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0. 16:33ㆍ美學 이야기
한국의 美 - 최고예술품을 찾아 (8)일월오봉병 우주의 원형 속에 담은 영원성에의 所望 … 독창적 조형성 괄목할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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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화는 민화의 한 종류이지만 사적이면서 장식성이 강한 일반 민화와 구분되는 회화의 한 갈래다. 이 분야에서 최고의 예술품으로는 단연 임금의 어좌 뒤에 놓였던 ‘일월오봉병’이 꼽힌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 화면에 수놓아진 상징적 의미가 중요한 감상의 포인트로서, 음양오행의 원리 속에서 우주의 구성과 왕권의 표상물을 조화롭게 거느리고 있다는 데서 그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다. 김홍남 관장이 기존 연구(‘18세기의 한국미술’)를 바탕으로 ‘일월오봉병’의 작품특징과 회화사적 의미를 짚어봤다. 궁중화를 언급할 때 조선왕조의 중요한 왕권표상물인 일월오봉병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궁실내의 어좌 뒤에 놓여져, 황태자가 있는 곳에도 허락이 되지 않은 오직 왕을 상징하고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死後에도 동반됐고, 왕이 여행할 때나, 알현실, 眞殿(왕의 초상화를 모셔두는 곳), 魂殿(돌아가신 왕의 神主檀을 宗廟로 옮기기 전에 임시로 모셔두는 곳) 등에 배설되기도 했다.
해와 달은 각각 陽과 陰으로 음양은 우주를 이루고 지속시키는 두 가지 힘인데, 둘이 동시에 떠 있어 원초적 단일성이 회복되는 영원한 시간을 의미한다. 좌우로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다섯 봉우리가 있다. 이는 五嶽을 상징하는데, 중국의 경우 동악의 太山, 서악의 華山, 남악의 衡山, 북악의 恒山, 중악의 嵩山을 가리키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동악의 금강산, 서악의 묘향산, 남악의 지리산, 북악의 백두산, 중악의 삼각산이 해당된다. 산은 녹색과 청색의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해, 큰 봉우리는 굵은 청색의 선으로 그렸고, 작은 바위들은 녹색으로 채색했다. 오악을 설정하고 신격을 부여하는 것은 산신에게 제사하는 한국인의 천신사상과도 연결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상서로운 소재인 해, 달, 오악, 물, 음양의 상징물들은 자연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에서 18세기까지의 유물이 증거하듯 고대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에 의해 전개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주제와 소재들은 주술적 효과와 통치의 수단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동서양 및 각 민족에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주제와 소재에서 중국의 周왕조에서 漢왕조까지 전개된 궁중전통을 잇고 있다 하더라도 그 주제의 성질과 회화상의 표현기법은 한국 민족의 사고체계, 종교, 정치이념, 그리고 조형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조선의 궁중회화는 법식에 맞는 권위와 장엄을 창출하고 왕조에 대한 하늘의 성스러운 축복의 표상과 하늘이 힘을 내려주도록 기원할 때 신비한 효험으로서 작용케 하기 위한 고안품이었다.
각 소재는 가장 특징적인 형태, 색채, 질감을 선택해 본질적 성격을 드러내는 데 치중하고 있으며, 고도로 양식화되고 과장된 것 또한 비슷하다. 다만 일월오봉병에는 동물그림이 아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큰 차이인데, 십장생도가 私的이면서 기복적 성격이 강한 것이라면, 일월오봉병은 항상 권위의 상징성을 지닌 엄격한 구성을 갖춘 公的인 그림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더욱이 십장생도는 화려한 극채색과 장식적 처리가 눈에 두드러져 마치 지상낙원과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데,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과장성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김홍남 / 국립민속박물관장·미술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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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오봉병
동의어 우주관의 반영과 왕조의 무궁한 발전의 기원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 펼쳐져 있는 그림이 일월오봉병이다. 궁궐에서는 주로 병풍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으나, 그림 자체를 말할 때는 일월오봉도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월오봉병은 정전에서 뿐만 아니라, 왕이 참석하는 흉례나 길례의식의 장소에도 의전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선대왕들의 초상과 신주를 모신 선원전에도 설치되었다. 다섯 봉우리의 산, 파도 치는 바다, 흘러내리는 폭포, 짙푸른 적송, 그리고 해와 달을 기본 소재로 하는 일월오봉병은 좌우대칭 구도를 기본으로 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옛사람들의 우주관과 음양 사상, 천명 사상과 길상 관념이 농도 짙게 응축돼 있다.
해와 달이 그려지지 않았던 일월오봉병
지금은 일월오봉병에 해와 달이 나타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오봉병 자체에는 해와 달이 그려지지 않았다. 현종 원년(1659)에 제작된 『효종빈전도감의궤』를 보면 오봉병을 제작하되 오채로 오봉산, 적송, 수파(水波)를 그린다고만 되어 있을 뿐 해와 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숙종 대의 의궤에서도 그냥 '오봉병'으로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의전용 병풍 그림의 화의가 오봉산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그와 같은 예에 속하는 그림인 〈오악도벽장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어 그간의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의궤를 보면, 당가 천장에 두 자 길이 정도의 철사로 일월경(日月鏡)을 매달아 오봉병 화면 위를 스치듯 내려오게 하여 해와 달을 대신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일월경과 오봉병이 한 세트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대상(大喪) 이후로 일월경 사용이 중지되면서 금은니(金銀泥)로써 해와 달을 화면에 직접 그려 넣는 방법이 사용되었고, 19세기 후반부터 현재 남아 있는 일월오봉병처럼 해와 달을 붉은색과 흰색(또는 노란색)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상징, 해와 달
천지를 다른 말로 광악(光嶽)이라 한다. '광'은 삼광(三光), 즉 하늘의 해·달·별을 가리키며, '악'은 땅의 오악(五嶽)을 일컫는다. 해와 달은 하늘의 대표적 상징이고, 오악은 땅의 대표적 상징이다.
옛사람들에게 하늘은 자연질서는 물론 인간의 사회질서까지 관장하고 주재하는 존재였다. 천명(天命), 천의(天意), 경천(敬天) 등의 말은 하늘이 정의와 도덕의 근원으로서, 따르고 존경해야 할 대상이었음을 시사해준다. 맹자는 하늘의 상징인 일월에 대해, "밝음의 덩어리이므로 빛을 받아들일 만한 곳은 반드시 모두 비춰준다"라고 했다. 이는 왕을 일월에 비유해서 한 말로 해와 달이 천지를 밝히듯이 왕은 백성들은 물론 미물까지 덕으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일월오봉병의 해와 달은 음양 이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해는 양의 대표적 상징이고, 달은 음의 대표적 상징이다. 해를 붉은색으로 칠하는 것은 해의 양기가 극할 때가 정오이며, 정오는 오행상으로 화(火)에 해당하고 오행색으로는 붉은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을 흰색으로 칠하는 것은 달의 음기가 극할 때가 달이 서쪽으로 질 때며, 서쪽은 오행상으로 금(金)에 해당하고 오행색으로 보면 흰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를 그림의 왼쪽에, 달을 오른쪽에 배치하는 것은 동양 고래의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이다. 동양의 전통 방위 관념에서는 남북 자오선상에서 남향한 상태를 방위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기준에 의하면 그림의 왼쪽(향해서 오른쪽)이 동쪽이 되고, 오른쪽(향해서 왼쪽)이 서쪽이 된다. 또한 해는 동쪽에서 뜨고 달은 서쪽으로 지므로, 좌(左) — 동(東) — 일(日), 우(右) — 서(西) — 월(月)의 도식이 성립된다.
천하의 산들이 모이는 오악
일월오봉병의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다섯 봉우리의 산은 오악을 의미하며, 땅의 대표적 상징이다. 중국에 있어서는 태산(동), 화산(서), 형산(남), 항산(북), 숭산(중악)이 오악에 해당하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금강산(동), 묘향산(서), 지리산(남), 백두산(북), 삼각산(중악)이 오악으로 설정돼 있다.
오악은 말 그대로 '다섯 개의 크고 높은 산'이지만 오악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좀 더 넓고 깊다. 오악의 '5'라는 수는 동양 상수학(象數學)의 기본인 1~9의 수 가운데 중앙에 해당한다. 중앙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포용하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오악은 천하의 모든 산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일월오봉병에서 오악을 자세히 보면 중앙에 있는 산이 좌우의 산들보다 앞쪽에 크게 그려져 있고, 좌우의 산들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어지게 표현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동서남북 사방의 산들이 중악에 포섭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월오봉병, 우주의 이치를 그리다
일월오봉병의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는 두 줄기의 폭포와 파도치는 바다다. 아래로 곧게 흘러내리는 폭포는 복잡한 준법 사용으로 다소 어지러워진 화면 분위기를 단숨에 정리해낸다.
폭포와 바다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 '강한조종어해'(江漢朝宗於海)라는 말이 나온다.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바다에서 조종(朝宗: 朝會)한다'는 뜻이다. 지상의 모든 물줄기가 아직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미 바다로 달려가는 형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백관들이 궁궐로 모여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물이 바다로 모여드는 것에 비유했다. 그림에서 두 줄기의 폭포는 그 아래쪽에 펼쳐진 짙푸른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 이는 천하가 임금에게 귀의하고 백관이 조회함을 상징한다.
바다는 그 크기와 깊이를 말하자면 측량하기 어렵고, 유구함을 말하자면 만고에 변함이 없다. 바다가 크고 깊은 까닭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 바다를 거두는 것이 두텁고도 넓은 땅이고, 땅과 바다를 모두 포용하는 것이 하늘이다. 그래서 하늘은 참으로 크고도 큰 것이다.
일월오봉병에서 폭포로 상징되는 물줄기를 수용하는 바다는 땅을 상징하는 오악에 포용되고, 오악은 중악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중악은 일월로 상징되는 하늘에 포용되므로 결국 모든 것이 하늘에 포용되는 셈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하늘로부터 모든 것이 분화돼 나오면서 산이 생기고 물이 생기고 나무가 생긴다. 일월오봉병은 이러한 우주의 이치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일월오봉병의 파도는 산수복해(山壽福海)라고 하는 동양 고래의 길상 관념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바다의 조류, 즉 조(潮, cháo)는 조정(朝廷)의 조(朝, cháo)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조정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백관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파도 문양을 수놓은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뜻의 소나무
소나무는 세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유교적 절의와 지조, 둘째 탈속과 풍류, 셋째 장수 또는 장구의 상징이 그것이다. 여기서 일월오봉병의 소나무는 장수나 장구의 상징으로서 그려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 소나무가 최초로 장구의 상징성을 얻게 된 것은 『시경』의 「천보(天保)」에 나오는 장생수로서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
시 「천보」의 내용 중에, "소나무 잣나무 무성하듯이 임의 자손 무성하리"(如松栢之茂 無不爾或承)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소나무가 지닌 장생수로서의 속성을 인간사에 대비시킨 구절이다. 이에 연유해서 소나무를 장수를 축원하는 상징어로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천보」는 단순히 왕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아니라 국가의 기업(基業)이 장구하고 공고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시이다. 따라서 일월오봉병의 두 소나무는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뜻을 담은 소나무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월오봉병의 문을 열고 어좌로
어좌단 뒤쪽에 설치된 일월오봉병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경첩과 문고리가 달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일월오봉병에 여닫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일월오봉병에 문이 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갔다가 환궁하여 어좌에 오를 때에는 정전 정면의 어도를 따라 월대의 답도를 지나 당가 정면의 층계로 오른다. 한편 편전에 머물고 있던 왕이 정전으로 들어갈 때에는 정전 뒤쪽 어칸 문을 통해 어좌에 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 궁궐 정전 당가의 계단을 주목해보면, 근정전과 중화전의 경우 당가 사방에 설치된 네 개의 계단 중에서 북쪽의 계단 폭이 가장 넓다. 이는 왕이 정전 안으로 들어와 당가에 오를 때 이 계단을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리해보면 편전에 대기하고 있던 왕은 정리(廷吏)의 안내에 따라 일단 정전 뒤쪽의 문을 통해 정전 안으로 진입한다. 이어 앞에 보이는 당가의 계단을 올라 이미 열려 있는 일월오봉병의 문을 나와 어좌에 앉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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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일월오봉병
(우주관의 반영과 왕조의 무궁한 발전의 기원)
화대백과사
전
일월오봉도
시대 | 조선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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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용어 |
분야 | 예술·체육/회화 |
개설
4첩, 8첩, 혹은 좁은 한 폭 짜리 협폭(挾幅), 또는 삽병(揷屛) 형식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여러 가지 의궤(儀軌) 기록에 의하면, 이 병풍은 ‘오봉산병(五峰山屛)’, 또는 제일 많은 경우 단순히 ‘오봉병(五峯屛)’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 문헌기록의 명칭을 따라 오봉병(五峯屛)이라고 불러야 한다.
특징
조선후기 대다수의 오봉병은 크기나 폭에 관계없이 다음과 같은 형식상, 구도상의 특징을 보인다. 1) 화면의 중앙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가장 큰 산봉우리가 위치하고 그 양 쪽으로 각각 두개의 작은 봉우리가 협시(挾侍)하는 양 배치되어 있다. 2) 해는 중앙 봉우리의 오른편에 위치한 두 작은 봉우리 사이의 하늘에, 달은 왼편의 두 작은 봉우리 사이의 하늘에 떠 있다. 3) 폭포 줄기는 양쪽의 작은 봉우리 사이에서 시작하여 한두 차례 꺾이며 아래쪽의 파도치는 물을 향해 떨어진다. 4) 네 그루의 적갈색 수간(樹幹)을 한 키 큰 소나무가 병풍의 양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바위 위에 대칭으로 서 있다. 5) 병풍의 하단을 완전히 가로질러 채워진 물은 비늘모양으로 형식화되어 반복되는 물결무늬로 문양화(文樣化) 되어있다. 산과 물의 경계선 또는 작은 봉우리 같은 형식화된 물결들의 사이사이, 혹은 그 두 군데 모두에 위로향한 손가락을 연상케 하는 역시 형식화된 하얀 물거품들이 무수히 그려져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국왕의 일상생활이나 궁중의 각종 의례에서 오봉병이 차지하는 막중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봉병의 도상(圖象)이나 그 유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몇몇 학자들은 『시경(詩經)』「소아(小雅)」의 「천보(天保)」시에 묘사된 다섯 종류의 산봉우리, 즉 산(山), 부(阜: 언덕), 강(岡: 산등성이), 능(陵: 큰 언덕), 그리고 남산(南山)에서 오봉(五峯)의 도상이 유래한 것임을 제시한 바 있다. 「천보」시는 신하들과 귀빈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고 그를 위하여 하늘과 조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시이다. 이 시에는 “여(如)◯◯...”라는 형식으로 아홉 가지 자연 현상이나 물체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다섯 가지 물체들은 산(山), 부(阜), 강(岡), 능(陵), 그리고 천(川)이며 이들은 하늘이 내린 왕을 보호하는 물체들이다. 나머지 네 가지는 통치자가 자신의 미덕을 실행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들은 초승달이 차츰 차올라오며 보름달이 되는 것, 매일 아침 어김없이 떠오르는 해(日), 남산(南山)의 장수(長壽)와 소나무와 잣나무(松柏)의 번성과 푸르름이다. 즉 이들은 자연의 일상(日常)이자 불변의 법칙이다. 오봉병의 다섯 봉우리는 ‘보호’와 관련된 네 종류의 ‘산’과 미덕과 관련된 무궁함으로 상징되는 남산(南山)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이전의 것으로 현재의 오봉병과 같은 주제를 그린 그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남송(南宋)의 마화지(馬和之, 12세기 초 활동)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을 여러 장 그렸는데 이 가운데 「천보(天保)」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산수화의 형태를 취한 이 그림은 산의 양쪽에 해와 달을 각각 그려 넣고 제목을 ‘천보’라고 적어 넣기는 하였지만 위에서 살펴본 천보시의 모든 요소를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천보(天保)」보다 더 형식화된 형태는 1605년 초간(初刊)된 『정씨묵원(程氏墨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먹[墨]의 표면에 찍는 도안을 목판화로 그린 것이다. 『정씨묵원』에 적힌 제목은 「천보구여(天保九如)」이다. 이 판화 그림에서는 산봉우리들이 조선시대의 오봉병에서와 같이 완전히 형식화되지 않았고, 가운데 봉우리의 왼쪽에 있는 달은 오봉병에 보이는 보름달이 아니라 반달이다. 실제로 시에 표현된 “차오르는 달”을 보다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 역시 우리나라 오봉병의 것들처럼 화면의 양쪽 끝으로 각각 갈라져 두 개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지 않고 보다 자연스러운 나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마화지(馬和之)의 산수화적인 표현과 매우 형식화된 조선의 오봉병의 중간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오봉병들 가운데 간기(刊記)가 적혀있거나 그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오봉병은 단 한 좌(座)도 없다.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 뒤에 있었던 4첩 병풍이 그 구도(構圖)로 보아 다른 병풍과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우선 4폭의 크기가 모두 같지 않다. 가운데 두 폭은 247×86cm이고, 양쪽 가의 두 폭은 247×78cm로서 전체 크기는 247×333cm이다. 물결무늬로 가득한 물과 흰 포말부분이 병풍의 전체 높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점이 다른 오봉병과 다른 점이다. 이 병풍에서 오봉과 일월이 마치 바다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두 폭포가 구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오봉병은 『정씨묵원』의 「천보구여」장면을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모든 요소들이 훨씬 형식화되어 배치되어 있다. 경기전의 오봉병은 임진왜란 후 파괴되었던 경기전을 1614년 새로 복원하여 어진을 봉안하였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의 오봉병에 관하여는 당가(唐家) 안 북벽에 오봉을 그리고 동서 벽에는 여록(餘麓)을 그리고 일월경(日月鏡)을 주벽에 철사로 걸어놓는다는 기록이 1674년 『현종대왕 빈전도감의궤』에 보인다. 1758년의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도설(圖說)에는 당가의 그림은 있으나 오봉병의 그림은 없고 일월경을 걸되 새로 만들어야 할 경우 금니(金泥)와 은니(銀泥)로 칠하라는 말이 있어 원래는 모종의 금속으로 만들어 쓰던 것을 영조(英祖)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비용절감 차원에서 새로운 규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선조 23년(1590)에 문정전(文政殿)에 도둑이 들어 어좌 일월경과 문장(門帳)을 도둑맞아 피의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어 어좌에도 일월경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봉병과 일월경의 관계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황
오봉병은 현재 각 궁궐의 정전 어좌 뒤에 대형 병풍, 그리고 1921년에 창덕궁에 건립된 신선원전의 12개 감실(龕室)에는 팔첩 오봉병과 협폭(挾幅) 오봉병이 당가(唐家) 안에 실제로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국왕이 참석한 각종 행사의 그림 속에 국왕이 앉는 자리에 화중화(畵中畵)의 형식으로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개인 소장으로 크고 작은 오봉병이 남아있다. 그 밖에도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오봉병들이 남아있고 최근에 공개된 문짝 형태의 오봉병들도 있다.
의의와 평가
오봉병은 조선시대 궁궐 의례(儀禮)와 관련되는 중요한 그림이다. 그 도상적 연원(淵源)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매우 독특한 형태로 발달한 국왕의 존재를 상징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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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어진관련 의궤와 미술사』(이성미, 소와당, 2011)
- 『중국 한국미술사』(김홍남, 학고재, 2009)
- 『동양화 읽는 법』(조용진, 집문당, 1989)
- 「조선왕실 흉례의 의장용 병풍의 기능과 의미」(신한나,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문 2008)
- 「조선시대 오봉병 연구 - 흉례도감의궤 기록을 중심으로-」(명세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7)
- “The Screen of the Five Peaks of the Chosŏn Dynasty”(Yi Sŏng-mi, Oriental Art, vol. XLII, no. 4, 1996/97)
2007년 12월 27일 (목) 17:50 뉴시스
유리건판 궁궐사진전-일월오봉병
전통적으로 조선시대 궁궐 안 임금의 어좌 뒤에는 특별한 형식의 병풍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체로 두 줄기 폭포가 흐르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 그림 하단엔 굽이치는 물결과 두 그루의 소나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해와 달이 떠 있는 병풍이다. 지금까지 20여점의 작품이 남아 있는
이러한 병풍을 일러 조선 후기 궁중 기록은 ‘오봉산병五峯山屛’ 혹은 ‘오봉병五峯屛’ 이라 전한다.
현존하는 4 개의 궁궐에 모두 남아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오봉병’은 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과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으나 중국 정전에서 사용된
기록이 없고 일본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특유의 전통이라 보여진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오봉병이 지닌 국가적인 기능과
심오한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보여지는데, 이것은 오직 군주만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어좌, 옥새와 마찬가지로 왕권의 상징이었다. 또한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고 유가적 통치원리에
따른 천명을 받는 군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天保’의 표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그림은 우주론적 도식을 보여주는데,해와 달은 하늘을, 다섯 개의 봉우리와
굽이치는 물결은 땅을 나타낸다. 따라서 군주의 존재는 세계와 우주의 축의 정점에 위치하며,
이때 비로소 天地人을 하나로 통일하는 매개자가 된다. 따라서 상징적 의미는 임금이
병풍을 배경으로 어좌에 앉아 해와 달 사이에 자리했을 때 완성된다.
일월오봉병의 양식적 특징
현존하는 병풍은 1폭에서 다폭까지 다양하고 크기와 세부표현에서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형식과 구성이 동일하다. 여기서는 해, 달, 산이라는 자연의 요소들이 사실적인 모습보다는
원형과 삼각형 등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상들로 도식화되어, 간결하고 원시적이며
순수하게 표현되어 있다. 윤곽은 여기저기 먹으로 처리되고, 색채는 전체적으로 오방색의 범위 안에서
빨간색의 해와 주황색의 소나무, 하얀색의 달, 청록의 소나무 잎과 산 표면,
희고 푸른 색의 선이 교차되는 물결, 흰색의 물결꽃, 푸른 배경 등 화려한 광물성 안료를 사용하였다.
산만이 예외적으로 다양한 각도의 짧은 붓질로 암석들과 거친 표면을 처리하여 험준함과
중량감과 입체감을 살려 산의 특색을 표현하려고 했다.
물결의 표현은 구비치는 선의 수평적인 반복으로 도식화되어 있고 장식적인 느낌이 크다.
전체적으로 형식은 단순하고 원형적이다. 그림은 깊이감과 동감의 환영적 표현이 배제되어 있고
구성이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적이고 도식적이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고정적이고 정적이며
좌우로 나란히 원형으로 묘사된 해와 달은 정지된 상태에서 시간을 초월한 우주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순차적, 연속적 형태를 동시적, 불변적 형태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적 논리성을 거부한다. 그것은 정지된 영원한 상태의 표현이며,
바로 이 ‘기이한’ 명료성 속에서 직설적이면서 함축적인 상징적 의미를 발산하는 듯하다.
이 때문에 그림의 형상은 하나의 아이콘이 된다.
일월오봉병의 도상과 해석
오봉병의 도상은 종교 이전시대의 주술적이고 정령주의적인 祭天전통의 측면,
도교의 불로장생과 신선사상의 측면, 음양오행론적인 측면, 유가적인 측면,
그리고 한반도의 전래의 산악 신앙과 五嶽전통(오악의 신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
‘지리산’남악, ‘삼각산’중악, ‘묘향산’서악, ‘금강산’동악, ‘백두산’북악)의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해와 달 그리고 산의 도상은 자연세계와 그 신령한 힘의 표현으로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고대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산은 하늘과 대비하여 가장 강력한 땅의 상징이다.
산은 일반적으로 세 개나 다섯 개의 봉우리로 표현되는데
산을 나타내는 중국의 상형문자 山(세 봉우리)을 형상화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도교적 도상학의 측면으로, 일월은 天界를 나타내지만,
이 경우는 불로의 신선이 거주하는 천계를 나타낸다.
음양오행론적인 측면으로 해는 양陽, 달은 음陰, 5개의 봉우리는 五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의 일월오봉병에서 음양을 상징하는 일월과 다섯 개의 봉우리가 함께 도상화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의 오봉이 음양오행의 오행을 표상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한반도 고유의 하늘 개념, 산악신앙, 그리고 오악 전통의 반영도 고려 할 수 있겠다.
한국적 하늘(天, 하느님)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포함한
삼성(환인.환웅.단군)에 대한 숭배이며, 이들은 곧바로 ‘하늘’과 연관되어 있다.
그림 옆의 두 그루의 우람차고 준수한 소나무를 비중있게 그린 것은
소나무에 대한 한국적 정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도상해석적 측면들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의 어좌에 설치된 왕권의 상징물인 일월오봉이
고대부터 중국에서 전래된 음양오행 사상과 유교 전통이 한국의 祭天사상과 혼합되어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여 제작된 독자적인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일월오봉병의 역사적 전개
일월오봉병이 가리개나 병풍형식으로 제작되어 어좌 뒤에 배치된 것은
조선 왕실의 전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명.청 황실은 물론이고,
한반도에서도 조선 왕조 이전인 고려 왕조의 어좌에도 설치되었던 기록이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조의 오봉병의 고안은 고전적인 전통의 지속이 아니라
조선 개국 때, 개국과 한양 천도, 그리고 신제도 수립과정에서 새 왕조는 주나라의 제도와 사서오경에서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한 모델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왕씨에서 조선의 이씨로의
역성혁명이 하늘의 뜻이며, 이씨 왕조가 무궁한 천보를 누릴 것이며, 왕좌에 오르는 제왕이
위로는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는 성군이라는 정표와 고려 왕조와 확연히 구분되는
왕권 상징물을 고안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제작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은 조선 초기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신수도의 성곽과 종묘, 사직, 경복궁의
주요 설계자였던 정도전인데, 그는 고대 유교경서에 능통했고 다재다능한 성리학자로서 <주례>와
그 건축적인 규범에 매우 조예가 깊은 철저한 고전주의자였다.
또 궁궐 내의 모든 전殿, 당堂, 문門, 각閣의 이름을 짓는 영광을 국왕으로부터 부여받고,
‘근정전’ 등과 같이 대개는 유가적 정신에 충실한 이름을 지었다.
비록 정황적이긴 하지만 왕권의 최고 상징물 중의 하나인 오봉병의 발의와 고안이
그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오긴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홍남 논문집] 중에서
<조선시대 ‘일월오봉병’ 에 대한 도상해석학적 연구 - 군주와 유교적 통치의 원리>
이 글은 주로 ‘민속’의 범주 안에서 다루어지던 ‘오봉병’에 대해 미술사학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연구로 1989년에 발표되었다.
일월오봉병과 정도전
五峯屛은 조선왕권의 표상이며, 우주 이치를 가장 극적으로 도식화하여 표현한 일종의 산수도이다.
대개 병풍의 형식으로 제작된 오봉병은 임금이 앉는 용상의 어좌 뒤편에 설치되었고,
임금이 임하는 모든 정사를 지켜보았다. 오봉병에는 천지를 나타내는 해와 달이 있고,
오행의 상징으로 화, 수, 목, 금, 토의 의미로 그려진 다섯 개의 산봉우리들이 있으며,
그 앞에 물이 경이롭게 펼쳐져 있고, 양 옆으로 붉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왕이 어좌에 앉으면 天, 地, 人 곧 우주를 이루는 삼재의 조화가 완성된다.
왕은 모든 이들 중의 으뜸이라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역>과 <노자>에서 네 가지 법상(위대한 근본의 상)으로 천지와 四時(사시), 해와 달,
그리고 땅 위의 성인, 즉 ‘부귀의’ 왕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 왕이야말로 하늘이 창조하는 神物(신물)을
본뜨고 천지의 변화와 변형을 본뜨고, 하늘이 보여주는 길흉을 가늠하는 가장 숭고한 자로 정의내리고 있다.
김홍남은 그의 논문집에서 ‘일월오봉병’이 왕권의 상징물로 고안된 것이 그 이전까지 내려온
고전적인 전통의 지속이라기보다는 조선 개국시로의 주도면밀한 회귀였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고 개국 후 태조 7년까지
최강의 정치 권력을 행사한 정도전이 있었으며, 나아가 일월오봉의 도상이
그의 발의와 고안에 의해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연구해왔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전의 ‘조선왕조의궤’가 유실된 상태라 정확한 자료를 찾지 못해
안타깝지만, 연구해온 결과 宣祖시대 이전, 즉 조선 전기부터 이미 어전의 당가에
오봉을 표현한 병풍과 해와 달을 상징하는 거울, 즉 일월경을 조합하여 일월오봉의 도상이
사용되고 있었고, 이 두 부분이 ‘일월오봉병’으로 합쳐져 사용된 것은 영조대 부터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일월오봉의 도상이 조선 개국 시기에 나왔을 가능성과 또 그 배후로 정도전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정황상의 근거를 알아보았다.
첫째, 오봉병 최초의 제작이 개국 직후 즉 태조 재위초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다.
한양 천도가 이루어진 개국 초에는 새 궁궐과 종묘. 사직이 세워지고 국왕이 참여하는
모든 의례와 의전이 정비되었으며, 국왕.왕후.왕태자 등과 문무백관의 의관을 재정비하는 작업과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당가에 놓일 의장과 장엄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고려왕조와의
차별화가 시도되었고 신왕조의 어좌에는 전 왕조에서 사용했던 도끼병풍이나
서예(중국에서도 사용됨)로 된 병풍대신 신왕조의 정치철학과 기상을 표현할
새로운 의장을 고안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바, 오봉병은 이씨 왕조가 하늘의 뜻을 받았고,
무궁한 천보를 누릴 것이며, 왕좌에 오르는 임금이 위로는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는
성군이라는 징표로 고안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이러한 왕권 상징물인 오봉병의
고안이 개국군주인 태조 재위 이후보다는 신축 경복궁에 태조가 입궐하여 정사를 보게 될 근정전에
어좌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보여진다.
둘째, 조선 전기에 이미 어좌에 일월오봉의 도상이 사용된 것은 확실하나, 영조 시기 이전에는
그림으로 표현된 오봉이 1 폭 가리개(일종의 병풍)의 형태로 설치되고 그 앞에 좌우로 해와 달을
표현하는 두 개의 거울(즉 일월경)을 걸어 전체적인 일월오봉의 도상을 완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오봉병은 왕권의 최고 상징의장으로 정전의 당가 외에도 왕이 공식적으로 거동하는 자리에
설치해야 하는 필수 의전품이었다. 그 상징성과 국가적 중요도를 고려한다면 그러한 발의와 고안을
할 수 있는 자는 고위 신료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조건에 가장 맞는 인물이 바로 이성계와 함께
역성혁명을 이끈 조정의 제2인자 정도전이라 생각된다.
셋째, 정도전은 1392년 개국 후 시해당한 1398년까지 7년간 명실 공히 신왕조의 최고 실권자였고,
태조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의탁했다. "개국 초기를 당하여 무릇 큰 정책에 있어서는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니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라고 조선초 문신 신숙주는 기술하고 있다. 정도전이 문집인 <삼봉집> 과
그가 지어 임금에게 올린 <조선경국전><경제도감><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내 정도전
관련 기록들은 정도전이 전방위적인 인물로 정치,경제,군사,법률,예악,음양,역법,건축,성리학,
문학,음악,미술 등에서 신왕조를 위한 모든 기틀을 세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넷째, 궁극적으로 오봉병은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천명한 正寶位의 조형적 구현이다.
그는 정보위 속에서 신왕조에 대한 천명과 천보, 그리고 성군의 유교적 이상국가를 그리고 있다.
다섯째, 정도전은 무엇보다 ‘건축의 정치’‘예술의 정치’ 를 이해했던 인물이다. 그의 모든 행보가
신왕조 조선을 유교적 이상국가로 건설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은
문헌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주요한 결정과 행위의 의미와 타당성을
문장의 힘을 빌려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기록하였다. ‘경복궁’이라는 이름도 군자(태조)가
만년 장수하고 큰 복을 받기를 바라면서 지었다 한다. 그리고 그는 궁궐에서부터 친위의장대의
노부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국왕의 존엄을 나타내기에 충분할 만큼 장엄하고 아름답고,
화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국왕의 의전에 ‘한 가지도 불완전한 것이 없게’
해야만 했던 완벽주의자 정도전의 노력과 근정전과 그 안의 의전물들, 왕을 둘러싼 노부들,
그 속에서 위엄과,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보는 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도록 설치되었던
일월경과 오봉병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다.
여섯째, 정도전은 조선 초의 궁궐 문화와 예술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도시설계자, 건축가였고,
시인이며 음악가로 거문고도 즐겨 연주하였고, 이미 고려 왕조에서부터 아악과 제례악을 관할하였고,
신왕조에서도 궁궐음악을 도맡고 있었다. 특기할 것은 그가 공신초상화 제작을 제도화함으로써
조선시대 초상화 전통의 기틀을 세웠다는 점이다.
일곱째는 정도전의 尙古主義와 조선 궁궐 건축과 미술에서 보이는 상고양식과의 관련성이다.
정도전이 고대 중국의 주나라 제도와 예악을 깊이 숭상하였다는 것을 문헌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철저한 성리학자이며 고전주의자로서 개국과 한양천도, 신왕조의 도읍설계, 관제, 의례의
재수립 과정에서 보인 정도전의 상고주의적 정신은 ‘태조실록’의 다양한 기록과 문집인 ‘삼봉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주나라의 제도와 사서오경에서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한
이론적 근거와 모델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도 확연하다. 특히 도성과 궁궐, 종묘와 사직의 설계에서
중국의 고전 <주례>의 ‘고궁기’ 의 음양오행론적 건축철학을 충실히 따랐다.
王都에 대한 <주례>의 규범은 고대 유가사상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보여주는데,
唐代 로부터 그 예법이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졌다. <주례>에 따르면 궁성은
한 변의 길이가 9리인 정방형으로 설계되고, 사면에는 각각 3개의 문을 두어야한다.
수도에는 남북방향으로 9개의 도로가 있는데, 각 도로의 폭은 9대의 마차가 통과 할 수 있어야 한다.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정면의 궁궐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는 종묘가 오른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고 뒤에는 시장이 위치하도록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은
중국 황실의 제후국으로 그 위계질서에 따라 하향 조정된 규모와 문의 수, 그리고 지형적인 제약으로
동편으로 뽑은 시장의 위치만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주례>의 규범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지형적 조건으로 인한 수도와 궁궐의 불규칙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왕궁은 상징적으로
동서남북과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축이 교차하는 四方 개념의 우주적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이러한 우주적 사방 개념의 공간구조는 다시 각 공간 내부에서 축소된 규모로 반복되었는데
경복궁의 근정전은 개념적으로는 동서남북 축 위에 대칭적으로 배열된 궁궐 공통의 수직축에 위치한다.
왕좌, 정전, 궁궐, 왕도, 왕국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동일중심을 공유하는 사각형 안에
확장, 축소되고 있는 우주철학적인 도식화라고 할 수 있다. 오봉병은 어좌 위에서
이 도식화된 표상의 정점을 장식하는 결정체였다. 그리고 왕이 오봉병의 해와 달의 중간에
정좌할 때 그는 이 우주적 공간의 핵이 되는 것이다.
정도전은 궁원 건축과 의전품과 궁궐 공예와 복식은 왕조의 정통성, 정치적 권위,
그리고 통치자의 의례적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서 ‘사치스러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장엄함과 화려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음양오행을 상징하는 오색단청은
우주의 영험한 기운과 천복의 상징적 채색이었고 화려한 장식 수단으로, 결국 궁궐의 장엄을
위해서는 오색단청의 사용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오봉병을 포함한 궁궐회화에서도
금빛과 청록으로 빛나는 고대적 이상향의 세계를 장엄하게 펼쳐내야만 했다. 또 이들은 보는 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왕과 왕실을 우러러보도록 할 목적에 맞게 서술적이기보다는
직설적인 도안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개국을 맞아
정도전의 발의로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오봉병은 조선 궁궐미술의 상고양식을 대변하며,
정도전의 상고주의 미학을 반영하고 또 그가 품었던 유교 이상국가에 대한 정치적 야망을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김홍남 논문집] 중에서
2008년 11월 16일 국제학술대회 “경계를 넘어서: 한국회화 국제학술심포지엄”
<조선 궁중예술의 상고양식: ‘일월오봉병’과 정도전 - 예악정치와 상고주의>
오봉은 인의예지신의 오행과 5대 명산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을 의미한다. 오봉은 다섯 명산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 땅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이해하고 싶다. 다섯 봉우리는 다섯 개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보다는 다섯 오(五) 5가 지니고 있는 동양의 상수 개념에서 주는 의미가 더 크다. 상수의 기본인 1~9의 수 가운데 5는 중앙이다. 중앙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한다. 오악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산을 상징한다.
오악의 좌우에는 이 두 쌍의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존재로 그 의미를 해석한다. 옛 선비들은 소나무를 절개와 장수 탈속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 되얏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은 단종에 대한 충절을 낙낙장송으로 노래하고 있다.
십장생 중의 한 가지인 소나무는 장수의 상징이다.
일월오봉도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흰색으로 그려졌다. 물은 바로 생명의근원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곧잘 어수(魚水)가 등장한다. 물을 임금으로 때로는 백성을 물로 표현하면서 군신관계를 강조한다.
파도는 조정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미술사학자 허균은 일월오봉병에서 우주질서를 읽어내고 있다.
"일월오봉병에서 폭포로 상징되는 물줄기를 수용하는 바다는 땅을 상징하는 오악에 포용되고 오악은 중악으로 집중된다.그리고 중악은 일월로 상징되는 하늘에 포용되므로 결국 모든 것이 하늘에 포용되는 셈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하늘로부터 모든 것이 분화돼 나오면서 산이 생기고 물이 생기고 나무가 생긴다.일월오봉병은 이러한 우주의 이치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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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오봉병>은 임금님의 권위를 상징하면서 임금님의 의자인 어좌 뒤편에 놓여진 병풍이다. 임금님의 초상화(御眞) 뒤에도 일월오봉병이 놓여졌다고 한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개의 봉우리와 산 아래 넘실대는 물이 그려져 있다. 일원오봉병의 의미를 해와 달, ㅇ므양과 오행으로 설명하거나 해와 달, 왕과 왕비, 다석개의 봉우리는 전 국토로 표현하면서 왕실의 권위와 번영 그리고 나라의 발전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월오봉병은 중국과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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