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들은 인터넷 파도타기를 통하여 여러 곳에서 모셔 왔음으로 원문의 그림과는 다름.
조선후기 무명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민화 가운데 까치호랑이그림은 가장 다양한 표현으로 많이 그려졌던 소재다. 즉 민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독창성이나 뛰어난 화법으로 인정받기보다는 그 표현과 소재에서 당시의 민중의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에 홍선표 교수가 까치호랑이 그림의 의미와 다양한 변모를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한국에서는 최근 발견된 1592년작(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까치호랑이그림이 늦어도 조선전기부터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炳蔚之風’이란 화제명과 出山虎의 도형, 그리고 제화시에 의거해 풀이해보면, 호랑이가 산속 안개에 숨어 7일 동안 먹지 않으면서 털갈이를 해 대인군자처럼 빛나는 위광을 지닌 문채를 이뤘으나 세인들에게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는데, 대낮에 여우와 이리가 호랑이를 가장해 횡행하므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위세를 보이며 힘차게 출림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배경목인 큰 소나무도 군자를 상징하며, 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까치는 호랑이의 출산에 놀라는 驚鳥이거나 혹은 이를 기뻐하는 喜鳥로 보인다. 이런 주제의식은 조선전기의 사대부상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결부된 것으로, 당시 사군자가 한 벌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하고 意趣的인 수묵화조화와 더불어 고사인물화(儒의 이상적 가치기준을 고대의 성현들에게서 찾으려는 정신)가 소경인물화(산수는 배경이고 인물중심으로 그린 것) 형식으로 성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호작도> 울산박물관 구입품(구입 2010년)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까치호랑이그림은 전기의 교화적 기능과 달리 정초에 잡기와 악령을 물리치는 액막이용 문배그림으로 그려 붙이던 풍습이 성행함에 따라 벽사용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호암미술관소장의 ‘까치호랑이’를 보면, 호랑이 특유의 번쩍이는 안광과 猛氣를 강조하기 위해 눈과 입을 모두 크게 과장해 그림으로써, 생동감 있는 표현보다 상투화된 과장성이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줄무늬는 활달하게 굽이치는 물결처럼 강조돼 발랄함을 느낄 수 있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 두 마리는 호랑이에게 산신령의 어떤 명을 받아 전해주려 온 듯 보이며, 호랑이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호랑이는 이 그림에서처럼 坐虎형이 있고, 또 걸어나오는 出山虎도 있는데 둘 모두 송대에 수립된 것이다. 얼룩 줄무늬 역시 원체풍의 전통을 따라 가는 먹선으로 그려진 것이 있고 묵면으로 도안화해서 그린 符籍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그림은 묵면으로 줄무늬가 강하게 표현됐음을 알 수 있다.
<늘푸른나무/명화감상/2014년 9월>
조선시대의 민화 <까치 호랑이>
까치 호랑이(조선 후기) 작가 미상 종이에 채색 86.7x53.4 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런 까치호랑이그림은 흔히 비사실적 과장성으로 인해 해학적 요소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虎逐三災라 하여 정초에 이 그림을 집집마다 붙였던 걸 감안한다면 벽사적 목적성이나 욕구과잉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시정과 향촌에 만연한 기복호사 풍조를 배경으로 급증한 수요에 따라 이들 액막이와 치장그림을 공급하는 ‘俗匠’ 또는 ‘환장이’의 출현과 더불어 민화양식이 대두하게 됐으며, 다양한 표현과 더불어 민화화된 까치호랑이그림이 가장 많이 그려졌다. 1766년 이덕무는 집집마다 그려 붙이는 이들 그림이 기능화 내지 도식화되는 현상을 개탄하기도 했다.
호랑이와 까치가 결합된 도상적 상징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까치는 길조로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호랑이는 맹수로서 잡귀를 막아준다는 길상벽사적 해석을 비롯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서낭신의 사자인 까치가 신탁을 호랑이에게 전하는 모습이라는 무속적 풀이와 슬기로운 까치와 골탕 먹는 호랑이 이야기를 나타냈다는 민담적 해설, 그리고 횡포한 양반관리를 상징하는 호랑이를 꾸짖고 조롱하는 착한 백성인 까치를 은유해 그렸다는 사회풍자적 해석 등이 있다. 민담과 사회풍자적 관점의 경우 흔히 호랑이는 바보같은 모습으로, 까치는 당당한 모습으로 설명된다.
도상의 성립에 대해서는 표범과 까치를 함께 그려 그 讀音에 의해 ‘報喜’라는 뜻을 나타내는 중국 길상화에서 유래돼 표범 대신 한국식의 호랑이로 변용됐다는 전래설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 고유의 자생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자생설의 맥락에서 까치호랑이그림을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말기에 이르러 松虎圖나 맹호도와 같은 사대부 수요의 권위적이고 격식을 갖춘 도상이 무명의 환장이들에 의해 파괴되고 변형된 진솔하고도 재밌는 표현방식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즉 원체풍의 송호도와 같은 정형을 해체하고 새롭게 태어난 민중적 형식의 역사적 소산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송호도에 까치가 없으면 정통회화로, 있으면 민화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런 관점 역시 까치호랑이의 도상을 정형에서 이탈해 19세기 전후 새롭게 수립된 화제로 인식한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호랑이와 새의 조합은 이미 6세기의 남북조시대에 대두됐고, 소나무가 새의 관찰대로서 호랑이그림의 배경목 구실을 하는 화면 구성은 10세기 초 오대에 성립됐으며, 까치호랑이그림은 북송대에 대두해 도상은 14세기의 원대에 확립된 것이란 사실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민화류 까치호랑이는 1969년 신세계화랑의 ‘호랑이 전’에 첫 공개된 후, ‘우리 고유’의 ‘민족상징화’로 각광받았으며, 1970년대 ‘한국주의’의 팽배속에서 민화붐을 선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족주의 민화관의 핵심 화제로 인기를 누려온 까치호랑이그림은, 호랑이와 이를 향해 등 뒤의 소나무 가지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는 까치를 소재로 유형화한 것이다.
▲ 17세기 ‘조경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흉배에 등장하는 호랑이 도상(위 사진)과 19세기 말 민화 ‘까치호랑이’(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2005년 서울역사박물관 민화전에 전시된 구라시키민예관 소장품에는 장례 때 악귀를 쫓는 탈인 方相氏처럼 네 개의 눈을 가진 호랑이도 있었다. 이처럼 평면적으로 단순화되고 多시점으로 구성된 파격적인 변형은 서구의 모더니즘이 발견한 순수 원시주의 조형의식이라기보다 선사시대 이래의 呪力과 신명을 지닌 부적풍의 靈媒的 양식의 오랜 전승성의 반영이며, 붉은 색의 액센트는 악령을 퇴치하고 신령을 즐겁게 했던 고대 단청 전통의 계승으로 여겨진다.
까치호랑이그림 외에 조선 후기 민화류에서는 문자도가 널리 유행했다. 한자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조형예술로 한자의 의미와 조형성을 드러냈는데, 삼강오륜의 사상을 반영하거나 현세의 행복, 장수, 안락을 희망해 동식물을 곁들여 병풍그림으로 많이 그렸다. 하지만 장식성이 강한 문자도와 달리 까치호랑이 그림은 시기적 변화를 담고 있다는 데서 차별성이 있다.
가령, 부적풍 까치호랑이는 원체풍과 달리 이마를 넓게 그리고, 눈을 노랗게 칠해 고양이 모습으로 변모됐는데 이는 조선말기 전염병인 호열자를 옮기는 것을 쥐귀신으로 믿고 이를 몰아내기 위한 의도인 듯하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報喜’의 상징과 함께 시끄럽게 짖으면서 ‘虎患’을 경계하는 ‘靈鵲’으로서의 기능도 지니고 있기에 이런 벽사성을 보강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벽사성이 강조된 민화류 호랑이는 일본에서도 그 효험성을 인정했던 듯, 19세기에는 해마다 동래를 통해 매그림과 함께 구입해 감으로써 수출화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민화’라는 개념은 1차세계대전 후 서양중심의 세계사를 일본중심의 동양주의로 초극하기 위해 민예미를 부각시킨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명칭은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민간화로 부르고 있다. 중국의 민간화는 衛畵, 畵張 등으로 지칭되다 청말기에 명명된 年畵가 주류를 이룬다. 연화는 고대의 桃符板과 문배그림에 원류를 둔 것으로, 송대에 세시풍속과 결부된 제액과 송축용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명 후기부터 민간수요가 급증해 목판화로 대량 제작됐다. 청대에는 수많은 연화 제작 공방이 생겼는데, 화공과 조판공, 인쇄공, 표구공 등이 분업해 제작했다.
양류천 연화는 길상화 중심으로 북경의 전판판화와 궁궐화의 영향을 받아 선각이 정밀하고 세련된 특징을 지녔으며, 도화오의 연화는 길상화와 함께 성시경관과 교훈적인 제재도 많이 다뤘고, 연속그림인 連環畵와 서양 동판화의 투시법 등을 수용해 명징하면서 화려한 경향을 보였다. 양가부의 연화는 문신을 비롯한 신상 위주로 과장된 형태와 간략한 선묘에 색채 대비가 심한 양식을 특징으로 제작됐다. 이러한 청대의 목판 연화는 베트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쳐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 제작 판매되고 있으며, 소주 연화는 일본 에도시대의 錦繪와 見立繪 형성과 문자도 및 경직도와 唐子圖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 민화의 주류는 에도시대의 서민용 祈福그림인 大津繪와 繪馬, 又又六繪이다. 특히 大津繪는 오츠지방에서 동해도의 여행객들을 위해 토산물로 팔던 민예적 그림으로, 柳宗悅이 이를 지칭하기 위해 ‘민화’란 용어를 만들었다. 먹으로 간략하게 그린 후 붉은 색과 녹색. 황색 등으로 채색한 粗畵이며, 민간신앙과 결부된 불교판화에서 시작해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그리는 토속적인 戱畵가 되었고 수요의 증가에 따라 판화로도 제작됐다. 한국의 경우는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부적류를 제외하고 판화로 다량 제작하는 전문 공방제도가 구축되지 못했고 주로 육필로 그려졌다. 도상과 표현 양식에서 원체풍의 저변화와 함께 청대 천진과 산동 지역 연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치졸하고 분방, 주략한 화풍은 명말 이래 경덕진 民窯에서 민간화공인 ‘瓷畵工’들에 의해 그려져 휘주 상인들을 통해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으로 수출된 청화백자 문양들과 더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어서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호환도
다반사였다. 이와 비례해 호랑이와 관련한 이야기와 문화가 발달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虎談國·호담국)'라고 부르기도 했다.
호랑이에 대한 우리의 유난한 애증은 현대에도 이어져 호돌이를 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내세우는 데까지 이르렀다.
까치호랑이', 신재현, 1934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드디어 화해를 한 호랑이와 까치.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왼쪽)
제주 용눈이오름 까치호랑이', 19세기, 일본민예관 소장.그림 속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른다.호랑이는 눈에 노란 불을 켜고 붉은 입을 벌린 채 구석에 있는 까치를
가차 없이 몰아세운다.까치는 이에 질세라 한껏 부리를 벌리고 꼬리를 높이 세우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오른쪽)
호랑이와 까치, 다윗과 골리앗
민화 쪽에서도 호랑이 그림, 특히 까치호랑이 그림의 인기가 매우 높다. 한국적인 특색을 강하게 나타낸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까치와 호랑이가 짝을 이루는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그 원류는 임진왜란 때 우리 땅에 전해진 '유호도(乳虎圖)' 또는 '자모호도(子母虎圖)'란 명나라 그림(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돌보는 모습을 표현)이다. 명나라식 까치호랑이는
이후 꾸준히 한국화됐다. 급기야 19세기 민화에서는 그 뿌리를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호랑이 그림으로 자리 잡았다.
까치호랑이 그림에서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길상(吉祥)의 상징이고 호랑이는 액을 막아주는 벽사(邪)의 상징이다. 호랑이 대신 표범이 등장하기도 한다. 표범 표(豹)자의 중국어 발음(바오)은 알린다는 뜻의 보(報)자와 같다. 까치는 기쁨(喜)을 뜻하므로 까치표범 그림은 보희(報喜), 즉 기쁨을 전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까치호랑이 민화는 단순히 길상과 벽사의 상징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풍자를 원래의 상징에 덧붙였다. 이런 까치호랑이 그림에선 무서워야 할 호랑이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작은 까치가 기세등등하게 등장한다. 호랑이들은 백수의 왕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사팔뜨기 호랑이, 고양이 같은 호랑이, 담배 피우는 호랑이, 거세된 호랑이, 까치의 눈치를
살피는 호랑이 등 얼빠지고 우스꽝스러운 '바보호랑이' 등 종류도 많다.
여기서 호랑이는 권력을 내세워 폭정을 자행하는 관리를 상징하고 까치는 힘없는 서민을 대표한다. 사회에 대한 비판, 특히 지배계층의 푸대접에 대한 불만이 민화 속에 우화적이고 해학적으로 표출된 것이다.이런 그림에는 권위적인 존재를 자신들과 같이 평범한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서민의 평등의식이 담겨 있다. 실제로 까치는 더욱 당당해져 호랑이에게 대들거나 호랑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기도 한다. 만일 호랑이가 덤비면 까치는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고 보면 민화 까치호랑이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호랑이가 아니라 까치라고 볼 수도 있다. 호랑이 그림에서 까치가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은 민화 속에서만 가능한 역설이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르네상스 서양에서도 어린 소년 다윗과 거인 장군 골리앗의 싸움을 담은 그림이 가톨릭의 권위에 대항하는 신교도(프로테스탄트)의 상징으로 인기를 끌었다.
까치의 꿈은 무엇일까
1930년대에 그려진 신재현의 까치호랑이(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에서 호랑이와 까치는 드디어 첨예한 대립에서 벗어나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선다. 그림 속 까치와 호랑이는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하다.그림 위쪽 가운데에 씌어 있는 '호랑이가 남산에서 부르짖으니 까치들이 모두 모여들다(虎嘯南山 群鵲都會·호소남산 군작도회)'란 문구가 이 그림의 분위기를 전한다. 어미 호랑이는 예쁘게 속눈썹을 치장하고 밝게 웃고 있고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이 덕분에 까치들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긴장을 풀고 호랑이의 초대에 흔쾌히 응하고 있다. 그림 전체가 밝고 명랑한 정서로 가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재현의 그림 속 호랑이는 권위로 지배하기보다 백성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지도자를 상징한다. 이런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높은 것은 깎아내리고 낮은 곳은 돋워서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 이야말로 호랑이 민화에 깃들어 있는 까치의 꿈일 것이다.
*<동아일보/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과) 2011.11.26>
정병모 교수는…
'민화를 세계로'란 목표로 세계 각국에 소장된 우리의 민화와 외국의 민화를 조사하고 있다.
'반갑다 우리민화전'(서울역사박물관),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전'(부산박물관), '중국민화전'(가회민화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여러 국제 민화 세미나에서 조언하기도 했다.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시와 경북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저서로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Korean Art Book-회화', '사계절의 생활풍속', '한국의 풍속화' 등이 있다.
▲도 1. <까치호랑이>, 1880년경, 종이에 채색, 96.0×57.0㎝,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소장
구한말의 민화 시장에서 거래된 민화 가운데 판매된 시점을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동일 양식의 그림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를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이 소장한 <까치호랑이> 한 점을 통해 심도 있게 살펴보았다. 한 점의 기준작을 실마리로 삼는다면, 비슷한 양식의 그림을 찾고, 그것의 경향을 확인하며, 나아가 양식의 계보를 검토하는 미술사적인 연구방법이 가능하게 된다.
19세기가 저물어 가던 1888년, 서울 광통교廣通橋 인근의 민화 시전市廛에 한 영국인 신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가판대에 놓인 여러 점의 민화를 사들였다. 그는 조선을 여행하러 온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Charles Varat(1842~1893)였다. 바라가 구입한 민화는 훗날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일괄 기증되었다. 외국으로 건너가 박물관으로 들어간 민화였기에 약 1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때 바라가 구입한 그림 가운데 <까치호랑이>(도 1) 한 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그림이 민화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1888년의 시장에 나와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무렵에 그린 것이겠지만, 정확한 시점은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구입 연도를 알 수 있기에 기준작으로 삼는 데는 문제가 없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수많은 까치호랑이 가운데 기준작은 불과 몇 점에 지나지 않는다. 기년작紀年作이 거의 전하지 않는 민화연구에서 이처럼 기준작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샤를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는 머리에는 표범 문양이, 몸은 호랑이의 줄무늬 형상을 하고 있다. 호랑이의 몸체는 황색, 얼굴의 눈과 입을 비롯한 배경의 소나무 둥치는 적색, 그리고 얼룩무늬는 토황색을 띠고 있는데, 약간의 공식화된 채색처럼 보인다. 호랑이의 형태는 사실적인 묘사보다 약간 도식화圖式化된 특징을 취하였다. 눈여겨 볼 부분은 머리 부분이 매우 조형적으로 디자인된 점, 호랑이 다리의 관절 부위에 원형圓形의 문양이 들어간 점, 그리고 발 부분을 큼직하게 그리되 희게 남겨 두었다는 점이다.
바라가 구입한 그림과 비슷한 형식의 <까치호랑이>(도 2)를 조자용趙子庸(1926~2000) 선생이 쓴 『한호韓虎의 미술』이라는 책에서 찾았다. 이 그림은 정월正月에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이 세화歲畵로 그린 것을 민간 화가들이 베껴 그린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호랑이 귀 끝의 톱니 모양은 사람을 해칠 때마다 하나씩 생기는 징표라고 해석하며 전형적인 민화 까치호랑이로 보았다.
이와 더불어 같은 형식을 보이는 또 한 점의 <까치호랑이>(도 3)가 가나아트의 소장품으로 전한다. 앞의 그림들과 비교하면, 화면의 전체 구성과 호랑이의 동세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머리의 점무늬가 조금 더 촘촘하고, 뒤편 소나무의 묘사도 약간은 구체적이다. 이런 특징으로 볼 때, 가나아트 소장의 <까치호랑이>는 1888년보다 앞선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세 점의 까치호랑이는 주요 특징을 서로 공유하고 있지만, 그림만 전한다면 제작시기를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나머지 두 점의 그림도 1888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의 크기로 볼 때, 가옥의 벽이나 방문에 붙이는 문배그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빠트릴 수 없는 또 한 점의 그림이 미국 해군장교 버나도J.B. Bernadou가 수집한 <까치호랑이>다.(도 4) 그는 샤를 바라보다 앞선 1884년에 광통교 인근에서 여러 점의 민화를 구입했다. 거기에도 <까치호랑이> 한 점이 들어 있었다. 버나도가 구입한 이 그림은 흑백도판으로 소개되었는데,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와 양식이 유사하다. 다만 일어선 동세를 취했지만, 얼굴의 호표형虎豹形 특징, 몸체의 줄무늬 방식, 발을 크고 희게 그린 점 등은 앞서 살펴본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버나도가 구입한 <까치호랑이> 역시 19세기 후반기에 유행한 또 하나의 형식임을 말해준다.
<까치호랑이>의 양식적 계통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의 양식은 어떤 계통에 넣을 수 있는 그림일까? 그 양식적 계보를 알아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는 19세기 까치호랑이 그림의 한 유형에 불과하지만, 이를 기준으로 하나의 양식적 범주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한 그림으로 조자용 선생이 소개한 바 있는 개인소장의 <청룡백호도 靑龍白虎圖>(도 5)를 살펴보았다. 8폭 병풍의 첫 폭과 끝 폭에 청룡과 백호를 그렸고(도 5-1), 나머지 화면에는 청록산수화 기법으로 산봉우리 세 개를, 그리고 폭포와 넘실거리는 물결을 그렸다. 묘사와 채색이 정치한 수준을 띠고 있어 전문 화원화가의 솜씨로 추측된다. 성급히 짐작해서는 안 되지만, 여기에 그려진 호랑이는 화원이 그린 화원양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특히 오른쪽 첫 면에 그려진 백호는 검은 줄무늬 위에 세필細筆로 흰털을 밀도 있게 묘사함으로써 백호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또한 도식화가 진행되지 않은 점, 청록산수의 뛰어난 색감, 파도의 문양, 구름과 운룡雲龍을 그린 필치가 매우 치밀하여 전체적으로 수준 있는 화격畵格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채색을 곁들인 산수와 폭포의 묘사는 궁중양식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연상하게 하여 화원의 그림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 청룡백호도>에 그려진 백호의 주요 특징은 바라가 구입한 그림에도 나타나는데, 바라가 사들인 <까치호랑이>의 선행 양식이 바로 <청룡백호도>의 백호와 같은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청룡백호도>는 기본적으로 19세기 중엽 이전 양식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이 그림에 나타난 특징들은 궁중 화원들이 그린 호랑이 양식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서 예시한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와 같은 양식을 취한 그림에도 빠짐없이 나타나 있어 하나의 계통으로 이어져 온 도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궁중화원 양식의 민간화라는 측면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삼성미술관 Leeum이 소장한 <까치호랑이>(도 6)는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와 친연성이 있으면서도 앞서 본 <청룡백호도>의 백호를 모방하여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호랑이는 머리를 앞으로 내밀어 목덜미가 곡선을 이루었지만, 기본적인 동세와 머리의 표현, 기타 몸의 얼룩무늬 묘사에 있어 앞서 본 그림들과 공통점을 보인다. 다리의 관절 부분에 있는 문양도 앞의 그림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19세기 후반기에 유행한 까치호랑이 그림은 20세기 전반으로도 이어지며 계승되었다.
조자용 선생이 호덕虎德이라 불렀던 <까치호랑이>(도 7)가 바로 20세기 이후의 연장선에서 논할 수 있는 그림이다. 특히 호랑이 발을 크고 희게 그린 것은 같은 계통에 속하는 주요 특징이라 생각된다. 호덕이라 불린 <까치호랑이>의 선행 양식을 19세기 말 광통교 인근에서 그려진 그림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그림은 묘사력이 부족한 화가라도 디자인 감각이 돋보인다면 훌륭한 까치호랑이를 그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민담民譚과의 관련성
바라가 구입한 <까치 호랑이>와 같은 형식의 그림을 민담民譚과 관련하여 살펴보자. 일찍이 호랑이 관련 민담과 설화를 호랑이 그림과 연결하여 해석하고자 한 분은 조자용 선생이다. 선생은 이를 통해 까치와 호랑이가 등장하는 그림의 배경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학술적인 고증에 이를 수 없는 한계도 분명했다.
필자는 처음 <까치호랑이>의 흰 발을 보고서 문득 밀가루를 발에 묻혀 엄마의 손이라고 아이들을 속였다는 호랑이 옛날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약간 어색한 감은 있지만, 연관성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였다. 일반적인 호랑이 그림에는 발을 몸체의 일부로 묘사했지만, 바라의 <까치호랑이>의 경우는 분명 화가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가 떠올린 옛날이야기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것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라는 민담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민담 속의 어머니가 남매를 두고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떡을 하나씩 받아먹었고 나중에는 어머니까지 해치고 만다. 그리고 어머니를 가장하여 남매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남매는 어머니의 손을 보여 달라고 하자, 호랑이는 발에 떡가루를 묻힌 뒤, 떡을 만진 손이라고 남매를 속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호랑이의 흰 발은 이 민담의 내용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 민담은 문을 열어준 남매가 나무위로 도망간 뒤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이야기 속의 호랑이는 발에 떡가루까지 묻히는 속임수를 썼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류의 호랑이가 이 민담 속의 호랑이가 아닌가 가정해 본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장면은 까치 한 마리가 얄미운 호랑이를 조롱하고 있는 장면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호랑이를 선량한 백성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탐관오리에 비유한 해석과도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광통교 인근에서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류의 그림은 민담의 모티프를 적용한 그림으로 여러 점이 매물로 나와 있었는데, 이는 수요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또한 광통교의 시전에는 까치호랑이 그림을 공급하는 화가군畵家群이 있었고, 그들은 하나의 화파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어떤 그림의 양식적 특징을 살피고, 그것의 선후관계를 따져 그림의 제작 시기를 파악하는 작업은 미술사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다. 언제 그린 그림인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그림이라면, 작품의 의미를 풀어가는 데에도 많은 이야기 거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연구방법을 적용한 사례가 축적될 때, 민화의 학술적 토대는 점차 더 견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연구의 축적이 필요한 이유이다. 샤를 바라가 구입한 <까치호랑이>가 1888년의 기준작이라는 사실은 이와 관련된 호랑이 그림의 양식사적 맥락과 의미를 알아보는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었음을 알아보았다. 민화의 양식사를 다룬 후속 연구에 유용한 시사점을 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artminhwa.com/까치호랑이-그림-기준작을-살피다/
⑭ 민화-까치호랑이 그림
임두빈 교수l승인0000.00.00l1219호 7면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까치호랑이 그림은 벽사수호적인 의미로 새해 첫날, 집안에 걸어놓았던 그림이다. 조선시대 전기부터 그러한 의미로 까치호랑이 그림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성현(成俔)의 용제총화(傭齊叢話)나 홍석모(洪錫謀)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등에서 알수가 있다.
호랑이는 옛 부터 우리 겨레의 설화속에 자주 등장해 온 동물이다. 대체로 우리 겨레가 생각해온 설화속의 호랑이는 착한사람과 정의로운 사람을 돕고 악한자를 징벌하는 존재였다. 이는 맹수로서의 호랑이가 지닌 무서운 힘과 겨레의 자연에 대한 깊은 친화감내지 경외감이 결합된 결과로서 나온 독특한 성격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호랑이는 산신(山神)과 같은 존재로 생각되거나 산신의 사자(使者)로 여겨져 왔다. 호랑이에 대한 이런 생각이 벽사수호(擘邪守護)적인 의미로 민화속에 호랑이를 등장하게 한 것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에서 까치가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 이유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삼국시대의 사신도에서 주작과 백호가 같이 등장하는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이는 까치를 호랑이의 신탁을 전달하는 사자로 보기도 하는데, 소박하게 생각하면 까치는 우리 겨레에게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길조이기에 서민들이 벽사수호적인 의미의 호랑이와 함께 민화 속에 그려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까치호랑이 그림은 이런 종류의 그림 가운데 최고 수준의 회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림이다.
▲ 미묘한 혼재성이 느껴지는 까치호랑이 그림.
우선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그려진 호랑이의 몸체는 그 대담한 배치법이 매우 파격적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을 보면 일반적으로 화면에 어느 정도의 공간성을 고려하면서 여유있게 호랑이가 배치되기 마련인데, 이 그림에서는 그러한 통념이 파괴되고 있다.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통상적인 공간적 여유와 거리감을 무시함으로써 사물은 그 현실적 모습으로부터 일탈되어 나와 미묘한 추상적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추상적 조형미와 구상성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 화면 전체에 넘실대는 줄무늬와 점무늬의 풍부한 시각적 울림은 현대의 추상화를 방불케 하고 있으며, 그러한 시각적 울림이 단순한 형식적 차원으로 주저앉지 않는 이유는 호랑이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풍부한 표현주의적 묘사 때문이다.
해부학적 비례 관계를 과감히 무시하면서 이 민화 제작자는, 자신의 내적 정서에 조응하는 변형의 방법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호랑이의 몸은 발에서 얼굴에 이르는 동세가 원형 구도를 그리면서 응집된 힘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기순환적 힘의 응집력이 화면에 활기를 주고 있다.
이렇게 응집된 에너지는 두 발과 꼬리를 통해 힘차게 외부로 뻗고 있으니, 두 앞발과 꼬리의 방향성은 응집된 힘의 원형적 움직임에 변화를 주기 위한 힘의 작은 방출구이다. 여러 방향으로 끊임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역동적인 대상 표현과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중층적 이미지, 추상적 형식미와 구상성과의 미묘한 혼재 양상 및, 이 모두를 하나로 융화 시키며 강렬히 뻗어 나오고 있는 조형의 에너지는 이 그림을 영원히 살아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