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⑤일본 윤쥬지(雲樹寺) 소장 통일신라종

2017. 5. 3. 23:03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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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⑤일본 윤쥬지(雲樹寺) 소장 통일신라종
    일본 소재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종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7.03.27 13:13

      천상의 소리 자태 지닌 

      ‘주악천인상’ 일품 꼽혀 

      뱃길로 건너간 것 짐작 

      8세기말 9세기 초 제작 


         통일신라 종은 국내에 3점의 완형 (상원사종, 성덕대왕 신종, 청주 운천동 출토 종)과 2점의 파종(선림원지종, 실상사 파종)이 남아있지만 일본에는 국내보다 많은 4점의 통일신라 종이 확인된다. 특히 지금은 소실되어 사라졌지만 통일신라 745년에 만들어진 ‘천보4년명 종’은 상원사종과 비견되는 아름다운 작품이었으며 856년에 제작된 범종이 나가사키(長崎)에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오키나와(沖繩)에 있던 현덕3년명(顯德三年銘, 956년) 종은 대동아 전쟁으로 불타 버리고 현재 용뉴(龍鈕)만 남아있어 더욱 아쉬움을 준다. 일본에 건너가 있는 4점의 범종 가운데 죠구진자종(常宮神社鐘, 833년)과 우사진구종(宇佐神宮鐘, 904년)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9~10세기 통일신라 범종의 편년자료로 한국 범종 연구에 귀중한 공백을 메워 주고 있다.


         큐슈(九州) 지방은 우리나라와 지역적으로 가까운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가장 많은 수인 총 11점의 한국 범종이 산재되어 있다. 큐슈 다음으로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지역이 많으며 토쿄(東京) 쪽인 칸토우(關東)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그 수효가 줄어드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 범종의 경우 주로 북부 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의 범종도 대부분 해안에서 가까운 지역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시에 중형종이나 소종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종을 가져갈 때 이동이 간편한 종을 대상으로 삼아 해상 운반이 용이한 해안가 일대의 사찰, 신사 등에 옮겨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남아있는 53점의 한국 종 가운데 한 점이 일본 국보(國寶)로, 20점이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은 비록 아쉽지만 우리 종의 가치에 자부심마저 든다.

      일본 소재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이 이번 호에 소개할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야스기시(安來市) 소재의 윤쥬지종(雲樹寺鐘)이다. 시마네현 북부 해안가인 윤쥬지(雲樹寺) 경내의 개산당(開山堂) 안에 보관되어 있는 통일신라의 종이지만 제작 당시부터 명문은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에 건너온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추각명(追刻銘)이 남아 있어 어떻게 본다면 이 종이 일본에 건너온 아픈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우선 용뉴(龍鈕)는 목 부분이 파손된 것을 현재 철끈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앞, 뒤로 뻗어 천판을 누르고 있는 좌우의 발은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上院寺鐘, 725년)과 동일한 모습이지만 용두는 그다지 역동감 있게 표현되지 않았다. 용뉴 뒤에 붙어있는 굵은 음통에는 크게 상, 중, 하단의 세부분으로 구획된 문양대를 두었는데, 상, 하단에는 중앙부에 화문(花文)이 첨가된 앙· 복련의 연판문을, 그리고 중단에는 천의를 옆으로 날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의 공양자상(供養者像)을 낮게 부조하였다. 이런 독특한 모습을 지닌 음통의 문양은 이 종이 거의 유일하다.


         종신(鐘身)에 비해 폭이 넓은 상, 하대에는 그 외연 부분을 화문이 첨가된 연주문대(連珠文帶)로 두르고 그 내부에 향로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게 배치한 2구씩의 공양자상을 새겨놓았다. 이러한 문양은 음통 중단에 표현된 공양자상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지만 사이사이의 여백 면에 화문과 운문을 첨가시켜 보다 화려하게 꾸몄다. 반면에 하대는 상대보다 폭이 조금 넓고 내부의 중심문양을 삼중(三重)으로 구획한 반원형의 장식문양으로 반복 시문한 점이 다르다. 이처럼 상, 하대 문양을 서로 다르게 시문한 통일신라 종으로는 지금은 소실된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 804년)에서도 보이지만 이 종은 그와 반대로 하대 쪽에 공양자상을 배치한 점이 서로 다르다.

      이 반원형 삼중원 내에는 각각 화문, 당초문, 여의두문을 가득 차게 장식하였고 주 문양 사이마다 보상화문을 채워 화려한 모습으로 꾸몄다. 상대 아래에 붙어있는 네 개의 방형 연곽대(蓮廓帶)에도 하대와 동일한 문양이 표현되었으며, 내부의 연뢰(蓮蕾)는 성덕대왕 신종처럼 돌출되지 않고 납작한 6엽의 화문좌형(花文座形)으로 표현되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여백 면에는 구름 위에 무릎 꿇은 채 천의를 날리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2구 1조(二軀一條)의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앞, 뒷면 동일하게 부조되어 있다. 왼쪽 상은 두 손을 모아 입으로 횡적(橫笛)을 불고 있으며 다른 한 상은 오른손을 머리 위에 들어 배 앞에 놓인 요고(腰鼓)를 치는 모습이 유려하게 표현된 천의와 함께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었다.


         정면관을 하고 구름 위에 앉아 무릎을 곧추 세운 전체적인 모습은 상원사종의 주악상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얼굴의 세부 윤곽이 보다 강조되었고 가느다란 천의의 날림은 복잡하면서도 어딘지 힘이 빠진 듯 느슨해졌다. 당좌 역시 다소 간소화되어 넓은 자방(子房) 안에는 연밥(蓮子)이 표현되지 않았고 그 바깥에는 화형 장식이 첨가된 8엽의 연판문을 둥근 테두리(圓圈) 없이 시문하였다.

      한편 당좌와 주악천인상 사이의 한쪽 여백면을 택해 ‘사입, 운주서탑산천장운수흥성선사, 응안칠년갑인 시월, 일일, 원주종순(舍入, 雲州瑞塔山天長雲樹興聖禪寺, 應安七年甲寅 十月, 一日, 願主宗順)’이라는 4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응안(應安)7년은 일본 년호로서 1374년에 해당된다. 윤쥬지에 전해 오는 <고종기(古鐘記)>에 의하면 종순(宗順)이란 거사가 꿈에 계시를 받아 운수사의 북방 바다 한가운데서 인양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보존이 양호한 현재의 상태로 미루어 바다에서 꺼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기록은 1374년에 가까운 어느 시기쯤 뱃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을 시사해 주는 내용이라 짐작된다. 주악천인상이 2구 1조의 형식이면서 횡적과 요고를 연주하고 있는 종으로 가장 먼저 제작된 종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천보4년명종(天寶四年, 745년)종이다. 이 종은 원래 나가사키현(長崎縣) 코쿠부후하치망구(國府八幡宮)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신불분리(神佛分離) 때 안타깝게 녹아 없어졌다.


         이처럼 요고와 횡적을 연주하는 모습의 주악상은 804년에 제작된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까지 계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악천인상의 유려한 의습과 천의, 볼륨감 넘친 신체의 표현 등에서 운수사종이 그 보다 이른 시기의 제작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단순화된 당좌의 표현과 왜소한 용뉴의 모습에서 상원사종, 성덕대왕신종 보다는 뒤늦은 시기로 판단되어 그 제작 시기는 대체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경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본다면 천보4년명 종이 사라져 버린 현재 이 윤쥬지종은 일본에 현존하는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총고가 75.3cm에 불과하여 통일신라 종 가운데서 그리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음통과 상하대에 표현된 다채로운 장식성과 상원사종에 비견될 만한 주악천인상의 우아한 자태는 일본 소재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종이라고 평가될 만하다. 현재 일본 중요문화재이다. 


       여음(餘音)

         이 종을 조사한지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당시 개산당 바닥에 두 개의 긴 목제 받침 위에 종을 올려놓은 어설픈 전시 모습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또 원래는 종을 보기 위해 별도의 관람료를 끊고 들어가야 했지만 한국 종을 한국 학자가 조사하는데 왜 표를 끊어야 되냐고 강력히 항의하자 그냥 입장을 시켜줬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사진 촬영을 흔쾌히 허락해 줬던 윤쥬지 스님들의 배려에 고마움을 표한다.


      [불교신문3285호/2017년3월29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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