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보1호 -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2017. 4. 6. 16:48美學 이야기




일본 국보1호 | 미술 이야기

알래스카 Ⅱ 2010.10.22 09:23
http://blog.daum.net/wongis/7087607            

 

 

* 아래는 베껴온 자료입니다.

 

 

 

1.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일본의 국보 제1호 / 높이 123.5cm 목조

신라 불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이는 교토의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에 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의 한 사람인 독일의 야스퍼스는 이 한국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서기 603년에 추고천황(推古天皇, 592-628)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574-622)가

교토 땅의 신라인 지도자였던 진하승 공에게 전해주었고, 진하승 공은, 즉시 봉강사를 창건했다.

이 봉강사가 현재 교토의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의 옛 이름이다.

진 공은 이 신라 불상을 모시고 오늘의 고류우지의 전신인 봉강사를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우지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학자들도 여기엔 이의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본의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국보 제83호/국립 중앙 박물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고류우지(광륭사)의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목조 불상이 바로

상투미륵상 또는 우는 미륵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 사학자인 다무라 엔초 교수는 그의 저서 『쇼토쿠 태자』에서

고류우지의 두 국보 목조 불상이 신라에서 보내온 것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쇼토쿠 태자는 신라에서 보내준 미륵상 1구를 진하승에게 주었다.

진하승은 이 불상을 모시고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고류우지이다.

(국보 제1호에 대한 이야기임) 또한 616년 7월에는 신라에서 사자를 파견하면서 불상을 보내주었다.

이 불상 1구도 고류우지에 지금 있는 소형의 미륵상(우는 상투 미륵)일 것이다."

 

고류우지에 있는 2구의 국보 불상 즉,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상투미륵상이 신라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옛 문헌이나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밝혀져 있으나, 고류우지에는 그런 확실한 설명이 없는 실정이다. 

  

 

출처 / 일본의 국보 1호

저자 / 살리자

 

 

 

2. 이도다완(井戶茶碗 진주사발)

 

 

 

  ▲ 일본의 국보로 진주사발. 기자이몽이도(喜左衛門井戶)

 

 

 

뒷모습.

 

 

일본 국보 중 도자기는 이 사발이 유일합니다.

일본인들은 이 도자기가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준다며 극찬합니다. 

그런데 이 도자기를 소장하던 일본인들은 모두 병이 걸려서 

일본 대덕사 고봉암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 아래 댓글 참조하세요.>

 

 

아래 사진과 댓글 <펌5>의 출처입니다.

http://cafe.daum.net/naturehealth/1kic/987

 

 

 

건수다완


 

 

 

송편분인다완/松平粉引茶碗


 

 

 

  

 

기자에몬/喜左衛門

 

 


 

 

건수다완

 

 

 

 

 통정통/筒井筒, 쯔쯔이쯔쯔

 


 

장속활고대다완/長束割高臺茶碗

 

 

 

 

주정분인다완/酒井粉引茶碗

 

 

 

 

천종이라보다완/千種伊羅保茶碗

 

 

 

 

 

 

 

 

 

 

 

 

 



댓글
이도다완에 대한 얘기 중... 이 도자기를 소장하던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니...
마치 피라미드를 발굴하는 자들에게 걸리는 저주같군요.
호오~ 흥미진진...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없나요?
겨우 밥사발이건만.... 아마도 무엇인가 사연이 있을 법 하군요!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도자기공예가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의 노리다케는 세계적인 명품이 되었는데 우리의 그릇은...
여전히 밥그릇이니...

한국의 도예기술이 전해질 무렵까지도 일본에서는 목기 그릇을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고급자기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고 하고요. [펌]
(펌)

일본 교토 다이도쿠지에 있는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입니다.

내부가 우물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세계에 100여개가 남아 있는데 모두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의 국보인 이 다완은 조선의 도공이 조선의 기술로 만든 조선의 것입니다.

이 다완은 국보라 가격을 매길 수 없지만,   비싼 것은 1000억을 호가한다고 하니

일본인과 다완의 역사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내전이 심하던 일본에서는 전장에서 무공을 세운 무사에게

포상으로 다완, 차를 넣는 통, 토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고려의 다완은 최고의 포상품이었다고 합니다.

1500년전 일본의 영주들 사이에서는 다도가 크게 유행을 했습니다.

다도 스승이 따로 있고 다완과 자신의 성을 바꾼 영주도 있었다고 하니

다도에 미친 인간들이었나 봅니다.

다도가 성행을 하니 다완이 필요했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중 조선의 다완은 최고의 대우를 받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동경할만한 이유였습니다.

1590년 오랜 내전을 종식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정통성과 다이묘들의 충성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전쟁을 일으킵니다.

일본이 최초로 해외로 원정을 해서 벌인 전쟁, 임진왜란이었습니다.

토요토미는 원정군에게 특명을 내립니다.

조선의 도공과 장인들을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끌고 오라는..

조선에서는 도공 1000명이 일본으로 끌려 갑니다.

왕실 자기를 만들던 광주요의 도공 384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000명의 숫자라는 것은 조선의 도공들을 싹쓸이 했다고 보면 된다는군요.

각지의 영주들은 가마을 만들고 조선의 도공들에게 자기를 만들게 합니다.

일본은 백자 생산에 성공합니다. 순전히 조선 도공의 힘이었습니다.

임진년에 끌려간 도공 이삼평이라는 사람이 일본 아리타에서 백자의 원료인

고령토를 찾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도공들을 끌고간지 30년만에 일본은 유럽의 황실과 귀족들의 자기 주문을 받습니다.

유럽으로 자기 수출이 시작된 것이지요.



16세기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 베트남이었습니다.

그 중 질 좋고 품위 있는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조선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저 멀리 아프리카, 유럽 , 아랍권으로 자기 수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은의 1/3을 중국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자기 수출의 결과입니다.

자기 수출을 하던 명나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원나라가 만들어낸 백자와 이슬람 문화권의 상징인 푸른안료,코발트가 빚어낸 청화백자는

당시 유럽의 황실과 귀족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립니다.

귀족들은 경쟁적으로 청화백자를 구입합니다

황실 귀족에게 청화백자는 권위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럽의 성에 창화백자를 도배를 한 방이 꼭 있습니다.

유럽인이 얼마나 청화백자에 열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명에서 청으로 나라가 바뀐 중국은 어수선한 국내 사정과 잦은 반란으로

청화백자의 생산이 거의 멈춘 상태였습니다.

이 공백을 틈타 일본은 청화백자보다 더 현란하고 진보된 자기를 유럽 시장에 내놓습니다.

조선 도공을의 힘으로 말입니다.

유럽은 중국 열풍에 이어 일본 열풍에 휩싸입니다.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일본 자기와

자기를 싸는 종이를 찍기 위한 칼라 판화는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엄청난 자기 수출로 돈을 번 영주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됩니다.

이는 곧 일본이 선진국으로 가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는 얘기죠..



반면 조선은 인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등 잇다른 전쟁으로

기술을 가진 도공도 없었을 뿐더러 자기를 만들 여유도 없었습니다.

임진왜란은 단순한 일본의 땅 따먹기식 침략전쟁이 아닌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바꿔놓은 전쟁이었습니다.

와아~ 다완 하나에 얽힌 사연이 이렇게 깊다니... 놀랍습니다.

보는 눈이 있어야 알아보는 것도 있겠지요.
그리고 보면...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어떤 다른 점이 있어요.
이케바나도 그 하나가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하더군요.
밥사발에서 우물을 보다니.. 참, 놀랍습니다!
(펌 2)

이도다완의 경우 국내에서 실물을 대하기 어렵다.
이는 일본 차인들이 조선에서 가져간 지방사기 가마에서 만든 그릇가운데 일부를 찻사발로 쓰면서
귀하게 여겨 간직해온 반면 조선인들은 식생활용기로 써왔기에
그릇을 대하는 생각도 달라 귀하게 간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고려말 청자가 쇠퇴하면서 대신 만들어 지기 시작한 분청사기는 약 100년간 조선도자기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1454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엔 자기소 139개소, 도기소 185개 등 전국적으로 324개소의 도자기 가마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와 도기소는 토산공물로서 왕실과 중앙관아에 필요한 각종 도자기를 구어 납품하던
가마의 숫자이다.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이 같은 가마터의 숫자는 조선초기 왕실은 물론 일반백성들 사이에서도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성기를 누리던 분청사기가 1470-1480년대에 이르러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원인은 1467-1469년경 성립된 사옹원관하인 분원때문이었다.
분원이 성립된 이후 경기도 광주의 분원가마에서 왕실이나 중앙관아에서 필요한 기물을 백자로 만들어
조달했기 때문에 지방 공물로서의 분청사기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았다.
물론 분원이 생기고 나서도 지방 가마에서 분청사기는 계속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분청가마는 지방관아나 서민들을 상대로 한 일상용기를 생산하는 가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분원이 설립된 이후 각 지방의 자기소에서 토산 공물로 납품했던 현물대신
그에 상당하는 만큼의 공포나 공미를 토산공물세로 대납해야 했는데
이는 사기장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소에 부과된 토산 공물세를 납부할 경우 사기장들이 스스로가 자유롭게 자기소를 운영할 수 있었다.
즉 민요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백자는 대략 1420년대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관심과 수요가 증가한 것은 1440년대이고,
백자 생산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1460년대엔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 백자가 제작되어
왕실 외에 관리들과 일부 서민들 사이에서도 상용되기 시잭했다.

그러자 왕조에선 왕실전용인 진상자기의 사사로운 사용을 금하고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산지의 소재읍으로 하여금 백자원료에 대한 통제를 체계화하여
지방가마에서 백자생산을 근원적으로 제한하려고 하였다.

백자는 신분상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왕실전용도자기이지
일반 서민들이 써서는 안되는 도자기라는 이유에서이다. 

   백자는 분청자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단단하고 흰색으로 깨끗하며,
선비들이 갖는 성리학적 이미지에 걸맞은 새로운 문화의 산물로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신 상류계층으로부터 선호의 대상이었다.

특히 세조시대에부터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사대부들에겐 더욱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청화안료를 중국으로부터 고가로 구입해야만 했기에
사대부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사대부들이나 재력있는 부유층이 중구과 밀무역을 통해 청화백자를 들여올 만큼
청화백자는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의 필수품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일반 서민층까지 백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같은 세정의 변화는 분청사기를 굽던 각 지방의 가마에 영향을 미쳐
지방가마는 서서히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될 수 밖에 없었다.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된 이후 지방의 백자가마는 처음부터 백자를 굽기 시작한 가마와
분청사기를 굽던 가마에서 분청사기에 이어 백자를 구운 가마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가마 근처에 백도가 생산되지 않아 부득이 백토가 생산되고 땔감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동해 새로 가마를 열어 백자를 만든 가마이고,
후자는 요행히 기존의 가마주변에서 백토가 생산되어 그 자리에서 분청사기에 이어 백자를 만든 가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백자는 경질백자와 연질백자로 구분된다.
경질백자는 태토의 입자가 치밀하여 기공률이 낮고 1300토 이상의 고열로 굽기 때문에
태도가 자화되어 흡수율도 낮고 두드리면 쇳소리를 낸다

이에 비래 연질백자는 1200-125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 구워낸 백자로
태토의 입자가 커서 비중이 낮아 가벼우며, 흡수율도 크고 두드리면 약간 둔탁한 소리를 낸다.
또한 소성온도가 낮고 대토의 입자가 치밀하지 못해서 경질백자보다 강도면에서 약하고 백색도도 떨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도다완과 관계있는 연질백자와 연질백자를 만든 가마다

흙과 불의 예술,
뜨거운 가마에서 그 열기를 견딘 산고...




(펌 3)


   '기자에몬 오이도'는 천하제일의 다완(茶碗)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다도에 쓰이는 다완을 세 가지로 나누는 데,
중국에서 전래된 것, 조선에서 전래된 것,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나눕니다.
그중에서 '다완은 고려'라고 흔히 말하듯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조선의 다완을 꼽습니다.

조선의 다완 중에서도 기자에몬 오이도는 '다완의 극치는 이 하나로써 다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최고의 명물로 칩니다.
이 다완은 다미(茶美)의 절정에 이르러, '화경정적(和敬靜寂)'이란 다(茶)의 경지가 여기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럼 이토록 다인들의 찬사를 듣고 있는 기자에몬 오이도가 걸어온 발자취를 먼저 한번 살펴볼까요?

'이도'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하였는가에 대한 정설은 없습니다.
다만 조선 지명의 음을 그대로 따다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자에몬'은 사람 이름이며, 그는 다케다라는 성을 가진 오사카의 상인이었습니다.
그가 이 다완을 소유하였던 까닭으로 '기자에몬 오이도'로 불리고 있습니다.

17세기 초에 이 다완은 혼다 다다요시(本多忠義)에게 헌납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혼다 이도'라고도 합니다.
그러다 1634년 봉록을 야마토국(大和國) 고오리야마(郡山)로 옮길 때
이즈미슈 사카이(오사카 중부에 있는 지역) 다도의 대가 나카무라 소에추(中村宗雪)의 손에 넘어갔으며,
1751년에는 도시에시게(塘氏家茂)의 소유로 다시 넘어갔습니다.
1775년 무렵에 이르러 다완 수집을 열심히 하던 마츄다이라 푸마이(雲州不昧)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다완은 '대명물' 부류에 들어가게 되었고,
푸마이는 1818년 아들 게탄(月潭)에게 유훈을 남기기를, "천하의 명물이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푸마이는 이 다완을 열렬히 사랑하여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갖고 다녔습니다.


   이 다완에는 불행한 소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유하는 자는 종기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종기라는 병이 지금이야 항생제와 같은 좋은 치료법이 있어 대수롭지 않겠지만
항생제가 없었던 당시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전에 이 다완을 소유했던 한 호사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림살이가 찌들어 교토의 유곽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해 마차를 모는 말몰이꾼까지 하였지만
이 다완만은 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종기로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재앙이 있다는 전설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 푸마이 자신도 이 다완을 입수한 뒤 두 번이나 종기로 고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두려워한 그의 부인이 다완을 팔 것을 종용하였지만
다완에 대한 그의 열애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푸마이가 죽은 후 그의 아들 게탄이 다시 종기를 앓자
이 다완은 마침내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의 분원인 고호안(孤蓬庵, 가족 묘지가 있는 절)에 기증되었습니다.
그것이 1818년 6월 13일의 일이었습니다.
명치유신 전까지는 마츄다이라가(松平家)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자에몬 오이도는 과연 어떤 그릇인가요?

이 다완은 조선의 밥공기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그릇이었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잡기(雜器)로, 만든 사람도 아무렇게나 만들었을 것입니다.
흙은 뒷산에서 캐오고, 유약은 화로에서 가져온 재를 사용하였으며,
물레는 중심이 헐렁하였을 것이며,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굽도 거칠게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마는 보잘 것 없었으며, 그릇에 모래가 달라붙어 있어도 그런 것에 구애받지도 마음쓰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조품도 없는 천하 명기 대명물의 정체입니다. 


  이처럼 막사발과도 같은 이 그릇이 왜 그토록 많은 일본 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요?

조선을 사랑하였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1931년 3월 8일 고호안에서 기자에몬 이도다완를 처음 보고는 '훌륭한 다완이다
- 그렇지만 어쩌면 이다지도 평범한가.'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고 합니다.

평범한 밥공기에서 천하 명기 대명물로로 바뀐 데는 야나기 무네요시도 지적하였듯이
이 그릇의 평범함 속에 있는 자연스러움과 건강함에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은 무사(無事), 무난(無難)함에 있습니다.
선어(禪語)에도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하였듯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임제록(臨濟錄)에도 이르기를, "무사함이 귀인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기자에몬 오이도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고요하고 평온한 정온(靜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며,
이런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다인들의 마음을 지금까지도 사로잡고 있습니다.


- 참조한 글은 1931년 5월 5일 공예 제5호에 실린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
<'기자에몬 오이도'를 보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쓰던 밥그릇에 물말아 마시듯 차를 마셨다는 거잖아요?
마치 주발에 커피 타마시는 것처럼요.
고려시대의 요강이 일본에 가서는 세숫대야로 쓰인 기록은 없을까요? ㅎ
개밥 그릇이 일본에 가서는 가문의 보물로 취급되어 그 집안의 상좌를 차지하면서
모심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
(펌 4)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손꼽아라면 아마도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가히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런 우리 대표 공예품이다.
도예는 도공의 솜씨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도공의 솜씨와 흙과 불과 바람이 어울려져야 된다고 한다.
도자기는 구워내는 온도의 차이에 따라 토기, 옹기, 도기, 자기로 구분하는데 ,
그냥 진흙으로 빗어 말린 후 모닥불에 구운 것이 토기라면
자기는 1,200-1,300도 이상의 고온 가마에서 구운 것이다.
토기는 그 태토가 강가에서 퍼온 진흙이라면,
자기의 태토는 힘들여 찾아낸 광석에 해당하는 고령토이다.
이러고 보면 우리의 청자와 백자를 학생들에게 공예미학 측면을 벗어나
선조들의 과학기술 측면에 놓고 한번 가르칠 필요도 있다고 본다 .
임란 전까지 자기를 제대로 만들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조선, 베트남 뿐이 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빚은 그릇이 가마 속에서 변형되지 않게 하며 열을 1,200도 이상 올릴 수 있는 기술과
최고의 원료가 고령토임을 알고 이것를 찾아 내는 기술은 다른 나라에는 그 당시 없었다는 셈이다.
오늘날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과 유전을 탐사해내는 기술 쯤으로 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서양에서도 귀족과 부유층에서는 청화백자 도자기를 매우 귀중하게 여겼고,
이게 집안에 있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다 하고,
심지어 도자기로 아예 집안 벽을 꾸미는 경우도 있었다지만 ,
서양 어느 나라도 청화백자를 만들지 못했고 중국에서 수입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청색 문양이 있는 흰 백자가 청화백자이고 ,
고온에서 구울 때 청색이 변하지 않는 안료는 코발트이다. 


   이 코발트는 중세에는 아랍지역에서만 생산되었고 아랍 무역상이 서양 명품족의 취향을 파악하여,
자기네 코발트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의 기술력으로 주문생산해서 다시 서양에 팔았다.
이 때문에 청화백자 생산국인 명나라는 전세계의 은의 30%를 보유했다고 한다.
당시 아랍이 잘 살고 명나라가 대국이였던 것은 이 청화백자 때문이였다.
왜 그때 조선은 자기 만드는 기술이 있으면서도 국제무역을 하지 못했을까?
너무 아쉽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하고 ,1,000여명의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다하니
조선의 도공을 싹쓸이 해 간 셈이다.
내 생각에는 당시 일본은 네델란드와 무역하면서 조총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도자기가 고가의 공산품이며 돈 덩어리 임을 알았던 것 같다.

   명,청 교체기의 전란 속에 당시 중국의 도자 생산지는 폐허가 되었고,
중계무역을 하던 국제 무역선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돌아 중국에 왔을때
중국의 도자 공장이 폐허가 되어 있었을 때 , 그들은 그냥 돌아갔겠는가?.
어떻게던 비슷한 것 이라도 가져가야 그들은 파산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은 중국보다는 품질이 떨어지지만 빈배보다는 나으니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다.
또 한편은 일본으로 갔을 것이다.

그때, 일본은 1,000여명의 포로로 잡아간 도공을 바탕으로
중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조선백자를 이미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
얼마나 돈을 벌었겠는가?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 시점은 아마도 이때부터 일것이다.

   일본은 이어 오채색 자기로까지 발전시켰고,
이를 서양에 수출할때 목판으로 찍은 강렬한 목판화로 포장해서 팔았다고 하고
이 강렬한 색감의 목판화 포장지를 보고 , 서양에서 화가들이 포장지의 색감 영향를 크게 받아
인상파,야수파의 화풍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에! 일본 수출품 포장용지가 서양 미술사를 바꾼 셈이 된다. 


  임진왜란이 없었거나, 왜란 당시 도공의 중요성을 알고,
이들 부터 보호, 피난시켰다면 조선은 어찌 되었겟는가? 동양사가 새로 쓰여 졌을 것이다.

왜란 당시 포로로 간 도공은 좋은 대우를 받았고,
뛰어난 도공은 일본의 지배계급인 사무라이 대접으로 일본도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떤이는 전란 중에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에서 천시받느니 일본으로 가자고 설득하여
숨어있던 도공과 친지를 찾아 데리고 갔다 한다.
민족의 큰 역사적 비극이 아닌가?


  나는 우리 만의 독특한 멋을 풍기는 도자기는 고려 청자와 이조백자의 사이에 생겨난 분청사기와
조선 후대의 백자 달항아리라고 본다.  
분청사기는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소박함과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인 형태를 가지며,
태토 위에 백토를 다양한 분장기법으로 칠하는 우리에게만 있는 도자기이다.
아랍을 거쳐온 비싼 코발트 안료 대신 , 흔한 철광석 안료를 사용하여 검은색으로 ,
튀어 오르는듯한 쏘가리 한마리 그려넣은 철화분청사기는 가히 일품이다.
또한 원형에 가깝도록 둥글게 말아올린 모양과 투명한 우유빛 유약(釉藥)이 더하여
마치 달을 연상시킨다 하여 달항아리라 불리는 조선 후대의 백자 달항아리도
마찬가지 우리의 정서와 멋이 아니면 만들수없는 도자기이다.
철화분청사기와 백자 달항아리를 중국, 일본 도예가가 만든다 생각해보자.
아무래도 어색하다. 막걸리와 소주 마시는 가난하면서도 자유스런 우리 도예가가 딱 이다 .

   그런데, 우리 도자기 중 미스테리한 도자기가 있다 .
분명 조선 도공이 만든 도자기인데 한국에는 단 한개도 없고 ,
일본에만 100 여개 전해지는 용도가 말차 찻잔인 이도다완이다.
일제시대 최고의 미술 공예연구가 였던 야나기무네요시가
조선의 민초들이 사용한 막사발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해서 한편에서는 막사발로 불리기도 하는
도자기이다 .    
이 이도다완들 중에 일본 대덕사에 안치되어있는 기자에몬 이도로 불리는 다완은
1951년 일본 우익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보26호 로 선정되고
추정 가격은 100억엔이나 된다고 한다 .
100개면 얼마인가?        
지금도 우리 도예가와 일본 도예가들이 재현에 힘쓰고,
그 제작 원 가마터를 찾아 헤메지만 확실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
일본인이 천하 3대 도자명물을 꼽는다면 조선 이도다완이 첫째이고,
그 다음이 그들의 라꾸도자, 가라쓰도자 라고 한다.

그런데... 도기장이 맘대로 어떤 것은 찻잔이 되고
어떤 것은 술잔이 되고 밥공기도 되고 하는 거 잖아요.
조선에서 버려진 것이 일본에서는 대우받았다는 말인데...

주인 잘 만나 밥그릇이 국보가 된 것이니... 팔자 한번 기막힙니다!
  이 미스테리 한 도자기가 이도다완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여러 설이 있다.
이도라는 한자 말이 우물, 샘을 칭하므로 조선땅 우물이 있는 곳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도산주로라는 일본인이 조선에서 가져가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진상하여 그의 이름을 붙혔다는 설,
다완의 속이 우물처럼 깊어 이도라고 했다는설 등, 설도 다양하다.

이도다완은 비파색이라는 노리끼리한 색을 띄며,
속이 우물 처럼 깊고, 힘있는 물레선과 태토의 모래알갱이가 간혹 보인다.
매화피라는 유약이 녹아 흘러내린 자국에,
굽이 높고 투박하지만 무작위한 미, 금욕, 절제, 고요, 자연의 미가 있다고 평한다


   원산지는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새미골, 사천시 곤명면, 진해 웅천설이 있으나
현재는 비슷한 파편이 발견되고, 주변에 땔감 많고, 조선 무역항 제포가 이웃하고 있는 웅천설을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이 이도다완은 일본에서는 같은 재료와 열처리를 해도 조선의 바람이 없어서인지 재현이 어렵고 ,
최근 우리측에서는 원형 가깝게 재현된다고 하니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다.
좋은 재현품은 천만원에 팔린다고 한다 .
이도다완은 조선의 막사발이였다. 아니다 조선 남해안 사찰에서 제기로 쓰여진 것이다,등
그 사용 용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하여튼 이 조선산 사발은 의문과 재미가 함께 한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일본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 다완의 유래는 재미있다 .
전해오길 다께다 기자에몬이라는 일본인이 토요토미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다 하고
토요토미 사후에 명문가로 이어 전해 졌는데
소장자 마다 원인모를 병으로 죽거나 불운이 겹쳤다 한다.
마지막 소장자는 부자가 동시에 병이 났는데
부인이 지금의 일본 대덕사에 다완을 안치하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이 이도다완을 여러개 소유하고 애지중지 하였으며
때로는 각 영주에게 이 이도 다완을 전함으로써 동맹과 협력, 신의와 자신에 대한 복종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내 생각에는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본인은 간교함과 잔인함,독선,위선,배신과 함께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
그 반대편 마음 속에는 양심의 가책과 출신의 비천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이도다완을 보고 만지는 순간 ,
투박함과 자연스럼 속에서 평온과 절제와 고요, 금욕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
또한 이 다완을 소유하고 또 주변에 하사 함으로써 ,
그는 양심의 가책과 출신의 비천함을 위안하고 합리화 하였으리라 .

   이도다완의 투박함 속의 미는 ,
당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조선민초와 유교적 금욕적 사고를 가진 조선 양반가에게는 일상의 미였겠지만
상대적으로 조선과 달리 피로 얼룩진 시대적 배경속에 살던 당시 일본 지배계층인 쇼군이나 다이묘 ,
상층 사무라이계급에게는 양심을 때리는 충격의 미로 다가 갔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 이 다완이 국보나 중요 문화재들로 지정되어 있고
그 재현품 마져도 소중하게 여김은,
그들이 우리 보다도 금욕과 절제, 자연스움의 미를 더 중시하거나 미적 감각이 깊고 섬세해서라기 보다,
그들의 역사와 삶 반대편의 미를 이도다완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 아닐런지?

   지금도 한일의 많은 도예 연구가들이 이도다완의 고요지를 밝히기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하니
나도 한번 추정해 본다.
내 추정은 , 이도다완이 처음 만들어진 시점은 1510년이고 그 숫자는 십 수개였다 ,
장소는 웅천이며, 만든 이는 와병 중인 한 장애인 도공이였다.
다시 만들어진 것은 한참 뒤인 1570-1590년 사이이며,
이때는 2-300개가 웅천, 하동,사천 등에서 몇몇 도공에 의해 최초 다완이 재현되어 만들어 졌고,
이는 전량 일본으로 건너 갔다고 본다.         이에 상상을 가미하여 소설(?)을 한번 쓰보면 ㅎㅎㅎㅎ

   1510년 왜인들에의해 삼포왜란이 일어 났는데,
그 중 제포의 왜인들이 당시 일본이 만들 수 없던 고가품인 도자기를 약탈하기 위해
도공과 가마가 있는 가까운 웅천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왜란 소문을 들은 웅천 민과 함께 도공들도 피신한 뒤였고
그들이 찾아 낸 것은 하반신이 불편한 늙고 병들어 누워있는 한 도공과 그를 병수발하는 딸이었다.
실망한 왜인들은 늙은 도공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딸이라도 끌고 가려했고 ,
이에 늙은 도공은 딸을 놓아주면 그들이 원하는 도자기를 당장 구워 주겠다고 제의하게 되고,
왜인들은 이 제의를 받아 들이게 된다.

   늙고 병든 도공은 한동안 도자기 굽는 일을 중단 한터라, 좋은 흙도 유약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딸을 위해 아쉬운대로 가마 터 주변의 사질점토를 물에 개어 ,
불편한 두발 대신 두 팔로 물레질을 해 나갔다.
늙은 도공 삶의 마지막 작업으로는 너무나 처절했으리라.
10수개의 사발을 빗어 가마에 넣고 불을 집힌 후, 그는 쓰려졌고 그리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황한 그들은 숨진 도공의 딸을 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조선 관군에 쫓기던 왜인 무리는 도공의 딸 마저 죽이고 난후,
되돌아가다 그 가마터를 찾아와 보니 가마는 식어 있었다,
그들이 급하게 가마를 열어보니 비파색, 간간히 붉은 색을 띄고, 이슬처럼 유약이 녹아 흘러내린,
노인의 마지막 물레 손길이 선명한 사발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싸들고 다시 제포를 거쳐 일본으로 달아났다 .

   세월이 한참 흘러 이 사발들은 당시 차문화를 즐기던 지배 계층인 다이묘들의 눈에 들게 되고,
이 중 몇개가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상납된다.
히데요시는 그간 사용하던 얇고 화려한 중국다기,은제,금제 다기를 뒤로하고
이 다기에 미치다시피 빠져든다.
그의 휘하 사무라이라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정적과 싸울 결의를 다질때나
정적과의 비장한 전투를 마치고 숙연히 차를 마실때
그들 손에 들린 다완이 주는 감촉과 색감과 모양새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천하 제일의 다완이라고 다들 느꼈으리라.
열광한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다완을 더 구하고자 하였으나
조선 웅천에는 그런 다완이 없었다.
당시 남해안을 따라 도자기 가마와 도공이 있는 지역, 웅천, 하동, 사천외 많은 곳을 뒤졌으나
역시 찾을수 없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성화에 쫓낀 수하들은 조선 도공에게 은밀히 재현해 만들어 주길 부탁한다.
비싼 댓가로 똑같은 다완을 부탁 받은 남해안 몇몇 도공들은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이를 만들어 줄 수 있었지만,
도공의 솜씨에 따라 약간의 차이들은 있었다,
만들어 건내준 다완 외에는 왜인과의 접촉 흔적을 없애고자
약속한 듯이 도공들은 민간에는 팔지 않았으며, 또한 미완성품은 잔 조각으로 깨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내 상상 속에 있는 "이도다완" 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단 1개도 전해 내려오지 않고,
그 다완의 파편이라고 추정되는 작은 조각들만이 발견된다고 상상한다.

일본 사람들이 투박함과 자연스러움의 미, 절제와 겸손과 금욕, 고요의 미를 품은
천하 제일의 다완이라 칭하는 이도다완!,
내 상상 속의 이도다완은 슬픔과 추함의 미, 한의 미까지 품은 조선도자기이다 .

   조선 도공이 구운 이 자기는 조선 백성이 밥과 국을 담으면 막사발이 되고,
삽살개 새끼 앞에 놓이면 개죽 사발이 되고, 부처님 앞에서는 제기 사발이 되고 ,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는 천하 제일 차사발이 되고 ,
일본 국보26호 사발도 된다


그래, 우리들 사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리라!      
단지 놓인 곳이 다르고 ,기회가 다르고, 보는 시선이 다를 뿐 다 같은 사발이겠지요.

바로 위에 제가 쓴 댓글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군요!

'조선 도공이 구운 이 자기는 조선 백성이 밥과 국을 담으면 막사발이 되고,
삽살개 새끼 앞에 놓이면 개죽 사발이 되고, 부처님 앞에서는 제기 사발이 되고 ,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는 천하 제일 차 사발이 되고 ,
일본 국보26호 사발도 된다 '
(펌 5)

   이도다완(井戶茶碗/정호다완)이란
조선에서 사발의 용도로 제작된 자기가 일본으로 전해져 선불교와 연관해 찻그릇으로 사용되며 붙여진 명칭이다.
흔히, '조선막사발'로도 불리는데, '막'이란 수식어는, '대충, 마구,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일본식 한자로는 '거친 황/荒'자로 표기 되기도 한다.

아래의 사진에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도자기를 만드는 태토가 "거칠/荒"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들은 '왕실차원에서 관리하던 관요'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민간 가마인 민요'에서 만든 생활용 도자 식기이다.
그러므로 막사발이란, '관요 자기와 비교해 질적으로 다소 거칠게 만든 민요 자기'인 셈이다. 


  16세기 말엽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차 담당을 맡았던 '센노리큐/千利休'는 선불교 승려였는데,
그의 스승이 추구하던 비물신적인 선종 사상의 영향 아래,
그 이전까지 화려하고 귀족적인 차문화의 대안으로 '와비차/ わび茶'라는 차문화를 육성한다.
'와비차/ わび茶' 의 성격은, '내면 또는 정신중시, 부족함, 진중함, 청순함'을 의미한다고 하며,
와비 / わび란, '수심, 걱정, 한가로운 정취'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선종적 차에 대한 사상 속에서,
귀족적이고 화려한 찻그릇인 천목다완을 대신할 그릇을 물색했으나,
일본 열도 내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납치한 조선도공들이 열도 일본에서 도자기를 제작하기 전까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인 1300도 내외의 온도에서 제작하는 자기 제작기술이 전무했고,
껏해야, '초지로'라는 도공이, 물컵만한 자그마한 크기의 흑유다완류의 라꾸다완/樂茶碗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 12세기 이래 최첨단의 도자 기술을 보유한 조선에서 제작된 사발들을
와비차용 찻 그릇으로 애용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에서 주문 제작하거나 수입해간 조선의 사발을 이도다완이라고 불럿다.


   이도다완의 명칭이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어원에 대한 썰/說이 몇가지 있다.
첫째는, 형태적 유사성에 의한, '속이 깊은 우물처럼/井 그릇의 속이 깊다는 이유때문에 붙여졌다는 설.
둘째, 생산지와 관련해서, 경남의 지명인 위등/韋登이 일본식 발음으로 '이도'라고 발음되는데,
'위등'에서 제작되어 이도란 명칭이 붙여졌다고도 추정.
세째, 인명과 관련해서, 조선사발을 일본에 소개한 이의 이름이 '이도'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네째, 발견처와 관련해서, 우물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이도다완은 비물신적인 선종의 영향을 받은 와비차의 특성과 연관해서 다기로 각광을 받는데,
이러한 다완들은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한가한 정취를 즐기기 위한 생활 용기'이기 보단,
권력 과시용 위세품이었다,
일례로, 이도다완이 전국시대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사무라이에게 격려금조로 하사되었는데,
그게 성 하나와 맞먹는 가치로 주어졌다니,
이는 고급 이도다완의 경우 전국시대 당시에 성의 가격에 준하는 가치가 있었단 말이다.
(이러했으니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도공의 납치에 혈안이 되었을 테고,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사츠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그러니, 이런 고가의 기물로 한가한 정취를 누리기 위한 차의 도구로 사용 되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400여년 전에도 성 한채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고급 이도 다완은
한가하게 명상이나 묵상을 즐기기 위한 '와비차'의 도구이기엔 너무 물신숭배적이다,
성한채를 강남의 고급 아파트 한동으로 비교를 한다면,
수백억대 가격의 찻잔으로 한가하게 차를 마신다는 것과 비슷할거다,

   예전에도 물신숭배적인 최고급 명품이었으니,  
400여년이 흐른 현재, 일본의 다도에서 일반적으로 다완을 감상할때
감상자는 다다미에 무릎을 꿇고(일본인의 일반적인 좌식 습관)상체를 구부려 팔꿈치를 다다미에 댄채,
손에 다기를 잡고, 손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아주 조심스레 감상을 한다.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가 일본의 일반적인 생활 습관이 란것을 이해한다 손쳐도,
고가의 다완을 자칫 떨어뜨려 깨트릴까 하는 염려로,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손목만 돌리면서 다완을 감상하고
그 찻잔으로 차를 마시면 와비차가 내포하는 한가로운 정취를 만끽할 수 있을려나?

   다완이라는 물신숭배에 대한 경구로, 단하소불/ 丹霞燒佛 이라는 고사와, 완물상지라는 성어가 떠오른다.
"단하소불"이라는 고사는 중국 태생의 천연선사가 사찰의 나무로 깍아만든 불상을 쪼개어 장작으로 사용하며,
'목불상은 부처가 아니며, 물질 대상/相에 집착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주장했고,
조선시대, 성리학자/도학자/道學者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에 집착하면 뜻을 잃는다"라는 경구를 마음에 새겨 물신숭배를 경계했다.

   와비차 풍의 다도가 선종에서 비롯되었는데,
차 음용은 참선이라는 묵상의 시간을 통한 깨달음의 방법이며 수단일 뿐이다,
즉, 차는 깨달음을 증폭되게하기 위한 수단으로 깨달음을 매개하는 각성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차의 음용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의 한 방법이며 과정일 뿐인데,
그 과정의 도구(찻잔)에 집착하는 것은 명백한 완물상지/玩物喪志할 가능성이 98프로쯤 될거다,
그러니 고가의 찻잔으로 차를 마시면서 그 뜻을 얻을(득지/得志) 가능성은 몇 프로쯤 될런가?

   일본 열도에 선종의 전파 이후, 불교 유물들이 제작되지 않는다,
이는 선종의 비물신적 성향이 반영된 결과인데,
불교와 관련있는 다완만은 유독 풍성하다는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라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타지역의 종교가 유입되면 토착 종교와 혼합되어 정착되듯이,
다완도 선종과 사무라이문화가 혼융되며, 사무라이라는 집권층의 요구와 욕망이 혼합되어 정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선종의 참선을 위한 한 방법이, 사무라이 문화의 정서에 혼융된 셈이다,
불교 선종의 형식에 사무라이의 내용이 담겨진 셈이다,
그렇다면 일종의 사도불기/仕道佛器인 셈인가?    
이렇게 정리하면 와비차의 완성자 선승 센노리큐가 사무라이 관백 히데요시에게 살해 당한 이유도 이해되고,
다완이 물신숭배적 특성을 지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일반적으로 이도다완의 경우,
형태 자체도 현대의 도자기처럼 완벽한 원형이 아니고, 무늬 또한 비대칭이 특성이다,
그래서, 어느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굴?의 생김이 달라 보인다,
그래서 사진 자료로 올려지는 경우, 가장 좋아보이는 면에서 촬영한 사진을 자료로 올린다,
이는 마치 현대 미술의 조각품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
또한 기면의 자연스러운 문양은 잘그려진 추상회화와 닮은 점이 있다.
다완의 실물은 몇년전,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상설전시품 몇점만 보았었고,
여기에 소개하는 다완은 왭상에 떠도는 대표적인 다완들이기에,
유명한 조각품을 단 한장의 사진으로 보는거랑 비슷할 거다,

아무튼 현재는 문화재로 관리되며 감상의 대상이 된 일본에서 보유중인 이도다완들을
개인적인 취향대로 나열해 보았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일상에서 그저 그냥 배채우는 것으로 먹는 밥먹는 일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멋진 식기, 그릇에 아름답게 담는 음식, 식사예절이겠죠.
한국에서도 다도가 있는데 일본 만큼 형식적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민족성에 관련된 것도 있겠죠?
일본의 정원만 해도 한국 양식과 많이 다르잖아요?
영화 '킬 빌'에 나왔던 일본 정원 생각나세요? 아름다움의 극치...
  지금 막, 아들 데려다주고 오면서 담에는 일본정원을 알아봐야지 했답니다.^^
각 나라와 민족에 따라 특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겠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해주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본이라고해서 깎아내리고, 중국이라고 해서 미리 기죽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도 옛날 얘기죠.
일본사람들이 더 말쑥하고 예절 바르잖아요.
중국사람들 외국에 나와서 하는 행세를 보면 같은 동양사람으로서 챙피할 때 많아요.
백화점 면세 코너에서 구두 벗고 양말 벗고 발가락 만지고 있는 모습 같은 거... ㅎ
파리에 사는 친구 한 명은 그런 얘길 하더군요.
잘 차리고 나가면 일본 사람인 줄 알고
그냥 막 입고 나가면 중국 사람인 줄 안다고요.
한국 사람들은... 그 중간이라고 해야할 지....
다른 얘기지만 중국어 배우는 열품이 점점 더 심해지네요.








                                                                                     
 
[스크랩] [역사] 일본인 얼굴로 변조된 일본 국보 1호 - 원래 한국 작품| ㆍ자유게시판
새하마노 | 조회 825 |추천 6 | 2011.02.19. 16:23

 

 

 

         

한국 (신라 혹은 백제)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한국 국보 83호) 

 

 

 


            

<일본 국보 1호> 일본 고류지(廣隆寺 : 광륭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위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한국 국보 83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양식이 똑 같습니다.

 

일본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만들어져서 일본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정설이라 하겠습니다.



 

'일본 국보 1호' 도 한국의 작품 <- 관련글  

 

 

그런데 두 불상이 얼굴만 좀 다릅니다. 상당히 다릅니다.

 

이는 일본 명치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얼굴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변조되어 그렇다는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변조 전의 원래 미륵상은 더욱 후덕한 얼굴이라 하겠습니다.

 

 

 

 

 

 

 

변조 후의 미륵상 (일본 국보 1호)

 



인위적으로 깎아내어 변조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겠습니다.

 

( 위 사진들은 출처는 아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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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앞에서 감동하는 일은 그만두라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성형수술하다(1편) 
김영조
일본 국보 제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성형수술됐다.     © 이무성

 

 

   우리는 교토, 나라, 오사카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일본인의 자랑인 보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혹시 교토 광륭사(廣隆寺, 고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일본 광륭사 책자에도 어김없이 국보 제1호라고 자랑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이 그에 감탄한다. 



 

일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왼쪽),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김영조



 

   우리는 보았다. 분명히 한국국보 금동상과 일본국보 미륵상의 서로 다른 얼굴을 말이다.

비록 광륭사 영보전 미륵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뇌리 속에서 서로 다른 이 두 불상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우리는 한 자료를 접하곤 깜짝 놀랐다. 이거야말로 “아주 놀라운 소식”이었고,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보고 온 이 미륵상의 얼굴이
개조되었다는 이 자료에 우리는 갑자기 정신이 멍멍해졌다.

우리가 그렇게 감동하고 왔던 그 광륭사의 미륵상 얼굴이 명치시대에 성형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얼굴에 손을 대기 전에 원형의 본을 떠서 도쿄예술대학에 보존했다는

보도듣도 못한 소식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전율했고 한동안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얼굴로 개조된 광륭사 “미륵상”

명치시대라면 벌써 백여년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는

미륵상의 얼굴이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고치기 전에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는데 일본인의 얼굴로 고쳐서 더 일본인에게 사랑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국보의 가치를 손상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본의 미술대학 교수 나가이신이치는 이렇게 미륵상의 성형에 대해 말했다.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인 얼굴로 개조되어 일본인에게 더욱 사랑받게 된 것이 무슨 문제냐는 식의 발언을 그는 서슴지 않는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경우는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나가이 신이치 교수가 일본인 얼굴로 개조됐다며 흡족해한 목보미륵보살반가상 얼굴 부분  ©김영조



   오늘도 교토 광륭사를 찾아가는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은 얼굴을 완전히 갈아치운 미륵상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다.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치민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얼굴을 일본식으로 뜯어 고쳐놓고서도

“국보의 가치를 손상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라는 일본인의 문화의식 수준이다.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성형 사실을 대충 넘긴 국내 학자의 책 

   도쿄대학 출신인 황수영 씨의 《반가사유상》란 책 56쪽에 보면 반가사유상 수리 사실을 사진으로 확인해 놓았다.

그리고 “수리 전의 얼굴 모습 : “우리나라에 있는 금동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의 얼굴과 닮았다.

/ 수리 뒤의 얼굴 모습 : 표면 처리가 말끔해졌으나 얼굴 모습은 수리 전의 인상과 달라져 일본 불상의 얼굴 모습으로 바뀐 느낌이 든다.”라는 아주 간단한 설명이 전부다. 

   일본 학자 신이치의 “고치기 전에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는데 일본인의 얼굴로 고쳐서 더 일본인에게 사랑받게 된 것이다. ”라는 주장을 보면
얼굴이 대폭 성형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황수영 씨의 반가상 수리 설명은 “바뀐 느낌이 든다.”라며 어정쩡하게 넘어가고 있다.
  

《반가사유상, 황수영, 대원사》에 보이는 목조미륵 수리 사진.     ©대원사

 

 


   일본 국보 1호 미륵상 얼굴을 뜯어고치고 현재까지도 “광륭사” 측이 입을 싹 씻는 점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미륵상을 보고 간 수많은 한국인!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륵상은 고대 한반도 장인이 만든 얼굴이 아니다.

일본인에게 사랑받으려고 개조된 인형의 모습이다.  

“수리 전의 얼굴모습은 한국인 모습이었다.”라고 신이치 교수는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투박하지만 순박한 모습의 미륵상이 한국인의 얼굴이다.

날렵한 일본인의 얼굴로 뜯어고쳐 놓은 지금의 미륵상은 인공이 가미된 미륵상이요,

세기적 보물에 손을 댄 파렴치한의 소행이다.

문화유산은 어떠한 경우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며 손상 시에는 가능한 한 원형복구가 이뤄져야 함은 상식이다.  


   광륭사는 미륵상 얼굴을 뜯어고친 것이 두려운 듯 주소나 전화번호도 없이 야스퍼스가 극찬한 글과 일본 국보 제1호란 것만 강조하는 이상한 안내 책자를 팔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누리집에도 소상한 내용을 싣지 않고 있다. 





                        ▲ 광륭사 안내책자 표지(왼쪽), 목조미륵보살반가상(가운데)     © 광륭사




글쓴이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59yoon@hanmail.net)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sol119@empal.com

출처 -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19562§ion=section2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얼굴이 된 미륵상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성형수술하다(2편)
 
김영조

 


   “(광륭사 미륵상)의 얼굴 부분에 손대기 전 형(型)을 떠놓은 것이 도쿄예술대학에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현재의 얼굴과 다르며 한국국립박물관 불상(한국 국보 제83호) 얼굴과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조선풍이었던 얼굴을 명치 수리 시에 일본풍의 얼굴 다시 말해 일본인이 좋아하는 얼굴로 고쳐 놓아 버린 것이다. ”
 
“像の頭部を型をとったものが東京の芸大に保存されている。これをみると現在の像の顔と異なっており、韓国国立博物館の像の顔に近い容相を示しているのである。つまり 朝鮮風であった顔を明治の修理のさい、日本風の顔、さらにいえば日本人好みの顔になおしてしまった。

<아스카불에 보는 일본과 조선> 116-117쪽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이하, 미륵상)의 얼굴이 수리되었으며

그것도 수리 전과 수리 후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말을 한 사람은 일본 미술사학자 나가이 신이치 교수이다.
 
   고대 조선인이 만든 일본 국보 제1호 미륵상은 오래전부터 여러 논쟁 속에 휘말려 왔다.

《일본서기》등 역사적 문헌은 “신라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하여 이 불상이 신라인의 작품임을 증언하고 있지만

이를 두고 일본 쪽 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계속 하면서

이 미륵상은 고대조선인이 만든 것이 아님을 필사적으로 연구(?)해 왔다.



1) 누가 만들었나?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


 

   이 미륵상은 일본서기에 신라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했으므로 한국산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본 학자들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다만, 만든 나라가 신라냐 백제냐에는 이견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홍윤기 교수의 “홍윤기의 역사기행<79>교토 고류지” 글을 인용해서 정리해본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현존하는 미륵상의 양식은 신라계의 것이며, 신라에서 보내준 불상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그 밖에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 교수, 미스자와 스미오(水澤澄夫) 교수, 미즈노 세이치(水野淸一) 교수 등은

"적송 미륵상은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며, 한국 국보 제83호인 금동반가상과 똑같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불상이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주장도 있음을 홍윤기 교수는 소개하고 있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와 도쿄교육대학 미술사학과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교수는 공저에서

"미륵상은 광륭사 사찰 기록에 따르면 스이코왕(592∼628) 11년(603년)에 백제에서 보냈다.”라고 한다.

또한, 고니시 아키오(小西秋雄)도 미륵상은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미륵상을 둘러싼 논쟁 중의 하나인 신라산이냐 백제산이냐는 학자마다 주장하는 바가 팽팽히 맞서 좀 더 시간이 걸려야 정리될지 모른다.

다만, 아직도 일부 학자들이 일본산이라고 억지스런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 미륵상은 신라 또는 백제 중 한 나라에서 건너간 불상이며 만든 곳이 한반도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여기서 재미난 사실 하나를 소개하겠다.

미륵상의 얼굴 개조 사실을 밝힌 미술사학자 신이치 교수의 경우이다.
 
   이 사람은 1976년 <역사공론>6월호 <아스카불에 보이는 일본과 조선>에서 말하기를

“미륵상은 조선인이 조선 땅에서 만들어 가지고 왔다기보다는

조선인 1세대쯤 되는 사람이 일본 땅에 와서 일본 재료인 적송으로 만든 것 같다.”라고 했다가

30년이 지난 2006년 7월 ≪일본·아시아 미술 탐색≫에서는 많이 누그러진 자세로

“조선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끝을 흐리고 있다.





   일본에는 고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많은 불상과 문화유산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감추거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이유를 달아 “일본 것”으로 둔갑시키고자 하는 일부 학자가 있다.

또 그들은 어정쩡한 표현으로 말 돌리기도 예사로 한다.

가령 “이 미륵상은 신라 불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라서...”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이런 말꼬리 흐리기 작전에 넘어가면 안 된다.



2) 재질이 무엇이냐? 적송(아까마츠)이냐? 녹나무(구스노키)냐?
 

   그간 일부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 미륵상”을 일본인이 만든 것으로 둔갑시키려고

상당한 논문을 쏟아냈다. 신이치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광륭사 미륵상을 만든 사람이 고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불상 재료이다.
 
   1951년 고하라 지로(小原次郞) 교수가 발표한 한 편의 논문은 종래의 일본제작설을 일시에 잠재웠다.

그는 “上代조각 재료 사적고찰” <불교예술 13호. 1951년, 일본>이란 논문에서

7, 8세기 일본 불상들은 “녹나무”인데 비해

미륵상의 재질은 “적송이다.”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700여 불상의 나무 재질을 연구한 사람으로 이 분야에서는 최고 권위자이다.
 
   정리해보면 “일본에서는 불상 재료로 적송이 안 쓰인다.”가 중요한 결론이다.

고하라 교수 자신은 한국에 두 번이나 방문하여 한국의 소나무 재료를 연구한 결과

이런 결론에 확신을 했다면서 이 책에서 “적송=조선” 등식을 확인해주고 있다.

   미륵상은 일본인 얼굴로 바뀌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신이치는 그의 논문에서 미륵상 얼굴 수리 이야기를 비교적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미륵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얼굴이 개조되어 기쁘다.”를 말하고자 함이었다.

 
신이치는 <아스카불에 보이는 일본과 조선>이란 논문에서 미륵상이 원만히 수리되었으며 아주 흡족하다고 했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불상 얼굴 개조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일본 국보 제1호 미륵상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명치시기에 얼굴 수리를 했다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얼굴로 바뀌었다.

 

   이런 신이치의 주장을 보면 광륭사 미륵상은 얼굴이 성형 수술된 것이 분명하며,

그것도 한국인의 얼굴에서 일본인의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다음 사진을 한번 보자.


 


   위 사진은 미의 비밀《美の秘密…二つの弥勒菩薩像》이라는 책에 나오는 수리 전의 미륵상 모습이다.

사진으로 볼 때 얼굴 모습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뺨 부분도 도톰한 게 역력한 한국인의 모습이다.

 
   이 미륵상에 대한 복원이야기를 다룬 책이 《美の秘密…二つの弥勒菩薩像》이다.

이 책은 1977년 2월 11일 NHK 교양 특집 <미의 비밀>의 하나로 다룬 내용이다.


   왼쪽 사진 속 미륵상 얼굴 앞에서 100여 년 만에 얼굴수리를 재현해 보이는 사람은 도쿄예술대학 교수 니시무라 코쵸(西村公朝)다.

 
신이치는 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명치시대에 이 상(불)은 수리되었으나

그때 수리에 손을 대기 전에 두부(얼굴포함 머리)의 형(型)을 떠놓은 것이 도쿄예술대학에 보존되어있다.

 

(明治時代にこの像は修理されたがそのとき修理の手をくだす前に像の頭部を型にとったものが東京の芸大に保存されている。) 
 


글쓴이
이윤옥 (
59yoon@hanmail.net)(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김영조 (
sol119@empal.com)(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출처 -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20346§ion=section2§ion2=문화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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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일본 국보 1호 | 미륵삼부경
혜윰 | 조회 300 |추천 0 | 2015.05.15. 22:14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높이 123.5cm   

일본 국보 제1호

교토의 고류사(광륭사, 廣隆寺) 소장

 

 















======================================================================================  

 

일본 국보 1호와 신라불상

 

   1980년대 초 일본 교토대 예술학부 학생이 교토 고찰 고류지(廣隆寺)에서 국보 1호 '보관(寶冠)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고류사 [廣隆寺(광륭사)] 일본 교토부[京都府] 남부 교토에 있는 절이다.

신라에서 건너온 하다노 가와가츠[秦河勝]가 창건하였다고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쇼토쿠[聖德] 태자가 '나는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이 불상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하다노 가와가츠가 자진하였으며, 고류사의 전신인 봉강사(蜂岡寺)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똑같이 생긴 일본 국보 제1호인 미륵보살상이 있는데, 이 불상을 만든 재료가 국내에서 나는 적송임이 밝혀지면서 한반도의 장인이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이곳에는 우는 아이의 모습 같아 '우는상투미륵상'으로 불리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이는 616년에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


 

 ▲ 고류사(廣隆寺) 전경 


 

 



   그는 감정을 주체 못한 채 대좌(臺座)로 뛰쳐 올라가 불상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목조 불상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졌고 그는 부러진 손가락을 주워 도망쳤다.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많은 이들이 법회에 나가거나 신사를 참배하며 손가락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반가상을 연모했던 범인은 며칠 뒤 손가락을 들고 자수했다.

'접합수술'로 복원하기 앞서 부러진 손가락을 정밀 조사하면서 재질이 밝혀졌다.

한국 봉화·영주에서 자라는 적송(赤松), 춘양목이었다.

이후 반가상은 신라 작품이라는 게 학계 다수설이 됐다.

고류지를 지은 신라계 호족 진하승(秦何勝)이 병으로 누운 여왕을 위해 신라에 반가상을 주문했다는 기록도 일본서기 등에 올라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교토의 반가상을 보고 "지상 모든 속박을 초월해 도달한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가 한국 국보 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봤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두 불상은 빼닮았다.

세 개의 산처럼 솟은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반가부좌(半跏)로 연꽃 좌대에 앉아 오른 손끝을 뺨에 댄 채 사유(思惟)에 빠져 있다.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불상)

   왼쪽 다리를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 자세로 왼손은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채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보살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6~7세기), 높이 21cm 원래 이 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조각에 나타나며, 불좌상의 양협시상에서 점차 단독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는 5세기 후반 윈강[雲岡] 석굴에서 이미 나타나지만 6세기 후반 북제시대에 가장 성행했으며, 명문을 통해 주로 태자사유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모니 이후에 나타날 미륵불이 지금 미륵보살로서 태자사유형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상이며, 신라에서는 화랑을 미륵과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彌勒菩薩半跏像)이라고 불렀다.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당시의 신앙경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비롯하여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아스카[飛鳥] 시대와 하쿠호[白鳳] 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고우류 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의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점이나 당시 삼국과 일본 간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





▲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




 

▲ 일본국보1호(교토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        ▲ 일본 국보 제1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교토대 학생부터 야스퍼스까지 세계인을 매료시킨 교토 반가상의 미소는 이미 우리 국보 78호 또하나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 깃들어 있다.

 

야스퍼스 (독일 철학자) 1883. 2. 23 독일 올덴부르크~1969. 2. 26 스위스 바젤.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실존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인간의 자기 실존에 대한 직접적 관심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했다. 후기 저작에서는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몰락에 대응하여 사고의 새로운 통일을 모색했으며 이 통일을 세계철학이라고 불렀다.




 ▲ 철학자 야스퍼스



   "슬픈 얼굴인가 하면 그리 슬픈 것 같지 않고, 미소 짓고 계신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 무어라 형언할 수 없게 거룩하다"(최순우).

입가에 엷게 걸린 우미(優美)하고 오묘한 미소는 숭고한 자비로움 그 자체다.

립중앙박물이 그제 개막한 통일신라조각전에 도쿄 국립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이 8세기 신라 불상 4점을 보내왔다.

20㎝가 채 안 되지만 전문가들이 '감상의 로망'이라 감탄하는 정교함과 생명력, 기품이 넘쳐난다.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른쪽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뺀 금동관음보살입상은 관능적 아름다움마저 발한다.

이 불상들은 내년 3월 1일까지 전시되다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제 때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빼내간 문화재 1000여 점 중 극히 일부라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힌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cafe.daum.net/hyunboo00/VZLO/22  제라울|광룡원







       한국 국보 83호와 일본 국보 1호| 관문성
환경사랑 | 조회 39 |추천 0 | 2011.10.01. 22:52

  

   일본의 반가사유상이 백제유래인지 신라유래인지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입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79>교토 교류지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제1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국의 미소’가 살아있는 우리의 고대 불상 앞에 유럽인들이 몰려들어 찬사를 연발하고 있다고 한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중심가의 보자르 예술센터에서는 10월9일부터 ‘한국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부처의 미소―1600년 한국 불교예술’이라는 주제로 ‘한국 불교미술 특별전’이 내년 2월까지 이어진다. 우리 불교 미술품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것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하 ‘금동반가상’,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바로 이 한국의 ‘금동반가상’과 빼닮은 쌍둥이격 불상이 일본에도 있다.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교토시 우즈마사 지역)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인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하 ‘보관반가상’)이 그것이다. 이 두 불상은 생김새가 서로 거의 똑같거니와 각기 머리에는 모자인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금동반가상’은 몸체를 청동(靑銅)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금동’ 불상인 데 비해 일본 고류지의 영보전(靈寶殿)에 있는 ‘보관반가상’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소나무 조각상이다. 일본문화재위원회는 1951년 6월 9일, 이 ‘보관반가상’을 일본 국보 제1호로 정했다.

리쓰메이칸대학 사학과 하야시야 다쓰사브로(林屋辰三郞) 교수는 “고류지에서는 국보 제1호 보관반가상 덕분에 재정이 생겨 먹고살게 됐다”(‘京都’ 1962)고 할 정도로 이 사찰의 주된 수입원이 되고 있다. 현재도 보관반가상을 구경하려면 5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일본 고류지 영보전의 ‘보계반가상’


   적송으로 만든 보관반가상은 고대 한국에서 왜나라에 보내줬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 보관반가상이 고대 신라와 백제 중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의 많은 학자는 “신라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그러나 신라가 아닌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저명 학자들도 있다. 필자는 그간 수집해온 역사 연구 사료들을 가지고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우선 신라 도래설이다. 미술사학자 미스자와 스미오(水澤澄夫) 교수는 다음처럼 지적했다. “서기 603년에 아스카의 왜 왕실에서 쇼토쿠태자에게서 보관반가상을 모셔다 교토 고류지를 처음 세운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 6∼7C)는 신라계 사람이다. 고류지의 미륵상이 신라 양식이라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수긍이 간다”(‘廣隆寺’ 1975)고 했다. 미술사학자 미즈노 세이치(水野淸一) 교수도 “적송 보관반가상은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며, 서울의 덕수궁미술관(일제 치하, 현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필자 주)에 있는 금동반가상(90㎝)과 똑같다”(‘法隆寺’ 1978)고 밝혔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고류지의 적송 보관반가상은 신라 불상이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현존하는 미륵반가상의 양식은 신라계의 것이라고 하며, 신라에서 보내준 불상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歸化人’ 1965)고 했다.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 교수 역시 ‘하타씨 연구’(秦氏の硏究, 1976)에서 신라 불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종래의 신라 도래설에 대해 신라가 아닌 백제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백제 도래설도 아울러 살펴본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와 도쿄교육대학 미술사학과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 교수는 공저에서 “보관 미륵보살 반가상(높이 84.3㎝)은 고류지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스이코천황(推古, 592∼628 재위) 11년(603년)에 백제에서 헌상(獻上)했다고 한다. 하타노카와카쓰는 이 불상을 쇼토쿠태자로부터 물려받아 이 절(고류지)의 전신(前身)인 하치오카데라(蜂岡寺)를 지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실제 제작은 7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되나, 그 양식은 한반도에서 전래한 것으로서, 지난날 경성(일제 하의 서울, 필자 주)의 이왕가박물관(당시 서울시청 앞 덕수궁미술관, 필자 주)에 있었던 청동제의 반가상을 극히 닮고 있다”(‘國寶·重要文化財案內’ 1963)고 했다. 



◇두 체의 한국 고대 미륵상을 보유한 일본 고류지 영보전



   이처럼 오타 히로타로와 마치다 고이치 교수는 현재 일본 국보 제1호인 적송 보관반가상은 고류지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서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렇게 밝히면서도, 이 글의 뒷부분에 가서는 슬며시 백제가 아닌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는 등 앞뒤가 맞지 않게 매듭을 지었다. 요컨대 중요한 사실은 고류지의 역사 책에 ‘백제에서 헌상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고류지에 전해오는 역사 책은 아마도 ‘고류지연기’(廣隆寺緣起)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사찰에서는 필자가 지난날부터 누차 ‘고류지연기’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고 있다.


   역시 백제 도래설을 주장하는 고니시 아키오(小西秋雄)씨도 보관반가상은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류지에는 귀화인의 자손 하타노카와카쓰가 조선에서 건너온 불상을 쇼토쿠태자에게서 물려받아 603년에 고류지를 세웠다. 이곳 영보전에는 유명한 반가상 두 체가 있다. 그중의 보관반가상은 적송을 재료로 만든 반가상으로서 백제 말기에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전래한 불상이라는 게 거의 확정적이다”(‘廣隆寺の彌勒菩薩’ 1962)고 했다.


   고니시 아키오씨가 밝힌 것처럼 고류지의 영보전에는 또 한 체의 일본 국보인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의 ‘보계반가상’도 모셔 있다. 이 보계 반가상에 대해 오타 히로타로 교수와 마치다 고이치 교수는 신라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즉 ‘보계반가상’(불상 높이 66.4㎝, 녹나무 한 둥치로 조각함)은 앞의 상과 똑같은 형식의 것으로서, ‘사전(寺傳)’에서는 신라에서 헌상했다고 한다. 보계를 드높게 틀어올렸기 때문에 머리에 관을 쓰지 못한 데서 앞의 상과 구별하여 ‘보계미륵’ 또는 그 용모로서 ‘우는 미륵’(泣き彌勒)으로 속칭하고 있다. 천의(天衣)는 가죽제로서 특이한 예이다”고 했다.

고니시 아키오씨 역시 다음처럼 보계반가상의 신라 도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우는 불상’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보계 미륵보살 반가상’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듯이, 스이코 31년(623) 신라에서 대사인 나말지선이(奈末智洗爾)를 일본에 보내와 헌상했다고 하는 불상으로 이 불상의 재료는 녹나무이다.”


   이처럼 고대 한국에서 전래한 반가상은 만든 곳이 각기 백제와 신라로 상반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13세기 후반에 일왕이 직접 썼다는 다음과 같은 역사 기록이다. 616년인 “스이코여왕 24년 5월3일, 여왕이 병환으로 쓰러지자 쇼토쿠태자는 여러 곳에 가람을 세우도록 서원(誓願)하였으며, 성체(聖體)와 똑같은 불상을 소원하자 그해 7월에 신라왕(진평왕, 필자 주)이 금불상을 보내주었다. 높이 2척이며 하치오카데라에 안치했다”(今上皇帝 ‘一代要記’ 1278∼1287)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서기 616년 7월에 신라왕이 보내주었다고 하는 ‘금불상’은 고류지 영보전에 있는 일본 국보가 된 두 체의 고대 한국 반가상(금불상)들 중에서 어느 쪽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찍이 저명한 불교미술 사학자 미나모토 도요무네(源豊宗) 교수도 두 반가상에 관해 일제 말기에 쓴 저서에서 국적은 지정하지 않은 채, “두 미륵상(보관반가상 및 보계반가상)은 스이코 시대(592∼628)에 조선에서 건너온 나무 조각상이다”(‘古美術見學’ 1944)라고만 단정했다. 금불상이라는 것은 나무 불상에다 도금한 것을 금동불상으로 오해했던 것.

문헌 제시를 마다하는 현재의 고류지에서는 두 반가상의 국적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고류지에서 직접 편집해서 팔고 있는 책자(‘廣隆寺’ 제작 便利堂. 발행연도의 표시도 안 함, 500엔으로 판매 중)에서는 ‘보관반가상’에 대해서는 국적 표시 없이 그저 ‘국보1호’만 크게 내세우고 있다. 반면에 ‘보계반가상’에 관해서만은 사진(14×23㎝)과 함께 “백제에서 갖다 바쳤다”고 다음처럼 쓰고 있다.

   “(국보)―백제국에서 온 공헌불(貢獻佛)로서, 앞의 미륵상(국보 제1호 보관반가상, 필자 주)과 똑같은 아스카시대(592∼628, 필자 주)에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불상은 눈이 크고 가늘고 길게 덮이는 눈이며, 입술을 당기고 있어서 울상처럼 보여 ‘우는 미륵’으로도 불린다.

이 불상도 또한 손발과 의상 등의 조법(彫法)이 뛰어나며 안정감 넘치는 빼어난 기교를 보이고 균제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자에서 국보 제1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적송 보관반가상은 책 전면의 큰 사진(18×23㎝)을 내고, 일본의 ‘국보 1호’라는 것만 자랑할 뿐이다. 어떤 이유인지 이 적송 보관반가상이 백제나 신라 그 어느 쪽에서 건너왔다는 출처에 관한 언급은 없다.


   두 반가상의 국적에 관한 기록이 엄연히 고류지 역사책에 있는데도 요즘 고류지에서 직접 편집해서 팔고 있는 책자에서는 적송 보관반가상에 대해서만은 전혀 백제나 신라 등 국적 표시 없이 그저 ‘국보 1호’만 크게 내세우고 있다. 오타 히로타로 교수 등이 “보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사전’(寺傳)에서 신라에서 헌상했다고 한다”고 했으나, 현재의 고류지 발행 책자에서는 “백제국의 공헌불”이라고 내세우니 옛날 ‘고류지연기’라는 사전을 사찰 관계자가 잘못 읽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모든 일본 학자들이 두 불상은 각기 한반도에서 보내왔다는데 어째서 적송 ‘보관반가상’에 대해 ‘국보 제1호’만 내세우며 백제나 신라 도래 표시는 뒷전으로 미루고 있는지 차제에 고류지 관계자들에게 굳이 묻고 싶다.

하기는 일본의 저명한 교토 향토사학자 다나카 시게히사(田中重久)씨가 그의 저서(‘彌勒菩薩の指’ 1960)에서 고류지는 “조선인의 절, 우즈마사의 고류지”라고 지적하면서, “조선의 불상이 분명한 것까지도 아스카시대에 만든 것이 돼버리고 만다”고 비판할 정도이기도 하다. 독일의 신칸트파 철학자였던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t, 1848∼1915)는 “역사는 과학이다”라고 주창했다. 역사의 고증은 결코 누구도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일본 국보1호| 좋은글&시&동영상&수필
솔나리(순선) | 조회 63 |추천 0 | 2008.12.15. 21:33

  

    광륭사에 있는 일본국보 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은  사진촬영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어디서 퍼온 사진 올림.(광륭사와 미륵반가사유상)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id=sung7208&bno=19552&nid=11286 

 


우리나라의 국보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너무나도 흡사한 불상. 일본의 한 대학생이

그  아름다움에 취해 껴안으려다 손가락이 부러지고, 복원과정에서 재질이 그 당시의 일본에서는

서식하지 않던 우리나라 적송으로 밝혀져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건너간 것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함.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은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크지 않았음.




                              

                       고류지(廣陸寺)의 목조반가사유상                     백제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출처] 일본국보1호에 대해서 ([예표건0801]Story of 1team) 

 우리의 선조들이 일본의 국보 1호 미륵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고대사와 한반도 침략을 숨기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코오류사 앞에 설명이 되어있는 돌비석의 일부분을 마모시키고 있는 역사 왜곡의 현장이 눈에 띄었다 함.

지금의 일본은 국보에 대하여 숫자를 지칭하지 아니한다고 함. 즉 국보면 모두가 가치가 있는 것인데 1호, 2호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따라서 지금은 미륵보살반사사유상은 일본의 국보1호라고 안하고 그냥 국보라 함.  국보 1호가 우리선조에 의한 것이 분명하니 자존심 상한 것이라고 예측함. 그러나 일본의 옛 서적에는 아직도 국보 1호라 되어있다 함. 

  이번 여행에서 법륭사, 동대사, 광륭사   3군데의 절을 보았는데 이름외기 힘드네.

다음은 법륭사와 법륭사에 있는 5층목탑 

 






일본의 국보 제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 유적,사적,절
김만성 2015.09.29 15:43

일본의 국보 제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 한성백제박물관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제1호는 높이 123.5센티미터의 목조 신라 불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이는 교토의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에 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의 한 사람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한국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우지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고류우지(광륭사)의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목조 불상이 바로

상투미륵상 또는 우는 미륵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 사학자인 다무라 엔초

교수는 그의 저서 『쇼토쿠 태자』에서 고류우지의 두 국보 목조 불상이 신라에서 보내온 것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쇼토쿠 태자는 신라에서 보내준 미륵상 1구를 진하승에게 주었다. 진하승은 이 불상을 모시고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고류우지이다.(국보 제1호에 대한 이야기임) 또한 616년 7월에는 신라에서

사자를 파견하면서 불상을 보내주었다. 이 불상 1구도 고류우지에 지금 있는 소형의 미륵상(우는 상투 미륵)

일 것이다."


고류우지에 있는 2구의 국보 불상 즉,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상투미륵상이 신라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옛 문헌이나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밝혀져 있으나, 고류우지에는 그런 확실한 설명이 없는 실정이다.




* 이상 인터넷에서 찾은 글

2015.09.29 | 블로그 > Daum블로그  blog.daum.net/bbb114/18353142









사진 자료 :
  2010.02.22 | 카페 > Daum카페  cafe.daum.net/koreafishland/3jur/245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진
 

국보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직접 찍은 사진)



일본의 국보 1호(목조 미륵반가사유상)


사진 자료 :

2015.03.13 | 카페 > Daum카페  cafe.daum.net/jeobsan/Fy5z/3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