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2. 12:19ㆍ도자 이야기
천하대명물 이도다완 파편 남해에서 나왔다 | |||||||||||||||||||||||||
이도다완 가마터 남해 거론되지만 알려지지 않아 대아고 설립자 박종한 선생 정포리서 청이도 파편 글 기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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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 가마터의 추정지로 남해가 자주 거론되지만 남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수 년 전 일본 공영방송 NHK가 이도다완 가마터를 찾기 위해 6개월 간 학계 언론계 도예계를 총망라해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와 관련한 모든 사료와 자료를 찾고 진주를 비롯한 영남 전 지역을 현지 답사했다. 가마터는 나오지 않았고 ‘진주 인근 일 것으로 추정한다’는 결론만 도출했다. 이도다완 가마터가 진주 인근이란 것은 1938년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학자들의 논문과 진주와 남해, 진해, 산청, 사천 곤명지역 등에서 파편이 발견되면서 정설로 굳어졌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진주목이었던 곳으로 한국 지질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해-하동 진교-사천 곤명-진주시 서부-산청 쪽으로 이어지는 자기의 원료인 고령토가 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남해가 포함된 이 지역은 공교롭게 이도다완 추정 가마터가 산재한 지역이다. 가장 구체적으로 남해를 이도다완 생산지로 말한 이는 독립지사이자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설립한 아인 박종한 선생이다. 박종한 선생은 일본의 이도다완을 본뒤 평생을 이도다완 재현과 가마터 조사, 차 문화 보급에 힘쓴 학자이자 이 분야 최고의 원로이다. 남해가 아인 선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기고에서 남해를 거론했다는 점이고 설천면에 하천다숙을 만들어 차문화 보급에 지금도 공로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선생은 2003년 <월간 차의 세계 7월호> 기고에서 ‘남해 서면 정포리’를 ‘청이도(아오이도)’ 파편이 나오는 지역이라고 밝혔다.
기고 내용은 ‘파편 출토지역을 보면, 대이도와 소이도는 진해 웅천 두동리, 청이도는 하동 진교 백련리와 남해 정포리, 소바이도는 고성군 구만면, 이도다기는 산청 청계, 가다데 이도는 진양 수곡면’이란 내용이다. 이도다완은 일반적으로 ‘기자에몬이도(대이도. 제일 위쪽 사진)’를 떠올리지만 형태나 빛깔 유약형태 등을 따져 고이도 (소이도) 아오이도(청이도) 이도와끼(협이도) 등 수십종으로 세세하게 분류돼 감상된다. 아인선생이 밝힌 남해 출토 파편 청이도는 황토빛깔이 나는 도자기에 푸른색 기운이 도는 사발을 말한다. 이 청이도는 이도다완이 일본에서 유명해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찻사발이기도 하다. 16세기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는 정적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를 회유하기 위해 조선에서 온 못생긴 사발 하나를 선물하고 가츠이에 군대를 복속시켜 버린다. 다양한 정치적 상황이 있었겠지만 이 사발은 하나의 거대한 복속의 상징이자 오다 노부나가를 지략가란 평판을 만든 구체적 상징이 되면서 일약 일본 열도를 뒤흔든다. 오다 노부나가의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사발을 이용하게 되면서 전국적 명성에 이어 수백년의 역사를 가지는 찻사발이 돼 버린다. 히데요시는 전쟁 공로자나 다이묘(영주)에게 이 조선 사발을 하사하고 다른 다이묘가 공격을 해 오면 이 사발을 보이는 것으로 동맹국임을 확인하곤 했다. 상징이자 징표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장 같은 구실까지 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이용된 이 도자기가 일본 전국시대에 이용됐지만 첫 역사에 등장한 도자기는 푸른빛이 도는 이도다완, 즉 남해에서 파편이 발견됐다는 청이도(아오이도)이다. 청이도 가마터로 서면 정포리를 지명한 박종한 선생은 이 지역을 답사한 다음 기고를 쓴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박종한 선생은 왜 정포리를 주목했을까. 이도다완((井戶茶碗)의 한자 표기인 ‘井戶(정호)’ 즉 ‘이도다완은 우물(샘)이 있었던 곳에서 만들어졌다’는 명칭 유래설에 따라 우물이 있었던 곳을 중점적으로 찾아다녔던 것은 상식적이었을 것이다. 또 임란 당시 사천 선진리(船津里) 왜성을 쌓은 왜장 모리 가쓰노부(毛利勝信)는 ‘(사천)선진리성 40리에 지점에 있는데, 새미골(井戶谷 또는 우물골)이라는 곳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에 따라 전 진주문화원 고 리명길 원장은 선진리 16km지점을 탐사했고 기고를 남기기도 했다. 사천 선진리와 선소(船所)의 앞 글자가 같은 한자음이라는데 일단 주목하지만 정포리는 선진리에서 30km 정도 떨어졌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임란 당시의 ‘거리 추측이 잘 못되지 않았을까’를 의심하면서 남해와의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는 있겠다. 이도다완 명칭과 이런 기록을 근거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와 국교 수립 전에도 일본인들은 어떻게든 국내로 들어와 가마터를 찾기 위해 남해를 비롯한 진주인근을 샅샅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뒤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굴꾼들의 가마터 찾기도 본격화된 시절이었다. 이후 우물이 있고 가마터가 있는 곳은 너도 나도 ‘이도다완 가마터’라고 말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가마터나 파편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도 관련 사기꾼이 억지 주장을 해대며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이 현실이다. 서면 정포리는 순우리말로 ‘우물개’라고 부르다가 200여년 전에 한자표기가 바뀌었다. 아인 선생은 이 ‘우물개 마을 불무골’ 자기요지의 분청사기 파편을 확인했고 ‘남해는 청이도 파편이 난다’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겨 ‘우물(샘)’이란 지명에 가마터가 나오면 모조리 이도다완 가마터라고 말해지던 지역과 구체성에서 차별화 시켰다. 남해의 이도다완과의 연관성은 이순신과 1597년 남해읍 선소왜성을 쌓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왜장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간접 연관성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는 마당에 이도다완에 매료됐던 히데요시, 그의 가신 야스하루가 이도다완을 몰랐을 리 없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5만명의 조선군을 1600명으로 기습해 처참히 패퇴시킨 그는 이순신에게는 대패의 쓴맛을 본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라는 글을 남긴 그다. 적장 이순신과 술이 아닌 차를 마시고자 한 마음, 남해 선소에서 그가 이순신과 이도다완을 놓고 차 마심을 생각했다면 지나친 상상일지도 모르겠다. 1300년 전의 남해의 차문화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이규보의 차시에서 말하는 ‘화계(花溪) 지명이 남해 화계일 가능성 높은 점’ ‘화계 지명이 남해가 맞다면 시에서 나온대로 남해의 차는 고려시대에 왕에게 진상된 고급차였다는 점’, ‘자생 차밭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 등 차와 차문화에 대해 역사적으로 또는 스토리텔링적으로 접근해 보고 남해군내에 고급차 문화에 대해 전략적 접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기사는 사천 곤명면 곤명요 김영태 선생의 도움을 받았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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