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8) 백제금동대향로
2017. 5. 2. 21:47ㆍ美學 이야기
[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8) 백제금동대향로
신광섭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백제금동대향로, 국보287호, 높이 64㎝, 백제 7세기, 국립부여박물관.
백제 관념세계의 이토록 화려한 표현-다양하고 신비로운 圖像 상상력 자극
금·은·동·철·청동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금속공예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삼국시대 후반 제작된 백제의 ‘백제금동대향로’와 통일신라시기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백제의 종교와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백제금동대향로는 사비시대 백제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군에 인접한 백제 능사의 工房址에서 출토됐다. 전체 높이 61.8cm, 최대지름 19cm로 향로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이뤄졌으나 원래는 봉황·뚜껑·몸체·받침으로 만들어 조합한 것이다.
뚜껑 정상부에선 한 마리의 봉황(높이 12cm)이 턱밑에 여의주를 끼고 날개를 활짝 펴 막 비상하려 한다. 꼬리는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갔으면서 부드럽다. 뚜껑 아래에는 5단의 三山形 산악문양 띠로 장식되어 있다. 삼산의 외곽에는 集線文을 음각했고, 맨 윗 단에는 다섯 명의 奏樂神仙이 있다. 악기를 반주하는 이들은 5악사로 불리는데, 阮咸, 縱笛, 排簫, 玄琴, 북 등 5개 악기가 실감나게 연주되고 있다. 완함, 종적, 배소는 서역에서 전해지는 악기로 보이며, 거문고는 고구려, 북은 남방악기에서 연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악기는 연기비암사계유명아미타삼존석상(국보 제106호), 고구려 안악3호분, 장천1호분, 무용총, 집안 오회분 4·5호묘에도 등장해 그 기원을 짐작케 한다.
그 아래에는 다섯 개의 산을 두었고, 산꼭대기마다 신선의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춤추는 기러기들이 있어 한폭의 아름다운 歌舞像을 이룬다. 5악사와 더불어 뱀을 물고 있는 짐승 등 상상의 동물,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현실세계의 동물 42마리, 주변인물 12명이 74곳의 봉우리와 계곡에 변화무쌍하게 표현돼있어 자세히 볼 수록 그 신비한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머리는 봉황, 다리는 용
봉황은 聖人의 탄생과 임금이 치세를 잘해 태평성대를 이룰 때 출현하는 상서로운 새이다. 天鳥, 瑞鳥, 神鳥로 여겨져 온 이 봉황이 출현할 때는 뭇 새들의 영접을 받으며 내려오는데 이 때,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리는 鳳鳴은 5음의 묘음으로서 주악신선으로 상징화했다. 봉황의 턱밑 여의주 바로 아래에는 2개의 구멍이, 5악의 뒤쪽에는 5개씩 두 줄로 10개의 구멍이 있어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대향로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면 動的인 자태로 그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향로 뚜껑에 있는 12명의 인물은 말을 탄 2명을 제하고는 발아래까지 내려오는 도포를 입고 있다. 그 중에서 폭포 아래 머리를 감고 있는 인물이 눈에 띄는데 그는 산천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말탄이 중 한명은 후방을 향해 활을 당기는 듯 날렵한 몸동작을 보여주며 다른 한명은 투구와 갑옷을 착용했고, 말은 안장과 각종 장식구로 꾸며졌다. 이런 기마인물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가야 토기의 것과 흡사하다. 또한 상상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 얼굴에 새의 몸이나 짐승의 몸을 하고 있는 평화스런 모습들이 눈에 띄는데, 선계의 신선을 묘사한 것이다.
뚜껑에는 또 악귀를 막기 위한 포수도 있고, 여섯 종류의 신령이 깃든 식물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길상, 서기의 상징으로 표현한 博山무늬가 있는데 박산무늬 테두리는 화염무늬로 장식했다.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바위가 있는데, 2~4개가 중첩되어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형상을 나타내 문양들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리는 듯 향로의 맵시있는 몸체와 연결된다.
마치 활짝 피어난 연꽃인듯
향로의 몸체인 爐身은 반구형 대접모양으로 삼단의 연꽃잎으로 덮여 있어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케 한다. 연꽃잎과 그 사이사이 여백에 27마리의 짐승과 두 명의 인물상이 있다. 그 중 한 명은 무예를 하는 듯한 동작이라 흥미로운데 이는 무용총과 안악1호분 벽화에서 보이는 인물과 유사하다. 27마리의 짐승 중에는 날개와 긴 꼬리를 가진 동물과 날개달린 물고기도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들고 있는 한 마리 용으로 표현됐다. 한쪽 팔은 치켜들고 세 다리와 꼬리로서 표현된 용의 자태는 환상적이며 생동감 있다. 용은 마치 승천하는 듯한 모습인데 주변이 화염·물결·구름모양의 갈기, 연화문등으로 장식되어 분위기를 더한다. 용의 뿔은 두 갈래로 끝이 고사리모양으로 말려있으며 날카로운 이빨, 벼슬, 갈기는 고구려 집안 오회분에 표현된 용의 모습과 흡사하다.
금동대향로는 삼국시대나 그 주변문화에서 찾기 힘든 균제미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온갖 물상으로 인해 단연 압도적 걸작이라 하겠다. 단조로운 향로 받침 기둥을 용의 머리와 몸체로 대체한 것이나 다리 하나를 밖으로 돌출시켜 역동성을 표현한 것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조형에 변화를 준 것으로, 구도상의 안정과 조형미를 추구했다.
이처럼 현존하거나 혹은 상상 속의 다양한 물상이 표현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출토 이후 고고학, 미술사 분야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왔다. 특히 향로의 도상에 대한 사상적 배경을 추정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도교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도성에는 일산, 오산, 부산의 三山이 있어, 국가가 전성기일 때 각 산에는 神人이 거주하며 조석으로 왕래했다 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무왕 35년에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의 사방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에는 섬을 축조해 方丈仙山을 조성했다고 했다. 방장선산은 영주산·봉래산과 함께 고대인들의 이상향인 삼신산의 하나다. 또한 37년에 무왕은 조정 신료를 거느리고 기암괴석과 기이한 화초가 있어 그림과 같은 백마강의 북쪽 포구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으며, 같은 해 궁남의 연못가에 있는 망해루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제 문양전 8종에서 이 향로의 도상들과 일치하는 문양이 보여진다. 이 중 산수산경문전은 삼산형의 산들로 표현됐는데 이는 향로의 몸체와 같고 그 분위기는 향로의 뚜껑 도상과 유사하다. 봉황아래 펼쳐진 산 경치와 주변에 유유히 흐르는 서운과 서기는 향로 뚜껑에 있는 봉황, 그리고 그 주변에 전개된 도상과 의도하는 바가 같다. 대향로에 피운 향연이 피어올라 봉황주변과 뚜껑의 심산유곡으로 흐르는 형상이 산수봉황문에 그대로 나타난다.
‘5’의 상징화로 중국 박산로와 차별화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향로를 중국 박산로와 관련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좀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봉황 아래 5개의 산, 5인의 악사를 보자.
삼국사기 온조왕 20년조에 왕이 大壇을 세우고 천지의 제사를 지냈는데 이상한 새가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는 기사가 있다. 또 이러한 제천의식과 더불어 백제 임금이 하늘과 5제에 대하여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출자한 부여도 일찍이 ‘5’라는 수의 개념을 기본단위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제에서도 도성을 5부, 전국은 5방으로 각각 설정해 통치하였다.
이와 관련해 백제 법왕은 불교와 산악사상은 결합하기 위해 성주사 터에 오함사를 창건하고 북악이라 칭하였다. 이렇게 볼 때 백제는 동·서·남·북에 중을 합하여 국가적으로 5악의 산악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봉황의 주변에 배치한 3산과 5악은 백제 숭천사상, 산악숭배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海中神山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도성에 조성하고 그 해중신산을 바라보는 망해정을 건립하고 불로장생의 표상인 여러 신선과 신수, 신목들을 대향로에 표현한 것이다. 요컨대 대향로의 3산과 5악, 산천, 제사는 봉황과 더불어 성군의 출현과 태평성대를 기대하는 백제인들의 이상향의 표현이며 궁극적으로 백제관념세계의 복합적 총체로써 이 향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궁남지, 3산, 숭천사상, 하늘과 5제의 개념, 백제문양전 등에서 볼 수 있는 도교는 백제의 새로운 통치 체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여겨져 무왕대의 국왕권위의 강화 분위기와 맞물려 있어서 향로는 백제 6세기말~7세기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발달한 백제의 공예기술은 면면히 이어져 신라에 전해졌고 우리나라 남북국시대 성덕대왕신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은 금동대향로와 쌍벽을 이룬다. 금동대향로가 출토하기 전만 해도 성덕대왕신종이야 말로 유일한 대표급 유물이었다. 비록 제작시기에 있어 2백여 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과 개별적 특성이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현존하는 가장 큰 범종으로 높이 37.5m 지름 2.27m 무게 118.9t이다. 이 종은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였다.
통일신라의 문화적 역량의 총 집결된 금속공예품으로 규모, 제작기술, 예술적 표현, 음향적 특성에서 한국 전통 종의 대표작이다. 금동대향로 역시 백제인의 사상과 염원을 담은 백제 최고의 걸작으로 백제 금속문화를 대표 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금속공예기술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또 금동대향로는 백제 27대 위덕왕이 전장에서 전사한 성왕을 追福하기 위하여 지은 백제능사에서 출토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父王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한 점에서 그 제작 동기가 같다.
그러나 두 문화재간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는데, 외형이 다를 뿐 아니라 내적 상징체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성덕대왕신종은 불교적 세계관이 표현된 불교예술품이고 대향로는 불교보다는 백제의 전통사상과 도교적 세계관의 혼합된 백제의 관념체계 그 자체이다. 또 성덕대왕신종은 그 예술적 표현과 함께 오묘한 음향적 특성으로 인하여 청각 예술을 가미한 소리로서 그 가치를 증가시켰다. 반면에 향로는 외연에 베풀어진 시각적 예술성과 향연이 함께 등장함으로써 향로의 停體와 향연이라는 動體가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다.
요컨대 향로에 베풀어진 다양한 물상은 백제인의 관념체계를 확실하게 드러낸 걸작으로 앞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미와 기능과 비교 검토해야 할 것이다. 특히 향로가 출토한 백제능사는 고구려의 능사개념과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져 고구려문화와의 관련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 필자는 중앙대에서 ‘백제 사비시대의 능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금속공예’ 등의 저서와 ‘백제금동향로의 조형과 편년’ 등의 논문이 있다.
※ 출처-교수신문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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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조사: 한국 최고의 금속공예
세련되고 정교한 은입사로 繪畵 연출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 국보92호, 높이 37.5㎝, 고려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최고의 금속공예 가운데 전문가들은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를 빼놓을 수 없는 명품으로 추천했다. “형태가 안정감 있고 유려한 곡선미를 보여준다”, “은입사의 풍경이 회화적으로 뛰어나다”, “상감기법이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다” 등이 그 이유였다.
어깨가 약간 강조된 둥근 몸체에는 위아래로 여의두무늬가 둘러졌다. 귀때를 중심으로 양쪽에 회화적인 풍경이 묘사되었는데, 수양버들 두 그루와 갈대가 우거져 있고, 뒤로는 언덕이 있다. 그 사이에 작은 섬들과 갯벌들, 헤엄치는 오리와 날아오르는 물새들이 한가롭게 표현되었으며, 작은 배에선 사공이 노를 젓고 있다. 저기 먼 산에는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철새들이 줄지어 날고 있다. 병면 전체에는 청록색의 녹이 고운 배경을 이루어 문양들이 한층 선명히 나타났으며, 은입사된 문양이 이와 어우러져 한층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늪가의 풍경은 고려청자에 보편적으로 나타났었다.
귀때에는 연화당초와 연잎이 장식되어 있고, 뚜껑이 덮여 있다. 목부분에는 구름이, 그리고 첨대에는 파초가 입사되어 있다. 또한 귀때의 덮개와 첨대 하단에는 은판을 뚫을새김으로 처리하여 장식효과를 높여주었다.
이 정병은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로, 특히 이 작품은 고려시대 청동은입사정병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ㅣ성덕대왕신종 ★★★★ㅣ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 ★★★
/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 추천해주신 분들: 강경숙 동아대, 김영원 국립중앙박물관, 방병선 고려대,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최응천 국립중앙박물관, 이상 총 6명 가나다순.
※ 출처-교수신문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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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금속공예와의 비교
기묘한 형상의 박산향로… 不死의 염원 연기처럼 피어올라
백제금동대향로의 조형적 始原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博山爐는 중국 서한 무제 무렵에 등장한 향로의 일종으로, 청동제가 많으며, 금으로 도금이 되어 화려함을 나타내는 경우도 다수 있다. 대부분 고위층 무덤에서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바다를 상징하는 承盤 위에 중국에서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박산을 상징하는 뚜껑을 덮은 동체부가 얹혀 있다. 육조시대의 詩에 ‘박산향로’라는 명칭이 보이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향로를 따로 ‘박산로’라고 부른다.
박산로에는 중첩된 산들이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산악도는 이전의 중국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후에 동아시아 산수화의 시원으로 여겨진다. 이는 특히 승반 위에 얹혀져 우주산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봉우리에 갖가지 기이한 동물과 신선들이 뿐 아니라 식물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조형은 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신선사상이나 不死 개념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향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향의 연기가 피어 나오며, 버팀대 아래에는 동물과 용이 배치된다는 점에서 다른 향로와는 차이가 있다.
漢代에 유행한 박산로의 조형과 상징성은 수·당대에 이르러서는 박산향로의 내적 의미의 쇠퇴와 함께 외형도 단순·도식화하고 있어 공예품으로서 이렇다할만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산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백제금동대향로가 탄생 계기로 볼 수 있다. 다만 백제에 이르러서 이 향로는 백제의 관념과 왕실을 섬기는 것으로 새로운 조형성과 상징성을 갖고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박산로의 전통이 전달되지 않아 고대국가의 발전기 양상을 대표하는 향로관련 유물은 보이지 않기에 중국이나 한국과 비교해 언급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
/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 출처-교수신문 9.18
자료창고
daljinsite.cafe24.com/?WS=33&BC=cv&CNO=341&DNO=5..
백제금동대향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 금동대향로
동의어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 금동대향로, 용봉봉래산향로 다른 표기 언어 百濟金銅大香爐
시대 | 고대/삼국/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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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 국보 제287호 |
성격 | 향로 |
유형 | 유물 |
크기 | 전체 높이 62.5㎝, 최대 직경 19㎝, 무게 11.8㎏ |
대표자 | 국유 |
제작시기 | 백제 |
분야 | 예술·체육/공예 |
소장/전승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의 향로.
개설
국보 제287호.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의 백제시대 고분군(古墳群)과 사비성(泗泌城)의 나성(羅城) 터 중간에 위치한 백제유적 발굴 현장에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象)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하는 신선(神仙)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해중(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神仙世界)이자 별천지(別天地)·이상향(理想鄕)을 닮게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내용
이 향로의 뚜껑에 박산은 5단(段)으로 되어 있다. 그 각단은 5봉우리로 구성되어 결과 큰 산은 25개이다. 이 큰 산의 각단은 엇갈리게 배치되었고 또 큰 산과 연결되는 49봉우리도 있어 결과 산은 매우 중첩된 양상이 되었다.
이 산에는 최정상의 봉황을 비롯한 37마리의 상상의 동물과 악사(樂士) 5인을 비롯한 17인의 신선이 있다. 또 나무 6그루, 향연구멍(香煙穴) 12개, 산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고 있는 폭포 그리고 낚시터가 된 호수(湖水)도 있다.
이 향로 노신(爐身)을 감싸 장식한 연꽃도 뚜껑인 산의 5단과 일치시키려고 5단 연판(蓮瓣)으로 나타냈다. 이 연판에 2인의 신선과 25마리의 상상의 동물을 나타냈다. 이 동물들은 이곳이 물 속과 물가 부위임에서인지 주로 물가에 사는 동물 또는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水中) 동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려한 동작을 보여주는 이 향로의 용은 대좌의 역할을 한다. 가느다란 머리 위로 넓고 무거운 향로의 동체(胴體)를 짊어지고 있다. 용의 몸통, 꼬리, 수염, 머리카락 등은 연꽃이나 연꽃과 관련된 당초문으로 나타냈다. 몸통은 착지면으로 갈수록 그 면적이 확대되고 있다. 몸통 맨 바깥쪽에는 이 향로가 해중신산이고 용은 해중(海中) 동물임을 알리려는 듯 바다의 파도(波濤)도 나타냈다.
이 향로 정상에 있는 새는 맨 아래에 위치한 용(龍)과 대비되어 나타내진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신수인 봉황이다. 봉황은 박산(博山)에서 양(陽)을 대표하는 신수로서 그리고 음(陰)을 대표로 하는 맨 아래에 배치된 용과 대칭되어 맨 정상에 안치되었다. 봉황은 막 비상하려는 듯 날개와 꼬리를 거의 50도(度)가량으로 펼치고 있다. 봉황의 부리 밑에는 용을 비롯한 신수(神獸)의 입 언저리에 배치되던 여의주가 있다. 봉황은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춘다고 하며 노래는 묘음(妙音) 또는 오음(五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 예로부터 음악과 관련된 동물이다. 이 향로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가 동반된 것, 다섯 원앙(鴛鴦)이 봉황을 응시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연화화생이란 연꽃에 의하여 만물(萬物)이 신비롭게 탄생되는 생명관을 말한다. 이 향로는 신산(神山)인 박산을 표현한 것이지만 향로에 표현된 용·봉황·연꽃·산 그리고 수많은 물상(物像) 모두가 이 연화화생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다. 연화화생의 중심을 이루는 연꽃은 이 향로의 경우 동체(胴體)인 연꽃봉오리이다. 그런데 연꽃은 물 속에 뿌리를 박고 물 위로 꽃을 피우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향로에서의 연꽃은 용을 통하여 물 속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이 향로의 연꽃은 용의 입과 연결되고 있다. 이 연화는 단순히 용의 입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아시아의 신수(神獸)인 용의 입에서 피어나는 기(氣)이다. 결국 용과 연꽃이 상호 동격인 것이다. 용의 입에서 화생된 이 향로의 연꽃은 노신(爐身)에서 보듯 만개한 연꽃이다. 그런데 이 만개한 연꽃은 뚜껑 부위에서는 산(山)으로 화생(化生)하고 있다. 이 산은 신선세계의 중심인 산(山), 박산(博山)이다. 결국 박산이 연꽃에 의하여 화생된 것이다.
신선사상에는 음양오행설도 포함되고 있다. 이 향로에서 음양관은 맨 정상에 봉황을 배치하여 양을 상징하고, 맨 아래에 용을 배치하여 수중세계이자 음을 상징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오행관은 뚜껑의 산이 5방위로 또 5단으로 솟았으며 또 각 단은 5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5곳의 박산문(博山文)을 남긴 것, 원앙 5마리, 악사(樂士) 5인, 5개의 구멍을 2겹으로 뚫은 향연구멍(香煙穴) 등으로 반영되었다.
신선세계 또는 신선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도교(道敎)에서는 의례히 향을 피우며 음악이나 춤이 동반함을 본다. 이 향로의 악사도 같은 차원에서, 즉 신선세계의 음악의 연주자로서 등장한 것이라고 본다. 또 악사는 예로부터 음악을 동반하며 나타내던 봉황 즉 이 향로 정상의 새와 관련된다. 즉 봉황이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추자 이에 동반하여 악사가 선계(仙界)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악기를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펴보면 커다란 둥근 몸체에 기둥이 꽂혀 있는 현악기는 우리나라의 ‘월금(月琴)’이나 중국의 ‘완함(阮咸)’과 흡사하다. 세로로 불고 있는 관악기는 ‘종적(縱笛)’이다. 가늘고 길이가 다른 관(管)을 여러개 묶은 관악기는 ‘배소(排簫)’이다. 배가 불룩하고 양쪽이 좁아지는 몸통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는 현악기는 ‘琴(금)’으로 보인다. 한 손으로 윗판을 들고 있는 타악기는 ‘동발(銅鉢)’로 보여진다.
동체를 연꽃봉오리형으로 뚜껑을 산모양(山形)으로 만든, 그리고 유달리 봉황(鳳凰)과 용(龍)을 돋보이게 배치한 이 박산향로를 일명 용봉봉래산향로(龍鳳蓬萊山香爐)라고도 부르고 있다. 여기서 종래 흔히 불리던 박산이라는 명칭보다 봉래산(蓬萊山)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향로의 박산이 일찍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 쪽에 있다는 상상의 신산(神山)인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키고, 또 그 삼신산 가운데서도 봉래산을 가장 많이 언급함에서이다. 결과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이상향으로 알려진 봉래산이란 이름을 이 향로에 부여한 것이다.
이 향로는 같은 박산을 표현한 6세기 전반(前半)에 제작된 백제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이나 7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부여 외리 출토 백제문양전과 비교하여 볼 때 더욱 다양하면서도 세련되고 발전된 모습이다. 따라서 이들보다 이 향로는 약간 시대가 내려가는 7세기 전반(前半)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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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동물의 입에서 비롯되는 도상 고찰」(조용중, 『미술자료』58, 국립중앙박물관, 1996)
- 「연화화생에 등장하는 장식문 고찰」(조용중, 『미술자료』56, 국립중앙박물관, 1995)
-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조용중, 『공간』321, 1994)
-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 상·하」(조용중, 『미술자료』53·54, 국립중앙박물관, 1994)
출처
32 한국의 유산 - 백제 금동대향로
업로드된 날짜: 2011. 3. 17.
kbs korean heritage
백제금동대향로
- 백제금동대향로
부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가운데 최고는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입니다.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향로가 발견된 곳은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나성 사이의 작은 계곡에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 능산리 고분군의 주차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차장 공사 직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향로가 발견되었습니다.
향로는 높이가 61.8cm로, 세계 최대의 금동향로입니다. 용 모양의 향로 받침대,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 몸체, 산들이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 이렇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백제창왕명 석조사리감
1995년 발굴조사로 향로가 발견된 일대가 절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때 이곳 목탑터 심초석에서 '백제창왕명 석조사리감'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창왕 13년(567년)에 매형공주(왕의 누이?)가 사리를 공양했다(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절은 백제 왕실의 원찰이며, 향로는 백제 왕실의 의식용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부분
향로는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 날개를 편 봉황이 보주 위에 서 있습니다. 봉황 가슴 부위에 나 있는 구멍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입니다.
- 부분
봉황 아래 뚜껑에는 다섯 악사가 있는데, 각각 금(琴), 완함(阮咸, 당나라 때의 현악기로 비파의 일종), 동고(銅鼓, 꽹과리), 종적(縱笛, 관악기), 소(簫, 피리의 일종)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완함을 연주하는 악사의 모습입니다.
- 부분
뚜껑에는 봉우리가 3개 있는 산들이 솟아 있습니다. 이 산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살펴볼까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머리에 뿔 같은 것이 달린 새, 괴수 머리를 한 짐승, 호랑이 등이 보이네요.
- 부분
좌선한 사람도 있고, 이런저런 짐승들도 있습니다.
- 부분
새들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 부분
받침대에는 한 마리의 용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용은 머리를 곧추세운 채 입으로 향로의 몸통 아랫부분을 물었고, 발은 한 발은 들고 나머지 세 발은 땅을 디뎠습니다.
- 부분
발가락이 5개인 용의 발톱을 보셨나요? 어떠세요? 닿기만 해도 살이 베일 듯 날카롭지 않나요?
-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 박산향로(博山香爐)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덧붙여져 만들어졌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6세기 중반~7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cafe.daum.net/moonhawje/DjXU/12658 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
백제금동대향로(국립부여박물관).flv
업로드된 날짜: 2010. 9. 1.
백제금동대향로(제2전시실)
게시일: 2016. 9. 11.
겨레문화 9 - 백제금동대향로에서 향로형 재털이까지 7B- 인문(동서양), 차생활
백제금동대향로에서 향로형 재털이까지
절집의 급한 사정
국보 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것은 1993년 12월이었다. 그것은 국립 부여박물관에서 부여의 나성과 능산리 고분들 사이에 있는 절터를 발굴할 때 출토되었는데, 발굴 당시 그것은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 각종 금동 제품과 유리 제품 및 그릇들과 함께 나무로 만든 물통의 밑바닥 부분에 파묻혀 있었다. 쉽게 말해서 백제금동대향로는 절집에서 향로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 예를 들어 법당터 등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향로가 있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자리에서 발굴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능산리 백제 절집에서 무언가 급한 사정이 생긴 나머지 향로를 다른 귀중품들과 함께 물통 바닥에 숨겼음을 말해준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사정이 생겼기에 당시 이 절집에서는 향로를 허겁지겁 숨겨야만 했을까?
능산리 절터에서는 백제 창왕昌王의 이름을 새긴 돌로 만든 사리감舍利龕이 나왔는데, 거기 새겨진 바에 따르면 그 절터는 서기567년에 백제 왕실이 주측이 되어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그 절집은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이 절집에서 생겼던 급한 사정도 아마 백제가 무너진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절집에서는 나라가 무너지는 급한 상황에서도 향로를 엄청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숨겼다. 그것은 그들이 이 향로를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어쨌든 그들은 이 향로가 신라나 당나라 군사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무려 14세기가 지난 뒤 다시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재생시간 01분 20초
향로의 생김새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마리의 용이 향로의 몸통을 받들고 있는데, 몸통은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 모양이며, 그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리고 몸통 가운데를 나누어 본체와 뚜껑으로 삼았으며, 본체는 다시 받침대와 몸통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부분을 따로 주조한 뒤 이어붙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로의 전체 높이는 63cm에 가까우며, 몸통의 최대 지름은 20cm에 가까울 만큼 큰 것인데, 무게도 12kg이나 된다. 중요한 것은 향로의 규모만이 아니다. 이 향로에는 상당히 많은 무늬가 있는데, 74개나 되는 봉우리와 65마리의 짐승 및 23인의 인물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밖에도 폭포나 산길 및 나무들이 이 향로의 꾸밈새를 더욱 빛나게 하며, 향로로서의 실용성에 걸맞게 12개나 되는 연기 구멍이 나 있다.
23인의 인물 가운데 5명은 향로의 뚜껑 위쪽에 조각되어 있는데, 그들은 각각 하나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동영상 참조). 그들이 들고 있는 악기는 “일곱 줄 거문고”(七絃琴)와 “열 여섯 짝 대나무 피리”(十六 排簫)와 개량비파인 ‘완함’阮咸과 긴 피리와 작은 북 등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삼국사기》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백제의 음악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뚜껑의 아래 쪽에는 16명의 선인仙人들이 조각되어 있고, 향로의 본체에도 2명의 선인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몸짓을 하고 있는데,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긴 모습을 비롯하여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나 길을 걷는 모습도 있으며, 못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사람과 역근易筋 자세로 하늘을 나는 사람 등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 가운데 16명 선인들의 모습은 각각 북방 기마종족계의 오랜 수련법인 16가지 수승화강행水升火降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머리를 감는 것은 잡념을 꺼리는 조목을 나타내고, 명상을 하는 모습은 핏기운을 늦추어주는 조목을 나타내며, 땅을 짚으며 길을 걷는 모습은 땅기운과의 감응 조목을 나타내고, 파초를 만지며 다른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몸의 눈을 떠나 귀로서 자기 내면을 살피는 조목 등을 나타낸다. 일찍이 북방 선가에 의해 이른바 현관타좌16식玄關打座16息으로 정리된 바 있는 각 덕목들이 이 향로의 무늬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또 말을 타는 모습과 말을 타고 허리를 돌려 활을 쏘는 모습들은 이 그림의 기마종족적 계통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몸의 흐름을 거꾸로 함으로써 기운의 흐름을 바로잡으려던 전통을 보여줌으로써, 문화적으로도 우리 겨레다운 계통성을 확인해준다.
이처럼 벡제 절터에서 출토된 이 향로에는 결코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물론 향로의 본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몸통 자체도 연꽃봉오리를 닮았지만, 거기에 새겨진 대부분의 무늬는 북방민족의 전통적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교가 들어온 이후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불교보다 전통사상적인 그림이 많듯, 불교를 국교로 하던 백제 말기의 이 향로에서도 불교보다 전통사상의 흔적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높이 61.8cm, 무게 11.8kg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번지 능산리 절터 출토
향로 최상단의 봉황 장식 세부 모습
천상계인 정상에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아래에는 음을 대표하는 수중동물 용을 배치하였다
향로 뚜껑의 펼친 모습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향로 단면도
단면도를 통해 보면 향로의 치밀한 설계가 드러난다.
몸체와 관, 받침이 모두 따로 제작되어 섬세하게 연결되어 있다.
향을 사르는 뜻
사실 향로와 향이라는 물건도 불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향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벼화禾자에 날일日자로 되어 있으며, 벼가 익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들어가 향의 옛 글자를 보면 기장서黍자 아래 달감甘자로 되어 있다. 기장이 단맛을 내려면 발효를 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장을 가지고 술을 만드는 일이다. 즉 향이란 기장 술의 향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장으로 빚어낸 술을 일러 울창주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부터 신을 내리게 하는 강신주降神酒로 쓰여왔다. 물론 울창주는 오늘날에도 천제나 종묘제례에서 강신주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장술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되는 역할을 했으며, 거기에서 파생된 향도 그런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지금도 몽골의 풍속에는 제사를 지낼 때,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제사지낼 곳 주위에 그 연기를 쐰다. 핀란드나 스웨덴 남부 등 기마종족의 전통이 남아있는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도 이런 풍습은 조금씩 남아있다. 요컨대 향문화는 북방 기마종족의 전통과 함께 이런저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만 향을 피우는 향로문화만이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했을 따름이다.
이처럼 향로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북방 기마종족들이 만들어온 물건이었다. 북중국의 경우에도 불교(석가모니 불교)가 생기기도 이전인 은나라 때부터 향로를 사용했으며, 북중국문화의 뿌리였던 기마종족들은 그보다 더 일찍부터 향로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을 사르는 역사는 아마 불을 사용하면서부터 원시적으로나마 시작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제사의식이나 기도의식이 다듬어지면서 상당히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이라는 한자어의 발음인 ‘샹’이 한님께 올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북방어 샹에서 온 것만 보더라도 향의 본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나를 다시하는 동양학》) 참조).
그러므로 한님 숭배를 바탕문화로 하는 우리 역사에서 향과 향로의 문화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경우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백제의 향문화가 거꾸로 중국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살펴보아야 할 정도로 우리의 향문화는 매우 발전해 있었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적 전통이 들어온 뒤에도 향문화는 여전히 전톤문화와 함께 다듬어졌다. 백제금동대향로처럼 크고 빼어나자는 않더라도 제사를 지내는 집이면 어디나 향과 향로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소장하고 잇었다. 우리 겨레의 옛 신화에서 자주 나오는 단檀나무도 향나무의 일종으로서, 자단향 목단향 등 좋은 향의 재료가 된다.그만큼 우리 겨레는 향문화를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잊혀지고 짓밟히는 세월
한님과 하나됨을 이루려는 전통적 사고방식의 약화와 함께 향문화도 차츰 형식화되었다. 시중에 모조품이 많이 나와 있는 고려시대의 청자투각향로만 하더라도 향을 사르는 문화적 본질보다 형식적 예술성에 치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조선시대의 백자향로는 장난기마저 서려있는 애완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석굴암이나 다른 국립공원의 오늘날 처지를 살펴보면 그런 형식성이나 장난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예쁘게 잘 만들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휴지통을 향로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담배꽁초 등을 버리게 한다. 참으로 겨레 문화의 바탕을 잃어버린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쓰레기통을 향로 모양으로 만들고 거기에 꽁초를 버린다는 것은 밥그릇에다 담배를 끄는 것보다 더 몰상식에 가깝다. 전쟁이 잃어날 때 밥그릇을 숨기고 떠나지는 않지만, 옛 백제인들은 향로를 눈에 띄지 않게 숨겼을 정도였으니, 과연 어느 것이 더 몰상식이더란 말인가. 또 그것을 이 나라의 문화정책 담당자들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니, 한님과 하나됨을 이루려는 뜻에서 다듬어온 우리들의 향문화는 이제 진정 사라진단 말인가?
그나마 화학 향을 거부하고 향의 본질을 되살리려는 작은 흐름들에 나름대로 희망을 걸어본다. 향 자체가 아니라 잃어버린 겨레의 소중한 것들이 그런 흐름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말이다. 또 그런 흐름 속에서 나를 억지로 꾸며서 한님을 속이려는 화학 향수보다 한님께 스스로를 밝게 보이게 하는 참인간화의 향기가 우리의 미래를 맑게 해주기를 꿈꾼다.
- 모울도뷔 준비 제5호(199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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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daum.net/koresob/3qsh/364 국광물자원공사OB회
백제 / Vank prkorea
업로드된 날짜: 2009. 3. 5.
백제 역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동영상입니다.
역사 바로 알기, 백제금동대향로ㆍ자유게시판
백제의 기상,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 287호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회랑 부근에 위치한 건물터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대형 향로(香爐)이다.
▲ 능산리 고분리 및 능산리사지 일원 전경
▲ 목관수조내 향로 출토 모습
백제금동대향로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맨 위의 봉황과 뚜껑의 산악도, 그리고 연꽃이 장식된 노신과 이를 물고 있는 용받침이다. 그리고 맨 위의 봉황과 뚜껑의 산악도는 하나의 주물로 만들어져 있고, 따라서 향로는 본래 세 부분으로 분리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향로 본체는 가운데 테두리의 '흐르는 구름문양(流雲紋)'을 경계로, 위쪽의 삼산형 산악도와 아래쪽의 연지의 수상생태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산악도에는 삼산형 산들을 배경으로 기마수렵 인물들을 포함한 신선풍의 인물들과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곳곳에 장식된 폭포, 나무들, 불꽃문양, 귀면상 등은 산악도의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었으며,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산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추고 있었고, 봉황의 바로 아래에는 5악사가 완함 등 서역 악기를 연주하며 둘러앉아 있었고 다시 그 주위에는 다섯 봉우리에 다섯 마리의 새가 봉황과 함께 너울너울 춤추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서 잘못 된 정보들도 있습니다. 이 백제금동대향로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나, 중국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백제인들에 의해서 제작되었음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증거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첫번째,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이다.
▲ [동탁은잔(銅托銀盞)]
뚜껑 중앙에 장식된 연꽃과 연꽃 형태로 된 손잡이 부분을 제외하면, 뚜겅의 둘레에 산악도가 장식되어 있고, 잔의 윗 부분에 ∽ 자 형태의 '유운문', 즉 흐르는 구름무늬가 있으며 다시 그 아래에 세 마리의 용이 연꽃을 둘러싸고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산악도 - 유운문 - 연꽃과 용 으로 이루어진 백제대향로의 구성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탁은잔의 산악도 위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천공을 날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 위에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 것과 기본 발상이 동일하다. 따라서 백제대향로는 동탁은잔의 구성을 보다 확대한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양자의 구성은 뚜렷한 연속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백제대향로를 제작한 장인들이 동탁은잔의 실물을 본 적이 있거나 그 구성을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백제대향로가 무령왕 때(501~523)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두번째, 부여외리에서 출토된 산수산경문전과 산수봉황문전이다.
▲ 산수봉황문전 ▲ 산수산경문전
백제대향로의 산악도는 '삼산형' 산들이 중첩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위의 문양전에 묘사된 산들의 양식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특히, 산수봉황문전의 산악도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와 그 정상에 장식된 봉황의 구도와 거의 동일합니다.
▲ 반룡문전
뿐만 아니라 백제대향로의 용장식 역시 같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반룡문전에 장식된 용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전자가 3차원의 공간에 입체화되어 있고 후자가 평면에 부조로 장식된 점을 제외하면 사실 동일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닮아 있는 것이다.
세번째,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에 장식되어 있는 수렵도
백제대향로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중국 남북조시대 향로의 산악도에는 수렵도가 장식된 예가 없습니다. 비록 한나라 때의 박산향로 중에 그러한 유의 수렵도를 가진 향로들이 있다지만, 그러한 향로들은 후한 시대에 이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해 위진 시대에 이르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산악도가 한나라 때 박산향로의 산악도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수세기 전에 사라진 이국의 향로를 복원해 재현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대향로 산악도의 수렵도는 동시대 중국 향로의 산악도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렵도가 갖는 의미와는 별도로 중국에서 백제대향로가 왔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네번째, 백제대향로의 공간 구분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공간 구획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
▲ 쌍영총 현실의 모사도 ▲ 쌍영총 팔각석주
쌍영총 현실의 두 팔각기둥을 보면 기둥의 상단과 하단에 연꽃이 장식되어 있어 일종의 연꽃주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기둥에 황룡이 장식되어 있다. 이 황룡은 기둥을 휘감고 연꽃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어 용이 노신의 연꽃을 물고 비상하는 백제대향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여기서 우리 백제대향로와 고구려 고분벽화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에 한쪽은 향로이고 다른 쪽은 벽화라는 기물상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공간 구획 방식이나 구성상의 유사성은 백제대향로의 세계관 내지 우주관이 고구려인들의 그것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다만 고구려고분에서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의 삼산형 산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백제대향로가 고구려 고분벽화와는 또 다른 양식상의 특징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섯번째, 봉황을 중심으로 하는 5악사와 기러기의 상징 체계만 해도 그렇다. 이러한 상징체계는 중국의 향로사는 물론 중국의 미술사에 등장한 바가 없다. 또 5악사가 들고 있는 악기들의 구성은 남조나 북조보다는 오히려 고구려의 주악도의 구성과 친연관계를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대향로가 중국과는 그 문화적 배경을 달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상의 몇 가지 양식적 특징과 중국의 박산향로에서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상징체계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백제대향로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결코 아니며 백제인들의 손으로 직접 제작한 기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금동대향로에 담긴 내용은 무엇일까요? 정말 중국의 불교 연화화생론으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우선 많은 불교 학자들이 노신에 장식된 연꽃을 두고 연화화생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제대향로에서 연꽃을 제외하면 딱히 불교와 관련된 상징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연꽃의 줄기를 물고 비상하는 용을 불교의 용(naga)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단지 그런 것 같다는 견해일 뿐 구체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은 백제의 장인들이 북위 향로의 노신에 장식된 로제트 문양이 갖고 있는 태양의 광명의 의미를 고대 동이계의 '광휘의 연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이는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장식이 불교의 연화화생설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고대 동북아인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연꽃을 태양의 광휘를 상징하는 '태양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지상의 연못에 대응하는 하늘연못이 있으며, 지상의 연꽃은 이 하늘연못에 거꾸로 심어진 연꽃(또는 태양)의 광휘를 받아 이 세상을 환히 밝힌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왕궁이나 고분 천정에 '하늘연못', 즉 천정(天井)을 만들고 거기에 연꽃을 거꾸로 심었던 겁니다. 중국 한대의 기남 화상석묘나 고구려고분의 천정에 장식된 연꽃이 그러한 예입니다.
연꽃과 짝을 이루는 용에 대해서도 고대인들은 일찍부터 지상의 연못과 하늘의 연못 사이를 순환하며 물을 조절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백제대향로의 '연꽃과 용' 유의 상징체계를 갖고 있는 고대 동아시아의 유물 역시 한나라와 그 이전의 유물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연꽃과 용'의 상징체계를 무리하게 불교의 연화화생설로 풀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느낌.
이 이야기들은 제가 서정록 교수님의 백제금동대향로를 일고 적은 것입니다. 아직 제가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도 있고 더 자세하게 설명드리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 있는 이야기들만으로도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과 무관하게 백제인 고유의 생사관, 세계관을 반영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았던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가 조금 더 발전하고 왜곡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정록 교수님의 백제금동대향로를 읽고
백제금동대향로 조금 더 자세한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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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문화유산답사방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1993년 12월23일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곽(木廓) 水路 안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扶餘)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 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 금속공예품 예술의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다.
향로
향을 피우는 그릇으로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이집트, 유대교를 포함한 고대 중동문명, 고대 그리스, 라틴문화권에서도 사용되었지만, 동양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인도에서는사람의 체취나 방 안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향을 사용하였다.
이와같이 나쁜 냄새를 제거해 주는 향은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는 의미로 변하여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러 부처들을 맞이하는 법당의 불전(佛殿)에 삼구족(三具足 .. 부처 앞에서 공양할 때 쓰는 세 가지 도구, 향로,꽃병,촛대를 이름) 또는 오구족(五具足)의 하나로 향로를 안치하게 되었다.
靑瓷獅子有蓋香爐 (산예향로 䝜猊香爐) 국보 제60호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자 향로를 만들었으며, 고려시대 금산사(金山寺) 향로는 일본에 전해져 이 것을 모방한 긴상사(金山寺) 향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향로로는 靑瓷獅子有蓋香爐(국보 제60호), 靑瓷麒麟有蓋香爐(국보 제65호) 등이 있으며, 그밖에 많은 향로가 전해지고 있다.
박산향로 博山香爐
박산향로(博山香爐)는 중국 한대(漢代)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구리로 만든 향로이다. 박산(博山)은 바다 위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상의 山이다. 신선, 기이하게 생긴 짐승, 바닷물 등이 향로의 뚜껑에 조각되어 있고, 몸체에는 구멍이 많이 뚫어져 있으며 금,은으로 상감 세공된 것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대략 2천년전에 바다를 상징하는 받침접시(이것을 承盤이라고 함) 위에 한 개의 다리와 겹쳐진 산봉우리 형태의 몸체를 갖춘 박산향로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향로의 기본형태가 되었다. 박산향로는 당시 중국의 산악숭배, 무속, 불로장생사상, 음양사상 등을 쫒는 신선사상이 조형적 배경이 되었으며, 박산향로는 우리나라에도 전래된 듯 하나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기 이전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승반(承盤)과, 하나의 다리를 대신하여 머리를 들어올린 용을 조각하여 받침을 삼았고, 그 위에 산을 표현하였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서 있어 외형적으로는 신선사상의 지향처인 三神山을 가리킨다는 박산향로의 형식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향로는 높이가 64cm에 이르는 유례없는 대작인데다, 용과 봉황의 비중이 상당히 두드러져 있고, 그리고 박산이라는 명칭이 중국적인 체취가 남긴 이름이므로, 우리 선조들에게 삼신산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친근하게 불리워 온 봉래산(蓬萊山)이라는 이름을 붙여 백제금동용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蓬萊山香爐)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다.
백제인들의 정신세계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뚜껑, 몸통, 받침 그리고 꼭대기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뚜껑은 백제인들의 이상세계인 박산(博山)을 상징하고 있다. 박산(博山)은 전설적인 山으로 동해 가운데 있고 불로장생하는 仙人들이 산다고 한다.
꼭대기의 봉황은 천하가 태평할 때 나타나는 상상의 새이다. 몸통은 만물의 어머니인 연꽃을 상징하고 있고, 받침은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상징하는 龍을 묘사하였다.
꼭대기 .. 봉황
뚜껑부분
백성을 상징하는 기러기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날아 들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니 장차 먼 곳의 백성이 귀의해 올 것입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과연 10월에 남옥저의 구안해 등 20여 가문이 부양에 이르러 귀의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게 하였다..."
"백제본기"의 온조왕 43년조에는 백성의 상징이 기러기임을 실제로 말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남하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의 삶에 덧대어 말한 것이다. 백제대향로 속에는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핀모습, 날개를 완전히 접은모습 등 모두 다른 자세로 조형되어 있는 기러기가 5악사의 연주에 맞추어 춤이라도 추 듯 가무상(歌舞像)으로 그려졌다. 이 향로 속의 다섯 마리 기러기..역시 백제인 즉, 백성을 나타내고 있다.
몸통 부분
받침 부분
신선세계와 불교,도교적 사상
향로는 천계 - 선계 - 인간계 속에 형상화된 天人 등 각종 인물과 맹호, 이무기, 물고기에서 반인반수(半人半獸)에 이르는 동식물 등을 염두에 둘 때 불교 유입 이전의 한국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 민속신앙 전체를 상징하는 100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백제가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때는 바로 382년, 하지만 기록상으로만 볼 때 6세기 전반과 중반 무렵 백제 불교미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는 국교가 불교이었던 만큼 향로가 제작되었을 시기에는 부여지방에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고, 그에 따른 탑과 불상들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6세기 후반에는 불교미술이 보다 완숙한 경지에 다다른, 전성기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태어난 대향로는 불교적인 색채도 물론 가미되었지만, 도교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
용과 봉황의 구성, 수렵의 인물상, 상상의 동물들 등 산악과 동물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같은 모습은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동탁은잔)에 장식된 용의 모습에서도 도교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 당시 백제의 장인들이 무려왕릉의 금속공예품을 장식할 수 있었던 예술적, 기술적 솜씨가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던 시기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백제금동대향로로 꽃을 피웠던 것이다. 향로는 불교와 도교 등 그 당시 백제인의 수준 높은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면 적절할 것이다.
백제대향로는 높이 61.8cm, 몸통 최대 지름 19cm, 무게 11.85kg으로 규모면에서 다른 박산향로(博山香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작이다. 향로는 뚜껑과 몸체 그리고 다리로 각각 따로 구리합금으로 주조되어 하나로 만들어 금으로 도금한 것이다.
이 대향로는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山 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像)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한다는 신선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이자 별천지인 이상향(理想鄕)을 닮게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뚜껑은 박산(博山)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향로는 많이 있으나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5단으로 이루어진 박산은 산봉오리가 모두 74개로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다양한 형태의 인물과 동물들이 돋을 새김되어 있는데, 사이사이에는 식물,바위,시냇물,폭포 등도 표현되어 있어 백제인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뚜껑은 정상부에 봉황이 턱 밑에 여의주(如意珠)를 끼고 있고, 그 아래로 다섯명의 악사(樂士)와 인면조신상(人面鳥身像), 인면수신상(人面獸身像) 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 세계에 실제하는 호랑이, 코끼리,멧돼지, 사슴 등 모두 42마리의 짐승과 다섯명의 악사를 비롯한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 새김되어 있다.
봉황은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온다는 상상의 새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 오르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턱 아래에 작은 여의주를 표현하고, 발톱으로는 큰 여의주를 움켜 잡고 있다. 봉황이 세상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한다. 봉황의 아래 산봉우리 정상에는 다섯 명의 악공이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향로의 정상에 있는 새는 맨아래에 위치한 용과 대비되어 나타내어진 아시아의 대표적인 신수(神獸)인 봉황(鳳凰)이다. 봉황은 박산(博山)에서 양(陽)을 대표하는 신수로서, 그리고 음(陰)을 대표하는 맨 아래 위치한 용과 대칭되어 맨 정상에 안치되었다.
봉황은 막 비상하려는듯 날개와 꼬리를 거의 50도 가량으로 펼치고 있다. 봉황의 부리 밑에는 용을 비롯한 신수(神獸)의 입 언저리에 여의주가 있다. 봉황은 벌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춘다고 하며, 노래는 묘음(妙音) 또는 오음(五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 예로부터 음악과 관련된 동물이다. 이 향로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가 동반된 것, 다섯 원앙이 봉황을 응시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산 봉우리 정상에는 작은 원앙 다섯마리가 봉황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에는 다섯명의 악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악사들은 완함,북,거문고,배소,퉁소를 각각 연주하고 있다. 산 봉우리와 그 사이에는 다양한 인물과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뚜껑에는 총 17명의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 짐승을 부르는 듯한 모습,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고 나무를 잡고 있는 모습, 지팡이를 집고 가는 등이 굽은 모습, 팔짱을 끼고 명상을 하는 듯한 모습 등으로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등이 보이고 있다. 한편 뚜껑에 뚫린 연기 구멍은 봉황의 가슴 윗부분에 연기가 나올수 있도록 뚫은 2개의 작은 구멍과 함께 다섯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 산봉오리 뒷쪽에 5개, 5명의 악사 앞에 솟은 산봉오리 뒷쪽에 5개를 둥글게 돌아가며 배치하였는데, 봉황의 가슴에 뚫린 2개를 제외하고는 솟아오른 뒷편에 가려져 정면에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향을 피우던 몸체는 연꽃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불교에서 모든 생명은 연꽃을 통하여 탄생한다고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를 "연화화생(蓮華化生 : 연화에 의하여 화생된다 - 화생이란 "어떤 조화를 부리듯 흔적없이 신비스런 모습으로 태어남))"이라고 한다. 연꽃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은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바다를 상징하는 용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연꽃으로 변하고, 이 연꽃에는 두 명의 인물과 다양한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연꽃잎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어 잎의 끝부분을 사선문(斜線紋)으로 음각하여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훨씬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금동대향로의 몸통은 연화화생을 표현하는데, 모든 생명은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것으로 8장의 연꽃잎이 세겹으로 배치되어 있다. 두 명의 인물은 달리는 동물 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무예를 하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한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몸통에는 27마리의 동물이 돋을 새김되어 있는데, 날개 달린 동물, 춤 추는 학, 날개 달린 자라, 물고기를 삼키고 있는 수달, 머리에 깃털이 있고 발은 넷이며 몸은 도룡뇽의 형태를 한 청어, 새들의 나라에 살며 쉴새 없이 지저귄다는 활구, 긴다리를 활짝 벌리고 달려가는 타조를 닮은 새, 날개 달린 잉어 등이 표현되어 있다.
층을 이룬 연꽃잎은 몸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데 제일 하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을 복엽(覆葉)으로 묘사하였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외면과 윗단의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용은 수중세계를 관장한다. 모든 생명은 물에서 나왔다고 한다. 바다에 사는 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용의 발톱 부분에 물결 무늬를 표현하였다. 물속에 사는 동물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용의 몸에도 연꽃 당초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용의 입김에서 연꽃이 피어 오르고 이 연꽃이 박산(박산)이 되어 있다. 용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백제대향로의 받침은 한 다리를 생동감 있게 치켜들고 있는 용이 활짝 핀 연꽃봉우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받침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의 뒤와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구름모양의 갈기를 투각하여 장식하였다. 구름모양과 다리 사이에 6엽의 연꽃무늬로 나타내었는데, 용의 세 다리와 구름모양이 원형을 이루게 구성하여 안정감있는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 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뒤까지 길게 뻗어있고, 길게 찢어진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용의 입안에 물려진 짧은 기둥은 향로 몸체의 하부 받침과 연결시켰다. 이처럼 용의 입과 연결되도록 물고 있는 모티브는 신라의 금관총 출토 초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용이 입에 물고있는 기둥의 위로는 향로 받침과 몸체를 연결시키기 위한 기둥이 이어져 있고, 이 기둥은 몸체의 둥근 안쪽면에서 약간 솟아 올라 그 끝에는 별도의 고리를 끼워 고정시켰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살얼음이 얼을 정도로 추웠던 1993년 12월12일 오후 4시 30분, 해가 뉘엇뉘엇 지고 부여 능산리의 고분 발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 쯤이었다.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 당시 부여박물관학예사는 공방의 수조라고 추측되던 물구덩이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차가운 물기를 머금고 기와편이 촘촘히 쌓여있던 물웅덩이..
드디어 웅덩이에 꽃삽으로 조금씩 파내려 가던 중 1m 이상 내려가자 석면,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다량의 기와, 백제금동불상 방배편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발굴단은 야간발굴이라는 특단의 결정을 한다. 야간발굴은 문제가 많은 결단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안전사고와 도난의 예방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한지 3시간반 쯤 지났을까..발굴단은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유물 앞에서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였다.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향로가 정말 백제인이 만든 것인가? 중국의 박산향로(博山香爐)와 닮았지만 그보다 더 섬세하면서도 크기도 크다. 우리가 정말 백제의 혼을 다시 깨운 것인가 ??"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것은 그곳이 바로 부여군에서 주차장으로 만들려고 계획하였던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계단식 논이었던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 추세에 있었고, 부여군은 주차장을 마련하기 전에 유구(遺構), 유물 확인을 위하여 사전 시굴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 부여군의 강행 방침에 부여박물관 및 충남대 박물관은 이에 항의하여 겨우 발굴조사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현장 상황은 더 이상 나쁠 수 없었다. 당시 2,000만원이 조금 넘는 비용으로 3개월이 넘는 발굴을 진행하여야 했고, 발굴지역이 계곡인데다 항상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겨울철 발굴조사를 진행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몇몇 고고학자들이 유구 밀집지역을 정확하게 잡고, 신속하게 발굴을 진행함으로써 한국 발굴사에 영원히 남을 만한 유물을 우리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30분 경 첫발견하였고,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난 오후 8시30분, 1,4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백제대향로의 제작 과정
대향로는 청동 표면에 금을 도금하였다. 받침인 용과 향을 담은 연꽃부분이 몸통이고, 박산(博山)과 봉황이 뚜껑이며, 뚜껑에는 12개의 연기 구멍이 있다. 향을 피우면 봉황의 가슴과 각 봉우리의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게 된다. 대향로는 일반적으로 금속 주조법인 밀랍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도안을 하고 밀랍에 조각을 하는데, 밀랍은 벌집과 송진을 잘 섞어 다진 다음 섬세하게 산과 인물과 동물을 조각하였다. 몸통에 그대로 새긴 경우도 있고, 따로 조각하여 붙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형태가 모두 만들어지면 진흙으로 거푸집을 만든다. 밀랍 원본에 섬세하고 고운 진흙을 붙이고, 여러 번 덧칠하여 바른다.어느 정도 마르게 되면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열을 가하면 열에 약한 밀랍이 녹아내려 진흙으로 만든 거푸집만 남게 된다.
이 거푸집을 가마에 넣고 한번 더 열을 가하는데, 이는 거푸집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굳히게 된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잘 맞추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열이 식은 후 거푸집을 깨트리면 향로의 모습이 나온다.
덜 다듬어지고 거칠은 부분은 따로 손질을 한다. 손질이 끝난 향로에 금도금을 하게 되는데, 금도금은 금가루와 수은을 섞은 후 불순물을 제거하고 붓이나 손으로 향로에 잘 바른다.그 후 열을 가하면 수은은 날아가고 금만 표면에 남게 된다. 금을 광쇠로 문질러 광택이 나면 금도금이 완성된다.
제작시기
능산리절터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절터로 1992년부터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형식이다.
이 절터의 공방(工房)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는데,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百濟昌王銘舍利龕 .. 국보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공양자와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舍利龕)에 새겨진 글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건립한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의 사리감(舍利龕)은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이었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윗쪽은 원형, 아래쪽은 높이 74cm, 가로와 세로가 50cm인 터널형이다.
감실(龕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cm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감실의 좌우 양측에 각각 중국 남북조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그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창왕십삼계태세재 정해매형 공주공양사리
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 丁亥媒兄 公主供養舍利
즉, 이 사리감은 성왕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威德王)에 의하여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하여 밝혀진 최초의 작품이다.
악기
신선세계 또는 신선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도교(道敎)에서는 의례시 향을 피우며 음악이나 춤이 동반하고 있음을 본다. 이 향로의 악사(樂士)도 같은 차원에서 즉 신선세계의 음악의 연주자로서 등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 악사는 예로부터 음악을 동반하며 나타내던 봉황 즉 이 향로 정상의 새와 관련이 있다. 즉 봉황이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추자 이에 동반하여 악사가 선계(仙界)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악기를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펴보면 커다란 몸체에 기둥이 꽂혀있는 현악기는 우리나라 월금(月琴)이나, 중국의 완함(阮咸)과 흡사하다. 세로로 불고 있는 관악기는 종적(縱笛)이다. 가늘고 길이가 다른 관을 여러 개 묶은 관악기는 배소(排簫)이다. 그리고 배가 불룩하고 양쪽이 좁아지는 몸통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는 현악기는 금(琴)으로 보인다. 한 손으로 윗판을 들고 있는 타악기는 동발(銅渤)로 보여진다.
백제 귀족을 상징하는 5악사
왕을 상징하는 봉황 그리고 백성을 상징하는 다섯 마리의 기러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다섯 명의 악사... 모두 백제의 5부체제를 표방하는 하나의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외형상 악기 연주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백제 5부체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5부 귀족 또는 5부족을 상징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5부체제란 ? 고대국가는 각 나라마다 고유한 성수(聖數)체계를 갖고 있어 각종 상징물의 조형원리 등으로 삼았다. 백제의 경우 행정기구이었던 5부(部)와 5방(方) 그리고 백제를 상징하는 대표적 조형물인 정림사터 5층석탑 등으로 볼 때 백제의 성수는 "5"의 체계에 든다.
악사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내려뜨리는 독특한 머리 장식, 산악도 속의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옷을 갖춰 입고 있는 모습 등은 이들이 귀족임을 대변해 주고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봉황을 중심으로 다섯명의 악사와 다섯 마리의 기러기.. 이러한 상징체계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음악과 정치의 상관관계이다.
고대에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이나 왕의 행차에는 물론 전쟁이나 수렵활동을 할 때에도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는 "소리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고대국가의 정치의 이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금동대향로가 5부체제를 봉황과 5악사, 기러기의 가무형태로 표현한 것은 백제인들의 정치적인 이상이 하늘의 질서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天神을 맞아 함께 제례를 지내며 가무를 하는 동안, 王과 神 그리고 귀족과 백성들은 모두 하나가 된다. 즉 백제금동대향로는 하늘을 향하여 피우는 향훈(香薰) 속에 神과 人間, 왕과 백성, 귀족과 평민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한데 어울려 사는 세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1400여 년 전 백제시대는 국제성과 평등성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세계이었다.
현금 玄琴
거문고로도 불리우는 현금은 중국 진(晉)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보내온 7현금을 왕산악이 개조하여 만들었다는 악기이다. 이 향로 속의 악사는 왼손을 3현으로 표시된 거문고 줄 위에 얹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거문고의 잔해가 발견되어, 이미 무령왕 시절에 백제인들이 고구려의 거문고를 사용하였다는 증거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완함 阮咸
백제금동대향로의 정수인 봉황, 그 바로 아래에는 악사가 감미로운 표정으로 완함을 연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완함이 다섯 악기의 중심이 되는 악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파계열의 현악기인 완함은 원래 말 위에서 다루는 서역의 악기이다. 중국 한대까지는 비파로 불리다가 진(晉)나라 때 완함이라는 사람이 잘 연주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완함은 보통 4현을 갖고 있는데, 이 향로 속의 완함은 3현만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피리 笛類
피리는 서역의 구자(현, 쿠차)에서 기원한 관악기이며, 가느다란 대나무로 엮어 만들었다. 서양의 팬푸르트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향로 속의 악사는 피리보다 관(管)이 길고 겹 리드의 흔적이 없는 적류(笛類)의 악기를 불고 있다. 적류는 흔히 옆으로 부는 횡적(橫笛 ..흔히 대금 또는 젓대)과 앞으로 부는 종적(縱笛)으로 구분되는데, 위의 악기는 종적(縱迪)에 해당한다.
배소 排簫
대나무를 옆으로 나란히 묶은 배소(排簫)는 북방 유목민들의 관악기로,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난다. 배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시경에 "소관"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악기는 북방민족이 주로 활동하던 한대(漢代)와 남북조시대에 널리 사용되다가 그들의 퇴조와 함께 쓰임새가 급격히 줄어, 이는 사실상 북방민족이 즐겨 사용하던 고유악기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향로속의 배소는 사다리꼴로 대략 10관에 길이는 1자(尺) 정도로 보인다.
북
완함의 오른쪽에 있는 북은 항아리 모양의 토기에 가죽을 씌웠다. 악사는 무릎에 북을 올려놓고 왼손으로 고정시킨 뒤 오른손으로 북채를 쥐고 내려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은 중국이나 고구려 유물에서는 아직 발견된 예가 없어 주목을 끌고 있는데, 그 원형을 인도네시아에서 찾아 볼 수 있어, 그곳으로 부터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물 그림
봉황 아래에는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다섯명의 주악상(奏樂像)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74개의 산봉우리와 18명의 인물 그리고 100여가지의 온갖 형상들이 조화롭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18명의 사람들은 모두 다 직업이 다르고, 하고 있는 일이 다르다. 폭포수에 머리를 감고 있는 사람, 도를 닦는 듯한 사람, 개를 끌고 다니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말을 타고 가는 사람 등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여흥을 보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물그림
동물들의 모습은 인물상 못지 않게 더욱 다양하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사자, 원숭이, 코끼리, 멧돼지, 개, 뱀을 물고 있는 거북이 등이 있다. 특히 코끼리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임에도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포함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상상 속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 사슴 등 향로 곳곳에 표현된 각종 문양은 향로의 품격을 한단계 높여준다. 향로 속 18인의 신선 또는 사람, 65마리의 짐승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실제로 보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묘사이다. 그리고 백제는 聖王 시절, 겸익이 뱃길을 이용하여 인도(印度)에 가서 불경을 구해 왔으며, 분황국과도 교역하였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분황국은 지금의 캄보디아로 백제의 해양진출과 무역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 17회 동기회 모임> 카페에서 모셔 온 자료
http://cafe.daum.net/heungbok/S6kI/252
대백제를 말하다 1부 : 700년 건축문화의 꽃 / YTN 사이언스
게시일: 2014. 9. 26.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http://www.ytnscience.co.kr/program/p...
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띄고 있었던 백제, 농업을 바탕으로 쌓은 경제력과 대외무역은 삼국중에 으뜸이었다.
그리고 고대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해 나간 백제의 위상.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잡아 고구려와 신려의 압박을 받으며 숱한 전쟁을 치뤄냈다.
해전으로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는 한편, 새로운 기술과 문...
대백제를 말하다 2부 : 찬란한 백제의 예술 / YTN 사이언스
게시일: 2014. 10. 5.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http://www.ytnscience.co.kr/program/p...
불교국가를 세운 백제, 안정된 정치와 강력한 왕권 확보를 위해 불교를 관장하며 독창적인 문화를 펼쳤다.
백제의 사상관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백제의 금동대향로는 당시 백제의 예술성과 과학기술이 집약된 최고의 문화유산!
백제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왕실을 주축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예술을 꽃피운 백제.
풍요롭고 여유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백제의 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유물로 밝혀지는 독창적인 백제의 문화와 예술은 찬란했던 백제를 되돌아 보라고
14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한국사 과학 探 - 대백제를 말하다 3부 : 잊혀진 해상의 길을 찾아서 / YTN DMB
게시일: 2014. 10. 21.
[YTN DMB 기사원문] http://www.ytndmb.co.kr/mytn/program_...
기원 전 18년, 온조에 의해 한강 근처 위례성에 자리를 잡고 세운 나라 백제.
700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속에 대백제가 탄생한 비결은 무엇일까?
일찍부터 다른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백제.
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바로 대외무역이었다.
다른 문화에 대해 배타성이 적고 개방적인 백제는 그야말...
[월간문화재사랑] 백제문화의 포용의 정신과 백제 금동대향로의 창조성 ⓔ지식, 교양채널
출처 : 월간 문화재 사랑(Vol 123) 2015년 02월호.......... cafe.daum.net/kncbook/M... 바람과나무이.. 백제 역사를 새로 쓴, 무령왕릉 / YTN 사이언스
게시일: 2016. 9. 28. 수준 높은 기술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문화강국 백제. 첨단 기술의 집합체이자, 동아시아 국제교류의 중심역할을 했던 백제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무령왕릉을 다시 조명해보고자 한다. 2015년 우리 문화재 가운데 '백제역사유적지구'가 12번째로 세계유산으로 이름을 올렸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와 부여, 익산으로 이어진 역사 유적지로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 증거를 보여주는 동시, 문헌과 기록의 부족으로 알려지지 않은 백제 문화가 얼마나 다채로웠고 휼륭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백제 문화의 화려함과 깊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71년. 백제 왕릉급 고분인 송산리 6호분의 비 피해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굴되었다. 처녀분이던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동물 모양의 석수와 토지신으로 부터 땅을 매입한 기록 그리고 죽은자가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담긴 지석이었다. 지석을 통해 무덤의 주인은 백제 제2의 중흥을 이끌었던 무령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모두가 주목한 것은 무령왕릉의 다양한 부장품! 왕과 왕비의 장신구를 통해서 백제의 금속 세공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었으며 일본의 금송으로 제작한 왕과 왕비의 목관을 통해서 백제와 일본의 문화적 역사적 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 밝혀내는 증거가 됐다. 또한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의 악어 장식과 코끼리 장식을 통하여 백제가 일본 이외에도 중국, 동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다양한 문화 교류 활동을 했음 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의 교류 활동은 문화, 역사의 발전 이외 항해술에도 꽃을 피우게 되어 한반도의 다른 국가보다 일찍부터 바다교통을 개척할 수 있었는데 특히 백제의 선박은 평저선이라 해서 배 밑이 평탄하여 높은 바람과 파도에 강한 첨저선에 비해 느리지만, 바다 위에서 흔들림이 덜하고 운송과 원양항해에 수월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더 활발한 외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의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를 다시 재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유적지, 무령왕릉 우리가 앞으로 미래의 남겨야 할 보물이다.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http://www.ytnscience.co.kr/program/p...
百濟金銅大香爐 (백제금동대향로)
▲동아시아 고대 금속 공예의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백제금동대향로
유 물 명 칭 : 百濟金銅大香爐 (백제금동대향로) 종 목 : 국보 제287호 지 정 일 : 1996. 05. 30 국적/시대 : 한국(韓國) 백제(百濟) 재 질 : 금속(金屬) 금동(金銅) 용도/기능 :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제례(祭 禮) 향로(香爐) 출 토 지 : 충청남도(忠淸南道) 부여군(扶餘郡) 문양/양식 : 동물문(動物文) 봉황문(鳳凰文) 소장 기관 : 국립1(國立1) 부여(扶餘)
서기 660년! ‘한(恨)많은 왕국’ 백제가 멸망한 이후 망국의 왕자 한 분이 일본으로 피란한다. 그는 일본 미야자키현 남향촌에 둥지를 틀어 백제마을을 가꾸었다. 마을사람들은 신다이(神門)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 1993년 10월26일, 이 남향촌 주민들은 보자기에 싼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았다. 실로 1,330 여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 이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날, 바로 그 곁에서는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 숨쉬는 듯한 용과 봉황 향로의 이름은 처음에는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였다. 향로의 받침엔 龍, 꼭대기엔 鳳이 장식됐잖아요. 또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蓬萊·方丈·瀛洲) 중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를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 동고(銅鼓), 종적(縱笛), 소(簫)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또한 뚜껑 전체가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이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 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 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이 향로는 어디까지나 중국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 오히려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한나라의 박산향로
(연꽃에 새겨진 한 사람은 무예를 수련하는 모습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동물을 타고 달리고 있다. 27 마리 동물 가운데는 날개가 달린 물고기, 악어, 황새 등이 보인다.)
연대는 역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후반, 즉 위덕왕(재위 554~597년)때 만들어 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론한다. -------------------------------------------------- *또 다른 해설 감상*
[해양강국 백제를 찾아서] 백제 금동 대향로 날아오를 것 같은 봉황… 막 피어난 듯한 연꽃 ▲봉황부분
1993년 12월 12일 백제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백제왕의 무덤이 여럿 모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쪽의 능산리 유적지 공방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백제 왕실에서 사용되었을 법한 금동 대향로가 발견된 것이다. 이 향로는 1400여 년의 시간을 넘어 겹겹이 쌓인 기와 조각 더미 밑에서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인들이 적의 침입을 피해 서둘러 숨겨놓은 듯하다.
향로란 나쁜 냄새나 기운을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는 도구이다. 인도에서는 약 4000 년 전, 동북아시아에서는 2300 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백제 주변국에는 산봉우리 모양의 뚜껑과 'ㅗ' 모양의 다리, 잔처럼 생긴 몸체를 갖춘 박산향로가 널리 만들어졌다. 백제 금동 대향로도 박산향로의 기본 형태를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백제인의 생각과 기술이 합쳐져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된 것이다. 높이 62.5 ㎝, 최대 지름 19 ㎝인 이 향로는 크게 4 부분으로 나뉜다.
맨 위의 봉황 장식 아래는 산악도로 장식된 뚜껑과 연꽃이 장식된 몸체, 몸체를 물고 있는 용 받침으로 이루어졌다. ▲상단부분
본체의 가운데는 테두리의 흐르는 구름 문양을 경계로 위쪽은 산악도, 아래쪽은 연꽃이 가득한 물의 세계로 구분이 된다. 산악도에는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사람과 신선 등 12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3 마리의 호랑이와 사자ㆍ원숭이ㆍ멧돼지ㆍ코끼리ㆍ낙타 같은 많은 동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중간부분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 새와 동물도 있다. 곳곳에 있는 폭포와 나무, 불꽃 문양, 귀면상은 산악도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추고 있다. 그 아래에는 5 명의 음악가가 완함, 북, 거문고, 배소, 피리를 불고 있다. 거문고는 고구려, 완함과 배소는 서역, 북은 남방의 악기이다. 이처럼 다양한 악기가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열린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5 개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은 조용하면서도 아늑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아시아 고대 금속 공예의 최고라는 평가
향로의 몸체 부분은 용이 활짝 핀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중하 연화(蓮花)부분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 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고, 잎마다 27 마리의 짐승과 2 명의 사람이 돋을 새김으로 장식돼 있다. 용은 한쪽 발을 치켜들고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만들어 안정감 있게 향로를 받치게 되어 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 나온 뿔은 두 갈래로 나뉘어 목 뒤까지 뻗어있고,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용을 형상화한 받침대 부분 이 향로는 백제 사람들이 도교와 불교를 믿었고, 다양한 음악과 놀이를 즐겼으며 해외와 활발하게 교류를 했음을 보여준다. 일본 열도를 크게 개척하고, 고구려도 쉽게 넘볼 수 없었던 백제의 힘은 이러한 기술과 문화에서 나온 것다. 일찍부터 바다를 적극 활용한 백제는 다른 나라로부터 앞선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쏟았다. 기술자, 예술가들에게 박사, 공, 사 등의 호칭을 주고 높은 벼슬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기술자와 문화 예술인을 높이 대우했기 때문에 수준 높은 기술과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할 백제 금동 대향로인 것이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 cafe.daum.net/hanmokbun... 한목분재회 |
백제금동대향로와 고구려벽화 -.-;;; 古典秀多
아래의 글은 올해 건양대학교 한국화 전공학생들의 작품집 <백제금동대향로와 고구려벽화>에서 실렸던 서문입니다.
도움이 될까 싶어 올리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오회분 4호묘의 천정벽에 그려진 해님-달님의 모습.)
고구려는 우리 역사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마치 우리 역사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거대한 호수와 같지요.
고구려 이전의 역사와 문화가 모두 고구려의 호수로 흘러들어왔다면, 고구려 이후의 역사는 모두 그 호수로부터 흘러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위치는 크고 깊습니다.
때문에 고대의 우리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고구려를 아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 민족이 오늘과 같은 단일민족의 신화를 갖게 된 것도 단군신화 때문이라기보다는 고구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정도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고구려고분벽화는 이땅의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도 귀중한 보물입니다. 그 앞에서 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고구려고분벽화에는 고대 동아시아의 북방문화와 수렵문화, 농경문화, 해양문화를 아우르는 창조적 역동성과 힘이 꿈틀거립니다.
그것은 농경문화에 토대를 둔 중국의 문화와도 다른 것이고, 해양문화에 토대를 둔 일본의 문화와도 다른 것이지요.
더욱이 고구려고분벽화는 이제는 사라진 북유라시아의 광활한 초월을 주름잡던 유목민들과 시베리아의 산림과 계곡에 살던 수렵인들의 문화의 진면목을 간직하고 있는 인류문화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구려고분벽화를 말할 때마다 저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벽화에 견주어 말하곤 합니다. 비록 이집트의 피라미드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문화사적 의미로 말하면 결코 그에 못지않다고 말이지요.
시베리아 샤만의 북 그림을 연상시키는 고구려고분벽화의 공간구성이나 5방색 계통의 아름다운 색채와 역동적인 동선(動線), 천정벽의 신화적 내용과 고구려인들의 천문도(天文圖), 그리고 천상계의 공간에 무수히 장식되어 있는 그 많은 수련들, 그리고 수렵도와 씨름도며, 천정벽을 두 팔로 들어 지탱하고 있는 역사(力士)의 모습, 또 장천1호분 등에 보이는 우주나무와 무용총의 가무배송도, 그리고 벽화에 그려진 수많은 악기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무용총의 수렵도. 춤추고 있는 산의 동선의 흐름을 보세요.)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고분 중 벽화가 그려진 고분은 모두 100여기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벽화의 풍부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막상 고구려벽화를 공부하는 이들은 그 연구의 단초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곤 하지요. 저 역시도 고구려벽화를 처음 공부할 때 그 단초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몰라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무릇 어느 집이든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문이 어딘지 몰라 입구에서부터 우왕좌왕하는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다 1993년 12월, 우연히 부여 능산리 무덤군 옆 골짜기에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던 중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습니다. 무려 150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땅속의 구덩이에 묻혀 있었건만 기물의 어느 한 곳 파손된 곳 없이 온전했으니까요. 그때 온 나라의 학자들과 언론들이 초특급의 국보가 발굴되었다며 환호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 향로의 실물을 보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영감이 왔고, 끝내 그 영감을 피해가지 못해 7년 가까운 시간을 오로지 향로공부에 전념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세계관이 고구려고분벽화의 세계관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그리고 고구려고분이 본장(本葬, 고구려는 이차장의 풍습을 갖고 있어서 고인이 죽은 지 정확히 27개월 만에 뼈를 수습해 본장을 지냈으며, 이때 고인(故人)의 혼령을 불러 말에 태워보내며 가무배송하는 풍습이 있었다) 때 고인의 뼈를 수습해 무덤에 안치하며 혼령이 천상계로 무사히 돌아가시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축조되었다면, 백제금동대향로는 왕실에서 신령들과 조상들의 혼령을 모시기 위해 만들었으며, 부여계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말이지요.
실제로 고구려고분벽화를 공부했던 경험은 백제금동향로의 구성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공부는 반대로 고구려고분벽화의 구성과 상징체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실마리들을 제공해주었지요.
그렇게 양자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쪽이 불완전해지는. 양자가 함께 있음으로써 비로소 둘 다 완전해지는.....
(무용총의 가무배송도. 고인의 혼령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춤과 노래로써 보내는.... 중앙 하단의 말탄이가 무덤의 주인공입니다. 오른쪽 무용단 아래에는 가창대가 있는데 잘 보이지 않아 아쉽군요....) 양자의 이런 관계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나 곧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백제금동대향로는 향로 본체의 가운데에 있는 류운문(流雲文) 테두리를 경계로 위는 천상계의 산악도를 표현하고 아래는 연꽃을 배경으로 수상생태계를 나타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구려벽화에서도 똑같이 확인됩니다.
고구려고분의 내부는 당시 목조건축물의 구조를 그대로 본따서 축조했는데, 덕흥리고분이나 쌍영총 등의 고분을 보면 건축물의 도리에 해당하는 사방벽의 도리에 류운문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고구려 건축물의 도리나 기둥에 이런 류운문류의 무늬가 많이 장식되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덕흥리고분의 류운문 도리 위의 천상계에는 산들과 함께 수렵하는 기마인물상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공간구성은 정확히 백제금동대향로의 산악도의 구성과 같은 것입니다.
또 백제금동대향로의 류운문 테두리 위에는 천상계의 광휘를 나타내기 위한 불꽃형태의 박산무늬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런 박산무늬는 덕흥리고분이나 안악고분 등 고구려의 초중기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쌍영총 현실을 받치고 있는 두 팔각기둥에는 연꽃과 용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 또한 백제금동대향로의 노신의 연꽃과 그 연꽃을 물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용틀임을 하는 용의 구성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 향로 본체와 아래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체는 다시 가운데의 류운문 테두리를 경계로 위쪽은 천상계, 아래쪽은 지상의 수상생태계(연화도)를 나타내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고구려벽화의 이런 구성은 중국 한족의 벽화나 기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성은 고대 동북아인들이 고대 동이계통의 문화와 수렵문화를 토대로 북방의 유목문화와 서역문화 등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시켜온 이땅의 고유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대 부여계인들이 이런 놀라운 세계관과 우주관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한족의 문화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고대 동북아에서 수천년간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정신이 응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래 중국의 변방으로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역사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대개 외부로부터 거세게 밀려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내부로부터 올라오는 자괴심과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백제금동대향로가 1500년만에 그 모습을 다시 세상에 드러내면서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이상과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
(덕화리고분 천정(하늘연못)에 거꾸로 심어진 하늘연꽃과 주위의 구름무늬, 별자리들.... )
어디 그뿐인가요.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고분, 쌍영총 등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분의 천정에는 으레 하늘연못(天井, 또는 藻井)이 조성되어 있고, 그 연못에는 커다란 연꽃이 거꾸로 심어져 있어 지상의 연못의 연꽃들과 조응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백제금동대향로의 노신에는 바로 이 하늘연못에 거꾸로 심어져 있는 연꽃에 대응되는 광휘의 연꽃이 장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동이계 사람들은 지상에만 연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연못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용이 천둥번개를 거느리고 비를 뿌리면 하늘연못의 물이 줄어드는 대신 지상의 연못과 하천의 물이 불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수충(水虫)인 무지개(虹)가 지상에 넘치는 여분의 물을 빨아 마시어 다시 하늘연못으로 가져갑니다. 이렇게 용은 지상의 물과 천상의 물의 순환을 조절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상의 연못에는 으레 연꽃이 핍니다. 그리고 그 연꽃 주위에는 잉어가 몰려들고, 다시 오리나 기러기 등 물새들이 날아듭니다.
이렇게 여름의 연못은 늘 하나의 ‘연화도’를 이룹니다. 그런데 지상의 연못에 연꽃이 핀다면 그에 대응하는 하늘의 연못에도 연꽃이 피겠지요.
연꽃이 있으면 다시 그 주위에 잉어 등의 물고기와 오리, 기러기 등의 새들이 모여듭니다. 그리고 물고기와 물새들은 다시 철따라 지상의 연못과 하늘연못을 오고가겠지요. 우리의 옛 신화는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오회분 5호묘 천정벽의 용. 화려하기 그지없지요. 흉노계통의 용입니다....)
고대 동이인들은 전국시대 말엽 목조건축물이 출현하자 지붕의 서까래 아래 쪽에 하늘연못, 곧 조정(藻井)을 만들고 그곳에 연꽃과 마름 등을 거꾸로 심었습니다.
또 교목 등의 아름다운 가지를 장식해 오방색의 화려한 단청을 꾸몄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궁전이나 사찰의 조정양식과 단청장식의 유래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화도의 세계는 지금까지도 민화(民畵)로 우리들 생활 속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
(진파리1호분 현실 남벽의 흐르는 구름무늬, 류운문.)
그러고 보면 고구려고분벽화와 백제금동대향로는 이 땅의 고대문화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다시 보게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이 땅의 조상들의 삶과 정신세계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일찍이 최치원 선생이 <이땅의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고 했던 바로 그 풍류의 정신입니다.
놀랍게도 덕흥리고분, 무용총, 삼실총, 씨름총, 오회분 등 많은 고구려고분벽화에는 갖가지 바람, 흐름, 결, 떨림의 무늬가 수없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바람무늬, 구름무늬, 물결무늬, 광휘무늬, 넝쿨 등의 식물무늬, 꽃무늬 등등. 이러한 각종 무늬와 그들이 함축하는 풍류의 정신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식(冠飾), 금동신발, 그리고 벽화고분의 구름무늬 등 백제인들이 남긴 유물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불선(儒彿仙)이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이땅의 조상들이 뭇생명들과 관계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방식의 아름다운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풍류라고 하면 흔히 중국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성행했던 술마시고 노는 다분히 현실도피적이고 퇴폐적인 그런 문화를 일컫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본래 이땅의 조상들이 갖고 있던 아름다운 도, <바람 風, 흐를 流>의 풍류와는 거리가 먼 말입니다.
중국의 한족지식인들이 노닐던 풍류는 당시의 어지러운 현실을 피해 자연 속에서 그 답답한 회포를 푸는 것이 고작이나 이땅의 조상들이 지켜왔던 아름다운 도는 오히려 삶의 근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땅의 풍류와 중국의 세속적인 풍류의 혼동을 막고자 최치원 선생이 말하는 풍류를 ‘바람, 흐름, 결, 떨림’으로 풀어서 사용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삶이란 늘 걱정거리를 끼고 살지만 그럼에도 경이와 감사할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매 순간 감사하면서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각저총의 씨름도. 우주나무 밑에서의 씨름이라.... 상징하는 의미가 간단치 않지요.)
그렇다면 이런 아름다운 도, 풍류의 세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9세기 중엽의 혼란한 시대에 살았던 최치원 선생이 그처럼 이 아름다운 도를 그리워했던 것일까요?
풍류란 요즈음 말로 옮기면 한마디로 ‘생명의 문화, 관계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산업문명이 가져온 경쟁과 지배와 파괴와 같은 그런 비생태적인 문화가 아니라 모든 생명을 공경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문화입니다.
그리고 평등과 관계와 배려를 중요시하는 문화입니다. 무릇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을 갖고 있고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우리 안의 바람인 숨결과 물, 비, 강물 등의 흐름, 그리고 형태와 무늬, 색깔 등의 결, 그리고 소리와 진동 등의 떨림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풍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가 평소 잊고 사는 숨쉬는 작은 행위만해도 더없이 경이롭고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은 해와 달도 숨을 쉰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같이 하늘을 일주하는데,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천왕지신총 같은 고구려고분의 천정벽에 그려진 달에는 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마치 호수의 물결이 흔들리 듯이. 또 천정에 그려진 태양은 으레 불꽃이나 연꽃과 같은 광휘의 꽃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꽃이란 생명의 정화(精華)입니다. 당연히 숨을 쉬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숨을 쉬는 존재는 표정이 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그들이 만든 장식물이나 심지어 연장과 같은 도구조차도 생명을 갖고 있다고 여겨 어느 하나 함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땅의 조상들은 그들이 관계하고 만나는 모든 존재에 숨결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은 다른 사람들의 숨과 섞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멀리 있는 자연의 다른 생명들의 숨과도 섞이게 되지요. 그렇게 나의 숨은 다른 존재의 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명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은 다른 존재들의 숨결과 생명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나는 혼자 숨을 쉬는 것 같아도 사실은 내 주위의 모든 존재들과 숨을 공유합니다. 그렇게 생명의 숨결을 나누며 거대한 생명의 거미집을 짓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실상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뗄레야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숨을 쉬는 작은 행위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하나인 고귀한 영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어디 숨만 그럴까요? 내가 마시는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먹고 배설하는 물은 돌고 돌아 언젠가는 내게 돌아옵니다. 세상의 그 모든 존재들을 돌아서 말이지요. 그렇게 나의 행위와 말과 생각 또한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영적인 지혜를 바탕으로 나보다는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서로 관계지워져 있고, 그 어느 생명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법을 함부로 거스르지 않았으며, 나를 내세우고 자랑하기보다는 나를 낮추었습니다.
또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위해 힘썼습니다. 요즈음식의 표현으로 하면 전쟁보다는 평화와 협동을 사랑했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아낄 줄 알았습니다. 양보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최치원 선생이 그처럼 흠모하였던 이 땅의 아름다운 도, 현묘지도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물질과 욕망에 물들지 않은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고구려고분벽화와 백제금동대향로 등 고대 동북아의 유물에는 이런 풍류의 세계가 바람무늬, 물결무늬, 때로는 식물무늬, 나선형 무늬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삼실총의 완함 연주자. 소리, 노래의 떨림의 세계를 나타내주기 위해 동선을 넣었네요.) cafe.daum.net/saltway/3... 소금창고가는.. |
"백제 금동대향로 中 남조 영향받아"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백제 금동대향로 中 남조 영향받아"입력 : 2004/06/18 17:21 | 수정 : 2004/06/18 17:23 권오영 교수 "6세기 中 벽돌그림 향로 닮아"1993년 충남 부여에서 출토되어 정교한 세공과 완벽한 표현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백제금 동대향로(국보 287호)와 공주 무령왕릉 금관 장식·진묘수 등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들이 중국 남조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학계의 논란이 예상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그동안 한대(漢代)에 유행했던 박산로(博山爐)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고유 한 예술품으로 생각돼 왔다. 권오영(權五榮) 한신대 교수는 19일 경북대에서 열리는 제79회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 서 ‘중국 육조문화를 통해 본 백제 문화의 특성’을 통해 “백제금동대향로는 비슷한 시기 중국 남조에서 사용된 향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무령왕릉 출토품 중 상당수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지난 2월 중국 장쑤(江蘇)성 창저우(常州)시 박물관에서 촬 영한 6세기 척가촌묘(戚家村墓) 벽돌 사진을 공개했다. 이 벽돌 사진은 작년 대전에서 열린 백제금동대향로 학술대회에서도 소개됐던 것으로, 그림 속 여성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백제금 동대향로와 비교했을 때 갸름한 형태와 위쪽 새 모양 장식이 비슷하지만, 장식과 표현기법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비교할 수 없이 단순하다. 그러나 권 교수는 “백제 문화의 특성이 국제성과 개방성에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기 위해 놓아둔 동물상)가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견된 돼지·악어 모양 진묘수와 흡사한 형태이 며 묘지(墓誌) 형식이나 왕비 관식의 연꽃 문양도 중국 남조에서 기원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 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에는 상당한 반론도 예상된다. 한 예로, 최응천(崔應天) 국립춘천박물관 장은 “벽돌에 그려진 향로의 모습은 옛 시대의 것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남조 때 실 제로 그런 향로가 사용됐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며 “이미 중국에선 박산로의 전통이 사라진 6세기에 백제에서 완전히 자신들의 문화로 소화한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중요하 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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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자 註 : 강소성 상주시(常洲市)에 해상대백제국의 담로가 있었다는 증거??
cafe.daum.net/ymcclub/V... ymc무재해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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