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긴 여운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
예로부터 에밀레종 별칭 ‘유명’
성덕대왕 왕생극락 ‘염원’ 담아
지금도 타종 가능한 신라 범종
8세기 통일신라 불교 조각 반영
①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진수를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국의 범종은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마치 맥박이 뛰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러한 범종의 긴
공명을 우리는 맥놀이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구라도 이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해 주는 오묘한 천상의
소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지니는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처럼 소리와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
(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보다 약
반세기 뒤인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손상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해 온 아직까지 타종이 가능한 신라 종이기도 하다.
원래의 종이 있던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성덕왕의
원찰(願刹)이었다.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인 효성왕(孝成王)에 의해 738년에 완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절에 달고자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慧恭王代)인 대력(大曆) 6년(771)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러운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있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 2에는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년(1460)에 영묘사(靈廟寺)로 종을 옮겨
달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 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
이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아 군인을 징발할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경주 부윤의 동헌(東軒)을 수리하면서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되었고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에 있었던 성덕대왕 신종도 옮겨 가게 되었다.
<고적도보해설집(古蹟圖報解說集)>에는 이 때를 1916년이라 하였으나 국립박물관의 유물대장에 의하면 1915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1915년 8월에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오랜 기간 구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75년 5월
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성덕대왕신종 용뉴.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
신종의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몸체의 상부 용뉴(龍)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음통(音筒)이 부착되어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르고 있다. 앞, 뒤의 발을 서로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의 얼굴은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역동감이 넘친다.
머리 위로는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뿔이 솟아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용의 목 뒤에 붙은 굵은 음통에는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누었는데, 각 단에는 연판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붙은 앙복련의 연판을 동일하게 부조하였다. 그리고 음통의 하단과 용뉴의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형식의 연꽃 문양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 부분에
까지 섬세하게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은 이 종이 세부까지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을 볼 수 있으며 여러 군데에 쇳물을 주입하였던 주입구의 흔적도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의 몸체 중앙부를 돌아가며 희미하게 주물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덕대왕 신종이 용뉴 부분의 천판까지를 한틀,
그리고 워낙 종이 크다보니 하나의 틀로 몸체 전체를 제작하기 어려워 몸체를 반으로 나누어 접합한 뒤 주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범종은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섬세한 용뉴 조각과 문양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사형주물법이 아니
밀랍주조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거대한 종을 만들면서 동원된 밀납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어서 이 종이
당시로서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란 것을 잘 말해준다.
종의 몸체 상대(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연주문이 장식되었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에 붙은 연곽대(蓮廓帶)에도 역시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蓮)는 상원사종(725)과 같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대부분의 신라 종이 돌출된
모습의 연뢰를 지닌 점과 달리 이러한 납작한 모습으로 장식된 종은 이후 8세기 후반의 일본 운주우지(雲樹寺) 종이나 일본
죠구진자(尙宮神社) 소장 연지사(蓮池寺) 종(833)에도 계승을 이루며 나타난다. 성덕대왕 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천상 대신 공양자상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③성덕대왕신종 음통. |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은(座) 자세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서 향로의
손잡이를 받쳐 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겨져 있고 배 앞으로
군의(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되었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는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이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 모습의
몸체로 구성된 모습이다.
최근 마모된 공양자상과 병향로의 모습을 복원해 본 결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석굴이나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향로와 향합(香盒)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들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되어 근래 제작된 신라대종에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성덕대왕 신종의 공양자상은 비록 얼굴 모습이 많이 마모되어 세부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세련된 자세와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천의,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범종 부조상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불교신문3276호/2016년2월25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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