6일
⑧등산 : 각금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해 사성암과 오산 정상을 거쳐 마고마을로 하산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산사랑, 한교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제2부 금오산 향일암



      게시일: 2013. 6. 18.


스스로 몸을 굽히지 않으면 보기 힘든 사찰
여름 입구에서 만나는 여수 명소 향일암
2016년 06월 20일 (월) 08:49:55오마이뉴스 최홍대 .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아서 휴가철만 되면 관광객들이 몰리는 자그마한 섬이 있다. 그곳에 가면 갓김치가 있고 서대회와 각종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드라이빙하다 보면 조그마한 암자에 닿게 된다. 조그마한 암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향일암은 4대 관음기도처(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여수 금오산 향일암) 중 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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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 입구 향일암 매표소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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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산도 끝자락 금오산에 있는 향일암은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 향일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때 인묵대사가 개창하면서부터이다. 향일암은 기도하는 암자로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하지만 관광지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어디서 보든지 간에 시야에 막힘이 없어 멋진 풍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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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으로올라가는 길 돌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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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표소를 조금 지나가면 두 갈래길이 나온다. 좌측의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산행길과 우측의 조금은 편한(?) 산길로 가는 길 중 선택해야 된다. 돌계단으로 가는 길은 10여 분이 소요되고 산길로 가는 길은 20여 분 정도가 소요된다. 돌계단은 10여 분이 걸린다고 하나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에게는 숨이 차는 정도의 운동량이 필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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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모양의머리 금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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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올라와보니 바다 풍경이 기막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향일암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냥 쭉 뻗어 있어서 망망대해가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10여 분을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 가슴 속에 있던 묵직한 것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저 앞에 있는 거북 머리 모양으로 돌출된 땅 모양 때문인지는 몰라도 향일암 곳곳에는 거북이 모양의 돌뿐만 아니라 다양한 거북 석상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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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 향일암으로 들어가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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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향일암이 다른 암자와 달리 독특한 것은 암자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돌과 돌 사이를 지나야 하고, 때로는 낮은 석문으로 인해 몸을 굽히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굽히지 않으면 둘러보기 힘든 사찰이다.

수직 절벽에 건립된 향일암의 바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경문이 자연스럽게 새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글자인가 보면 글자가 아니고 글자가 아닌 것 같아 지나가려고 하면 글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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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 향일암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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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의 대웅전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바위 사이로 걸어 올라갈 때쯤 보인다. 향일암은 원통보전, 삼성각, 관음전, 용왕전, 종각, 해수관음상 등이 있는 곳으로 사찰이 갖추어야 할 구색은 다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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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내 향일암의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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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암절벽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지 경내는 그렇게 넓지 않다. 매년 향일암에서는 일출제가 열리는데 그걸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고 한다.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온 보람이 있다. 원통보전을 보기 위해 거대한 바위 두 개 사이를 지나온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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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관음전 모습을 드러낸 상관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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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상관음전은 다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한번 관문을 지나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인생은 끝없는 관문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잠시 든다. 뻥 뚫린 경관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좁다란 길을 지나가야 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생길은 고단함 끝에 낙이 있는 법이다. 고단함을 외면하고 낙을 만날 수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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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선대 원효대사가 참선했다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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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향해 솟아나온 저 바위가 바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좌선대이다. 탁 트인 남도의 바다를 맞이하고 해풍을 맞아가며 수도했을 원효대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향일암(向日庵)이라는 암자의 이름의 뜻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향일암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적에 항전하기 위해 승려들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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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바다 향일암에서 바라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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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는 시원함을 넘어 상쾌하기까지 하다. 향일암에게 한편을 내어준 금오산 한자의 의미는 금빛 자라산이다.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과 앞으로 튀어나온 땅 모양을 보면 꼭 거북이를 닮아있다.

향일암까지는 조금 헉헉 대면서 올라갈 만하나 무릎 관절이 안 좋다든가 그동안 운동을 게을리 한 사람이라면 금오산 등반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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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꼴뚜기 데친 꼴뚜기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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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 매표소를 기점으로 주변에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 갓김치와 막걸리를 팔고 있는데 데친 꼴뚜기를 파는 곳도 있다. 지난달 서천 장항항에서 연 꼴뚜기 축제에서 만난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남해까지 와서 보니까 오랜 지인을 만난 것 같다.

여수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돌산에서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향일암은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 조금은 말해주는 것 같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제휴에 의해 게재됐습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HD특집 다큐멘터리 - 庵子(암자) 01-지리산 구층암 HDtv 

업로드된 날짜: 2012. 2. 2.




   자연주의 건축의 윤리적 아름다움--구례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 불교교리               

우주 | 조회 59 |추천 0 | 2016.11.09. 15:44
 



다실이 있는 서쪽 요사채의 모과나무 기둥.
 



백련결사, 수행선원의 청정도량


   나무에 피는 연꽃이 목련(木蓮)이고, 나무에 열린 참외가 목과(木瓜)다. 그 목과가 모과다. 노랗게 익은 모과는 영락없이 참외를 닮았다. 그런데 울퉁불퉁한 것이 못났다. 못나서 모개라 부르기도 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한다. 못난 모양에 비해 모과향은 대단히 향기롭다. 맛은 오만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시큼하고 떫다. 모양과 색, 향, 맛, 효능에 두루 놀라는 열매가 모과다.


자연과 구층암이 유기적으로 일체화
개심사 심검당, 청룡사 대웅전과 상통
나무 골과 옹이까지 수용한 자연주의
자연이 완성한 구조를 건축체계에 포용


   모과나무는 중국 원산이다. 학명은 Chaenomeles sinensis이다. Chaenomeles는 명자나무속의 속명이다. 속명(Chaenomeles)은 라틴어 갈라지다(chaino)와 사과(melon)의 합성어다. 열매가 사과 같고 가지가 잘 갈라진다는 뜻이다. sinensis는 ‘중국의’ 뜻을 지닌 라틴어로 원산지를 밝힌 종명이다. 나무의 학명은 라틴어로 통용한다. 라틴어는 생활언어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시대에 변함없이 항구적으로 명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속명은 대문자로 시작하고, 종명은 소문자로 시작한다. 모과나무는 생물분류학적으로 분류하면 식물계-속씨식물문-쌍떡잎식물강-장미목-장미과-명자나무속-모과나무종의 계통에 따른다. 흥부전에 나오는 ‘화초장(花草欌)’도 바로 이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이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중심 줄기가 외길로 높이 자라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속명에서 그 특성이 보이듯이 가지가 잘 갈라져 자라기 때문이다. 모과나무에서 하나의 사각형 판재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과나무로 화초장 장롱을 만들었다면 필시 귀한 물건임에 분명하다. 모과나무로 건축목재로 사용하였다면 더구나 희한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에 그 진귀한 장면이 있다.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 뒤로 난 조릿대 터널 오솔길을 지나면 구층암(九層庵)에 닿는다. 〈화엄사 사적〉(1924) 등의 기록에 화엄사는 큰 절 여덟에 암자 81암, 즉 화엄사는 ‘8원 81암’의 사격으로 전해진다. 구층암은 81개소 산중암자 중의 하나로 이어져 내려왔다. 요사채에 걸린 현판(광무원년: 1897년)에는 ‘구층연사(九層蓮社)’라고 기록하고, 〈중수구층암기〉(1899년) 현판에는 ‘구층난야’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또 1901년에 승려 등 60인이 구층암에서 염불수행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를 가졌다고 하는 바, ‘구층연사’는 구층암의 백련사 성격을 환기시켜 준다. 특히 ‘구층난야’의 기록은 구층암이 수행자들의 청정선원이었음을 조명해준다. 1937년 상량문에서는 ‘구층대’로 기록하고 있어 그 다양한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즉 구층암은 시대에 따라 구층연사, 구층난야, 구층대 등으로 불리며 백련결사, 선원, 강원 등의 도량으로 수행을 이어왔음을 파악할 수 있다. 결사도량, 수행선원이었던 만큼 도량의 청정한 기풍과 담백한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유전적 생태환경이 아닐 수 없다. 구층암에서 받는 첫인상은 그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소박함, 고요함, 청정함이다.



  

모과나무 원형 그대로를 요사채 건물의 기둥으로 썼다. 맨 오른쪽은 동쪽 요사채 모과나무 기둥이고, 나머지 두 기둥은 서쪽 편의 것이다



나무 그대로 처마 밑에 옮겨 심은 듯


   10여 년 동안 구층암을 지키고 계신 덕제스님은 구층암이 지닌 특성으로 자연스러움을 첫손에 꼽았는데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구층암 가람이 주변의 지리산 자연환경과 얼마나 천연성과 조화로움으로 경영하였는지를 보려면 천불보전 뒤 언덕에 올라보면 된다. 구층암을 구품연화대의 정토로 능히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가람배치여서 놀랍다. 청정한 숲 속 자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형국이다. 마치 그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풍경처럼 자연과 건축이 유기적으로 일체화한 것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구층암 건축에서 자연스러움의 요소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선원의 요사에서 기름기와 습기를 제거한 자연 그대로의 분위기를 구현하는 것은 형상을 따르는 그림자만큼이나 당연해 보인다.


   구층암은 천불전의 흙으로 만든 천불과 야생차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구층암의 상징은 오래된 모과나무 기둥이다. 나무의 생김 그대로 기둥으로 쓰거나 들보, 창방으로 쓰는 경우는 왕왕 있다. 서산 개심사 심검당, 범종각 건물이나 안성 청룡사 대웅전, 아산 봉곡사 요사, 합천 호연정 건물 등에서 무위(無爲)의 소박한 심정들을 만나곤 한다. 서양의 그리스 건축에서는 사람의 인체를 건축기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의외다. 모과나무는 소나무, 전나무처럼 외줄기로 자라서 통나무 목재로 쓰일 수 있는 재목이 아니다. 중간 키의 관목에다 가지 분화가 활발해서 통나무를 얻기 어렵고 등걸 표면이 혹처럼 울퉁불퉁하고 옹이가 많아 목재로서의 기본 자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구층암 좌우 요사 두 채에는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삼아서 일찍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천불전 뜨락엔 다섯 그루의 모과나무가 있다. 천불보전 계단 양 옆으로 살아있는 두 그루가 있고, 좌우 요사채에 기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세 그루다. 모과나무 기둥은 생김 그대로다. 모과나무 원형을 그대로 살려 야성적인 힘을 보존하고 있어 경이롭다. 잔가지만 툭툭 쳐내고 골격 그대로 기둥으로 활용했다. 툇마루와 창방의 기능적 결구를 위해 최소한의 홈을 파냈을 뿐이다. 그냥 서있는 나무 그대로를 처마 밑에 옮겨 심어 둔 형국이다. 건축이 숲의 정서를 담고 있다. 건축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서양의 고딕건축은 유럽의 떡갈나무 숲의 재현이다. 활엽수의 숲과 나무들의 왕성한 생명력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고딕양식이다. 기둥은 나무이고, 아칸서스 잎은 활엽수의 풍성한 잎으로 재현했다. 자연은 끊임없이 부활하고 생산하며 재탄생한다. 숲과 나무로 해석한 건축적 형상을 통해 근원적인 분위기와 무한한 생명력을 담아냈던 것이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고딕건축이 담고 있는 정신의 전위에 가깝다. 보다 직접적이며 대범하다. 그리고 자연의 상징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구현하고, 역사적 층위를 갖는 인문적 자연으로 재탄생시켰다. 모과나무 삶의 드라마틱한 반전이고 성스러운 회향(回向)이다.



  
천불보전 뒤 언덕에서 바라본 구층암. 



존재에 대한 깊은 존엄성의 통찰


    평범한 요사채 건물에 살아있는 모과나무 기둥이 들어서자 건축공간이 엮어내는 정신적인 장(場)이 아라한과를 얻은 듯하다. 강한 중력으로 공간이 휘는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움의 경지를 고양하고 있다. 고승대덕들이 남기고 간 지팡이처럼 삼엄하기도 하다. 관대함, 무소유, 무애자재, 용맹전진, 해탈 등 깊은 수행력의 정서가 공간에 흐르고 청정 도량의 결계(結界)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무가 아니라 나무 형태를 빌린 일깨움의 선지식 같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건축을 누구나 돌아보는 건축으로 전환시킨 경이로운 안목이다. 존재에 대한 존엄성의 통찰이 깊고도 숭고하다. 특히 비정규직 일회성 소모품으로 사회구조를 조정하는 시대에 존재의 존엄성을 이보다 더 깊이 일깨울 수 있을까?


  하나의 건축에 구조적 안정성과 경제성, 심미적 아름다움의 요소는 언제나 숙고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셋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일은 전문 건축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는 서로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까닭이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그 셋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모과나무 기둥은 수피가 벗겨진 뼈대의 구조다. 그런데 줄기는 인위로 다듬지 않은 원형 그대로다. 나무의 원형은 수백 년간 외부환경과의 투쟁 속에서 역학적으로 가장 안정화 되고 최적화 된 물리구조다. 다듬지 않고 단청을 입히지 않았으니 경제성은 논하고 따질 필요가 없다. 심미적이며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우리가 독창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 건축가 가우디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힘줄 같은 나무 골과 옹이까지 자연주의로 수용했다. 심지어는 나무와 일체가 된 돌덩어리도 그대로 내버려 뒀다. 자연 스스로가 형성하고 완성한 구조 그대로를 건축 체계로 포용했다. 나무 형태나 굴곡에 대한 차별적 분별을 여읜 차원이다. 건축에 표현된 비유클리드적이며 비선형적 구조역학의 경이로운 형태다. 자연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그 바탕임에 분명하다. 군더더기 없는 뼈대가 가지는 구조미학과 윤리적 아름다움이 빛난다. 모과나무 세 그루 구층암 처마 밑에 기둥으로 심어져 있다. 휜 것은 휜 그대로, 굽고 파인 결은 파인대로, 옹이는 옹이대로 나무 스스로가 형성해온 모양 그대로로 집을 지었다. 건축이 살아 있다. 



노재학 불교사진작가  noduc@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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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구층암의 역사
  
 작성자 :
작성일 : 2015-08-06     

고싱가숲 불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http://www.gosinga.net/archives
본문은 화엄사의 공식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화엄사 구층암의 역사


큰절이 여덟이요 암자가 여든 하나


   구층암은 화엄사에 딸린 암자이므로 그 역사 또한 화엄사의 역사에 편입되어 서술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화엄사사적>(1697; 1924) 및 <봉성지>(1800)를 보면 신라 경덕왕 때에 “큰절이 여덟이요 부속 암자가 여든 하나大寺八屬庵八十一”라 하였으니, 이 서술 내용에는 구층암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현재의 화엄사 경내 및 산중 암자, 인근 마을에까지 이르는 각종 유구들을 조사해 보면, “대사8 속암81” 내지 “8원 81암”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구층암은 늦어도 신라 경덕왕 때에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나아가 <화엄사사적>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하는 각종 전각, 당우 및 암자의 이름을 그 위치까지 지정하여 예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구층암은 “봉천원奉天院”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먼저 구층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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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뜨락에 오를 때 보이는 석탑 부재들


   계곡을 따라 대숲을 지나 구층암에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맞는 석물은 계단돌로 쓰이고 있는 석탑 부재이다. 이 석탑 부재를 딛고 뜨락에 오르면 왼편으로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탑신부며 옥개석 등의 석탑 잔편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다. 이 석물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애초에는 삼층석탑 두 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현재의 삼층석탑 한 기는 사실 1961년에 각황전을 중수할 때 구층암 주위 사방에 널려 있는 부재들을 수습하여 세운 것이지만,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연대를 잡는다. 천불전 앞의 석등과 배례석 역시 비슷한 연대로 보며, 현재 화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려시대 동종 역시 구층암의 옛 천불전 터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들 석물들과 동종은 나란히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건립되거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바, 현 구층암 사역은 적어도 이들 유물보다 앞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냇물은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흐르고


   현재의 봉천암鳳泉庵과 길상암吉祥庵 및 인근의 여러 암자터를 포괄하는 구층암 사역이 신라말/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예상이 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암자나 원院의 이름으로 ‘구층’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는 임진란 내지 정유란 시기에 불에 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중수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1697년에 <화엄사사적>이 간행되었으나, 여기에는 당시 중수되었던 전각이나 암자 이름이 아쉽게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기록에 구층암 사역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1487)를 살펴보도록 하자.



   신미일. 쌀 다섯 되를 남겨두고 설근과 헤어지다. 밥을 먹은 뒤 초막을 출발하여 연령을 지나 고모당을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보월, 당굴, 극륜 등의 암자를 지났다. […] 이날 삼십 리를 걸어 봉천사奉天寺에 이르렀다. 절은 대숲에 있었으며, 누 앞으로는 긴 시내가 있어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흘렀다. 아름다운 절이로고! 이날 황제가 승하했다는 불우한 소식을 들었다. 주지는 육공이었다. 신축년(1481)에 산에 놀러갔을 때 개성의 감로사에서 본 자였다. 나를 누상에서 접대하고는 선당에 묵게 하였다.


   임신일. 비가 내려 봉천에 머물다. 누상에 앉아 근체시 한 수를 얻었다. 시첩은 누의 창에 있다. 계유일. […] 밥을 먹은 뒤 내려가 황둔사黃芚寺를 둘러보았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花嚴으로 명승 연기가 창건한 절이다. 절 양편으로는 모두 대숲이었다.


辛未. 留米五升別雪根. 食後發伐艸幕. 過淵嶺登姑母堂. 挾右牛翻臺而南下. 過寶月,堂窟,極倫等庵. […] 是日行三十里. 抵奉天寺. 寺在竹林中. 樓前長川. 行竹底而鳴. 佳刹也. 是日聞皇帝陟方之奇. 住老六空. 辛丑年遊山時見於開城甘露寺者. 接余樓上. 館余禪堂. 壬申. 滯雨留奉天. 坐樓上覓近體一首. 帖在樓囱. 癸酉. 飯後下觀黃芚寺. 寺古名花嚴. 名僧緣起所創. 寺兩傍皆竹林


   남효온은 조선초 1487년에 지리산 일대를 답사했다. 그는 9월 신미일에 반야봉 인근의 초막에서 출발하여 연령-노고단-보월-당굴-극륜-봉천사에 이르는 삼십 리 길의 산행을 했다. 이 산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고단에서 출발하여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길은 노고단과 우번대 사이의 화엄사 골짜기를 따라 하산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이 길은 무넹기, 코재에서 시작하여 집선대, 국수등을 거쳐 구층암, 화엄사에 닿는다. 즉 노고단에서 화엄사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인 것이다.



history02
구층암의 대숲과 오솔길. 시냇물은 이 대숲 아래를 뚫고 흐르니 난간 앞의 노래가 된다.


   또한 ‘보월寶月’이라는 암자명은 <화엄사사적>(1924)에서 한자는 다르지만 음가는 동일한 ‘보월정사普月精舍’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남효온이 언급하는 암자들은 비록 현존하지는 않을지라도 당시 화엄사의 속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봉천사와 화엄사를 오가며 묵었던 이후 일정으로 보건대, 봉천사는 화엄사와 몹시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효온이 답사한 ‘봉천사奉天寺’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화엄사의 바로 윗편의 구층암 일대로 비정함이 타당하다. “절은 대숲에 있었으며, 누 앞으로는 긴 시내가 있어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흘렀다”는 묘사는 현재 구층암 일대의 풍경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법 사격이 컸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화엄사사적>(1697)에서 때마침 ‘봉천원’ 사역을 기록하고 있어 보완이 된다. 전각과 당우의 이름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봉천원 겸 연등각 13간, 정문 겸 산호루 13간, 종각 3층3간, 자미당 3간, 삼광전 3간, 도솔전 3간, 제석전 3간, 칠성전 3간, 팔관당 5간, 좌우경루 각3간, 배운루 3간, 의상암 3간, 동손암 3간, 죽조암 3간, 봉래암 3간, 십육나한전 5간, 오백응진전 9간, 천불전 15간


   위 봉천원 기록은 <화엄사사적>을 기록할 당시 고래로 건립된 적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왔던 내용이다. 이것은 어느 한 시점의 전체 규모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에 걸쳐 명멸했던 이름들을 통시적으로 종합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 봉천원 기록이 고스란히 봉천원의 규모를 뜻하지는 않는 한편 더러는 관련 내용이 일실되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남효온이 며칠동안 묵었던 ‘봉천사奉天寺’가 사적기에서 말하는 ‘봉천원奉天院’과 동일한 사찰이라고 보면 그가 접대를 받았던 누각은 다름아닌 ‘산호루’나 ‘배운루’였을 것이며, 당시의 수행승은 적어도 30인 이상이었다. 그리고 현재 구층암의 주불전인 ‘천불전’이 기록에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호남봉성지지리산화엄사봉천원중창상량록>(1874)의 제명에서 ‘봉천원鳳泉院’이라는 이름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사적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봉천원奉天院’은 필시 현재의 봉천암을 포함한 구층암 사역이 아닌가 한다. 음가(봉천)는 같은데 한자(奉天/鳳泉)만 다른 경우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지리’와 ‘화엄’만 해도 음가는 같은데 여러가지 다른 한자 표기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남효온은 비오는 날 봉천사 누상에 앉아 칠언율시 한 수를 얻었으니, <봉천사 누창에 쓰다書奉天寺樓囱>가 그것이다. 이 시는 그의 <추강집>에 실려 있거니와 가을날 구층암의 우중 풍경으로 운위될 만하다:



머리깎은 이 삼십이 유생에게 인사할 제

구월의 두류산은 수목에 비단을 둘렀구나.

빗방울 때리고 바람 비껴 부니 누 밖의 소리요

시냇물은 대숲 아래를 뚫으니 난간 앞의 노래라.

서리는 능히 천 그루의 잎을 떨어뜨려도

가을은 한 그루의 마음을 떨구지 못하는구나.

고담한 마음속 회포는 도리어 활발발하여

새벽 창가 차를 마시니 사방의 산은 잠겨 있더라.



禿翁三十謝靑衿    九月頭流錦樹林

雨打斜風樓外響    溪穿竹底檻前吟

霜能脫落千林葉    秋不彫零一木心

枯淡襟懷還潑潑    曉囱茶罷四山沈


 

불타는 화엄사, 그리고 아흔 여덟 대덕의 토굴살이


   화엄사는 임진난 내지 정유난의 병화로 전체적으로 불탔다. 이를 두고 홍세태는 “도선의 유적은 외로운 연기 뿐道詵遺跡只孤烟”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화엄사사적>(1924)은 선조26년(1593)에 절이 불탄 뒤에 아흔 여덟 분의 대덕들이 토굴살이에 의지하면서 터를 지켰다고 적고 있다. 구층암의 사역 역시 이때 불탔을 것이다. 특히 정유난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섬진강을 따라 내습하여 구례와 남원 일대가 가장 참혹한 병화를 입었으며, 구례의 봉성과 남원성이 함락될 즈음에 지리산 산중구곡의 암자들까지 모조리 불에 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정유난에는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승려 153인이 전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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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가는 길에 뒤돌아본 각황전


   큰절이 여덟이요 암자가 여든 하나였건만, 이제 화엄사는 외로운 연기 한 가닥만 남고 말았다. 그러나 토굴살이를 하며 터를 지켰던 대덕들의 덕으로 화엄사는 현재의 사격으로 다시 서게 된다. 병화를 입은 지 삼사십 년이 지나 인조8년(1630)에 마침내 화엄사 중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각과 당우, 암자가 차차 건립되었다. 인조23년(1645)년 즈음에는 이미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적전, 해운당, 송객료, 계명당, 만월당, 선당, 쌍련당, 향각전, 부도전, 동방장, 동전, 승당 등의 전각과 당우가 건립되었으며 암자로는 보적암, 금정암, 상암, 봉전동암, 상용문암, 하용문암, 은선암, 부도전, 적기암 등이 건립되었다. (이 내용은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1645년 <화엄사상물건도록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층암은 인조25년(1647)에 중창되었다. 그리고 화엄사 중건 대역사의 마지막은 장육전(각황전)의 중건으로 숙종25년(1699)에 시작해 숙종28년(1702)에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703년에 삼존불과 사보살상을 조성하고 이레동안 경찬법회를 열었다. 병화로 소실되고 나서 거의 일백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현재의 사격을 되찾은 것이다.


 

선원, 강원, 백련사, 비구니 도량, 불교정화 운동


   이후 구층암의 역사는 <구층대상량문>(1937)<봉성지>(1800), <중수구층암기>(1899), <화엄사사적>(1924)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구층암은 1647년에 중창되었다고 하였으나 이 연도는 2차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향후 비공개 자료인 여러 중수기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개된 여러 자료의 정황상 1647년 무렵에 중창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1772년에 봉암장로 등이 구층난야에서 경찬법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한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0년에 간행된 <봉성지>에서는 화엄사 속암으로 ‘구층’과 ‘봉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바, 1849년의 <봉천암중창기>는 임진난 이후 최초 중창이 아니라 대규모 중수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로 ‘구층’과 ‘봉천’을 언급하는 사료들은 풍부하므로 현재의 구층암 사역은 17세기에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화엄사의 구층과 천은사의 수도와 내산사의 영원에서 사교를 수료”한 청하탄정 선사의 행장으로부터 1800년대 후반에 구층암이 강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8년에 구층암이 중수되었다. 매천 황현은 중수된 구층암에서 이틀을 묵고서 쓴 <중수구층암기>에서 “기와와 서까래를 곱고 산뜻하게 일신하였다”고 썼다. 1901년에는 승려도속 60인이 구층암에서 백련사를 결사하고 발징화상의 유풍을 진작시켰다. 특히 1900년에는 청하탄정 선사가 견성당에 설선회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경허선사를 모시고 상원암에다 선원을 복설하였는데, 이 상원암은 현재 구층암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여러 암자터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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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나무 기둥으로 유명한 구층암 본존요사.
현재 다실로 쓰이고 있는 이곳은 선방·강원·결사도량 등으로 쓰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구층암의 역사는 본존요사가 애초부터 선방 내지 강원의 용도로 건립되었음을 알려준다. 즉 좌우에 방장실을 두고 가운데에 선방을 둔 구조로서 대중이 모이기에 적합하기에 때로는 선원으로 때로는 강원으로 때로는 백련결사의 도량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구층대”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며, 사중의 기록들은 유생 황현의 <중수구층암기> 외에는 대부분 “구층대”라고 불렀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구층암이 한때 비구니 도량으로 쓰였던 흔적은 천불전 화단에 세워져 있는 비구니 덕선스님의 공덕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비구니 법희선사가 한때 구층암에 머물러 수행했던 이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때가 1941년으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마도 일제군국주의 시대의 여파였던 듯 화엄사 전체가 어떤 공적 기록물도 남지 않은 암흑기로 접어든다. 이 암흑기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바, 여순사건에서 촉발된 지리산 빨치산 투쟁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속수구례지>에서는 산승이 하야한 것이 7년 간이라고 기록했다. 7년 간에 걸친 전투 끝에 빨치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1954년에 비로소 지리산 입산이 허락된다. 때마침 1954년에 불교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화엄사의 주체세력이 대처승에서 비구승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구승이 맨 처음 입주한 곳이 바로 구층암, 봉천암, 금정암이며 이후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1961년에 비구승이 화엄사에 완전히 입주한다. 그리하여 화엄사는 마침내 암흑과 전란에서 빠져나와 빛나는 역사의 전통 위에 법등을 켠다.


   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화엄사가 전소될 뻔한 위험에 처했으나 차일혁 토벌대장이 이를 막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1948년 여수, 순천, 백운산을 거쳐 마침내 지리산에 입산한 김지회 부대 등은 노고단을 거점으로 삼고 산 아래 마을들을 순식간에 점령한 다음 구례 전체를 해방구로 만들려는 의도로 대규모 정규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국군의 백인기 연대장이 산동군에서 피습당하여 자살한 것이 이 무렵으로, 이후 구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불에 타고 말았다. 칠불사, 연곡사가 전소된 것이 이 무렵이요 화엄사의 지장암과 사하촌 여관마을이 불탄 것도 이 무렵이다. 노고단 산정 주위의 서양인 별장촌 60여 채도 이때 불탔다. 그러나 깊은 산 지리산은 천혜의 은거지였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0년에 내원암, 보적암이 파괴되고, 1951년에는 상원암, 보운암, 만월당이 소실되었다. 이때 작전을 주도한 것은 제11사단으로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으나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


   이후 제8사단이 새로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였고, 1951년 5월 10일 군경합동작전회의에서 또 다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펼치기 위해서였다. 이때 차일혁 부대장은 관할 지역이 아닌데도 화엄사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다른 부대장을 대신하여 화엄사에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문짝들만을 뜯어내 소각하는 상징적 행위로 그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화엄사가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구층암도 살아남았다. 빨치산 토벌대장이었음에도 적 이현상의 주검을 정중히 화장하고 권총 세 발을 예포로 쏘았던 차일혁은 늘 염주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이현상 주검의 주머니에서도 염주가 나왔다. 차일혁 공덕비는 화엄사 경내에 세워져 있다.


 

용맹정진과 야생차


   길게 잡아 이삽십 여년 간의 암흑기와 전란기를 빠져나온 화엄사는 도광스님이 주지를 하면서 오늘날의 가풍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도광스님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화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봉천암, 구층암에 용맹정진 선원을 개설하였으며, 이에 전국의 제일납자들이 생사를 내놓고 정진하였다. 그 당시 전강스님이 한 시절 봉천암에 조실로 있기도 하였으며, 일타스님 역시 구층암 선방에 방부를 들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정찬주의 소설 <인연>에서 그려진 바 있으니 이를 소개한다:



   방광의 이적을 보인 일타는 화엄사 선방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비구 대처 간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들르지만 수행하기에 아주 조용하고 기운이 좋았다. 더구나 선방으로 운용되는 구층암은 대웅전 바로 뒤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도 경내와 달리 깊은 산중처럼 적막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백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소리쳐 흐르고, 천불전 계단 옆에는 모과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과나무였다. 고목이 되면 목재로 사용하는 듯 구층암에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일타는 모과나무 기둥 사이의 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구층암에서 서른 걸음 거리에 자리한 암자가 봉천암인데, 이곳에 전강이 화엄사 선방의 조실로 머물고 있었으므로 화엄사 스님들은 봉천암을 조실채라고 불렀다.


─ 정찬주, <인연> 중에서


그러하니 구층암이 한 시절 한국 선불교의 선등이 가열하게 타올랐던 곳임을 알고 우리는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숲 아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제 구층암은 산중 적막처라기보다는 신도들과 관람객들이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암자가 되었다. 아울러 구층암 가까운 곳에 선등선원이 설립됨으로써 구층암은 이제 선방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원, 강원, 백련결사 도량, 비구니 도량, 용맹정진 도량으로 쓰였던 역사를 거쳤던 만큼, 구층암의 건축에서나 자연환경에서나 그 풍모를 간직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바로 이것이 구층암에 들 때 은은히 번져오는 첫 인상의 근원일 것이다. 그러하니 우리는 그 향취를 소매에 묻히고 자연스럽고, 질박하고, 아담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곳을 소요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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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사역 주변의 야생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다.


   이제, 구층암 본존요사의 선방은 누구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로 변모되었다. 현재 화엄사 각황전 뒷편에서 시작하여 구층암, 봉천암에 이르까지 월류봉, 차일봉 능선 자락을 타고 야생차가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다. 넓게는 부도밭에서 연기암까지 군데군데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기도 하다. 그간에 산중의 스님들만이 끽다했던 이 야생차는 이제 구층암 다실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도 제공되고 있다.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말이 있으나 무릇 선禪에 참參하지 않은 채 맛만을 운위하여 그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니, 먼저 우리는 선방으로 쓰였던 구층암의 역사를 품에 안으며 선정禪定에 들어야 할 일이다. 구층암 선원에서 용맹정진을 하던 수행자들에게 일미一味를 전하여 수행의 힘을 북돋아 주었던 그 야생차가 이제 또 다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으니, 반갑다 아니할 수 없다.


                     


 
 







      

제목[사진·그림] 화엄사에서 선재(善財)를 만나다년/호2011/10
소제목문학 속에 비친 산사(山寺)/최두석 詩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호수444
글 : 국수용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
최두석

화엄사 구층암에는 모과나무가 있고
모과나무 기둥도 있다
산 나무는 당연히 꽃 피우고 열매 맺는데
죽은 나무 기둥은 지붕을 힘껏 떠받치고 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보라는 가르침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모습이라지만
어떻게 죽느냐가 신성한 후광을 씌우기도 하고
버러지처럼 비루하게도 한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삶의 진정을 증명하기도 한다
유난히 죽음으로 삶의 깃발을 세우려 한
지사나 열사가 많이 배출된 나라에 살며
죽어 장작으로 불타거나
옻칠한 장농이 되지 않고
지붕 받치는 기둥이 되는 것이 과연
보람인지 업보인지 생각한다
속이 문드러지면서 풍기는
모과 향내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

-시집 투구꽃(창비, 2009)
중에서











  딸아이와 동행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가운 초가을 햇살이 경내 마당에 반사되어 눈이 부신 정오쯤, 화엄사에 도착했다. 먼저 우리 부녀는 어린 스님의 안내를 받아 숙소를 배정받았다. 갓 사춘기를 넘긴 중학생 딸아이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어린 스님은 꽤나 수줍어했다. 도심에서 자라 또래 이성을 자유롭게 만나는 딸아이와는 분명 다른 순수함이 보였다
.
저녁공양을 마치고 방에 누워 아득히 들려오는 염불소리와 창 너머로 흐르는 개울물소리를 듣던 딸아이는 벌써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나 또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함 속에 화엄사상,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현행(普賢行)의 뜻을 되새겨 본다
.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구층암의 모과나무기둥에서 윤회(輪廻)의 가르침을 배우고 경내에서 마주쳤던 어린 스님의 눈에서 화엄경의 선재(善財)를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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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용 : 프랑스 Cosmos(News Photo Agence)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동아시아의 문화와 시사뉴스를 유럽의 매체에 보도하는 일을 해왔다. 대표작으로 독일의 슈피겔에 보도된 매향리 미공군사격장남북이산가족상봉등이 있다. 현재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3번의 개인전과 30여 회의 기획전을 통해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한 사회적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다.



월간 불광    bulkwang Group




 
제목[단박에 떠나는 암자순례] 그 꽃눈은 나를 닮았더라년/호2015/4
소제목전남 구례 화엄사, 구층암, 연기암, 지장암호수486
글 : 유윤정   사진 : 하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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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힘껏 자라기로 했다.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나면 이제는 꽃망울을 터트릴 때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올라올 봄을 마중가고 싶었다. 떠나자. 운동화 끈 질끈 매고 버스에 올랐다. 구례 화엄사와 화엄사 산내 암자들을 찾았다. 따뜻한 햇살 맞으며 내딛는 발걸음을 흙이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바람에 실려 오는 흙내음이 향긋하다.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걷잡을 수 없이 봄이다. 


| 화엄華嚴,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하다
  서울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3시간 10분. 전남 구례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눈이 편안했다. 높은 것이라곤 물결치듯 완만한 지리산 능선과 하늘뿐. 좋다. 지리산 화엄사로 향했다.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와 지리산이라고 불렀다는 산, 그리고 지혜로운 문수보살이 굽어보는 산자락에 544년 연기 조사가 창건한 화엄사.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이 곳곳에 있는 화엄사의 입구는 굵은 동백나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천왕문을 지나, 폭이 좁은 계단을 올라, 보제루普濟樓를 끼고 돌아 마주한 경내에는 동·서 오층석탑(동오층석탑 보물 제132호, 서오층석탑 보물 제133호)이 대웅전을 장엄하고 있었다. 9세기 신라 하대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을 올라가는 계단 앞 좌우에 배치된 높이가 같은 석탑. 높이는 같지만 서탑은 화려한 문양을, 동탑은 장식 없이 단정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어쩐지 석탑이 이란성 쌍둥이처럼 느껴진다. 저마다 개성 뚜렷한 탑이 부처님 계신 곳을 장엄한다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10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저 탑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까.

   대웅전 부처님께 ‘부처님, 저 왔습니다.’ 인사를 올리고 나와 홍매화를 찾았다.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파 선사가 심었다는 홍매화. 다른 홍매화보다 꽃이 검붉어 흑매화라 불리는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에게도 인사를 했다. 도량을 둘러보니 능소화, 백일홍, 매화, 동백, 산수유들이 저마다 모두 망울망울 단장 중이다.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의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 화엄華嚴. 꽃이 반드시 열매를 맺듯 보살의 행위 또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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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 펼쳐진 산수화와 한 송이 꽃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부터 뒤뜰로 발걸음을 향해 구층암에 올랐다. 대나무 숲길이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조심히 오라고 곧게 인도하고 있다. 바람이 살랑 불었다. 대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환영한다고 박수치는 것 같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새의 지저귐, 계곡물의 졸졸거리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 계곡물 소리에 귀를 씻어내며 5분 남짓 걸었을까. 소담한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북이를 탄 토끼, 봉황, 용두가 주심포 끝에 조각돼 있고, 살미마다 연꽃봉오리가 얹혀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천 분의 토불을 모신 천불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단청을 꼼꼼히 살펴보면 숨은 게를 찾을 수 있는 수세전, 다듬지 않은 모과나무 기둥이 세워져있는 승방이 안온하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여래좌상이 조각돼있는 삼층석탑, 그리고 소박한 석등(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32호)과 배례석이 마당에서 객을 맞이한다. 

   마침 구층암 덕제 스님이 승방에서 차를 한 잔 대접해주었다. ‘茶香四流차향사류’라는 편액이 달린 승방에서 마신 차는 죽로야생차竹露野生茶라 했다. 암자 뒤 대나무 그늘 밑에서 자란 야생 찻잎을 직접 덖기도 하고, 발효차로도 만들어 인연이 닿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한단다. 혀끝에 감기는 차향이 달근하고도 상큼하다. 

   차를 여러 잔 마시고 덕제 스님에게 구층암 이곳저곳을 안내받았다. 승방에서 나오자마자 모과나무 기둥이 눈에 띈다. 제멋대로 자란 모과나무를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 만들었다. 모과나무 기둥의 맞은편에는 살아있는 모과나무가 있다. 살아있는 나무의 잘린 단면을 보아, 저 나무가 이 기둥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살아있는 모과나무는 모과를 맺고, 자리를 바꾼 모과나무는 건물을 받치고 있다.

   멋진 꽃을 보여주겠다며 나선 스님을 따라 강아지 ‘솔’이 신이나 좇아간다. 함께 따라나서 천불보전의 뒤 언덕에 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산수화, 한 송이 꽃. 천불보전을 중심으로 지리산 봉우리가 연꽃 봉우리가 됐다.

“스님, 이 곳에 올라오셔서 저 아름다운 산을 보실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냥 바라보는 것이지 뭘 생각해요. 그냥 바라봅니다. 뭘 자꾸 괴로움을 줄려고 그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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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의 잊지 않는 초심
   나뭇잎을 밟으며 숲길을 걷는데 발걸음이 가볍다. 눈앞에 다람쥐가 쪼르르 나무를 탔다. 잘 다져진 길 위의 돌부리에, 나무뿌리에 집중하며 걷다보니 땅을 밟고 있는 느낌이 새삼스럽다. 그저 바닥에 닿는 발에 집중하며 한참을 걷다보니, 한문으로 쓰여진 두 표지석이 이곳이 연기암의 입구라는 것을 일러줬다. 두 표석 중 왼쪽에 있던 入此門內입차문내 莫存知解막존지해라는 문구. ‘이 문 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문구에 가슴이 뜨끔하다.

   화엄사 산내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해발 560고지)에 위치한 연기암은 화엄사의 원찰로, 인도 승려 연기 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에 최초로 토굴을 짓고 가람을 세워 화엄법문을 설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의 연기암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소되어 1989년 중창되었다. 지금의 가람에는 국내 최대 높이의 문수보살(13m)이 지리산 중턱에서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암의 대웅전은 일반적인 사찰의 대웅전과는 달리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이라고 부른다. 화엄 성지이기에 주불로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셔놓았기 때문이다. 화엄사의 대웅전도 주존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기에 대웅상적광전의 명칭이 옳지만 인조 임금의 친숙부 의창군이 ‘대웅전’ 편액을 내려 대웅전으로 부르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웅상적광전 토방에 올라 문수보살의 시선을 따라 저 멀리 섬진강을 바라보았다. 저 섬진강 줄기 곁은 구례읍내일 것이다.

   순례의 마지막으로 올벚나무를 만나고 싶었다. 콧속에 봄내음 잔뜩 머금고 연기암에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타박타박 산 밑으로 내려왔다. 화엄사를 빠져나와 일주문 맞은편 다리를 건너 왼쪽 산기슭에 위치한 지장암으로 향했다. 

   자그만 법당에 들어가 아담한 부처님께 참배를 하고, 소담한 절 마당을 가로질러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을 뻗어냈을 나무뿌리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물 머금은 이끼 낀 돌담을 돌아서 수령 약 350년의 천연기념물 제38호 올벚나무를 찾아갔다. 올벚나무 앞에는 200년 세월의 살구나무가, 뒤로는 산벚나무, 동백이 올벚나무를 휘호하고 있었다. 

   나무의 태어남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한 사람의 태어남은 알고 있을 나이의 나무다. 35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매년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준비를 하고 꽃을 피워낸다. 나무의 초심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때를 준비하는 나무에게 또 배운다. 살구도, 올벚도, 산벚도 만개하고 나면 꽃잎 사이로 내리쬐는 그 햇볕이 녹음을 키워 내리라. 지장암 올벚나무 밑동에 합장하고 있는 돌부처님에게 기도했다. ‘부처님, 큰 사람 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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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불광   Bulkwang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제4부 영취산 서운암



게시일: 2013. 6. 18.



불가(佛家)의 청정함과 전통의 향기를 만나다
[통도사 암자 속으로②] 설화 속 이야기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
09.03.23 13:43 ㅣ최종 업데이트 09.03.23 13:43 홍성현 (gus073)

   지난 기사에 이어 통도사 서북쪽에 있는 암자인 수도암과 안양암, 반야암, 극락암, 비로암, 백운암, 서축암, 자장암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이들 암자로 가는 길은 암자를 둘러보고 그 속의 설화를 따라가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영취산의 장엄한 풍경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수도암과 안양암

 


수도암
ⓒ 홍성현
수도암



   서운암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반대쪽 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수도암이 나온다. 수도암은 통도사 암자 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로, 건물 전체가 7간 밖에 되지 않는다. 공민왕 21년(1372년) 정신대사가 창건하고, 중건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조용한 개인 수도처로는 그만이라고 한다. 작은 암자 규모에 걸맞게 입구에 차량 3~4대 주차할 수 있는 조그만 주차장이 있고, 암자 내로 들어가면 말소리를 내기가 무안할 만큼 적막감이 감돈다.

 

수도암에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곧바로 안양암이 나온다. 안양암은 통도팔경 가운데 하나인 안양동대(대웅전 서남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에 위치해 통도사가 한 눈에 내려다보여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풍광이 일품이다.

 

안양암에는 대나무 숲길을 따라 대웅전으로 바로 연결된 산책로가 있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대나무 소리가 정취를 자아낸다. 차량을 이용했다면 포장된 도로에 주차하고 고운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가면 누군가 쓴 것인지 '금연구역'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것이 쌩뚱맞다. 하지만 뒤쪽에 앙증맞은 동자승 인형들이 놓여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안양암
ⓒ 홍성현
안양암



반야암

 


반야암
ⓒ 홍성현
반야암
  

   안양암을 지나 한참을 가면 다시 길이 갈라지는데, 통도사 암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자장암과 백운암으로 가는 길이다. 먼저 백운암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그 길을 따라가면 산길로 접어들기 전 평지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반야암이다.

 

반야암은 가장 최근인 1999년 창건돼 가장 현대식(?) 건물을 자랑한다. 매주 경전교실을 열어 경전을 공부하려는 불자들이 모여 가족법회를 열기도 한다. 또 템플스테이를 원하는 불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마치 자연휴양림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조그마한 계곡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가 눈길을 끈다.



 

극락암



극락암
ⓒ 홍성현
극락암

 


   백운암 방향으로 소나무가 늘어선 산 길을 따라가면 극락암이 나온다. 이제부터 산길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올라가야 한다. 물론 차량(중·대형 버스는 불가능)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극락암은 충혜왕 2년(1332년) 창건됐다. 창건 후 조선 후기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조선 영조 34년(1758년) 중창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선승으로 유명한 경봉스님이 수행했던 극락암에는 늘 많은 수행승이 머물렀다고 한다. 수행승들이 몰려들자 1968년 선원을 9동 104칸으로 늘려 지었고, 지금도 수 많은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돌다리인 '홍교(虹橋)'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영축산 봉우리가 비치는 연못에 가로놓여 있다. 경내에는 산정약수가 흐르는데, 극락암에 오르느라 흘렸던 땀을 한 번에 식혀준다.

 

극락암 500m 아래에는 '이란야'라는 수행도량이 있는데, 1969년 세워진 현대식 건물로 일단 이곳에 한 번 들어가면 최소 3년은 참선에 몰두해야 한다.


 

비로암


 


비로암
ⓒ 홍성현
비로암

 


   극락암에서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과 비로암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데, 우선 비로암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유는 백운암에서 설명하겠다. 비로암은 충목왕 원년(1345년)에 창건됐다. 입구에는 정겨운 돌담이 반겨주고,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정겹다.

 

비로암으로 들어서면 옛 건물의 정원에 와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암자 서북쪽으로 500m 지점에 통도팔경 가운데 하나인 비로폭포가 있고, 뒷산에 우거진 송림은 통도사 내에서 가장 울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암자에는 '백운명고'라는 북이 걸려 있는데, 백운암에서 들리는 비로암의 은은한 백운명고 소리 또한 통도팔경의 하나다.


 

백운암

 


백운암
ⓒ 홍성현
백운암


   앞서 백운암에 가기 전 비로암부터 들리자고 했는데, 그 이유는 백운암으로 가는 길은 통도사 암자 가운데 가장 난코스이기 때문이다. 통도사 암자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다른 암자와 달리 차량으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작은 주차공간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다리 힘으로만 올라야 하는 고난(?)의 암자다.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곳에서 650여m 떨어진 곳에 있어, 1시간 가까이 산길을 올라야 겨우 백운암에 다다른다.

 

오르막 입구에는 암자에서 쓸 물건을 운반하는 지게가 있는데, 물건이 있으면 암자를 방문하는 불자들이 누구라도 짐을 나눠지고 오르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렇게 힘겹게 올랐다면 결코 배신하지 않는 곳이 바로 백운암이다. 흰 구름이 떠도는 높은 곳에 있다는 뜻으로 백운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은 흰 구름이 감도는 백운암 아래로 그림처럼 통도사가 펼쳐지고, 아스라이 동해안이 보이기도 한다.

 

산신각 법당에서 서남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는 '가을 하늘 아래 금빛으로 빛난다' 해서 이름 붙은 금수라는 석간수가 있고, 백운명고의 북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발 아래 펼쳐진 산곡을 보면서 표주박으로 금수를 떠서 들이키면 세속의 모든 번뇌를 식히고 무아의 선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 조일대사가 창건해 순조 10년(1810년) 침노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아쉬운 것은 백운암 요사채 복원공사가 진행돼 오는 4월까지는 공사 중인 모습밖에 볼 수 없다.

 

서축암

 


서축암
ⓒ 홍성현
서축암



   다시 길을 내려와 자장암으로 접어들자. 자장암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서축암이 먼저 반긴다. 서축암은 1996년 대시주자인 수련화보살과 입적한 월하 큰스님, 현재 감원인 원행 스님에 의해 창건된 신형 암자다. 그래서인지 암자라기보다 고택의 정원 같은 느낌이 든다.

인법당 형식의 대웅전이 있고, 암자 가운데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다보탑이 유명하다.


 

자장암

  



자장암
ⓒ 홍성현
자장암



   서축암 다보탑을 둘러봤다면 이제 자장암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자장암은 통도사를 짓기 전인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바위벽 아래서 움집을 짓고 수도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자장암에는 4m 높이의 바위벽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통도사 내에서 유일한 마애불로 1896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아래쪽으로 자장전이 있는데, 이곳에는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마애불 뒤편으로 바위틈에 맑은 석간수가 흐르고, 그 바위벽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자장율사와 금개구리 전설로 유명하다. 금개구리 전설은 자장암에서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통도사를 찾은 불자들은 으레 자장암의 금개구리를 보려고 하는데, 암혈 속의 개구리를 보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로써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측정하기도 한다.

 

이곳도 백운암과 마찬가지고 현재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 어수선한 느낌이어서 아쉬움을 더한다.   







[통도사 1편] 암자만 7곳... 나만의 코스, 공개합니다

[양산] 통도사 여행
등록날짜 [ 2014년10월22일 09시34분 ]

나만의 코스

 

   통도사 팔경 중 하나로 손꼽는 안양동대는 먼 산정상이 아니라도 통도사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일반인은 거의 잘 모르는 곳이다. 통도사 오층석탑을 가로질러 산길을 따라 이동하거나 통도사 계곡을 건너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이 있는데 바로 통도사 암자중에서 가장 가깝지만 가장 알려지지 않은 안양암이 바로 그 곳이다.


 

▲ 통도사 전경

 

   오늘의 여행은 개인적으로 자주 찾아와 걷곤 하는 통도사를 거쳐 안양암과 서운암을 돌아오는 통도사의 새로운 여행코스를 옮겨 보고자 한다. 이 코스의 특징은 절집 통도사라는 의미보다 한발 물러난 곳에서 만나는 통도사의 여행으로 처음 소개하는 코스이다.


 

▲ 통도사 계곡 가을옷 갈아입는 중

 


   통도사를 들어서기 전 입구에서 아예 주차를 하고 걸어서 통도사로 진행한다. 솔숲을 따라 매표소에서 약 1.3km 들어서면 부도군 앞 주차장에 도착한다. 양산천을 따라 오르는 솔숲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통도사 여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스쳐 오르면 석당간과 부도군이 기다리고 있다.


 

▲ 통도사 솔숲길 끝자락 통도사 내 주차장 입구

 

   절집 방문은 해탈문을 지나 일주문을 열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일주문에는 대원군이 새긴 "영취산 통도사"란 현판과 두 기둥 주련에는 "佛之宗家 國之大刹불지종가 국지대찰/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다" 는 뜻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볼보종찰임을 알려주고 있다.

 

 

 

 

   통도사는 해탈문을 필두로 직선선상에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을 구성하고 금강계단을 정점으로 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통해 크게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영역을 이루고 있는데 상로전은 통도사의 핵심인 대웅전과 금강계단, 중로전은 불이문에서 세존비각까지의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있으며, 하로전은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영역으로 세 개의 불전과 만세루가 삼층석탑을 애워싼 형식을 하고 있다. 

  

▲ 경남유형문화재 제403호 석당간 






▲ 부도원


   폐사지에 가면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석조물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석당간이다. 통도사 절집입구 부도군 앞에 위치한 석당간은 찾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울 만큼 법당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석당간과 중심법당이 멀리 있는 경우는 부석사 역시 그러 할 만큼 그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통도사 석당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 당은 사찰을 나타내거나 행사를 알리는 깃발로 이것을 거는 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지탱하기 위해 옆에 세우는 지주(기둥)를 당간지주 또는 철간지주라 하는데 대게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당간은 대부분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석재나 철재로 만든 지주만 남아 있다. 당간을 받치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고려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의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통도사의 석당간은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혀 있다. 석당간 중에서 쇠로 만든 철당간으로는 공주 계룡산 갑사에 있다.

 

석당간 앞에 있는 부도원은 통도사를 거쳐 간 역대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가 모여 있는 곳으로 통도사 내 신성한 공간임은 틀림없다. 본래 통도사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월하 방장스님의 교시로 1993년 오늘날 위치로 모았는데 큰스님의 부도가 60여기, 비석 50여기이다.


 

▲ 해탈교 건너 해탈문으로 향하는 길목


 

 

▲ 통도사를 가로질러 흘러 내리는 양산천

 

 

 

 

▲ 일주문 옆 설법전으로 향하는 양선천을 따라 걷는 길 뒷편으로 보이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오층석탑으로 향한다.

 

▲ 일주문 앞 주차장으로 일주문으로 진입하는 차량도로


 

▲ 일주문 앞 교량에서 바라 본 양산천 전경

 

▲ 양산천에 가을이 걸리기 시작했다.

 

▲ 오층석탑으로 향하기 위해 건너야 할 다리

 

   일주문 옆으로 난 양산천 길을 따라 오르면 행자교육원을 거처 공양간을 지나 설법전으로 이어지는데 아치형으로 만든 작은 다리를 건너면 대숲 가려진 작은 오솔길이 경사를 따라 이어지는 돌계단으로 안내하고 돌계단 끝자락에는 통도사 오충석탑 1기가 우뚝 서 있다.

 

▲ 오층석탑

 

   통도사에는 경내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오층석탑 2기가 있다. 1기는 대웅전과 관음전 중간 구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근대작품이며, 일주문에서 통도사를 통과하는 양산천을 건너는 공양간 못미처 아치형 다리를 건너 산속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언덕 위 자리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흩어져 있는 조각을 1991년 하종성 스님의 교시로 복원하였는데 사라져 버린 4.5층은 새로운 석재로 보강하였다. 오층석탑 내 1층 탑신석은 옛 모습을 통해 감실을 두고 그 속에 경주 황룡사 목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수습한 불사리 2과를 봉안하였다.


 

▲ 안양동대에서 바라본 전경. 지금 대광명전 수리공사중

 


   오층석탑 뒤편으로 완만한 등산길이 열려져 있다. 이곳은 거의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산길로 걷는 중간 중간 통도사 전경이 숲에 가려져 얼핏 얼핏 시선에 들어왔다 숲이 가려놓기를 반복한다. 산길을 따라 300m 정도 따르면 숲이 잠시 멈칫하고 탁 트인 공간이 열린다.

 

▲ 통도사 중심법당 지붕 모습

 

▲ 통도사 전경

 

   통도사 절집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을 안양동대라 한다. 대광명전 기왓장 내리는 모습까지 훤하게 들어오는 이곳은 바로 안양암이 있는 언덕위로 내려서면 안양암 경내를 통과하게 된다.

 

 

 

▲ 전망대 바위에서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안양암

 

   안양암은 고려 충렬왕 21(1295) 찬인대사가 창건 후 고종 2(1865) 우담대사가 중창을 하면서 오늘날 안양암에서 가장 오래된 북극전을 만들었으며, 1963년 우송화상이 중수를 하였다 전하지만 안양암에 관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 안양암 중심법당

 

▲ 안양암 옛 출입문으로 보이는 문

 

▲ 안양암 내 북극전

 


   북극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아담한 정각으로 보상암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건물에는 단청과 벽화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경남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는 북극전이 있는 이곳은 안양동대라는 바위 위 자리잡은 암자로 예불을 목적으로 하는 사찰과는 달리 수도를 위해 조성한 암자로 추정하고 있다.

 

북극전은 장수를 상징하는 북극성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토착신앙인 칠성신앙과 관련성이 있어 보이며, 기둥 간격이 다른 건물과는 달리 2m가 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오늘날 안양암에는 법당, 청송당, 고금당, 정토문, 독성각이 있으며, 안양암 아미타후불탱과 북극전 칠성탱은 성보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 안양암에서 설법전으로 내려서는 길. 절간 언덕 뒷편으로 나가면 안양암 주차장으로 향하며, 이 길로 내려서면 설법전이다.

 

▲ 안양암 출입문에서 바라 본 전경에 가을이 걸려있다.

 

   안양암에서 임도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서면 설법전으로 향한다. 안양암 주차장에서 녹차밭을 지나 내려서면 서운암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서운암으로 향한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걷다보면 서축암과 자장암, 극락암, 반야암 그리고 비로암까지 갈 수 있지만 거리가 제법 되는 만큼 그곳은 차를 회수하여 이동하는 것이 좋다.

 

안양암 주차장에서 서운암까지는 약 1.1km 거리이다. 서운암은 봄이 아름답지만 가을이면 서운암 숲길을 돌아가면서 바라보는 영축산의 가을 풍경도 빼 놓을 수 없는 풍경을 선물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 서운암

 

   통도사 암자 중에서 경관이 뛰어난 서운암은 매년 봄이면 들꽃축제를 여는 암자로 잘 알려져 있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버려졌던 산자락을 가꾸며 그 공간에 화사한 꽃과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수목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들꽃을 심었다.

 

▲ 국내 최대 백자 삼천불

 

   우리나라 불교역사상 최대 규모인 백자로 만든 삼천불이다. 1985년 암자에 가마터를 만들고 성파스님이 조성하기 시작한 도자 불은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로 삼천불로 당시 가마터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삼천불을 모신 2층 법당에서 내려다보면 장독이 도열하고 있다.

 

▲ 전각 틈 사이로 본 전경

 

 

 

▲ 된장 익어가는 서운암

 

   평소 성파스님은 장독이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사용한 것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기며 수집하였고 오래된 장독 3000여개 속에서는 생약제가 첨가된 1,300년 비법의 전통사찰 된장이 익어가고 있다.

 

▲ 서운암 소나무

 

▲ 산책길에서 바라 본 서운암

 

▲ 언덕에서 바라보면 신불산에서 영취산을 잇는 산을 조망할 수 있다.

 

 


   서운암 꽃길을 따라 걷다보면 통도사 장격각을 만나게 된다. 장격각에서 언덕을 내려서면 옥련암이며, 옥련암을 거쳐 백련암을 들른 후 다시 통도사 주차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 코스에서 만나는 통도사 암자만 하여도 7곳을 스쳐간다.

 

통도사 초입을 시작하여 바람따라 걷다보면 통도사를 거쳐 안양암에 도착한다. 호젓한 산길 홀로 걷는게 불안하다면 계곡을 따라 설법전까지 가면 설법전에서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함께 노송과 활엽수가 열어둔 구렁이 담넘어 가듯 구불구불 돌고 돌아가는 산길을 만나게 되고 산길 끝자락에 안양암이 있으며, 안양암 뒤편으로 조금만 오르면 통도사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온다. 안양암에서 올라왔던 길 반대편으로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자장암과 극락암 가는 길이며, 왼편으로 서운암이다. 서운암으로 걸어들어가면서 즐기는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특히 서운암에서 옥련암으로 넘어 백련암으로 향했다 되돌아 나오는 숲길은 가을이면 더 없이 좋은 사색의 길이다.

 

 

통도사 입구를 시작으로 통도사 일주문에서 오층석탑을 거쳐 안양암 그리고 서운암을 거쳐 임도를 따라 내려선 후 다시 통도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통도사로 진입하면서 통도사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을 살펴 보고자 한다.

 

제1편  좀 특별한 통도사 여행

그리고 통도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http://blog.daum.net/okgolf








[다큐멘터리 庵子 암자순례 12부작]  제5부 가야산 백련암



게시일: 2013. 6. 18.



진흙탕 같은 삶,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얻는 곳| 사찰탐방 및 안내.......♧               
日花 | 조회 75 |추천 0 | 2010.04.02. 12:03
  
   마음을 씻는 산사도 잦은 발길로 번잡함을 피할 수는 없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깊숙한 암자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그곳에서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 불일암 불일암 하사당에서 여행자에게 법구경을 주었던 덕현스님(현 길상사 주지)
ⓒ 김종길
불일암



1. 무소유 법정스님이 17년간 머문 암자-조계산 불일암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암자이다. 찾아오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자 법정스님은 이곳을 미련 없이 떠났다. 암자 곳곳에는 평소 깔끔하셨던 법정스님의 성품이 배어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찾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아는 이들만 찾는 수행의 공간이었다.


 


▲ 일지암 일지암의 초당
ⓒ 김종길
일지암



2. 맑고 향기로운 차茶의 성지-두륜산 일지암

 

   일지암은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중년 이후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일지암一枝庵'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시승 한산의 시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에서 따온 말이다. 한 마리의 새가 쉬는 데는 나무 한 가지면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많이 소유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이 경계해야 할 말이다.


 


▲ 백련암 부처의 얼굴을 닮은 불면석과 백련암 전경
ⓒ 김종길
백련암



3. '자기를 바로 보라'-가야산 백련암

 

   예부터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라 일컫던 백련암은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조 38년인 1605년에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래전부터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고승들이 수도를 해왔던 곳이다. 성철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한 곳으로 더 알려진 백련암은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수행처로 깊은 곳임을 알겠다.


 


▲ 자장암 주위 풍광이 아름다워 통도사 팔경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 김종길
자장암



4. 장엄하게 펼쳐진 만다라의 세계-영축산 자장암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에 머물었던 유서 깊은 암자이다. 계곡이 시원하고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가 아름다워 통도사 팔경 중의 하나로 당당히 손꼽힌다. 자장암은 극락암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이유인즉슨 암자의 풍광도 빼어나거니와 자장암에 살고 있다는 금개구리 때문이다. 법당 뒤쪽 바위 구멍에 살고 있다는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머물 때부터 이곳에 살며 자장암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 상무주암 상무주암과 텃밭을 가꾸는 현기스님(왼쪽), 산비탈에 정성스럽게 가꾼 텃밭(오른쪽)
ⓒ 김종길
상무주암



5. 천하제일의 참선 암자-삼정산(지리산) 상무주암

 

   "그 경치가 그윽하고 조용하기가 천하에 제일이라 참으로 참선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대오한 보조국사 지눌이 상무주를 일러 '천하제일갑지'라고 하였다. 상무주는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198년 봄부터 1200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지눌은 상무주암에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오로지 선에만 몰입하였다. 해발 1100미터에 자리한 상무주암에는 선승으로 유명한 현기 스님이 계신다.


 


▲ 상무주암 가는 길 영원사에서 상무주암 가는 산길은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 김종길
상무주암

 


▲ 상연대 상연대 뒷마당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과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 김종길
상연대



6. 구름과 바람이 감춘 암자-백운산 상연대

 

   상연대는 지리산의 동북쪽에 있는 백운산의 800미터가 넘는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상연대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말 경애왕 1년인 924년에 고운 최치원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기도를 하던 중에 관세음보살이 연꽃을 타고 나타나 상연上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암자 앞마당에 서면 천왕봉과 장엄한 지리능선이 보인다. 상연대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선문이 쇠퇴하자 이곳에 옮겨와 선문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수도암 법당 안마당에서 본 가야산 자락
ⓒ 김종길
수도암



7. 도선국사가 칠일동안 춤춘 명당-수도산 수도암

 

   수도암은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풍수와 선을 한 맥락으로 보았던 도선은 이 암자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칠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수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터가 없다 하여 산 이름을 수도산이라 하고 암자를 수도암으로 이름 지었다. 앞으로는 가야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봉우리마다 흰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니 도가 아니더라도 절로 흥이 난다. 암자의 전각과 그 배치는 다소 휑한 느낌이지만 그 터는 가히 명당임에 틀림없다.


 


▲ 월명암 월명암 안마당에서 본 내변산의 수려한 산세
ⓒ 김종길
월명암



8. 바람도 달도 쉬어가는 암자-능가산 월명암

 

   천삼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월명암은 변산반도 능가산 법왕봉에 자리 잡고 있다. 부설거사가 오대산으로 가던 중 만경현 백연지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이곳에서 구仇씨의 딸인 묘화라는 여인과 인연을 맺어 등운과 월명 두 남매를 낳게 되었다. 딸인 월명을 위해 이곳 변산에 토막을 짓고 도를 닦아 월명은 이 자리에서 득도하였다.


 


▲ 지장암 오대산의 유일한 비구니 암자이다.
ⓒ 김종길
지장암


9. 오대산의 유일한 비구니 암자-남대 지장암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들에는 중대 사자암(적멸보궁),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의 다섯 암자가  있다. 원래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중국의 오대산(청량산) 신앙을 자장율사가 우리나라에 소개하여 강원도 오대산이 성지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보천태자에 이르러 오대의 각 대마다 다섯 진성眞聖이 거주하고 있다는 신앙으로 신비화되었다. 남대 지장암은 오대산에서 유일한 비구니 암자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방을 연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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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다비식


게시일: 201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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