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김정희의 불이선란도(글과 그림의 혼융의 예술혼)| 茶이야기
디피카 | 조회 53 |추천 0 | 2007.08.30. 11:58
| 글과 그림의 경계를 해체하는 書體 …混融의 극치 속에 살아나는 예술혼 | 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5)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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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가운데 한국 역사상 추사체만큼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도 드물다. 설문조사 결과 한국의 미술사가들은 모두 추사의 작품을 ‘최고의 글씨’로 꼽았다. 그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詩·書·畵의 일체를 보여주며 초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글씨체를 혼융해내는 것에서 그 탁월함을 능히 알 수 있는데, 서예전공자인 이동국 씨가 이를 중심으로 추사체의 미덕을 살펴보았다. /편집자주
고도의 理念美를 전적으로 筆劃과 墨色으로 창설한 이로 추사(1786~1856)가 꼽히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최고 완숙미를 갖춘 작품이다. 혹자는 ‘세한도’를 앞세우기도 하지만 詩·書·畵의 혼융을 三絶로 완전히 보여준 ‘불이선란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불이선란도’는 추사체가 완전히 농익어 소위 碑學⑴과 帖學⑵의 성과가 혼융·완성되는 말년의 작품이자 서예적 추상성과 불교적 초월성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선 작품의 구성을 보자. ‘불이선란도’는 이름 때문에 습관적으로 난초에 눈이 가게 되지만 글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 뿌리의 난화를 둘러싸고 한수의 題詩와 세 종류의 跋文, 自號와 다양한 印文의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난을 먼저 그린 후 제발을 했는데, 순서에 유의해서 봐야 그 내용적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있다(표2 참조).
그런데 알고보면 시·서·화·각 등 다분히 이질적인 요소들이 主從의 관계없이 난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조화로운 화면경영에는 그림과 글씨를 넘나드는 추사의 필법이 숨어있다. 이는 추사자신이 高踏을 추구하는 隱逸處士로서의 자부심을 표출한 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데, ‘草隸와 기이한 글자 쓰는 법⑶으로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 사실 ‘초예기자지법’은 문인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동기창(1555~1636)으로부터 확인되지만, 추사처럼 蘭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형상을 극단적으로 관념화 해 점과 획으로 해체시킨 이는 드물다.
그림과 글씨영역에 따라 극도로 절제된 먹의 농담, 方圓의 필이 혼융되며 구사된 난의 줄기나 글씨의 획은 이미 둘이 아니라 ‘초예기자지법’ 한가지일 뿐이다. 나아가 점획의 太細나 長短 등 서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조형요소가 그림과 글씨에 조화롭게 하나로 적용되는 데서 ‘불이선란도’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奇怪와 古拙로 다가온다.
특히 <표1>의 1열과 2열의 ‘天’·‘達’·‘俊’·‘筆’ 과 같이 각종 획이 축약되거나 ‘有’·‘客’·‘蘭’·‘摩’와 같이 극도로 길게 강조되면서 이런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題詩의 章法을 봐도 <표2> ①-1의 첫 행에서 보듯 ‘不’와 ‘作’, ‘蘭’과 ‘花’의 大小대비나 예서와 행서·초서 등 서로 다른 서체의 운용을 통해 극단적인 변화 속에서도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표1>의 3열에서 보이는 ‘放’·‘筆’·‘可’·‘有’등과 같이 급기야는 필획마저도 뭉뚱그려지고 해체되면서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없애기까지 한다. 난의 잎 또한 50세 전후 완성된 ‘난맹첩’⑷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엄격한 비수와 三轉의 묘미⑸와, 더불어 통상적인 鳳眼이나 象眼도 생략되거나 무시되면서 그저 점획으로 해체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와 고졸의 미가 唐楷의 正法을 토대로 西漢 예서의 고졸함을 획득한 秋史體의 완성지점과 그대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즉, 추사체의 미감은 단순히 글씨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奇하고 怪함 또한 바름(正)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이선란도’의 진정한 가치는 몇 줄기의 극도로 절제된 필선으로 글씨 쓰듯 그림을 그린 것에만 있지 않다. 요컨대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던 것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난 주위의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⑹ 넘치는 필체로 쓴 제시나 발문, ‘仙客老人’·‘曼香’과 같은 自號나 ‘樂文天下士’·‘金正喜印’·‘古硯齋’ 등의 인문이 가득해 오히려 시문과 글씨가 주가 된다. 사실 그림은 속성상 자연물의 외형적 묘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추사는 畵題를 통해 난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심회를 드러내고 있다.
“난을 치지 않은지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려 냈구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 경지가 바로 유마 불이선일세”(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이 화제를 통해 우린 추사가 난초 그림의 畵意를 ‘불이선’에 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시를 통해 제시된 ‘불이선’의 화두는 초예와 기자의 글씨·그림으로 현현된다. 이러한 ‘不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維摩詰所說經’⑺의 入不二法門品에 나온다. 유마가 “절대 평등한 경지에 대해 어떻게 대립을 떠나야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문수가 답하기를 “모든 것에 있어 말도 없고, 설할 것도 없고, 나타낼 것도, 인식할 것도 없으니 일체의 문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 즉 不二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하고선, 다시 어떻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이 때의 상황을 유마경에선 “유마는 오직 침묵하여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모든 행동이나 언어의 표현은 신발 위에서 가려움을 긁는 것과 같아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나 도달하지는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유가의 性이나 敬과도 통한다. 추사는 그런 경지를 한 포기의 난을 치며, 제시와 글씨를 통해 생각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추사의 문인예술가로서 위치와 미덕은 한마디로 ‘혼융’, 즉 관념과 사실, 법도와 일탈, 유·불, 시서화, 서법과 화법, 碑派와 帖派를 아우르는-데에 있다. 추사체가 전대 글씨와 차별성을 갖는 이유도 혼융의 미에서 발견된다. 조선의 이용, 한호, 이광사는 비록 중국의 조맹부나 미불, 동기창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왕희지를 글씨의 궁극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추사는 여기서 나아가 글씨의 이상을 王法 이전의 서한 예서에서 찾고 있다. 서예미학적 관점에서도 그 기저는 다같이 5백년 조선유학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초기 왕조 개창기의 화려함, 중기 도학시대의 엄정함, 후기 실학시대의 개성적인 아름다움 위에 추사는 엄정함과 개성이 禪氣 가득한 기괴와 고졸과 하나 되는 지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동주선생은 완당에 대해 ‘청조취미가 淸人의 작품도 脫態하여 자기의 것을 만드는 특유한 소질을 가졌고, 고관대작과 더불어 문인, 묵객, 역관, 釋家에 까지 문인화의 새 바람을 집어넣고 심지어 직업화가에 까지 문인풍을 흉내내게 하는 완당바람을 만들었지만, 이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 뻗고 자라날 그림의 꽃나무들을 모진 바람으로 꺾어 버린 것 같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는 ‘완당바람’이 진경산수화 등 사실주의 화풍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필자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유는 이미 겸재와 단원에 의해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절정에 다다랐으며, 추사에 의해 마지막으로 문인화가 완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사는 유·불을 넘나들며 글씨와 그림을 하나 되게 하며 그림의 지평을 글씨로 까지 제대로 넓혔던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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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비각碑刻을 숭상하는 서파.탁본의 진위와 내용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첩학帖學과 상대적인 개념이다.이 개념은 청대 학자 완원이 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을 제기하면서 등장했다.
- 법첩法帖을 연구하는 중국 서도의 한파로,비학과 상대적인 개념이다.서적의 진위와 글월의 내용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며,중국청대의 가경,도광,연간이전에는 서법에서 법첩을 숭상하였다. 완원이 남북서파론을 제기한 이후 첩학은 남파,비학은 북파로 분류되었다.
- 조선말기 김정희의 <불이선란도>에 쓰인 구절의 한부분으로 여기서 기자는 문자의 육체(고문,기자,전서,예서,교서,충서)중의 하나로 고문과 비슷하지만 그것과 다른 형태를 띤다.
- 김정희 작품으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이 화첩은 상하 2권에 10폭과 6폭씩 자가난법으로 그려낸 대표작을 장첩하고,난 그림의 유래와 난을 잘 치던 명가들을 소개하는 글을 함께 실었다.난맹첩이라는 이름은 난을 치는 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맹서의 의미와 마음을 같이한다는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있다.
- 묵란화 운필법의 하나로,난엽을 칠때 붓을 세번 눌렀다 떼면서 선에 변화를 주는 기법을 말한다. 김정희는 이 기법을 가장 중요시하였고,이는 그의 문하에서 활약한 조선 말기 묵란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 문인화의 중요한 가치이론,독서와 학문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것으로 인품을 바탕으로 하며,독서를 통해'서권기'를 획득할수 있다는 점에서 문인화론과 관련이 깊다.그리고 서권기의 반대항목이 무지나 무식이 아니라 시속,혹은 속이라는 점에서 탈속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 구라마습이 번역한 대승불교 경전으로, 총 3권 15품이다.[유마경]의 많은 한역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었으며 대승불교의 재가주의를 천명하는 경전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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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작란도
동의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다른 표기 언어 不作蘭圖
요약 테이블
시대 | 조선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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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 김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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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표시기 | 1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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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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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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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세로 54.9㎝, 가로 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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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책수 | 1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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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 종이 바탕에 수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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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자 | 손창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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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예술·체육/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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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전승 | 손창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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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도 / 김정희 김정희, 〈불이선란도〉, 종이에 수묵, 54.9×30.6㎝, 개인소장. 조선말기 문인화가 김정희의 대표적인 묵란도이다. ‘불이선란도’라는 제목은 그림 위의 왼쪽에서 시작되는 김정희의 글에서 따 온 것이다. 이 그림은 서예를 쓰는 필법으로 난을 그려야 한다는 김정희의 묵란도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담묵으로 그린 난초는 연약한 듯하면서도 획의 구부러짐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또한 진한 먹으로 쓰여진 글씨들은 여백을 꽉 채우면서도 그림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설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54.9㎝, 가로 30.6㎝이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으며, 김정희의 묵란도(墨蘭圖)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라고도 불린다.
내용
이 그림에 붙여진 ‘부작란도(不作蘭圖)’ 혹은 ‘불이선란도’라는 제목은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줄을 바꾸며 써내려 간 쓴 김정희의 제시(題詩)에서 연유한다.
“난초 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의 하늘을 그려 냈다. 문을 닫고 마음 깊은 곳을 찾아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라 썼다. 또 조금 작은 글씨로 “만일에 누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역시 또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살던 유마힐의 무언(無言)으로 거절하겠다.”라는 글이 추사체(秋史體)로 적혀 있다.
이 시와 글은 석가모니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인도의 현인(賢人) 유마힐과 보살들 간의 대화를 기록한 『유마힐경(維摩詰經)』 중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서 따온 것이다. 즉 선(禪)을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하는 보살에게 오직 침묵으로 대항하여 ‘둘이 될 수 없는 선(不二禪)’의 참뜻을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정희는 오랜만에 그린 난초를 ‘성중천(性中天)’이라 하고 이를 다시 ‘불이선’에 비유하고 있다. 또 한 번 크게 꺾인 길다란 난초 잎의 오른쪽에는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의 이상한 글씨체로 (난을)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이해하고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라고 썼다. 김정희 자신이 그의 화란법(畵蘭法)에서 늘 주장해 온 것처럼 예서와 초서로 난을 그렸다고 밝힌 것이다. 과연 이 그림의 난초는 언뜻 보면 잘 그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추사체의 글씨를 특징짓는 기괴(奇怪)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화면의 제일 왼쪽에는 “처음에는 달준(達俊)을 위하여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단지 하나는 있을 수 있으나 둘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오소산(吳小山)이 보고는 빼앗듯이 가져가니 우습다.”라고 쓰여 있다.
이 글을 통하여 김정희는 사람들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주고, 그 친구들은 그의 깊은 마음속의 표현인 난초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지기(知己) 사이나 작화(作畵) 태도는 북송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중국 사대부 화가들의 전형적인 이상세계를 상기시켜 준다.
난초는 담묵(淡墨)으로 힘없이 그려져 이제 곧 시들어 버릴 듯하다. 더구나 여백을 꽉 채운 짙은 먹 글씨들의 위세에 눌려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연약하면서도 군데군데 보이는 비백(飛白)의 묘미와 몇 번씩 구부러진 획의 강인성이 두드러져 보이며 한 송이 꽃이 향기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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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추사집(秋史集)』
- 『추사 김정희, 학예 일치의 경지』(국립중앙박물관, 2006)
- 『한국의 미』 17-추사김정희-(임창순 감수, 중앙일보사, 1985)
- 『한국의 미』 18-화조·사군자-(정양모 감수, 중앙일보사, 1985)
[스크랩] Re:김정희의 부작란도(不作蘭圖) /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공부방
쇠소 | 조회 27 |추천 0 | 2013.05.01. 06:01
부작란도(不作蘭圖) /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불이선란(不二禪蘭圖)〉 또는 ‘不作蘭花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이라는 화제의 ‘부작란(不作蘭)’을 인용하여 〈부작란도〉라고 이름 붙여진 이 그림은, 추사가 그린 〈세한도〉와 더불어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담묵의 몇 안되는 필선으로 한 포기의 난을 그렸는데, 잘 그리려고 애쓴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붓 가는 대로 맡겨진 필선이 난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뿐이다. 난 주위의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 넘치는 필체로 쓴 화제가 가득하여 그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예 작품인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처럼 그림에 문학적인 요소을 가미하는 형식은 이미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남종화적 그림들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림은 그 속성상 일단 자연물의 외형적 묘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한계성 때문에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심회나 사상을 명료하게 들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는 시각적인 묘사만으로는 부족한 사상이나 심회의 표현을 위해 화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추사는 〈부작란도〉에서 난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심회를 화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화면의 위쪽에 있는 화제의 내용을 보면.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 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 김정희 ◈ 지본담채 55.0×31.1cm ◈ 개인소장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렸네. 마음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비야이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힐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답하겠다」
이 뜻은 『유마경』의 「불이법문품」에 있는 내용인데, 모든 보살이 선열에 들어가는 상황을 굳이 설명하는데 최후에 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추사가 이 불이선으로 난을 설명한 것은 지면에다 난을 그리는 것보다는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진정한 난을 그리는 예술의 경지라는 뜻이 될 것이다.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 쓴 화제이다.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 又題”
(초서와 예서, 기이(奇異)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쓰다)
초서, 예서, 그리고 흔히 쓰이지 않는 괴벽한 글자[벽자(僻字)]를 쓰는 법으로 난을 그렸으니 보통 사람들이 그 뜻을 어찌 알고 좋아하며 즐길 수 있겠는가를 묻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해 버리고 만다.
어쩌면 오만이라고도 볼 수 있을 이런 마음은 옛 선비들이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던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선비들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답(高踏)을 추구하며 은일을 즐기는 것을 절의와 명분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고, 그런 경지에 있는 자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때로 이 자부심이 지나쳐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백안시하는 자만심을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 쓴 화제가 있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이 화제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말하고, 하늘의 본성을 사출해 낸 득의 작은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只可有一 不可有二’를 난 그림은 하나이면 족하지 두 번 그릴 일이 아니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앞의 화제의 내용에 나오는 유마의 불이선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도 있다.
불가(佛家)에서 ‘불이(不二)’를 말할 때 ‘불이’는 즉 ‘일(一)’로써 법성(法性) 또는 진여(眞如)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불이’는 두 개가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조화를 깨뜨리지 않고 있으며, 그 조화 속에서도 대립의 양상은 없어지지 않는 절대 평등, 절대 조화의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화제가 있다.
“吳小山見而 豪奪可笑”
(오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얼른 빼앗아 가려 하는 것을 보니 우습도다.)
그림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림만 탐내어 가져가려는 미련함에 웃음을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림의 깊은 뜻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할 바엔 소산 스스로가 그 뜻을 터득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것 같지도 않으면서 그림만 탐내어 빼앗아 가려고 하니 가소롭다는 것이다.
추사의 자부심과 자만심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이상의 화제를 통하여 추사가 크지 않은 난 그림 한 장을 통해 ‘불이’나 ‘유마의 침묵’과 같은 경지를 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안다는 것과 직접 느낀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시화일체의 기본 정신은 시와 그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받쳐주고 채워주며 서로를 분명히 해주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부작란도〉는 화제가 강조하는 내용에 비해 난 그림이 감상자에게 호소하는 힘이 약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점을 떠나서 보면 〈부작란도〉는 화면 전체에 서권기와 문자향이 충만되어 있고, 김정희의 선비다운 교양과 인품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문인화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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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 산책
작성일 : 12-05-05 11:15 추사(秋史)의 사유(思惟)와 시화(詩畵)-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 |
|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종이에 수묵. 55×30.6㎝. 개인소장.
난초는 한 송이 꽃을 피우지만 그 은근한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소담한 작은 꽃이여. 천박하지 않은 자태, 담백한 색과 은은한 향기가 그 생명이다. 따라서 난은 고고한 향(香)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골에 홀로 피어 고아한 모습과 향기를 간직한 난은 지조 있는 선비와 절개를 지키는 여인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교양과 인품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만으로는 부족하여 그는 자신의 철학이나 감정표현을 위해 화제(畵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화면의 위쪽에 있는 화제의 내용을 보자. ‘난초를 안 그린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다. 마음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깊이깊이 생각을 거듭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마땅히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살던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이 사절하겠다.’ 여기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불이선은 ‘모든 보살들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맨 마지막의 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보살들은 언어와 문자로 심오한 뜻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며 감탄했다.’는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 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쓴 화제를 보면 ‘초서와 예서, 이상한 서체로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이 어떻게 이를 알겠으며, 어찌 이를 좋아하랴?’라고 이 그림의 근원을 설명하며 이를 이해하지 못 할 거라고 단정해버리는 옛 선비의 자만심이 배어있는 내용이 있다. 화면 왼쪽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쓴 글을 보자.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불가(佛家)에서 불이(不二)는 ‘하나’로서 ‘법성(法性)’ 또는 ‘진여(眞如)’를 말한다. ‘불이(不二)’는 두 개가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조화를 깨뜨리지 않고 있으며, 그 조화 속에서도 대립의 양상은 없어지지 않는 절대적 평등, 절대적 조화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화제를 보면 ‘오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얼른 빼앗아 가려하는 것을 보니 우습도다’ 오소산이 이 그림의 깊은 뜻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도 않고 그림만 탐내어 빼앗아 가려고 하니 가소롭다는 것이다.
이상의 화제를 이해하고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보면 조화와 유마의 침묵이 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화일체(詩畵一體)의 기본정신은 서로 받쳐주고 채워주며, 또한 서로를 분명히 해주고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라는데 추사의 난화(蘭花)에는 고매한 선비다운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는 충만해 있으나 보는 이와 받는 이에 대한 각별한 배려는 덜 해 보인다.
오아시스의 보충 해설이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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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05 11:31 |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월간해인』, 2003년 12월(262호)에 실린 글이 적절할 것입니다. 천천히 읽고 추사 김정희의 선(禪)과 란(蘭)은 둘이 아니라는 그림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마힐의 불이법문(不二法門) 우리는 항상 모든 경계를 상대적으로 분별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옳고 그름, 좋음 나쁨, 맞음 틀림 등으로 분별하여 차별짓고 취사선택한다. 피할 수 없는 이러한 취사선택이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원인이다. 그러나 선의 세계는 이러한 차별의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본질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 본질의 세계에서 사물을 보고 살아가는 것을 선의 경계라고 한다. 유마힐 거사는 대승보살의 무차별적 경계를 성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32명의 대보살들이 유마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질문에 각기 자기 방식으로 대답하였고 마지막으로 문수사리 보살에게 물었다. “문수사리여! 당신은 어떠한 것이 보살의 둘이 아닌 법문에 듦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뜻으로는 모든 법(진리)이 말할 것도 없고(無言), 이를 것도 없으며(無說), 보일 것도 없고(無示), 알릴 것도 없어서(無識), 모든 질문과 대답을 초월한 것(離諸問答)이 바로 둘 아닌 법문에 듦입니다.” 32분의 대보살들이 각자의 좋아하는 바에 따라 대답한 것도 훌륭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대답들은 아직 개념과 생각의 경계 속에 머물러 언어와 개념의 차원(言說相)을 초월하지 못한 대답들이었다. 그러나 문수사리의 대답은 언설도 없으며 보일 것도 알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과 대답을 모조리 초월(離諸問答)한다. 참으로 상식을 깨뜨리는 멋진 대답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때에 문수사리 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우리는 제각기 각자의 대답을 말씀드렸거니와, 어진이께서는 마땅히 어떤 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듦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 유마힐은 잠잠히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然無言). 그때 문수사리가 찬탄하며 입을 열었다. “좋고도 좋습니다(善哉善哉). 글자도 언어도 없음이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둘 아닌 법문에 듦입니다.” 유마힐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묵연무언(默然無言)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의 대답은 이미 개념과 언설의 차원을 초월했던 것이다. 그러한 대답을 본 문수는 유마힐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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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서화평론<153>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 제발을 쓰다
독립큐레이터 이택용
온라인 뉴스부 기자 / 입력 : 2015년 12월 30일(수)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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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경북문화신문 | |
▶해설
김정희(金正喜)의『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 화제를 쓴 그림이다. 우리나라의 서화사(書畵史)에서 서화(書畵)의 경계를 해체하면서 고도의 이념미를 전적으로 필획과 묵색으로 구가한 이로 김정희가 꼽히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불이선란도』는 최고의 완숙미를 갖춘 작품이다. 혹자는 세한도(歲寒圖)를 앞세우기도 하지만, 시, 서, 화의 혼융을 삼절(三絶)로 하여 이것을 완전히 보여준『불이선란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더구나『불이선란도』는 추사체가 농익어 소위 일 비학(碑學)과 이 첩학(帖學)의 성과가 혼융, 완성되는 말년의 작품이자 서예적 추상성과 불교의 선적인 초월성의 결정체이다. 우선 작품의 구성을 보자.『불이선란도』는 이름 때문에 습관적으로 난초에 눈이 가게 되지만 글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한 뿌리의 난 그림을 둘러싸고 제시(題詩)와 다수의 발문(跋文), 자호(自號)와 다양한 인문(印文)의 낙관(落款)이 있기 때문이다.『불이선란도』는 난을 먼저 그린 후 제발(題跋)을 했는데, 보통 아래와 같은 순서로 풀어낸다.
▶김정희(金正喜)의『불이선란도』에 화제를 씀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난을 치지 않은지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을 그려냈구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 경지가 바로 부처의 제자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어떤 사람이 강요하면 구실을 삼아, 마땅히 인도의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살던 유마(維摩)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사절하겠다. 만향 김정희.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에는 집에 심부름하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만 그릴 수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김정희. 以草隸奇字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又題. 초서와 예서, 기이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 김정희가 또 쓰다.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억지로 빼앗려고 하니 우습다.
▶ 추사 김정희의『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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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서화평론<153>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불이선란... 2015.12.30 | 경북문화신문
[스크랩] 추사의 묘경...세한도,불이선란도.| ┗▷자료,정보 나눠요
추사 그림의 법고 창신의 묘경
-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중심으로 -
- 강관식 -
(법고에 충실한 선비적 자세에서 나온 예술적 추상성으로 세한도를 남겼고,
즉, 전통에 입각한 정통 문인화를 만듬.
이에 비해 불이선란도는 불교 귀의로 종교적 초월성에서 표출된 창신의 작품이다.
결국,세한도를 만드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불이선란도가 나올 수 있었다.
예술적 추상성<=마음>을 넘어서야 종교적 초월성<=진리>을 담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잡초같은 란에서 예술성을 갖춘게 아니라, 종교적 무심,무욕이 표현된 의미를 볼 수 있다. 화선일치를 극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불이 선란도는 추사가 유마경을 보다 그렸다하니...빈섬은 유마거사의 마음에 이른 추사가 그린 침묵의 난이라 했다.)
유교와 불교는 원리상 상호 배타적인데..종교 통합한 인격적 정신을 예술적 승화.
예술적 승화=조형미를 새롭게 하여 심미적으로 완성...추사체.세한도,불이선란도.
1. 불이(不二)의 성중천(性中天)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추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이다. 이 그림은 건필(乾筆;물기가 적은 마른 붓, 곧 渴筆)과 검묵(儉墨;먹을 아껴 쓰는 것, 곧 惜墨)을 통해서 고졸(古拙)하고 간솔(簡率)한 풍격(風格)을 추구했던 추사 그림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학예(學藝) 일치와 서화(書畵) 일치는 물론 화선(畵禪) 일치를 통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묘경(妙境)을 지향했던 추사예술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그림은 19세기 중반 서화계(書畵界)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추사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관건이 될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 서화계의 새로운 변화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실마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서의 팔분서를 판교 정섭이 육분반서라는 새로운 형태로 창출...조형미에서 시각적 율동성을 추구함. 다시 말하면, 전서는 전서대로,예서는 예서로 쓰는 고유 서법이 있고, 행서는 행서로,..해서는 해서로, 초서는 초서로...오서체법이 있다. 이중 예서를 쓰는 팔분법이라고 하는 미시=구체 논리가 있는데, 이러한 서체와 서법을 처음으로 정섭이 한 글자에 혼합해서 썼다. 그것을 넘어서 난을 그리듯이 글씨를 썼고, 글씨를 쓰 듯이 난을 그렸다...이래서. 육분반서라는 필체를 만들었는데...추사는 여기에 비석의 글씨체까지 가미한 서체를 만듬.....추사는 비석과 원형의 첩을 통합 함.)
이처럼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양식적(樣式的=조형미,괴,)인 측면이나 심미적(審美的=고.졸)인 측면에서 볼 때 추사 그림의 본질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점이 많지만, 추사의 자전적(自傳的=가치관)인 맥락과 실존적(實存的=삶)인 맥락에서 두 그림의 경계(境界)를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적지 않은 별격(別格)의 그림이기도 하다. 이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그려졌지만 추사의 절실했던 실존적 울림의 흔적으로서 ‘본성의 참모습(성중천 性中天=삶에서 드러난 가치관)과 일치’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한도가 제주 유배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응결된 한 편의 비극적 서사(敍事)라면, 불이선란도는 추사 만년의 사소한 일상이 무심하게 스쳐갔던 하나의 우연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세한도가 황량한 바닷가에 의연하게 솟아 있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의 고고(孤高)한 모습 같다면, 불이선란도는 적막한 산 속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잡초 같은 모습이다. 그 결과 <세한도>가 꼿꼿하고 당당한 선비 같아 유화(儒畵)의 한 정수(精粹)를 보여준다면, <불이선란도>는 걸림 없고 허허로운 선사(禪師) 같아 선화(禪畵)의 한 정화(精華)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이처럼 일견 같기도 하고 일견 다르기도 하지만, 두 그림 모두 추사가 평생에 걸쳐서 추구했던 추사 그림의 본질적인 풍경이고 근원적인 경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추사라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었던 두 부분이기도 하고, 추사가 평생을 밟아나갔던 두 단계이기도 하며, 추사의 본질이 실존적으로 드러났던 두 계기이기도 하다. 추사는 제주바닷가의 처연한 유배 속에서 <세한도>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하나의 본질적 경계를 경험하고, 다시 북청(北靑)으로 귀양갔다 돌아온 과천(果川) 산중의 적막한 은거(隱居) 속에서 <불이선란도>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던 또 하나의 근원적 경계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추사는 그림이 지닐 수 있는 실존적 의미를 실로 아름답고 격조있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예일치와 서화일치는 물론 화선일치를 통해서 평생에 걸쳐 추구하던 법고창신의 묘경[=동영상적으로 표현이라면 지나칠순 있으나,생동감은 분명하다...작가의 맘이 몸 = 손에 나와서 전달된 붓으로 노래하고 먹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 필의가 운필로 드러남... 인격 없으면 붓칠(=painting)이 되고, 인격 있으면 붓이 마음을 따라 그리는(=drawing) 예술 = 노래와 춤을 이룬다.]을 자득(自得)하고 이를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차원에서 회화적(繪畵的)으로 실현했다. 추사 그림이 매우 고전적일 뿐만아니라 당대적이면서도 또한 개성적인 느낌을 동시에 주면서 강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 그림이 주는 감동의 핵심은 바로 이 생생한 실존적 경험(학문적 탐구와 서예 연습=문사철의 서권기,시서화의 문자향)을 통해서 법고와 창신의 모순적인 대립극(對立極)을 그 중심에서 초극한 뒤 이를 불이(不二)의 묘경으로 통합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법고=정,창신=반,일치=통합=합,즉,변증법을 예술적 승화로 보여줬다?,주역의 상보를 기초로 표현했다? 미철학으로 설명하면...진선미가 새롭게 완성된 추사를 알 수 있는 그림들이다.)
2.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의 경계
1) 불이선란도의 제작 시기와 배경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의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이 가는 대로 그려주었던 작은 난초 그림이다. 그런데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될 때 고금도(古今島)에 동배(同配)될 정도로 추사의 복심(腹心)으로 불린 규장각의 각감(閣監) 오규일(吳圭一)이 어느 날 우연히 이 그림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억지로 빼앗아가고 말았다. 그 후 이 그림은 추사 말년의 애제자였던 소당 김석준을 거쳐서 장택상과 손재형 등을 지난 뒤 지금은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그림보다도 글씨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그림보다도 오히려 글씨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독특한 그림이다. 그림보다도 글씨가 많아지게 된 것은 추사가 제발을 네 번이나 추가했기 때문이다. 추사는 우연히 손길가는 대로 그렸던 이 그림이 이외의 득의작(得意作)으로 느껴졌는지(<불이선란도>의 난초부분 참조), 여러 가지 사념(思念)과 심회(心懷)를 적으며 제발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문하생(門下生)들끼리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게 되었던 특별한 사연까지 밝히며 제발을 계속 추가했다.
그러나 추사는 제발을 네 번이나 쓰면서도 기년(紀年)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정확한 제작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불이선란도>는 추사의 그림 중에서도 서예(=예술)적인 추상성과 불교적인 초월성을 가장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노년의 만년작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그 제작 시기와 배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파악한다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연뿐만 아니라 극도의 추상성과 초월성이 담겨있는 이 그림의 성격과 의미를 추사의 자전적인 맥락에서 보다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일찍이 추사의 제자와 후손들이 이 <불이선란도>의 제작 시기를, 추사가 1848년 12월에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51년 7월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기 전까지 도성(都城) 안에 들어갈 수 없어서 잠시 노량진의 일휴정(日休亭)에 우거(寓居)할 때 그린 것으로 보았던 듯하다. 왜냐하면 추사의 사후에 제자와 후손들이 편찬한 문집에는 이 <불이선란도>의 첫머리에 있는 제시(題詩)가 제주와 북청에서 썼던 시들의 중간에 배열되어 있어서 대략 이 무렵의 시로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사의 문집은 청나라 문사들의 글이 여러 편이나 추사의 글로 잘못 편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강 한번만 읽어도 그 시점을 알 수 있는 편지들이 아무렇게나 마구 뒤섞여있을 정도로 추사의 글을 정밀하게 고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극히 부실하게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편년의 정확한 근거로 삼기에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 <불이선란도>와 직접 연관되어 있는 현존 자료들의 내용들을 검토해 보면 거의 대부분 과천 시절의 추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추사의 그림 가운데 가장 불교적인 초월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그림의 성격도 추사가 지계(持戒)를 실천할 정도로 불교에 더욱 귀의해갔던 과천 시절과 보다 자연스럽고 의미있게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불이선란도>는 추사가 1852년 8월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56년 10월에 졸(卒)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은거했던 과천에서 그린 최만년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이 <불이선란도>는 현존하는 추사의 거의 마지막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이선란도>와 관련된 현존 자료를 검토하며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해 보도록 하겠다. <불이선란도>를 편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는 <불이선란도> 자체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추사가 네 번이나 추가했던 제발(題跋)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이 제발을 순서대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불이선란도>와 관련된 현존 자료를 검토하며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해 보도록 하겠다. <불이선란도>를 편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는 <불이선란도> 자체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추사가 네 번이나 추가했던 제발(題跋)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이 제발을 순서대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위쪽의 첫 번째 제시와 발문
난초 그림 안 그린지 20년 만에 부작난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쳐냈네. 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폐문멱멱심심처(閉門覓覓尋尋處)
이것이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 차시유마불이선(此是維摩不二禪)
만약 어떤 사람이 억지로 요구하며 구실을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무언(無言)으로 사양하리라. 만향(曼香) 쓰다.(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추사)
(2) 오른쪽 중간의 두 번째 발문
초서(草書)와 예서(隸書), 기자(奇字)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쓰다.(고연재) (以草隸奇字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又題 <古硯齋>
(3) 왼쪽 아래의 세 번째 발문
애초 달준(達俊)이를 위해서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 번만 있을 수 있고,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仙客老人) 쓰다.(낙문천하가)(김정희인)
示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樂文天下士)(金正喜印)
(4) 왼쪽 아래 안쪽의 네 번째 발문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다.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추사가 이처럼 네 번이나 제발을 추가한 것은 기본적으로 쓰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가 써나갔던 순서대로 다시 복원해서 써보면(네 편의 제발 부분 복원도 참조), 이 <불이선란도>에서 제발과 글씨가 차지하는 조형적 의미가 얼마나 크고 중요하며, 추사가 이를 얼마나 선세하게 고려한 듯, 위에서부터 역행(逆行)으로 시작해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와서 순행(順行)으로 작게 쓴 뒤, 다시 왼쪽 아래로 내려가서 역행으로 크게 썼다가 다시 더 안쪽의 그림 옆에 담묵으로 작게 쓰는 등, 위치와 크기는 물론 행법(行法)과 농담(濃淡)까지 적절히 맞추어가며 제발을 계속 추가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제발을 토대로 하여 <불이선란도>를 편년해가는 데 있어서 특히 중요한 사항은 제발의 내용, 제발에 등장하는 인물과 추사의 관계, 추사가 사용한 자호(自號)와 도장(圖章), 제발의 서체(書體), 그리고 그림의 화풍(畵風)과 화의(畵意)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애초의 이 그림을 그려 받은 달준이 과연 추사와 언제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점은 이 그림을 편년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이 그림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추사가 달준이와 관련해서 남긴 자료는 이 <불이선란도> 이외에 2편의 시가 더 알려져 있다. 하나는 <청관산옥(靑冠山屋)에서 여름날 아무렇게나 짓다(靑冠山屋夏日漫拈)>라는 개인 소장의 시고(詩稿)이고, 나머지 하나는 문집에 들어 있는 <희롱삼아 써서 달준에게 주다(戱題贈達俊)>라는 시이다. 먼저 첫번째의 시고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천관산옥에서 여름날 아무렇게나 짓다
가을철 갯가의 시골 노인네 秋浦田舍翁
물고기를 잡느라 물가에서 자네 採魚水中宿
아내와 자식들은 백로를 날리며 妻子張白?
은 대 숲에 숨어 그물을 치네. 結置映深竹
시를 지어 만고에 전하면, 題詩留万古
비단 위 글자에 푸른 이끼가 끼리. 錦字綠苔生
가다가다 하룻밤을 심심 산촌에서 묵으니 行行一宿深邨裏
풍년이라 닭 울고 개 짓는 소리 저자처럼 시끄럽네. 鷄犬豊年鬧如市
황혼곁에 나그네 드니 온 집안이 반가워 黃昏見客合家喜
달빛 아래 못물 퍼내 물고기를 잡네 月下取魚?塘水
해묵은 초가 삼간,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 老屋三間, 可避風雨
빈 산의 선비 하나, 홀로 이소경(離騷經)에 주(注)를 다네. 空山一士, 獨注離騷
여름철 청관산옥에서 운자(韻字)도 없이 아무렇게나 읊어 팔을 한 번 시험하며 달준에게 써주다.(靑冠山屋夏日漫拈 無次聊以腕爲達俊)
이 첫 번째의 시고는 청관산옥에서 여름철에 운자(韻字)도 없이 그저 손길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이런저런 시구들을 써준 것이다. 청관산옥은 과천의 청계산(淸溪山)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있다고 하여 추사가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 따라서 이 시고는 추사가 과천에서 달준에게 써준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달준이는 추사가 과천에 은거할 때 같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추사가 청관산옥에서 그저 아무렇게나 손길 가는 대로 달준에게 시를 써주는 모습은 바로 추사가 달준이에게 <불이선란도>를 손길가는 대로 부담없이 그려주던 모습과 거의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그리고 추사가 아무렇게나 손길가는 대로 읊고 그려준다는 것을 ‘만념’(漫拈)과 ‘만필(漫筆)이라고 하여 두 번 모두 같은 만(漫)자로 쓰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추사의 문집에 들어 있는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다.
소 외양간 돼지우리 옆에 발을 개고 앉았는데 盤坐牛宮豚柵邊
쑥대머리 몹시 커서 묵은 책을 압도하네. 蓬頭特大壓陳篇
태고(太古)라 천황씨(天皇氏) 일만팔천 글자들을 天皇一萬八千字
삼년인가 이년인가 맹공이처럼 울어대네. 蛙叫三年或二年
이 두 번째의 시는 구체적인 장소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추사는 달준이가 쑥대머리를 하고 돼지우리와 소 외양간 옆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2,3년이나 맹꽁이처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외우고 있는 모습을 마치 눈 앞에 보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村家의 田舍 모습을 묘사한 이 시는, 추사가 흔히 ‘강상(江上)’이라고 표현했던 노량진의 일휴정(日休亭)보다도, 통상 ‘전사(田舍)’나 ‘전간(田間)’이라고 일컬으며 이 시와 유사한 풍격의 전원시(田園詩)나 촌가(村家) 즉사(卽事) 같은 시들을 많이 썼던 과천과 더 연관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달준이가 과천의 청관산옥에서 추사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한 첫 번째 시고의 내용을 고려하면 더욱 그와 같이 생각된다.
특히 이 두 번째 시는 달준이의 신분이나 추사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어 더욱 주목된다. 왜냐하면 달준이가 쑥대머리를 한 채 외양간과 돼지우리 옆에서 맹꽁이처럼 <십팔사략>을 외우고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그는 평민(平民) 출신의 학동(學童)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기실 똘똘하다는 뜻이 담겨있는 ‘달준(達俊)’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이름도 그가 평민 출신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그리고 추사가 아무런 부담도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손길 가는 대로 그림도 그려주고 시도 써주면서 자연스런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나, 달준이가 추사 곁에서 2,3년이나 공부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그는 집안일도 하고 추사를 시봉(侍奉)하면서 최소한 시화(詩畵)를 감상할 줄 아는 학동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앞의 시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달준이는 과천의 청관산옥에서 추사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므로, 만약 달준이가 추사 곁에서 <십팔사략>을 2,3년간 외움 공부하던 것도 과천에서 있었던 일로 본다면, 추사가 1852년 8월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바로 과천에 은거했기 때문에, 달준이가 과천의 추사 곁에서 공부하고 시봉하던 시점은 대략 1853,4년경 전후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추사는 과천에 은거하던 1853년 봄에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 그림에 제발을 쓰면서 “여기저기 떠도느라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가 이미 20여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달준이에게 그려준 <불이선란도>의 첫 번째 제시에서도 “난초 그림 안 그린지 20년 만에 우연히 본서의 참모습을 처냈네”라고 하여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불이선란도>에서 말한 ‘20년’은 운자를 맞추며 쓴 것이기 때문에 대략 ‘20여 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는 1853년에 석파에게 써 주었던 제발에서 말한 ‘20여 년’과 거의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며, 추사가 말한 이 ‘20년’이나 ‘20여 년’이란 그저 대략적으로 어떤 느낌의 시간과 기억의 시점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추사가 과천에서 1853년에 석파에게 ‘20여 년’ 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또한 ‘20년’간 난초를 그리지 않다가 우연히 달준이에게 <불이선란도>를 그려주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과천의 천관산옥에 함께 있었던 달준이에게 장난삼아 시를 써준 시점도 대략 1853,4년경 전후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연관시켜 생각하면, 이 <불이산란도>는 일차적으로 추사가 1853,4년경 전후에 과천에서 달준이에게 그려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불이선란도>에 들어있는 추사의 자호와 도장 및 제발의 서체나 서풍(書風)은 대체로 북청 시절이나 과천 시절에 남긴 만년의 작품들에서 주로 보이거나 공통점이 많은 편이고, 특히 과천 시절과 더욱 구체적으로 연관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 <불이선란도>가 과천에서 그려진 것일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제발의 서체와 서풍의 경우, 추사가 1849년 8월부터 1856년 4월까지 박정진(朴鼎鎭)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모은 <보담재왕복간(寶覃齋往復簡)>이 특히 주목된다. 본래 글씨는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시기에 썼다 하더라도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편지들은 추사가 아랫사람에게 그저 손길가는 대로 부담없이 써준 행초(行草)라는 점에서 <불이선란도>의 제발과 거의 같은 성격의 글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편지들은 6년 동안 동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서법(書法)으로 총 14통을 쓴 것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되는데, 대체로 1851년 북청유배 이전의 강상 시절 편지와 1853년 북청 유배 이후의 과천 시절 편지는 그 서체와 서풍이 확연히 다르다. 1853년 이후의 과천 시절 편지는 <불이선란도>의 제발과 그 서체나 서풍이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1855년 6월 3일의 편지는 <불이선란도>의 제발 글씨와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심지어 같은 시기에 쓴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특히 중심의 골격을 이루는 가로의 늑(勒) 획과 세로의 노(努) 획만 극단적인 필법으로 굵게 강조한 뒤, 여타의 부분적인 획들은 가늘고 약하게 써서 통상적인 자형(子形)과 획법(劃法)을 거의 생략하거나 무시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몇 개의 글자나 행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아슬아슬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매우 파격적인 간가(間架) 결구(結構)는 이 두 글씨가 가장 유사하다. 따라서 이러한 제발의 서체와 서풍으로 볼 때, <불이선란도>는 1853년에서 1855년경의 과천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1855년경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더욱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추사는 자호와 도장을 단순히 작가 표기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를 또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하며 그때그때 자신의 사념과 정조(情操)에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자호와 도장으로 계속 바꾸어 가며 사용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확실한 진작의 경우 자호와 도장도 편년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불이선란도>에 찍혀있는 추사(秋史)와 고연재(古硯齋)의 도장이다. 이 도장은 확실한 현존작 중에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강간다시조인거(江干多是釣人居)>의 시가 들어 있는 시첩(詩帖)에 두 개가 찍혀있고,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권돈인의 <세한도>에 있는 추사의 제첨(題簽)과 발문에도 두 개가 같이 찍혀 있다. 이 두 작품은 글의 내용이나 글씨의 풍격으로 볼 때 과천시절의 최만년 작품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도장은 최만년의 과천 시절에 주로 사용했던 도장이라고 생각되며, 이와 동일한 도장이 찍혀있는 <불이선란도>도 과천에서 최만년에 그려진 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특히 권돈인의 <세한도> 앞에 붙어 있는 추사의 “세한도” 제첨은, 추사가 과천에서 권돈인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 의하면, 1855년경 전후에 과천에서 쓴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쓴 글씨의 모본(模本)에 대해서는 박군(朴君)이 이미 공정을 마쳤으므로 이에 감히 원본과 아울러 바칩니다. 또 제가 세한(歲寒) 한 편을 써서 묵은 맹약(盟約)을 펴기는 했으나, 자체(字體)의 모양이 세속의 법식에 들지 않으니, 또 한 가지 비방을 얻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혹 합하(閤下)께서 보고 나무라지 않으시고, 산신령도 꾸짖지 않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이 편지는 추사가 전에 권돈인이 부탁했던 “세한” 한 편을 써주면서 같이 보낸 것인데, 추사가 “자체(字體)의 모양이 세속의 법식에 들지 않으니, 또 한 가지 비방을 얻게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한 점으로 볼 때, 추사가 써준 이 “세한” 한 편은 서예 작품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며, 현재 권돈인의 <세한도>에 붙어있는 추사의 “세한도” 제첨이 매우 졸박하고 파격적인 고예(古隸)임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그 글씨를 가르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추사는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운구한민(雲句漢旻)과 남호영기(南湖永奇, 1820~1872)라는 두 스님이 대원(大願)을 발하여 <화엄경(華嚴經)>을 간행하려고 하고 있어 그 뜻이 가상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남호 영기 대사가 1855년 봄에 평소 추사가 드나들던 봉은사(奉恩寺)로 찾아와서 간경소(刊經所)를 차리고 <화엄경>과 <행원품별행(行願品別行)> 등을 판각한 뒤, 1855년 가을부터 1856년 9월 사이에 판전(板殿)을 신축해서 봉행했던 일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추사의 이 편지와 “세한도”의 제첨은 1855년경에 과천에서 주로 썼던 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도장이 찍힌 <불이선란도>도 대략 1855년경에 과천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지금까지 검토하며 논증했던 내용들을 모두 종합해보면, <불이선란도>와 직접 연관된 제발의 내용이나 등장 인물, 서체, 도장 등의 모든 사항이 대부분 1853년경부터 1855경 사이로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불이선란도>도는 대략 1853년경부터 1855년경 사이에 과천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분명한 연대가 구체적으로 잡히는 제발의 서체와 도장에 따른다면 1855년경의 최만년에 과천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더욱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특히 파격적일 정도로 통상적인 법식을 크게 벗어나서 매우 초월적인 경계를 보여주고 있는 <불이선란도>의 기본적인 풍격이 과천에 은거했던 최만년 추사예술의 본질적인 풍격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한 편년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불이선란도>는 추사가 제발에서 직접 “유마거사(維摩居士)"와 ”불이선(不二禪)“을 두 번이나 언급할 정도로 불교적인 초월적 경계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추사는 1855년경에 과천에서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직접 유마거사와 불이선을 언급하며 더욱 불교에 귀의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사실은 그런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마침 또 <유마경(維摩經)>을 판각(板刻)한 승려가 왔기에 스스로 일부(一部)를 취하고, 또 일부를 가지고 바로 상서(上書)를 마련하게 하여 즉시 심부름꾼을 시켜서 곧장 가서 강상(江上)에 우러러 바치도록 하였는데 과연 착오가 없었습니까?
이 경(經)의 주(注)는 바로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이 말했던 바 “하나의 빗물로 공평하게 적셔준다”(一雨潤公)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하나 모두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부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마거사의 묘희국(妙喜國)의 연기(緣起)를 건너는 데는 자못 방편이 됩니다.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이 말한 바 “문장(文章)에 귀신 같다”고 한것이 바로 이 <유마경>과 <능엄경(楞嚴經)>인데, 경전을 번역하는 역장(譯場)에서 문장을 윤색한 것이 <능엄경>보다 더 나은 것은 또한 시대(時代)의 좋고 나쁨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인가 봅니다.
이 한민(漢旻)이라는 승려는 자칭 운구(雲句)라고 부르는 자로서 작년부터 소인에게 내왕했는데, 믿음의 뿌리도 매우 깊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願力)도 대단히 많습니다. 비록 아직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금강경(金剛經)>과 <능엄경>에 대해서는 자못 공부를 많이 했고, 그 정진하는 정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문하에 나아가 직접 뵙고자 하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여 처음에는 소인이 갈 때 함께 가려고 하였지만, 지금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 그자가 혼자서 특별히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를 먼저 소개해드리기 위해서 서신 한 장을 아울러 깆추었습니다.
또 하나의 승려 영기(永奇)는 자칭 남호(南湖)라는 자로서 연전에 <아미타경(阿彌陀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의 두경을 판각하여 또한 강상(江上)에 이미 전달했던 자이니, 아마 생면은 아닐 듯합니다. 이 두 승려가 대원(大願)을 발하여 <화엄경>을 간행하려고 하니, 그 뜻이 또한 가상할 뿐입니다.>
추사는 이처럼 1855년경 무렵에 <유마경>을 직접 받아 읽고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을 높이 평가하며 이에 귀의해 가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 그린 것이라 생각되는 <불이선란도>에서도 이와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치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추사는 본래 왕실의 외척이라는 가문의 전통 속에서 일찍부터 불교를 접한 당대 최고의 불교 학자였지만, 이 과천시절에는 지계(持戒)를 실천하고 직접 유마거사를 의미하는 “병거사(病居士)”라 자호할 정도로 더욱 거사선(居士禪)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천에서 초의(草衣)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근자에 자못 선열(禪悅)에 대하여 가경(佳境)의의 묘(妙)가 있지만 더불어 이 묘체(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선사와 한번 눈썹을 펴고 토론하고 싶은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네”라고 하여 직접 ‘선열’의 경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무렵의 1854년경부터 과천의 추사에게 드나들고 있었던 운구 스님에게도 유마거사가 침묵하고 말하지 않았던 것도 곧 성문(聲門)의 하나인데, 선림(禪林) 중에는 마침내 한 사람도 해철(解澈)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고 나아가 “그림의 이치는 선(禪)과 통한다”고 하면서 화선 일치를 강조하는 화론(畵論)을 써주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이 <불이선란도>에 담겨 있는 불이법문의 불교적인 초월적 경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사는 1848년 12월에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정치적인 재기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다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탄압으로 1851년 7월에 북청으로 유배되는 좌절과 시련을 겪었다가, 1852년 8월에 북청에서 풀려난 뒤로는 아예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과천에 은거한 채 정계를 완전히 떠나 가까운 봉은사를 오가며 불교에 귀의하고 매우 초월적인 무념(無念) 무주(無住)의 경지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불이법문의 경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추사의 이 <불이선란도>는 바로 그러한 불이 법문에 가까운 만년의 초월적인 삶 속에서 일상의 사소한 손길이 무심하게 스쳐갔던 하나의 우연한 흔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불이선란도>의 제작 시기와 배경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추사의 자전적인 맥락에서 보다 실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추사의 삶에서 나온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 두 점이다...유불선 일치, 서화일치,불이선란=화선일치....모든 걸 일치로 통합=회통 시켰다는 사유..그것은 다름 아닌 주역의 상보=상생에서 기인하고 있다가 불교의 불이사상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우연하게 표출된 작품이 불이선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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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0-06-08 오후 2:47:42 | 조회수 : 1373 |
1.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생애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 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만향(曼香) 선객노인(仙客老人) 구경(謳竟)외 다수. 충남 예산 출생.
실학자,금석학자, 고증학자로서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고 특히 예서에서 새 경지를 이룩하였으며, 사의(寫意)적 문인화를 시도하여 조선 근대회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중국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써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또한 실사구시를 주장하여 근거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세한도(歲寒圖), 부작란(不作蘭),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연표 1786년(정조10년) 출생 | 父-김노경 母-기계(杞溪) 유씨. 증조부- 김한신 증조모-화순옹주 | 1795년(정조19년) 10세 | 박제가에게 배우기 시작함. | 1801년(순조 1년) 16세 | 모친 기계 유씨 별세 | 1805년(순조 5년) 20세 | 박제가 졸. 부친 김노경 문과 급제 | 1806년(순조 6년) 21세 | 첫 부인 한산 이씨 졸 | 1809년(순조 9년) 24세 | 김노경 연경행. 추사가 동행. 연경(燕京)에서 공부 | 1810년(순조10년) 26세 | 이 때까지 청나라에서 옹방강,완원등과 교유. | 1816년(순조16년) 31세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발견 | 1819년(순조19년) 34세 | 추사 문과 급제 | 1839년(헌종 5년) 54세 | 추사 형조참판 | 1840년(헌종 6년) 55세 | 추사 동지부사.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 | 1841년(헌종 7년) 56세 | 소치 허유, 제주도로 추사 배알 | 1843년(헌종 9년) 58세 | 초의선사 제주도로 추사 문안 | 1844년(헌종10년) 59세 | 소치 허유 제주도로 추사 배알. 이상적을 위해 세한도 제작 | 1847년(헌종13년) 62세 | 소치 허유 제주도로 추사 배알. | 1848년(헌종14년) 63세 | 추사 방송(放送) | 1849년(헌종15년) 64세 | 추사 귀경 | 1851년(철종 2년) 66세 |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 1852년(철종 3년) 67세 | 추사 방송(放送) | 1855년(철종 6년) 70세 |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씀. | 1856년(철종 7년) 71세 |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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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후기의 학예적 환경
고려시대 성행하던 불화(佛畵)가 퇴보하면서 조선전기에는 송(宋), 원(元)의 북종화풍 회화에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주로 산수화와 사군자화가 유행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명(明)과 청(淸) 문화의 영항을 받으면서 남종문인화가 유행하는 가운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의 진경산수라는 조선 고유의 사실(寫實)적 화풍이 널리 보급되었고,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 ? )의 풍속화등은 정통적 고유색을 띄게 된다. 글씨에서는 왕희지와 조맹부의 글씨가 풍미하고,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 )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가 등장하는 등, 민족적 자주적 서화풍이 무르익는다.
숙종,영조,정조 년간은 사회가 안정되었던 관계로 조선 후기의 문화가 꽃피우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고유의 색채는 추사의 등장과 때를 같이 하여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된다. 실학의 발흥이 조선 사회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신선한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열풍은 추사에게 이어졌다. 조선왕조를 이끌던 성리학이 쇠퇴하고 고증학이 새로이 대두되면서, 추사가 중국 서화가들과의 교유에 의해 익힌 금석학과 사의화(寫意畵)는 전통적 동국진체나 진경산수보다 시대를 앞서 가는 새로운 바람이 되었는데, 결국 열린 개방주의가 폐쇄적 민족문화를 압도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초반 이후의 근대 서화는 추사를 그 시원으로 하여 새롭게 출발하게되었다. 추사는 자신의 산수를 원(元) 황공망(黃公望)의 기초 위에 예찬(倪瓚)의 화법을 곁들여 완성해 나아갔는데, 그의 화풍을 직접 체득한 자는 소치(小癡) 허유(許維. 후에 鍊으로 바꾸어 부름. 1809-1892)이다. 허유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을 거쳐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과 방계의 의재(毅齋) 허백련(許白鍊)에게 이어져 호남화단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사풍은 높은 수준의 추상미를 추구하는 까닭에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것은 물론, 추사 추종자들마저 중국풍의 서화를 임모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않다. 소치를 비롯,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고람(古藍) 전기(田琦) 등 일부에게만 그대로 전해졌을 뿐, 배우는 자가 숫적으로 적어 추사의 서화는 엘리트 문화로서는 존재하였으나 대중적 파급효과는 미진한 상태였다.
한편 이 시기에 사회계층의 대 변화가 일고 있었다. 사대부들은 양적 팽창으로 인하여 지배계급에의 참여도가 떨어져 권력없는 양반이 늘어나면서 문약(文弱)한 계층이 늘어가고, 반면 평민층에서는 부의 축적과 상대적 신분의 향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질서가 크게 변동하는 관계로 안정된 사회에서라야 누릴 수 있는 고급문화를 향수(享受)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는 형성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추사의 사의적(寫意的) 그림은 회화사상에 신 화풍을 일으켰을 뿐, 계속하여 이어간다는 것은 그의 제자들로서도 역부족이었기, 자연히 대중화에 이르지 못한 것이며 이 과제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 1897)이 해결하게 된다. 추사가 서거할 당시 14세였던 오원(吾園)은 소치와 동 시대에 활동하였으나, 추사와 소치로부터 받은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대중은 이해하기 어려운 추사풍의 그림보다는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오원의 그림을 훨씬 더 선호하게되었고, 그 영향은 그의 제자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 심전(心田) 안중식(安仲植)으로 이어져 대중 속에 파고들었던 관계로 오원 장승업을 한국 근대회화의 비조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사의 회화는 전통적 조선 고유의 색을 깨뜨리고 사의화(寫意畵)를 등장시킴으로써 새로운 회화의 장을 열고, 이어서 오원 장승업이라는 조선 근대회화의 비조를 탄생시키는 모체 역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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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작란(不作蘭) 지본. 55×31cm. 서울 개인소장
추사의 그림 중에서 부작란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난을 그리되 글씨 쓰던 획이 그대로 동원되었으며, "예서 쓰듯,초서 쓰듯, 괴이한 글자 쓰듯 그려댔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어찌 알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글까지 직접 써 넣은 것을 보면 추사 자신도 일반 대중들은 접근하기 어려우리라는 판단을 가지고 그렸음이 분명하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초 현대풍의 작품인 것이다.
당시까지 사군자 중 가장 많이 그려지는 소재는 단연 대나무였었다. 그러나 추사 이후 난이 가장 많이 그려지는 소재가 되었는데, 이에는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지만, 여하튼 한 시대 회화의 흐름을 일시에 바꾸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 이 부작란이다.
원래 이 작품의 이름은 없었으나 화제중 "부작란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이란 부분이 있어 부작란이라 일컬어져 왔는데, 화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불이선란(不二禪蘭)이 적절하겠다는 의견도 있다.
무수히 보이는 인영(印影)은 사진으로는 판독이 어려운 것들이 몇몇 있다. 대부분은 추사가 직접 찍은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는 나중에 소장자나 감상자등이 찍은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어 좀더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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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뜻 풀이
<1>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난초를 안 그린지 20년 우연히 그려냈다. 마음 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거듭 생각해보니 이 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말 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 만향<曼香>
내려쓰기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전개되는 장법이 특이하다.
이 화제를 통해서 우리는 추사가 자기 난초 그림의 화의(畵意)를 불이선(不二禪)에 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마음 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난 예술의 진정한 경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유마 불이선"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제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온다.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최후에 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특히 "불이"’에 관한 문수보살과 유마거사 간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유마가 질문하기를 “절대 평등한 경지에 대해 어떻게 대립을 떠나야 그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문수가 대답하기를, “모든 것에 있어서 말도 없고, 설할 것도 없고, 나타낼 것도, 인식할 것도 없으니 일체의 문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 즉 불이(不二)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문수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유마에게 물었다.
이 때 상황을 경(經)에서는, “유마는 오직 침묵하여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행동이나 언어의 표현은 진실에 닥아가고자 하나 도달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유마는 침묵으로 웅변했던 것이다. 이 유마의 침묵은 도가(道家)의 무(無)나 도(道)의 경지와 통한다. 추사는 그런 경지를 한 포기의 난을 그리며 생각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2>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又題 ("謳"자는 "삼수변+나눌구"로 판독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음)
초서와 예서,기자법으로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이 이를 어떻게 알 것이며 이를 어찌 좋아하랴? 구경<謳竟>이 또한 적다.
난을 그렸으면서도 그 것을 그리지 않고 필법으로 설명한 것은 난을 회화가 아닌 서체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금석학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서화세계에서 고답(高踏)을 추구하며, 그런 경지에 있는 자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어쩌면 변화없이 정통성에만 매달려왔던 당시의 서화계에 대한 실망스러움을 토로한 독백으로도 볼 수 있다. 추사의 자부심과 자만심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3>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으로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것이지 두 번도 그려서는 안될 것이다.선객노인<仙客老人>
이 제기(題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설명하면서, 이 한 장으로서 자신의 심경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 하나로서 족하지 어찌 여러 장이 필요할 것인가 하는 주장이다. 20년간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간 난을 어떻게 쳐야할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였음을 나타내며, 이제 오직 하나로 족할 뿐 둘도 있을 수 없다하였음은 이 란을 완성한 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법열(法悅)에 들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처신에 신중을 기하는 조선의 사대부로서 이 정도 기쁨의 표현을 거침없이 해댔다면 추사 자신이 이 작품에 대하여 오만이라고 느낄 정도로 대단히 만족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까지의 세 문장에서 호를 曼香,謳竟,仙客老人의 세 가지를 사용하였다.
<4> 吳小山見而豪奪可笑
오소산<吳小山>이 이를 보고 억지로 빼앗아가는 것을 보니 우습다.
이 부분은 나중에 별도로 써넣은 것 같아 보인다. 달준<達俊>과 오소산<吳小山>이 어떠한 인물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림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림만 탐내어 가져가려는 미련함에 웃음을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오소산이 가져갔는지 아니면 가져가려고만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인물이 밝혀지지 아니하니 문구풀이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
참고 1. 유마경(維摩經)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대승불교 경전. 정확한 명칭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며 줄여서 《유마힐경》 《유마경》이라 한다.유마힐은 주인공인 거사로서 리차비족의 수도인 베살리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호라고 하나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경은 3회 1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마거사가 병으로 앓아 눕자 부처는 지혜 제일인 사리불을 비롯하여 가섭·수보리 등을 병문안 가게 권하나 그들 모두 유마거사의 높은 법력이 두려워 문병가기를 꺼린다. 결국 문수보살이 가게 되는데 유마거사와의 대화에서 문수보살은 대승의 깊은 교리인 불이(不二)법문을 유마거사의 침묵을 통해 깨우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또한 유마가 본래 병이 없지만 중생들이 병을 앓기에 보살도 병을 앓는다고 설명하여 중생들과 동심일체가 된 보살의 경지를 나타내었으며, 유마거사 가족들의 소재를 묻자 지혜가 아버지이고 방편이 어머니라고 하여 유마거사가 이미 대승보살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경전 성립 당시의 재가불자들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 경에 대한 한역은 7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3가지로 지겸(支謙) 역의 《유마힐경》 2권, 구마라습 역의 《유마힐소설경》 3권, 현장(玄) 역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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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간송문화 63<2002>. 간송문화 64<2003> 한국의 미 17<추사 김정희> 한국의 미 6<서예> 한국의 미 18(화조 사군자) 한국의 미12(산수화) 완당평전(유홍준 학고재) 동양화1000년(허영환. 열화당) 추사김정희의 서화( 최순택. 원광사) 동양미술 감상(열화당. 허영환) 조선후기 그림과 글씨(이태호 유홍준 학고재) 현대문인화의 경향연구(정숙모 석사학위논문) 두산세계대백과.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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