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9) 성덕대왕신종

2017. 5. 2. 22:02美學 이야기



      

[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9) 성덕대왕신종

                                                                                                                       최응천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 높이 3.66m 구경 2.27m, 통일신라 771년, 국립경주박물관.



묘한 울림 소리…힘찬 용뉴와 세련된 공양자상

   성덕대왕신종은 한국의 금속공예품 가운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어떤 점에서 아름답고 뛰어난지 종의 세부형태에서부터 다양하게 새겨진 무늬,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바까지 최응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이 세밀히 짚어 보았다. /편집자주


   현존하는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상원사에 있는 통일신라 725년명 범종으로 삼국시대 범종이 한 점도 남아있지 못한 현재로선 가장 古格을 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원사 종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은 한국 범종 중 가장 클 뿐 아니라 가장 맑고 웅장한 소리, 아름다운 형태와 문양을 지녀 예전부터 한국의 최고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일찍이 이 범종을 찾은 ‘대지’의 작가 펄 벅은 이 범종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해 이 범종 하나만으로 박물관을 세우고 남음이 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종신의 상부 위 龍는 한 마리 용이 목을 구부려 天板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音筒이 부착돼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앞뒤의 발을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뉴는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로 표현돼 통일신라 범종의 용뉴 중 가장 역동감 넘치면서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뒤에 붙은 굵은 음통은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눴다. 각 단에는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葉文을 정교하게 새긴 仰·伏蓮의 연판을 부조했고 가장 하단에는 仰蓮만을 새겼다. 음통 하단과 용뉴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연꽃 문양을 돌려가며 장식하고 있어 주목된다.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까지 장식된 것에서 세심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과 여러 군데 쇳물을 주입했던 주입구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종신의 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聯珠文이 장식됐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했다. 상대에 붙은 蓮廓帶에도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蓮)는 통일신라의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납작하게 표현된 게 독특하다. 이런 형태는 후에 운쥬지종(雲樹寺鐘)이나 죠구진자종(常宮神社鐘, 833년, 일본 소장)과 같은 8~9세기 통일신라 범종에까지 계승되는 일종의 변형 양식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奏樂天人像과 鐘口의 모습이 다른 종과는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를 받쳐 든 공양자상이 앞뒤 면에 조각돼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듯이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고(座)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 향로 손잡이를 받쳐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겨 있고 배 앞으로 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됐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모습의 몸체로 구성됐다. 공양자상의 세련된 자세,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天衣와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내 범종 부조상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공양자상은 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종신의 앞뒤 면에 새겨진 양각명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4구의 공양자상을 배치한 점 역시 다른 종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아울러 종구 부분을 8번의 유연한 굴곡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도 다른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에 따라 그 위에 장식되는 하대 부분도 8릉의 굴곡을 이루게 되고,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撞座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겼으며 그 사이를 유려한 모습의 굴곡진 연화 당초문으로 연결시켜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좌는 주위를 원형 테두리 없이 8엽으로 구성된 寶相華文으로 장식했다. 종신 앞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해 구성한 1천여 자에 이르는 장문이다.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 자씩 짝을 맞춰 율문을 만든 ‘銘’을 배치했는데 서의 첫 구절은 성덕대왕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밝히고 있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 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一乘의 圓音’을 깨닫는다.’. 여기서 말하는 종소리인 ‘一乘之圓音’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회통하는 부처의 설법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당시에 글을 지은 이는 翰林朗이고, 직급은 급찬이었던 金弼奧이며 종 제작에 참여한 인명이 기록돼 있는데, 鑄鍾大博士인 大奈麻 朴從鎰과 次博士 朴賓奈, 朴韓味, 朴負岳 등이다. 또한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됐으며 종의 무게는 18.9톤에 달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종이 걸려 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으로 불리기도 하며 우리에겐 ‘에밀레종’으로 더 친숙하다. 봉덕사는 폐사돼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절로 확인된다. 성덕왕이 증조부 무열왕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 효성왕이 738년에 절을 완공했다.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은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했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인 大曆六年(771)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돼 성덕대왕신종으로 일컫게 됐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후 여러 번 거처를 옮기게 됐다. ‘동경잡기’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년(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 달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慶州府尹이던 芮椿年이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됐는데, 징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종은 한일 합방 후에도 여러 번 옮겨졌고 경주읍성이 헐리면서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경주 부윤의 東軒을 수리하는 등 조선시대 관아를 수리해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됐다.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옮기게 됐다. 이때를 ‘고적도보해설집’에는 1916년이라 했으나 국립박물관 유물대장 등에 의하면 1915년 8월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시 1975년 4월에는 동부동 박물관에서 새 박물관으로 옮기기 위해 종각을 해체하고 1975년 5월 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


   한편 종에 얽힌 에밀레종 설화는 일반적으로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募緣과 달리 인신공양인 점에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해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듯 하다는 애절하면서도 다소 잔인한 설화내용은 한편으로 성덕대왕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주는 자료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종을 치는 궁극적 목적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기 위한 것이며, 범종이란 불교의 대승적 자비사상의 대표적 의식 법구다. 하물며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했다는 내용은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과 상반되는 신빙성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성덕대왕신종의 경우도 최근에 이뤄진 성분 분석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극소수의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돼 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것처럼 인은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종을 주조할 때 70%가 물인 인체 성분을 쇳물에 넣었다면 종은 완성되지 못하고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은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一乘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린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에밀레종으로 부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 범종은 비록 혜공왕대인 771년에 완성됐지만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최고 황금기를 구현했던 8세기 경덕왕대에 제작되기 시작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신라의 과학과 건축, 조각이 총망라된 최고의 완성품이 바로 석굴암과 불국사인 것처럼 당시에 있어 최고의 금속공예 기술의 역량을 동원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덕대왕신종이다. 크기도 웅장할 뿐 아니라 신비의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하는 한국 금속공예의 최고 걸작임에 분명하다.


/ 최응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 필자는 일본 구주대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국립춘천박물관의 초대관장을 역임했다. ‘금속공예’ 등의 저서가 있다.

※ 출처-교수신문 9.25
▒▒▒▒▒▒▒▒▒▒▒▒▒▒▒▒▒▒▒▒▒▒▒▒▒▒▒▒▒▒▒▒▒▒▒▒▒▒▒▒▒▒▒▒▒▒▒▒▒  


한국의 미 (19) 中·日 범종과의 비교
中, 밖으로 벌어진 형태…日, 두텁고 밋밋한 문양

   우리나라의 범종은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이나 일본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의장을 지닌다. 특히 여운이 긴 울림소리(共鳴)가 웅장하여 동양 삼국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종의 웅장한 소리와 긴 여운은 종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종복)이 불룩하다가 다시 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이는 종구 쪽 아래 부분이 안으로 말려있음으로 종소리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배려다. 또한 우리나라 종은 종각 등에 높게 걸리지 않고 지상에서 낮게 거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을 치게 되면 종 안에서 공명을 통한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 소리가 울리게 되는데 이 공명을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하게 종구 쪽의 안으로 오므라들도록 함으로써 이를 다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우리나라 범종은 종구 아래쪽에 전통적으로 그 지면을 움푹 파거나 이곳에 큰 독을 묻은 경우(움통)도 볼 수 있는데, 종구 쪽에서 빠져 나온 공명이 움통 안에서 메아리 현상을 이루어 그 여운이 길어지는 효과를 보게 된다.


   아울러 반드시 한마리의 용으로 구성된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형태의 ‘음통’(음관, 용통)이 솟아 있다. 이러한 음통은 대부분 그 내부가 비어있고 하부 쪽이 종신 내부에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 따라서 이 음통은 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음향조절장치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되고 있다. 즉 음관의 역할이 가격시의 격렬한 진동을 신속히 걸러내어, 충격을 신속히 제거하고 소리의 일부를 공중으로 보내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종은 크기에 관계없이 음통이 붙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 종에 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라는 문양띠를 두어 아름다운 장식문양을 새겼으며 상대에 붙여 네 방향으로 곽을 두었고, 이 안으로 9개씩 총 36개의 연꽃봉우리(蓮?)를 배치하는 게 특징이다. 중국 종은 이러한 연뢰가 없고, 일본 종은 있긴 하지만 우리 종처럼 수효가 일정치 않으면서 형태는 연꽃이 아닌 돌기형이다. 그리고 종신 여백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이나 공양상, 또는 불·보살상을 반드시 장식하는 것도 한국 범종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아울러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 별도로 마련된 당좌라는 원형 장식을 앞뒤 면 두 곳에 배치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종은 형태상 祖型鐘과 荷葉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중 조형종은 일본 종의 기원이 되는 형식으로서, 쌍룡의 용뉴와 더불어 직선화된 종신은 십자로 구획되지만, 일본 종의 경우 윗부분 구획에 종유가 장식된다. 조형종과 하엽종은 지역적인 특징이 있어 하엽종은 양자강 북쪽인 중국 북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서양의 벨(bell)처럼 밖으로 벌어진 종의 외형과 花形으로 여러 번 굴곡을 이룬 종구, 종신 중단을 가로지른 횡대와 그 주위를 袈裟무늬 형태의 結縛文으로 장식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일본 종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조형종을 모본으로 하고 있지만 쌍룡의 중간에 솟은 화염보주, 종신의 상·하대와 이를 연결한 십자형 띠의 교차부분에 표현된 당좌, 그리고 상부 곽에 많은 수가 장식되는 종유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일본의 종도 시대가 흐르면서 金剛杵 등의 여러 가지 문양에 첨가되기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종의 두께가 두텁고 장식 문양이 미미한 단순한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종의 유려한 형태와 의장은 주조기술면에서 밀납주조법을 사용했다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이와 달리, 일본 종은 밀납주조가 아닌 沙型주물법을 사용하며 중국 종 역시 사형주물법이면서 철제의 종이 많다는 점이 독특하다. / 최응천
※ 출처-교수신문 9.25













daljinsite.cafe24.com/?WS=33&BC=cv&CNO=341&DNO=5..  


로고








성덕대왕신종 과학성 소개



                                          


게시일: 2015. 9. 23.

국립대구과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덕대왕신종

        

개설 

   국보 제29호.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완성은 혜공왕 때인 771년에 이루어졌다. 이 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에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였다.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이 동종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다. 일명 봉덕사종·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거종(巨鐘)으로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부의 양식이 풍요 화려한 동종의 하나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한다.


내용

   이 동종을 완성하였을 당시는 통일신라의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극성기를 이루던 시기로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와 같은 우수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특히 이 동종의 명문은 종명(鐘銘)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문장면에서도 지극히 뛰어난 것이다. 지은 사람은 신라 혜공왕 때 한림랑급찬(翰林郎級飡)인 김필계(金弼溪)라고도 하고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하나 글자가 마멸되어 분명하지는 않다. 종명은 630자로 된 서문(序文)과 200자로 된 명(銘)으로 짜여 있다.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

서문은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첫째는 종소리야말로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신기(神器)임을 역설하였다. 둘째는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러한 공덕을 종에 담아서 그 공덕을 영원히 기릴 뿐만 아니라,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화롭고 민중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發願)을 담았다. 셋째는 그러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의 효성과 덕을 찬양하였다. 넷째는 그러한 사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인 혜공왕이 그 사업을 이어서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효성과 덕망의 소치라고 찬양하였다. 다섯째는 종이 완성되자 이에 대한 감격과 신비로움, 그리고 종의 효용성을 서술하고 종소리와 함께 온누리가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이어서 명이 덧붙여지는데, 이것도 서문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4자구(四字句)로 시적(詩的)인 맛을 살려 찬양과 발원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특징

   종신의 상하에는 견대(肩帶, 上帶)와 구연대(口緣帶, 下帶)를 둘렀고, 그 속에 주로 보상당초문을 주문양대(主文樣帶)로 장식하였으며, 특히 하대에 속하는 구연대는 종구(鐘口)가 팔능형(八稜形)을 이룬 특수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팔능형의 윤곽형이 되는 능(稜)마다 당좌(撞座)와 유사한 대형 연화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견대 밑으로는 4개소에 연주문 안에 견대에서와 같은 보상당초문양으로 조식된 유곽을 둘렀으며, 그 내부에 돋을새김 연화로 표현된 9개의 유두(乳頭)가 들어 있다. 이 유곽 밑으로 종신에 비천상(飛天像) 2구(軀)를 상대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서로 어긋나게 8판(瓣)의 연화당좌 2개를 배치하였다.


   오대산 상원사동종의 명문이 동종의 정상부인 천판 (天板)에 명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종신에 장문의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것은 신라동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전체적인 동종의 조각수법은 동양 어느 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종인 동시에 상원사동종과 더불어 최대의 조각양식을 구비한 동종이다. 종신에 2구씩 마주보는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상으로서 주위에 보상화(寶相花)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와 영락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비천상으로서 한국비천상의 대표가 되는 조각수법이다.

종정(鐘頂)의 용통(甬筒), 즉 음관에도 몇 개의 단(段)을 두어 단마다 앙련과 복련으로 된 화려한 연판(蓮瓣)이 장식되어 있고, 용뉴의 용두(龍頭)와 몸체도 박진감 있고 사실적인 조각수법으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동종의 명문 내용과 종의 형태가 고유섭(高裕燮)의 해석에 따르면 “팔화(八花)는 팔음(八音)을 상징하였으리라. 화엄의 유(乳)를 없애고 36화(花)를 안배함은 삼귀계(三歸戒)를 옹호하기 위한 36선신(善神)의 상징이리라(大音震動於天地間, 聰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貴之奧義, 懸神鐘悟一乘云圓音).”고 한 것은 이 신종의 법기(法器)로서의 존재이유일 것이라고 하였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체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한국종연구』(염영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신라의 공예』(고유섭,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통문관, 1966)
  • 「봉덕사종에 대한 별개의 고찰」(염영하,『범종』7, 1984)
  • 「봉덕사범종소고」(홍사준,『고고미술』19·20, 한국미술사학회, 1962)


출처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



                                             


게시일: 2017. 2. 3.

출처 : EBS 다큐프라임 - 하늘이 내린 소리 코리안 벨

성덕대왕신종 - 일명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1| 미술관련 모음글

마음거울 | 조회 20 |추천 0 | 2013.03.18. 07:21
  


성덕대왕신종 음통과 용뉴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탁본



 

   엄청나게 큰 소리는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 무게가 23~25톤, 높이가 3미터 75센티, 구연부(口緣部) 지름이 2미터 25센티, 두께가 11~25센티의 산과 같이 우뚝한 저 종에서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올 수 있을까. 영롱하고 맑다는 표현만으로는 그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그려낼 수가 없다.  낭랑하고 깨끗하면서 웅혼하며 거룩하다. 사람은 한평생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하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 이가 몇이나 될까.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 있는 이가 들으면 문득 법열의 경지에 이르러 득도할 것이며, 보통 사람이나 나무꾼이 들어도 누구나 희열의 경지에 이르러 그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다. 새벽잠에서 막 깨어나려 할 때 꽝 하고 울리는 희열의 종소리가 마음속으로 퍼져 들어왔을 때 그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순화된 마음은 아마 진정한 의(義)에의 희열이라고 밖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은 인왕동에 있으며 월성의 바로 동쪽 방면이다. 원래는 경주 시내 한복판인 동부동이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 터에 있었다. 1975년 7월 2일에 현재의 새 청사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였던 옛 자리는 5백년이 넘은 큰 은행나무가 뒤뜰에 있었고, 내동헌(內東軒)이라 불리는 관아 건물과 목조 한옥 몇 채가 있었으며, 그 한쪽에 종각이 있었고 정원에는 오래된 산수유나무와 흰 철쭉이며 아름드리 모과나무가 있었다. 구관 대지가 모두 1200여 평인데 그 속에 갖은 신라 유물이 아기자기하게 건물 속 고물 진열장에, 그리고 나무 밑에 놓여 있었다.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 에밀레종)은 그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한쪽 구석 종각에 달려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매일 새벽이면 종이 울렸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경주 시내에 차가 그리 많지 않았고, 새벽이면 더욱 조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었다. 겨울 종소리와 여름 종소리는 다르다. 겨울 종소리는 차고 맑으며, 여름 종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나는 여름 종소리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 대종을 구관에서 새 박물관 종각으로 옮겨 다는 큰 역사가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종이라 하나 요즘은 신식장비도 많고 기술도 상당하니 옮기고 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저 신성하고 위대한 종을 어떻게 하면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하여 새 박물관으로 모셔 가서 새 종각을 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그래도 경주의 남녀노소 모 시민이 한 마음이 되어 스님도 시장님도 경찰서장님도 우체국장님도 누구나 발벗고 나서서 몇 년 기획하고 몇 달 준비하여 무사히 종을 옮겼다.


   종을 옮기는 기술적인 일을 맡은 이는 대한통운 중기부 여러분이었다. 참 고맙고 어진 분들이었다. 어떠한 요구도 어떠한 주문도 모두 받아들여 종을 옮기는 데 터럭 끝만큼 한 소홀함이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종을 새 종각에 달려고 생각해보니까 콘크리트 건물이 저 위대한 종을 과연 잘 모실 수 있을까, 혹 시공이 잘못되어 보가 내려앉거나 꺾여 종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또 종고리가 잘못되어 휘거나 부러져 종이 떨어지지나 않을까하고 밤낮없이 걱정되었다.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특별히 청하여 28톤 무게의 강철 덩어리를 빌려다가 새로 지어놓은 종각에 달아놓았다.


   강철 덩어리 28톤을 달아놓고 흔들어 보고 올라가도 보고, 고리도 살펴보기를 수백 번 하였다. 시공자와 이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였다. 신식 기술과 자재로 만든 종각과 종고리에 절대로 이상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철 덩어리를 매단 지 이레부터인가 트집이 나기 시작하였다. 신관공사 관계자가 그렇게 장담하던 종고리가 휘고 벌어져서 그대로 매달아두면 며칠 못 가서 강철 덩어리가 떨어질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열흘 만에 강철 덩어리를 내렸다. 천만다행으로 종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종각에서 떼어내면서 그 분하고 원통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공사 관계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민족 모두에 대한 자책이었다. 우리 민족 모두의 정성을 담아 길이 보존하여야 할 이 종을 달아야 할 핵심인 고리가 어찌 이 지경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우리 세대를 사는 모든 사람에 대한 실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일그러진 고리를 붙들고 부르르 떨었다. 

 

   열댓 관쯤 되는 일그러진 고리를 상자에 담아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져다가 고리에 이상이 있다고 해도 반신반의하던 사람들 앞에 펼쳐놓았다. 일순 아무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한 얼굴을 추스르지 못했다. 누군가가 “이런 죽일 놈들……” “이놈들을 당장 잡아다가…” 하고 신음하듯 말했다. 

  공사담당 회사의 사장, 전무, 현장 감독, 공사 감독관들이 모두 불려와서 사색이 되었다. 펄펄 뛰면서 이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해도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그 길로 일그러진 고리를 가지고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재질을 실험하였더니, 시험한 연구원이 “이 쇠는 뚱쇠(찌꺼기 쇠로 만든 쇠)입니다”라고 하였다. 만일 포항제철에서 강철 덩어리를 쾌히 빌려주지 아니하였다면 또 대한통운 중기계장 이용일 씨, 작업반장 김창배 씨 외 여러분이 작업비 받을 생각도 않고 강철 덩어리를 실어다 매달아 주지 아니하였던들 성덕대왕신종은 땅에 떨어져 깨지는 비운을 맞았을 것이요, 우리 민족의 양심과 자존심은 허공으로 날아가야 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인 성덕대왕신종을 거는 작업이니까 공사담당 업자도 이것만은 의당 잘 했으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국립경주박물관 신축 시공업자는 유명한 토목건축 회사이니 아니 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시골 박물관 관장이 강철 덩어리를 빌려다가 달아맨다, 실험을 한다 하고 부산을 떠니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실험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당장 종고리를 제작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원자력연구소의 김유선 박사와 금속실장 황창규 선생 등 과학자와 박물관 관계관 몇분이 위원이 되어 고리를 어떻게 만들어야만 안전하겠는가에 대한 심의가 오래 두고 진행되었다. 황실장과 자주 만났다. 한달이 가도 결론이 나지 아니하였다.  황실장의 말 중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핵심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종의 무게가 25톤 가량이므로 종을 거는 고리는 50톤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찬 바람이 불면 종이 약간씩 흔들리기 때문에 정지상태보다 두 배의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종은 종머리 부분이 중국이나 일본, 아니 세계 어느 나라 종에도 없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종머리에 음관(音管)이 있고 용트림을 한 종고리가 달려 있다. 음관은 종머리 한쪽 옆에 있고 종고리가 음관을 싸 감으면서 종머리의 중심에 있다. 종을 걸어 지탱하는 것은 고리 모양으로 된 용트림의 등허리이다. 


   결국 휘어 구부러진 용의 등허리에 쇠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 쇠막대기 양쪽을 달아매야 하는 것이다. 이 쇠막대기의 직경이 최소한 15센티는 되어야 50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쇠막대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특별히 만든 것이 아니면 안 되며, 황실장이 지정하는 실력 있는 공장에서 황실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고리 부분인 용의 휘어진 등허리의 안쪽 직경이 9센티 미만이란 점이다. 15센티가 아니라 50센티나 되는 아주 든든한 철봉을 만들었다고 해도 종고리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이 벽에 부딪혔다. 세계의 모든 강철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도 직경 15센티 이하의 쇠막대기로는 50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갖은 방편이 다 나왔지만 신통한 결론이 나오지 아니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황 실장이 경주에 와서 “관장님, 그럼 전에는 이 종을 어떻게 달아놓았습니까”한다. “그 전에는 옛날 철봉에 매달았지요” 했더니, “바로 그겁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도 언뜻 생각이 떠올라 구관에서 종각을 해체하고 종을 매달았던 쇠고리를 모두 그대로 금고에 잘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황실장에게 바로 보여드렸다. 
 

   구관에서 종을 달고 있던 쇠막대기는 1915년 봉황대에서 동부동으로 그 종을 옮겨온 후 최소한 60년은 종을 무사히 달아맸던 것이다. 좀 길게 잡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면 몇 백년, 또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면 1200년을 버틴 철봉이다. 이 철봉을 살펴보니까 우그러지지도 않았고 터럭끝 만큼도 휘지 아니하였다. 황실장이 득의만만하여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이것이 안전하다는 것은 경험으로 증명됩니다. 지금의 금속공학으로 만드는 직경 15센티 이하의 쇠막대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결국 신종을 다는 철봉은 옛날 우리 선조님네가 만든 그 철봉을 이용하였다. 그 봉을 천장에 매다는 데 필요한 고리는 황 실장의 특별 배려로 달포에 걸쳐 서울에서 다시 만들어왔다. 그 전에 만든 고리는 전체 무게가 5관이었는데 새로 만들어 온 것은 1.5톤이나 되었다. 두께 3센티의 철판, 직경 10센티의 철봉, 직경 5센티의 특수 나사 등이었다.

 
   설계를 다시 하여 완전히 종각의 윗부분을 해체하고 거기 구멍을 뚫고 철판으로 싸감고, 거기서 윗고리를 가로지르고 다시 상하로 구멍 뚫린 두께 10센티의 철판을 드리웠으며 제일 밑의 작은 구멍에 직경 8센티의 옛날 쇠막대기를 가로질러 종을 달았다. 지금(1987) 인왕동 새 종각에 종을 건지 만 십년이 조금 넘었다. 

매일 새벽 종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다.     (계속)

 

/ 笑佛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



2013.03.18 | 카페 > Daum카페  cafe.daum.net/cool2181







[포항MBC뉴스][투데이-포항]에밀레 종 재현'신라 대종' 주조



                                             


게시일: 2016. 11. 21.


[투데이-포항]에밀레 종 재현'신라 대종' 주조





성덕대왕신종 2| 미술관련 모음글

마음거울 | 조회 15 |추천 0 | 2013.03.18. 07:23



성덕대왕신종 명문




성덕대왕신종 구연부 하대

 


   1963년 2월부터 그 해 말까지 당시 원자력연구소에서 고종건, 함인영 두 박사 팀이 삼국시대에서부터 통일신라(일부는 고려시대)까지의 우리나라 금동불상과 범종 등의 금속 유물을 중점적으로 조사한 일이 있었다. 이분들은 불상 등을 특수촬영(감마선 투과 촬영)하여 얻은 필름을 분석해서 주물을 만들기 위한 기본 소조(塑造)의 골조, 주물기술 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고고학상의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 했다.

  이 상세한 보고서는 『미술자료』(국립중앙박물관, 제 8․9호, 1963‧1964년)에 수록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주물을 하기 위한 기본 골조는 매우 우수하며,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日月冠)은 불신(佛身)의 주물벽이 매우 얇아서 이렇게 얇은 주물이 당시에 어떻게 가능했는지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또 용접 기술도 뛰어나고 주물에 기포(氣泡)가 없어 불신의 주물벽이 얇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분들은 그때 성덕대왕신종도 촬영하였는데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종은 크기 때문에 불상들과 달리 종신(鐘身) 벽이 두껍고 장중하여야 하며, 매달아서 소리가 잘 나야 한다. 촬영 결과는 이 종이 완벽한 종이라는 것이다. 주물의 완벽성 이외에도 주물을 하기 위하여 만든 내외의 거푸집이 완벽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보신각종을 다시 만들 때의 기록영화를 본 일이 있다. 특수 용광로를 여러 개 만들고 이 용광로를 이용해서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넣는 장면은 가히 숭엄한 장관이었다.


   우선 종의 기본은 소리가 잘 나야 하리라 생각된다. 소리가 잘 나기 위해서는 완성되고 난 다음에 주물에 기포가 없어야 될 것이다. 도자기도 치밀하게 완전히 자화(磁化)되어야만 소리가 곱고 외형도 아름답다. 속에 구멍이 숭숭 뚫리면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날 것이다. 기포를 없애기 위해서는 합금비율 등 여러 가지 배려 필요하고 쇳물을 여러 군데서 한꺼번에 일정하게 부어야 하며, 강한 압력을 주어서 공기를 모두 빼내 기포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종소리가 나지 않아 스님이 애기를 시주로 받아 넣었더니 종소리가 잘 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여러 번 실험하고 난 연후에 갖은 정성을 다 들였더니 비로소 맑은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일 것이고, 뼈 속에 있는 인 성분이 쇠를 녹이고 순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있어서 생겨난 전설일 것이다(1997년부터 종에 대한 본격적이 조사로 종의 성분  분석결과 인은 검출되지 않았다).


   25톤의 쇳물이 부어져 내리면 그 압력은 대단할 것이다. 그 압력에다가 기포를 없애기 위한 압력을 가하면 더욱 압력이 상승할 것이니 이를 견뎌낼 거푸집이 필요했을 것이며, 또 압력을 넣어 기포가 빠져 나오게 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였을 것이다(1998년 봄에 종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한 결과 19톤이었다).
옛날 언제 생긴 것인지 모르나 이 종의 한 면에 갈려나간 자리가 길게 파여 있다. 이 종신을 갈아 마시면 수태를 한다든가 하는 어떤 효험이 있다는 속설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갈려서 파인 자리가 마치 유리알 같이 매끄럽다. 미세한 기포도 거의 발견되지 아니한다. 지금 종을 그대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렇게 완벽한 주물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라고 당시 조사자들은 말하였다.


   종을 거는 핵심인 철봉을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철봉이 길어 잘라냈는데 황 실장은 그 단면을 보더니 이것은 여러 가지 합금해서 넓고 기다란 판을 만들고 그 판을 단조(鍛造)로 때리면서 말아서 철봉을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철봉이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고 유연하기만 하면 휘기 때문에 강하고 유연한 것을 합금과 단조로 절묘하게 조절하였기 때문에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종은 때려야 소리가 난다. 그리고 종소리는 아름다워야 한다. 종은 때려서 깨지지 않아야 할 것이며 때려서 우그러들어도 아니될 것이다. 소리 또한 너무 강해도 아니되고 너무 부드러워도 아니될 것이다. 종은 단조가  아닌 주물이기 때문에 끈끈하고 강한 맛이 조화를 이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 종을 어루만지면서 손바닥으로 때려 보면 이 종은 강하면서 마치 찰떡과 같이 찰지고 끈기가 있다고 늘 생각하였다.


   얼마 전 보신각종을 새로 만들 때 이 성덕대왕신종을 재현하는 데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에 그보다 더 훌륭한 종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재현’이었다. 음향학을 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종(특히 내부)의 형태, 종에 장식한 여러 가지 문양, 특히 한국종에 붙어 있는 음관 등이 음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의 위치에 따라 또한 음향이 크게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덕대왕신종이 산과 같이 우뚝하면서 유연하고 아름다운 특유의 곡선을 지녔던 것은 소리를 아름답게 내위한 내면의 형태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또한 아직까지 그 기능에 대해서 밝혀지지 아니한 음관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데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종의 어깨 윗부분 가장자리의 연판문(蓮瓣文), 종 옆 위쪽의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 어깨띠(肩帶)와 연판문의 납작한 구유(九乳, 종의 위쪽에 있는 9개의 젖꼭지모양의 돌기물), 능(稜) 모양의 구연부와 역시 선이 굵은 보상당초문으로 된 구대(口帶, 구연부의 띠), 4개의 유곽 밑에 있는 4구(軀) 비천상, 종머리 부분의 용뉴, 음관‧축(軸)과 같은 방향으로 유곽 사이의 밑에 있는 2개의 연판문 당좌, 이 반대 방향으로 유곽 사이의 밑에 있는 2개의 연판문 당좌, 이 반대 방향으로 있는 명문(銘文)들이 종합적으로 종소리의 울림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문양들은 불교적 의미를 지니면서 표면을 장식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종의 울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적당히 도드라지고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크기로 시문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당시의 과학과 예술의 혼연한 합일이고 조화였을 것이다. 당시의 과학자가 종의 기본 형태 음관의 위치, 크기, 울림에 필요한 외부 장식의 위치, 장식의 높이 등을 제시하면, 그것이 썩 잘 어울리면서 아름답도록 예술가가 표면설계를 하는데 아마 많은 절충과 토의를 하였을 것이다. 창조란 그만큼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모든 부위가 기능이 있고 불교적 뜻이 있으면서 혼연히 하나가 되어 아름답다.


   산사에 가서 종 치는 연유를 스님께 물으니, 지옥의 중생이 종소리를 듣고 모두 깨어나 극락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 청정하고 맑은 소리가 지옥에 떨어진 중생의 죄도 사하여 주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박물관에 달려있는 신종을 쳐보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함일 것이다. 에밀레종 소리를, 그 아름다운 희열을 모두에게 들려주어 청정한 마음을 잠시라도 지니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나라의 보물을 함부로 칠 수도 없고 또 수시로 치면 손상할 위험도 있다.


   신관으로 이사 와서 종을 무사히 달아놓고 쳐보았다. 이 소리를 그대로 녹음해서 듣고 싶은 이에게 언제든지 들려줄 수 있도록 할 작정이었다. 6월 중순쯤 한밤 고요할 때 종을 치고 그 소리를 녹음하기로 하였다. 

경주박물관이 산업도로변이라 대형 트럭이 질주하지 않는 틈을 타서 종을 친다. 여운이 끝없이 계속되어 그 여운이 끝나기 전에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또 다시 하고 하였다. 그러다가 요행히 여운이 끝날 때까지 차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문득 개골개골 맹꽁맹꽁 소리가 은근하면서 요란하다.


   자동차 소음에만 신경을 쓰고 논에 그득히 모여 밤새 노래를 불러대는 개구리, 맹꽁이의 합창은 미처 생각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전직원의 협조를 얻어 근처 논에 한 사람씩 작은 돌멩이를 들고 섰다가 꽝 하고 종을 쳐 종소리의 여운이 끝날 때까지 개구리, 맹꽁이의 합창을 잠시 멈추도록 하였다. 밤새워 천신만고 끝 개구리, 맹꽁이 소리가 끼어들지 아니한 맑은 소리를 수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언젠가 불국사의 월산(月山) 스님을 맞아 개구리, 맹꽁이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하니까, 스 말씀이 “아! 종소리에 개구리, 맹꽁이 소리가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더 자연스럽죠” 한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든 옛 스님네도 이런 마음으로 저 종을 만들었을 것이니, 저토록 의젓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종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개구리 소리를 빼려고 기를 쓴 오늘의 안목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끝)

/ 笑佛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

cafe.daum.net/cool2181/QzW4/77  워거즐 튼무아







문화와 인물 3회 다뉴세문경 재현, 이완규 주성장님


                                               


게시일: 2016. 9. 28.


이완규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 47호 주성장
장인아트 대표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국미총리상 수상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③ 성덕대왕신종 (上)

세속의 번뇌망상 잊게 해주는 천상의 소리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7.02.22 11:29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긴 여운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

    예로부터 에밀레종 별칭 ‘유명’

    성덕대왕 왕생극락 ‘염원’ 담아

    지금도 타종 가능한 신라 범종

    8세기 통일신라 불교 조각 반영


    ①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진수를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의 범종은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마치 맥박이 뛰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러한 범종의 긴 

    공명을 우리는 맥놀이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구라도 이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해 주는 오묘한 천상의 

    소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지니는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처럼 소리와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

    (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보다 약 

    반세기 뒤인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손상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해 온 아직까지 타종이 가능한 신라 종이기도 하다. 



       원래의 종이 있던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성덕왕의 

    원찰(願刹)이었다.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인 효성왕(孝成王)에 의해 738년에 완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절에 달고자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慧恭王代)인 대력(大曆) 6년(771)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러운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있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 2에는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년(1460)에 영묘사(靈廟寺)로 종을 옮겨 

    달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 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

    이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아 군인을 징발할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경주 부윤의 동헌(東軒)을 수리하면서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되었고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에 있었던 성덕대왕 신종도 옮겨 가게 되었다. 

    <고적도보해설집(古蹟圖報解說集)>에는 이 때를 1916년이라 하였으나 국립박물관의 유물대장에 의하면 1915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1915년 8월에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오랜 기간 구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75년 5월

    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성덕대왕신종 용뉴.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신종의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몸체의 상부 용뉴(龍)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음통(音筒)이 부착되어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르고 있다. 앞, 뒤의 발을 서로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의 얼굴은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역동감이 넘친다. 


       머리 위로는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뿔이 솟아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용의 목 뒤에 붙은 굵은 음통에는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누었는데, 각 단에는 연판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붙은 앙복련의 연판을 동일하게 부조하였다. 그리고 음통의 하단과 용뉴의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형식의 연꽃 문양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 부분에

    까지 섬세하게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은 이 종이 세부까지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을 볼 수 있으며 여러 군데에 쇳물을 주입하였던 주입구의 흔적도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의 몸체 중앙부를 돌아가며 희미하게 주물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덕대왕 신종이 용뉴 부분의 천판까지를 한틀, 

    그리고 워낙 종이 크다보니 하나의 틀로 몸체 전체를 제작하기 어려워 몸체를 반으로 나누어 접합한 뒤 주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범종은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섬세한 용뉴 조각과 문양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사형주물법이 아니 

    밀랍주조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거대한 종을 만들면서 동원된 밀납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어서 이 종이 

    당시로서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란 것을 잘 말해준다. 


       종의 몸체 상대(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연주문이 장식되었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에 붙은 연곽대(蓮廓帶)에도 역시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蓮)는 상원사종(725)과 같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대부분의 신라 종이 돌출된 

    모습의 연뢰를 지닌 점과 달리 이러한 납작한 모습으로 장식된 종은 이후 8세기 후반의 일본 운주우지(雲樹寺) 종이나 일본 

    죠구진자(尙宮神社) 소장 연지사(蓮池寺) 종(833)에도 계승을 이루며 나타난다. 성덕대왕 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천상 대신 공양자상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③성덕대왕신종 음통.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은(座) 자세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서 향로의 

    손잡이를 받쳐 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겨져 있고 배 앞으로 

    군의(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되었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는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이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 모습의 

    몸체로 구성된 모습이다. 


       최근 마모된 공양자상과 병향로의 모습을 복원해 본 결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석굴이나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향로와 향합(香盒)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들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되어 근래 제작된 신라대종에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성덕대왕 신종의 공양자상은 비록 얼굴 모습이 많이 마모되어 세부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세련된 자세와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천의,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범종 부조상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불교신문3276호/2016년2월25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불교신문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④ 성덕대왕신종 (下)| ◈********㉿자유♡공간

    가을하늘 | 조회 41 |추천 0 | 2017.03.11. 15:31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④ 성덕대왕신종 (下)

    지옥서 고통받는 중생 제도하겠다는 자비심 상징


    신라 사회의 정치와 사회 

    교리 아는 중요한 금석문

    어린아이 인신공양 설화

    종교폄훼 의도 가진 낭설



    ①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과 종각.


       성덕대왕신종의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 명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로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으로 4구의 공양자상을 배치하고 있는 점도 이 종의 중심이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종구 부분을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양식적 특징이다. 


       이에 따라 그 위에 장식되는 하대 부분도 8릉의 굴곡을 이루게 되고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겼으며 그 사이를 유려한 모습의 굴곡진 연화 당초문으로 연결시켜 한층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당좌는 그 주위를 원형 테두리 없이 8엽으로 구성된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타종으로 인해 문양이 많이 마모되었다. 




    성덕대왕신종 명문과 공양좌상 배치.


       종신 앞, 뒷면의 가장 중심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서(序)’와 ‘명(銘)’을 배치하였는데 1000여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당시 신라 사회의 정치 상황. 불교 교리 및 사회 제반 사항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기도 하다. 


    서문의 내용은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단락은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는 내용으로서 종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불교의 내용을 들어 역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음(圓音)이란 바로 부처의 설법을 원음(圓音), 일음(一音), 다음(多音) 등으로 구별해서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는 일승(一乘)을 설하실 때의 설법음을 바로 원음(圓音)이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이 내용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회통(會通)하는 부처의 설법을 신종의 소리를 통해 깨닫게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점에서 자못 의미 깊다. 

    둘째 단락은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러한 공덕을 종에 담아서 그 공덕을 영원히 기릴 뿐만 아니라,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안하고 민중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을 담았다. 


       셋째 단락은 그러한 국가적인 큰 주조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성덕왕 아들인 경덕왕의 효성과 덕을 찬양한 부분이다. 넷째 단락은 결국 종의 주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인 혜공왕이 이 사업을 이어서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효성과 덕망의 소치라고 찬양한 부분이다. 


    다   섯째 단락은 종이 완성되자 이에 대한 감격과 신비로움, 그리고 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서술하여 ‘모양을 보는 자는 모두 신기하다 칭찬하고 소리를 듣는 이는 복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마지막 단락이야말로 극락세계는 물론이고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신종을 치고자 한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대쪽의 명은 서문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4자구(四字句)로 시적(詩的)인 맛을 살려 찬양과 발원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당시에 이 글을 지은 사람은 한림랑(翰林朗) 급찬이었던 김필오(金弼奧)이며 종 제작에 참여한 많은 인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대나마(大奈麻) 박종익(朴從鎰)과 차박사(次博士) 박빈나, 박한미, 박부악(朴賓奈, 朴韓味, 朴負岳) 등이다. 여기에 기록된 고위 관직의 인물들은 당시에 이 종이 국가적인 대역사로 이루어진 점을 잘 말해준다. 여기에 당시로서도 엄청난 양에 해당되는 구리 12만근이 소요된 점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톤에 달했다. 





       한편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일반적인 모연(募緣) 설화와 달리 인신공양(人身供養)의 내용인 점에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다소 애절하기까지 한 설화의 내면에는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범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는 자비심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하였다는 내용 자체가 조성 목적에 전혀 맞지 않아 더욱 의구심이 든다. 더욱이 성덕대왕 신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지만,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종이 깨져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이 종의 이름을 명문 첫머리에 두어 일반적인 종과 달리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점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전혀 근거도 없고 왜곡된 별칭인 에밀레종으로 부르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범종은 비록 혜공왕대인 771년에 완성되었지만 통일신라 불교미술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구현하였던 8세기 경덕왕대(景德王代, 742 ˜765)에 제작되기 시작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던 당대 최고의 과학, 건축, 조각술이 주조기술과 합쳐져 총체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성덕대왕 신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975년 인왕동 박물관으로 종을 옮겨 달 때 옛 철고리를 다시 바꿔 달려고 당시 가장 유명한 포항제철에 의뢰해 고리를 특별히 주문 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을 직접 달기 전 실험을 해본 결과 고리의 직경이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원래의 고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금속 주조 기술을 지니고 있었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높이 3.66m, 구경이 2.27m에 이르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이면서 신비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함께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품이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종임에 분명하다. 



     여음(餘音)


       성덕대왕 신종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근거도 없는 제야의 종이란 명목으로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타종되었다. 함께 치기 시작한 보신각종은 결국 균열이 생겨 새로운 복제 종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성덕대왕 신종 역시 제아무리 통일신라의 완벽한 주조기술로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수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종을 중단한 것인데, 아직도 성덕대왕 신종의 타종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다. 다행히 2016년 11월 경주시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완벽히 재현한 신라 대종을 주조하여 타종하기 시작하였다. 천만 다행한 일로서 이 종을 주조한 성종사 및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불교신문3280호/2017년3월11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cafe.daum.net/SAHOI33/i9bf/531   러브향기정원







    전설의 소리, 성덕대왕신종


                                             


    게시일: 2016. 7. 12.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

    1300여년, 세상을 울리는 성덕대왕 신종.

    성덕대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으로

    2톤가량의 구리와 34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유명한데 크고 웅장한 소리는 놀라울 정도다.

    이 소리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 있는 걸까?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분석한 결과 약 50여가지의 주파수가 포착됐다.
    50여 가지의 소리가 합쳐져 그만큼 웅장하고 기묘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성덕대왕신종에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위한 과학적인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성덕대왕신종이의 소리 과학! 그 놀랍고 아름다운 비밀을 공개한다.






    에밀레종 전설의 진실 (성덕대왕 신종)| * 오온이(空)함 *

    眞明(金成培) | 조회 473 |추천 0 | 2015.10.27. 16:32


     

     

     

     

    에밀레종<br>전설의 진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종이 있다. 웅장하고도 해맑은 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오묘한 천상의 소리이다. 이처럼 소리와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애절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 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이다. 다시 말해 호적등본상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면 주민등록상으로는 봉덕사종이 맞지만 별칭에 해당되는 에밀레종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종에 얽힌 전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이나마 성덕대왕 신종이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가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강원도 상원사(上院寺) 종(725년) 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맑고 웅장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지녀 일찍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 종이 걸려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의 남쪽인 남천리에 있던 절로서 효성왕(孝成王) 대인 738년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이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혜공왕(慧恭王) 대인 771년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런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됨에 따라 이후에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世祖) 5년(1460년)에 영묘사(靈廟寺)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다시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영묘사 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되었는데, 징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5년 8월에 다시 봉황대 아래에서 관아가 있던 동부동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 그 사진은 마침 조선고적도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관아 자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동부동 옛 박물관에 오랜 기간 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1975년 5월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 이전모습

       종의 형태는 위, 아래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한 항아리형의 몸체에 상, 하대라는 문양띠를 두고 방형의 연곽(蓮廓)과 당좌, 주악상을 배치하였다. 몸체 위쪽으로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목 뒤로 굵은 음통이 솟아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성덕대왕 신종은 다른 통일신라 종과 구별되는 몇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자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의 명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종의 중심은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종구를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과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긴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이다. 종신 앞, 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서(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자(四句)씩 짝을 맞춘 [명(銘)]을 배치하였다. 특히 서의 첫머리에 있는 구절은 성덕대왕 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성덕대왕 신종 공양자상(위)<br>성덕대왕 신종 음통 관통구멍(아래)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一乘之圓音)]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김필오(金弼奧)이며 종의 제작자로는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박종일(朴從鎰)과 박빈나(朴賓奈), 박한미(朴韓味), 박부악(朴負岳) 등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ton에 달했다.
       한편 이 종에 얽힌 에밀레종 설화는 일반적으로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모연의 설화와 달리 인신공양에 관계된 전설인 점에서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애절하면서도 다소 잔인한 설화의 내용은 다른 한편으로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말해 준다. 발원으로부터 제작까지 3대에 걸쳐 30여년이나 소요된 시간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불가에서 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종소리를 통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고자 하는 대승적(大乘的) 자비 사상을 담고 있다. 하물며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 하였다는 내용은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과 상반되는 그야말로 신빙성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다행히 성덕대왕 신종의 과학적인 성분 분석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다는 것은 주조의 과정상 처음부터 종을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 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조성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이 종의 이름이 일반적인 종과 달리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확인되지도 않은 에밀레종이란 별명으로 부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사진

    [문화재대관 국보 금속공예](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2008.12)
    성덕대왕 신종 p.225, 226, 227, 228, 229, 230 사진 참조

    글,사진 = 최응천 /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글 사진 = 최응천 /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동국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구주대학에서 ‘한국 범음구(梵音具)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하여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을 거쳐 2002년 초대 국립춘천박물관장과 전시팀장, 아시아부장, 미술부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와 동 대학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2009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불교미술대전』,『갑사와 동학사』,『금속공예』 등의 저서와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의 종합적 고찰」, 「미륵사지 출토 금동 수각향로의 조형과 편년」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cafe.daum.net/kkgsrbng/DtJ1/122   금강정사바라밀카페




    에밀레∼에밀레∼ 영원을 깨우는 그윽한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

    blog.donga.com/yil2078/archives/13895   저널로그





    [신문과 놀자!/이광표 기자의 문화재 이야기]‘에밀레∼’ 영혼을 깨우는 그윽한 종소리

    이광표기자 입력 2015-08-26 03:00수정 2016-05-04 21:37

    성덕대왕신종의 매력과 비밀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통일신라·771년 제작)이 있습니다. 높이 3.75m, 아래쪽의 입구 지름 2.27m, 무게 18.9t으로, 우리나라 전통종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답습니다. 처음엔 경주 봉덕사에 설치했지만 몇 차례의 이전을 거쳐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지요.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종은 그윽한 종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신비롭게 자리 잡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종을 치지 않습니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녹음된 종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빼어난 조형미, 신비로운 종소리에 힘입어 한국 전통종의 백미로 꼽히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771년).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한국 전통종의 백미 

       불교에서는 종소리를 부처의 진리의 소리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의 혼탁한 영혼을 깨우는 소리,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부처의 설법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옥의 중생도 사찰의 종소리를 들으면 모두 깨어나 극락으로 간다”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한국 전통종의 전형(典型)이자 백미(白眉)로 평가받습니다. 전체적으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합니다. 몸체 중앙에 장식한 비천상(飛天像·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이 특히 매력적이지요.

       성덕대왕신종의 또 다른 매력은 깊고 그윽하며 여운이 오래가는 종소리입니다. 그럼, 성덕대왕신종 종소리의 신비로움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그 비밀을 밝혀내고자 도전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비밀의 핵심은 맥놀이 현상의 극대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맥놀이는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 맥놀이가 길게 이어질수록 종소리는 여운이 오래 남고 그윽해집니다. 

        성덕대왕신종은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불심의 표현입니다. 또한 성덕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신라의 평화와 번영, 신라인들의 안녕을 갈망하는 마음도 담겨 있지요. 무릎을 꿇고 향로를 든 채 공양하고 있는 비천상은 바로 성덕왕의 명복을 빌고 있는 겁니다.

    성덕대왕신종 몸체에 장식된 비천상.


    ○종을 치지 않는 까닭  

        안타깝게도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를 지금은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2004년부터 타종을 중단했기 때문이지요. 타종을 할 경우, 종에 충격을 주어 자칫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제작된 지 13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다 보니 종은 점점 약해져가고 있습니다. 강원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725년 제작) 역시 오랜 타종으로 인해 균열이 생겨 타종을 중단한 상태랍니다.

        그런데 타종 중단 문제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뜨거운 논란이 있었습니다. 1992년 국립경주박물관은 종의 안전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타종을 중단했습니다. 그러자 “종은 쳐야 종이다. 종을 치는 것이 외려 더 안전하다”라는 의견과 “종을 계속 치면 종이 훼손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어요. 경주박물관은 종의 안전 상태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종합안전진단을 실시했고 그 결과 타종이 불가능할 정도의 결함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주박물관은 2001년부터 타종을 재개했어요. 그러나 또다시 종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자 경주박물관은 2004년 타종을 완전히 중단했습니다.

    명동성당에 걸려 있던 서양식 종(1966년). 우리 전통종과 외형 특성이 많이 다르다.

    ○정말로 아이를 넣었을까  

        성덕대왕신종에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불심이 깊은 한 여인이 아기를 공양함으로써 무사히 종이 만들어졌고 그 후 종을 칠 때면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아기 목소리(에미일레라, 에미일레라)가 들린다는 전설이지요. 그래서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어린 아기가 들어간 걸까요? 1990년대 말 국립경주박물관은 성덕대왕신종의 성분을 분석했습니다. 종의 12군데에서 극소량의 샘플을 채취한 뒤 1000만분의 1% 이상 들어있는 성분을 분석했습니다. 만일 종을 만드는 데 아이를 넣었다면 사람의 성분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사람 뼈 성분의 하나인 인(燐)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인 성분이 모두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사람을 넣었다는 얘기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에밀레 전설의 의미는 매우 각별합니다. 신라인의 불심과 감동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종과 서양 종의 차이  

        여기서 한 번, 우리 전통종과 서양 종의 차이를 알아볼까요. 우리 종은 몸통 선이 부드럽게 내려오다 아랫부분이 약간 안쪽으로 오므라든 모양입니다. 나무막대(당목·撞木)로 종의 바깥쪽을 쳐서 소리를 내지요. 땅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걸어 놓기 때문에 종소리는 아래쪽으로 쫙 깔리면서 굵직하고 은은합니다. 청동으로 만들어 대부분 푸른색이랍니다.

        서양 종은 컵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위쪽이 좁고 아래쪽이 벌어져 있어요. 종 속의 쇠막대기 구슬을 이용해 종의 안쪽을 두드려 종을 칩니다. 높은 곳에 매달아 놓기 때문에 종소리는 높고 가는 편입니다. 우리 종과 서양 종, 그 모양과 타종 방법 등이 서로 대비된다는 점이 꽤 흥미롭습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50826/73250344/1#csidx2c3d3f450829ff29321416985213c57 


    donga.com






    에밀레종이 대체 뭔가요?

    모바일 익명 | 2016.09.22 18:38 | 조회 331


    에밀레종, 즉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입니다.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국보
    종목국보 제29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1구
    시대통일신라
    소유국유


    - 설화에 따라 에밀레종으로 부르거나 봉덕사에 걸려 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 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였다.(위키백과 사전 참조)


    프로필 사진
    HouseSoul

    | 2016.09.22 |                

                         


  • 답변

    이미지 내용성덕대왕신종 - 나무위키namu.wiki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2/BellofKingSeongdeok.jpg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https://pbs.twimg.com/profile_images/714566766807089152/Gn371bnO.jpg

    공식명칭

    한글

    성덕대왕신종

    한자

    聖德大王神鍾

    영어

    Bell of King Seongdeok

    분류번호

    국보 29호

    소재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시설

    1구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771년


    1. 개요2. 에밀레종 전설
    2.1. 내용2.2. 진실
    3. 특징
    3.1. 종 고리는 로스트 테크놀로지다?
    4.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5. 기타


    1. 개요[편집]

    이 종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선덕대왕신종이 아니다!
       신라 때 만들어진 크고 아름다운 종(악기).
    국보 29호로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신라 범종 중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 전까지는 신라대에 만들어진 현 한국 최대의 종. 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으나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은 2008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종공원의 세계평화의 종(10,000관 (37.5톤) 높이 4.67m 지름 2.76m)이다.[1]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    신라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버지 성덕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그래서 성덕'대'왕) 경덕왕이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죽었고 그 아들,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가 끝난다(즉, 그때까지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것은 성덕대왕신종 표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2. 에밀레종 전설[편집]

    2.1. 내용[편집]

      봉덕사에 달아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고 '에밀레' 하고 울린다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에밀레종에 대한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 때 종을 만들기 위한 돈을 시주받았는데, 시주하러 다니던 스님이 들른 어떤 한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건 갓난아기뿐이네요'라고 아기라도 시주받아가겠냐는 투로 말했고 가난한 집을 본 스님은 시주를 못하겠구나-싶어 그 집을 떠나 스님은 다른곳들에서 열심히 시주를 받아 종을 만드는 데에 바쳤다.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2]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결국 아이를 강제로 데려왔고,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밀레('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한다.


  •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로 들린다고 한다. (최상수, <경주의 고적전설>에서 발췌)


  • 2.2. 진실[편집]

       이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놀랍게도 2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아동문학가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이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다. 이후 친일문학가 함세덕에 의해 공출과 징병에 빗대 이를 정당화 하는 희곡 <어밀레 종>으로 둔갑한다. 그렇기에 에밀레종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에밀레종이라는 이름도 이 때 처음 생긴 것이라는 설이 있다.


  •    여기서 종을 주조할 당시 아이를 넣었다는 인신공양 설화는 일제에 의해 이용되기 전부터 간장과 막야부터 시작하여 중국에서 이미 있었다. 아이를 넣었다는 설화 자체는 구전이라 하여도 일본이 인위로 만든 얘기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설화가 보신각종에서 성덕대왕신종으로 넘어간 것일 뿐이란 주장도 나온다. 선교사 알렌과 헐버트 등은 1900년을 전후해 에밀레가 보신각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


  •    1927년 성덕대왕신종에 대해서도 유아공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글이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 밝혀지면서 에밀레종이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또한 조선 중기 평양 연광정 옆의 평양 종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다는 것을 해당 기사에서 전하고 있다#. 고로 더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    종이 운다는 이야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전량 때 세워진 중국 감숙성 무위(武威)시 대운사(大雲寺)에 있는 종이 대표적. 여기는 "낭아娘呀, 낭娘"(여자 혹은 어머니)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 이라고 운다고 한다(황인덕의 연구). 당나라~오대십국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추정되므로 이런 이야기가 번역되어 같은 시기 한반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 전설이 혜공왕대의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왕으로 세우고 국정을 농단하던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혜공왕대의 실권자이자 혜공왕의 외사촌이기도 한 김양상을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것.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유형의 전설에서던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죽은 경덕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완성된게 혜공왕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리있는 해석이긴 하지만 앞서 보듯 이 설화 자체가 논란이 있어서(...) 


  •    그러니 당연히 진짜로 아이가 들어간 게 아니다. 성분 분석에 따르면 인간을 넣었을 경우 당연히 있어야 할 성분(뼈의 칼슘이라든가, 인이라든가)이 없는 걸로 봐서 그냥 전설일 뿐이라고. 애초에 주조 과정에서 종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속한 공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신종을 만들 때는 소형 도가니들로부터 동시에 주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아이를 넣으려면 아이를 균등하게 갈아(…) 도가니별로 넣어줘야 하는데 잔혹성은 둘째치고서라도 제대로 된 종이 나올 리가 없다. 다만 당시 애를 갈아넣었다고 할 만큼 고혈을 짜서 만들었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    또한 그런게 사실이라면 왜 기록이 없을까? 물론 기록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 쳐도 삼국사기에도 없다는건 진실이 아니라면 없다는게 이상하다. 저자가 김부식 이기에, 게다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를 믿는 신라에서 종을 만든다고 아이를 잡아와 집어넣는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리고 정말 종을 만든는데 아이가 필요하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종은 다 아이가 집어넣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3. 특징[편집]

    현 소재지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


       신라의 사찰인 봉덕사에 있었다가, 봉덕사가 폐찰되자 1460년 영묘사(靈妙寺)에 옮겨서 걸었다. 이후 1507년에 경주성 남문 밖에 걸어서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    성덕대왕신종의 아래에는 땅을 파놓은 울림통이 있는데, 종 위의 음관과 함께 한국 종의 고유한 특징이다. 울림통은 종이 울릴 때 나오는 간섭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설치된 울림통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종의 진동수와 약 3Hz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크기를 키워야 된다는 이야긴데, 연구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울릴 일이 없다 보니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종 위의 음관은 찢는 듯한 고주파음을 재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    현재 성덕대왕신종은 종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있다.[3]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하였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과 2003년 개천절(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이후로는 보존에 문제를 일으키는 금속 스트레스 누적을 억제하기 위해 이를 금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종을 살짝이나마 쳐보는 일이 빈번해 당목도 떼서 바닥에 둔 상태다. 주기적으로 쳐 주는 것과 안 치는 것 어느 쪽이 보존에 유리한지는 전문가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의 보존기술은 반쯤 망가진 종을 완전복원해 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정도라는 사실은 알아두자. 아침저녁으로 종치면서도 천년이 넘도록 멀쩡했건만 나름대로 보존을 한답시고 최첨단 기술로 개발된 보존액을 발랐다가 되레 부식해서 이젠 치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녹슬지도 않은 쇠에 보존액을 굳이 바를 리가 없으므로 이건 그냥 진짜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 대한 악담이나 억측이다. 


  •    예전처럼 소리가 잘 안 난다는 지적에 대해, 음향 전문가 중 한 사람은 종이 아니라 종을 타격하는 당목이 너무 오래 되어서(!) 종을 제대로 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 표면의 명문(銘文)이나 그림 등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 코너에 가자, 탁본이 전시돼 있다.


  • 3.1. 종 고리는 로스트 테크놀로지다?[편집]

       종을 메달고 있는 고리는 오파츠 수준의 강도를 자랑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신관으로 옮겨 달면서 새로 종고리를 만들었는데, 종고리의 강도를 실험해보기 위해 강괴를 달아놓고 변화를 관찰해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종의 하중보다 더 가벼운 강괴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든 종고리가 늘어져버렸다고 하며, 이에 신품 제작을 시도했지만 종고리를 넣는 구멍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여기에 들어갈 만한 고리로는 종의 무게를 지탱할 강도를 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직경 15cm면 버텨낼 수 있는데 구멍의 직경이 9cm가 안 되었기 때문에, 와이어로 칭칭 감아버리면 무게가 분산되는 효과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그래서는 종을 달아둔게 아니게 되므로 포기했다고 하며, 결국에는 본래 쓰던 고리를 찾아서 다시 끼워넣었다는 것이 해당 서적의 진술이다. 이에 대한 가설으로는, 합금으로 만든 철판을 조금씩 말아 두드려가면서 쇠막대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고도 한다.


  •    여담으로는, 모 TV 프로그램에서 시험해 본답시고 원래 고리를 떼고 최첨단 합금으로 만든 고리로 실제 바꿔달자 하루도 채 안 돼서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도로 갈아끼워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 
    그러나 이 고리 오파츠설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데, 일단 산업현장에서 사용하는 50톤의 중량을 버티는 샤클의 지름이 2인치(5.08cm)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의 반박글도 참고하면 좋다. 사실 고리 오파츠설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만 실려 있는 내용이라서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    현재 교차검증으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리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책에 실린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려서 만들어진 도시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고리만 해도 위의 링크에 실린 것 처럼 얇은 합금을 대장장이(...)가 말아서 만들 필요 조차 없이 그냥 적당한 철을 가져다가 쓰면 별로 의문의 여지없이 충분히 해결 가능한데다가, 그냥 사진만 확인해봐도 고리보다 더 공학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그 고리를 끼우는 틀 자체가 근대에 복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시대에 육각볼트에 너트를 썼다면 그게 바로 오파츠!!

    4.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편집]

       동북아시아의 대종들은 대개 맑고 높은 소리보다는 진중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 기술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이다. 앞서 말한 음통(음관)과 울림통도 그렇지만(...) 


  •    에밀레종도 대단한 물건이지만, 역사상으로 보면 신라 최대의 종은 아니다. 신라 최대의 종은 경덕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의 종으로, 그 규모가 성덕대왕신종의 무려 4배에 달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때 몽골군의 침략으로 황룡사가 파괴될 때 없어졌지만, 
    간발의 차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은 아니다. 46년 빨리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725년 주조, 1.7m)이 가장 오래된 종이다. 46년이 간발의 차는 아닌 것 같지만 이 종은 성덕왕 때 만들었고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이 죽은 뒤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5. 기타[편집]

       그런데, 이 에밀레종에 신묘한 힘이 있어 이 종의 가루를 달여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근거없는 미신 때문에 가끔 이걸 긁어가는 미친 사람들이 있다고. 남아선호사상의 폐해라지만 문화재 훼손이고 엄연한 범죄다. 괜히 이런 거 먹고 위장장애를 일으켜서 병원에 실려온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하지 말자
    여담이지만 비공식 트위터도 있다. 에밀레 꼭 한 번 들어가보자.이 트위터는 암묵의 룰에 따라.... 이걸 계속 보다보면 정신장애를 일으켜서 병원에 실려갈 것 같다


  •    특유의 인신공양 전설이 주는 충격 때문인지, 국내에선 왠지 모르게 사람을 인신공양급으로 부려먹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공밀레와 번밀레, 인밀레가 있으며, 또 다른 파생어들로는 애니 작화가 매번 극강이면 작화진을 갈았다면서 작밀레 같은 단어도 있다.


  •    전통무용가인 이애주 씨가 이 종소리에 맞춘 춤을 만든 적이 있다. 춤 이름은 후천개벽무(後天開闢舞)로 본래는 1986년 개천절에 초연할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같은 해 10월 9일 한글날에 공연을 하였다고. 장선우 감독이 영상 촬영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꼬이는 바람해 미처 촬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애주 씨는 성덕대왕신종 타종 행사 때 종에 대한 의미를 담은 춤을 추는 공연을 열었다.


  • http://www.privatelosangelestours.com/wp-content/uploads/2012/12/Korean-Friendship-Bell.jpg



  •    캘리포니아의 샌 페드로San pedro에는 이 종을 본따 만든 korean friendship bell이 있다.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와 종각의 모습이 어우러져, 근처에서 이 종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도 잠깐 나온다.

    • 관련 항목 : 공밀레, 번밀레


       애니메이션 괴담 레스토랑에서는 이것을 모티브로하여  "우는 범종"이 나온다. 

    [1] 이전 까지는 한국 범종제작 기술이 실전 되어 새로운 전통 대종이 나기 힘들었지만 현대에는 기술이 복원 되어 새로운 종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 진천군 덕산면 성종사에서 제작 되고 있다.[2] 이 부분은 여러 바리에이션이 있다. 처음부터 아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점궤가 나왔다든가, 어미가 아이 운운하며 시주를 거절함으로써 스님을 모욕했기에 부정타서 종 완성이 안 되는 거였다던가...[3] 매시 정각, 20분, 40분에 들을 수 있다.[4] 영상 정보가 있는 위키러는 확인 바람.

  •   ㅡ 다음 Tip 답변자료







    [스크랩] 에밀레종 비천상| ▒ 불교 문화유산

    범각 | 조회 64 |추천 0 | 2012.09.17. 21:10


    불교문화미술 조각 


    에밀레종 비천상


    [에밀레종 비천상]

    에밀레종 비천상 탁본을 차실에 밑에 가리개 처럼 표구해서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선물 받았습니다.

    정말 맘에 드네요



     자비의 꽃

     


    관련

       

    cafe.daum.net/6534800/YxM2/48   ●화계산 송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