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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집(浮査集)》 해제(解題)
- 성세(聖世)의 일민(逸民)이었던 불우한 학자 -
최석기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번역 저본의 서지 사항 및 간행 경위
이 책은 조선 중기 진주에 살던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 저본인 《부사집》은 8권 4책의 목판본으로, 판심(版心)은 ‘부사집(浮査集)’으로 되어 있으며, 사주쌍변(四周雙邊)이 있고, 반곽(半郭)은 가로 23.8㎝ 세로 17.5㎝이며, 판심(版心)에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가 있다. 또한 계선(界線)이 있고, 반엽(半葉)은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매 행은 22자로 되어 있다. 앞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서문이 붙어 있으며, 권7~권8에 부록이 추가되어 있다.
이 책은 1785년에 간행된 초간본으로 문중에 남아 있으며,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에는 복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도서번호: 811.98-성여신-부)은 권5~권6이 궐실된 것인데, 1990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국문집총간 제56책을 영인하여 간행할 적에 이 판본을 그대로 수록하여 권5~권6이 빠져 있다.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되지 못한 권5~권6은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에 소장된 것으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부사집》은 부사의 둘째 아들인 성용(成鏞)의 증손 성처회(成處會)가 부사의 유고를 수습하고, 성처회의 아들 성대적(成大勣)이 문체별로 편정하고 〈연보〉를 작성해 붙임으로써 문집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부사의 외손서인 안창한(安彰漢)의 아들 안시진(安時進)이 부사의 문인으로서 1687년경 〈언행록〉을 저술하여 성처회에게 보내, 부록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문집 간행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785년 성대적의 족질 성동익(成東益:成鏞의 5대손)과 족손 성사렴(成師濂)이 안시진의 족증손 안경점(安景漸)에게 찾아가 〈언행록〉의 교정을 부탁하는 한편, 안경점의 족인으로 당대 근기 남인계의 대학자였던 안정복(安鼎福)에게 시문집의 교정을 청하고 서문ㆍ행장ㆍ묘갈명 등을 받았다. 전에 편정해 두었던 원고에 이런 부록 문자를 첨부하여 그해 진주에서 간행하였다.
2. 저자의 생애와 학문
1) 가계 및 생애
성여신의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査),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부사는 1546년(명종1) 정월 초하룻날 자시(子時)에 진주 동쪽 대여촌(代如村) 구동(龜洞) 무심정(無心亭: 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서 성두년(成斗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 초계 변씨(草溪卞氏)는 충순위 변원종(卞元宗)의 딸이다.
부사의 집안은 고조부 성우(成祐) 때부터 진주에 살기 시작했다. 증조부 성안중(成安重)은 149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를 지냈고, 조부 성일휴(成日休)는 문장과 효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기묘사화 이후 출사를 포기하고 강호에 은거하였다. 부친 성두년은 자가 추지(樞之)인데, 유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인해 일찍 과거를 포기하였다.
부사는 8세 때부터 이모부인 조계(槽溪) 신점(申霑)의 문하에 나아가 《소학》ㆍ사서삼경 및 역사서 등을 배웠다. 신점은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으로 조용히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던 인물이다. 부사는 15세 때 진주 향교 교수로 부임한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에게 《상서》를 배웠으며, 16세~17세 때는 인근의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춘추좌씨전》 및 당송고문(唐宋古文)을 읽었다. 18세 때 사천에 살던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을 찾아가 《근사록》을 배웠으며, 21세 때에도 찾아가 학업을 익혔다. 23세 때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처럼 부사는 젊은 시절 지역의 명유들 문하를 두루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는데, 특히 구암과 남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사는 15~6세를 전후해 기초적인 서적을 다 읽고 난 뒤, 인근의 응석사(凝石寺)ㆍ쌍계사(雙磎寺) 등 사찰에서 폭넓은 독서와 문장수업에 들어갔다. 16세 때부터는 응석사에서 《춘추좌씨전》 및 유종원(柳宗元)ㆍ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 등의 고문을 탐독하였으며, 19세 때부터 부친상을 당한 23세 때까지 쌍계사에 가서 독서하였는데, 《춘추좌씨전》ㆍ《사기》 및 당송고문을 즐겨 읽었다.
23세 되던 해인 1568년 겨울 단속사에서 거접(居接)할 때, 승려 휴정(休靜)이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간행하고, 사천왕상을 새로 만들어 안치했다. 부사는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이 맨 뒤에 수록된 것에 분개하여 거접하던 유생들과 함께 승려들을 꾸짖고 책판을 불태웠으며, 사천왕상과 나한상을 끌어내 목을 잘랐다. 그리고 인근에 살던 남명 조식 선생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게 한 뒤, 다음 날 찾아가 배알하고서 《상서》를 배웠다. 이때부터 남명의 문하에 출입하여 동문들과 교유하였다. 당시 최영경(崔永慶)이 남명을 찾아왔었는데, 그때부터 교분을 맺고 종유하였다.
부사는 18세 때 관찰사가 순시하다가 치른 시험에서 〈운학부(雲鶴賦)〉를 지어 장원을 차지하였다. 19세 때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인 향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후로 수십 차례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20세 때 만호 박사신(朴士信)의 딸 밀양 박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부사는 23세 때인 1568년 11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고, 1571년 남명과 구암을 찾아뵈었다. 그러나 동년 7월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부친상을 당하기 전 두 차례나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실의에 빠졌던 것 같다. 그러나 삼년상을 마친 뒤, 응석사ㆍ쌍계사에서 경전 및 《심경》ㆍ《근사록》ㆍ《성리대전》 등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의 공부가 주로 문장가들의 고문에 치중해 있었음을 반성하고, 경전 및 성리서를 정밀히 독서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사는 36세 때인 1581년 봄 창녕 선영에 가서 성묘를 한 뒤, 창녕군수로 있던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에 의령(宜寧) 가례(嘉禮)로 이거하여 약 5년 동안 처가에서 살았다. 이때 그는 곽재우(郭再祐)ㆍ이대기(李大期)ㆍ이대약(李大約)ㆍ이종영(李宗榮) 등과 교유하며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 때 사귄 벗들과는 평생 동지적 우의를 유지하였다. 그는 40세 때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 과거를 위한 공부에만 전념하지 않고 심성수양을 다짐하였다. 44세 때인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 동문 최영경ㆍ유종지(柳宗智) 등이 억울하게 죽자 매우 애통해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산 속으로 피난하였다가 1594년에 돌아왔다. 그때 김덕령(金德齡)이 인근 월아산(月牙山)에 진을 치고 있어 함께 군사(軍事)를 논의하였다. 1595년 김덕령이 무고로 구금되자, 신원소를 올려 적극 구원하였다. 1597년 왜적이 다시 침입하여 김천(金泉)으로 피난하였다가, 곽재우가 진을 치고 있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들어가 함께 군사를 도모하였다.
54세 때인 1599년 고향으로 돌아온 부사는, 부사정 정사(浮査亭精舍)와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강호에 묻혀 지내는 은일의 삶을 지향한다. 한편 남명의 문인으로서 덕천서원을 중건하는 일에 동참하였으며, 동문 최영경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리는 데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남명이 정한 예를 가지고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예속을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 부사는 이 시기에 경세적 포부를 접고 강호에 은거하는 삶을 지향하지만, 사인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부사는 1602년 최영경을 신원하는 소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서회(鷄黍會)를 결성하였다. 이 계서회는 부사와 이대약ㆍ이종영이 주축이었다. 이 가운데 이종영은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속록(續錄)에 들어 있는 남명의 문인이며, 이대약은 최영경ㆍ하항(河沆)ㆍ정인홍(鄭仁弘)에게 배운 이대기의 동생이다. 이들은 모두 부사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불우한 사류로서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다. 부사는 이 계서회의 모임을, 뜻을 얻지 못하여 물러나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사귐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부사는 64세 때인 1609년 생원ㆍ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또한 1613년 68세의 나이로 문과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궤우지로(詭遇之路)’를 써 보라는 관인의 말을 듣고서 “지금 너의 말을 듣고 보니 세도를 알 만하다. 더구나 시사가 안정되지 못하여 삼강이 무너지려 하니, 과거에 합격한들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고서, 곧바로 귀향하였다. 당시의 정국은 이이첨(李爾瞻) 등이 토역(討逆)을 주장하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단하자는 논의가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였는데, 부사의 말은 이런 집권층의 처사를 삼강오륜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아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부사는 현실과의 불화가 깊어져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산수 유람에 빠져들었다.
1614년 정온(鄭蘊)이 갑인봉사(甲寅封事)를 올렸다가 옥에 갇히자, 부사는 오장(吳長)ㆍ이회일(李會一)ㆍ이각(李殼) 등과 함께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만년에는 정인홍과 절교한 박민(朴敏, 1566~1630)과 가까이 지냈는데, 이 시기부터 집권층인 대북 정권에 동조하지 않고 중북의 입장에 섰던 듯하다.
부사는 71세 때인 1616년 9월 24일부터 10월 8일까지 15일 동안 하동을 거쳐 쌍계사ㆍ불일암(佛日庵)ㆍ신응사(神凝寺)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동행한 사람이 정대순(鄭大淳)ㆍ강민효(姜敏孝)ㆍ이중훈(李重訓)ㆍ박민(朴敏)ㆍ문홍운(文弘運) 및 맏아들 성박(成鑮)과 넷째 아들 성순(成錞)이다. 이들은 팔선(八仙)이라 자칭하였는데, 성여신은 부사소선(浮査少仙), 정대순은 옥봉취선(玉峯醉仙), 강민효는 봉대비선(鳳臺飛仙), 이중훈은 동정적선(同庭謫仙), 박민은 능허보선(凌虛步仙), 문홍운은 매촌낭선(梅村浪仙), 성박은 죽림주선(竹林酒仙), 성순은 적벽시선(赤壁詩仙)이라 불렀다. 이 유람이 신선들의 놀이였기 때문에 부사는 이 유람록을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라고 이름을 붙였다.
부사는 72세 때인 1617년 4월 이삼성(李三省)ㆍ박민ㆍ강윤(姜贇)ㆍ하장(河璋)ㆍ조경(曺炅)ㆍ하선(河璿)ㆍ최기(崔屺)ㆍ정위(鄭頠)ㆍ성박(成鑮)ㆍ박성길(朴成吉)ㆍ정시특(鄭時特)ㆍ최후식(崔後寔)등과 다시 지리산을 유람하였으며, 78세 때인 1623년에도 조겸(趙㻩)ㆍ진량(陳亮)ㆍ김옥(金玉)ㆍ조후명(曺後明) 등과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부사는 1622년 하징(河憕)ㆍ조겸ㆍ박민 등과 함께 《진양지(晉陽誌)》를 최초로 편찬하였다. 부사는 1632년 11월 1일 부사정에서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사에 대한 후인들의 인물평을 통해 인물 성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조임도(趙任道)는 만사에서 “문장과 글씨 당대 제일이었네.〔翰墨當年第一人〕”라고 하였으며, 정달겸(鄭達謙)은 만사에서 “문장으로 당대를 놀라게 한 지 구십 년.〔驚代文章九十年〕”이라 하였으며, 하홍도(河弘度)는 제문에서 “문장은 샘물처럼 솟구쳤으며, 글씨는 안진경의 생동하는 서체를 사모했네.〔文辭湧其如泉 字慕魯公之龍蛇兮〕”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부사는 당대 진주 지역에서 문장과 글씨 모두 제일로 칭송되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안정복이 지은 〈묘갈명〉에는 “아, 선생이시여. 성스러운 세상의 일민(逸民)이셨네. 젊어서 어진 스승을 만나, 도학의 진면목을 깊이 즐기셨네. 학문은 마음에 근본을 두어, 경(敬)과 의(義)를 함께 병행했네. 행실이 몸에 드러났으니, 효제충신이었네. 교화가 향리에 행하니, 가르침이 젊은 유생들에게 젖어들었네. 뛰어난 재능과 빼어난 기량을 지니고서, 산림에 자취를 숨겼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백성들 복이 없었도다.”라고 하였다.
안정복은 부사에 대해,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도학자이며, 마음에 근본을 두고 경의를 함께 실천한 유학자이며, 향리에 교화를 베푼 교육자이며, 빼어난 경세적 재능을 지녔지만 뜻을 펴지 못한 일민이었다는 점을 인물 성격으로 드러내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부사는 문장과 글씨가 당대 그가 살고 있던 지역에서 최고였던 인물이었으며, 경(敬)ㆍ의(義)를 함께 실천한 유학자로서 경세적 재능을 지니고서도 세상에 쓰이지 못한 인물로 정리할 수 있겠다.
2) 사회적 역할
부사의 사회적 역할은 아래와 같이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리학적 이념을 굳게 견지하여 불교를 배척한 것이다. 부사는 23세 때인 1568년 10월 지역에서 선발된 9명의 유생들과 단속사에서 거접할 때, 승려 휴정이 편찬한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이 맨 뒤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책판을 불태우고 나한상과 사천왕상을 끌어내 목을 잘랐다. 그것은 유가의 도를 헐뜯고 선비들을 모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명종 때 승려 보우(普雨)가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불교가 다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리학적 이념에 투철했던 젊은 선비들은 불교가 다시 부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니, 부사의 행동은 당대 사림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 시기는 선조가 갓 즉위하여 사림 정치가 열리던 시대였으니, 명종 때 위축되었던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부사는 분개하여 과격한 행동을 하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 신진 사림으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하고자 한 그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신원을 청한 것이다. 부사는 1595년 진주 유생을 대신하여 체찰사에게 김덕령 장군의 신원을 위해 상서하였으며, 1596년에는 김덕령 장군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2년 봄에는 정온(鄭蘊)ㆍ이육(李堉) 등과 함께 기축옥사 때 억울하게 화를 당한 최영경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으며, 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영암에 부처(付處)된 곽재우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1614년에는 갑인봉사를 올렸다가 화를 당하게 된 정온을 구원하기 위해 이대기ㆍ오장(吳長) 등과 함께 소를 올려 신구하였다.
부사는 이런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셋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도와 함께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1594년 김덕령 장군이 인근에 와서 진을 치자 본가로 돌아와 함께 군사를 의논하였으며, 1597년 김천으로 피난하였다가 곽재우 장군이 화왕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군사를 의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 및 그들의 활약상을 기리는 글과 김시민 장군이 진양성을 온전히 지켜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넷째,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풍속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우선 후학들을 가르쳐 학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임무로 여겼으며,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이 불에 타 훼손된 것을 동문들과 함께 중건하였다. 또한 자신이 사는 마을의 동약(洞約)을 만들어 상부상조하는 풍속을 일으키려 하였다.
다섯째, 지방 문화에 관심을 갖고 지방지를 편찬한 것이다. 부사는 77세 때인 1622년 지역의 인사들과 함께 《진양지》를 처음으로 편찬하였다.
3) 학문 성향과 문학관
부사의 학문은 구암 이정을 통해 계발된 효제충신의 도와 남명 조식을 통해 전수된 경의(敬義)로 요약될 수 있다. 구암은 그에게 유학의 근본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남명은 성리학과 심성수양의 요체를 일러주었다. 부사는 이 두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로 융합하여, “효제충신은 경의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경의는 효제충신이 아니면 확립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조선 성리학은 사화기를 거치면서 학자들이 재야에서 위기지학에 전념하여 도덕성을 드높이기 위해 심성수양을 중시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학문 성향을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남명 조식이다. 남명은 성리학이 꽃피는 16세기 중반에 심성수양을 통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론적 탐구에 치중하는 당시의 학풍을 경계하여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말한다.”라고 하면서, 인사(人事)에서 천리를 구하지 않으면 실득이 없다고 하였다.
부사의 학문 성향도 남명의 이런 학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는 “학자들이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인(天人)의 이치를 말하며, 겉으로는 근엄하고 공손한 체하면서 안으로는 방탕하고 게으르다.”라고 하여, 당시 학자들이 일상의 실천을 외면한 채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함부로 말하는 병폐를 비판하였다. 부사가 퇴계의 문인인 구암에게 수학했으면서도 성리설을 전개한 것이 없는 것은 남명의 이런 학문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부사의 학문 성향이 남명의 학문과 유사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남명과 마찬가지로 광박한 학문을 추구하여 산수ㆍ병진(兵陣)ㆍ의약ㆍ천문ㆍ지리 등에 모두 마음을 두고 궁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부사는 학문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자들은 경전에서 널리 구하고, 백가의 글에 널리 통해야 한다. 그런 뒤에는 번다한 것을 수렴하여 간결하게 해서 자신에게 돌이켜 요약하는 데로 나아가서 스스로 일가의 학문을 이루어야 한다.
이 말은 정인홍이 지은 남명의 〈행장〉에 있는 내용과 거의 같다. 이는 부사가 문인들에게 강조한 것으로, 그 역시 이와 같은 학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사의 이와 같은 학문관은 퇴계 이후 주자만을 존신하는 쪽으로 경도된 일반적인 학문 성향과 변별되는 성향으로, 남명의 학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부사는 거듭 과거시험에 낙방하자,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41세 때 지은 〈학일잠(學一箴)〉을 보면,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과 맹자(孟子)의 ‘양호연지기(養浩然之氣)’와 자사(子思)의 ‘유일(惟一)’을 마음에 새기며 밤낮으로 고요히 심성수양을 다짐하고 있다. 이 잠의 말미에 “나의 천군(天君)을 섬겨, 마음을 전일하게 함을 주로 해 흩어짐이 없게 하라.”라고 한 것은, 성리학의 경공부(敬工夫)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군’은 ‘마음’을 비유한 것으로, 남명의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보이는 ‘천군’이다. 이 역시 남명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부사는 40세 이후 강호에 물러나 은거하는 삶 속에서 그의 학문은 심성을 수양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69세 때 자식들을 위해 〈성성재잠(惺惺齋箴)〉을 지었는데, 이 역시 심성수양의 두 축인 존양(存養)ㆍ성찰(省察)의 요지를 뽑아 만든 것이다. 이 잠에서도 남명의 경ㆍ의로 요약되는 수양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는 일신(一身)의 주인을 심(心)으로 보고, 일심(一心)의 주인을 경(敬)으로 본다. 그리고 이를 지키는 방법으로 ‘성성(惺惺)’을 거론하였다. ‘성성’은 송유(宋儒) 사량좌(謝良佐)가 제시한 경공부의 하나로, 남명이 〈신명사도〉에서 ‘혼(昏)ㆍ몽(夢)’과 상대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또 이 잠에는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방법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듯이〔鷄伏卵〕’와 ‘고양이가 쥐구멍을 지키고 있듯이〔猫守穴〕’를 인용하고 있는데, 전자는 남명이 삼가(三嘉) 토동(兎洞)에 세운 ‘계부당(鷄伏堂)’의 당호의 의미와 같으며, 후자는 선가(禪家)의 말을 빌어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공부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부사의 학문이 남명의 경의학에서 연원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자료가 〈삼자해(三字解)〉이다. 이 〈삼자해〉는 부사가 62세 때 쓴 글로, 만년의 삶의 지표였다. 이 글에서 그는 삶의 세 가지 지표로 직(直)ㆍ방(方)ㆍ대(大)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의 효사(爻辭)에서 취한 것이다. 직(直)은 경(敬)에, 방(方)은 의(義)에, 대(大)는 성(誠)에 달려 있다고 보아 경을 심지주(心之主)로, 의를 사지주(事之主)로, 성을 신지주(身之主)로 삼았다. 남명은 곤괘 문언(文言)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를 취해 자신의 경의학을 수립하였는데, 부사는 곤괘 육이효 효사의 ‘직(直)ㆍ방(方)ㆍ대(大)’를 바탕으로 직(直)ㆍ방(方)과 관련된 경ㆍ의는 물론 대(大)를 성(誠)과 연관 지어 자신의 학문 성격을 특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런 학문 성향은 만년에 완성된 것이다.
부사는 젊은 시절 대부분 과거를 위한 독서와 문장 수업으로 보냈다. 곧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서 경세제민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포부 외에 또 문학으로 성취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포부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술회하면서, “나는 일찍이 두공부(杜工部)로 자신을 비유하고, 직(稷)ㆍ설(契)의 말로 삼가 나에게 비의했다.”라고 하였다. 곧 두보(杜甫)처럼 시대와 민생을 걱정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고, 순(舜) 임금 조정의 농사를 담당했던 후직(后稷) 또는 교육을 담당했던 설(契)과 같은 인물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포부는 결국 자신을 구속하는 장애요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을 높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부사는 만년에 자아와 세계의 괴리를 인식하고 자신의 포부를 접은 채 은일의 삶을 지향하였다. 그래서 그는 안연(顔淵)과 같은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하기도 하였는데, 〈도초사(舠樵辭)〉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강호에 한 늙은이 살고 있는데 / 江湖有一翁
학문을 해도 시대에 맞지 않아 / 學焉而不適於時
십 년 동안 비파 잡고 지내다 보니 / 十年操瑟兮
귀밑머리 하얗게 세고 바람만 쓸쓸하네 / 兩鬢華髮風蕭蕭
농사를 지어도 풍년을 만나지 못해 / 耕也而不逢於年
쌀독에는 남아 있는 쌀이 없어서, / 甁無儲粟兮
안자처럼 빈한한 삶 굶주리는 날만 느는데 / 一瓢顔巷日空高
걱정 없이 생업을 경영 않고 그럴 생각도 없이 / 休休焉無營無思
고서만 펴놓고 읽으면서 자득해 하네. / 對黃卷而囂囂
이 글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본떠 지은 것으로, 강호에 은거하는 삶의 지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글에서 부사는 안회(顔回)의 안빈낙도를 다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부사의 학문 성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부사는 젊어서 두보 같은 인물이 되고자 하는 문학적 지향을 하였고, 또 당대 진주 일대에서 제일의 문장으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적 성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 사림파의 문학관을 견지하고 있다. ‘시는 성정(性情)이 발하여 소리가 된 것으로……성정지정(性情之正)을 드러내야 한다.’라는 그의 시론은, 주자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는 생각이 성정에서 나와 조화자연의 기미를 참조하고, 읊조리는 것이 사물의 이치를 드러내 만변무궁의 지취(志趣)를 모범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당시(唐詩)의 화려함이나 송시(宋詩)의 섬세함을 탈피하여 아정(雅正)하고 평담(平淡)한 것을 추구하였는데, 특히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를 본받고 있다.
한유는 변려문의 부화한 문장을 반대하고 박실한 고문을 주장한 사람이며, 구양수는 이상은(李商隱)의 서곤체(西崑體)를 반대하고 고문의 방법으로 시를 쓰는 새로운 풍격을 이룩한 사람이다. 구양수가 새로 이룩한 시풍은 당송고문과 마찬가지로 형식미보다는 내용미를, 화려함보다는 풍격을 중시하며 이론의 전개나 서사적인 서술도 피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부사는 한유와 구양수를 전범으로 함으로써, 기고(奇高)하고 부화(浮華)하기보다는 이아(爾雅)하고 평담(平淡)한 것을 주로 하여 이치를 수승(殊勝)하게 하는 문예의식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부사의 문학에 대해, 후대 박태무(朴泰茂, 1677~1756)는 “넉넉하고 법도에 맞으며 맑고 아름답고 반듯하여 전혀 경박하고 각박한 기상이나 조탁하고 수식한 자태가 없다.”라고 평하면서 평평한 길을 법도대로 달리는 것에 비유하였다. 또 안정복(安鼎福)은 “공의 시문은 호건(豪健)하여 이치가 있다.”라고 평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부사의 문학적 성향은 한유와 구양수를 전범으로 하여 아정평담(雅正平淡)함을 주로 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3. 문집의 체제 및 내용
1) 문집의 체제
《부사집》은 8권 4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서문과 목록이 실려 있다. 권1~권2는 시(詩)와 사(辭)ㆍ부(賦), 권3은 소(疏)ㆍ서(書)ㆍ서(序)ㆍ발(跋)ㆍ기(記), 권4는 상량문(上樑文)ㆍ잠(箴)ㆍ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ㆍ비명(碑銘)ㆍ묘지(墓誌)ㆍ제고축문(祭告祝文), 권5~권6에는 잡저, 권7~권8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이를 문체별로 보다 상세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권별 | 문체별 | 편수 |
권두 | 서문 | 1편 |
목록 | 1편 |
권 1 | 오언절구 | 14수 |
오언율시 | 10수 |
오언고시 | 5수 |
육언절구 | 1수 |
칠언절구 | 96수 |
권 2 | 칠언율시 | 22수 |
칠언고시 | 8수 |
사(辭) | 1수 |
부(賦) | 2수 |
권 3 | 소(疏) | 1편 |
서(書) | 6편 |
서(序) | 2편 |
발(跋) | 1편 |
기(記) | 7편 |
권 4 | 상량문(上樑文) | 3편 |
잠(箴) | 3편 |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 | 20수 |
비명(碑銘) | 2편 |
묘지(墓誌) | 1편 |
제고축문(祭告祝文) | 7편 |
권 5 | 잡저(雜著) | 10편 |
권 6 | 잡저 | 2편 |
권 7 | 부록(附錄) | 세계도, 연보 |
권 8 | 부록 | 언행록, 행장, 묘지명병서, 만사, 제문, 봉안문, 상향문 |
2) 내용 및 특징
권1~권2에 수록된 시는 대개 만년의 작품으로 모두 150여 수 정도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절구가 110수나 된다. 이를 보면 부사는 율시보다 절구를 즐겨 지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부화한 것을 싫어한 그의 문학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부사의 시세계에 나타난 특징을 정리해 보면, 첫째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펴 보지 못한 한이 서려 있으며, 둘째 만년에 불화가 극대화되어 선계(仙界)를 유람하는 선취경향(仙趣傾向)을 보이고 있으며, 셋째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사의식이 표출되어 있으며, 넷째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안빈낙도의 정신이 들어 있으며, 다섯째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며 지은 역사에 대한 회고가 많이 담겨 있다.
첫째, 이상과 포부를 펴보지 못한 한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오언절구로 된 〈섭빈음(鑷鬢吟)〉의 서문에서 자신은 두보(杜甫) 같은 시인이 되고자 했고 후직(后稷)이나 설(契)처럼 공업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런 포부가 이미 어긋났다는 점을 말하고, 이어 만년에는 신선이 되기를 구했지만 그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면서 “설(契) 등에 비유한 것 헛된 말이 되었고, 신선이 되길 구한 것도 이룩하지 못했네. 요순시대로 만들고자 했던 포부 이미 어긋났으니, 귀밑의 흰 머리털 뽑기를 그만두었네.”라고 읊조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빚어진 불화를 단적으로 드러낸 시이다.
이런 그의 심경을 가장 잘 표현한 시가 〈아유일가(我有一歌)〉이다. 이 시는 모두 5장으로 된 오언고시체의 연작시로, 매 장은 20구로 되어 있다. 제1장부터 제4장까지는 시인이 자신의 재주를 거문고ㆍ옥ㆍ장검ㆍ천리마에 비유하면서 이런 재주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한하였고, 제5장은 세상에 쓰이지 못해 자연에 묻혀 사는 자신의 빈한한 삶을 노래하였다. 이 가운데 네 번째 시를 인용해 본다.
나에게 한 마리 천리마가 있으니 / 我有一良驥
덕으로 기르고 힘으로 다루지 않네 / 以德不以力
어떤 이는 이 말이 악와(渥洼)에서 왔다 하고 / 或云渥洼來
어떤 이는 이 말이 형하(濚河)에서 왔다 하네 / 或云瀠河躍
두 귀는 가을 대나무를 벤 듯이 삐죽하고 / 兩耳批秋竹
두 발굽은 차가운 옥을 자른 듯 단단하네 / 雙蹄削寒玉
예천(醴泉)의 물을 목마른 듯이 마시고 / 醴泉水渴飮
옥산(玉山)의 곡식을 주린 듯 먹어 치우네 / 玉山禾飢食
달리고자 하면 하루에 천리 길을 가고, / 欲騁千里途
팔고자 하면 연성(連城)의 가치일세. / 欲買連城直
그런데 세상 사람들 천리마를 몰라보고, / 世人昧天才
모두 한통속으로 용렬한 말로만 보네. / 滔滔視之劣
세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값이 싼 말, / 所好就價微
보잘 것 없는 노둔하고 졸렬한 말이라네 / 駑駘之齷齪
방성(房星)은 부질없이 빛나고 / 房星空熒熒
용매(龍媒)는 마구간에서 늙어가네 / 龍媒老槽櫪
가을바람 불어오는 기나긴 밤에는 / 秋風吹永夜
허기져 머리 들고 울며 서성거리네 / 仰秣鳴跼踖
손양(孫陽)은 어느 곳에 있는가 / 孫陽在何處
고개 떨구고 소금수레에 엎드려 있네 / 垂首鹽車服
이 시는 자신이 천리마의 재주를 지니고 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시골에 묻혀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부사는 중년 이후 이런 탄식을 자주 하였다. 인근에 있는 청곡사(靑谷寺)를 둘러보고 쓴 〈유청곡사(遊靑谷寺)〉 두 번째 시에서도 “젊은 시절 학문을 연마한 곳 바로 이 산중, 굶주리며 부지런히 공부한 것 부질없이 되었네. 만사가 지금은 한바탕 꿈이 되었으니, 백발로 추풍을 대하기가 부끄럽구나.”라고 하였다.
둘째, 선유(仙遊)를 통한 선취경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자신의 포부를 펴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사의 불화는 1613년 대북 정권의 노선에서 이탈한 뒤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잠시 현실을 떠나 선계를 찾아 나서는 선취경향을 보인다. 산수벽이 있던 그에게 극대화된 불화는 급기야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선유의 길로 나서게 하였다. 그는 71세 때인 1616년 가을 15일 동안 쌍계사 등지를 유람하였는데, 곤양(昆陽) 땅을 지나면서 “나는 이 세상의 사람, 애초 물외의 사람이 아니었네. 가을바람에 높은 흥취 일어나니, 신선을 배우는 사람이 되리라.”라고 읊었다. 또 정대순(鄭大淳)의 시에 화답하면서 “이 한 몸 이미 늙었으니, 온갖 계책 긴 탄식만 자아낼 뿐. 소매 떨치고 진(眞)을 찾아 나서는 길, 아름다운 약속 어기지 않아 기쁘네.”라고 하였다.
부사는 이런 마음으로 쌍계사ㆍ신응사 등지를 둘러보면서 신선세계에 매료된 듯한 의식을 보인다. 쌍계사에 이르러서는 “선원(仙源)으로 가고픈데 어느 곳일까, 향로봉 위에서 고운(孤雲)을 부르리라.”라고 노래하였으며, “난새를 곁말로 삼청(三淸)에 가려 하니, 누가 학을 타고 나와 함께 가려나.”라고 읊조렸으며, 불일폭포 근처 고령대(古靈臺)에 올라서는 “홍애(洪崖)를 좌로 하고 부구(浮丘)를 우로 하도다, 고운을 부름이여 진결을 묻노라.”라고 선유사를 지었다. 이런 시구를 보면 그 당시 부사는 신선이 되기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현실권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는 사의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유람을 마치고 돌아올 적에 불화가 어느 정도 해소되어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새롭게 자각하는 현실인식을 보인다. 그는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평생토록 경세제민 꿈꾸지 않았다면, 학을 몰고 난새를 곁말로 할 수 있었으리.”라고 노래하면서, 사인으로서의 경세적 본분을 환기시켰다. 그는 유람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사인의 한 몸은 경세제민을 그 계책으로 삼고, 사인의 한 마음은 남과 함께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으로 지향을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산에는 어찌 들어갈 수 없겠으며, 신선은 어찌 배울 수 없겠는가?
현실세계에서 뜻을 얻지 못하여 현실권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는 사인으로서의 책무를 다시 각성한 것이다. 현실을 떠난 지식인은 유가에서 결신난륜(潔身亂倫)의 무리로 지탄한다. 즉 자신만 깨끗하기를 추구하여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부사가 현실의 불화 때문에 선계를 찾았지만, 그는 끝내 신선이 되기를 구하지 않고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사림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아 각성이 뚜렷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부사는 자신의 선유를 “이름은 선(仙)이지만 실제는 선이 아니다.”라고 그 의미를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런 사의식은 그가 최치원을 ‘유선(儒仙)’으로 부른 것이나, 경주에 가서 김시습(金時習)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그가 선가(禪家)로 도피한 것 누가 알리 그 속내를, 단지 옛 임금을 위해 끝내 잊지 못한 것일 줄을.”이라고 노래한 것이나, 곽재우에 대해 “솔잎 먹으며 신선술 일삼은 것 말하지 말라, 유후(留侯)가 어찌 신선을 배운 사람이리.”라고 노래한 데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부사의 선취는 신선세계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유학자로서 선유를 즐긴 ‘유선적 선취(儒仙的 仙趣)’ 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넷째, 은거하여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안빈낙도 정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아유일가〉 제5수는 앞의 4수와는 달리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자연에 묻혀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그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나에게 한 칸의 초가집이 있으니 / 我有一間屋
띠풀 집 집안이 항상 적막하구나 / 茅簷長寂寂
사람들은 천만 칸의 집을 좋아하지만 / 人喜千萬間
나는 무릎 펼 만한 이 집을 기뻐하네 / 我喜僅容膝
남들은 금과 비단 쌓아두길 좋아하지만 / 人喜積金帛
나는 한 섬 곡식을 비축한 것도 기쁘네. / 我喜貯甔石
시렁 위에 쌓인 만 권의 책 속에는, / 牀上萬卷書
요ㆍ순ㆍ공자ㆍ맹자의 말씀이 들어 있네 / 堯舜孔孟說
창가에 있는 다섯 이랑 정원에는 / 窓邊五畝園
설중매와 푸른 대가 심어져 있네 / 寒梅與綠竹
때가 되면 강가의 밭을 갈아 / 時耕江上田
벼와 삼, 콩과 보리를 심네 / 禾麻雜菽麥
때론 강에 나가 물고기를 낚기도 하니 / 時釣滄江魚
은빛 붕어와 누런 잉어, 그리고 쏘가리 / 銀鯽黃鯉鱖
집안에서 자손들을 가르치다 보니 / 室中敎仔孫
하루 종일 굶주림과 목마름을 잊네 / 昕夕忘飢渴
바라는 바는 질병이 없는 것 / 望以無疾病
힘쓰는 바는 과실이 적은 것 / 勉以少過失
이와 같이 남은 생을 보낸다면 / 如斯送餘年
길이 끝나도 통곡을 면할 줄 알리 / 途窮知免哭
이 시는 자신의 재주와 포부를 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개탄을 노래한 앞의 4수와는 달리,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만년의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부사의 삶의 자세는 78세 때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뒤 쓴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86개의 입성(入聲) 운자로 쓴 172구의 장편고시로, 구양수의 〈여산고(廬山高)〉와 한유의 〈남산시(南山詩)〉를 본떠 지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자는 선유를 통해 얻은 정신적 청량감을 한껏 과시하고 나서 “고금의 인물이 같고 다른지는 내 모르지만, 다만 조물주와 한무리 되어, 산천의 언덕을 소요하기도 하고, 인간 세상에 마음껏 노닐기도 하니, 구애됨도 없고 얽매임도 없구나.”라고 노래하여, 만년의 걸림이 없는 삶의 지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부사는 만년에 현실세계에서 오는 불화를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극복하면서 자유로운 정신적 여유를 얻은 듯하다. 그는 만년에 선(仙)과 속(俗)을 물외와 현실의 영역에서 찾지 않고 마음속 진(眞)의 세계를 찾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금천구곡(琴川九曲)을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武夷九曲)보다 못할 것이 없는 선구(仙區)로 여기며, 자연과 조화된 참된 즐거움을 찾았다. 이런 정서를 담은 시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노래한 〈구곡시(九曲詩)〉 9수와 〈양진당팔영(養眞堂八詠)〉 8수를 눈여겨 볼만하다.
다섯째, 유적지를 돌아보며 역사를 회고하는 역사인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젊은 시절 역사서를 즐겨 읽었으며, 노년임에도 《진양지》 편찬을 주도할 정도로 역사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하고 신라의 역사를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고, 평양을 둘러보고 12수의 절구를 남겼다. 이 외에도 〈동도회고(東都懷古)〉ㆍ〈서도회고(西都懷古)〉ㆍ〈용장사(茸長寺)〉 등 역사를 회고한 시가 몇 수 더 있다. 부사가 남긴 150여 수의 시 가운데 영사시가 40여 편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의 역사인식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영사시는 민속이나 역사를 노래한 악부시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 시편들에는 역사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구제하려는 경세사상이 들어 있다.
이상에서 권1~권2에 실린 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권2의 말미에는 〈도초사(舠樵辭)〉ㆍ〈화횡황아병중술회부(和鐄黃兒病中述懷賦)〉ㆍ〈차별지부증별김동리윤안(次別知賦贈別金東籬允安)〉 등 3편의 사(辭)ㆍ부(賦)가 실려 있다. 〈도초사〉는 뜻을 얻지 못한 사인으로서 안회(顔回)처럼 안빈낙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글이고, 〈화횡황아병중술회부〉는 셋째 아들의 병중에 자신의 공부한 내력과 과거에 실패한 것 등을 돌아보며 아들에게 마음을 잘 조섭할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차별지부증별김동리윤안〉은 1611년 지은 것으로, 한유(韓愈)의 〈별지부송양의지(別知賦送楊儀之)〉에 차운하여 김윤안(金允安)을 전별한 글이다.
권3에는 소(疏)ㆍ서(書)ㆍ서(序)ㆍ발(跋)ㆍ기(記)가 실려 있다. 소는 〈양전시진폐소(量田時陳弊疏)〉 1수가 실려 있는데, 양전(量田)할 적에 눈으로 목격한 폐단에 대해 상소한 글로 그의 경세제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서(書)는 〈대김장군덕령상체찰사이공원익서(代金將軍德齡上體察使李公元翼書)〉 등 6편이 실려 있다. 발은 〈연주시발(聯珠詩跋)〉 1편이 실려 있고, 기는 〈양직당기(養直堂記)〉 등 7편이 실려 있다. 〈연주시발〉은 원나라 때 만든 당ㆍ송의 대표적 시를 뽑아 평석을 붙인 《당송천가연주시격(唐宋千家聯珠詩格)》에 발문을 단 것으로, 부사의 시론(詩論)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기문 가운데 〈진양전성기(晉陽全城記)〉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온전히 보존한 김시민 장군의 공적을 드러낸 것이다.
권4에는 상량문 4편, 잠(箴) 3편, 우리나라 역대 현인을 칭송한 20수의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 비명(碑銘) 2편, 묘지(墓誌) 1편, 제고축문(祭告祝文) 7편이 실려 있다.
3편의 잠은 〈학일잠(學一箴)〉ㆍ〈만오잠(晩寤箴)〉ㆍ〈성성재잠(惺惺齋箴)〉으로, 부사의 학문정신이 심성수양의 실천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방제현찬〉은 우리나라 현인 20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학문과 덕을 칭송한 시이다. 신라 시대 인물로는 최치원(崔致遠), 고려 시대 인물로는 정몽주(鄭夢周)ㆍ길재(吉再)ㆍ서병(徐甁)ㆍ이집(李集)ㆍ김주(金澍)ㆍ원천석(元天錫) 등 6인, 조선 시대 인물로는 김종직(金宗直)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일손(金馹孫)ㆍ서경덕(徐敬德)ㆍ정희량(鄭希良)ㆍ김정(金淨)ㆍ성수침(成守琛)ㆍ송인수(宋麟壽) 등 13인이 들어 있다. 고려 시대 인물 6인의 찬 뒤에 후지가 붙어 있고, 조선 시대 인물 13인의 찬 뒤에도 후지가 붙어 있는데, 이들에 대해 찬을 쓴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려 시대 인물 가운데 서병ㆍ이집ㆍ김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신라ㆍ고려 시대 인물 7인의 찬 뒤에 붙은 후지에 의하면, 최치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일 뿐 아니라 속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언급하였고, 정몽주와 길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도학을 연 성리학의 종장임을 드러냈다. 나머지 서병과 이집은 충성을, 김주와 원천석은 고려가 망하자 이조를 등진 점을 각각 들었다. 부사는 오운(吳澐, 1540~1617)이 편찬한 《동사찬요(東史簒要)》에서 이 네 사람의 사적을 보고 그들에 대해 전해지는 것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충절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이들의 찬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 시대 인물 13인에 대한 후지에 의하면,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ㆍ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연원을 우선 중시하여 언급하고, 김일손은 정충(貞忠)한 점을, 정희량은 기미(機微)를 안 점을 들었다. 그 이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남명 조식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남명ㆍ구암은 부사의 스승이기 때문에 자기 스승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사집》 권6에 실린 〈종유제현록〉을 보면, 남명ㆍ구암 등 스승으로부터 종유했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인적 사항을 차례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를 두고 미루어 보면, 남명이 퇴계와 동갑이지만 자신이 배운 스승이기 때문에 퇴계까지만 거론하고 남명은 넣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사의 학문 성향은 남명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성리학이 발양하던 시기에 남명처럼 수양론 위주의 학문을 택하였다. 그렇다면 부사가 우리나라 도학의 연원을 거론할 때 남명을 그 도통에 위치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왜 넣지 않은 것일까? 여전히 의문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그 뒤에 실린 비명ㆍ묘지는 김시민ㆍ강덕룡(姜德龍) 장군에 관한 전기이다.
권5에는 잡저로 〈삼자해(三字解)〉ㆍ〈칠의와설(七宜窩說)〉ㆍ〈경계책(經界策)〉ㆍ〈문계기무론(聞鷄起舞論)〉ㆍ〈문(問)〉ㆍ〈계서약록서(鷄黍約錄序)〉ㆍ〈계서약록기(鷄黍約錄記)〉ㆍ〈계서록(鷄黍錄)〉ㆍ〈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ㆍ〈금산동약병서(琴山洞約幷序)〉 등이 실려 있다.
〈삼자해〉는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에 나오는 ‘직(直)ㆍ방(方)ㆍ대(大)’를 ‘경(敬)ㆍ의(義)ㆍ성(誠)’에 연관시킨 것으로, 부사가 추구한 학문의 요체를 드러낸 글이다. 〈경계책〉은 사마시의 시권(試券)으로 토지 제도와 세금 문제를 논한 것이며, 〈문계기무론〉도 시권으로 중국 진(晉)나라 때 조적(祖逖)의 고사를 통해 초야의 사인이 재능을 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함을 논한 글이며, 〈문(問)〉도 시권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성의정심(誠意正心)하여 존양성찰(存養省察)한 사람을 군자라고 정의하고서, 공자 문하에서 남궁괄(南宮适)ㆍ복부제(宓不齊)를 그런 군자라고 논한 글이다.
〈계서약록기〉는 부사와 이대약(李大約)ㆍ이종영(李宗榮) 등이 매년 봄ㆍ가을에 만나는 계서회의 모임을 결성하게 된 배경을 기록한 글이고, 〈계서록〉은 그 실제 모임을 기록해 놓은 글이다. 〈방장산선유일기〉는 1616년 정대순(鄭大淳)ㆍ박민(朴敏) 등 자칭 팔선(八仙)과 함께 쌍계사 방면을 유람하고 남긴 장편의 유람록이다. 〈금산동약병서〉는 부사가 살던 금산 마을에 자신이 만든 향약을 시행한 내력과 그 규약을 기록해 놓은 글이다.
권6도 잡저로 〈종유제현록(從遊諸賢錄)〉과 〈침상단편(枕上斷編)〉이 실려 있다. 〈종유제현록〉은 스승 남명ㆍ구암ㆍ약포로부터 종유했던 인물들을 대략 기록해 놓은 글로, 그의 사승 및 교유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맨 앞에 남명ㆍ구암ㆍ약포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 인물에 대해서만 ‘선생’으로 표기하여 사승 관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가 어려서 배운 신점(申霑)에 대해서는 ‘조계 신공(槽溪申公)’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 뒤로는 공(公)으로 칭하거나 성과 호만 기록해 놓았다. 그 뒤에 실린 인물로는 박승임(朴承任)ㆍ최영경(崔永慶)ㆍ정구(鄭逑)ㆍ곽재우(郭再祐)ㆍ이제신(李濟臣)ㆍ강심(姜深)ㆍ하항(河沆)ㆍ박제인(朴齊仁)ㆍ이로(李魯)ㆍ이염(李琰)ㆍ유종지(柳宗智)ㆍ이광우(李光友)ㆍ김덕령(金德齡)ㆍ이정(李瀞)ㆍ이대기(李大期)ㆍ이천경(李天慶)ㆍ하응도(河應圖)ㆍ진극경(陳克敬)ㆍ하항(河恒)ㆍ신가(申檟)ㆍ하징(河憕)ㆍ김윤안(金允安)ㆍ정승윤(鄭承尹)ㆍ한계(韓誡)ㆍ최여경(崔餘慶)ㆍ강언평(姜彦平)ㆍ강덕룡(姜德龍)ㆍ이흘(李屹)ㆍ이대약(李大約)ㆍ하천주(河天澍)ㆍ김우옹(金宇顒)ㆍ조종도(趙宗道)ㆍ정온(鄭蘊)ㆍ오장(吳長)ㆍ박민(朴敏)ㆍ한몽삼(韓夢參)ㆍ조임도(趙任道)ㆍ하홍도(河弘度)ㆍ하진(河溍)ㆍ정윤목(鄭允穆)ㆍ이육(李堉)ㆍ이각(李殼)ㆍ이곤변(李鯤變)ㆍ강민효(姜敏孝) 등이 있다.
〈침상단편〉은 부사가 별세하기 직전 학문의 요체에 관해 언급한 내용으로, 태극(太極)ㆍ이기(理氣)ㆍ오행(五行)ㆍ오상(五常)ㆍ심통성정(心統性情)ㆍ지의(志意)ㆍ체용(體用)ㆍ중화(中和)ㆍ충서(忠恕)ㆍ성정(誠正)ㆍ경의(敬義)ㆍ신독(愼獨)ㆍ존양성찰(存養省察)ㆍ격물치지(格物致知)ㆍ효제충신(孝悌忠信)ㆍ위학지도(爲學之道)ㆍ교인지술(敎人之術)ㆍ역행(力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은 부사의 학문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권7은 부록으로 〈세계도〉와 〈연보〉가 실려 있는데, 〈연보〉는 부사의 현손 성처회(成處會)의 아들 성대적(成大勣)이 만든 것이다.
권8은 부록으로 〈언행록〉ㆍ〈행장〉ㆍ〈묘지명〉ㆍ만사 등이 실려 있다. 〈언행록〉은 부사의 외손서인 안창한(安彰漢)의 아들 안시진(安時進)이 부사의 문인으로서 1687년 작성한 것이며, 1785년 외6대손 안경점(安景漸)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것이다. 〈행장〉과 〈묘지명병서〉는 1785년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것이다. 만사는 조임도(趙任道)ㆍ한몽삼(韓夢參) 등 10인이 지은 것이 실려 있으며, 제문은 하홍도(河弘度)가 지은 1편이 실려 있다. 또 이규년(李奎年)이 지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이 1편씩 실려 있다.
4. 자료의 가치
부사는 남명 조식의 문인 가운데 진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이기 때문에 남명학을 다음 세대에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부사의 학문 성향이 남명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사집》은 남명학의 전개 양상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부사는 광해군 말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반대한 중북의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따라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인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살피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부사는 자신이 언급하고 있듯이, 두보처럼 문학적 성취를 하고자 하는 포부와 후직(后稷)ㆍ설(契)처럼 경세제민의 재능을 펴고자 하는 포부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비록 경세적 재주를 당대에 시험하지는 못했지만, 문학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취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와 산문 속에서는 매우 수준 높은 문학적 형상화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17세기 전반 진주 지역 문인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여겨진다. 특히 유학자로서 현실세계에서 오는 불화를 달래기 위해 선유(仙遊)를 하면서 느끼는 정서를 기록한 〈방장산선유일기〉는 이 시기 지식인의 성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17세기 전반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향촌에 살던 사인들의 정신적 지향과 사회적 활동 등을 그의 문집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문학 방면뿐만 아니라, 정치ㆍ사회 방면에서도 활용도가 높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부사의 시 속에는 역사를 노래한 시가 다수 있기 때문에 17세기 전반 사인의 역사인식을 살피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가 살던 곳에 경영한 금천구곡(琴川九曲)도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구곡이므로 구곡문화를 살피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2015년 4월 30일
- [주-D001] 부사는 …… 하겠는가 :
- 成汝信, 《浮査集》 권7, 〈年譜〉 참조.
- [주-D002] 조임도(趙任道)는 …… 하였으며 :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만사.
- [주-D003] 정달겸(鄭達謙)은 …… 하였으며 :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만사.
- [주-D004] 하홍도(河弘度)는 …… 하였다 :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제문.
- [주-D005] 안정복이 …… 하였다 :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묘갈명병서〉.
- [주-D006] 효제충신은 …… 않는다 :
- 성여신, 《부사집》 권6, 〈枕上斷編〉. “孝悌忠信, 非敬義, 則不行, 敬義, 非孝悌忠信, 則不立.”
- [주-D007] 손으로 …… 말한다 :
- 曺植, 《南冥集》 권2, 〈與退溪書〉. “近見學者, 手不知灑掃之節, 而口談天理.”
- [주-D008] 학자들이 …… 한다 :
- 성여신, 《부사집》 권8, 〈言行錄〉. “學者, 手不知灑掃之節, 而口談天理, 外爲莊恭, 而內實放惰.”
- [주-D009] 학자들은 …… 한다 :
- 성여신, 《부사집》 권8, 〈言行錄〉. “且學者, 博求經傳, 旁通百家, 然後斂煩就簡, 反躬造約, 自成一家之學.”
- [주-D010] 정인홍이 …… 내용 :
- 조식, 《남명집》 권두, 〈行狀〉. “盖先生, 旣以博求經傳, 旁通百家, 然後斂煩就簡, 反躬造約, 而自成一家之學.”
- [주-D011] 나의 …… 하라 :
- 성여신, 《부사집》 권4, 〈學一箴〉. “事我天君, 主一無適.”
- [주-D012] 나는 …… 비의했다 :
- 성여신, 《부사집》 권1, 〈鑷鬢吟幷序〉. “翁, 嘗用杜工部竊比, 稷契之語, 竊比於己.”
- [주-D013] 강호에 …… 하네 :
- 성여신, 《부사집》 권2, 〈舠樵辭〉. “江湖有一翁, 學焉而不適於時, 十年操瑟兮, 兩鬢華髮風蕭蕭, 耕也而不逢於年, 甁無儲粟兮, 一瓢顔巷日空高, 休休焉無營無思, 對黃卷而囂囂.”
- [주-D014] 시는 …… 한다 :
- 성여신, 《부사집》 권3, 〈聯珠詩跋〉. “詩者, 性情之發, 而爲聲者也. 人之心, 主一身而統性情. 聞善言, 則感發焉, 見惡事, 則懲創之. 其所以感發焉懲創之者, 無非性情之正也.”
- [주-D015] 그의 …… 흡사하다 :
- 《논어》 〈爲政〉 제2장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에 대해,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凡詩之言, 善者, 可以感發人之善心, 惡者, 可以懲創人之逸志, 其用歸於使人得其性情之正而已.”라고 하였다.
- [주-D016] 생각이 …… 하였다 :
- 성여신, 《부사집》 권3, 〈聯珠詩跋〉. “學之者, 苟能尋章而得其格, 逐句而中其調, 思出性情而參造化自然之機, 吟形物理而模萬變無窮之趣, 興於之訓, 學夫之戒, 遵而勿失, 則學者之初, 庶有益矣.”
- [주-D017] 당시(唐詩)의 …… 있다 :
- 성여신, 《부사집》 권3, 〈聯珠詩跋〉. “唐人環麗之習, 沿六朝也, 而韓愈氏痛正之, 宋朝纖巧之態, 襲西崑也, 而歐陽子力攻之, 然後絺繡之章, 化而爲爾雅, 靡曼之句, 換而爲平淡.”
- [주-D018] 넉넉하고 …… 비유하였다 :
- 朴泰茂, 《西溪集》 권6, 〈題浮査先生遺卷後〉. “先生所著述詩若文, 亦非拘曲士弄觚墨者所能幾及, 而紆餘典贍, 淸麗雅正, 了無輕浮刻薄之氣, 彫琢粉飾之態, 而比之如平路逸駕範驅而不失其馳, 則先生平日所養, 粹然而深, 卓然而高, 推之文章之末, 而自如是, 沖澹和平, 得性情而中軌度者耳.”
- [주-D019] 공의 …… 있다 :
- 성여신, 《부사집》 권8, 〈墓碣銘〉. “公之詩文, 豪健有理致.”
- [주-D020] 설(契) …… 그만두었네 :
- 성여신, 《부사집》 권1, 〈鑷鬢吟 幷序〉. “比契徒虛語, 求仙亦未詳, 君民計已左, 休鑷鬢邊霜.”
- [주-D021] 악와(渥洼) :
- 한 무제 때 용마가 나왔다는 감숙성 안서현의 강 이름.
- [주-D022] 형하(濚河) :
- 복희씨 때 용마가 나왔다는 황하.
- [주-D023] 예천(醴泉) :
- 태평성대에 솟아나는 단술처럼 맛이 좋은 샘물.
- [주-D024] 옥산(玉山) :
- 좋은 벼가 나는 산으로 곤륜산을 말함.
- [주-D025] 연성(連城) :
- 진 소왕(秦昭王)이 화씨옥(和氏玉)을 15개의 성과 바꾸고자 한 데서 나온 말로, 화씨옥을 연성옥(連城玉)이라 한다.
- [주-D026] 방성(房星) :
- 거마(車馬)를 담당하는 별.
- [주-D027] 용매(龍媒) :
- 준마를 가리킴.
- [주-D028] 손양(孫陽) :
- 말을 잘 알아본 백락(伯樂)을 가리킨다.
- [주-D029] 젊은 …… 부끄럽구나 :
- 성여신, 《부사집》 권1, 〈遊靑谷寺〉 제2수. “少年磨劒此山中, 暎雪啖蔬枉費功, 萬事如今成一夢, 羞將白髮對秋風.”
- [주-D030] 나는 …… 되리라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我是寰中人, 初非物外人, 秋風動高興, 將作學仙人.“
- [주-D031] 이 한 몸 …… 기쁘네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一身已潦倒, 百計入長嗟, 拂袖尋眞路, 佳期喜不差.”
- [주-D032] 선원(仙源)으로 …… 부르리라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欲泝仙源何處是, 香爐峯上喚孤雲.”
- [주-D033] 난새를 …… 가려나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驂鸞欲向三淸去, 駕鶴何人共我廻.”
- [주-D034] 홍애(洪崖)를 …… 묻노라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左洪崖兮右浮丘, 喚孤雲兮問眞訣.”
- [주-D035] 평생토록 …… 있었으리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平生倘不懷經濟, 鶴可駕兮鸞可驂.”
- [주-D036] 사인의 …… 없겠는가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士之一身, 經濟其策, 士之一心, 兼善其志. 不然, 山何可不入, 仙何可不學.”
- [주-D037] 이름은 …… 아니다 :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然則今我仙遊, 名雖仙也, 實非仙也.”
- [주-D038] 그가 …… 부른 것 :
- 성여신, 《부사집》 권1, 〈敬次灌圃魚先生雙磎寺八詠樓韻〉 제4수. “何年星隕矗荒原, 四字雙刻萬古存, 天爲儒仙留勝迹, 至今雲物護嵓石.”
- [주-D039] 그가 …… 줄을 :
- 성여신, 《부사집》 권1, 〈茸長寺〉. “逃禪誰識逃禪意, 只爲舊君終不忘.”
- [주-D040] 솔잎 …… 사람이리 :
- 성여신, 《부사집》 권2, 〈挽郭忘憂堂〉 제2수. “莫道茹松追異術, 留侯豈是學仙人.”
- [주-D041] 나에게 …… 줄 알리 :
- 성여신, 《부사집》 권1, 〈我有一歌〉 제5수.
- [주-D042] 고금의 …… 없구나 :
- 성여신, 《부사집》 권2, 〈遊頭流山詩〉. “古今人同不同未可知, 只與造物者爲徒, 而逍遙乎山川之阿, 放曠乎人間之世, 無所拘而無所縶.”
- [주-D043] 부사는 …… 찾았다 :
- 성여신, 《부사집》 권1, 〈九曲詩幷序〉. “今此琴川九曲之佳絶, 亦何異於武夷之仙區. 但因其地, 占其名, 摸寫風流 如晦菴者, 無之. 勝之埋沒, 迄無傳之者.⋯⋯今余旣名其地, 爲九曲水, 又詠其旨, 爲九曲詩, 係寫於洞約之後. 惟我一洞諸員, 共遵條約, 共成美俗, 共遊勝地, 共賞勝事, 熙熙然皥皥然, 自然流入於洪荒朴略之世界. 不知何者爲是, 何者爲非, 何者爲榮, 何者爲辱. 朝如是, 暮如是, 春如是, 秋如是, 今年如是, 明年如是, 不知年數之將至, 可以終吾生而倘佯矣. 天壤之間, 復有逾於此樂者乎.”
- [주-D044] 고려 …… 있다 :
- 성여신, 《부사집》 권4, 〈東方諸賢贊〉. “徐掌令李參議之作詩寓忠, 野服不屈, 籠巖之臨江不渡, 寄書訣家, 耘谷之踰垣避匿, 不受點汚, 則可以別立列傳, 輝映竹帛, 而尙未聞列諸史傳. 故深用慨然, 謹攷東史簒要, 拜記而贊之.”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최석기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