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7)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

2017. 4. 30. 14:39美學 이야기



      

[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7)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


                                                                                                        강경숙



蓮池의 생태까지 자연스럽게 재현 …보기만해도 즐거워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높이 22.7㎝ 입지름 4.8㎝ 굽지름 8.4㎝, 15세기 전반, 호림박물관. (앞면)



   분청사기는 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이지만, 점점 상감청자 조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변모를 갖추게 되었다.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한 분청사기 유물은 상당량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것 하나 콕 짚어서 “최고다”라는 의견이 나오진 않았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에 따르면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과 ‘분청사기철화어문병’이 “가장 아름다운 분청사기”로 꼽히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강경숙 교수가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의 아름다움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분청사기하면 “무기교의 기교”요, “무계획의 계획”으로 한국미술의 특징을 말한 고유섭의 표현이 먼저 떠오른다. 기교는 의도가 개입된다면, 무기교는 의도된 바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의도된 바 없는 표현은 진정성과 순수함이 느껴진다. 기교와 멋으로 잘 준비된 상차림은 막상 먹었을 때 별맛이 없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러나 오래 숙성된 된장의 구수한 맛은 잊혀졌던 고향을 떠오르게 하듯 원초적인 향수를 느끼게 한다. 분청사기의 맛은 순수함과 구수한 즐거움을 전달한다. 이것은 장인으로서 학습한 경계를 훌쩍 넘어 분방한 즐거움으로 만든 작품이다. 여기에 때로는 익살스러움이 더해져서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쓱쓱 그린 선은 바로 연이 되고 모란이 되고 새와 물고기가 된다.



과감한 배치와 생략기법 돋보여
   그 중에서도 전해지는 박지 분청사기에는 현대인의 미감과 어울리는 예술성 높은 작품이 많다. ‘현대적’이라 함은 전통적 틀에서 성큼 벗어나 무언가 새로움을 찾아냈다는 것인데, 이런 분청사기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것 하나가 바로 국보 179호인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이다. 고려청자에서처럼 깔끔하고 이지적인 느낌은 없지만 수더분하고 구수한 맛에서 자유 분방함이 느껴진다.


   원래 둥근 병의 앞뒷면을 편편하게 두드려 약간 곡면을 이루게 납작하게 한 것이 편병인데, 이 병의 옆부분은 그다지 납작하지 않아 다소 두툼한 양감을 느끼게 한다. 편병의 전후 둥근 면에는 연못의 장면이 묘사되었다. 무늬는 사실적이 아니라 반추상화 되거나 도안화되었다. 한 면에는 너울너울한 커다란 연잎 서너 개가 거의 전면을 차지할 정도로 가득히, 입체적으로 포치되었고 그 아래로 물고기 두 마리가 나란히 헤엄치고 있다. 이들 주위에는 막 피려고 하는 연봉오리를 집중적으로 배치시켰는데 모두 열한 송이다. 연봉오리 중 가장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은 상단 중앙에 포치시켰다.


   여기에 더하여 왼쪽 중간 지점에 연밥 뒤로 긴 몸을 가진 한 마리 물새의 몸부분이 묘사되어 한정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입체적 공간처리가 탁월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또 다른 면도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물고기가 생략된 대신에 하단 좌우에 긴 꼬리를 드리운 두 마리의 물새가 역시 연밥과 같이 살짝 겹쳐서 묘사되었다. 말하자면 편병 앞뒤 면에는 연잎을 중심으로 연봉오리, 연밥, 물고기, 물새 등의 연지 주변의 풍경을 주저함 없이 시원하게 도안화하여 한 여름날 오후 서정적인 연지의 풍광을 소박하게 감상하게 해주니 한 폭의 그림을 대하는 듯하다.
양 측면은 삼단 구도로 나뉘어졌다. 하단부에는 연판을 그렸고, 중단과 상단부에는 연꽃을 새겨 넣었으며, 주둥이 상단에도 연판문대를 그려 넣어 편병 전체가 통일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안을 담당한 조각장은 연지의 생태를 잘 아는 작가였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그는 탁한 물에서 맑게 피기 시작하는 연봉오리, 두 마리 물고기, 두 마리 물새의 상징으로부터 자손의 번영과 풍요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꿈꾸었으리라. 흙을 친구삼아 평생을 자연과 하나 되어 즐거운 물레질과 무늬를 넣는 손놀림은 연지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으로 탄생되었다. 높은 차원의 작가수업을 받은 도화서 화가의 경지와는 다른 한국인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분청사기의 진면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論語’ 雍也 편에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미학적인 분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 분청사기이다. 이런 작품을 만든 15세기의 작가는 현대인이 영원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분장기법으로서 백토분장을 어떻게 구사하여 무늬를 넣는가에 따라 상감, 인화, 박지, 조화, 철화, 귀얄, 덤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편병은 백토 분장을 한 후, 무늬 외에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고 무늬는 선으로 조각함으로써 무늬의 흰색이 도드라진 박지기법과 조화기법을 혼용한 작품이다. 가마 안에서 산화되어 부분적으로 분청 유약이 갈색으로 변색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파르스름한 분청유약을 통해 회색 태토와 백색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4세기의 고려왕조는 유목민인 몽고족이 세운 원왕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원의 새로운 기형과 무늬는 고려말 청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조선초의 분청사기·백자에까지 지속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편병으로서 용도는 술병이었을 것이며 조선시대에 유행한다. 분청사기의 편병 형태는 항아리의 앞 뒤를 눌러서 만든 둥근 양감을 가진 형태가 많은 반면, 백자편병에는 보다 날렵한 납작한 편병이 많으며 19세기까지 유행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움 줘”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 공민왕 때 태동하여 조선 세종 재위기간에 다양하게 발전한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는 없었고, 1930년경 일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의미불명의 三島라는 이름 대신 분장회청사기라는 특징을 들어 명명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줄여 분청사기로 일컬어졌다. 분청사기는 민족문화를 완성시킨 세종시대의 문화와 궤를 같이하며 활달하고 꾸밈이 없고 독창적이며 일탈된 자유분방함의 고유미를 보여준다.


   세종시대는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해 보고자 하는 이념 밑에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그 결실은 훈민정음의 창제이며 그 의도는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트이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이 28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 이 외에도 우리 풍토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 우리의 질병은 우리 산천에서 나는 약제로 치료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편찬된 ‘향약집성방’, 천문관측기의 발명 등은 모두 民本을 전제로 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의 개발과 창달이라는 차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세종은 외래문화의 수용보다는 자국문화의 고유성을 찾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전개되었다.


   明의 청화백자는 공무역, 사무역 혹은 진상의 방법으로 15세기 조선 도자계의 한 특징을 이루었지만, 이를 모방 재현하고자 한 적극적인 노력의 흔적은 세종시대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는 가운데 백자는 세종의 어기로 사용되었고 분청사기는 공납자기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처럼 분청사기는 貢物의 대상이었으므로 중앙 관아의 이름이 새겨진 예가 많은데, 관아 이름을 새긴 동기는 깨지거나 혹은 개인의 불법 소지를 막기 위해 태종 17년에 상납 관아 이름을 넣게 한 조처에서 비롯되었다.
   관아는 공납품을 관장하는 장흥고, 어부로서 음식과 관계되는 내섬시·내자시, 공안부·덕령부와 같은 상왕부, 경승부·인수부와 같은 세자부 등이다. 특히 장흥고나 인수부가 새겨긴 경우는 경주, 언양, 고령 등과 같은 지명을 함께 새기고 있어 불량품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각 지방관의 책임을 후일에 묻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 것’에 대한 자각에서 탄생해
   분청사기는 지역 특색이 뚜렷하다. 가령 호남지방은 박지와 조화기법의 분청사기에서 특징을 보이는데,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은 세종시대의 부안 아니면 고창지방의 제품이 아닐까 한다.
호남지방의 박지와 조화기법의 분청사기에 버금가는 곳이 공주 학봉리 계룡산록 일원에서 제작한 철화기법의 분청사기로 일명 계룡산 분청사기라고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호암미술관 소장의 ‘분청사기철화연화어문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려진 물고기와 연화는 물고기의 대표 속성인 머리부분과 등의 지느러미만을 강조하고 나머지 부분은 재해석한 도안으로 처리했다. 머리의 표현은 성깔이 성성한 쏘가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그림 담당 장인의 기량이 돋보인다. 이와 같은 종류의 그릇은 당시 중앙관아의 공납용은 아니었지만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과 더불어 15세기 후반 도자문화의 일면을 유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 강경숙 (동아대ㆍ미술사)
※ 필자는 이화여대에서 '분청사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도자사의 연구', '분청사기'등의 저서가 있다.
※ 출처-교수신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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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조사:한국 최고의 분청사기
水草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듯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분청사기철화연화어문병, 높이 31.1cm 입지름 6.8cm 굽지름 7.9cm, 15~16세기, 리움미술관.

   한국의 대표적인 분청사기로 전문가들은 ‘분청사기박지연화문편병’과 더불어 철화기법을 쓴 ‘분청사기철화어문병’을 꼽았다.
“형태와 문양에서 박진감이 넘친다”, “과감한 생략으로 솔직함과 자유자재한 표현이 돋보인다”, “익살스럽다” 등이 ‘철화어문병’을 추천한 이유다. 병의 구연부는 나팔처럼 바깥으로 벌어졌고, 아랫배는 불룩하여 풍만한 감을 보여준다. 무늬는 매우 과감하게 그려졌다.


   병 상층부는 연판무늬나 세로줄 무늬 없이 단순하게 세 개의 선으로 둘러싸여 단순 명료하고 소박한 미를 보여준다. 물고기 무늬는 억지의 흔적이 없고 시원스럽게 그려져 의젓해 보인다. 지느러미는 마치 날개처럼 묘사되어 운동감을 최대한 살려 주었다. 또한 아가미에서 몸 쪽을 향해 그려진 몇 개의 선은 비늘을 표현한 것으로 장인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즉 다른 보조문양 없이 중심에 간결한 초화문을 두고 물고기가 빠르게 이동하듯 그렸는데, 이 물고기문은 한 마디로 “병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된다.


   철사안료는 잘못 사용하면 문양이 번지기 쉽다. 하지만 이 병은 15세기 말~16세기 초 사이에 발견된 철화 분청 가운데 안료 사용을 가장 능숙하게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 추천해주신 분들: 강경숙 동아대, 김영원 국립중앙박물관, 방병선 고려대, 윤용이 명지대, 이종민 충북대, 장남원 이화여대,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이상 총 8명 가나다순.
※ 출처-교수신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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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분청사기와의 비교
淸逸의 기품으로 문인 사로잡아…간략 소박한 陶器

   분청사기의 박지기법은 11세기 중국 송대 이래 금대를 거쳐 원대까지도 계속 사용한 기법이다. 예컨대 북송의 자주요, 요대의 건와요 등에서는 백지 바탕에 선으로 조각을 한다든지, 혹은 면으로 조각을 한 도자기가 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분청사기 박지기법보다 일찍이 앞서 있다.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14세기 원 경덕진요에서 제작된 ‘백자청화어조문호’는 대표적인 중국의 분청사기라 할 수 있다.
주 문양은 연지와 물고기이다. 상하 종속문에는 화문과 연판문이, 구연부에는 파도문으로 구성되어 전체가 청화로 장식되었다. 사실적인 연꽃과 물고기의 표현은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항아리로서 원대 청화백자를 대표한다.


   이처럼 도자기에 그리는 길상도는 14세기 원대 청화백자의 제작과 더불어 원·명대에 크게 유행했다. 길상도에는 흔히 세한삼우, 사군자, 국화 등이 있지만, 연은 세속의 풍요를 상징함과 동시에 진흙물에서 피어나는 꽃이므로 청향이 있는 淸逸의 기품을 보여주어 일찍부터 문인들이 좋아했다.
북송 주돈이의 ‘愛蓮說’ 중에 목단은 세속의 부귀, 국은 세속을 떠난 은일, 연은 세속을 떠난 君子로 찬양하고 있다. 중국 청화백자에는 연지백로, 연지어, 연지원앙 등 복합적인 도안으로 풍요와 번영, 부부화합, 자손번영, 과거급제 등의 길상의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종교의 의미도 담고 있다.


   중국의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장인들도 접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은 중국과 직접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상감청자에서 백자제작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고안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꽃과 물고기라는 길상무늬는 공통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요업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도기제작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 도기 가운데는 조선의 분청사기의 모방품이 제작되거나 혹은 도쿄의 하타케야마 키낸칸 박물관 소장의 쉬노(志野) 자기(분청사기와 비슷한 자기 종류)의 하나인 ‘鼠志野蓮文平鉢’과 같은 그릇이 제작되었을 뿐이다. 이 평발은 넓은 사발 안바닥에 연잎, 연밥, 얼기설기 묘사된 연줄기를 간략히 배치시키고 있다. 백토를 일부 사용하고 그 위에 유약을 씌워 초보의 자기 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본격적인 자기요업은 임진왜란 이후 끌려간 조선의 장인들의 기술 위에서 17세기 중국의 수입자기에 힘입어 백자와 청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 강경숙 (동아대ㆍ미술사)
※ 출처-교수신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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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도자기(분청사기, 백자)의 특징.중요 내용 

           

안녕하세요?저는 5학년입니다!


제가 모둠 숙제를 하는데 저희 모둠이 도자기에 대해 알아봐야해요. .


그래서 조선시대의 도자기(분청사기.백자)의 특징 중요 내용. . 등등 써주세요


내일까지부탁드려요 .


하지는꼬마 | 2012.09.25 20:18 수정됨 최초등록일 2012-09-15 19:31 최종수정일 2012-09-25 20:18 | 조회 3,576 |


      
답변 목록
  • 답변채택된 답변       
  • 반가워요. 저도 5학년인데 숙제를 하다가 보게 되어서 올릴게요.


    분청사기
       분청사기란 말은 1930년대 고유섭(高裕燮:1904~1944)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하여 새롭게 지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약칭(略稱)이다.
    퇴락한 상감청자(象嵌靑瓷)에 그 연원을 두는 이 사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그릇의 질(質)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施文技法] 등이 크게 발전 ·세련되어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으며,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白瓷)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의 공급은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맡게 되자 관장제수공업체(官匠制手工業體)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면서 민간용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파급되면서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었으며,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청사기가 유교(儒敎)의 사회기반 위에서 성장하였고 고려 이래의 불교와 함께 표면상으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 전통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분장과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에 따라 7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판 후 백토나 자토(裏土)를 감입(嵌入)해서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기법, 둘째는 무늬를 도장으로 찍고 백토분장(白土粉粧)을 한 후에 닦아내서 찍힌 무늬가 희게 나타나는 인화기법(印畵技法), 셋째는 분장 후 무늬 이외의 백토를 긁어내 태토의 어두운 색과 분장된 백색을 대비시켜 무늬를 표현하는 박지기법(剝地技法), 넷째는 분장 후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기법(造花技法), 다섯째는 분장 후 철분(鐵分)이 많은 안료(顔料)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기법(鐵畵技法), 여섯째는 귀얄로 분장만 하는 귀얄기법, 일곱째는 백토물에 담궈서 분장하는 덤벙기법이다. 이들 각각의 기법들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전기(발생기:1360~1420)는 고려청자 상감무늬의 퇴화된 여운과 그 변모 및 인화기법이 발생한 시기이고, 중기(발전기:1420~1480)는 상감 ·인화 ·조화 ·박지 등 다양한 기법의 분청이 생산된 시기이며, 후기(쇠퇴기:1480~1540)는 상감 ·인화 기법의 쇠퇴하고 철화 ·귀얄 ·덤벙분청이 성행한 시기이며, 말기(소멸기:1540~1600)는 귀얄 ·덤벙분청이 소멸된 시기이다.
    분청사기에는 1417년(태종 17) 호조(戶曹)에서 관물(官物) 도용(盜用)의 폐단을 막고자 상소한 내용에 의거 분청사기를 사용한 관청이나 그 제작지 등에 관한 명문(銘文)이 있는 것들이 있다. 이들 관청 중에는 일정기간 존속되었다가 없어진 관청들도 있어 분청사기의 편년(編年)이나 당시 도자기의 제작양상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국보 179) ·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177)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국보 178) ·분청박지화문병(보물 287) ·분청사기모란문반합(보물 348) ·분청사기연화문편호(보물 268) ·분청사기철화어문호(보물 787) 등이 있다.
    백자
       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졌으며, 그 수법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순백자(純白瓷):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類型)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여 바탕흙과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원(元)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릇 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유약은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순백자는 다른 빛깔로 장식하지 않으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며 부분적으로 장식물을 첨가하거나 혹은 투각(透刻)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수가 있으며, 표현한 종류에 따라 ① 소문백자(素文白瓷), ② 양각백자(陽刻白瓷), ③ 음각백자(陰刻白瓷), ④ 투각백자(透刻白瓷), ⑤ 상형백자(象形白瓷)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소문백자: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包容力)이 있고 청초(淸楚)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 항아리는 달걀색과 비슷한 순백색의 항아리이다. 얕은 입과 우묵한 받침, 부드럽게 벌어진 몸에서 무한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그릇 일부에 가는 빙렬(氷裂)이 있으나, 조선시대 항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② 양각백자: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양각 매화무늬 장방형연적(長方形硯滴)은 네 귀를 안으로 접은 뒤 한쪽의 좁은 면에는 파도 무늬를 양각하고 그 위에 해태 모양의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과 뒷면에는 매화를 양각하였다.
    ③ 음각백자: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④ 투각백자: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 연환문필통(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하였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세 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十字形)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
    ⑤ 상형백자: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연적은 굵은 가지로 받침을 만들고 복숭아에 긴 잎이 붙어 있어 끝이 뾰죽하고 안으로 홈이 패어 있는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2) 청화백자: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소상팔경(蕭湘八景)·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접시·사발·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주전자·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연적·필세(筆洗)·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동물·산수(山水)·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하였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해내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안료(酸化鐵顔料)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墓誌)에 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洗鍊美)를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관요(廣州官窯)와 지방민요(地方民窯)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관요의 것은 잘 수비(水飛)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白瓷釉)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대나무·운룡(雲龍)·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죽(竹)·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철화(鐵畵)·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石間褓)라고 하였다. 가마터[窯址)로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천안·괴산·철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진사)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여진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시 분원리요(分院里窯)와 함남의 영흥(永興)일대가 알려져 있다.

    청자는 처음 중국(은,주,춘추전국시대)때 만들어져 고려초기(10~11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답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에서 조선초(15세기초)에 만들어졌구요. 백자는 17세기 조선시대때 만들어졌습니다.

    청자의 특징
    자연스러운 선과 세련된 형태, 요란하지 않으면서 운치있는 문양, 은은하고 투명한 비취색 등이 고려청자의 특색이다. 청자가 투명한 비취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말부터이며 이 시기부터 청자의 형태 또한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이고 있다. 고려청자는 12세기 전반기부터 맑은 비취색과 세련된 모습으로 그 미적, 기술적 수준이 최고 절정에 다다른다. 12세기 전체를 통틀어 순청자가 우수한 품질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으로 12세기 중엽에서는 상감기법과 문양에 있어서 가장 세련된 시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세기 중엽부터는 청자의 생산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대신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 | 2012.09.18 수정됨 최초등록일 2012-09-18 19:00
    최종수정일 2012-09-18 19:01
    | 의견 1


   *** 고맙습니다. 3학년이 5학년 형언니들 한테 많이 배웁니다.   ^ ㅡ ^   - (()) -



분청사기의 문양과 장식기법

cutedrum| 2006.05.17 13:18 |조회 1122|신고


분청사기의 문양과 장식기법


  분청사기의 문양
   분청사기의 문양은 연꽃, 모란, 모란잎, 초화문, 물고기, 용, 매화 등이 주류이다. 또한 이들 문양이 서로 합치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하고, 단순화되기도 하는등 자유롭게 변형되면서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에 발전한 다양한 문양들은 불교 등의 신앙체계와 중국을 비롯한 외국 문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회화적인 그림이나 도안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가식없는 순박하고 솔직한 그림은 한국인의 미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 같은 인화문이라도 도구나 방법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나타낸다. 


  상감기법
  고려 청자의 상감기법이 계승된 것으로 15세기 전반기의 분청사기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점차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다. 그 한 예가 분청사기상감용문(龍文)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높이가 49. 7센티나 되는 대형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커다란 항아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대형식기를 사용하던 몽고족의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용문항아리는 크기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문양소재와 그 배치에 있어서도 외국 문물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전면을 몇 개의 문양대로 구획한 점, 몸통의 윗부분에 밀집된 인화국화문을 바탕으로 하여 커다란 입구부분의 문양 등 당시 중국 원,명의 도자기와 연결된다. 그러나 해학적으로 표현된 활기에 넘친 용의 문양과 상감기법, 인화국화문 등은 15세 기 전반의 분청사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인화기법
   인화기법은 상감기법의 변형으로 도장과 같은 문양을 새기는 도구로 찍어서 문양을 나타낸 것이다. 인화문 소재로 애용되던 것은 국화이며, 인화국화문은 분청사기 가운데 가장 세련되었다. 분청사기 인화문은 15세기에 중반에 절정기를 맞이한다. 분청사기의 인화문과 상감문은 고려말 청자상감과 직결되는 것이며 조선시대 청자상감과 그 원류를 같이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형태와, 유약, 문양들이 바로 분청사기의 특색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상감문은 인화문과 병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고려말 청자상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문양은 14세기 후반 고려청자상감보다는 많이 세련되어졌으며 고려말 청자상감에서는 볼 수 없는 활력이 있다. 


   귀얄기법
   귀얄기법은 분청사기에 있어서 모든 백토분장기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분청사기에서 귀얄기법이라하면 귀얄자국 외에 다른 기법이 첨부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회흑색의 기본흙 위에 귀얄로 힘있고 빠른 속도로 바르기 때문에 백토의 흔적과 태토색의 대비로 운동감을 줄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무늬 효과까지 나타내므로 신선한 분위기를 보인다. 이 기법은 16세기에 성행하여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조화와 박지기법
   조화는 백토분장을 한 위에 선각(線刻)하여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이며, 박지는 조화문에서 바탕의 백토를 긁어내어 태토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 기법은 대체로 함께 사용되는데, 연당 초문항아리의 연당초문에서 조화, 박지기법이 병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철화문 기법
   분청사기의 여러 가지 문양을 새기는 기법 가운데 가장 추상적인 문양을 나타낸 것이 철화문이다. 철화문은 백토분장한 위에 철분을 함유한 질흙으로 문양을 새긴 것으로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철화문은 회흑색의 저질태토위에 반드시 귀얄로 백토분장을 하고 그 위에 철회로 자유롭게 문양을 나타낸 것이다. 이 철화연화문항아리는 문양이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뚜껑과 합쳐서 4단이 된다. 유약을 바른 담화색은 따뜻한 질감이 있어 보인다.





 분청사기 상감용문 항아리(粉靑沙器 象嵌龍文 壺) 

15세기전반 높이 49.7cm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상감모란문 매병(粉靑沙器 象嵌牧丹文 梅甁)

15세기 높이 28cm 보물 239호 영남대 박물관



     

- 다음 TIP 오픈 지식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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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무늬 편병(粉靑沙器彫花魚文扁甁, 조선 15~16세기, 국보178호), 


   물고기 무늬가 크게 새겨진 이 작품은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작품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자기를 대표한 여러 작품 중의 하나이다.

백토를 두껍게 입히고 조화 기법으로 무늬를 새겼다. 앞.뒷면과 옆면에 서로 다른 무늬와 위로 향한 두마리의 물고기를 생동감이 넘치는 선으로 나타냈다. 양 옆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위와 중간에 4엽 모란무늬를 새기고, 배경을 긁어냈으며 아랫부분에는 파초를 새겨 넣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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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용무늬 항아리(粉靑沙器象嵌印花雲龍文壺, 조선 15세기, 국보259호).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모습을 잘 보이고 있는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분청사기이다.

당당한 양감과 풍만함이 돋보이는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인화기법과 상감 기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분청사기의 활기차고 건강한 미감이 잘 드러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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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무늬 매병(粉靑沙器象嵌魚文梅甁, 조선 15세기, 보물347호), 


   고려시대 유행했던 청자 매병의 형태를 계승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매병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기형은 고려 말 상감 청자에 보다 가깝지만 무늬를 표현하는데 인화 기법의 비중이 높아졌고 탁했던 유약이 향상되어 비교적 밝은 회청색으로 바뀐 점이 두드러진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진 출처 : www.dapsa.kr/blog/?tag=중앙박물관&paged=21   컬쳐 앤 히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