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27. 16:20ㆍ산 이야기
전통적으로 한민족은 산을 숭배하는 신앙을 간직해 왔다. 불교가 한반도에 정착할 때도 우리의 산신숭배와 샤머니즘 등과 잘 융화했기 때문에 단시간에 발전할 수 있었다. 지금도 사찰 위쪽에 있는 산신각이나 칠성각․독성각 등은 불교가 산신숭배와 융합한 흔적들이다.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산에 올라 민족정체성을 확인하고 호연지기를 키우는 장이었다.
산을 숭배하는 우리의 산신신앙은 고대~중세~근대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서민들에게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민들은 무슨 행사만 있으면 산에 올라, 산신각을 찾거나 불상을 찾아 기도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통천문을 통과하기 앞서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산악숭배사상은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한반도와 같은 산악국가이면서 한반도의 산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시 조선인들과 조금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한 논문이 발표됐다.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박찬모 HK교수가 발표한 ‘<朝鮮及滿洲>(이하 조선과 만주로 통칭)에 나타난 조선 산악 인식’ 이란 논문에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한반도 산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상봉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당시 지리산 모습이 민둥산으로 안쓰럽다.
당시 발간된 <조선과 만주>는 1912년 1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한반도에서 월간으로 발행된 최장수 종합잡지였다. 전신은 1908년 창간된 <朝鮮>이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조선과 만주>는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한 사전 조사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등 각 방면을 망라해서 싣는 종합잡지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한반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朝鮮>을 창간한 뒤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다시 만주지역에 대한 노골적 침략성을 드러내며 한일합방 이후 <朝鮮>을 <조선과 만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연곡사 동부도와 서부도 앞에서 일행들이 일제히 멈췄다.
실제로 <조선과 만주>, <朝鮮>은 많은 지면을 통해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논리와 한반도 지형과 산에 대한 정보를 할애했다. <조선과 만주>의 창간호 첫 내용이 ‘신영토 개척’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찬모 교수는 당시 수록된 기고문과 기행문을 통해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산을 보는 시각을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져왔던 시각과 비교 분석했다.
일제시대 때부터 고사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 산악을 본 시각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19세기 개항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찾았다. 이들은 대부분 미개하고 비위생적인 모습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선의 산악에 대해서도 황폐성과 야만성을 지적하고 있다.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산행에 앞서 삼신산 쌍계사 일주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먼저, <조선과 만주>에 나타난 일본인들의 조선 산악엔 대한 대체적인 첫 인상은 민둥산(禿山․독산)이다. 민둥산은 미개와 문화 지체의 현상으로 보았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철도종사원 나니와 센타로(難波 專太郞)는 조선의 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을 밟고 낙조를 즐기고 있다.
‘조선의 산은 수척하여 쌀쌀한 황태의 느낌이 있는 것에 대하여, 일본의 산은 매우 온기가 있다. (중략) 조선의 산은 일본의 그것처럼 ‘정’은 아니다. ‘의’이다. ‘소곤거림’은 아니고 ‘침묵’이다. 혹은 또 ‘광명’은 아니고 ‘자포자기’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중략) 자포자기의 그것이 아니라면 버려진 듯한 조선에서 미술은 발달하지 않았다. (중략) 이것은 단지 악정(惡政)과 이웃나라의 위협의 결과만이라고 보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닐는지. (후략)’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화엄사 연기대사의 사자석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앙에 조선일보 로고가 새겨진 깃발도 눈길을 끈다.
나니와는 조선의 민둥산에 대한 느낌을 문화예술의 낙후성으로 연결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문화적 낙후성은 악정과 위협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춘원 이광수는 민둥산과 문화예술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둥산은 교육과 식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화예술은 세계에 조선인의 기개를 펼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산악에 대한 식민과 피식민의 주체에 따라 뚜렷한 시각의 편차를 나타냈다.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 정상을 오르던 중 노고단의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맨앞 병으로 나발 불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띈다. 예나 지금이나이렇게 술 마시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로 일본인들은 조선의 명승지로 불리는 여러 산악을 탐방했다. 이들에게 금강산․소요산 등은 자연물을 완성할 수 있는 심미적 공간이거나 휴양지일 뿐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처럼 지명 유래와 각종 전설, 그리고 유적 등을 찾아 그곳에 역사적 숨결과 문화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태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을 등산하면서 코재를 향해 오르고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등을 지낸 이마무라 도모는 조선의 자연을 만끽하는 풍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20~30인이 들어갈 수 있는 암굴 속에 숙박하기로 했다. 나뭇가지를 잘라와 그것을 펴서 침상을 만들었다. 청려한 계곡물을 길어온 후 부근의 마른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붙여 탕을 끊이거나, 가지고 온 쌀로 밥을 짓고 통조림을 열어 저녁식사를 유쾌하게 하였다. (후략)’
지리산 음양수를 지나고 있는 1938년 노산 이은상 일행.
이마무라 일행은 한라산 산정 아래의 안온한 암굴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도회지 음식점에서 맛볼 수 없는 감흥에 젖어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반면 노산 이은상 일행이 한라산에서의 산행 모습은 사뭇 다르다.
‘산상에 해가 저문다. 백록담반(白鹿潭畔), 초원 한 머리에 장막을 친다. 장막 머리에는 장작불을 집힌다. 저녁 짓는 연기가 하늘로 한 무더기 터져 오른다. 마치 번제(燔祭)를 지내는 구약시대와 같다. ‘시나이산’상에 장막셋을 짓고 옛 선지자 ‘엘리아’와 민족의 은인 ‘모세’와 성사기독을 모시고 싶다한 ‘베드로’의 말이 기억된다. 이 거룩하고 신비한 한라산상에서 나 또한 우리 역사의 선지자와 은인과 성사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후략)’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을 오르다 야영준비를 하고 있다.
한라산에서 이은상 일행의 평온한 밤을 지켜주는 것은 일본인들이 말한 암굴과 침상이 아닌 ‘한라산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은은한 달빛과 모닥불을 후경으로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기도하는 이은상의 행위는 흡사 음화된 종교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금강산과 백두산, 묘향산 등은 그들이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소속감의 원천이었다.
노산 이은상 일행이 칠불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당시 산행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은상은 설악산에도 올라 “설악은 우리 옛 선민의 오랜 존승을 입어온 신산성역(神山聖域)이라. (중략) 그 영적을 더듬고 그 활력을 얻어 ‘조선’ 민족정신을 재인식하자, ‘조선’ 민족신념을 재수립하자, ‘조선’ 민족문화를 재건설하자. (후략)”고 다짐했다. 따라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산악은 민족정신․민족신념․민족문호 등을 회복할 수 있는 공동체적 정체감을 환기시키는 장소였다.
노산 이은상 일행이 지리산을 종주하다 반야봉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명승 산악은 단순한 미적 완성과 휴양의 공간에 불과한 반면, 이은상 등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한라산과 설악산 산상에서의 모든 행위가 민족적 제의이자 배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돌아가기에 앞서 기념촬영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산악은 제국적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산악연구나 산행, 잡지 간행 등 제반 산악활동은 최종적으로 국가(제국)를 부유하게 하는 하나의 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산악에서 일본의 신화적 세계를 호출함으로써 확장된 제국의 영토를 합리화 하려는 이채로운 시도도 찾을 수 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등산을 체위향상과 오락의 하나로 규정하며, 등산의 효용을 ‘국가제일주의․국방제일주의․전체주의사상’으로 전용했다. 물론 그 시도는 조선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무위로 돌아갔다.
일제시대 당시 불일폭포의 모습.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많아 보인다.
결론적으로 한민족에게는 조선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등의 매개체인 산악이 민족의 성소 및 민족정체성 확인 또는 휴양의 공간 등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반해 제국신민인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산악은 단순한 심미적 공간이나 휴양의 공간으로, 혹은 국부 증진의 대상이나 제국적 영토 욕망의 구상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주의 연구나 총독부 주도의 사회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일본인은 조선의 산악을 총독부와는 다른 층위에서 상정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강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리산 상봉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고 있다.
1920년대까지는 이와 같은 산악인식과 산행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조선일보․신간회의 생활개신운동과 조선 총독부의 건강증진운동 등으로 등산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산행의 효용성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산됐다.
서울로 돌아와서 당시 서울역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전부 깔끔한 차림으로 단장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들의 암벽등반, 알피니즘(alpinism)과 순수한 등산운동을 담고 있는 영화와 서적의 보급, 그리고 1931년 ‘조선산악회’와 1937년 ‘백령회’ 등이 창립되면서 탐승 위주의 산행에서 알피니즘적 성격의 등반이 본격 막이 오른다. 지식인들에게 산악이 낭만주의적 대자연이었다면, 알피니즘적 주체들에게는 계몽적 이성의 지배 대상이었다. 특히 조선산악회는 산악연구는 지리학․지질학․식물학․역사학 등 여러 학문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산악연구의 목적이 궁긍적으로 식민지배를 위한 지형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국부증진과 국가적 효용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남원 입구에 서 있는 장승. 남원을 지키는 장승이다. 지금도 그대로 서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산악은 국가적 효용을 다각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는 방편이자 구상물이라는 것이다. 1930년대 전후의 조선산악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투어리즘에서 알피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 당시 지리산 상봉 사진. 사진이 왼쪽으로 누워 있다.
논문을 발표한 박찬모 교수는 “조선 산악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결국 식민지 지배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면서 “일제시대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의 산악 인식차이에 이어 친 일제 성격인 ‘조선산악회’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백령회’(전재자 註 :한국산악회 전신)의 구체적 활동모습과 구성원 등에 대한 본격 연구도 하면 민족정체성이 조금 더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밝혔다.
blogs.chosun.com/pichy91/2012/11/04/일제시대-한반도-山은-제국주..
1954년 강원도 횡계스키장에서 장남 신중부 씨와 함께한 신업재 선생.
sansuyu.net/ssu/chonwb.htm 지리산 산수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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