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6. 22:19ㆍ美學 이야기
(6) 조속(趙涑)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한국의 미
2007.03.26. 17:39
http://blog.naver.com/jss378/50015721109
순간 포착의 예리한 시선으로 묘사 … 절제되고 가다듬어진 墨法
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6) 조속의 노수서작도
2006년 05월 30일 (화) | 이원복 광주박물관 |
▲조속 作 노수서작도, 113.5×58.3㎝, 견본담채,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인물화보다는 나중에, 산수화보다는 앞서 발전한 화조화는 사생의 방법을 통해 사실적으로 꼼꼼히 그리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조속의 ‘노수서작도’는 구성과 기법, 묘사, 필치 등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조선 중기의 작가들이 그렇듯, 조속 역시 활발히 연구되거나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그림을 자세히 분석하여 그 뛰어난 점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마치 문틀을 통해 창밖 나무에 앉은 새를 보는 듯한 折枝翎毛 계열인 ‘老樹棲鵲圖’는 조선 영모화의 됨됨이를 대변하는 명화다. 비록 화면에 화가를 알려주는 도장이나 관지는 없으나 滄江 조속(1595~1668)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大作으로 일견 수묵으로 보이나, 상세히 살피면 나뭇잎 등에 옅은 청색과 황색 등 부분적으로 담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가지 위에는 까치와 박새(白頰鳥)가 각각 한 쌍씩 등장하여 여태껏 조속의 영모도들이 獨鳥나 雙鳥였던 것과는 다르다.
화면 네 꼭지를 연결한 교차지역 즉 화면 중앙에 위치한 까치는 머리의 방향만 반대 방향으로 돌린 점을 제외하면 一定型(화면 내에 나무에 앉은 까치를 측면으로 나타내되 머리쪽을 좌상단에, 꼬리를 우하단으로 하여 사선상에 몸통을 비롯해 일직선이 되게 포치시킨 것)에 가까운 형태다. 다른 새들과 달리 까치처럼 큰 새는 나란히 가까이 곁에서 서로 바라보며 짖는 예가 드물다.
‘노수서작도’에서 보듯 가슴과 배를 앞으로 드러낸 다른 한 마리는 자기를 향한 까치를 애써 피하려는 듯 눈의 방향과 달리 부리로 목덜미 아래 깃을 뒤지는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이 깃을 뒤지는 동작은 까치들이 흔히 잘 취하는 동작으로 뒤에서 살피면 마치 졸고 있는 새(宿鳥) 같아 보이나 이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둘 다 입은 다물고 있어 눈동자만 빛나는데 서로의 따뜻하고 은근한 情이 십분 잘 나타나 있다.
까치를 바라보노라면 입을 마주 대고 있는 경우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그 보다는 부리를 다문 형태가 오히려 더 효과적이어서 함께 우는 여느 작은 새들의 二鳥和鳴과도 다르며, 이와 같은 모습에서 더욱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역시 까치를 오래 주시한 다음 표현이 가능한 정경으로 화본 내에서 찾기 힘든 장면이다. 다만 一定型에서처럼 목을 세워 아직 울기 바로 직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까치의 장점이기도 한 소리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데, 이 점은 까치로 인해 이차적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한 쌍의 또 다른 새로 인해 상쇄효과를 얻는다. 까치보다 작은 몸매로 좀 떨어진 가지에서 적극적인 몸동작과 부리를 벌려 和鳴하는 새와 함께 그려져 있어 차이를 보여준다. 순간의 포착은 예리한 시선으로 가능했으며, 사생에 기초해 화면구성의 妙와 사실성이 결합돼 이 같은 수작이 완성될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새와 달리 나무의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鵲圖에 있어 獨鵲은 조속 이후 梅枝에 그려짐이 일반적인데 비해, 雙鵲은 조선말기를 제외하곤 매지에 깃들게 나타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즉 조속 그림의 나무는 일견 미루나무나 포플러처럼 보이나 17세기에는 그러한 외래 수종은 우리 강토에 없었다. 꽃이 진 뒤 잎이 난 梅로 볼 수도 있겠으나, 확신하긴 어렵다. 몰골로 나타낸 老樹는 우측 화면 밖에 본 줄기가 있어 화면 우에서 좌로 상하 고루 자연스레 퍼져 있으며, 화면에 고루 적당히 전개된 배경의 나무가지들은 화면 구성의 묘를 더한다. 또한 화면 안과 밖을 넘나들며 직각으로 꺾이고 갈라지는 가지의 선이 화면을 골고루 분할하며 채우고 있다. 용필의 능숙함은 붓을 측면으로 뉘어 빠른 속도로 찍어나가듯 나타낸 역삼각형의 잎들과 줄기의 전개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노수서작도’의 그동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한국지성인이 조촐한 색채감각과 그 호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최순우)라던가 “30대 긍지에 차 있던 시기의 활력있는 그림”(최완수)이라는 평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모자이크 식으로 그려진 세모꼴의 나뭇잎 등에서 명대 임량의 영향이 느껴진다”(홍선표)라는 말에서 보듯이, 사실 ‘노수서작도’는 기본적인 화면구성과 필치 등에서 중국 명대 초기에 활동한 임량(1416경~1480)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임량 등 절강성에서 활약한 일군의 직업 화가들의 화풍상의 특징은 산수가 인물 등장을 위한 무대처럼 小景이며, 강한 흑백 대조, 거친 필치, 동적이며 어수선한 분위기 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닮은 산수가 조선 중기화단의 문인화가들로부터 시작돼 크게 유행했는데, 조속의 영모나 묵죽의 배경처리, 그리고 식물소재의 선택 등에서 임량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속은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텐데, 단적으로 훨씬 빠른 속도감으로 묵법을 구사하는 임량에 비해 조속의 묵법은 더욱 절제되고 가다듬어져 있음을 들 수 있다. 특히 가지와 잎의 표현에서 그런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암 作 모견도, 73.2ⅹ42.4㎝, 종이에 담채, 조선 전기, 국립중앙박물관. © |
그러나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과 작품의 됨됨이인 완벽성 등 여러 측면을 두루 살핀다면 조속의 ‘노수서작도’를 대표적인 화조화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암의 ‘모견도’는 동화적이고 따듯한 분위기의 그림이지만 餘技性이 짙고, 대담한 화면 구성과 활달한 필치, 전체적인 완숙미 등에서 ‘노수서작도’가 격조를 보여준다 할 수있다.
조속이 영모, 매, 죽, 산수에 능했다는 문헌들의 기록대로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영모화, 묵매화, 산수화 등 다양하지만 그중 영모화를 가장 많이 그려 영모화가로서의 위상이 높다. 17세기 화단에서 크게 주목받은 士人畵家인 조속은 그러나 화면에 자신의 款署 남기기를 기피하여 작가의 款印은 없으나 모두 傳稱作이 아닌 眞蹟으로 간주됨이 통설이다. 부친에 이어 묵매와 영모화에 이름을 얻은 아들 조지운(1637~1691)과 달리 낙관을 하진 않았으니 ‘滄江’의 묵서가 있는 수작들 역시 後款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조선 중기에 속한 화가들처럼 조속 역시 유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드물게 산수화도 몇점 남겼는데, 그 가운데 물가 풍경을 담은 ‘湖村煙凝’은 북송 米芾이 창안한 붓을 옆으로 뉘여 가로로 쌀 모양의 점을 찍는 米點을 다른 화가들보다 일찍 사용한 점에서 돋보인다. 이는 후에 정선이 진경산수에서 우리 산천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기법으로, 조속이 진경산수의 선구자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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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력있게 표현된 해학적 동심”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조속의 노수서작도 ★★★★★★★ 이암의 모견도 ★★★★ 장승업의 영모도대련 ★★★ |
中·日 화조화와의 비교
새보다는 ‘꽃’ 중심인 중국 … 일본, 화려함의 極値
중국은 용, 우리나라는 호랑이 등 나라마다 선호하는 동물이 달라 그림도 이에 영향을 받는다. 방대한 영토에 긴 역사를 지닌 중국은 일찍부터 문화전반에 있어 두루 앞서니 그림도 마찬가지다. ‘芥子園畵傳’ 등의 畵本이나 현존하는 그림을 살필 때 동양에서 즐겨 그려진 새는 상상적인 봉황, 주작, 난조, 학, 매, 해오라기, 물총새, 메추리, 꿩, 박새, 제비, 참새, 구욕새, 까마귀, 공작 등이다.
중국에 있어 화조화는 화려한 채색으로 그린 섬세하고 장식성이 강한 직업화가의 工筆과 문인들이 수묵담채 위주로 여기로 그린 사의적인 그림 등 두 계열로 나뉜다. 그 중 전자에 속하는 작품을 살펴보면, 명대 중기의 왕유열의 ‘쌍희도’를 들 수 있다. ‘쌍희도’라는 제목의 그림은 다수가 전해지는 가운데 왕유열의 것은 화려한 채색으로 중국적 화조화의 한 특성을 나타낸다.
▲王維烈 作 雙喜圖, 지본채색, 118.7x63.1cm, 17세기, 대만 고궁박물원. © |
청대 황월에 의해 붙여진 화제 “歲朝徵吉例題圖 / 披繪心祈嘉應符/ 河復工成雙報喜 / 兆民樂業寸懷愉 / 御題王維烈雙喜圖 / 臣 黃鉞 奉勅敬書(새해 아침 길조 부르려 의례껏 그림에 시를 쓰나니 / 그림 펼쳐보며 마음으로 좋은 감응 있기를 기원하노라 / 河復이 그림 완성하여 한 쌍으로 기쁨 알리니 / 억조창생 즐거운 일로 모든 마음 즐거우리 / 왕유열의 쌍희도에 황제가 시를 짓고 / 신 황월이 칙명을 받들어 공경히 글씨를 쓴다)”를 보면 중국에서도 까치가 길조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속의 ‘노수서작도’와는 달리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眞彩로 그려진 붉은 동백과 화려한 매화이다. 즉 조속이 꽃을 배경으로 삼아, 까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면 왕유열의 그림은 꽃이 중심이 되고 까치는 그 배경으로 비쳐질 정도다. 게다가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도 시선을 분산시키는 감이 있는데, 이는 장식이 많아 화려함을 강조하다보니 그러한 것이다.
▲狩野山樂·山雪 合作 花游禽圖,101.9x183.5cm, 금지채색, 京都 妙心寺 天球院, 후스마(西). © |
일본 역시 채색화가 발달했지만 중국과는 다른 양상이다. 특히 모모야마시대(1576~1615)에는 이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건축양식에 의해 장식화가 출현한다. 일본 도처에 거대한 성이 건립됐고, 天守閣이라 불리는 거대한 석축 위에 전각을 세웠으며, 이들 건축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산수, 고사인물, 노송, 단풍, 모란, 화조, 초충 등을 소재로 한 障屛畵가 왕성하게 등장하며, 16~17세기에 전성기를 이뤘다.
그 중, 모모야마 양식의 끝을 장식한 카노 산라쿠(1559~1635)가 나이 70이 넘어 양아들 산세츠(1590~1651)와 함께 그린 ‘花遊禽圖’를 보자. 우선 큰 건물 내부를 구획하는 미닫이, 즉 후스마와 병풍 그림인데, 커다란 화면에 대담하고 힘찬 필치가 돋보인다. 금지에 과장된 매화나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데, 나뭇잎이 화려한 붉은 색으로 표현돼 사실성과는 거리가 있다.
매화나무 아래 위치해 있는 푸른색의 나뭇잎 역시 화려함을 자랑한다. 화면 오른쪽에는 괴석 위에 꿩이 앉아 있는데, 일본에서는 섬나라인 까닭에 실제로 까치가 드물어 중국이나 한국처럼 까치가 그림의 소재로 택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꿩은 그 자체가 가장 화려한 색을 띠고 있는 조류라서 이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진다. 일본 화조화의 화려함 때문인지, 이들에게 중국 그림은 수묵담채로 그린 그림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화조화를 중국이나 한국과 비교할 때 때론 경직되고 형식화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출처-교수신문 5.30
[출처] (6) 조속(趙涑)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작성자 반딧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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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속(趙涑) 1595년(선조 28)∼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서화가. 허목의 미수기언 인물록
조속(趙涑) 1595년(선조 28)∼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조경온(趙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취병(醉病). 병조참판에 추증된 조수륜(趙守倫)의 아들이며, 문인화가 조지운(趙之耘)의 아버지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퇴하였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으며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받았다.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함에도 구애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梅)‧죽(竹)‧산수와 더불어 수묵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특히, 까치나 수금(水禽) 등을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에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明代)의 수묵사의화조화가(水墨寫意花鳥畵家)인 임량(林良)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국특유의 정취 짙은 서정세계와 상통되는 것으로,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조지운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이하영(李夏英) 등에게로 이어졌다. 그 밖에도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와 같이 주목되는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미법(米法)을 기조로 하여 다루어진 〈호촌연의도〉는 조선시대 남종화(南宗畵)발전의 초기단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역대명필들의 글씨에도 관심을 보여 그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의 수집활동을 시작한 이 방면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와 〈매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梅鵲圖)〉 등이 있다.
기언 제63권 습유
시(詩)
창강 노인(滄江老人)에게 보냄 을사년
나의 꿈에 동남신녀가 현문을 밟으니 / 我夢東南神女躡玄門 오만 구멍 성난 듯 바람 소리 들리네 / 萬竅譹號聞天風 암담한 그 상태에 천지가 막혀 / 形開黮黯天地閉 불어대던 온갖 소리 조용해지고 / 吹萬皆死 귀에선 여운만 응응거린다 / 空響在耳常喁喁 기쁜 일 놀라운 일 다 안 들리고 / 可喜可愕皆不聞 서글픈 마음은 혼돈 세계 빠져서 자취 없이 노는 듯 / 心忡忡如入沌混遊無蹤 사람 보고 벙어리처럼 큰소리치며 / 望人大語如愔啞 의아하게 흘겨보고 바보같이 웃으니 / 視如疑笑如癡 옆의 사람 손뼉 치며 귀먹었다 웃어대네 / 傍人拍手笑我耳全聾 창강 노인은 장님된 지 오래이니 / 滄江老人久已盲 애닯다 이 사람은 운명의 탓이런가 / 咄嗟斯人天所窮 나 또한 온갖 일 떨쳐 버리고 / 我亦塊然謝機括 세상일 관심 없이 칩충처럼 산다네 / 深居不窺如蟄蟲 같은 세대 함께 나 백가서 다 읽고 / 兩人竝世皆讀百家書 천고의 일 토론하며 뇌동은 않네 / 歷談千古無雷同 한 사람 귀먹고 한 사람 눈먼 것도 하늘의 뜻 / 聾一人瞽一人亦天意 우리 두 사람은 어기지 말고 / 令我兩人莫相違 거공같이 서로가 의지하면 / 長相從如駏蛩 귀머거리 볼 수 있고 장님은 들을 수 있으니 / 聾能視瞽能聽 두 사람 한 몸같이 즐기게 되어 / 兩人相樂如一身 이루의 눈 밝음과 사광의 귀 밝음 부럽잖으리 / 不羨離婁明師曠聰 근심과 즐거움 서로 도와 가면서 / 但願世間憂樂兩相須 큰소리로 하늘께 사례를 하고 싶네 / 放言大噱酬天公
記言別集卷之八
용주(龍洲)의 교외 집에서 조희온(趙希溫)에게 준 소서(小序)
3월 16일 우중(雨中)에 창강(滄江) 조희온과 용주공의 손령초당(蓀嶺草堂)에서 만나 봄날의 경치를 감상하였는데, 녹색을 띤 시냇물은 맑디맑고 꽃은 만개하였으며, 앞산에는 철쭉이 천 겹으로 펼쳐져 있었다. 희온과 이별한 이후 수년 사이에 나는 매우 노쇠하였건만, 희온은 70여 세의 나이에도 아직 정력이 왕성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희온이 평생에 심산 대해(深山大海)를 유람하면서 바라보았던 절경(絶境)을 이야기하고 이어 동방의 문묵 고사(文墨古事)까지 언급하였는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는 회상을 품게 하였다. 용주공이 그를 위하여 칠언 절구 2수를 지어 주기에 미수는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주C-001]용주(龍洲) : 조경(趙絅, 1586~1669)의 호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별호는 주봉(柱峯)이다. 미수보다 9세 연상으로 막역한 교유를 맺었다. [주C-002]조희온(趙希溫) : 조속(趙涑, 1595~1668)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희온 또는 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ㆍ취옹(醉翁) 등이다. 미수와 동갑이며, 부친은 조수륜(趙守倫)이다.
龍洲郊舍。贈趙希溫小序。 三月十六日雨中。與滄江趙希溫。相遇於龍洲公蓀嶺草堂賞春。溪水綠淨。花滿發前。▒躑躅千層。與希溫相別數年。吾衰甚。希溫七十餘。精力尙強。酌話終日。希溫爲言平生所遊歷深山大壑曠望絶境。仍及東方文墨古事。使人聞之。懷想無窮。龍洲公爲作七言二絶贈之。眉叟。識。
기언 별집 제10권
발(跋)
진선(進善) 조속(趙涑)의 금석첩(金石帖)에 씀
지금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의 진선(進善) 조군(趙君)이 금석첩(金石帖) 4책을 보여 주었는데, 대단히 기이하여 내가 매우 재미있게 보아서 피로한 것도 잊었다. 옛날 절의 탑과 산의 비석과 바다의 빗돌과 큰 묘에 새긴 글들이 한 자도 빠짐없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신라에서부터 1천 1백 년이 지나는 동안 글씨로 후세에 이름난 사람은 최 학사 치원(崔學士致遠), 김생(金生), 탄연(坦公), 시중 이군해(李君侅), 안평 공자(安平公子)와 근세(近世)의 양사언(楊士彦), 황기로(黃耆老), 한호(韓濩), 백광훈(白光勳) 등과 같은 사람들인데, 그 글씨가 모두 이 도서첩에 들어 있다. 여기에 들어 있는 사람이 무릇 87인이니, 넉넉히 우리나라의 문헌을 자랑할 만한 증거가 된다. 나는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최 학사(崔學士)의 쌍계사비(雙溪寺碑)를 보았고, 이끼 낀 사이에서 또 석문(石門)의 대자(大字)를 보았으며, 청량산(淸凉山)에 놀러 갔다가 김생의 굴을 보았고, 해인사(海印寺)에서 또 김생의 글씨를 보았으며, 동해로 나가 양봉래(楊蓬萊)의 갈필(葛筆)로 쓴 글씨도 보았는데, 나는 이런 것을 대단히 좋아했었다. 지금 나는 이미 늙었고 여러 난리도 겪었으며 또 세월도 30년이나 지났으니, 고적(古跡)은 많이 매몰(埋沒)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도서첩을 조군에게서 얻어 보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마음에 깊은 감회가 생기는구나. 조군은 학식이 넓고 성품이 고아하며 옛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옛날 글씨를 좋아한다. 일찍이 명산 대택을 구경하여 옛날 글씨를 본 것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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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거목들의 명화읽기(24)...창강 조속(滄江 趙涑)
창강 조속(滄江 趙涑)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 희온(希溫), 호 창강(滄江)·창추(滄醜).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하고, 효종 때 시종(侍從)에 뽑혔으나 역시 사양했다. 그러나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장령(掌令)·진선(進善)을 지낸 적이 있다.
경학(經學)과 문예·서화에 전념하였으며, 영모(翎毛)·매죽(梅竹)·산수(山水)를 잘 그렸는데, 특히 영모는 중국풍의 형식을 벗어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果川)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舒川)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金堤)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창강일기(滄江日記), 그림으로 흑매도(黑梅圖) 매작도(梅鵲圖) 지상쌍금도(枝上雙禽圖), 글씨로 조회양은렴비(趙淮陽恩廉碑: 扶餘), 좌찬성이계맹비(左贊成李繼孟碑: 金堤)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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