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6. 12:40ㆍ美學 이야기
문인의 뜻 화폭에 품고 그림의 道 넓히다 - 조선 ‘훈남 아티스트’, 김홍도 김홍도, 그림으로 길(道)을 넓히다 서책더미와 서화 두루마리, 지필연묵, 파초잎사귀, 칼, 호리병, 생황 등이 여기저기 툭툭 흩어진 방안. 그 가운데 사방관을 쓴 맨발의 선비가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일체의 배경이 생략된 때문인지 사물들은 비파 소리와 함께 공간을 부유하는 듯하고, 선비의 표정은 흡사 다른 시공간을 사는 듯, 꿈을 꾸는 듯, 아련하다.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그 안에서 시나 읊조리며 살려 하네”라는 화제(畵題)는 주인공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일 터. 일명, 포의풍류(布衣風流).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자화상이 있다면, 아마도 이 그림일 것이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그 안에서 시나 읊조리며 살려하네" 아름다운 풍채와 태도에 마음이 활달하고 구애됨이 없어 사람들이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조희룡趙熙龍) 군의 초상을 대하고 보니 옥이 비치는 듯 난이 향기로운 듯 소문에 듣던 것보다 훌륭하며 바로 온화하고 고상한 군자의 모습이다. (이용휴李用休)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 (홍신유洪信裕) 김홍도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추측건대, 용모가 꽤 준수하고 풍기는 인상이 매우 단아하고 우아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비파와 퉁소를 연주하는 솜씨까지 일품이었다고 하니, 조선 후기 최고의 ‘훈남 아티스트’를 꼽으라면 단연코 김홍도다. 김홍도라는 천리마, 정조라는 백락 김홍도는 화원(畵員)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도화서(圖畵署)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화원을 뽑아 국가와 왕실의 도화작업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당시 화원은 국가 소속 공무원, 그것도 천시되던 손기술을 쓰는 하급공무원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업무량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각종 의궤도와 행렬도 같은 국가행사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시로 중국의 화보와 오래된 그림들을 모사하는가 하면, 종종 사대부들의 계모임이나 연회에도 불려 다녔으니,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을 한다는 건 언감생심. 직업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화원은 화원 가문에서 대를 이어 배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김홍도는 화원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다른 화원들과 달리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이뤄낸 것이다. 그의 재능이 천부적이었다고는 하나, 재능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강세황의 「자화상」중 일부. 표암 강세황은 조선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당시 화단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홍도는 김해 김씨 가문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하급 무반벼슬을 지낸 중인계급이었고, 그나마도 조부대부터는 벼슬한 기록이 없다. 그런 그가 어떤 경유로 화원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김홍도 군이 어린아이로 내 문하에 다닐 적에…… 이따금 그의 솜씨를 칭찬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일러 주기도 하였다"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기록으로 보아 그 주변에서 그림을 배우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21세(1765)에 화원으로서 중요한 화사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고, 29세에는 영조와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어용화사 작업에 참여하는 등 이미 20대에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그러나 김홍도를 논할 때는 누구보다도 그,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문화통치’ 혹은 ‘철인(哲人)통치’를 꿈꿨던 이 깐깐한 주자주의자는 김홍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조 원년(1777)부터는 일반적인 화역(畵役)에 김홍도의 이름이 없고, 1783년에 왕실에서 유능한 화원들을 수시로 데려다 쓰기 위해 따로 시험을 치러 뽑는 차비대령화원제(差備待令畵員制)를 실시했을 때도 김홍도는 제외되었다. 김홍도를 일반 공무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정조가 특별대우했다는 얘기다. 정조는 김홍도가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흡족해했다고 하고, 김홍도는 임금의 부름에 대비하여 거의 대궐 안에서 살다시피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깥사람 중에는 사실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임금께서는 미천하고 비루하다고 버려두지 않으셨으니, 김홍도는 밤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했다."(강세황) 정조의 폭풍 같은 배려가 아니었다면, 화원 김홍도가 아티스트 김홍도가 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천재도 때(時)가 만들어 내는 법이니. 여하튼, 김홍도는 정조의 배려 덕분에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김홍도의 눈을 통해 18세기 조선의 산천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문인의 뜻을 품은 단원 정조라는 백락을 얻었으니, 김홍도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좋은 운도 운용할 줄 모르는 자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김홍도는 자신의 운을 타고, 마음을 다해 화가의 길을 걸었다. ‘문인화’만을 최고로 치며 화원을 천시하는 문인들의 오만함이 내심 역겨웠을 법도 한데, 김홍도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그림에 문인의 뜻을 담았다. 그가 마흔 살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자 ‘사능’(士能)은 “일정한 재산(恒産)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恒心)을 갖는 것은 선비만이 가능하다”라는 『맹자』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호는 ‘단원’(檀園)이다. 사십대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안기찰방과 연풍현감을 역임한다. 화원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관리로서의 능력을 뚜렷이 검증할 길은 없다. 다만, 연풍현감 당시에는 중매를 일삼고 아랫관리들에게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한다는 내용의 상소 때문에 압송될 뻔 했다가, 정조의 특별사면으로 도화서로 복귀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 허연 수염을 달고 잔칫상을 받는 노인들을 비롯 ‘기로’의 급에 끼지 못해 밖에서 구경하는 이들에서부터 구걸하는 거지들까지, 환갑의 김홍도는 150명이 넘는 인물을 이 그림에 세세하게 담아 냈다 사십대의 벼슬 경험을 거치면서 김홍도는 ‘단원’이라는 자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박달나무 정원’이라는 뜻의 ‘단원’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본뜬 것이다. 이와 관련한 정황은 강세황의 「단원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유방은 문사로서 고상하고 밝았으며 그림이 전아했다"고 한다 하여 김홍도가 그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자호를 단원이라 하고 자신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했다는 것. "그의 솜씨가 옛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풍채도 훤칠하여…… 이유방 같은 사람에게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고원하여 그만 못할 것이 없다" . " 기품이나 실력에서 자네가 이유방만 못할 게 뭔가, 화원이라고 기죽을 것 없네" 라는 격려의 말. 김홍도에 대한 진한 애정과 배려가 느껴진다. 문인의 뜻을 품은 화원 김홍도. 많은 문인들이 그의 재능을 아끼고 그의 기품을 흠모했지만, 그만큼 또 많은 문인들은 그의 재주를 '속되다'고 평가했다. 1800년, 김홍도의 든든한 백그라운드였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정조의 남자들처럼 김홍도 역시 휘청, 했다. 예순의 나이에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차정되어 젊은 화원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던 김홍도의 소회가 어떠했을지. 그러나 김홍도는 자신의 필치를 잃지 않았다. 여느 '전설 속 화가'들처럼 세상을 원망하거나 술에 취해 울부짖지도 않았다. 여전히 단아하고 우아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다듬었다. 말년작 「추성부도」(秋聲賦圖, 1805)에는 구양수의 「추성부」가 전하는 정취와 함께 가을날의 스산함이 짙게 배어 나온다. 그런가 하면 은퇴한 사대부들이 개성 송악산 만월대에서 계모임을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 1804)에는 김홍도 특유의 서사 가득한 풍속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져 있다. 이용휴의 말처럼, 김홍도는 스스로의 긍지를 버리지 않았고, 누가 뭐라든 그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원하는 자에게는 흔쾌히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려 주었지만, "자신의 마음과 손재주로써 교제의 예물이나 기방의 장식품 따위를 제공하기를 원하지 않았다."(이용휴, 「대우암기」對右菴記) 힘이 닿는 한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1805년에서 1806년 사이의 어느 날엔가 세상을 떠났다. 홍도(弘道), 그림의 도를 넓히다 김홍도「추성부도」.「추성부」는 구양수의 글로 처량한 가을소리의 감회를 동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표현한 구양수의 대표작이다.
김홍도 하면 대개 풍속화를 떠올리고, 많은 이들이 김홍도를 '풍속전문화가' 정도로 취급한다. 하지만 이건 다분히 현대적 관점에서 18세기 문화사를 재구성한 결과다. 어떻게든 그 시기에서 민족적 자각의식을, 민중적 현실주의를 찾아내고자 했던 근대주의의 산물이다. 물론, 김홍도의 풍속화는 독보적이다. 하지만 그의 독보성은 그가 민중의 현실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의 그림이 갖는 다층적 유머와 파격적 구성, 펄떡거리는 현장감,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디테일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그의 경이로운 시선에 있다. 이는 18세기에 연암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옥 등이 보여 준 새로운 글쓰기와도 공명한다. 역사의 딱딱한 지층으로부터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있었고, 김홍도는 그 힘을 유일무이한 스타일로 형상화한 것이다. 한 화가가 인물, 산수, 선불(仙佛), 화조 등 전 장르에 두루 뛰어나기란 쉽지 않다. 김홍도에게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릴 만한 가치가 있었고, 그는 마음을 담아 그 가치를 표현해 냈다. 홍도(弘道). 그렇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그가 낸 길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건, 그로 인해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길이 널찍해지고 풍요로워졌다는 사실이다. 예술의 ‘道’는,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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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주요 작품들 소개해주세요~
김홍도의 주요 작품에 대해서 조사해야하는데요..
김홍도의 그림들 설명도 같이해서 몇개 알려주세요!!!!
송혜교내언니 2011.12.11 13:16 수정됨 조회 23,995
- 답변
안녕하세요?
김홍도의 주요 작품이라...
네이버 지식에서 찾은 것들입니다.
-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약간 촌스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운 작가 김홍도는 조선시대의 풍속화가였습니다.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그린 그의 그림을 봐도 그렇고… 사실은 고상한 낭만이나 우아한 예술성은 기대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를 알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이 땅의 화가들 중에서 김홍도 만큼의 여유와 풍류를 가진 예술가가 정말 드물다는 것이었죠. 화가 김홍도. 그는 가슴에 신선을 품고 살았습니다.
1745년 영조 21년에 평범한 중인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어느 누구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적 능력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지, 10대부터 그의 능력은 인정을 받았답니다. 지난 회에 소개해 드렸던 화가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스무살이 되기 전에 도화원의 화가가 되었지요.
그의 평생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강세황에게 배운 것은 그림 뿐이 아니었습니다. 김홍도를 크게 아끼던 강세황은 그에게 시와 글도 가르쳤으니까요. 덕분에 김홍도는 여느 중인 출신의 화가들과 다르게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자신의 그림 곁에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그림 곁에 글을 써놓는 것이 진정한 문인의 풍류라 여겼거든요. 영화 “취화선”에도 글을 쓰지 못해 천대받은 장승업이 화를 내는 장면을 기억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홍도는 눈이 맑고 키가 훤칠한데다, 용모가 빼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그가 쓰는 글이나 시를 보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신선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었다고 하니, 김홍도는 화가라기 보다는 소위 예술인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진행되는 그림 사업에는 그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왕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도 몇번이나 책임자로 활동하게 되죠. 게다가 중인으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하는 데요, 첫번째 부임지가 바로 스승 강세황과 함께 근무하는 장원서였습니다. 그곳은 궁중의 화초나 과실나무들을 관리하는 곳이었으니 화가출신 관리가 일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겠죠?
그가 마흔 다섯살이었을 즈음에는 정조의 지시로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산하를 그리는 훈련을 한 후에 그는 일본 쓰시마 섬으로 가서 지도를 그려옵니다. 그리고 중국에도 다녀오면서 외국의 사정을 왕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화가로서, 조선의 백성으로서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만간에 화가 김홍도의 독특한 인생경험이 영화로 제작될 것이라고 하니, 자못 기대가 되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김홍도가 그린 것은 풍속화만이 아니랍니다. 아래에서 소개해드리는 것처럼 그의 그림 중에는 꽃과 나무, 동물 등을 그린 정물화와 금강산 등을 그린 산수화, 건축물이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재연하는 그림, 삼강오륜 같은 책에 들어가는 삽화 그리고 절에서 다루어지는 불교화까지 실로 그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그림에 손을 댄 듯합니다. 그의 그림들 모두 많은 이들의 요청에 의해 그려진 것이니 그의 인기를 가히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은 그림 주문을 통해 김홍도가 돈을 많이 벌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처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신선을 품고 살았던 사람인지라 돈이나 명예를 쫓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벼슬보다 더 좋은 자연 속의 삶>, <소나무 아래서 이야기 나누기> 등의 작품을 그리면서 삶에 대한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흔 살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화가 김홍도는 세상의 물욕이나 권력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여유와 낭만을 즐기며,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천하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 깊은 심사 자주 거문고 줄에 담아보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남아도 해가 될 뿐이며 / 부귀의 지극함도 거짓되고 수고로우니
어찌 산 속 고요한 밤 향 피우고 앉아 / 소나무 소리 들음만하리요춤추는 아이 (1778) ]
위의 그림 뿐 아니라 김홍도가 그려낸 <풍속화첩>에는 “논갈이”, “대장간”, “고기잡이”, “빨래터” 등 일상 생활을 재미나게 그려낸 그림들이 있습니다. 북, 장구, 피리, 해금등의 가락에 맞추어 소년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네요. 다소 투박하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듯한 선의 터치가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씨름도 (1778) ]
이 그림은 김홍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히고 있죠. 단오날 즈음 씨름판이 벌어진 광경을 반시계 방향의 재미있는 구성으로 그려내었습니다. 특별히 더욱 독특한 것은 다들 씨름에 집중하면서 둥글게 모여있는 데 왼쪽 아래에서 씨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엿장수 아이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그의 재치가 숨어있는 것이죠.[ 서당도 (1778) ]
혼이 나서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다른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있네요. 예전에는 오로지 양반만이 글을 깨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당에는 양반의 아이들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홍도의 서당도는 모여있는 아이들의 더벅머리나 행색을 보니 중인계급의 서당인 듯 합니다. 아마 영정조 시대의 서당은 중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나 봅니다. 이렇듯 변화하는 사회상을 김홍도는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나무 아래 생황을 부는 어린 신선 (1779) ]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소나무 곁에서 새깃털 옷을 입은 어린 신선이 생황이라는 우리의 민속 악기를 불고 있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악기를 불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고요하면서도 처연합니다. 눈으로 소나무의 줄기를 따라가보세요. 어디쯤에 용의 머리가 숨어 있답니다.[ 시녀도 (1781) ]
임금님의 초상까지, 초상화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김홍도. 그가 그린 초상화 중 하나이지만 궁의 시녀를 그려낸 것이 재미있네요. 뭉뚝하게 표현된 시작된 붓의 터치가 날렵하게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맑고 투명한 색상의 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의 아름다운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데요, 아마 시녀가 아니라 선녀를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나비 (1782) ]
찔레꽃을 찾아 모여든 나비들의 모습을 부채에 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풍속화가로 다루어지고 있는 김홍도이지만 위와 같은 정물화에도 상당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이 부채 그림을 보고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사람의 솜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빼앗았다. ”[ 단원도 (1784) ]
그림의 제목이 김홍도의 호를 사용한 것처럼 위의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생활의 한 단면을 그려낸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그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불러 놓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위에 적힌 시는 그의 친구가 지은 것이구요. 나무가 많은 집에서 친구들과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풍류가 부럽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이런 낭만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네요.[ 명경대 (1788) ]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견되고 있는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인 명경대. 그 또한 금강산 관광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 데요. 정선이 실제로 경치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김홍도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금강산은 실로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서루 (1788) ]
이 그림도 김홍도가 금강산을 그린 <금강사군첩> 중 한 장면입니다. 지도를 그린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약간은 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가로 43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끼고 여유롭게 세워져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 속 풍경은 매우 넓고 깊습니다.[ 봄맞아 지저귀는 까치 (1796) ]
봄에 핀 복숭아꽃 주변에서 까치들이 모여 지저귀고 있는 모습입니다. 맑고 깨끗한 색과 선을 사용하여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살리고,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까치와 북숭아 나뭇가지들을 그려낸 것이 신선과도 같은 그의 심성을 잘 표현한 듯 합니다. 이 그림처럼 그의 마음 속에는 물욕이나 권력욕과 같은 무언가를 가득 채우기 보다는 적당히 비워 있었습니다.
- 2009.10.05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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