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설악산 遊山記

2013. 5. 14. 17:29산 이야기

 

 

 

 

정범조의 설악 유산기

 

  2백 33년전 1778년(정조2년) 가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ㅡ1801)가 양양 군수로 부임하여 가다가 북쪽으로 보이는 우뚝하고 장대한 설악산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는 (56세) 때인 다음해 1779년 3월 17일부터 22일까지 6일간 가까운 벗들과 사위. 아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유람을 떠났다.

 

   그가 남긴 설악기(雪嶽記)에 의하면 설악산의 면면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둘러본후 너무 고생한 나머지 주위를 돌아볼 기력조차 쇠진 하였지만 눈에 또렸하게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것은 모두 산" 임을 알았다고 했으며. 또한 3백여년 전 홍태유(洪泰猷 1672ㅡ1715)가 저술한 유설악기(遊雪嶽記)를 보면 지금까지 많은 산을 보아왔지만 금강산만이 설악산과 우위를 다툴수 있고 다른 산은 견줄 바가 못된다. 이 산이야말로 산중의 은자(隱者: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살고있는사람) 라고 예찬했다

 

 

 

 

 

 

 

 

 

조선시대 설악산 기행문 고찰


                                                                                                                                                 장 정 룡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
Ⅰ. 머리말

산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준다. 그리고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다. 이렇게 산은 사람과 말없이 친근한 벗이 되고 때로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나는 어려서 설악산 아랫마을에 살았다. 그곳에서 내 키를 훌쩍 넘는 눈다운 눈을 맞아보았고, 한겨울에 마을로 내려온 산양도 보았고, 설화(雪花)의 경관에 흠뻑 빠져본 적도 있었다. 산악인은 물론 한국인 가장 좋아하는 산이 설악산이라고 평하니 설악산아랫마을에 살았던 나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할 것이다.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은 1708m에 달하여 남한에서 한라산∙지리산 다음 가는 높은 산이며, 연중 5~6개월간 눈이 쌓여 있다. 전체면적 354.6㎢의 경관적 특징인 웅장하고 다채로운 모습은 대규모의 화강암의 관입(貫入)과 이에 수반되는 암질, 구조상의 차에 의한 차별침식(差別侵蝕)의 결과다.

설악경관의 백미는 무엇보다 가을 단풍과 겨울 백설이다. 1966년부터 산악등반대회로 시작된 가을철 설악문화제는 신라 때부터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려 행했던 국가급 봉정산제(封定山祭)의 소사(小祀)제의를 계승한 것이다.(주1)

지난 1996년부터 시작된 겨울철 설악눈꽃축제가 2008년에 폐지되었으나 명산 설악의 전통을 계승한 겨울산 눈꽃과 얼음축제로 되살려 특화함이 마땅하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겨울 설악에 눈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도 설악산은 천연보호구역으로 그 명칭 자체로 오랜 역사와 전통적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설화인 눈꽃, 얼음산 빙벽, 겨울산행등반, 얼음조각대회, 울산바위 이야기 등으로 충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이야기 줄거리를 지닌다.


설악의 겨울눈꽃축제가 대관령이나 태백산 눈축제, 화천산천어축제와 함께 대표성을 지닌 겨울축제로 환생한다면 봄설악은 산채와 들꽃, 여름설악은 시원한 계곡물, 가을설악은 만산홍엽의 단풍, 겨울설악은 백설과 솜다리꽃을 주제로 한 사계절축제화가 가능하다.

사실상 춘하추동의 설악은 천변만화(千變萬化)와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속초는 청정바다, 영감이 깃든 호수, 화이트 설악산이라는‘초이스-속초(CHOICE-SOKCHO)’의 선택받은 무한하고 강력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으며 OSMU(one source multi use)를 통한 활용 가능성도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적설기 설악산 훈련등반대 10명이 죽음의 계곡에서 조난당했던 당시에 나는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촌 설악동에 살았다.

많은 취재진과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 집에 묵으면서 잠깐이지만 큰 귀가 인상적이었던 노산 이은상, 국어학자 심악 이숭녕 선생, 부친과 함께 설악개발기에 앞장섰던 이달영, 이대성, 의사 이기섭 박사, 사진가 최구현 작가도 만나보았다.(주2) 훗날 우연한 기회에 노산 선생의〈설악행각〉을 읽으면서 주마등처럼 지나간 유년기 설악시절이 되살아났다.(주3)

노산처럼 좋은 유산록을 쓰지는 못했지만, 어른들과 함께 대청봉을 수시로 넘었고, 계조암과 양폭산장도 자주 갔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설악에 대한 관심은 관광안내자로 입담 좋은 유만석이라는 탁월한 이야기꾼을 만나서 설악산 전설을 수집했다.(주4) 그리고 전달재라는 채삼인을 만나 설악산 심메마니 풍습을 살펴보았고,(주5) 울산바위 전설도 새로운 시각으로 천착해보았다.(주6)

이번 기회에 조선시대 설악산기행문을 집필하니 권금성을 바라보고 쌍천물에 멱을 감던 지난 세월, 그 감회가 새롭다. 그간 설악산 시문에 대한 단편적인글이 나왔으나 전반적인 연구는 금강산 등에 비하면 희소하다. 따라서 국립공원 설악산에 대한 자연생태적 연구 뿐 아니라 구전설화, 시(한시), 소설, 수필, 사진, 그림, 가요 등 문예미학적 관점에서 설악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와 체계적인 자료수집이 필요하다.(주7)

1965년 11월 5일자로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된 설악산은 1970년 국립공원이 되었고, 1982년 8월 12일 유네스코 세계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금강산에 비해 규모나 명성이 그리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반도 분단이라는 현재의 상황에서 본다면 통일이 되기 전까지 설악과 금강은 가깝고도 먼 운명에 처해 있다 할 것이다. 설악은 설악대로, 금강은 금강대로 각각 나름의 아름다움과 풍치를 갖고 있기에 굳이 설악과 금강을 작의적으로 비교하거나 상하를 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주8)

설악을‘옷은 입은 금강’이라 하거나, 설악산 가는 길에 개골산 중을 만나 풍악이 어떠하냐고 물었다는 시조도 결국은 금강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주9) 근래 들어 설악과 금강을 연계관광하자는 견해가 나오지만 사실상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악은 설악이다. 송강이 놀라서 내뱉었다는 퍼닝(punning:언어유희)처럼 설악은 설악(서락)이지 벼락이 아니다.(주10) 설악기행문이 금강산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수를 보인다고 해서 설악이 금강의 미에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973년부터 설악에 입산하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성동규 사진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설악산은 돌들과 계곡과 수목의 조화로운 합창교향곡이다. 그것은 대자연과의 조화이며 질서이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은 특히 그 다양한 변화 속에 있다. 막히는가 하면 터지고, 오밀조밀한가 하면 장대하고, 감겼다 풀어지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철따라 변화하는 오묘한 색채와 형상들의 조화는 신공(神工)이라 불러 마땅하리라”고 극찬했다.(주11)

설악의 진경산수를 보여준 문봉선 교수는“만경대를 그리려고 며칠간 양폭에서 머물기도 했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도 여러 번 했다. 그런 가운데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광경이나 생각이 내 그림을 바꾸어 놓았다. 아침에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해질녘에 보이는 모습이 달랐다. 짙은 먹으로만 그려보기도 했고 붓 대신 나뭇가지를 꺾어 골격만 그려보기도 했으며 운무를 쫓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그려보기도 했다”고 서술했다.(주12)

이처럼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사계의 설악산은 다양한 관점과 시각, 다양한 예술장르에서 논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고에서 설악을 탐승하고 그 감상을 기록한 조선시대 기행수필을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수필(隨筆)은 이른바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한가한 마음에서 처마에 떨어지는 낙수물로 먹을 갈고 편지를 잇대어 수의수필(隨意隨筆)로 여유롭게 쓴 글이다.(주13)

고전수필의 형식에 기(記) 록(錄) 문(聞) 화(話) 담(談) 필(筆) 등 여러 가지가 있는 것도 상황에 맞는 글을 쓰는 무형식의 형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기행문은 감동을 주는 수필문학의 한 장르로서 뿐 아니라 파한(破閑)을 넘어 지리와 풍속, 전설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한 연구 자료다. 또한 낮은 곳에서 높은 이상을, 지류에서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탐승의 경지는 산악기행만이 갖는 높고 깊은 가치다.

설악기행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조선시대 문인 삼연 김창흡과 내재 홍태유가 맺은 인연이 묘하다.

첫 번째 인연은 같은 해인 1705년에 설악산을 다녀와서 쓴 최초의 설악기행문이란 점이다. 김창흡은 52세, 홍태유는 33세에 설악산을 다녀온 것이나, 하나의 대상을 놓고 다른 문체인 일기체와 감상문으로 쓴 두 선비의 다른 시각이 여실히 나타난다.

두 번째 인연은 설악산에 은둔했던 김창흡이 나이는 아래지만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홍태유의 시문들을 산정(刪定)했다는 점이다. 삼연은 홍태유의 세 아들이 권유하여 내재의 시와 설악산에 대한 글들을 보고, 높은 문학성을 칭찬하였다.

이처럼 김창흡과 홍태유는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고, 설악산이라는 자연이 맺어준 인연이 특별하다. 내외설악을 죽망망혜(竹杖芒鞋)의 모습으로 교감하며 돌아다닌 뛰어난 와유록(臥遊錄)은 이정소, 이복원, 정범조, 김금원의 글이 더 있다.

본고에서는 설악을 찾았던 선비들이 1700년대에 작성한 기행문 가운데 유산(遊山)과정과 경관미 서술을 탐색하고, 작가의 서사적 상상력을 분석하고자 한다.

 

  (  ***   삼연 김창흡 선생은  세도가인 안동김씨 김상현(金相賢>의 후손이고, 아버지와 형제들이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전국을 유랑하다가 설악 구곡담 계곡가에 벽운정사(불이나서 후에 영시암)을 짓고 은거하다 몇해후 다시 유랑길을 떠난다. 삼연 선생은 서예가 여초 김응현(如初 金應顯)의 11대 선조로 당시의 안동김문은 장동김이라고 하여 한국의 <메디치가>의 역활을 하였으며, 여기에서 조선 후기의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가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최근에 一中 김충현,김응현 형제가 영시암을 복원하여 새로 짓다.현 주지는 도봉산 쌍룡사,남산 한옥마을 부근의 충정사 주지인 도윤(道允 :72세)스님이 겸하여 맡고 있다.여초 선생님은 서울 중앙고에서 고문을 가르치셨던 白牙 金彰顯 선생님의 형이다.)

 

 

Ⅱ. 설악산의 유래와 팔기팔경

 


설악을 명악(名岳)이요 영악(靈岳)이며(주14) 또한 선경(仙境)이요 화경(畵境)이다.(주15) 예로부터 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삼형제라고 불러왔으며 금강과 설악이 골격은 닮았지만 심산정경(深山情景)의 맛은 삼형제 가운데 설악이 으뜸이라 평가하였다. 금강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한데, 설악산은 수려한데다 웅장하다고도 평한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설악을 칭송하기를“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그윽한 골속에 있으되 고운 양자(樣姿)는 물속의 고기를 놀래고, 맑은 소리는 하늘의 구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뜻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취미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금강보담도 설악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케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주16)

 

  설악산은 인제, 양양의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위에 생긴 일대승지입니다. 전일에는 인제 쪽은 한계산이라 하고 양양 쪽은 설악산이라 하여 일산(一山)에 이명(二名)이 있었지마는 본대 이유있는 일 아님에 마땅히 유래가 먼 설악이란 한 이름으로 통일할 것이겠지요.

  설악산은 또한 커다란 石山덩어리로서 그의 경치는 대개 금강산에 비방하다고 하면 얼른 짐작이 될 것입니다.

  산세가 웅대하고 기봉이 무더기무더기 높이 빼어나고 골이 깊고 숲이 짙고 큰 소와 급한 여울과 맑은 시내와 긴 폭포가 여기저기 변화있게 배치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홀연 기이함에 놀라고 홀연 시원함을 부르짖게 하는 점이 대체로 금강산과 같습니다. 탄탄히 짜인 상은 금강산이 승(勝)하다고 하겠지마는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산이 도리어 승하다고도 하겠지요.

 

  금강산은 너무나 현로(顯露)하여서 마치 노방(路傍)에서 술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이 있음에 비하여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그윽한 골속에 있으되 고은 양자는 물속의 고기를놀래고 맑은 소리는 하늘의 구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뜻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취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금강보담도 설악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케 할 것입니다.

  근래에 교통이 편리해짐과 함께 금강산의 속악화(俗惡化)가 점점 줄달음질을 할수록 우리의 설악산에 대한 그리움은 그대로 깊어감이 또한 사실입니다.

  옛날에도 참으로 산수의 사이에 몸을 맡기려 하던 이는 김매월당, 김삼연 네와 같이 그윽한 집을 다 이 산중에 얽고 지낸 것이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누가 나으냐 못하냐 하는 문제는 얼른 대답하기 어렵고 또 아무래도 금강산이 나으리라 함이 보통이겠지마는 설악산에는 분명히 금강산에서 볼 수 없는 경치가 많이 있습니다.

 

  첫째 산의 입구인 갈역(葛驛:박성원의 한설록에는 加歷이라 하였다)으로부터 시작하여 물을 거슬러서 올라가는 70리 길이의 긴 계곡에 바위벼랑과 돌바닥이 깊은 골로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을 데리고 굽이굽이 갖은 재주를 부려서 토막토막 소도 만들고 폭포도 드리우는 일대(一大) 필름은 금강산은 고사하고 조선의 어느 명산에고 다시없는 장관일 것입니다.

  하나하나를 다로 떼어서는 청룡담, 황룡담, 제폭, 황장폭 무엇무엇 하지마는 온통 합하여서는 곡백담(曲百潭)이라고 부릅니다. 해주의 석담, 청주보은의 하양동, 안의의 서상동, 북상동 등을 다 한데 연접해도 그 길이나 그 기이함이나 다 설악의 곡백담을 따르지 못할줄 나는 생각합니다.

 

  수렴동(水簾洞)이란 것이 금강산, 설악산에 다 있지마는 금강의 수렴은 오두막살이집 쪽들창에 천발 쯤 된다 하면 설악의 수렴은 경회루 넓은 일면을 뒤덮어 가린 큰 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칠폭, 십이폭 등 무더기 폭포가 여기저기 많음도 한 특색이거니와 산성골짜구니로 솟아 떨어지는 대승폭포는 두 동강을 합하면 길이가 수백 척이어서 반도 안에서는 가장 긴 폭포가 됩니다. 이밖에 옥련(玉蓮)을 느려 세운 듯한 봉정과 석순을 둘러친 듯한 오세와 같이 봉만(峯巒)과 동학(洞壑)의 유달리 기이한 것도 이루 손을 꼽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설악의 경치를 낫낫이 세어보면 그 기장(奇壯)함이 결코 금강의 아래 들 것이 아니건마는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리기는 금강산의 몇백천분지의 일도 되지 못함은 아는 이로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큰 실상을 가지고 세상에 소문나지 아니한 것이 설악산 하나만은 아니겠지요.

혹자는 설악을 은자(隱者)의 산이라 했다.(주17) 그만큼 금강에 비해 덜 알려졌다는 뜻도 되지만 설악은 유일하게 금강과 그 아름다움을 다툴 수 있으며, 그 명성은 생육신이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과 5천여수의 시를 남긴 삼연 김창흡에 의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주18)

노산도“창파를 잡아다려 발밑에 깔고, 내로라 빼어 오른 설악산청봉, 매월이 놀던 데가 어디메던고, 뎅그렁 오세암에 풍경이 운다”고 매월당에 대해서 언급했다.(주19)


설악산은 강원도 인제군, 양양군, 고성군 일부와 속초시까지 포괄하는데 설악산맥 북쪽의 주능선을 경계로 양양방면 즉 동쪽을 외설악, 서쪽인 인제방면을 내설악이라 부르며 한계령 남쪽 장수대 주변을 내설악이라고도 부른다.

설악의 주봉인 대청봉은 해발 1,708m이며 연중 5개월 동안 눈이 쌓여 있으며, 봄의 진달래, 초여름의 후박꽃과 아련한 신록,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으로 등산객 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승지다.(주20)

설악은 신라 때 처음 소사(小祀)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칭으로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華山) 등으로 불렀는데 그 어원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한가위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 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주21)

둘째는 암석의 색깔이 눈 같이 하얗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고(주22)

셋째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의‘ 뫼’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주23)

조선중기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첫째와 둘째 유래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데“설악산은 산이 매우 높아 음력 8월(중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음력 5월(여름)에 가서야 눈이 녹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른다. 또 그 바위 봉우리의 돌 빛이 희고 깨끗하기 때문에도 또한 설악이라 부른다”고 하였다.(주24)

따라서 설악 명칭의 유래는 백설과 관련된 것, 암석과 관련된 것,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외면적 양태와 정신적 세계관을 포함한 명칭으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눈 설(雪)자를 사용한‘설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필자는 설악산과 관련된 두 권의 서명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하나가 노산 이은상의《산찾아 물따라》(박영사, 1966년 초판, 1975년 3판 발행)이고, 다른 하나는 황호근의《국립공원 설악산》(통문관, 1973년)이다.

노산의 이 책은 동아일보에 1933년 10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37회에 걸쳐 연재된 것으로 그의 설악산 기행에는 심마니, 포수 등 10여명이 동행하였다.

30세의 젊은 시인이자 동아일보 기자출신이며 산악인인 노산 이은상은 설악행각 1회 ‘行脚前夜의 燈下에서’라는 제목으로 설악행각을 쓴 동기를 밝혔는데“그 모든 것보다도, 설악은 우리 옛 조상들의 오랜 숭배를 입어온 신령한 산, 거룩한 지역이라 후세에 끼쳐진 한 자손이 찾아가 그 영적을 더듬고 활력을 얻어 조선민족정신을 재인식하자, 조선민족 신념을 재수립하자, 조선민족문화를 재건설하자 하는 거기에 더 큰 깊은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글은 후에《노산문선에 수록되었지만, 새로《산찾아 물따라》(1966년)를 묶어 내면서“일제시대의 검열기준으로 ‘설사 신문에는 그대로 넘겨준 글이라도 단행본에는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이어서 군데군데 삭제를 당한 곳이 많았다. 그랬으나 이번에 이같이 새로 간행하게 되므로, 그 당시 이 글을 발표했던 동아일보 보관지에서 그 삭제된 구절을 찾아 그대로 베껴 내어 완전히 보충해 넣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5) 따라서《노산문선》에 실리지 못했던 설악행각의 내용들이《산찾아 물따라》에 오롯이 담겨지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처럼 설악산이 1933년 노산 이은상 신문연재로 널리 알려졌다는 평가가 온당하다.(주26)

다음의 서명본인 황호근《국립공원 설악산》은 사단법인 속초시관광협회 회장이었던 양권일이 전용갑에게 준 것으로 내표지에‘全瑢甲先生惠存楊權一’이라고 서명하였다.

서문에 의하면 양권일이 지우였던 황호근에게 설악산에 대한 책을 저술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황호근의 자서에“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속초시관광협회 회장 양권일 선생의 물심양면에 걸친 뜨거운 희생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을 특별히 밝히고 감사를 드리는”것이라 하였다.

양권일 회장에게 이 책을 받은 전용갑 사진작가는 자신의 책 앞장 화보에“사진-○표는 全瑢甲撮影, 其他崔九鉉撮影”이라고 직접 써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전용갑 선생의 소장본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필자의 수중에 들어옴에 따라 소개를 하게 된 것도 전생의 큰 인연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수록된 컬러사진 40장 가운데 전용갑이 붉은색 볼펜으로 ○표를 한 사진은 향성사의 탑, 신흥사전경, 귀면암, 비선대, 양폭, 천당폭포(사진 속에 촬영준비를 하는 최구현의 뒷모습이 담겼다), 권금성 케이블카, 금강굴, 금강문, 선녀봉의 웅자, 백담사의 전경, 한계령의 108계단, 12선녀탕, 백담산장, 속초항 출어, 영랑호, 속초시 전경, 전설이 깃든 하조대 등으로 19장이다.

따라서 최구현이 촬영한 사진은 노루목 고개, 신흥사 부도, 울산암, 흔들바위, 높이 솟은 미륵봉의 웅자,천불동계곡, 천화대, 진태봉의 운해, 비룡교,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장수대, 대승폭포, 속초항의 일출, 명태덕장, 속초해수욕장, 옥색옥녀탕, 의상대, 낙산사, 홍련암, 낙산해수욕장 등 21장이다. 1970년대 속초의 사진작가로 최구현과 전용갑이 활약했으며 황호근의 책자에 수록된 사진도 함께 작업했음을 미루어 알 수있다.

황호근과 양권일은 설악산의 팔기팔경을 정리하였다.“ 설악산에는 기괴한 점이 많은 산이라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그 이치를 생각해도 풀 수 없는 기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조화로 이루어졌는지 천만년의 비밀이 간직된 채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그런 기괴한 점을 양권일 선생과 함께 해석하고 정리하니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여덟 가지나 되므로 여기에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설악산의 풍경 가운데 특히 손꼽을 수 있는 풍경 가운데 유독 팔경을 선정한 것은 그만큼 풍경조성에 절대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정한 것이다. 필자는 양권일 선생과 몇일을 두고 옛 선인들의 시구나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선정한 것이다”라 하였다.(주27)

설악산의 팔기는 모두 자연현상에 대한 기괴한 것으로 오랜 옛날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던 신기한 것이라 하였고, 설악산의 팔경은 여덟 가지 좋은 풍경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필자가 팔기와 팔경 내용을 풀어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설악산의 팔기(八奇)

① 천후지동(天吼地動):여름철 비올 때 하늘이 울부짖고 땅이 갈라지듯 지축이 흔들리는 것
② 거암동석(巨巖動石):큰 집 채만한 바위가 쉽게 움직이는 설악산 흔들바위의 신기한 것
③ 전석동혈(轉石洞穴):계조암같이 바위가 바위와 서로 맞대어 자연굴을 만든 기이한 것
④ 백두구혈(百斗溝穴):내설악 외가평에서 백담사 구혈은 콩 백말을 담는 구멍으로 기괴한 것
⑤ 수직절리(垂直節理):천불동 골짜기 봉우리가 수직으로 갈라져서 온갖 형상을 하는 기이한 것
⑥ 유다탕폭(有多湯瀑):설악산에 탕이 많은데 모든 물체가 탕에 빠지면 탕벽에 붙는 괴이한 것
⑦ 금강유혈(金剛有穴):미륵봉의 금강굴과 같이 큰 석산에 큰 구멍이 뚫린 신기롭고 기이한 것
⑧ 동계지설(冬季遲雪):과거에는 늦가을부터 눈이 내렸지만 이제는 정월이나 2월에 내리는 것

 


○ 설악산의 팔경(八景)

① 용비승천(龍飛昇天):설악산 폭포수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용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모습
② 운악무해(雲岳霧海):여름철 봉우리마다 구름 위에 솟아 있고, 골짜기는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모습
③ 칠색유홍(七色有虹):폭포에서 생기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일곱색 무지가 펼쳐진 모습
④ 개화설경(開花雪景):겨울산이 눈꽃으로 덮이는데 나무와 기암절벽의 눈꽃들이 묘경을 이룬 모습
⑤ 홍해황엽(紅海黃葉):가을 산천이 단풍으로 물들어 마치 수를 놓은 병풍을 펼쳐놓은 것과 같은 모습
⑥ 춘만척촉(春滿躑躅):봄의 대청봉에는 철쭉과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온 산에 가득하여 아름다운 모습
⑦ 월야선봉(月夜仙峰):가을 밤하늘이 밝을 때 둥근 달이 중천에 뜨면 기암 괴봉들의 선녀같은 모습
⑧ 만산향훈(滿山香薰):봄에 눈향나무가 피어 그 향기가 바람따라 온 산에 가득하여 향기에 취한 모습

 


설악산 팔경은 이처럼 사람들이 계절과 자연을 탐익하며 그 경관을 읊은 것으로, 천지수(天∙地∙水) 삼원(三元)과 오행의 절경을 합친 도교적인 팔채지경색(八采之景色)이다. 따라서 그 팔경은 원경(元景) 시경(始景) 현경(玄景) 영경(靈景) 진경(眞景) 명경(明景) 통경(洞景) 청경(淸景)의 경지를 말한 것이다.(주28)

이에 따라 1973년에 간행된 설악산 책자는 필자인 황호근과 책을 쓰도록 독려한 속초시관광협회 회장 양권일, 사진작가 최구현과 전용갑이 공동으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설악만이 갖는 팔기와 팔경은 골라낸 것도 선각자의 혜안이라고 하겠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설악을 찾은 것은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과 같은 마음에서 시작된 듯하다. 이미 이름난 금강과 유일하게 우위를 논할 수 있는 설악산을 가기 위해, 평평한 길에서는 말도 타고, 가마도 타고 가다가 험한 돌길이 나오면 신발을 챙겨서 걸었다.

그렇게 다녀온 설악에 대한 감동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그리고 설악을 찾는 이들에게 그 감동을 알려주기 위해서 유려한 문체로 한문기행수필을 남겼다. 다행스럽게 그들의 문집에 담겨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다.

 

 

 

 

Ⅲ. 조선시대 설악산 기행문 개관

 


1. 김창흡의〈설악일기(雪岳日記)〉(1705년)

 


김창흡(金昌翕:1653~1722) 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낙송자(洛誦子),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로서 이단상(李端相)에게 배웠다.

1673년(현종 14)에 진사가 되었고, 1684년 장악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죽자 형 창집, 창협과 함께 영평에 숨어 살았다. 1721년 집의, 다음해 세제시강원진선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과 함께 율곡 이후 대학자라 칭했는데, 신임사화로 형이 유배지에서 죽자 크게 상심하였고 지병이 악화되어 그 해에 죽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양주의 석실서원, 울진의 신계사, 강릉의 호해정 영당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삼연집》, 저서에《심양일기》,《 문취》, 편서에《안동김씨세보》가 있다.

25세 때 처음 설악산과 만났던 삼연의 만년기는 설악산 은거기간으로 54세부터 59세까지 만 5년이다. 벽운정사에 거처하다 1708년 화재가 나자 1709년 다시 영시암을 짓고 머물렀다. 삼연은 설악에서 많은 시를남겼는데, 그 가운데 비선대 시 한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瓊臺俯金潭(경대 같은 맑은 물 굽어보니)
右扇排靑峰(부채 같은 청봉이 그 곳에 펼쳐졌네)
融時備衆妙(이곳이 생길 때에 妙理를 갖추었던가)
豈惟勢奇壯(그 勢어찌하여 이리도 기장한가)(주29)

삼연은 열 가지의 즐거움을 논했는데 그 가운데‘산천을 두루돌아 말과 종도 지쳤지만 안장에 걸터앉자 길가며 읊은 게 작품이 되어 한 주머니 가득할 때(經歷山川馬頓僕怠據鞍行吟有作成囊)’‘세모의 산속 절에서 눈보라 흩날릴 때 밤은 춥고 스님을 잠들어 혼자 앉아 책을 읽을 때(崖寺歲暮風霰交山夜寒僧眠孤坐讀書)’가 들어 있다.(주30)

설악을 주유(周遊)하며 시 쓰고 홀로 글읽던 설악산 시인의 삼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속초시 노학동 동사무소 앞 길가에는 1982년 속초문화원에서 세운 삼연 김창흡 선생 추념비가 있다. 비문내용에는“그의 가문이 권문세가이었기에 당쟁의 상처도 컸다.

장희빈과 얽힌 기사환국에 부는 송시열과 함께 사사(賜死)되고 중백부(仲伯父) 또한 적소에서 죽는 등으로 처참한 가난(家難)을 당하였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시인이었던 삼연 선생은 끔찍한 환해풍파가 싫어 내설악에 들어와 영시암을 어리다 물소리 솔바람으로 홍록을 씻으면서도 문득 외설악의 웅자와 동해의 창파가 그리우면 속초에 자주 와서 향사들과 어울려 시회주를 즐겼다.

삼연이 간지 사반천여년 산천은 변하였으나 그 정이 그리워 그이 비폭층담과 소야팔경을 새겨두고 그를 추념코자 한다.”고 적었다.

김창흡이 지었다는 소야팔경은 설악산 달마봉에서 발원하여 척산, 노리를 거쳐 청초호로 유입되는 소야뜰의 경관을 노래한 것으로 청호마경(靑湖磨鏡), 속초귀범(束草歸帆), 주교야화(舟橋夜火), 온정조하(溫井朝霞), 논산조양(論山朝陽), 청대화병(靑垈畵屛), 노동명월(蘆洞明月), 이동백설(梨洞白雪), 도원홍우(桃源紅雨), 척산야침(尺山夜砧) 등이다.31《 삼연집》은 72권 36책으로 삼연은 5천여수의 시를 남겼다. 삼연의 기행문〈설악일기〉는 1705년 8월 24일부터 12월 5일까지 기록한 내용이다.


2. 홍태유의〈유설악기(游雪岳記)〉(1705년)

홍태유(洪泰猷:1672~1715) 선생은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남양, 자는 백형(伯亨), 호는 내재(耐齋)다. 주부(主簿)벼슬을 했던 홍치상(洪致祥)의 아들로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과 저술에만 힘을 섰다.

문학재능이 뛰어난 문장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고 한다. 영조 때 지평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인심(仁心)을 바탕으로 한 덕정(德政)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시문집으로《내재집(耐齋集)》5권이 있다. 시는 평담전아(平淡典雅)하였으며 시에 천재적 재능을 가졌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송나라 사람의 시를 좋아하다가 두보의 시에 침장하였고 만년에는 당나라 시인 귀잠과 잠삼의 시체를 좋아했다. 삼연 김창흡이 그를 크게 칭찬할 정도로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내재는 경기도 여주의 이호(李湖)에‘내재’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1705년(숙종35) 설악산, 한계사 일대를 유람했다.

저자는 가문의 불행을 겪은 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산천유람을 즐겼으며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44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남에 따라 미처 자신의 시문을 정리하지 못했다. 1715년에 기세한 후 아들들이 초고를 바탕으로 유문을 수집 편차한 뒤 당대의 명인들에게 보였는데 먼저 김창흡의 산정(刪定)을 받고 다음에 이병연, 이덕수에게 산정 받아 5권 3책의 책자를 간행하였다.


책자의 간행은 1730년(영조6) 저자의 종숙부이자 당시 영의정 홍치중의 도움을 받아 운각활자로 냈으며 이선현과 이덕수가 서문을 썼다. 이후 1754년 아들 홍익삼이 경주 부윤에 제수되자 저자에게 이조참판이 추증된 뒤 문집이 다시 발간되었다.

아들 홍익삼은 운각활자로 문집을 초간한 후 부록문자를 구성하는 등 중간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저자의 재종제 홍진유가 지은 유사에다 홍익삼이 1754년 추증사실을 추기하였고, 1747년경 윤봉조에게 행장을 받고 이제가 지은 묘갈명에 윤심형의 추기를 받고 1739년경 이덕수에게 묘지명을 받았다. 이 중간본은 홍익삼이 경주부윤으로 있던 1754년과 이듬해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전하는 규장각 중간본 완본은 1755년경 목판이다.

내재집 권1~2는 시로서 220여수가 연대순으로 실려 있고, 권3은 서(書) 서(序), 권4는 기(記) 제후(題後) 잡저(雜著) 권5는 논(論) 묘지(墓誌) 행장(行狀) 애사(哀辭) 제문(祭文), 부록은 유사 행장 묘갈명 묘지명이다.〈 유설악기〉는《내재집》권4에 수록되어 있다.

홍태유의 설악산 기행은 인제현에서 동북쪽의 삼차령을 넘고, 곡백담 하류, 난계역을 거쳐 곡백담에 이르렀다.

봉정암을 보았고 유홍굴의 오른쪽으로 들어가 십이폭동과 폐문암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30리를 더 들어가 심원사와 삼연정사의 직서루를 거쳐 유홍굴에 도달했다. 거기서부터 돌길을 힘들게 올라 십이폭동을 보고, 남쪽 절벽을 타고 봉정암에 이르렀다. 폐문암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 오세암에 이르렀다.

홍태유는 이렇게 인제지역의 내설악 명승을 돌아봤는데, 유홍굴에 대해서는 율곡 이이가 과거시험의 시관을 있을 때, 급제자로 뽑았던 유홍(유홍:1524~1594)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언급하였다.

유홍은 1557년에강원도 암행어사를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와 함경도로 세자를 시종하였고 도체찰사를 맡았으므로 강원도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홍태유는 이처럼 설악을 아껴서 친우들에게 자랑하고, 절경을 찾는 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기행문을 썼던 것이다.

 


3. 이정소의〈유설악록(遊雪岳錄)〉(1733년)

이정소(李廷熽:1674~1736) 선생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여장(汝章), 호는 춘파(春坡)이며 강화출신이다.

좌랑 상휴의 아들로 1696년 진사가 되고 숙종 40년(1714) 증광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숙종 41년(1715) 식년시 을과에 장원하였다. 노론으로 벼슬은 지평과 정언에 올랐다. 1721년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종의 후손이 없자 노론의 4대신과 함께 연잉군(뒤의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소론파의 항소와 신임사화가 일어나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 영잉군인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승지,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문집으로 필사본인《춘파만록(春坡漫錄)》이 있다. 이 책은 동유록, 후동유록, 유설악록이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유설악록은 외설악 기행문으로 와선대, 비선대, 금강봉, 계조암, 천후산 등이 언급되었다.


4. 이복원의〈설악왕환일기(雪岳往還日記)〉(1753년)

이복원(李福源:1719~1729) 선생은 조선후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본관은 연안, 호는 쌍계(雙溪), 자는 수지(綏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6대조는 대제학 월사 이정구, 5대조는 대제학 백주 이명한, 고조부는 이만상으로 3대 대제학으로 유명한 대제학 청호 이일상의 셋째 아우다.

증조부는 군수 이봉조, 조부는 관찰사 이정신, 아버지는 예조판서 이철보(李喆輔), 어머니는 예산현감 박필순의 따님이며, 아들은 영의정 이시수(李時秀)와 대제학을 역임한 극옹(屐翁) 이만수(李晩秀)를 둔 명문가다.

쌍계 이복원은 영조 14년(1738) 사마시, 영조 30년(1754)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대사간, 대사헌, 1772년 대제학, 1775년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정조 4년(1780)에 이조판서를 거쳐,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판중추부사, 원자보양관, 세자부, 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1783년에는 문안사, 1790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에 능하여 영조의 시책문을 짓고 정조가《명의록》을 지을 때 찬집당상을 맡았으며, 왕실의《갱장록》편찬을 주도했다. 이외에도《일성록》《대전회통》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쌍계유고(雙溪遺稿)》가 있다.

관직에 있는 동안 몸가짐에 엄격하여 마치 벼슬이 없는 선비처럼 포의를 걸치고 근신하는 생활로 일생을 보내 유상(儒相)이라 불렸다. 문형이 된 후에 정조 임금은 자신이 세운 규장각의 문헌편찬 작업과 왕실의 기록을 전적으로 맡겼으며“마음속에 쌓인 덕망이 밖으로 맑게 비치니, 공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어진 재상이로다”라고 말했다.

 또한 쌍계의 죽음을 맞이하고 쓴 사제문(賜祭文)에서 정조는“몸은 순수하고 깨끗하며 사람들로부터는 시비가 없었고, 항상 맑고 검소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견고하였도다”라고 칭송하였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그를‘포의(布衣)의 대제학’이라 일컬었으며, 집안은 국조문원가(國朝文苑家)라 하였다.

신흥사에는 영조 때 신흥사를 중창한 용암체조(龍岩體照)대사의 용암대선사비가 있는데, 당시 좌의정을 지낸 쌍계가 비문을 짓고 표암 강세황이 글씨를 썼다.

20세에 첫째 부인인 파평 윤씨를 잃고 재취한 순흥안씨 부인과 18년을 살았지만 둘째 부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고 쓴 제문은 조선 선비가 아내를 잃고 애통한 심사를 글로 표현한 것이다.

“ 사람 사는 것이 마치 흩날리는 꽃잎이나 버들강아지와도 같아 정처 없이 흩어지고 떨어지니 그 사이에 한번 만난다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오.…수명은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내 할 일을 다했는지 생각하면 유감이 있구려. 이것이 내가 못내 후회하고 한스러워, 시간이 흘러도 그 한이 풀리지 않는 이유라오”라고 슬퍼하였다.

쌍계가 강원도 양구현감 재임시기인 1753년(영조29)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양구 관아에서 출발하여 수렴동을 거쳐 쌍폭, 봉정암, 가야동굴, 오세암, 영시암 등을 유람하고 양구현 관아로 돌아온 내설악 기행문이다.

매월당 김시습과 오세암에 대한 언급과 주지 설정과의 대화가 들어 있으며 영시암과 삼연거사에 대한 기록도 하여 설악과 매월, 삼연의 인연을 중시하였다. 기행문의 끝에는 양구현의 가뭄으로 인해 보리들이 말라 시들고 근심스런 안색의 백성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어진 목민관의 따뜻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 기행문은《쌍계유고》제10권에 수록된 것으로 장편에 속한다.

 


5. 정범조의〈설악기(雪岳記)〉(1779년)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조선후기의 남인계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정시한(丁時翰:1625~1707)의 현손이자,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친척이다.

37세인 1759년 진사시에, 1763년(영조39) 증광문과에 갑과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고, 1768년 지평∙정언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773년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1776년인 56세 풍기군수와 공조참의를 거쳐 1778년 병조참의 동년 7월에 양양부사를 제수 받아 8월에 부임하였다. 당시는 대흉년이라 양양주민이 새로 경작한 밭의 세금과 어민의 봉납을 면제하였다.

양양부사를 재직하면서 이듬해인 1779년 3월 설악산을 유람하고〈설악기〉를 썼으며 4월에는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1785년(정조9)이후 대사간, 대사성, 이조참의, 한성부우윤, 대사헌, 개성부유수,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1799년에 예문관제학, 1800년(순조즉위) 실록지사로서《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해좌선생문집(海左先生文集)》이 전한다. 1867년에 간행한《해좌집》39권 19책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으며〈설악기(雪岳記)〉는 권23 기(記)에 들어 있다.

《해좌집》권6과 권7에는 양양 낙산사, 현산요, 동해묘, 낙산사, 의상대, 관음굴, 죽도, 영랑호, 선유담, 청간정, 신흥사, 비선대, 천후산, 계조암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범조는 시와 문장에 뛰어나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정조가 당대 문학의 제일인자로 평가할 정도였으며 시풍은 풍아화평(渢雅和平)하였고, 각지 명승고적에 대한 감회를 적은 것이 많다. 이덕무가《청비록》에서 평한 것과 같이 정범조는 석북 신광수와 이름을 나란히 한 작가로서 세상을 놀라게 한 작품을 썼다고 평한다.(주32)

정범조는 조선 정조연간에 여러 관직을 거치며 남인을 이끌었는데 1794년 지돈녕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1796년 친척인 정약용이 원주 법천동 우담에‘청시야(淸時野)’라는 초당을 찾았다. 현계산 탄천의 우담에 살던 정범조는‘맑은 세상에기에 초야에서 늙으려 한다는 뜻’을 담아 초당을 지었다.

목민심서의 저자 정약용은〈청시야초당기(淸時野草堂記)〉에서“공이 처신하는 것과 세상 살아가는 것은 대개 마음에 스스로 얻은 것이 있어 그런 것이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초야에 묻혀 사는 것도 도가 있으니, 맑은 시대가 아니면 초야에 묻혀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Ⅲ. 조선시대 설악산 기행문 내용과 일정


설악기행문 5편 가운데 내용이 중복되지 않는 외설악 기행문인 이정소의〈유설악록(遊雪岳錄)〉(1733년)과 정범조의〈설악기(雪岳記)〉(1779년) 등 두 편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33) 이외의 기행문은 수집 되는대로 추후에 보충하여 살펴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

 


1. 이정소《 춘파만록>> <유설악록〉(1733년)

[내용] 9월 11일 계미일 맑음. 양양에서 아침을 먹고 나서 간성군수 조탁(趙擇)이 영공(令公)을 겸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14일 모임이 있으므로 설악산의 완연한 가을 경치도 볼 욕심에 진사 민태수(閔台)와 함께 동행하여 길을 나서 연곡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동산관(洞山館)에서 묵었다.

12일 갑신일 맑음, 상운역을 떠나 양양부에 들러 승지 이휘진의 애려(哀廬:상을 당한 사람의 임시거처)에 들러 만나고 저녁에 낙산사에서 묵었다.

13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민태수와 함께 이화정에 나와 앉아 멀리 대해의 동쪽을 바라보니, 한줄기 붉은 오색구름이 가로로 퍼져 언덕을 잠깐 비추고 흩어지더니, 커다란 태양이 날아올라 만 가닥 금빛을 위아래로 쏘아 비추니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전에도 이곳을 유람하러 온 관리들이 왕왕 있었는데 이러한 장관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이렇게 일기가 청명한 것이 신의 도움이 있는 것 같다 한다.

아침을 먹은 후 출발하여 바닷가를 따라 10여리를 가서 강선역에 도달하고 또 20여리를 가서 신흥사(新興寺) 동구에 도착하니 신흥사에 기거하는 스님 여덟아홉 명이 절에서 나와 말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갈 것을 권하였다.

관사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수레를 끌며 천천히 걸어 큰 내를 건너니, 지나치는 양쪽 가로 석봉들이 빼어나게 나와 층을 이룬 것이 신기하고 괴이하여 가히 장관이다. 남쪽을 보니 한 줄기 폭포가 모든 봉우리의 머리처럼 하늘에 걸려 마치 필련(匹練:하얗게 바랜 한 필의 백포)처럼 아래를 드리우고 있다. 여름에는 이 두 폭포의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고 물길의 모양은 눈과 같은데, 지금은 물 떨어지는 것이 졸졸 흐르기를 면치 못한다고 스님이 말한다.

향성사(香聲寺) 구터를 지나니 5층탑이 하나 있는데 스님이 말하기를“이것은 바로 옛날 큰 사찰의 폐허인데 기 백여 년이 된 것”이라 하였다. 산세가 부드럽고 수목이 울창한 길을 따라 사찰누각에 이르니 누각의 겉이 쇠락하고 편액이 낡아 스러져 망가져 있고 주묵 또한 다행을 면치 못하였다. 늙은 스님 10여명이 와서 둘러앉았는데 내가“설악 한 자락에도 많은 명승이 있군요.”라고 말하였다.

대개 나의 말에 덧붙여 말하였는데 이 절의 북쪽에는 천후산(天吼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의 아래에 석굴이 있고 그 석굴에는 계조암(繼祖庵)이 있다 한다. 이 절의 남쪽에는 식당암(食堂岩)이 있고 그 바위 아래가 와선대(臥仙臺)이고 그 위가 비선대(飛仙臺)인데, 반나절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견여(肩輿:두 사람이 어깨에 매는 가마)가 앞서 식당암을 향해 나아가니 구불구불 구비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발길마다 하얀 돌이 밟힌다. 또 한 골짜기를 넘으니 좌우에 단풍나무 숲의 붉고 푸른 빛 사이로 햇빛이 파고든다.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옥구슬이 떨어지는 소리와 같고 푸른 계곡은 곧게 뻗어 와선대에 이어 있다. 와선대의 반석은 평평한 것이 위 아래로 층을 이루고 있다. 산의 바위는 대개 그 이름에 연유가 있게 마련인데 이곳은 근년에 세 글자가 새겨진 것이다.

나와 스님 일행이 바위 위에 둘러앉아 산에서 나온 과실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산중의 별미를 맛보고 이리저리 배회하며 멀리 경치를 감상하고, 다시 일어나 또 수 십 보를 나아가며 더위잡고 땀 흘리며 기어올라 비선대에 이르렀다.

용맹스럽고 장대하게 구름 기둥처럼 양쪽 언덕에 서 있는 금강봉(金剛峰)은 하늘 밖까지 이를 듯 뻗어져 나온 것이, 옛날 이백의 시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서쪽에 있는 폭포의 물은 양쪽 봉우리 사이로 쏟아 흩어지며 마치 옥구슬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남쪽 골짜기 아래로 흐르는 것이, 그 원류로 물의 기세가 웅장하니 이 서쪽 폭포가 더욱 기이하다. 남으로 보이는 여러 봉우리는 숲이 울창하고 깊으며 빼어나 숲 골짜기가 더욱 깊어 보이고 첩첩산중을 이루었는데, 스님이 이르길“옛날 신라 말, 권씨와 김
씨 두 성씨가 세속을 피해 이곳에서 머물었던 까닭에 권금성(權金城)이라는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고 말하였다.

가마를 돌려 천후산을 향하니 커다란 바위가 마치 돌 부채처럼 하늘 높이 눈빛으로 하얗게 치솟아 있고 향기를 피우는 성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으니, 이곳이 가히 모든 금강의 경치 중 백미라 하겠다.

험난한 돌길을 열 걸음 걸어 아홉 꼭대기에 겨우 도착하니 아래에는 용암(龍岩)이 있고, 양안에 두 가닥나무로 다리를 놓아 가까스로 지팡이를 짚고 건너니 석문이 보이는데, 두 바위 사이에 기거하는 스님이 한 명 있어 앞서 나를 인도하여 굴 안으로 들어가니, 굴 안에 세 칸 남짓 계조암이 들어 앉아 있고, 암굴 위의 석문 밖에는 정암(庭岩)이 있는데 바위의 반쯤 높이의 용암에는 사람 오십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위의 단상에는 어른 키의 한 배 반 정도 되는 소위 움직이는 돌이라 부르는 동석(動石)이 있어 시험 삼아 밀어보니, 어린 아이의 힘 정도로도 움직이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다. 스님 말이“원래 이 돌은 두 개였는데 하나가 밑으로 떨어져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굴 밖 서쪽 바위틈에 샘이 하나 있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차며 먹을 수 있다. 민태수와 함께 바위 위에 앉아 사면을 둘러보니 향로봉이 보이고, 그 남쪽에는 달마봉이 있고, 그 동쪽에는 남국사봉이 있고, 그 남쪽에는 천후산이 있고, 그 북쪽으로 수려하고 준수하고 빼어난 나라의 명승들이 늘어섰다. 달마봉으로부터 천후산의 사이를 넘어 보이는 만리 창해는 그 광대한 모습이 그 옛날 소동파가 시로 읊었던 소위‘질풍같은 세상에 홀로 선 깃털 같은 존재니 신선에 이르는 것이 오늘이라’고 하였던 것과 같다.

절에 있는 스님 여럿이 와서 아뢰는데 그들을 자세히 알아보니 이대사(頤大師)는 나와 동갑인데 매우 총명하고 도리를 알며 경문에 능하고 시율(詩�)이 빼어나니 그 실력이 가히 한문공(한유)을 능가할 정도이다. 석양은 산 위에 걸쳐 있고 새로 나온 달이 신흥사 위에 떠올라, 나와 이대사는 나란히 침상에 누웠다.

아침 동틀 무렵 가마가 양양부에 도착하고 군수가 이미 와 앉아 있어 동행하여 돌아왔으니 설악을 유람한것은 단지 하루뿐이었다. 글로써 기록하여둔다.

[일정] 춘파 이정소는 1733년 9월 11일 가을 경치를 보기 위해 양양에서 진사 민태수와 함께 설악 구경을 나섰다. 연곡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동산관에서 묵었다. 12일 상운역을 떠나 낙산사에 묵은 다음날 13일부터 강선역을 거쳐 신흥사에 입구에 도착하였고, 이어 옛 향성사터의 5층탑을 보고, 식당암, 와선대, 비선대에 당도했다. 여기서 사방의 금강봉, 천후산, 향로봉, 달마봉, 국사봉 등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금강굴이라 부르는 금강봉에 대해서도 용맹스럽고 장대하다고 하였다. 휴식을 취한 후 일행은 가마를 돌려 내려와 돌부채처럼 생겼다고 한 천후산인 울산바위 아래 세 칸 남짓의 바위굴인 계조암을 보고, 흔들바위 등을 차례로 바쁘게 돌아보았다.

이정소의 전체 일정은 3일이 소요되었으나 설악기행은 하루만의 기록으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권금성에 대한 전설이다. 권금성은 신라 말 권씨와 김씨가 이곳에 머물러서 불려졌다고 하였으며 또한 흥미로운 것으로 어른 키의 한 배 반 정도 되는 소위 움직이는 돌이라 부르는 동석(動石)이 있어 시험 삼아 밀어보니, 어린 아이의 힘 정도로도 움직이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다고 언급한 것이다. 계조암 앞의 흔들바위를 지칭하는데 원래 이 돌은 두 개였으나 하나가 밑으로 떨어져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는 승려의 언급도 적었다.

굴 밖 서쪽 바위틈에 샘이 하나 있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차며 먹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시원한 물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정소의 일정은 지금도 외설악을 즐겨 찾는 비교적 단거리의 관광코스다. 270여년 전 조선 선비가 걸었던 그 길을 가벼운 마음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신흥사에서 좌측으로 걸어가면 와선대와 비선대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올라가면 계조암과 울산바위가 그 모습 그대로 장관을 이룬다. 세월은 가고 인물이 떠나도 절경은 여전하다.

 


2. 정범조《 해좌집》권23, 기〈, 설악기〉(1778년)

[내용]무술년(1778,정조2) 가을, 내가 양양의 임소로 가다가 북쪽으로 설악을 바라보니, 구름 가에 우뚝하여 아주 장대하였으나, 관리의 일정이 촉박하여 가서 놀 수가 없었다. 다음해 3월 상운(祥雲)의 승(丞) 장현경(張顯慶) 사응(士膺), 고을의 선비 채재하 군과 약조하여 함께 출발하였다. 그리고 척질 신광도, 사위 유맹환, 아들 약형이 따랐다.

신축일(17일) 신흥사에서 묵었다. 절의 주위에 천후(天吼) 달마(達摩) 토왕(土王)의 여러 봉우리들이 둘러서 있다. 설악의 바깥 산들이다. 임인일 (18일)에 신흥사 승려 홍운에게 견여를 인도하게 해서 북쪽으로 비선동(飛仙洞)을 거쳐 들어갔다.

봉우리 모습과 물소리가 이미 정신과 혼백을 맑게 해준다. 고개를 올려 바라보니 깎아 세운 듯 절벽이 수백 심(尋)의 길이다. 견여를 내려서 오르는데, 벽은 모두 돌계단이다. 한 계단마다 한 번씩 숨을 몰아쉬면서 올랐다.

장사응을 돌아보니 아직 아래쪽 계단에 있다. 그는 따라갈 수 없다고 절레절레한다. 마척령(馬脊嶺)을 오를 때 홀연 큰 바람이 일어나고 안개와 비가 내려서, 사방이 다막힌 듯 캄캄하였다. 홍운 승려는“이것이 중설악입니다. 날이 개면 설악 전체가 보일 겁니다.”라고 하였다.

어스름에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기이한 봉우리가 사방에서 옹위하고 있으면서 삼업하여 사람을 치려는 듯하다. 중간에 토혈이 뚫려 있어, 고즈넉하게 암자를 하나 들여 넣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일찍이 은둔한 곳이다. 암자에는 두 개의 초상화가 있는데, 매월당을 유학자로서 그려둔 형상과 불자로서 그려둔 형상이다. 나는 배회하며 추모하면서 서글픈 느낌에 사로잡혔다. 공은 스스로 오세동자라 하였으므로 이 암자의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계묘일 (19일)에 왼쪽 기슭을 넘어 아래로 내려오다가, 길을 꺾어 오른쪽으로 향하여 큰 골짝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산봉우리의 형세가 마척령보다 더 험준하다. 밧줄로 끌고 앞장 서서 가면, 뒤에서 미는 사람이 꼬옥 들러붙어 10리를 간 후에 사자봉의 절정에 올랐다. 이것이 상설악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이 모두 산이다.

고니가 나는 듯하고 칼이 서 있는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한 것은 모두가 봉우리요, 오지그릇 같고 가마솥 같고 동이나 항아리 같은 것은 모두가 골짝이다. 산은 모두 바위이고 흙이 없으며, 짙푸른 색은 마치 쇠를 쌓아놓은 듯한 빛깔이다. 사자봉의 동쪽은 조금 굽어 흘러가는 형세이다. 암자가 있어서 봉정(鳳頂)이라 한다.

전하는 말에 고승 봉정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사자봉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 벼랑을 따라 남쪽으로 갔는데, 벼랑이 좁아 가까스로 발을 디딜 정도였다. 발을 내디디는 곳은 낙엽이 쌓이고 바위가 무너져 있고 나무가 가로누워 있어서 벌벌 떨려 건너갈 수가 없다. 왼 켠 오른 켠 산들은 모두 기이한 봉우리들로, 수목의 숲 위로 불쑥불쑥 솟아나 있다.

물은 뒤쪽 산에서부터 나와 골짝을 두루 덮으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골짝은 모두 돌이어서, 맑고 밝기가 마치 눈과 같다. 그 위로 물이 덮어 흐른다. 바위가 엎드려 있다가 솟아나고 움푹 파였다가 볼록 튀어나고 좁았다가 넓어지고는 하는데, 그 형세는 모두 물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대개 폭포를 이룬 것이 열서너 개 인데, 쌍폭이 특히 기이하다. 못을 이루고 보를 이루고 만류(漫流:흥건한 물이름)를 이룬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수렴(水簾)이라 일컫는 것이 가장 기이하다. 이런 것을 종일 보다가 영시암에 들어갔다.

이 암자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이름 지은 것으로, 그가 일찍이 이곳에 은둔하였다고 한다. 봉우리와 골짝이 그윽하고도 기이하며, 흙이 있어서 작물을 심을 수가 있다. 아름다운 수풀과 무성한 나무들이 많고 밤새도록 두견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갑진일(20일)에 물을 건너서 남쪽 골짝 속으로 갔다. 계곡의 시내는 나무와 바위가 뾰족뽀족 솟아서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다. 조금 올라가자 바위가 모두 흰색이더니, 홀연 보랏빛 붉은빛으로 변하여 수면에 너른하게 그 빛이 서린다. 왼쪽에는 석벽이 감벽의 색으로 서있고 물이 그 가운데로 갈라져 나오며 쏟아져서는 콸콸 소리를 냈다. 앞에 산봉우리가 있는데 아주 험준하다. 견여에 찰싹 엎드려서 올라갔다. 좌측 기슭을 따라서 아래로 백 걸음을 내려가자 앞에 석벽이 수십 심(尋:1심은 8척)의 높이로 우뚝 서서 마주한다.

색은 깨끗한 푸른빛이다.

폭포가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나는 듯이 쏟아져 내려, 영롱하기가 흰 무지개와 같았다. 바람이 잠깐 잡아채자 가운데가 끊어져서 아지랑이며 눈이 되어, 가볍게 훌훌 날려 허공에 가득하게 되고 남은 물보라가 때때로 옷으로 날려 들어왔다.

종자에게 피리를 불게 하여 폭포소리와 서로 응답하게 하니, 맑고 명랑한 소리가 온 골짝에 울렸다. 이것이 바로 한계(寒溪)폭포이다. 내가 홍운에게“이런 것이 또 있는가?” 물었더니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풍악(금강산)의 구룡폭포보다도 훨씬 장관이다.

동남방은 숲과 골짝이 아주아름답다. 동쪽은 오색령(五色嶺)인데 영천(靈泉)이 있어서 체증에 좋다고 한다. 수석이 많아서, 바라보니 그윽하고 괴이하였으나, 날이 늦어 끝까지 가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넘어 돌아와 백담사(百潭寺)에 이르러 묵었다.

을사(21일)에 북쪽으로 가서 비선동(飛仙洞) 뒷산을 따라 내려갔다. 산이 허공에 매달린 듯 급하다. 바위가 온통 뒤얽히고 구멍이 많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곧바로 자빠져서 죽을 것만 같다. 남쪽으로 마척령 등 여러 봉우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바라보노라니, 하나하나 모두 구름 가에 있다. 어떻게 나를 그 꼭대기에 올려두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신흥사(神興寺)에서 묵고, 병오일(22일)에 돌아왔다.

[일정] 정범조의 설악기행문은 1778년 3월 17일 신흥사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21일 다시 신흥사에 돌아온 다음날 22일 마쳤다. 일행은 장현경, 채재하, 그리고 친척 등 5명, 신흥사 승려 홍운, 가마 꾼들이 동행하였다. 따라서 10여명 정도가 함께 내설악을 돌아보았다. 그의 일정은 신흥사에서 오세암까지 40리, 오세암에서 사자봉까지 40리, 사자봉에서 영시암까지 40리, 영시암에서 한계령까지 30리, 한계령에서 백담사까지 30리, 백담사에서 신흥사까지 40리의 거리다.

전체 도보로 걸어서 돌아온 거리는 220리였으며 견여(肩輿)로는 단지 40리 정도만 갈 수 있다 하였다. 봉정암은 고승 봉정이 있었다 하고,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이 지었다고 적었으며 수렴동을 절경으로 꼽았다. 오색령에 는 약수인 영천(瀛泉)이 있어서 체증에 좋다고 하였으니 지금까지 오색약수의 명성이 이어진다.

정범조는 사자봉을 최고로 쳤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이 모두 산이다. 고니가 나는 듯하고 칼이 서 있는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한 것은 모두가 봉우리요, 오지그릇 같고 가마솥 같고 동이나 항아리 같은 것은 모두가 골짝이다. 산은 모두 바위이고 흙이 없으며, 짙푸른 색은 마치 쇠를 쌓아놓은 듯한 빛깔이다”라 하였다.


말년에 양양부사를 했던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 선생도 양양에 대한 글 한줄 남기지 못했으나, 정범조 양양부사는 설악기행을 남겨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산을 좋아하고 은둔하는 처사의 풍모를 지녀서 사람들은 그를‘산야인(山野人)’라 불렀다고 전한다. 험난한 벼슬길에 지쳤지만 경치 좋은 설악산을 곁에 둔 양양부사가 되자, 서슴없이 설악을 찾은 것도 그의 타고난 성품이기도 했으며, 시를 좋아하고, 문장을 통해 고적을 소개하고 싶은 심미안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두 편의 설악산 기행문을 살펴보았다. 기행수필의 특성상 개인적 감상이 주류를 이루지만, 비교적 일정이나 명승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여 현재의 길라잡이로도 도움이 되는 글이다. 이정소의 외설악 기행과 정범조의 내설악기행문은 내외설악에 대한 선비들의 사랑이 짙게 배어나오는 문장이다. 산중의 미인이라는 설악을 오래 깊이 사랑한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겠으나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 가운데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과 삼연 김창흡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홍태유, 이정소, 정범조, 김금원 등도 있다.

설악을 기록한 근현대인물로는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1930년대부터 설악을 누비고 신문에 소개한 노산 이은상의 업적도 놓칠 수 없다. 그리고 1960년대 초부터 설악산 개발에 앞장섰거나 이를 사진으로 남긴 이달영, 이대성, 최구현, 유만석, 이기섭, 이기찬, 정형민, 이종우 씨 등도 떠오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산악인 유창서, 사진가 성동규, 최낙민, 환경운동가 박그림 씨와 같이 설악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이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나의 부모는 평안도출신으로 1.4후퇴 때 월남하여 속초에 정착하였다. 당시 중앙시장 내의 평북여관 자리를 이기섭 박사에게 양도하고, 리어카에 우리를 태우고 1960년초 설악산으로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당시에 남겨진 사진을 보면 비선대, 계조암, 비룡폭포 등 흑백사진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영국왕실에서 지었다는 산장에서 뛰어놀았고, 틈만 나면 양폭산장으로 달려가 유만석 아저씨가 끓여주던 산당귀차도 마시고 구수한 전설도 들었다. 설악을 찾은 관광객에게“여러분이 왔다해서 와선대요 그런데 비가 와서 비선대다”라고 소개했다는 어떤 안내자의 설명도 대신 들려주었고, 설악산 이곳저곳의 바위이름과 전설도 지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른바 설악산 신스토리텔링의 창시자다. 반달가슴곰, 산양, 멧돼지, 산토끼, 하늘다람쥐, 솜다리꽃, 금강초롱, 열목어(곤돌메기), 어름치 이들은 나의 유년기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처럼 항상 주위를 맴돌던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 집 주위로 눈길을 뚫고 산양이 내려왔는데 며칠 대나무 잎을 뜯어다 주어 보살핀 후 서울동물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1978년 6월 설악동 기존지구 강제철거가 마무리되면서 1960년부터 살았던 그곳을 우리는 떠났다. 뿔뿔이 흩어진 친구처럼 설악에 대한 기억도 차츰 흐려져 갔다. 하지만 설악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말려서 보관하고 있는 한국의 에델바이스 솜다리꽃처럼 지금도 설악은 내 곁을 가까이에서 지키고 있다.

한반도의 등허리에 우뚝 솟은 설악, 금강산과 제주도 관광 및 해외여행에 밀려나 명맥조차 잇기 힘든 설악관광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독자적이며 창의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 설악산만의 독창적 킬러콘텐츠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해야 한다.

심마니이야기, 울산바위와 권금성 이야기, 백담사이야기, 삼연과 매월당이야기, 설악의 비경과 유서 깊은 산악제의, 열목어, 신갈나무, 당단풍나무 등의 친자연과 친환경적 생태문화적 요소로도 이미 충분한 경쟁력과 세계인의 감동을 줄 수 있다.

한국의 스위스라고 칭송하던 설악이 지금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내 걸음방식으로 걷지않고 남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다. 날로 쇠락해가는 설악관광의 현실을 보면 가슴이 저린다. 그래서 우리는 설악산얘기를 다시 꺼내야만 하고, 설악눈꽃축제도 부활해야 한다. 설악은 눈의 원조산이며 신성한 정신적 영산이다. 또한 솜다리꽃으로 다시 핀 고 이기섭 박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설악문화제를 경쟁력 있는 명품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선인들 그리고 후대에게 우리들이 설악을 위해서 무엇을 했으며, 설악에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실천했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설악산을 둘러싸고 있는 속초∙고성∙양양∙인제의 설악권이 상생과 협력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에게는 설악산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충실히 수집하고 정리해야 할 과제가 남겨져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설악기행을 다시 읽으면서 진교준의〈설악산 얘기〉라는 시를 다시 읊고 있다. “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나는 산이 좋더라, 영원한 휴식처럼 말이 없는, 나는 산이 좋더라, 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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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정룡,〈 속초시의 축제>《강원도 축제의 이해》국학자료원, 2006, 135~154쪽, 이 글에서 필자는 속초시 축제를 전통지향형축제, 통일지향형축제, 국제지향형축제로 나눈바 있다. 지난 1996년부터 시작된 설악눈꽃축제를 폐지하고, 2008년부터 시작한 불축제를 비롯하여 논뫼호불꽃놀이와 실향민주제를 포함한 속초관광발전 을 위한 4계절특성화축제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2) 崔九鉉, 《雪嶽山觀光畵帖》雪岳觀光協會, 1958, 필자 소장의 이 흑백사진집을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3) 李殷相, 〈雪岳行脚>《?山文選》永昌書館, 1947

4)장정룡 외, 《속초지역구전설화집》속초문화원, 1999

5) 장정룡, 〈설악산 심메마니연구〉《강릉어문학》7집, 강릉대국문과, 1992

6) 장정룡,〈 설악산 울산바위전설고찰《〉속초문화》제24호, 2008, 72~92쪽

7) 엄경선〈신문기사로 읽는 우리 지역이야기〉28,《설악신문》934호, 2009.11.30 14면

“1975년 6월 당시 굴지의 음반사였던 지구레코드에서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하춘화가 부른‘속초에 심은 사랑’‘설악산 메아리’를 새 음반으로 내놓았다.

‘ 속초에 심은 사랑’은 속초시의 고향심기운동에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하춘화가 단독으로 불렀으며,‘ 설악산 메아리’는‘잘했군 잘했어’‘다정한 부부’에 이은 후속타를 노려 하춘화, 고봉산이 콤비로 불렀다.”

 

필자가 소장한‘설악산메아리’(김령인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고봉산 노래)음반에 실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음반의 뒷면에는 속초항구과 흔들바위를 미는 승려 사진이 들어 있다.

“ 1.흰구름 덮인 설악산으로 그대와 손잡고, 휘파람 불면서 하이킹 가자, 진달래 철쭉꽃 우리를 부른다. 레이 레이 레이호 레이 레이호, 산메아리 를려온다 사랑노래 들린다, 시원한 폭포수가 노래를 합창하면, 오색의 무지개핀다 그대와 손을 잡고, 설악산 찾아가는 즐거운 청춘하이킹,

2. 형제봉으로 마등령으로 즐거운 하이킹, 콧노래도 흥겹게 설악산 가자, 에델봐이스가 우리들을 부른다, 레이 레이 레이호 레이 레이호, 산새들이 노래한다 흰구름이 떠있다, 금강산 찾아가다 설악산 봉우리핀, 전설의 울산바위로 발걸음 가벼웁게, 비선대 찾아가는 즐거운 청춘하이킹”

 

1984년 남궁옥분 도‘설악산’(오세은 작사작곡)이라는 노래를 취입했다. 가사 중에는“설악산 설악산 오 설악산, 나는 좋아 설악산이 나는 좋아, 아 그대 품속으로”라고 하였고 대청봉, 한계령 오색약수, 백담사 등 내설악을 주요 내용으로 넣었다.


8) 金蓮東, 《全鮮名勝古蹟》東明社, 1929, 257쪽“麟蹄郡, 雪嶽山…泉石絶勝하고 峯巒壯奇하야 與金剛으로 上下云이라”


9) 趙明履 “雪嶽山가는 길에 皆骨山중을 만나, 중드리 무른 말이 楓岳이 엇더트니, 이 이 여 서리치니 때마잣다 드라” 조명리는 조선 영조 때 사람으로 자는 仲禮, 호는 道泉州�江,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文憲이다. 유창돈, 《고시조신석》동국문화사, 1959, 348~349쪽

 

10)“ 송강 정철은 설악에서 역적이 나타난다 하여 봉정암에 穴을 지르려고 설악산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정철은 설악산을 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여 후세에 흥미로운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 雪岳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苦境이며, 鳳頂이 아니라 難頂이라’라고 말하며 매우 고생을 했다고 한다. 즉 설악산에 들어서자 천지가 진동하고 소낙비가 내리고 큰 瀑?聲이 온 몸을 삼킬 듯이 으르릉 거리자 혼자서 답답하여 내뱉은 말이라고 한다.

”황호근,《 국립공원 설악산》통문관, 1973, 47쪽, 필자가 수집한 송강정철과 설악산에 얽힌 전설로는‘계조암과 송강 정철’‘울산바위와 송강정철’이 있다. 장정룡《, 속초지역구전설화집》속초문화원, 1999, 119쪽 참조

11) 成東奎,《 雪岳의 秘境》아카데미서적, 1988, 머리말

12) 문봉선,〈 설악산과 나 그리고…〉《설악산》학고재, 1996, 130쪽

13) 李齊賢,《 翁稗說》仲思序“지정 임오년(1342) 여름이다.…벼루를 꺼내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을 받아 먹을 갈았다. 그리고 평소에 벗들에게서 받은 편지 조각을 이어서 그 뒷면에 여러 가지를 적고 그 끝에 책이름을 역옹패설이라고 붙였다.”

14) 黃根,《 國立公園雪嶽山》通文館, 自序

15) 金錦園《, 湖東西洛記“》人之稱名區勝景者必曰仙景畵景”

16) 崔南善,《 朝鮮의 山水》東明社, 1947, 23~25쪽, 원문의 맞춤법을 현대어로 바꾸었다.(필자 주)

17) 洪泰猷,〈 遊雪岳記〉<<耐齋集》卷4. 記“지금까지 많은 명산을 보아왔지만 그 중에서도 금강산만이 이 설악산과 우위를 다툴 수 있고 다른 산은 견줄 바가 못 된다. 금강산은 그 아름다움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의 경치는 우리나라 사람조차 아는 이가 드무니, 이 산은 산 가운데 隱者이다. 내가 세세히 설악의 경치를 적은 것은 고향에 돌아가 친우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요, 또 절경을 찾아 유람하려는 이들에게도 알려주려는 뜻에서이다.”

18) 金錦園(1817년경-1847년이후)《, 湖東西洛記“》설악에는 옛날 김삼연의 영시암과 김청한의 오세암이 있었으나 그들의 자취가남아 있지 않아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설악의 이름이 이 두 사람 때문에 더욱 알려져 금강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19) 李殷相《, 祖國江山》民族文化社, 19, 32쪽

20) 손경석,《 한국의 산천》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202쪽

21)《 新增東國輿地勝覽》권44, 양양산천조“부의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으로 매우 높고 가파르다. 중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지었다.”(在府西北五十里鎭山極高峻仲秋始雪至夏而消故名)

22) 金錦園,《 湖東西洛記“》설악산을 찾으니 돌들은 불쑥불쑥 솟아 하늘에 닿았고, 산봉우리들 우뚝 벌려 있는데 돌들은 희기가 눈 같아 설악이라 이름했다.”(訪雪岳山石勢도?天峯巒聳종? 石白如雪故名雪岳也) 김금원은 원주 태생으로 자세한 이력은 알수 없으나 14세 때인 1830년 봄 3월에 남장을 하고 처음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규당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으며 서울 용산에 있는 삼호정에서 박죽서, 김운초, 김경춘 등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 1850년에 유명한 여류기행문인《호동서락기》를 썼다.(필자 주)

23) 李殷相,〈 雪岳行脚〉<<鷺山文選》永昌書館, 1958, 165쪽“이 설악의‘설’이란 것은 결국 신성을 의미하는‘ ’의 음역인 것임만은 介疑할 것 없는 일이라 봅니다”

24) 김윤우,〈 설악산의 산수와 명승고적〉<<山書》제15집, 한국산서회, 2004, 20쪽

25) 이은상,《 산찾아 물따라》박영사, 1966년 5쪽, 머리말은 1966년 10월 3일 개천절에 노산 이은상이 썼다.

26) 엄경선,〈 그 시절 설악에는 무슨 일이, 신문기사로 읽는 우리지역이야기⑥《〉설악신문》905호, 2009. 5. 4 14면

27) 黃根,《 國立公園雪嶽山》通文館, 1973, 59~65쪽

28) 장정룡,《 강원도민속연구》국학자료원, 2002, 189쪽

29) 崔承洵,《 太白의 詩文》下, 江原文化叢書11, 강원일보사, 1977, 155쪽“그는 비선대의 맑은 물을 굽어보고 그 물에 잠긴 奇壯한 경관을 본 것이 아니라 물밑에 잠겨있는 그림자를 보았다.…우주의 묘리를 한데 모였다는 것도 기발한 상이거니와 낙구에 여운을 남겨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것은 더욱 이곳의 경승도 살렸고 문장의 운치도 더하였다.”

30)《 三淵集》  拾遺卷之24,‘ 藝園十趣’

31)《 道川面面勢一覽》大正十五年度, 1926‘ 所野八景起源’이 자료는 일제강점기 도천면 통치자료이나 당시의 문화재나 고적, 명소전설 등을 포함하고 있다. 박익훈 전 교장님이 소장하신 자료를 빌려 필자가 쓴《속초지역 구전설화집》에 영인 수록하였다. 면세일람이 나올 당시 도천면 기성회회장은 박상희였다. 그는 이후 1929년부터 12년간 도천면장을 역임하였다. 엄경선,《설악의 근현대인물사》마음살림, 2009, 163‘ 속초번영의 주역, 속초읍장 박상희’

32) 李家源,《 韓國漢文學史》民衆書館, 1961, 326쪽

33) 이정소 지음, 임영란 옮김〈유설악록(遊雪岳錄)〉《山書》제15호, 한국산서회, 2004, 14~17쪽 정범조 지음, 심경호 옮김〈설악기(雪岳記),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이 모두 산이다〉《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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