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9. 19:40ㆍ차 이야기
제3부 누락 ㅡ> 지리산 구층암 동영상으로 대신하였음. ......
*** 구층암 동영상 마지막 부분 다음 회 예고편에 영취산 서운암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다큐멘터리 암자순례 12부작] 중에서 제3부 동영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임.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제1부 오산 사성암
겨울의 막바지 남도의 깊은 산사에 들러 새봄의 희망을 차분하게 다져보는 것은 어떨까.
오산의 오(鰲)자는 자라 오자다. 이 이름의 유래는 몇가지 속설이 있다. 중국 전설속에 자라가 등에 지고 다닌다는 바다속 큰산이 오산이라는 것.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오산을 자라가 섬진강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자라를 가리키는 鰲(자라 오)자를 이름에 붙였다는 설이다.【 그런가 하면 산의 정상이 벼랑이어서 ‘벼랑 뫼’로 불리던 것이 ‘별뫼’가 되고 이것을 한자로 적는 과정서 자라鱉(별)자를 썼는데 어느 때부터 그 뜻과 모양이 비슷한 鰲(오)자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
오산에 오르는 길은 등산로와 차도가 있다. 죽마리 각금마을로 접어들면 조그마한 등산로가 나온다. 넉넉히 1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사성암 팻말이 있는 곳부터는 찻길이 나있어 자동차로 오를 수 있다.【 편하게 갈 요량으로 찻길로 갔더니 차로는 오를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좁고 진창인데다 덜녹은 눈이 길을 덮고 있다.
휴!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언제 저기까지…” 하는 마음이지만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따복따복 한 걸음 한걸음 보태본다. 산행 시작 15분께 가뿐 숨을 돌리려고 멈춰서 뒤를 보면 거기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뒤통수의 조망이 발길을 틀어 잡는다. 그 강이 있어 비로소 너른 들판이 있고 그 들판에 기대어 사람들의 마을이 있다. 이 길이 지루하지 않고 오붓한 것은 섬진강과 지리산 덕이다. 】
【 그렇게 쉬엄쉬엄 한 걸음마다 산보며 강보며 하늘보며 걷는다. 어느새 땀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 사성암 오르는 길은 유난히 경사가 급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코끝이 땅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 하다. 거기에 하얀 눈을 이불삼아 덮고 있으니 비료포대 하나만 있으면 내려가는 길은 신날 것 같다는 상상도 해본다. 굽이 굽이 모롱이를 몇개 돌아 얼추 1시간 정도면 사성암에 닿는다. 사성암이 있는 곳은 531m이고 그 남동쪽으로 약 200m정도 더 오르면 정상(542m)이다.
갑자기 앞이 툭 터지며 환하게 경물이 변한다. 동네 뒷산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오른 산에서 이렇게 멋드러진 풍경을 대할 줄 몰랐다. 길게 굽이쳐 흘러가는 섬진강과 흰 눈에 덮인 지리산이 눈 앞에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는 산. 그래서 산은 꼭 높은 것 만이 제 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사성암(四聖庵)은 백제 성왕(544년) 연기조사가 세운 이래 원래 오산암이라 불리다 원효·의상·도선·진각 네 성인이 이곳에서 수도했다 해서 사성암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사성암은 여느 절과는 달리 넓은 마당이 없다. 대신 가파르게 올라가는 돌계단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좁은 돌계단 옆에는 1m높이의 돌담이 쌓여져 있고 돌담위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저마다 소원을 기원하면 이름을 적어놓은 기와가 가지런히 포개져 있다. 【언뜻 보니 】 건강과 소원성취를 비는 염원을 담은 내용들이다.
깍아지른 듯한 벼랑에 붙여 지은 약사전이 마치 중국의 3개 석굴중 하나인 둔황의 모가오쿠를 하나 떼어다 붙여놓은 것 같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전각에 오르니 법당의 안쪽 암벽에 약사여래불을 새긴 암각화가 보인다. 원효대사가 수행중 손톱으로 긁어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약사전에서 내려다보니 곡성에서 구례구역을 지나 동쪽으로 확 꺾어져 흐르는 섬진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을 지나 산신각 왼편에 한 사람이 수도하기 알맞은 크기의 자연굴이 뚫어져 있다. 굴을 관통해 지나가면 터가 나온다. 이 터에 서면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 차일봉이 병풍을 두른듯이 둘러 싸고 있으며 그 아래 너른 벌판 한가운데 구례읍내가 손바닥만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옆에 바위틈이 조금 벌어져 있어 한쪽은 좌선대요, 또 한쪽은 우선대다. 원효스님과 도선스님께서 앉아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큰 스님의 인연터라 일년에 세 번 이곳을 찾아 이 바위 사이를 세번 뛰어넘으면 소원성취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 이름이 뜀틀바위다.【 신선이 베를 짠 흔적인 씨줄 날줄이 바위 위에 그어져 있다는 신선대, 연기선사가 아미타불 마애불로 되었다는 관음대, 화엄사를 향해 절하는 곳이라는 배석대, 향불을 피워놓은 향로대, 바람이 센 곳이라서 풍월대, 붉은 색 바위벽으로 이루어진 괘불대,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반성한다는 낙조대, 바위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평풍대, 하늘을 우러른다는 앙천대 등이 ‘오산 12대’를 이루고 있다. 오산을 이렇게 사성암 주위로 ‘오산 12대’라 부르는 깎아지른 벼랑이 즐비해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
/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
바위벽에 매달린 사성암 '아슬아슬'
봄 정취 물씬한 구례 오산의 숨은 명소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섬진강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섬진강은 강물의 양을 늘리며 긴 잠에서 깨어난다. 이때쯤이면 어머니의 속 깊은 정이 느껴지는 섬진강을 끼고돌며 봄의 전령사인 매실나무, 산수유나무, 벚나무가 번갈아 꽃 대궐을 만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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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풍경 2 | |
ⓒ 변종만 |
따뜻한 봄바람에 꽃 축제의 화사함이 더해지니 봄 마중 나온 사람들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들뜬 마음으로는 작은 사찰이나 큰길에서 조금 외돌아진 여행지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 여행지가 바로 전남 구례군 문척면 오산 정상에 있는 사성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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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성암 | |
ⓒ 변종만 |
사성암(전남문화재자료 제33호)은 구경거리가 많은데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명소다. 드라마 '토지'에서 주인공 길상과 서희가 불공을 드리던 도솔암의 촬영지였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적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사성암의 아름다운 모습을 말할 수 없다. 제비집처럼 가파른 바위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성암을 보고나서야 '오산을 오르지 않으면 후회하고 두 번 다시 가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역사가 오래된 사찰답게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 중요한 것을 다 갖추고 있어 위엄과 품위가 느껴진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과 구례읍의 풍경도 일품이다. 자라 오(鰲)자를 쓴 오산이라는 산의 이름도 이곳의 생김새가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의 물을 자라가 먹고 있는 모습이어서 붙여졌다.
암자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오산에 있어 원래는 오산암이었는데 '원효, 의상, 도선, 진각'이 수도한 후 4대 성인이 수도했던 곳이라 하여 사성암으로 불린다.
주차장 끝에 있는 돌탑을 지나면 100여m 거리에 사성암이 숨어있다. 바위벽을 병풍 삼은 암자들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만들어 논 세상이 새롭다. 넓은 마당 대신 허리높이의 돌계단이 이어지고, 양옆의 돌담 위에 이름과 소원을 적어놓은 기와들이 눈길을 끈다.
기둥 세 개에 의지한 채 바위벽에 매달린 약사전은 97년 이후 법당까지 흙을 채워 절벽을 메우고 공사가 끝난 다음 다시 흙을 파내는 고생 끝에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만든 암자다. 구불구불 돌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25m의 암벽에 조각된 마애여래입상(전남문화재 제222호)이 자비로운 미소로 맞이한다. 선정에 든 원효 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입상은 음각으로 놀라울 만큼 선이 뚜렷하다.
약사전에서 지장전으로 가는 길의 언덕에 수령이 800년도 더 된 귀목나무가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지장전의 돌담에도 소원을 적은 기왓장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주지스님이 묵는 작은 암자 옆 바위도 기도를 하는 장소다. 소원을 빌면서 바위의 빈틈에 올려놓은 동전들이 이색적이다. 기왓장에 소원을 적었건 바위틈에 동전을 올려놓았건 소원이 모두 이뤄질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지장전 위에 뜀바위로도 불리는 소원바위가 서있다. 이 바위에 하동으로 뗏목을 팔러갔던 남편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를 잃은 설움에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활공장에서 이륙한 패러글라이딩들이 하늘을 수놓는 모습도 멋지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돌아서면 큰 바위 사이로 아담한 산신각이 나타난다. 산신각 옆의 바위틈이 도선국사가 좌선하던 도선굴의 입구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어두운데 중간쯤에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수행에 정진했을 도선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도선굴의 출구가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어 밖으로 나오면 구례읍, 섬진강,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올망졸망한 집들이 넓은 들판에 둘러싸여 있는 구례읍, 큰 물줄기를 만들며 S자로 휘감아 도는 섬진강, 그런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꼬리를 무는 지리산의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도선굴에서 깨달음을 얻고 딴 세상에 온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인 오산 정상은 등산로인 활공장에서 5분여 거리에 있다.
사성암을 나와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을 품은 봄철여행 1번지 섬진강변을 달리노라면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은빛물결이 다음에 또 만나자고 손짓한다.
여행 정보 |
*도로안내 ①통영ㆍ대전고속도로 함양JC → 88고속도로 남원IC → 19번 국도. → 밤재터널 →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 ②호남고속도로 전주IC → 남원 → 19번 국도 → 밤재터널 →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 ③호남고속도로 곡성IC → 곡성읍 → 17번 국도 → 구례 구역 → 18번 국도 →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 ④남해고속도로 하동IC → 하동읍 → 19번 국도 → 간전삼거리 좌회전 → 861번 지방도 → 죽마리 → 사성암 *Tip자료 ①사성암 입장료 : 2,000원(주차료 없음) ②전화 : 사성암 061)781-5463, 구례군청문화관광과 061)780-2450 ③사이트 : 구례군청문화관광(http://www.gurye.go.kr/culture)-관광명소-유명사찰-사성암 ④주의사항 : 사성암 주차장까지 가파른 산길이 이어져 안전운전이 필수 ⑤주변 볼거리 : 구례 산수유마을ㆍ화엄사ㆍ천은사, 하동 화개장터ㆍ최 참판 댁ㆍ쌍계사, 광양 청매실농원 ⑥먹거리 : 재첩국, 참게탕, 은어회, 산채정식 ⑦장터 : 구례장-3ㆍ8일, 화개장-1ㆍ6일 ⑧등산 : 각금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해 사성암과 오산 정상을 거쳐 마고마을로 하산 |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산사랑, 한교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제2부 금오산 향일암
스스로 몸을 굽히지 않으면 보기 힘든 사찰 | ||||||||||||||||||||||||||||||||||||||||||||||||||||||||||||
여름 입구에서 만나는 여수 명소 향일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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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아서 휴가철만 되면 관광객들이 몰리는 자그마한 섬이 있다. 그곳에 가면 갓김치가 있고 서대회와 각종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드라이빙하다 보면 조그마한 암자에 닿게 된다. 조그마한 암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향일암은 4대 관음기도처(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여수 금오산 향일암)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돌산도 끝자락 금오산에 있는 향일암은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 향일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때 인묵대사가 개창하면서부터이다. 향일암은 기도하는 암자로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하지만 관광지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어디서 보든지 간에 시야에 막힘이 없어 멋진 풍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조금 지나가면 두 갈래길이 나온다. 좌측의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산행길과 우측의 조금은 편한(?) 산길로 가는 길 중 선택해야 된다. 돌계단으로 가는 길은 10여 분이 소요되고 산길로 가는 길은 20여 분 정도가 소요된다. 돌계단은 10여 분이 걸린다고 하나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에게는 숨이 차는 정도의 운동량이 필요한 곳이다.
조금 올라와보니 바다 풍경이 기막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향일암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냥 쭉 뻗어 있어서 망망대해가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여수 향일암이 다른 암자와 달리 독특한 것은 암자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돌과 돌 사이를 지나야 하고, 때로는 낮은 석문으로 인해 몸을 굽히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굽히지 않으면 둘러보기 힘든 사찰이다.
향일암의 대웅전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바위 사이로 걸어 올라갈 때쯤 보인다. 향일암은 원통보전, 삼성각, 관음전, 용왕전, 종각, 해수관음상 등이 있는 곳으로 사찰이 갖추어야 할 구색은 다 갖추었다.
기암절벽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지 경내는 그렇게 넓지 않다. 매년 향일암에서는 일출제가 열리는데 그걸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고 한다.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온 보람이 있다. 원통보전을 보기 위해 거대한 바위 두 개 사이를 지나온 의미가 있다.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상관음전은 다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한번 관문을 지나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인생은 끝없는 관문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잠시 든다. 뻥 뚫린 경관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좁다란 길을 지나가야 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생길은 고단함 끝에 낙이 있는 법이다. 고단함을 외면하고 낙을 만날 수는 없는 듯하다.
바다를 향해 솟아나온 저 바위가 바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좌선대이다. 탁 트인 남도의 바다를 맞이하고 해풍을 맞아가며 수도했을 원효대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향일암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는 시원함을 넘어 상쾌하기까지 하다. 향일암에게 한편을 내어준 금오산 한자의 의미는 금빛 자라산이다.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과 앞으로 튀어나온 땅 모양을 보면 꼭 거북이를 닮아있다.
향일암 매표소를 기점으로 주변에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 갓김치와 막걸리를 팔고 있는데 데친 꼴뚜기를 파는 곳도 있다. 지난달 서천 장항항에서 연 꼴뚜기 축제에서 만난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남해까지 와서 보니까 오랜 지인을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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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로드된 날짜: 2012. 2. 2.
자연주의 건축의 윤리적 아름다움--구례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 불교교리
백련결사, 수행선원의 청정도량
자연과 구층암이 유기적으로 일체화 모과나무는 중국 원산이다. 학명은 Chaenomeles sinensis이다. Chaenomeles는 명자나무속의 속명이다. 속명(Chaenomeles)은 라틴어 갈라지다(chaino)와 사과(melon)의 합성어다. 열매가 사과 같고 가지가 잘 갈라진다는 뜻이다. sinensis는 ‘중국의’ 뜻을 지닌 라틴어로 원산지를 밝힌 종명이다. 나무의 학명은 라틴어로 통용한다. 라틴어는 생활언어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시대에 변함없이 항구적으로 명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속명은 대문자로 시작하고, 종명은 소문자로 시작한다. 모과나무는 생물분류학적으로 분류하면 식물계-속씨식물문-쌍떡잎식물강-장미목-장미과-명자나무속-모과나무종의 계통에 따른다. 흥부전에 나오는 ‘화초장(花草欌)’도 바로 이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이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중심 줄기가 외길로 높이 자라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속명에서 그 특성이 보이듯이 가지가 잘 갈라져 자라기 때문이다. 모과나무에서 하나의 사각형 판재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과나무로 화초장 장롱을 만들었다면 필시 귀한 물건임에 분명하다. 모과나무로 건축목재로 사용하였다면 더구나 희한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에 그 진귀한 장면이 있다.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 뒤로 난 조릿대 터널 오솔길을 지나면 구층암(九層庵)에 닿는다. 〈화엄사 사적〉(1924) 등의 기록에 화엄사는 큰 절 여덟에 암자 81암, 즉 화엄사는 ‘8원 81암’의 사격으로 전해진다. 구층암은 81개소 산중암자 중의 하나로 이어져 내려왔다. 요사채에 걸린 현판(광무원년: 1897년)에는 ‘구층연사(九層蓮社)’라고 기록하고, 〈중수구층암기〉(1899년) 현판에는 ‘구층난야’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또 1901년에 승려 등 60인이 구층암에서 염불수행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를 가졌다고 하는 바, ‘구층연사’는 구층암의 백련사 성격을 환기시켜 준다. 특히 ‘구층난야’의 기록은 구층암이 수행자들의 청정선원이었음을 조명해준다. 1937년 상량문에서는 ‘구층대’로 기록하고 있어 그 다양한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즉 구층암은 시대에 따라 구층연사, 구층난야, 구층대 등으로 불리며 백련결사, 선원, 강원 등의 도량으로 수행을 이어왔음을 파악할 수 있다. 결사도량, 수행선원이었던 만큼 도량의 청정한 기풍과 담백한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유전적 생태환경이 아닐 수 없다. 구층암에서 받는 첫인상은 그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소박함, 고요함, 청정함이다.
나무 그대로 처마 밑에 옮겨 심은 듯
구층암은 천불전의 흙으로 만든 천불과 야생차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구층암의 상징은 오래된 모과나무 기둥이다. 나무의 생김 그대로 기둥으로 쓰거나 들보, 창방으로 쓰는 경우는 왕왕 있다. 서산 개심사 심검당, 범종각 건물이나 안성 청룡사 대웅전, 아산 봉곡사 요사, 합천 호연정 건물 등에서 무위(無爲)의 소박한 심정들을 만나곤 한다. 서양의 그리스 건축에서는 사람의 인체를 건축기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의외다. 모과나무는 소나무, 전나무처럼 외줄기로 자라서 통나무 목재로 쓰일 수 있는 재목이 아니다. 중간 키의 관목에다 가지 분화가 활발해서 통나무를 얻기 어렵고 등걸 표면이 혹처럼 울퉁불퉁하고 옹이가 많아 목재로서의 기본 자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구층암 좌우 요사 두 채에는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삼아서 일찍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천불전 뜨락엔 다섯 그루의 모과나무가 있다. 천불보전 계단 양 옆으로 살아있는 두 그루가 있고, 좌우 요사채에 기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세 그루다. 모과나무 기둥은 생김 그대로다. 모과나무 원형을 그대로 살려 야성적인 힘을 보존하고 있어 경이롭다. 잔가지만 툭툭 쳐내고 골격 그대로 기둥으로 활용했다. 툇마루와 창방의 기능적 결구를 위해 최소한의 홈을 파냈을 뿐이다. 그냥 서있는 나무 그대로를 처마 밑에 옮겨 심어 둔 형국이다. 건축이 숲의 정서를 담고 있다. 건축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서양의 고딕건축은 유럽의 떡갈나무 숲의 재현이다. 활엽수의 숲과 나무들의 왕성한 생명력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고딕양식이다. 기둥은 나무이고, 아칸서스 잎은 활엽수의 풍성한 잎으로 재현했다. 자연은 끊임없이 부활하고 생산하며 재탄생한다. 숲과 나무로 해석한 건축적 형상을 통해 근원적인 분위기와 무한한 생명력을 담아냈던 것이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고딕건축이 담고 있는 정신의 전위에 가깝다. 보다 직접적이며 대범하다. 그리고 자연의 상징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구현하고, 역사적 층위를 갖는 인문적 자연으로 재탄생시켰다. 모과나무 삶의 드라마틱한 반전이고 성스러운 회향(回向)이다.
존재에 대한 깊은 존엄성의 통찰
하나의 건축에 구조적 안정성과 경제성, 심미적 아름다움의 요소는 언제나 숙고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셋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일은 전문 건축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는 서로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까닭이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그 셋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모과나무 기둥은 수피가 벗겨진 뼈대의 구조다. 그런데 줄기는 인위로 다듬지 않은 원형 그대로다. 나무의 원형은 수백 년간 외부환경과의 투쟁 속에서 역학적으로 가장 안정화 되고 최적화 된 물리구조다. 다듬지 않고 단청을 입히지 않았으니 경제성은 논하고 따질 필요가 없다. 심미적이며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우리가 독창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 건축가 가우디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재학 불교사진작가 noduc@hyunbul.com <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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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구층암의 역사 | ![]() |
작성자 : 작성일 : 2015-08-06 |
고싱가숲 불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http://www.gosinga.net/archives 화엄사 구층암의 역사큰절이 여덟이요 암자가 여든 하나 구층암은 화엄사에 딸린 암자이므로 그 역사 또한 화엄사의 역사에 편입되어 서술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화엄사사적>(1697; 1924) 및 <봉성지>(1800)를 보면 신라 경덕왕 때에 “큰절이 여덟이요 부속 암자가 여든 하나大寺八屬庵八十一”라 하였으니, 이 서술 내용에는 구층암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현재의 화엄사 경내 및 산중 암자, 인근 마을에까지 이르는 각종 유구들을 조사해 보면, “대사8 속암81” 내지 “8원 81암”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구층암은 늦어도 신라 경덕왕 때에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나아가 <화엄사사적>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하는 각종 전각, 당우 및 암자의 이름을 그 위치까지 지정하여 예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구층암은 “봉천원奉天院”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먼저 구층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을 살펴보도록 하자. ![]() 구층암 뜨락에 오를 때 보이는 석탑 부재들 계곡을 따라 대숲을 지나 구층암에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맞는 석물은 계단돌로 쓰이고 있는 석탑 부재이다. 이 석탑 부재를 딛고 뜨락에 오르면 왼편으로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탑신부며 옥개석 등의 석탑 잔편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다. 이 석물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애초에는 삼층석탑 두 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현재의 삼층석탑 한 기는 사실 1961년에 각황전을 중수할 때 구층암 주위 사방에 널려 있는 부재들을 수습하여 세운 것이지만,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연대를 잡는다. 천불전 앞의 석등과 배례석 역시 비슷한 연대로 보며, 현재 화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려시대 동종 역시 구층암의 옛 천불전 터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들 석물들과 동종은 나란히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건립되거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바, 현 구층암 사역은 적어도 이들 유물보다 앞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봉천암鳳泉庵과 길상암吉祥庵 및 인근의 여러 암자터를 포괄하는 구층암 사역이 신라말/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예상이 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암자나 원院의 이름으로 ‘구층’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는 임진란 내지 정유란 시기에 불에 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중수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1697년에 <화엄사사적>이 간행되었으나, 여기에는 당시 중수되었던 전각이나 암자 이름이 아쉽게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기록에 구층암 사역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1487)를 살펴보도록 하자.
남효온은 조선초 1487년에 지리산 일대를 답사했다. 그는 9월 신미일에 반야봉 인근의 초막에서 출발하여 연령-노고단-보월-당굴-극륜-봉천사에 이르는 삼십 리 길의 산행을 했다. 이 산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고단에서 출발하여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길은 노고단과 우번대 사이의 화엄사 골짜기를 따라 하산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이 길은 무넹기, 코재에서 시작하여 집선대, 국수등을 거쳐 구층암, 화엄사에 닿는다. 즉 노고단에서 화엄사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인 것이다. ![]() 구층암의 대숲과 오솔길. 시냇물은 이 대숲 아래를 뚫고 흐르니 난간 앞의 노래가 된다. 또한 ‘보월寶月’이라는 암자명은 <화엄사사적>(1924)에서 한자는 다르지만 음가는 동일한 ‘보월정사普月精舍’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남효온이 언급하는 암자들은 비록 현존하지는 않을지라도 당시 화엄사의 속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봉천사와 화엄사를 오가며 묵었던 이후 일정으로 보건대, 봉천사는 화엄사와 몹시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효온이 답사한 ‘봉천사奉天寺’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화엄사의 바로 윗편의 구층암 일대로 비정함이 타당하다. “절은 대숲에 있었으며, 누 앞으로는 긴 시내가 있어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흘렀다”는 묘사는 현재 구층암 일대의 풍경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법 사격이 컸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화엄사사적>(1697)에서 때마침 ‘봉천원’ 사역을 기록하고 있어 보완이 된다. 전각과 당우의 이름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위 봉천원 기록은 <화엄사사적>을 기록할 당시 고래로 건립된 적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왔던 내용이다. 이것은 어느 한 시점의 전체 규모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에 걸쳐 명멸했던 이름들을 통시적으로 종합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 봉천원 기록이 고스란히 봉천원의 규모를 뜻하지는 않는 한편 더러는 관련 내용이 일실되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남효온이 며칠동안 묵었던 ‘봉천사奉天寺’가 사적기에서 말하는 ‘봉천원奉天院’과 동일한 사찰이라고 보면 그가 접대를 받았던 누각은 다름아닌 ‘산호루’나 ‘배운루’였을 것이며, 당시의 수행승은 적어도 30인 이상이었다. 그리고 현재 구층암의 주불전인 ‘천불전’이 기록에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호남봉성지지리산화엄사봉천원중창상량록>(1874)의 제명에서 ‘봉천원鳳泉院’이라는 이름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사적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봉천원奉天院’은 필시 현재의 봉천암을 포함한 구층암 사역이 아닌가 한다. 음가(봉천)는 같은데 한자(奉天/鳳泉)만 다른 경우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지리’와 ‘화엄’만 해도 음가는 같은데 여러가지 다른 한자 표기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남효온은 비오는 날 봉천사 누상에 앉아 칠언율시 한 수를 얻었으니, <봉천사 누창에 쓰다書奉天寺樓囱>가 그것이다. 이 시는 그의 <추강집>에 실려 있거니와 가을날 구층암의 우중 풍경으로 운위될 만하다:
화엄사는 임진난 내지 정유난의 병화로 전체적으로 불탔다. 이를 두고 홍세태는 “도선의 유적은 외로운 연기 뿐道詵遺跡只孤烟”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화엄사사적>(1924)은 선조26년(1593)에 절이 불탄 뒤에 아흔 여덟 분의 대덕들이 토굴살이에 의지하면서 터를 지켰다고 적고 있다. 구층암의 사역 역시 이때 불탔을 것이다. 특히 정유난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섬진강을 따라 내습하여 구례와 남원 일대가 가장 참혹한 병화를 입었으며, 구례의 봉성과 남원성이 함락될 즈음에 지리산 산중구곡의 암자들까지 모조리 불에 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정유난에는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승려 153인이 전사하기도 했다. ![]() 구층암 가는 길에 뒤돌아본 각황전 큰절이 여덟이요 암자가 여든 하나였건만, 이제 화엄사는 외로운 연기 한 가닥만 남고 말았다. 그러나 토굴살이를 하며 터를 지켰던 대덕들의 덕으로 화엄사는 현재의 사격으로 다시 서게 된다. 병화를 입은 지 삼사십 년이 지나 인조8년(1630)에 마침내 화엄사 중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각과 당우, 암자가 차차 건립되었다. 인조23년(1645)년 즈음에는 이미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적전, 해운당, 송객료, 계명당, 만월당, 선당, 쌍련당, 향각전, 부도전, 동방장, 동전, 승당 등의 전각과 당우가 건립되었으며 암자로는 보적암, 금정암, 상암, 봉전동암, 상용문암, 하용문암, 은선암, 부도전, 적기암 등이 건립되었다. (이 내용은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1645년 <화엄사상물건도록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층암은 인조25년(1647)에 중창되었다. 그리고 화엄사 중건 대역사의 마지막은 장육전(각황전)의 중건으로 숙종25년(1699)에 시작해 숙종28년(1702)에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703년에 삼존불과 사보살상을 조성하고 이레동안 경찬법회를 열었다. 병화로 소실되고 나서 거의 일백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현재의 사격을 되찾은 것이다. 이후 구층암의 역사는 <구층대상량문>(1937)과 <봉성지>(1800), <중수구층암기>(1899), <화엄사사적>(1924)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구층암은 1647년에 중창되었다고 하였으나 이 연도는 2차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향후 비공개 자료인 여러 중수기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개된 여러 자료의 정황상 1647년 무렵에 중창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1772년에 봉암장로 등이 구층난야에서 경찬법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한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0년에 간행된 <봉성지>에서는 화엄사 속암으로 ‘구층’과 ‘봉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바, 1849년의 <봉천암중창기>는 임진난 이후 최초 중창이 아니라 대규모 중수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로 ‘구층’과 ‘봉천’을 언급하는 사료들은 풍부하므로 현재의 구층암 사역은 17세기에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화엄사의 구층과 천은사의 수도와 내산사의 영원에서 사교를 수료”한 청하탄정 선사의 행장으로부터 1800년대 후반에 구층암이 강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8년에 구층암이 중수되었다. 매천 황현은 중수된 구층암에서 이틀을 묵고서 쓴 <중수구층암기>에서 “기와와 서까래를 곱고 산뜻하게 일신하였다”고 썼다. 1901년에는 승려도속 60인이 구층암에서 백련사를 결사하고 발징화상의 유풍을 진작시켰다. 특히 1900년에는 청하탄정 선사가 견성당에 설선회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경허선사를 모시고 상원암에다 선원을 복설하였는데, 이 상원암은 현재 구층암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여러 암자터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 모과나무 기둥으로 유명한 구층암 본존요사. 현재 다실로 쓰이고 있는 이곳은 선방·강원·결사도량 등으로 쓰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구층암의 역사는 본존요사가 애초부터 선방 내지 강원의 용도로 건립되었음을 알려준다. 즉 좌우에 방장실을 두고 가운데에 선방을 둔 구조로서 대중이 모이기에 적합하기에 때로는 선원으로 때로는 강원으로 때로는 백련결사의 도량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구층대”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며, 사중의 기록들은 유생 황현의 <중수구층암기> 외에는 대부분 “구층대”라고 불렀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구층암이 한때 비구니 도량으로 쓰였던 흔적은 천불전 화단에 세워져 있는 비구니 덕선스님의 공덕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비구니 법희선사가 한때 구층암에 머물러 수행했던 이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때가 1941년으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마도 일제군국주의 시대의 여파였던 듯 화엄사 전체가 어떤 공적 기록물도 남지 않은 암흑기로 접어든다. 이 암흑기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바, 여순사건에서 촉발된 지리산 빨치산 투쟁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속수구례지>에서는 산승이 하야한 것이 7년 간이라고 기록했다. 7년 간에 걸친 전투 끝에 빨치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1954년에 비로소 지리산 입산이 허락된다. 때마침 1954년에 불교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화엄사의 주체세력이 대처승에서 비구승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구승이 맨 처음 입주한 곳이 바로 구층암, 봉천암, 금정암이며 이후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1961년에 비구승이 화엄사에 완전히 입주한다. 그리하여 화엄사는 마침내 암흑과 전란에서 빠져나와 빛나는 역사의 전통 위에 법등을 켠다. 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화엄사가 전소될 뻔한 위험에 처했으나 차일혁 토벌대장이 이를 막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1948년 여수, 순천, 백운산을 거쳐 마침내 지리산에 입산한 김지회 부대 등은 노고단을 거점으로 삼고 산 아래 마을들을 순식간에 점령한 다음 구례 전체를 해방구로 만들려는 의도로 대규모 정규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국군의 백인기 연대장이 산동군에서 피습당하여 자살한 것이 이 무렵으로, 이후 구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불에 타고 말았다. 칠불사, 연곡사가 전소된 것이 이 무렵이요 화엄사의 지장암과 사하촌 여관마을이 불탄 것도 이 무렵이다. 노고단 산정 주위의 서양인 별장촌 60여 채도 이때 불탔다. 그러나 깊은 산 지리산은 천혜의 은거지였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0년에 내원암, 보적암이 파괴되고, 1951년에는 상원암, 보운암, 만월당이 소실되었다. 이때 작전을 주도한 것은 제11사단으로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으나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 이후 제8사단이 새로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였고, 1951년 5월 10일 군경합동작전회의에서 또 다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펼치기 위해서였다. 이때 차일혁 부대장은 관할 지역이 아닌데도 화엄사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다른 부대장을 대신하여 화엄사에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문짝들만을 뜯어내 소각하는 상징적 행위로 그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화엄사가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구층암도 살아남았다. 빨치산 토벌대장이었음에도 적 이현상의 주검을 정중히 화장하고 권총 세 발을 예포로 쏘았던 차일혁은 늘 염주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이현상 주검의 주머니에서도 염주가 나왔다. 차일혁 공덕비는 화엄사 경내에 세워져 있다. 길게 잡아 이삽십 여년 간의 암흑기와 전란기를 빠져나온 화엄사는 도광스님이 주지를 하면서 오늘날의 가풍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도광스님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화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봉천암, 구층암에 용맹정진 선원을 개설하였으며, 이에 전국의 제일납자들이 생사를 내놓고 정진하였다. 그 당시 전강스님이 한 시절 봉천암에 조실로 있기도 하였으며, 일타스님 역시 구층암 선방에 방부를 들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정찬주의 소설 <인연>에서 그려진 바 있으니 이를 소개한다:
그러하니 구층암이 한 시절 한국 선불교의 선등이 가열하게 타올랐던 곳임을 알고 우리는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숲 아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제 구층암은 산중 적막처라기보다는 신도들과 관람객들이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암자가 되었다. 아울러 구층암 가까운 곳에 선등선원이 설립됨으로써 구층암은 이제 선방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원, 강원, 백련결사 도량, 비구니 도량, 용맹정진 도량으로 쓰였던 역사를 거쳤던 만큼, 구층암의 건축에서나 자연환경에서나 그 풍모를 간직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바로 이것이 구층암에 들 때 은은히 번져오는 첫 인상의 근원일 것이다. 그러하니 우리는 그 향취를 소매에 묻히고 자연스럽고, 질박하고, 아담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곳을 소요할 일이다. ![]() 구층암 사역 주변의 야생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다. 이제, 구층암 본존요사의 선방은 누구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로 변모되었다. 현재 화엄사 각황전 뒷편에서 시작하여 구층암, 봉천암에 이르까지 월류봉, 차일봉 능선 자락을 타고 야생차가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다. 넓게는 부도밭에서 연기암까지 군데군데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기도 하다. 그간에 산중의 스님들만이 끽다했던 이 야생차는 이제 구층암 다실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도 제공되고 있다.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말이 있으나 무릇 선禪에 참參하지 않은 채 맛만을 운위하여 그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니, 먼저 우리는 선방으로 쓰였던 구층암의 역사를 품에 안으며 선정禪定에 들어야 할 일이다. 구층암 선원에서 용맹정진을 하던 수행자들에게 일미一味를 전하여 수행의 힘을 북돋아 주었던 그 야생차가 이제 또 다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으니, 반갑다 아니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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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23 13:43 ㅣ최종 업데이트 09.03.23 13:4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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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씻는 산사도 잦은 발길로 번잡함을 피할 수는 없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깊숙한 암자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그곳에서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1. 무소유 법정스님이 17년간 머문 암자-조계산 불일암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암자이다. 찾아오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자 법정스님은 이곳을 미련 없이 떠났다. 암자 곳곳에는 평소 깔끔하셨던 법정스님의 성품이 배어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찾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아는 이들만 찾는 수행의 공간이었다.
2. 맑고 향기로운 차茶의 성지-두륜산 일지암
일지암은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중년 이후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일지암一枝庵'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시승 한산의 시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에서 따온 말이다. 한 마리의 새가 쉬는 데는 나무 한 가지면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많이 소유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이 경계해야 할 말이다.
3. '자기를 바로 보라'-가야산 백련암
예부터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라 일컫던 백련암은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조 38년인 1605년에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래전부터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고승들이 수도를 해왔던 곳이다. 성철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한 곳으로 더 알려진 백련암은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수행처로 깊은 곳임을 알겠다.
4. 장엄하게 펼쳐진 만다라의 세계-영축산 자장암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에 머물었던 유서 깊은 암자이다. 계곡이 시원하고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가 아름다워 통도사 팔경 중의 하나로 당당히 손꼽힌다. 자장암은 극락암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이유인즉슨 암자의 풍광도 빼어나거니와 자장암에 살고 있다는 금개구리 때문이다. 법당 뒤쪽 바위 구멍에 살고 있다는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머물 때부터 이곳에 살며 자장암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5. 천하제일의 참선 암자-삼정산(지리산) 상무주암
"그 경치가 그윽하고 조용하기가 천하에 제일이라 참으로 참선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대오한 보조국사 지눌이 상무주를 일러 '천하제일갑지'라고 하였다. 상무주는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198년 봄부터 1200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지눌은 상무주암에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오로지 선에만 몰입하였다. 해발 1100미터에 자리한 상무주암에는 선승으로 유명한 현기 스님이 계신다.
6. 구름과 바람이 감춘 암자-백운산 상연대
상연대는 지리산의 동북쪽에 있는 백운산의 800미터가 넘는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상연대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말 경애왕 1년인 924년에 고운 최치원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기도를 하던 중에 관세음보살이 연꽃을 타고 나타나 상연上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암자 앞마당에 서면 천왕봉과 장엄한 지리능선이 보인다. 상연대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선문이 쇠퇴하자 이곳에 옮겨와 선문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7. 도선국사가 칠일동안 춤춘 명당-수도산 수도암
수도암은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풍수와 선을 한 맥락으로 보았던 도선은 이 암자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칠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수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터가 없다 하여 산 이름을 수도산이라 하고 암자를 수도암으로 이름 지었다. 앞으로는 가야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봉우리마다 흰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니 도가 아니더라도 절로 흥이 난다. 암자의 전각과 그 배치는 다소 휑한 느낌이지만 그 터는 가히 명당임에 틀림없다.
8. 바람도 달도 쉬어가는 암자-능가산 월명암
천삼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월명암은 변산반도 능가산 법왕봉에 자리 잡고 있다. 부설거사가 오대산으로 가던 중 만경현 백연지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이곳에서 구仇씨의 딸인 묘화라는 여인과 인연을 맺어 등운과 월명 두 남매를 낳게 되었다. 딸인 월명을 위해 이곳 변산에 토막을 짓고 도를 닦아 월명은 이 자리에서 득도하였다.
9. 오대산의 유일한 비구니 암자-남대 지장암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들에는 중대 사자암(적멸보궁),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의 다섯 암자가 있다. 원래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중국의 오대산(청량산) 신앙을 자장율사가 우리나라에 소개하여 강원도 오대산이 성지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보천태자에 이르러 오대의 각 대마다 다섯 진성眞聖이 거주하고 있다는 신앙으로 신비화되었다. 남대 지장암은 오대산에서 유일한 비구니 암자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방을 연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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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다비식
게시일: 201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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