鷺山 이은상 선생님의 1938년 지리산탐험기  자료 사진 外

2017. 10. 27. 16:20산 이야기



       

일제시대 한반도 山은 제국주의 국부증진과 휴양의 대상


   전통적으로 한민족은 산을 숭배하는 신앙을 간직해 왔다. 불교가 한반도에 정착할 때도 우리의 산신숭배와 샤머니즘 등과 잘 융화했기 때문에 단시간에 발전할 수 있었다. 지금도 사찰 위쪽에 있는 산신각이나 칠성각․독성각 등은 불교가 산신숭배와 융합한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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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조선인들은 산에 올라 민족정체성을 확인하고 호연지기를 키우는 장이었다.


   산을 숭배하는 우리의 산신신앙은 고대~중세~근대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서민들에게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민들은 무슨 행사만 있으면 산에 올라, 산신각을 찾거나 불상을 찾아 기도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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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통천문을 통과하기 앞서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산악숭배사상은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한반도와 같은 산악국가이면서 한반도의 산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시 조선인들과 조금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한 논문이 발표됐다.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박찬모 HK교수가 발표한 ‘<朝鮮及滿洲>(이하 조선과 만주로 통칭)에 나타난 조선 산악 인식’ 이란 논문에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한반도 산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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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상봉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당시 지리산 모습이 민둥산으로 안쓰럽다.



   당시 발간된 <조선과 만주>는 1912년 1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한반도에서 월간으로 발행된 최장수 종합잡지였다. 전신은 1908년 창간된 <朝鮮>이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조선과 만주>는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한 사전 조사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등 각 방면을 망라해서 싣는 종합잡지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한반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朝鮮>을 창간한 뒤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다시 만주지역에 대한 노골적 침략성을 드러내며 한일합방 이후 <朝鮮>을 <조선과 만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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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동부도와 서부도 앞에서 일행들이 일제히 멈췄다.


   실제로 <조선과 만주>, <朝鮮>은 많은 지면을 통해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논리와 한반도 지형과 산에 대한 정보를 할애했다. <조선과 만주>의 창간호 첫 내용이 ‘신영토 개척’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찬모 교수는 당시 수록된 기고문과 기행문을 통해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산을 보는 시각을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져왔던 시각과 비교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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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때부터 고사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 산악을 본 시각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19세기 개항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찾았다. 이들은 대부분 미개하고 비위생적인 모습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선의 산악에 대해서도 황폐성과 야만성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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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산행에 앞서 삼신산 쌍계사 일주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먼저, <조선과 만주>에 나타난 일본인들의 조선 산악엔 대한 대체적인 첫 인상은 민둥산(禿山․독산)이다. 민둥산은 미개와 문화 지체의 현상으로 보았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철도종사원 나니와 센타로(難波 專太郞)는 조선의 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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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을 밟고 낙조를 즐기고 있다.


   ‘조선의 산은 수척하여 쌀쌀한 황태의 느낌이 있는 것에 대하여, 일본의 산은 매우 온기가 있다. (중략) 조선의 산은 일본의 그것처럼 ‘정’은 아니다. ‘의’이다. ‘소곤거림’은 아니고 ‘침묵’이다. 혹은 또 ‘광명’은 아니고 ‘자포자기’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중략) 자포자기의 그것이 아니라면 버려진 듯한 조선에서 미술은 발달하지 않았다. (중략) 이것은 단지 악정(惡政)과 이웃나라의 위협의 결과만이라고 보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닐는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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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화엄사 연기대사의 사자석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앙에 조선일보 로고가 새겨진 깃발도 눈길을 끈다.


   나니와는 조선의 민둥산에 대한 느낌을 문화예술의 낙후성으로 연결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문화적 낙후성은 악정과 위협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춘원 이광수는 민둥산과 문화예술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둥산은 교육과 식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화예술은 세계에 조선인의 기개를 펼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산악에 대한 식민과 피식민의 주체에 따라 뚜렷한 시각의 편차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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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정상을 오르던 중 노고단의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맨앞 병으로 나발 불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띈다. 예나 지금이나이렇게 술 마시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로 일본인들은 조선의 명승지로 불리는 여러 산악을 탐방했다. 이들에게 금강산․소요산 등은 자연물을 완성할 수 있는 심미적 공간이거나 휴양지일 뿐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처럼 지명 유래와 각종 전설, 그리고 유적 등을 찾아 그곳에 역사적 숨결과 문화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태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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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을 등산하면서 코재를 향해 오르고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등을 지낸 이마무라 도모조선의 자연을 만끽하는 풍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20~30인이 들어갈 수 있는 암굴 속에 숙박하기로 했다. 나뭇가지를 잘라와 그것을 펴서 침상을 만들었다. 청려한 계곡물을 길어온 후 부근의 마른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붙여 탕을 끊이거나, 가지고 온 쌀로 밥을 짓고 통조림을 열어 저녁식사를 유쾌하게 하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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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음양수를 지나고 있는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



   이마무라 일행은 한라산 산정 아래의 안온한 암굴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도회지 음식점에서 맛볼 수 없는 감흥에 젖어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반면 노산 이은상 일행이 한라산에서의 산행 모습은 사뭇 다르다.

‘산상에 해가 저문다. 백록담반(白鹿潭畔), 초원 한 머리에 장막을 친다. 장막 머리에는 장작불을 집힌다. 저녁 짓는 연기가 하늘로 한 무더기 터져 오른다. 마치 번제(燔祭)를 지내는 구약시대와 같다. ‘시나이산’상에 장막셋을 짓고 옛 선지자 ‘엘리아’와 민족의 은인 ‘모세’와 성사기독을 모시고 싶다한 ‘베드로’의 말이 기억된다. 이 거룩하고 신비한 한라산상에서 나 또한 우리 역사의 선지자와 은인과 성사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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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을 오르다 야영준비를 하고 있다.



   한라산에서 이은상 일행의 평온한 밤을 지켜주는 것은 일본인들이 말한 암굴과 침상이 아닌 ‘한라산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은은한 달빛과 모닥불을 후경으로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기도하는 이은상의 행위는 흡사 음화된 종교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금강산과 백두산, 묘향산 등은 그들이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소속감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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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일행이 칠불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당시 산행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은상은 설악산에도 올라 “설악은 우리 옛 선민의 오랜 존승을 입어온 신산성역(神山聖域)이라. (중략) 그 영적을 더듬고 그 활력을 얻어 ‘조선’ 민족정신을 재인식하자, ‘조선’ 민족신념을 재수립하자, ‘조선’ 민족문화를 재건설하자. (후략)”고 다짐했다. 따라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산악은 민족정신․민족신념․민족문호 등을 회복할 수 있는 공동체적 정체감을 환기시키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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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을 종주하다 반야봉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명승 산악은 단순한 미적 완성과 휴양의 공간에 불과한 반면, 이은상 등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한라산과 설악산 산상에서의 모든 행위가 민족적 제의이자 배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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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돌아가기에 앞서 기념촬영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산악은 제국적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산악연구나 산행, 잡지 간행 등 제반 산악활동은 최종적으로 국가(제국)를 부유하게 하는 하나의 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산악에서 일본의 신화적 세계를 호출함으로써 확장된 제국의 영토를 합리화 하려는 이채로운 시도도 찾을 수 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등산을 체위향상과 오락의 하나로 규정하며, 등산의 효용을 ‘국가제일주의․국방제일주의․전체주의사상’으로 전용했다. 물론 그 시도는 조선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무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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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당시 불일폭포의 모습.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많아 보인다.


   결론적으로 한민족에게는 조선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등의 매개체인 산악이 민족의 성소 및 민족정체성 확인 또는 휴양의 공간 등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반해 제국신민인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산악은 단순한 심미적 공간이나 휴양의 공간으로, 혹은 국부 증진의 대상이나 제국적 영토 욕망의 구상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주의 연구나 총독부 주도의 사회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일본인은 조선의 산악을 총독부와는 다른 층위에서 상정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강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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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상봉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고 있다.



   1920년대까지는 이와 같은 산악인식과 산행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조선일보․신간회의 생활개신운동과 조선 총독부의 건강증진운동 등으로 등산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산행의 효용성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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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와서 당시 서울역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전부 깔끔한 차림으로 단장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들의 암벽등반, 알피니즘(alpinism)과 순수한 등산운동을 담고 있는 영화와 서적의 보급, 그리고 1931년 ‘조선산악회’와 1937년 ‘백령회’ 등이 창립되면서 탐승 위주의 산행에서 알피니즘적 성격의 등반이 본격 막이 오른다. 지식인들에게 산악이 낭만주의적 대자연이었다면, 알피니즘적 주체들에게는 계몽적 이성의 지배 대상이었다. 특히 조선산악회는 산악연구는 지리학․지질학․식물학․역사학 등 여러 학문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산악연구의 목적이 궁긍적으로 식민지배를 위한 지형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국부증진과 국가적 효용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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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입구에 서 있는 장승. 남원을 지키는 장승이다. 지금도 그대로 서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산악은 국가적 효용을 다각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는 방편이자 구상물이라는 것이다. 1930년대 전후의 조선산악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투어리즘에서 알피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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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당시 지리산 상봉 사진. 사진이 왼쪽으로 누워 있다.


   논문을 발표한 박찬모 교수는 “조선 산악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결국 식민지 지배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면서 “일제시대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의 산악 인식차이에 이어 친 일제 성격인 ‘조선산악회’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백령회’(전재자 註 :한국산악회 전신)의 구체적 활동모습과 구성원 등에 대한 본격 연구도 하면 민족정체성이 조금 더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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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강원도 횡계스키장에서 장남 신중부 씨와 함께한 신업재 선생.



      "흰 구름이 산골짜기에 자욱하니 푸른 바다 물결은 포구를 이루었고, 흰 파도가 눈을 몰아내니 산들은 섬이 되어 점점이 깔린 듯하다.돌담에 몸을 기대고 위 아래를 바라보니 정신도 마음도 한가지로 막막하여 몸이 태초의 공간에 안긴 채 하늘과 땅과 더불어 흘러가는 듯했다."


천왕봉   '이른 새벽 동틀 무렵 해발 1,915m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 보라. 끝업이 펼쳐진 회색 구름 바다 저멀리 동녘 하늘에 희뿌연 서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이것도 잠깐, 동쪽 하늘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면서 휘황찬란한오색 구름 속에서 진홍빛 거대한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부채살 같이 뻗치며 불쑥 솟는다. 이 장엄한 일출의 모습에는 어떤 경탄사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천왕봉 해돋이는 지리산 8경 가운데서도 제 1경이다. 이 일출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삼대에 걸쳐 적선을 해야 한다는 속설도 있다. 아무래도 까마득히 땅을 누르고 하늘에 닿을 듯이 우뚝 솟은 천왕봉은 거대한 바윗덩어리들로 이루어졌다. 하루에도 몇차례씩이나 짙은 구름과 안개에 싸이고 비바람, 또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때문에 이른 새벽 천왕봉에 올랐다고 하여 누구나 일출의 황홀경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차례나 거푸 일출을 보러 갔지만 끝내 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천왕봉 정상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km떨어진 장터목 산장이나 법계사에서 앞날 저녁에 일단 여장을 풀었다가 새벽 3시, 또는4시에 랜턴을 밝혀 들고 정상으로 출발해다 한다. 아무리 더운 여름철에도 해돋기 전의 천왕봉은 얼음처럼 차다. 운무가 잔뜩 싸고 있거나 강풍이라도 몰아치면 두툼한 방한복을 껴입고도 견뎌내기 어렵다. 천왕봉에선 일출을 천하 제일로 치지만 아침운해가 하계를 뒤덮고 있을 때의 경관 또한 선경중의 선경이다. 마을도 길도 구름바다에 잠겨 있고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만 섬처럼 떠 있는 것이다.   노고운해가 좋다지만 천왕봉에 비견될 수는 없다.또 시계가 맑은 아침에는 천왕봉에서바라보는 사방의 조망이 참으로 광활하다. 서북으로 소백산맥의 속리산과 덕유산 그리고 북쪽에 가야산과 황매산 남쪽의 백운산과 다도해 동쪽으로 웅석봉과 진주 시가지, 서쪽으로 반야봉과 노고단이 선명하게 바라보인다. 천왕봉은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 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지리의 주봉은 계절마다 준비해 둔 멋진 옷을 갈아입는 듯 을해년 정월의 풍광은 쪽빛 하늘에 수놓은 듯 피어난 영화가 마치 산호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영국의 경건함을 보여주고 있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치듯 흐르는 물보라 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천왕봉의 장군같은 모습노산 이은상선생은 천왕봉에 올랐을 때의 장쾌함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조리 다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천왕봉에 오르면 하늘 위헤 올라선 것으로 생각 되는 것은 시인들만이 갖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천  왕  봉  오  름

내원사∼장당골∼치밭목산장∼천왕봉∼로타리산장∼자연학습원∼중산리


1500여 식물 자라는 크고 넓은 산
   백두대간의 남한 최고봉 지리산(1915m)은 웅장한 산세만큼이나 사시사철 다양한 식물을 키워내므로 지리산 꽃산행은 어느 계절이든 좋다. 그러나 4월 중순까지 천왕봉에 눈이 남아 있을 정도로 고도가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코스를 잡아야 한다. 지리산에는 15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중부 지역의 800미터급 산에 보통 육칠백 종류가 자라는 것에 비하면 거의 배에 가까운 숫자다. 그만큼 높이도 높고 산역도 넓다는 것을 나타낸다.

   4월의 지리산 꽃산행, 특히 4월 중순 이전의 꽃산행은 낮은 산자락을 거치는 코스를 잡아야 한다.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장당골이다. 이 골짜기는 남향에 가까워 이른봄 꽃을 관찰하기에 좋다. 장당골은 지형도와 등산안내도에 대부분 한판골이라 되어 있는 골짜기로 내원사에서 무재치기폭포로 이어진다. 계곡의 길이는 도상거리로 12킬로미터, 30리나 된다. 지리산에서 등산객의 손때가 타지 않은 깨끗한 골짜기로 꼽을 만한 곳이다. 한가지 흠이라면 계곡 중간쯤에 있는 경상대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우마차로가 나 있어 산행의 맛이 약간 줄어든다는 점이다.


한국특산식물 히어리 꽃 피어
   입산통제소에서 산행을 준비하노라면 광대나물의 자줏빛 꽃이 시선을 끈다. 꽃색이 선명해 사진을 잘 받는 식물이다. 지척의 내원사로 향하면 호제비꽃 군락이 반긴다. 돌계단 옆에 꽃을 활짝 피워 발길을 붙잡는다. 전국의 어느 산에서나 이른 봄 흔하게 볼 수 있는 큰개별꽃과 민들레를 보고 경내로 들어서면 올벚나무, 동백나무, 백목련, 산수유 등 절에서 심은 정원수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조용한 경내를 돌아보고 내원사를 벗어나 장당골로 들어서면 계곡이 넓고 물이 맑음에 먼저 놀란다.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 중의 하나인 갯버들이 계곡 가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수술의 진노랑 빛이 계곡의 물빛과 잘 어울린다. 선홍빛 꽃이 핀 진달래도 계곡의 풍광을 연출하는 데 한몫을 한다. 진달래 꽃색은 붉은 정도가 다양한데 이곳의 것은 가장 붉은 축에 든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비자나무가 나타난다. 다 자라도 키가 3미터를 넘지 않는 나무로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식물이어서 쉽게 눈에 띈다. 잎을 뒤집어 보면 꽃-개비자나무 같은 나자식물(裸子植物)은 꽃이 피는 식물이 아니므로 포자수(胞子穗)라 해야 옳겠다-이 달려 있다. 바위 틈에서 주로 자라는 매화말발도리도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더 이상 계곡을 따라 오르기가 불편할 즈음 우마찻길로 올라선다. 길 가 곳곳에서 꽃이 핀 개암나무를 볼 수 있다. 한 그루에 수꽃과 암꽃이 따로 달리는 개암나무의 수꽃은 개꼬리꽃차례 혹은 수상화서(穗狀花序)라고 하는 꽃차례를 이루며 치렁치렁하게 가지 중간에 달리고, 암꽃은 한 개씩 가지 끝에 달린다. 개암나무 종류는 우리나라에 5종류가 있는데 잎이나 열매가 달리면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꽃만 피어 있는 상태에서는 종(種)을 정확하게 식별해 낼 수 없다. 중부 지방에서 동백나무라고도 하는 생강나무는 잎이 나지 않은 낙엽활엽수숲 여기저기서 노랗게 꽃을 피워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나오는 `노란 동백나무'는 바로 이 생강나무를 이른다. 계곡을 건너는 곳에 이르면 능선의 사면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노란 꽃이 띄엄띄엄 보이는데 한눈에 보아도 생강나무의 꽃색깔보다 연하다. 세계적으로 지리산 부근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히어리다. 이른봄에 피는 꽃이라 좀처럼 관찰하기가 어려운 식물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확이다. 내원사를 출발한 지 1시간이 조금 지나면 바깥장당의 농가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여러 집이 있었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이주를 해 지금은 한 가구만 남아 있다.


시골길 걸으며 보는 봄식물들
   양지바른 밭 가에 큰구슬붕이, 솜나물, 남산제비꽃, 잔털제비꽃이 피어 있다. 제비꽃 종류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보이는데 종을 구분하기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비꽃속의 우리나라 식물은 40여 종에 이른다. 농가를 지나면 바로, 시원스레 자란 왕대숲이 펼쳐진다. `산중에 웬 대나무?' 하는 의문이 들지만 산청이 전국에서 이름난 왕대 생산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왕대숲에서 40여 분 더 올라가면 안장당의 염소 키우는 집에 이른다. 일대의 조릿대는 염소들이 뜯어먹어 버려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계속해서 뜯긴 조릿대가 나타나는데 염소의 행동반경이 우리에서 2킬로미터쯤 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양지꽃과 할미꽃이 새로 나타난다. 폐가를 하나 지나 여러 개체의 민들레가 소담스런 꽃을 피운 계곡 가에 도착한다. 도시에서 보는 서양민들레가 아니라 우리의 `토종'민들레다. 근처의 물 웅덩이에는 엄청난 수의 올챙이가 바글대고 있어 살아 있는 자연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조금 후 계곡이 갈린다. 주계곡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우마찻길은 왼쪽의 작은 계곡을 따라 나 있다. 우마찻길을 따라 계속 가면 곧 경상대연습림 장당보호소다. 머위와 흰털괭이눈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 이 부근이다. 연습림보호소 건물을 지나면 길이 갈라진다. 왼쪽의 길이 더 뚜렷해 보이지만 그 길은 써리봉 남릉으로 가는 길이고, 치밭목으로 가는 길은 오른쪽이다. 곧 계곡에 닿아 건너면 이후부터 조릿대숲이 지겨울 정도로 이어진다. 양지에서 자라는 봄꽃식물이 많이 있을 조건이 아닌 듯한 생각이 든다. 계곡이 갈리는 곳에 도착하면 큰 골짜기를 따라 왼쪽 길로 들어선다. 오른쪽 길이 더 뚜렷해 보이지만 계곡을 건너면 곧 오래된 표지기가 나와 제길임을 증명한다.


장당골 상부에 자라는 너도바람꽃
   이 부근에서 지리산 꽃산행에서 오래 기억에 남을 식물을 발견하게 된다. 해발고도가 900미터를 넘고 간간이 잔설이 있어 더 이상의 봄식물을 만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할 즈음이다. 막 피어나려는 현호색이 신호다. 조금 더 오르면 꽃이 핀 현호색과 그 `기억에 남을 식물'이 나타난다. 너도바람꽃이다. 200여 미터나 되게 넓게 분포하는데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개체가 모여 있는 곳도 있다. 북방계 식물이 지리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것은 백두대간 때문이 아닐까, 백두대간에 의해 이 식물의 분포가 확장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릿대숲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능선의 헬기장에 닿는다. 너머 계곡의 무재치기폭포가 보이고 그 위의 능선에 있는 치밭목산장도 보인다.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아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철쭉이 많은 사면을 내려서면 대원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그곳에서 오르막을 한차례 오르면 무재치기폭포 전망대에 설 수 있다. 내려다보이는 장당골에는 하얀 수피(樹皮)를 가진 거제수나무가 많다. 그 나무들의 어린 가지가 붉게 물들어 생기를 발산하며 장관을 연출한다. 전망대의 구상나무에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사라져 가는 지의류가 붙어 자란다. 송라(松蘿)라는 것으로 구상나무 가지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다. 예전에는 전국의 깊은 산에서 많이 자랐다고 하나 무분별한 채취와 환경의 변화로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하등생물이다. 몇 해 전에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발견되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힌 적이 있다. 산장을 향하면 알록달록한 수피를 가져 쉽게 구분되는 노각나무가 여러 그루 나타난다. 지리산 인근에서만 자라는 식물로 여름에 피는 꽃도 좋지만 수피가 아름다워 관상수로 가치가 있을 나무다. 치밭목산장에서 하루를 묵어야 한다. 10여 년 가까이 산장을 관리하고 있는 민병태씨는 학사 출신 산장지기로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 회장이기도 하다. 4월 말, 5월 초면 산장 주변이 온갖 꽃들로 수놓아져 치밭목산장 치밭의 어원인 `취밭'을 실감케 한다. 

           

멸종되는 지의류 송라
   산장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4월 말에 산행에 나섰다면 샘 쪽으로 내려서서 조개골 상부를 지난 후 중봉과 하봉의 안부로 올라서기를 권하고 싶다. 이때쯤이면 조개골 상부에 꽃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고, 능선에 올라서면 무재치기폭포 전망대에서 보았던 송라를 다시 한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봉과 하봉 사이의 안부에서 자라는 송라는 소나무류가 아닌 낙엽활엽수 고목에도 붙어 있어 더욱 놀라운 일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보이는 중봉의 북사면은 하얀 눈과 검푸른 침엽수가 조화를 이루어 신비경을 만들어낸다. 그 침엽수가 능선에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많고 주목도 간간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높이가 30여 미터나 되는 수형이 좋은 가문비나무도 있어 눈길을 끈다. 출발한 지 2시간쯤 지나면 중봉 아래에 도착하고 산장에서 써리봉을 거쳐오는 등산로와 만난다. `치밭목 6km, 대원사 16km, 천왕봉 2km' 라는 이정표가 서있다. 곧 1875미터의 중봉 정상에 올라선다. 주변에는 잣나무, 가문비나무, 구상나무가 즐비하다. 전망이 일품이다. 남쪽으로는 중산리까지 이어지는 마야계곡이, 북쪽으로는 칠선계곡이 들어온다. 천왕봉에서 제석봉, 촛대봉, 반야봉, 노고단을 거쳐 북으로 이어져 나간 백두대간도 가물거린다. 4월의 천왕봉은 아직 봄이 아니다. 해발 1850미터에 있어 남한에서 가장 높은 천왕샘을 지나 법계사 밑의 로타리산장까지는 부지런히 걸으면 1시간에 갈 수 있다. 산장에서 순두류 쪽으로 내려선다. 순두류에 내려가 자연학습원을 보고 가기 위해서다. 산장에서 조금 아래에는 흰털괭이눈이 자란다. 장당골에서 보았던 식물이다. 30여 분 부지런히 걸어 흔들다리를 건너면 곧 순두류 1킬로미터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서어나무와 오리나무 꽃이 피어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거제수나무, 함박꽃나무, 황벽나무 등에 수목표찰을 달아 등산객들이 나무이름을 익힐 수 있게 해놓았다. 일본이깔나무 조림지로 들어서면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금방 자연학습원으로 통하는 길에 서게 된다. 이 부근 물가에서 애기괭이눈을 찾을 수 있다. 학습원으로 들어가는 길 가에는 산괴불주머니와 딱총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자연학습원에서 중산리까지는 찻길을 따라 가거나 계곡의 옛길을 따라 내려간다. 계곡을 따르면 조릿대밭이 이어지고 간간이 개암나무와 세잎양지꽃을 볼 수 있다. 중산리의 들녘에서는 금창초와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경상남도 자연학습원
   지리산 꽃산행을 할 때는 중산리 순두류에 있는 경상남도 자연학습원을 들러볼 만하다. 87년 4월 개원한 이 학습원은 경남도민을 대상으로 자연보호, 식물 및 곤충 관찰, 극기훈련 등을 교육하는 곳이다. 학습원 내에 있는 3개의 자연관찰로의 110여 종 나무에 표찰을 달아 놓아 교육효과를 높이고 있다. 일반인도 들어갈 수 있는데 10명 이상이 사전에 신청하면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경남도민들은 숙박을 하며 교육을 받을 수 있다(☏0596-72-1001 학습부). 자연학습원에서는 두 가지를 꼭 보도록 한다. 첫째는 약용식물원이다. 지리산에서 자라는 200여 종의 약초를 키우고 있어 산행 중에 모르고 지나친 많은 식물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사무실에 전시돼 있는 식물표본이다. 170여 점의 표본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 식물 익히기에 좋다. 5월 31일까지의 산불경방기간 중에는 지리산 주릉에 올라서는 것이 통제된다. 탄력적으로 운영되기는 하지만 천왕봉 부근은 중산리에서 법계사까지만 산행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이 자연학습원을 활용하면 좋다. 중산리에서 칼바위를 거쳐 법계사까지 간 다음 로타리산장에서 순두류 쪽으로 하산해 자연학습원에 들르면 정상 못 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sansuyu.net/ssu/chonwb.htm    지리산 산수유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