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장산 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2017. 10. 27. 02:24산 이야기



       

방장산 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여행기. 유람기.
낙민 | 조회 23 |추천 0 | 2016.01.31. 13:06

  

  방장산 선유일기(성여신) 산행 경로



방장산 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 가을에 부사야옹(浮査野翁)이 두류산을 유람하려 하였는데, 함께 가기로 약속한 사람은 옥봉(玉峰) 정희숙(鄭熙叔), 능허(凌虛) 박행원(朴行遠), 매촌(梅村) 문여간(文汝幹)이고, 따라나선 사람은 성박(成鑮)성순(成錞)이고, 소문을 듣고 좇아온 사람은 봉학대(鳳鶴臺) 강사순(姜士順)동정호(洞庭湖) 이근지(李謹之)가 바로 그들이다.

   9월 24일 신묘. 나는 부사정(浮査亭)에서 느린 말 한 필, 동자 한 명, 대지팡이 하나, 짚신 한 켤레, 시집 한 권을 준비하고, 종이ㆍ벼루ㆍ붓ㆍ먹 등의 도구와 옷ㆍ이불ㆍ베개ㆍ자리 등은 모두 문매촌의 말에 싣고 출발하였다. 문매촌은 한 줄기 검푸른 털이 어깨를 두르고 네 다리는 모두 누런 얼룩말을 타고, 짐 실은 노새를 끌고 종 셋을 거느렸다. 성순은 먼저 박행원의 집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성박은 다음 날 부사정에서 출발하여 낙천와(樂天窩)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문여간과 함께 사천(泗川)으로 갔는데, 문여간이 서숙(庶叔) 문발(文勃)을 위해 구암동(龜巖洞)에 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방(嘉坊)에서 출발하여 검호(劍湖)를 지나고, 이천(伊川)을 건너 정촌(鼎村)을 지나 관율(官栗)의 제방 아래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아 매사냥을 구경하였다. 그러고 나서 구암동에 이르러 이차일(李次一)을 만나고 사우(祠宇)에 배알하였다. 봉사(奉事) 하영견(河永堅)초정(草亭)에 투숙하였는데, 하군(河君)이 우리를 맞아들여 정성스레 대접하였다. 이때 국화가 한창 만개했는데, 대청과 방안에 화분이 놓여 있어 짙은 향기가 사람에게 스며들었다. 등불 아래에서 술잔을 나누며 실컷 즐긴 뒤에 마쳤다. 이어변(李魚變)이차일이 와서 인사하고 갔으며, 문발도 함께 하였다.


   25일 임진. 김대성(金大成)윤방(尹芳)이 와서 인사하였다. 이차일이 술을 가지고 왔다. 벽에 시가 걸려 있었는데, 주인이 화운(和韻)을 청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몸이 천지간에 한가로운 사람이 되니 / 身爲天地一閒人
가는 곳곳 산과 계곡 새롭게 보이네 / 到處溪山入眼新
동성에서 한없이 술에 잔뜩 취해 / 醉殺東城無限酒
비스듬히 누워 흰 두건을 거꾸로 썼네 / 頹然倒着白綸巾
- 여러 사람들이 지은 시가 많지만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와 같다. -

또 오언 절구를 지어 이차일에게 주었다.

동성에 가을 해 저무는데 / 東城秋日暮
백발로 국화를 마주 대하네 / 白髮對黃花
술잔 드니 도리어 한스러움 더할 뿐 / 把酒還添恨
산양의 친구 생각 가득히 밀려오네 / 山陽舊意多

   아! 이차일은 곧 세상을 떠난 나의 벗 상사(上舍) 백인재(百忍齋) 이자거(李子擧)의 서자이다. 백인재는 본처의 자식이 없어 이차일이 그 집안일을 주간하였다. 지금 문 앞에 이르니 옛 집은 황량하고 사당만 서 있는데, 나무는 늙고 마을은 텅 비어 낙엽만이 개울에 가득하였다. 서성거리며 둘러보니 자못 옛 친구 생각이 났다.
조반을 먹은 뒤에 강주(江州)를 지나 진현(晉峴)에 이르러 소나기를 만났다. 박행원의 집에 도착하니, 박행원은 이청(李淸)을 위문하는 잔치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 성순만 있었다. 저녁에 박행원이 와서 함께 낙천와(樂天窩)에서 잤는데, 주인에게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한가한 마음으로 고인을 배우는 사람 / 心事休休學古人
집안 가득 친한 벗들이 모여 정겹네 / 一堂簪盍摠情親
참된 성품은 꾸밈없음을 이제야 알아 / 始知良性無矯餙
여기저기 심은 황국이 자연스럽네 / 散植黃花却任眞


   26일 계사. 낙천와에서 출발하였는데, 다섯 사람이 동행하였다. 총각 강이원(姜以源)이 따라가기를 원해 허락하였다. 수곡(樹谷)에 도착하여 강사순(姜士順)을 방문하였는데, 강사순 또한 따라가기를 원해 허락하였다. 다음날 아침 술병을 가지고 송림(松林)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주인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찾아오니 / 爲訪故人來
동쪽 울타리에 국화꽃이 피어 있네 / 東籬菊正開
내일 송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 明有松林約
그대는 이 약속을 저버리지 말게나 / 君須無負哉

   말을 달려 송림에 들어가 류경지(柳景祉)모정(茅亭)에서 잤다. 류경지의 동생 류경진(柳景禛)은 곧 우리 중형(仲兄)의 사위이다. 그는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처 성씨(成氏)가 과부로 살면서 어린 고아 삼형제를 거두어 키웠으니, 류지억(柳枝億)ㆍ류지만(柳枝萬)ㆍ류지천(柳枝千)이다. 류지만은 나에게 글을 배우기 때문에 지금 부사정에 있어 류지억과 류지천만이 있었다. 우리 세 부자와 박행원은 먼저 그 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밥을 먹고 서쪽 집 초정(草亭)에서 함께 잤다. 곤양(昆陽)으로 가는 도중에 절구 두 수를 읊었다.

나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 我是寰中人
애초 세상 밖 사람 아니었네 / 初非物外人
가을바람에 높은 흥취 이니 / 秋風動高興
신선을 배우는 사람이 되리 / 將作學仙人

곤산 서쪽 언덕에 송림이 있는데 / 昆山西畔有松林
그 아래 긴 버들 푸른 그림자 짙네 / 林下長楊翠影深
비로소 알겠네 도잠이 문 밖에 버들 심고 / 始知陶潛門外植
갈건을 공연히 저버리고 국화꽃 딴 마음을 / 葛巾空負掇英心


27일 갑오. 이웃에 사는 강우주(姜遇周)강익주(姜翊周)ㆍ정지제(鄭之悌)ㆍ강동립(姜東立) 등이 와서 인사를 했으며, 강사순도 도착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 출발하여 봉계(鳳溪)를 지나 맥동촌(麥洞村) 앞에 이르자, 바람은 세차게 불고 날씨는 추워져 촌집에 들어가 편안히 쉬고 싶었으나, 전날 출발할 때 정희숙(鄭熙叔)에게 편지를 보내 횡포(橫浦)에서 함께 자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황현(黃峴)에 이르기 전에 멀리 북쪽에서 오는 자가 보였는데, 누런 얼룩말을 모는 세 명의 종과 서로 손을 흔들어 호응한 뒤에야, 정희숙의 일행임을 알고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맥동촌에 되돌아가기로 약속을 정하고, 박능허의 종 명생(命生)으로 하여금 길에서 기다리다 정희숙 일행을 맞이해 오게 하였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햇볕을 등지고 앉아 기다렸다. 명생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저 분들의 행차가 거의 고개 허리쯤 이르렀는데 제 목소리를 듣고 다시 십여 보 내려와 답하기를 ‘노새를 채찍질하여 높이 올라가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고개를 넘어 갈 테니, 횡포촌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도 저들이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 다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날씨가 매우 추우니, 거센 바람을 맞으며 높은 재를 넘는다면 감기라도 걸릴까 두렵습니다. 앞마을에 들어가 묵고 내일 출발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모두 “그럽시다.”라고 하였다.

   28일 을미. 아침에 날씨가 매우 추워서 일찍 움직일 수 없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황현(黃峴)을 넘고 횡포(橫浦)를 지났으나, 정희숙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공돌원(公突院)을 지나 계동(桂洞)으로 찾아 들어 하홍의(河弘毅)의 집에 도착하니, 정희숙이 먼저 와 있었다. 기쁘게 마주 대하니, 눈썹이 누런 이가 정희숙임을 알 수 있었다. 정희숙이 눈썹을 찌푸리고 나에게 말하기를 “며칠 전 감기에 걸려 거의 몸을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말렸으나, 내가 소매를 뿌리치고 왔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믿음직한 선비일세. 우리들의 산행은 신선의 유람으로 이름하여 모두 ‘선(仙)’ 자를 붙여 호를 지었네. 그대도 ‘선(仙)’ 자로 일컬어지면 세속에서 생긴 병이 저절로 나을 걸세.”라고 하니, 정희숙이 말하기를 “말은 참 좋다마는, 내 병이 낫지 않으면 약속한 대로 되지 않을까봐 걱정되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말을 들으니, 내 병이 이미 나은 듯하네.”라고 하였다.
이에 서로 의논하여 절구 한 수씩 지었는데, 정희숙이 우리 일행에게 주어, 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이 한 몸 이미 늙고 쇠약하여 / 一身已潦倒
온갖 계책은 긴 탄식만 자아낼 뿐 / 百計入長嗟
소매 떨치고 신선 찾아 나서는 길 / 拂袖尋眞路
아름다운 약속 어기지 않아 기쁘네 / 佳期喜不差

   날이 저물어 나는 박행원과 같이 잤다. 한밤중에 우리 집 종 숙남(肅男)이 매우 급히 불러 그 까닭을 물어 보니 “말이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성박과 강사순이 가서 보니, 말이 코에 병이 생겨 거의 치료할 수 없었다. 강사순이 말을 치료하는 법을 대략 알고 있어, 코끝과 꽁무니에 침을 놓았다. 잠시 후에 말이 스스로 일어나 풀을 먹더니, 그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집에서 곤히 잠들어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어서야 그 얘기를 듣고서 강사순에게 사례하기를 “그대의 솜씨가 말의 병을 잘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과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지 못하며, 그대의 솜씨가 말에는 능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는 능하지 못하구려. 나의 단잠은 종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벗이 말을 치료하는 것도 알지 못했으니, 나의 단잠은 진단(陳摶)에게 알맞구려.”라고 하고서, 서로 함께 크게 웃었다.

   29일 병신. 아침에 하영견초정(草亭)에 다시 모였다. 각각 안부를 물으니, 모두 “편안하오.”라고 하였다. 문여간은 “간밤에 갈증이 매우 심했는데, 물을 가져다 줄 사람이 없었다면 난감했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경장을 한 번 마시면 온갖 감정이 생기네.’라고 하는 것이다. 잠시 뒤에 정희숙이 왔다. 모두가 밤새 감기 증세가 어떠했는지를 묻자, 정희숙이 말하기를 “가래가 전보다 배나 심하니, 그대들을 따라 산에 들어갈 수 없을 듯하네.”라고 하고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모두들 정희숙은 병으로 따라갈 수 없으리라 여겨 저마다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모두 그의 시에 차운하였는데, 나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신선 세계 어느 곳에 신선 누각이 있는가 / 仙區底處有仙樓
부구의 어깨를 치는 좋은 유람 마련하였네 / 擬拍浮丘辦勝遊
유후는 무슨 일로 병을 핑계 삼아 물러났나 / 何事留侯徑謝病
옥퉁소가 공연히 학암의 가을을 저버렸네 / 玉簫空負鶴巖

   정희숙과 작별하고 섬진강을 향해 달려 손유경(孫裕卿)정사(亭舍)에 이르렀다. 손유경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정사를 지키는 하인 필동(畢同)이 있었다. 그 주인의 소식을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필동이 맑은 술을 내와 여러 사람이 각자 서너 잔씩 마셨다. 편지를 써서 필동으로 하여금 급히 주인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그 편지에 “내가 그대에게 편지를 보냈고, 정옥봉(鄭玉峰)도 좋은 소식을 전했었는데, 그대는 듣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속세에서의 심사를 알 만합니다. 섬진강 가 정사에 이르렀을 때 필동이 술을 내어 대접하니, 하인이 주인보다 낫습니까? 주인이 하인보다 낫습니까? 이번 그믐날 뒤따라 석문(石門)으로 오십시오. 석문까지 올 수 없다면 호정(湖亭)에서 머물러 기다려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자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소쇄한 높은 정자에서 맑은 호수 굽어보니 / 高亭瀟灑俯澄湖
호남과 영남 사이의 별천지로구나 / 湖嶺中間別一區
몇 곡의 노랫소리 나그네를 붙드는데 / 數曲纖歌留遠客
푸르스름한 산 희미하여 있는 듯 없는 듯 / 依微山翠有而無

   오후에 강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구름의 형세가 매우 험악해졌다. 흥룡(興龍)을 향해 달려가다 도중에 눈을 만나 촌가에 들어갔다. 잠시 구름이 걷혀 흥룡에 있는 하응일(河應一)의 집으로 달려갔다. 새로 지은 기와집은 높은 누각과 온돌방이 있었는데, 온돌방은 매우 넓었다. 정희숙이 병이 조금 나아 뒤따라 왔다. 나는 시를 지어 읊었다.

누각은 푸른 풀 우거진 언덕을 바라보고 / 軒臨靑草岸
대문은 흰 구름에 싸인 봉우리를 마주하네 / 門對白雲峯
하룻밤 신선 세계에서 자고 가게 되면 / 一宿壺中
지팡이가 용이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 應看杖化龍

   30일 정유. 이웃에 사는 노인 이혜(李蕙)ㆍ김숙남(金淑男)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혜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문여간이 그와 두 판을 두어 모두 패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 출발하여 군산(君山) 앞에 이르니, 삽암(鍤巖) 위에 천막을 치고 앉은 이가 보였는데, 그가 분명 적선(謫仙) 이근지(李謹之)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삽암에 도착해 보니, 그는 이근지가 아니고 이상(李祥)이었다. 이상은 무인(武人)으로, 계미년(1583, 선조16) 별시에 합격하였는데, 강장기(姜長鬐)와는 같은 해에 급제한 사이이다. 우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술 두 동이와 안주 여섯 광주리는 산해진미였는데, 모두 둘러앉아 술을 마셨는데도 다 마시지 못했다. 해가 이미 기울어 서둘러 마시고 떠났다. 나는 삽암의 옛 자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은 고려 말 사람으로, 고려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이 산 속으로 숨어들어 삽암 위에 터를 잡고 살았다. 뒤에 조정에서 대비원 녹사(大悲院錄事)로 부르자 시 한 구절을 벽에 썼는데, “한 조각 임금의 명령 산골까지 찾아오니, 내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음을 비로소 알겠네.〔一片絲綸來入洞 始知名字落人間〕”라고 하였다. 드디어 담을 넘어 달아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

시인이 백발머리로 고적을 찾아 / 訪古騷人雪滿頭
선철의 옛 숲 언덕에 올라왔네 / 來登先哲舊林丘
아래위로 닿은 하늘 상강 물가 같고 / 天連上下猶
동남으로 열린 땅 악양과 흡사하네 / 地坼東南似岳州
세상 피한 맑은 기품 푸른 산처럼 우뚝했고 / 遁世淸標靑嶂立
담을 넘은 높은 자취 흰 구름처럼 떠갔네 / 踰牆高躅白雲浮
한 줄기 긴 피리 소리에 강산은 짙어가고 / 一聲長笛江山老
갈대꽃 억새꽃 흩날려 가을이 깊어 가네 / 蘆荻花飛入晩秋

   이때 술잔을 돌리며 시를 읊조린 지 얼마 안 되어, 옛 화개현(花開縣)을 나와 악양현(岳陽縣)을 지나서 평사역(平沙驛)을 거쳐 군산(君山)으로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멀리 바라볼 때는 누군지 몰랐는데,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눠보니 바로 이근지(李謹之)였다. 이근지의 이름은 중훈(重訓)인데, 고 상국(相國) 이준민(李俊民)의 조카이다. 집이 한양에 있으나 현달을 지향하지 않고, 푸른 산 속에 들어와 살고자 하였다. 일찍이 계동(桂洞)에서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신 뒤, 도탄(陶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정여창(鄭汝昌) 선생은 연산군 때 도탄 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뒤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이곳은 삽암(鍤巖)과 10리 거리이다. 명철(明哲)의 행(幸)ㆍ불행(不幸)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관포(魚灌圃)의 시에 “대 숲이 정공의 집을 가렸으니, 당시에 길이 살 곳으로 정했음을 알 수 있네. 중년에 연좌되니 원숭이와 학이 원망했고, 늙어서는 이 강의 고기도 먹지 못하였네.〔竹林半掩鄭公廬 想得當時卜永居 正坐中年猿鶴怨 老來不食此江魚〕”라고 하였다. - 나는 도탄을 지날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 선생은 유림의 종장이신데 / 鄭先生是儒林匠
만년에 시내 서쪽에서 은거해 살았네 / 晩卜幽貞溪水西
석양에 말 세우고 지난 일에 상심하니 / 落日停驂傷往事
구름도 물빛도 온통 처량하구나 / 雲容水色共悽悽

   도탄을 출발하여 가정(柯亭)에 이르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단교(斷橋) 주변에 이르자, 아랫마을ㆍ윗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왔는데, 횃불을 든 자가 거의 20여 명이나 되었다. 앞서 흥룡에 있을 적에 하응일(河應一)ㆍ최기(崔屺)에게 유람 도중 필요한 사람ㆍ말ㆍ음식 등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군과 최군 두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기별하여 불을 밝히고 나와 맞이하게 한 것이다. 단교는 곧 쌍계사(雙磎寺)ㆍ신응사(神凝寺)ㆍ칠불사(七佛寺) 세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여 내려오는 곳이다. 시내는 넓고 돌은 험한데, 예전의 다리가 지금은 허물어졌으므로 ‘단교(斷橋)’라고 한다. 말을 탄 사람이건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건 한 사람도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불을 밝혀 나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군과 최군 두 사람이 부지런히 일을 주관했다 할 만하고, 마을 사람들의 선량함도 생각할 만하다.
   화개현 앞의 시내를 건너 석문(石門) 앞에 당도하니, 쌍계사 수승(首僧) 삼보(三寶) 등의 승려가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팔영루(八詠樓)에 이르니, 절의 승려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요학루(邀鶴樓) 앞에서 말에서 내려 누각에 올라 둘러앉으니, 절의 승려들이 등불을 밝히고 연회를 베풀며 합장을 하면서 위로하였고, 후추차ㆍ홍시ㆍ다래ㆍ잣 등의 과일을 대접하였다. 그러고 나서 저녁밥을 먹었다. 사운시(四韻詩) 한 편을 지었다.

가정 마을 가는 도중 취기가 돌더니 / 柯亭道上帶微醺
신선 세계 찾아 드니 들판은 어둑어둑 / 尋到仙區野色昏
횃불 밝혀 단교 건널 때 큰 바위는 울퉁불퉁 / 束火渡橋危石露
옷자락 잡고 누각 오르니 저녁 종소리 들리네 / 攝衣登閣暮鐘聞
저녁 안개 내려앉아 삼신동은 어렴풋하고 / 煙霞縹緲三神洞
이끼 낀 석문의 네 글자는 희미하네 / 苔蘚微茫四字門
선원으로 가고픈 데 어느 곳인가 / 欲泝仙源何處是
향로봉 위에서 최고운을 불러 보네 / 香爐峰上喚孤雲


   10월 1일 무술. 아침 해가 떠올라 비단 창이 환해질 즈음에 요학루에 나갔는데, 높다란 난간은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아찔하였다. 서성거리다가 발길을 돌려 법당에 들어갔는데, 빽빽이 있는 방은 고요했고 붉고 푸른 단청은 눈이 부셨다. 먼저 봉래전(蓬萊殿)을 찾았는데, 옛날에는 온돌이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 그 안에 경판(經板)만 소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옛날 독서하던 곳이다.
지난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 강득희(姜得熙) 문경(文卿)과 함께 와서 거처했고, 그 해 겨울 11월에는 류대명(柳大鳴) 이원(而遠), 강검(姜儉) 희약(希約), 하조종(河朝宗) 달원(達源) 등과 다시 와서 거처하다가, 다음 해 병인년(1566) 정월 그믐에 각자 헤어졌다.
또 정묘년(1567) 가을에 최순흠(崔舜欽) 여일(汝一), 권세인(權世仁) 경초(景初), 류장(柳璋) 여옥(汝玉), 하천주(河天澍) 해숙(解叔) 등과 응석사(凝石寺)에서 출발하여 광제사(廣濟寺)단속사(斷俗寺)덕산사(德山寺) 등을 두루 탐방하고, 남명 선생 알현하려고 했으나 선생께서 김해(金海)로 가시어 뵙지 못하였다. 시냇가에 초정(草亭)이 있었는데, 정자 기둥에 선생이 손수 쓰신 시 한 수가 있었다.

천 석이나 되는 큰 종을 보게나 / 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네 / 非大扣無聲
어찌하면 나도 저 두류산처럼 /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게 될까 / 天鳴猶不鳴

   우리들이 처음에는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읊조리고 음미한 한참 만에 그 뜻을 조금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서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생의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선생의 역량은 이 시를 통해 상상할 수 있겠네. 이번 걸음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도천(桃川)- 지금의 덕천서원 터이다. - 를 거닐다가 번천동(樊川洞)을 지나 숙묵암(宿黙菴)을 거처서 설봉(雪峰)을 넘어 불일암(佛日菴)에서 묵었다. 쌍계사로 내려가 겨울 석 달 동안 역사서를 읽고, 다음 해 봄에 산을 나왔다.
   아! 을축년과 정묘년의 일이 벌써 50년이나 지났고, 그 때 함께 노닐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한 격이다. 난리와 많은 전쟁으로 사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지금 새로 지은 절에 나 홀로 다시 와 옛터를 둘러보니, 이른바 ‘늙은 신선 죽지 않고 흥망을 다 보았네.’라는 격이었다.

   또 영주각(瀛洲閣)에 들렀다. 영주각은 법당 뒤에 있는데, 평소 동방장(東方丈)ㆍ서방장(西方丈)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옛날의 옥천사(玉泉寺)이다. 내가 일찍이 노승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옛날에는 ‘쌍계(雙磎)’라는 이름이 없었다. 최치원이 옥천사에 와 거처하면서 진감선사(眞鑑禪師)와 도우(道友)가 되었다. 이곳에 두 줄기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에 최치원이 바위에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네 글자를 썼다. 그 뒤 이 절의 승려가 옥천사 앞에 큰 사찰을 지어 ‘쌍계사(雙磎寺)’라 이름하였고, 옥천사를 동ㆍ서 방장으로 삼았다. 이 절에 ‘쌍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뒤에 또 팔영루(八詠樓)를 지었는데, 심약(沈約)의 시에 “쌍계사를 비추는 밝은 달, 팔영루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고 한 데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오늘 와서 유람하니, “젊은 시절 나그네로 머물던 곳, 오늘은 그대들 떠나보내고 노니네.”라는 것이었다. 팔영루는 이 절의 승려 중섬(仲暹)이 지었다. 팔영루에 걸린 시는 어관포(魚灌圃)가 먼저 짓고, 제현들이 이어서 화운(和韻)하였는데, 황필(黃㻶)의 시만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팔영루의 현판은 승려 영지(靈芝)가 쓴 것이라 한다.
   정오 무렵 여러 벗들과 무너진 섬돌 주변을 배회하다가 변생(卞生)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닐었다. 마침 이 창원(李昌原)의 종 일원(一元)이 술을 가지고 와서, 모두들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셨다. 비전(碑殿) 문 밖에는 돌로 된 비석이 있는데, 곧 최고운이 짓고 쓴 것이다. 선사를 위하여 지은 것인데, 절묘한 문장은 간간이 난해한 곳이 있었지만, 줄줄이 이어진 빼어난 글씨는 글자마다 정신이 깃들어 있고 기력이 있어서 어루만지며 아낄 만하였다. 내가 옛날 노닐던 감회를 시로 한 편 지었다. - 시집에 보인다. - 또 과객 - 정승 기자헌(奇自獻) - 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소롭구나 반구옹의 산수벽이여 / 可笑鷗翁山水癖
두류산을 반평생 몇 번이나 찾았던가 / 頭流半世幾來來
난새 타고 삼청에 오르고자 하니 / 驂鸞欲向三淸
누가 학을 타고 나와 함께 가려는가 / 駕鶴何人共我廻

   보심(寶心)이라는 승려가 시축(詩軸)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일대의 이름 있는 벼슬아치들이 지은 것으로, 진양(晉陽) 사람 향장(鄕長) 남태형(南泰亨), 생원(生員) 하위보(河魏寶), 밀양 부사 하진보(河晉寶), 봉산 군수(鳳山郡守) 김대명(金大鳴), 진사 정대함(鄭大咸), 생원 공인박(孔仁博), 죽원(竹院) 이인민(李仁民) 등이 이 승려에게 지어 준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남긴 시와 글씨는 완연히 어제의 일 같으니, 참으로 슬프도다.
   요학루(邀鶴樓) 벽 위에 여덟 신선의 이름을 썼는데, 부사소선(浮査少仙)ㆍ옥봉취선(玉峯醉仙)ㆍ봉대비선(鳳臺飛仙)ㆍ능허보선(凌虛步仙)ㆍ동정적선(洞庭謫仙)ㆍ죽림주선(竹林酒仙)ㆍ매촌낭선(梅村浪仙)ㆍ적벽시선(赤壁詩仙)이다. 또 두 신선을 추가하였는데, 용담수선(龍潭睡仙)하응일(河應一)이고, 학동후선(鶴洞後仙)최이(崔圯)이다. 강이원(姜以元)은 약 찧는 아이로 삼고, 정시특(鄭時特)은 단약(丹藥) 만드는 아이로 삼았다. 글씨는 성박(成鑮)이 썼다.


   2일 기해. 날씨가 화창하고 좋아서 명승지를 유람하기에 알맞았다. 모두들 청학동(靑鶴洞)을 찾아갈 계획이 있어 절의 승려로 하여금 남여 네 대를 준비하게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남여 네 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늙은이와 병든 이가 타고나니, 네 명의 신선은 탈 수 없었다. 늙은 성부사와 병든 정옥봉과 살찐 이동정은 모두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양보하여 타게 하였다. 남여 한 대만 남았는데 박능허는 문매촌보다 나이가 많고, 문매촌은 박능허보다 걸음이 느릿해서 두 사람이 서로 타려고 하였다. 내가 이에 번갈아 타도록 약속을 정하여 한 사람이 먼저 타고 20여 보를 가서 내려 쉬게 하고, 다른 사람이 타고 이르게 하였다. 이와 같이 번갈아 타고 가면, 걷는 수고가 없을 것이다.
   드디어 신선을 찾는 유람을 하기로 정하고, 아침밥을 먹은 뒤 영주각(瀛洲閣) 동쪽 문에서 출발하였다. 보심(寶心)으로 하여금 길 안내를 하게 하였다. 남여 네 대에 나눠 타고 가는데, 젊은 승려 10여 명이 번갈아 가며 남여를 메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걷다가 쉬다가 하였다. 수십 보쯤 가니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을축년 가을. 이언경(李彦憬)ㆍ홍연(洪淵)’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대개 유람할 때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영구히 전하고자 한 것이다. 남명 선생이 유산록(遊山錄)에서 이미 기롱하였으니, 내가 어찌 다시 말하겠는가.
   또 10여 보쯤 가다가 남여를 세우고 내려서 붉은 낙엽을 깔고 땅에 앉기도 하고, 푸른 이끼 낀 바위 옆에 기대기도 하였다. 동복을 시켜 나무 끝에 올라가 후도(猴桃)를 따게 하여 모두 후도를 먹었는데, 그 맛이 달고 향기로웠다. ‘후도’는 세속에서 ‘월라(月羅 다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열매가 서리를 맞아 익은 채 줄기에 달려 있었는데, 나뭇가지 끝을 흔들자 익은 것이 저절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다투어 주웠는데, 많이 주운 사람은 바구니에 가득 찼다. 또 누런 배와 홍시가 떨어져 낙엽 속에 묻혀 있었는데, 낙엽을 헤치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종들이 다투어 주워 먹다가 싫증이 나자, 서로 던지며 장난을 하였다.
   피리 부는 두 종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갔다. 오시(午時)가 채 되기 전에 비로봉(毘盧峰) 북쪽에 도착하였는데, 학암(鶴巖)이 남쪽에 있고, 잔도(棧道)가 그 동쪽에 있어 남여를 두고 걸어갔다. 이곳은 내가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 꿈속에서 찾아왔던 곳이다. 꿈 이야기는 나의 서술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위 중간 길이 끊긴 곳에 나무를 잘라 걸쳐놓았는데, 그 아래는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나갈 수 없었다. 완폭대(翫瀑臺) 소나무 밑에 이르러 줄지어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백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를 마주하고 동쪽에는 폭포가 있으며,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라고 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鶴淵)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龍湫)가 있다. 완폭대 아래에 좁은 길이 있는데, 부여잡고 수직으로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선동(三仙洞)’ 세 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지만, 몸이 가볍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불일(佛日菴)에 이르렀는데, 암자는 텅 비어 먼지만 절에 가득하였다. 문매촌이 한 구절 읊기를 “학 떠나니 둥지 튼 소나무는 늙었고, 중 떠나니 옛 절은 텅 비었네.〔鶴去巢松老 僧歸古寺空〕”라고 하여, 내가 두 구를 채워 “신선을 찾던 옛날 꿈 속, 이 산중에 와 있었지.〔尋眞他日夢 應在此山中〕”라고 읊었다. 마침내 벽에 이 시를 써 붙였다.
잠시 뒤 향로봉(香爐峰)에 오르려는데, 아들 성박이 옷깃을 당기며 말리기를 “저희들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겠으니, 이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위험한 산봉우리에 부디 오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네 아비 나이가 백 살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향로봉에 오르지 못하겠느냐.”라고 하고서, 이에 오죽장(烏竹杖)을 짚고 짚신을 매고서 여러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올라갔다. 세 번 쉬고 나서야 봉우리 꼭대기의 고령대(古靈臺)에 도착하였다. 승려 신섬(信暹)이 대추와 후추를 넣고 달인 차 한 통을 가지고 먼저 봉우리에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몇 잔을 따라 주고, 바구니에 가득 담은 홍시와 다래 등 과일을 내어 먹이니, 갈증이 절로 해소되었다. 봉우리는 깎아 세운 듯이 높았다. 모두 줄지어 앉아 있다가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눕기도 하고, 늘어서 있다가 소나무 가지를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가벼이 낭풍(閬風)에 올라 상제가 사는 곳에 가까이 온 듯하고, 공동산(崆峒山)에 올라 광성자(廣成子)을 방문한 듯하였다. 드디어 〈선유사(仙遊辭)〉1장을 지었다.

산이 높고 높음이여 푸른빛을 모았고 / 山矗矗兮攢碧
물이 차디참이여 푸른 물결 흘러가네 / 水冷冷兮下綠
신선 무리들이 옷소매를 나란히 하였는데 / 有仙曹兮袂聯
정갈한 여덟 밥그릇에 푸른 옥 지팡이 있네 / 八飯靑精兮杖綠玉
호랑이와 표범에 걸터앉고 용을 타며 / 踞虎豹兮登虯龍
붉은 난새에 올라타고 백학을 끌어당기네 / 驂紫鸞兮控白鶴
왼쪽엔 홍애요 오른쪽엔 부구이고 / 左洪崖兮右浮丘
고운을 불러 참된 비결을 묻노라 / 喚孤雲兮問眞訣
적송자을 잡아당겨 붉은 퉁소를 부니 / 挽赤松兮弄紫簫
머리 위 지척은 옥황이 사는 곳이네 / 頭邊咫尺兮玉皇攸宅

   3일 경자. 날씨가 또 화창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뒤 신응사(神凝寺)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석문 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둘러보았다. 두 개의 큰 바위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서쪽엔 ‘쌍계(雙磎)’, 동쪽엔 ‘석문(石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글자마다 크기가 사슴 정강이 만하였는데 바위에 깊이 새겨져 있어 어제 쓴 글씨처럼 뚜렷하였다. 사람들이 두 바위 사이로 지나다니기 때문에 ‘석문’이라고 한다. 석문 가에는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놓았는데, 떼를 입혀 자리를 펴놓은 것 같았다. 그 옆에는 큰 소나무가 우뚝 서 있고 흰 돌이 즐비하였으며, 푸른 이끼가 얼룩덜룩하였다. 한 줄기 시내가 청학동으로부터 흘러오다가 고여 맑은 못을 이루었다. 못 가의 한 바위에 ‘진주(晉州)’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 쓴 글씨인지 알 수 없었다.
   손유경(孫裕卿)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내가 답하기를 “그대의 서찰을 받아 보니, 일의 전말이 상세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대의 신의가 남다름을 알겠으니, 고마움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편지를 보내면서 만날 기일을 정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이 서촌(西村)을 경유하게 되면 그대가 반드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유(仙遊) 소식만 전했던 것입니다. 그대가 길에서 전하는 말만 믿고 정군(鄭君)에게 묻지 않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옛날 흥공(興公)천태산(天台山) 적성(赤城)을 밟아 보지도 않고, 천태산을 그리고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벗에게 ‘이 부를 땅에 던지면 금석 소리가 날 것이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천고(千古)에 전합니다. 그대가 우리들의 선유에 끼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성명(姓名)을 빌미로 삼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보낸 8장의 시는 흥공〈유천태산부〉와 함께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어제는 향로봉에 올랐고, 오늘은 신응사(神凝寺)에 들어왔습니다. 내일은 작은 배를 타고 섬진강에 닿을 것이니, 그대는 천천히 오십시오. 선유의 흥취를 읊은 많은 시편들을 다 써서 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만 줄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지었다.

무릉도원 들어오니 또 다른 세상 있어 / 路入桃源別有天
동구 밖은 운무에 속세와 단절되었네 / 雲煙鎖斷洞門邊
속세 소식을 그 누가 나에게 전하리 / 塵間消息誰傳我
기별 줄 어부는 낚싯배를 매어놓았는데 / 報道漁郞繫釣船

   시를 짓고서 옛 화개현(花開縣) 앞을 지나 무지개다리가 드리워진 곳에 다다랐다. 옛날에는 물가에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신응사 승려 태능(太能) 등 5, 6명이 나와 맞이하였다. 모두 말에서 내려 외나무다리를 건넜는데, 다리 머리에는 수침(水砧)이 있었다. 절 문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능파각(凌波閣)이 있었는데, 임진ㆍ계사년 난리 때 왜적들에 의해 불타버려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곧바로 법당에 들어가니, 옛날에는 텅 비었던 불전이 지금은 온돌을 깔았다. 전각의 모퉁이는 구름을 찌를 듯 높고, 금빛 푸른빛 단청은 눈을 부시게 하였다. 법당 안은 수백 명을 수용할 만큼 넓었다. 절 터는 깊고 깊숙한 곳에 있어 인간 세상과 아득히 떨어져 있으니, 마치 몸이 요지(瑤池)에 이르러 몸소 옥황상제의 궁궐을 보는 듯 황홀하였다. 발길을 돌려 법당을 나온 뒤 기수(琪樹) 밑에 둘러앉아 산세를 훑어보니, 뭇 봉우리가 사방을 둘러싸고 두 줄기 시내가 합류하며, 임궁(琳宮)의 찬란한 모습이 물속에 비쳐 절이 기이하고 빼어난 곳에 있다고 할 만하였다. 여산(廬山)호계(虎溪)서호(西湖) 가의 영은사(靈隱寺)도 이와 같은지 모르겠다.
   또 절에서 걸어 나와 시내를 따라 1리쯤 올라가서 푸른 시내의 바위 가에 앉았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소나무에 기대어 위아래를 훑어보니, 잎이 떨어져 산의 모습은 황량하였고, 물이 줄어 시내의 돌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내는 흰 물결을 뿜어내며 옥 같은 소리를 내고, 산은 구름을 비집고 우뚝 솟아 있어 까마득히 선원(仙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었다. 수석의 기이한 모양과 유람의 고아한 정취에 대해서는 선현들의 기록에 남김없이 다 묘사해 놓았으니, 거친 내 솜씨로 어찌 그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단지 난리가 끝난 뒤 산하는 옛날 그대로인데 누각은 모두 허물어졌고, 영웅은 새처럼 지나가 버렸고, 옛 일은 구름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서성이며 바라봄에 어찌 감회가 없으랴.
   절의 서쪽에 또 ‘사당(社堂)’이란 한 암자가 있었다. 옛날 나는 벗과 함께 이 암자에 와서 공부할 적에, 그윽하고 고요함을 사랑하여 몇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암자 앞에는 큰 대나무 천여 그루가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창문에 아른거렸다. 문 밖에는 넓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가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푸른 잎과 붉은 꽃봉오리가 문 밖까지 그늘을 드리웠었다. 신응사 승려에게 물었더니, 그 암자가 아직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찾아갈 수 없었다. 돌아와 법당에 들어가 나란히 누워 한숨 잤다. 어두워지자 등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절의 승려 태능이 절구 두 수를 지어 보여주기에, 내가 그 시에 차운하였다.

산수를 보는 것은 내 능히 잘하지만 / 觀水觀山是我能
현묘와 적멸 담론함은 내 어찌 능하리 / 談玄談寂又何能
이 집에 저절로 진여의 법 있으니 / 渠家自有眞如法
태능은 이 법에 능한가 불능한가 / 爲問太能能不能

청허당 노승을 예전에 만났었고 / 淸虛堂老曾相見
을축년에 여기서 글을 논하였지 / 此地論文乙丑年
오늘밤 선사 만나 옛 일을 담론하니 / 今日逢師談舊事
청아한 시 백여 편이 눈앞에 선하구나 / 淸詩照眼百餘篇


   4일 신축.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온 나무가 산을 울렸다. 날씨가 매우 추워 갖옷을 겹쳐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출발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싶었지만, 30여 명이나 되는 일행의 식량과 말의 먹이를 조달하기도 매우 어려운데다, 이미 서 도장(徐都將)동정호(洞庭湖)에서 배를 띄우기로 한 약속이 있었고, 손유경도 편지를 보내 “초 8일쯤 조수(潮水)가 높지 않으니 행장을 꾸려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침을 먹은 뒤 추위를 무릅쓰고 억지로 출발하였다. 절 문을 나서며 손유경의 시에 차운하여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여산의 일주문에서 웃으며 작별하고 / 笑別廬山一柱門
머리 들어 호계의 구름 우두커니 바라보네 / 擡頭黯倚虎
멀리 산 밖에는 풍파가 세찬 줄 알겠으니 / 遙知山外風波急
누가 배를 대 놓고 푸른 술통 끼고 있을까 / 誰繫蘭舟擁綠罇

말을 타고 가면서 아홉 개의 ‘교(橋)’ 자로 운을 달아 절구 세 수를 지었다.

냇물에 꽃잎 떠오던 옛 무지개다리 / 落花流水舊虹橋
오늘은 어찌하여 외나무다리 되었나 / 今日胡爲一木橋
봄바람 불 때 천태산 길 들어가려 하니 / 春風擬入天
누가 다시 내가 석교 건너는 것 보려나 / 誰復看余渡石橋
- 이 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 


야윈 말 채찍질 하며 다리를 건너는데 / 懶鞭羸馬過溪橋
단풍잎 바람결에 다리 위에 흩날리네 / 紅葉颼颼亂颭橋
절경 만나 읊조리니 어깨 절로 들썩이는데 / 遇景沈吟肩自聳
옆 사람은 호연교에 잘못 비유하네 / 傍人錯比浩然橋
- 이 시는 석문교(石門橋)를 지나면서 지은 것이다. - 


산 속의 해 뉘엿뉘엿 끊긴 다리 비추는데 / 山日依微照斷橋
시인은 어느 곳 단풍 든 다리에 머무는가 / 詩人何處泊楓橋
강가의 고깃배 불빛에 흥취 무궁하여 / 江天漁火無窮興
섬진강 호수 가의 다리에 와 있구나 / 知在蟾津湖上橋
- 이 시는 화개교(花開橋)를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

   가정촌(柯亭村) 앞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이 장막을 치고 맞아들여 점심을 대접하였다. 음식상이 약소하지만 정갈하였으며 맛이 좋았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은 이름이 ‘지귀(智貴)’로, 호남의 부자 나치리(羅致里)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덕천 전곡(德川典穀) 손득전(孫得詮)이 찾아와 인사하고 인도하여 평사(平沙)로 가서 묵었다. 오후에 도탄(陶灘)을 지나 삽암(鍤巖)에 도착하니,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배가 역풍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만나기로 약속한 손 상사(孫上舍)와 서 도장도 배를 저어 올라올 수 없어 섬진강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평사역 촌가로 달려가서 편히 쉬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아침에 화개동을 출발했는데 / 朝出花開洞
오후에 강바람이 더욱 매섭네 / 江風晩更尖
석양 무렵 옛 역에 투숙하여 / 斜陽投古驛
한가히 앉아 바람 자길 기다리네 / 閒坐待波恬

   저녁에 소촌 찰방(召村察訪) 정윤목(鄭允穆)이 이웃집에 와서 묵었다.


   5일 임인. 바람이 잠잠하고 하늘이 맑아 날씨가 화창하니, 배를 타기에 적합하였다. 아침밥을 서둘러 먹었다. 소촌 찰방두류산을 유람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 시집에 보인다. - 소촌 찰방이 출발하려다 내 시를 보고 곧바로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떠났는데, 그가 화답시를 지어 보내 왔다. - 원운(原韻) 아래에 붙어 있다. -
   아침밥을 먹은 뒤에 흥룡촌(興龍村)을 향해 달려갔다. 마을 앞에 장막을 치고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고성 군수(固城郡守) 윤삼락(尹三樂)이혜(李蕙)ㆍ김숙남(金淑南) 등이었다. 윤 고성(尹固城)이 술 한 잔씩 다 돌리고 이혜가 술잔을 반쯤 돌렸을 때, 뱃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손 진사께서 앞 여울에 배를 대어놓고 여러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시(午時)에는 조수가 점점 낮아지고 얕은 여울이 앞에 있어, 배를 늦게 띄우면 운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자리를 파하고서 일행을 거느리고 뱃머리로 향하였다. 뱃머리에 꽂아 둔 노란 국화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손 진사가 북치는 사람, 피리 부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기생들을 데리고 왔다. 호숫가에 세 척의 배가 매여 있었는데, 그중에 배 한 척을 보내 우리들을 맞이하여 태웠다. 우리들이 다투어 배에 오르니, 손 상사는 뱃전에 기대어 시를 읊조리고 있었고, 서락(徐落)ㆍ성수명(成守命) 등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이에 세 척의 배를 연결하여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잔잔한 물결은 일지 않아 수면은 거울을 닦아 놓은 듯하였고, 강 양쪽 산 언덕의 모습은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울긋불긋하였다. 강 중간쯤에서 돛을 올렸는데, 돛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술 한 잔씩 마시며 시 한 수씩 읊조렸고, 북소리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노래하고 춤추며 술잔을 수없이 주고받았다. 나는 배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읊조리며 시를 쓰는 붓은 짧고 / 吟裏詩毫短
뱃머리에 춤추는 소매는 길구나 / 船頭舞袖長
석양에 무한하게 이는 흥취를 / 斜陽無限興
모두 고인의 술잔에 부치노라 / 都付故人觴


   이때 석양이 산에 걸려 강물에 비치고, 푸른 산은 강물에 그림자 드리우고 먼 숲엔 연기가 깔리니, 어스름한 저녁 풍경을 한 자루 붓으로 그려내기 어려웠다. 이에 술 한 잔씩 더 돌리고 풍악을 재촉했다.
손 진사의 강가 정자에 다다랐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왔으나, 오히려 모래톱에 배를 대지 못하여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장터 옆 나루까지 갔다가 돌아와 손 진사 정자 밑에 배를 대었다. 고성동정적선(洞庭謫仙)을 데리고 먼저 내려가고, 여러 사람들도 모두 각자 흩어졌다. 나머지 일곱 신선과 손유경은 배를 돌려 노닐다가 한참 뒤에 배에서 내렸다.
   강가 정자로 들어가 등불을 밝히고 다시 술을 마셨다. 내가 일행에게 약속하기를 “오늘 유람은 기쁨과 즐거움이 이미 흡족하지만, 문자음(文字飮)을 하지 않을 수 없네. 술이 한 순배 돌 때까지 시 한 수를 짓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니, 모두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반에 술잔 하나를 놓아 가운데 두고, 시 한 편을 짓고 술 한 잔씩 마셨다. 돌아가며 왕복하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쳤다. 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소매 속의 청사검 얼마나 울었을까 / 袖裏靑蛇幾浪吟
배 안에서 흥 일어 풍악이 울려 퍼지고 / 興入舟中歌笛響
강가에서 시 지으니 새들의 노래구나 / 詩成湖外鷺?音
공부는 명예에 골몰하지 않았으니 / 工夫不向名間沒
평생 계획 어찌 이익을 좇는 데 빠지리 / 計較寧隨利上沈
오늘의 신선 유람 우연이 아니니 / 此日仙遊非偶爾
그대들은 세한의 마음 저버리지 말게 / 請君休負歲寒心


   6일 계묘. 곤히 자고 늦게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홀로 호수 가 정자로 나와 나무에 기대어 둘러보니, 아침 해가 막 떠올라 호수와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으며, 경치는 짙고 옅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술꾼들이 손 진사의 종 필동(畢同)의 누추한 방에 모여, 술통을 가득 채워 진탕 마셨다고 들었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다.

먼 나무에 남기 서려 산의 모습 고요하고 / 嵐橫遠樹山顔靜
높은 봉우리에 해가 뜨니 맑은 수면 붉네 / 日上高峰鏡面紅
범부들은 이 빼어난 아침 풍경 모른 채 / 凡骨不知朝景勝
술에 취해 누추한 방안에 널브러져 있네 / 觥絃徑倒陋房中

   이에 술꾼 손유경매촌낭선(梅村浪仙), 죽림주선(竹林酒仙) 등이 깜짝 놀라 헐레벌떡 나와 술이 깨었다고 하면서 불민함을 사죄하였다. 또 정자 위에 술자리를 벌여 술잔을 주고받으며 각자 내 시에 화답하였다. 내가 다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누대 안에 술이 있어 사람들 먼저 취하였고 / 臺中有酒人先醉
호숫가엔 바람 없으나 낙엽은 절로 떨어지네 / 湖上無風葉自飛
배회하는 늙은이는 시를 짓지도 못했는데 / 徙倚老査吟未了
물새 떼 다시 남쪽 바다를 향해 날아가네 / 群鷗又向水南歸

   아침밥을 먹은 뒤 각자 작별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를 “이번 유람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뒷날 다시 유람하게 된다면, 만나서 그 기일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매촌낭선으로 하여금 약속하는 글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에 “청학동의 신선 유람은 맑은 흥취가 흡족하지 못했다. 가을에 다시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봄으로 기약하여 내년 3월 보름에 이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한다. 손유경으로 하여금 후일 선유의 예(禮)를 행하게 하여, 뱃놀이에 필요한 도구와 관현의 악기를 책임지고 준비하여 빠짐없이 갖추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동정적선매촌낭선악양(岳陽)으로 가고, 손유경은 강가의 정자에 남고, 부사소선ㆍ옥봉취선ㆍ봉대비선ㆍ능허보선ㆍ죽림주선ㆍ적벽시선 말을 타고 줄지어 돌아왔다. 우현(牛峴)을 넘고 하천(霞川)을 건너 공돌원(公突院) 시냇가에 이르렀다.
   아들 성박으로 하여금 작은 산머리에 올라가 하 지평(河持平)의 묘를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지평의 이름은 충(漴)으로, 나의 증조모 하씨의 부친이다. 묘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산머리에 세 개의 큰 무덤이 세발솥처럼 줄지어 있었으나, 묘갈(墓碣)이나 묘지(墓誌)도 없고, 또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찾을 수 없어 돌아왔다.
하중오(河重吾)ㆍ성수명(成受命) 등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먼 곳까지 배웅해 주었다. 이에 여섯 신선이 모두 술에 취하였고, 피리소리와 노래가 함께 울려 퍼지자, 일제히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들판에서 벼를 베던 사람들이 낫을 들고 서서 바라보았다.
   횡포(橫浦)를 지나 황현(黃峴)을 넘고, 대야천(大也川)을 경유해 동곡(桐谷)에 도착하여 옥봉(玉峰) 정희숙의 집에서 묵었다. 조여헌(趙汝獻)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7일 갑진. 흰죽을 먹고 아침 일찍 출발할 즈음에 곤산(昆山)의 성명은 강숙(姜叔), 자는 백양(伯陽)인 사람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인사하였고, 조여수(趙汝秀)도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후방(後方)을 지나 원당(元堂)을 거쳐 곤명(昆明)을 지나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세 신선이 삼선동을 두루 구경하고서 / 三仙歷覽三仙洞
천풍을 옆에 끼고 학을 타고 돌아가네 / 腋挾天風駕鶴廻
잠깐사이 군산 북쪽 땅을 날아 지나면서 / 須臾飛過君山
곤명을 보니 병화에 거의 재가 되었네 / 看送昆明幾劫灰

   저물녘에 능허보선낙천와(樂天窩)에 도착하여 묵었다.

   8일 을사. 약동(藥洞)의 고개를 넘으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산중에서 열흘 동안 신선세계 찾으며 / 山中十日窮探討
계곡의 좋은 경치 소매에 가득 담았네 / 滿壑煙霞拾滿裾
종들도 산수가 이름난 것을 아니 / 僮僕亦知山水號
구름 속의 닭과 개 거짓이 아닐세 / 雲中鷄犬不爲虛

임천탄(林川灘)을 건너 수우당(守愚堂)을 지나면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숲 밖의 서풍은 나뭇잎을 쓸어 가고 / 林外西風吹葉去
구름 가 북녘 기러기는 서리를 불러오네 / 雲邊北鴈帶霜來
황량한 옛 집에는 지키는 이 없고 / 荒凉古宅無人守
마른 대 찬 매화에 슬픔만 끝없네 / 枯竹寒梅不盡哀

황류탄(黃柳灘)을 건너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명승 찾는 마음은 붕새가 북해로 떠나는 듯했고 / 探勝心如鵬徙北
환속하는 몸은 자고새가 남으로 돌아가는 듯하네 / 還塵身似鷓還南
평생토록 경세제민을 꿈꾸지 않았으면 / 平生倘不懷經濟
학과 난새를 타고 오를 수 있었으리 / 鶴可駕兮鸞可驂

해 질 녘에 부사정(浮査亭)에 도착하였다.

   산 속에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자는 모두 선인(仙人)이었고, 산 밖으로 나오니 만나는 자는 모두 범인(凡人)이었다. 한 몸이 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느냐에 따라 선인과 범인이 달라지는 것은 곤붕(鵾鵬)이 북해로 날아가는 것자고(鷓鴣)가 산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한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어찌 높게 기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비의 한 몸은 그 계책을 경세제민에 두고, 선비의 온 마음은 그 뜻을 천하 사람과 선을 행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산에 어찌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신선을 어찌 배우지 않을 것인가.

 명도 선생(明道先生)유산시(遊山詩)“옷소매의 티끌을 삼일 동안 끊었다가, 남여 타고 머리 돌려 돌아가려 하노라. 평생토록 경세제민의 뜻을 두지 않았다면, 등한시 하여 어찌 산을 나오랴.〔衿裾三日絶塵埃 欲上藍輿首更回 不是平生經濟志 等閒爭肯出山來〕”라고 하였으니, 이는 산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회암 선생(晦庵先生)〈감흥시(感興詩)〉“유유히 떠나 신선이 되기를 배워서, 세상을 버리고 구름 속에 노니는구나. 선약 담은 숟가락 입에 한번 들어가면, 환한 대낮에도 날개가 돋는다네. 세속을 벗어나긴 어렵지 않으나, 구차하게 사는 삶 어찌 편안하리.〔飄飄學仙侶 遺世在雲間 刀圭一入口 白日生羽翰 脫屣諒非難 偸生詎能安〕”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선을 배우는 것이 불가함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仙遊)는 이름은 ‘선유’이지만, 실제는 ‘선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유람록 끝에 그 지취(志趣)를 드러낸다. 같이 유람했던 벗들이 내가 산수벽(山水癖)이 있고 또 산 속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안다는 것으로 기록하게 하였다.

   내가 보건대, 여덟 신선 가운데에는 노소(老少)가 있고, 부자(父子)가 있고, 형제가 있다. 그러나 명승을 찾아 무리 지어 다닐 때는 노소ㆍ선후의 순서를 잊었고, 흥에 겨워 시를 지을 때는 부자ㆍ형제의 차례를 잃었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다투어 달려가 어른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시구를 얻으면 곧바로 써 보여 부형(父兄)보다 뒤에 하지 않았다. 이 유람을 하면서 형체를 잊고 구속을 버리고서 태고의 순박한 세계로 자연스레 흘러 들어가 모두 ‘팔선(八仙)’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서문을 지으면서 아비로서 자식을 돕고, 더욱 흥에 미치고 장난하고 농담하여 격이 없는 대목은 읽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란다. 부사야옹(浮査野翁)이 기록한다.

   정사년(1617, 광해군9) 봄에 진주 목사 구암(耈巖) 이삼성(李三省)이 단성 현감(丹城縣監) 및 진양 사람들과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이 산을 옛날 유람한 적이 있다고 하여, 편지를 보내어 같이 가자고 청했다.
4월 초순에 나는 큰 아들을 데리고 구암 및 두세 고을 사람을 따라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이날 칠송정(七松亭)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행차가 진주 서쪽 광탄(廣灘) 가에 이르렀을 때, 검은 구름 한 조각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몰려오더니, 바람이 몰아치고 소나기가 퍼붓고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였는데, 모자를 쓰고 도롱이를 걸칠 틈도 없었다. 잠시 후에 날씨가 갰는데,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고, 붉은 기운이 동쪽과 북쪽 사이에 자욱하게 끼니, 일행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의아해 했다. 나는 이 일은 실로 비상한 이변으로 아마도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1일 동안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두 박민(朴敏)침류정(枕流亭)에 도착하였다. 물에 밥을 말아 먹고 밥상을 물리고서 술상을 차리려 할 때, 갑자기 전 관찰사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의 부음(訃音)을 듣고 헤어졌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광탄 가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던 때가 바로 곽공이 세상을 떠나던 시각이었다.

   아! 공은 의리에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공적은 사직(社稷)에 있고 이름은 역사에 드러났으니, 어찌 감히 한두 마디 말로써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공이 중년에 도인술(導引術)을 하고 반평생 솔잎을 먹고 산 것에 대해서 공을 아는 사람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곽공은 타고난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 특이한 점은 매우 많지만, 마음속의 은미한 생각에 대해서는 또한 일반인들이 그 전말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람에 옷깃을 날리고 달빛에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은거한 것은 후한(後漢) 때의 수경(水鏡) 사마휘(司馬徽)와 같았고, 명성과 벼슬을 얻은 것은 전한(前漢) 때의 유후(留侯) 장자방(張子房)과 같았다. 병도 없던 고사(高士)가 갑자기 구름을 타고 비바람을 몰고 우레를 재촉하여 떠나기를 이처럼 신비롭고 기이하게 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소하(蕭何)가 묘성(昴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부열(傅說)이 기성(箕星)을 타고 승천한 것을, 이를 통해 더욱 믿을 수 있겠다. 그리고 무지개다리는 후일 북두칠성과 견우성 사이에 걸쳐져 일월(日月)의 광명(光明)을 도우리라는 것을 또한 저승에서도 상상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한 마디 말을 써서 기이한 자취를 기록하고, 또 공사(公私) 간의 애통한 마음을 붙여 둔다.


 

[주D-001]옥봉(玉峰) 정희숙(鄭熙叔) : 정대순(鄭大淳, 1552~?)으로, 옥봉은 그의 호이고, 희숙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창의하여 최기필(崔琦弼)을 도와 왜적을 토벌하였고,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건하는 데 앞장섰다.
[주D-002]능허(凌虛) 박행원(朴行遠) : 박민(朴敏, 1566~1630)으로, 능허는 그의 호이고, 행원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태안(泰安)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5) 진사가 되었다. 저술로 《능허집》이 있다.
[주D-003]매촌(梅村) 문여간(文汝幹) : 문홍운(文弘運, 1577~1610)으로, 매촌은 그의 호이고, 여간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금산(琴山)의 가방(嘉坊)에 거주하였다. 부친은 진사 문할(文劼)이다. 1612년(광해군4) 진사가 되었다. 저술로 《매촌집》이 있다.
[주D-004]성박(成鑮) : 1571~1618.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선(而善)ㆍ흡여(翕如),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성여신(成汝信)의 장남이다. 조식의 제자인 모촌(茅村) 이정(李瀞)에게 배웠다. 저술로 아들 성한영(成瀚永)의 문집과 합본으로 나온 《매균양세고(梅筠兩世稿)》가 있다.
[주D-005]성순(成錞) : 1590~1659.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진(而振), 호는 천재(川齋)이다. 성여신의 넷째 아들이다. 저술로 《천재집》이 있다.

[주D-006]봉학대(鳳鶴臺) 강사순(姜士順) : 강민효(姜敏孝)로, 봉학대는 그의 호이고, 사순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진주의 인담(仁潭)에 거주하였다. 효종 때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주D-007]동정호(洞庭湖) 이근지(李謹之) : 이중훈(李重訓)으로, 동정호는 그의 호이고, 근지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조식(曺植)의 자형인 이공량(李公亮)의 손자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주D-008]낙천와(樂天窩) : 박민의 정자 이름이다.
[주D-009]구암동(龜巖洞) : 현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이다.
[주D-010]가방(嘉坊) : 현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이다.

[주D-011]검호(劍湖)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에 있는 금호지(琴湖池)이다.
[주D-012]정촌(鼎村)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에 속한 마을이다.
[주D-013]관율(官栗) : 현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두량리에 있는 마을이다.
[주D-014]사우(祠宇) :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위패를 모신 구계서원(龜溪書院)의 구산사(龜山祠)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D-015]동성(東城) : 현 경상남도 사천시의 옛 이름이다.

[주D-016]산양(山陽)의 친구 생각 : 진(晉)나라 상수(向秀)가 혜강(嵇康)과 산양(山陽) 땅에서 절친하게 지냈는데, 혜강이 죽은 뒤에 그곳을 지나다가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추억을 생각하며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9 向秀列傳》 이곤변이 살던 사천에 와서 그를 그리워 한다는 의미이다.
[주D-017]백인재(百忍齋) 이자거(李子擧) : 이곤변(李鯤變, 1551~?)으로, 자거는 그의 자이고, 백인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구암 이정의 손자이다.
[주D-018]강주(江州)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강주 마을이다.
[주D-019]진현(晉峴) : 현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에 있는 진치령인 듯하다.
[주D-020]수곡(樹谷)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水谷面)이다.

[주D-021]송림(松林)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송림리이다.
[주D-022]중형(仲兄) : 성여효(成汝孝)이다. 임진왜란 때 향교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진양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위판을 안은 채 죽었다.
[주D-023]곤양(昆陽)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이다.
[주D-024]갈건(葛巾)을 …… 마음을 : 갈건은 갈포로 만든 두건이다. 도잠(陶潛)의 〈음주(飮酒)〉에 “만일 다시 유쾌히 마시지 않는다면, 공연히 두상의 건을 저버리게 되리라.〔若復不快飮, 空負頭上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도잠은 항상 갈건(葛巾)을 쓰고 다니다가 술을 만나면 즉시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쓰곤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그리고 《음주시(飮酒詩)》에 “동쪽 울타리 국화꽃 꺾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離下, 悠然見南山.〕”라고 한 구절이 있다.
[주D-025]강우주(姜遇周) : 조식의 문인인 만송(晩松) 강렴(姜濂, 1544~1606)의 맏아들로, 찰방을 지냈다.

[주D-026]강익주(姜翊周) : 자는 배중(棐仲), 호는 송은(松隱)이다. 조식의 문인인 만송(晩松) 강렴(姜濂, 1544~1606)의 셋째 아들이다.
[주D-027]봉계(鳳溪)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봉계리이다.
[주D-028]횡포(橫浦) : 현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이다.
[주D-029]황현(黃峴) : 황토재이다. 현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과 북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길이다.
[주D-030]계동(桂洞)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계동 마을이다.

[주D-031]하홍의(河弘毅) : 자는 중오(重吾)이다. 《덕천원생록(德川院生錄)》에 등재되어 있다.
[주D-032]진단(陳摶) : 송(宋)나라 박주(亳州) 진원(眞源)사람으로, 자는 도남(圖南)이다. 그가 화산(華山)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곡식도 먹지 않고 한 번 누우면 100일 동안 일어나지 않고 잤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列傳》
[주D-033]경장(瓊漿)을 …… 생기네 : 경장은 선인(仙人)의 음료이다. 당(唐)나라 때 배항(裵航)이 선녀인 운교부인(雲翹夫人)을 만났을 때, 운교부인이 배항에게 시(詩)를 주어 “경장을 한번 마시면 온갖 감정이 생기고, 현상을 다 찧고 나면 운영을 만나리라. 남교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어찌 꼭 기구하게 옥경을 오르려 하나.〔一飮瓊漿百感生, 玄霜搗盡見雲英. 藍橋便是神仙窟, 何必崎嶇上玉京.〕”라고 하였다. 뒤에 배항이 남교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한 노구(老嫗)의 집에 들어가 물을 요구하자, 노구가 처녀 운영(雲英)을 시켜 물을 갖다 주었다. 그래서 배항이 그 물을 마시고는, 앞서 운교부인의 예언을 생각하여 운영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자, 노구가 “옥저구(玉杵臼)를 얻어 오면 들어 주겠다.” 하므로, 뒤에 배항이 옥저구를 얻어서 마침내 운영에게 장가들어 신선이 되어 갔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古今事文類聚前集 卷34 仙佛部》
[주D-034]부구(浮丘)의 …… 치는 : 세속을 떠나 신선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다는 말이다. 부구는 신선의 이름으로, ‘부구의 어깨를 친다’는 것은 《문선(文選)》 〈유선시(遊仙詩)〉에 “왼쪽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쪽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친다.〔左挹浮邱袖, 右拍洪厓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5]유후(留侯) : 한(漢)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고,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유후의 봉작을 받고 나서 “바라건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신선인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耳.〕”라고 말하고는 벽곡(辟穀)과 도인(導引)의 술법을 행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36]손유경(孫裕卿) : 손작(孫綽, 1577~?)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경, 호는 완매당(玩梅堂)이다. 부친은 직장(直長) 손경례(孫景禮)이다. 하항(河沆)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5) 진사가 되었다.
[주D-037]석문(石門) : 쌍계석문(雙磎石門)을 가리킨다.
[주D-038]흥룡(興龍) : 현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흥룡 마을이다.
[주D-039]신선 세계 : 원문의 ‘호중(壺中)’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뜻한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 한다. 《後漢書 卷72下 費長房列傳》
[주D-040]지팡이가 …… 되리라 :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호리병 속의 별천지에 들어가자 옥당(玉堂)이 화려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그득하여 함께 술을 실컷 마셨다. 그가 돌아올 때에는 자기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하자, 호공이 대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것만 타면 저절로 집에 갈 수 있다.”라고 하므로, 비장방이 그 지팡이를 타고 조는 듯한 순간에 홀연히 집에 당도해서는 그 지팡이를 갈피(葛陂) 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보니, 그것이 금방 청룡으로 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神仙傳 壺公》

[주D-041]군산(君山) : 군산은 중국 호남(湖南) 동정호(洞庭湖) 가운데에 있는 산 이름인데, 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동정호 주변의 산인 듯하다.
[주D-042]강 장기(姜長鬐) : 강덕룡(姜德龍, 1560~1627)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중(汝中), 호는 매촌(梅村)이다. 성여신과 동서지간이다. 일찍이 무예를 익혀 정기룡(鄭起龍)ㆍ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무용(武勇)으로 ‘삼룡(三龍)’으로 불렸다.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하여 함창 현감, 장기 현감을 지냈다. 제1차 진주성전투 때 군기 관리를 맡아 왜병 격퇴에 공을 세웠고,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도와 성주(星州)의 화원현(花園縣), 고령(高靈)의 안림역(安林驛), 삼가(三嘉)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주D-043]상강(湘江) :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에 있는 상수(湘水)를 가리킨다.
[주D-044]악양(岳陽) : 중국 호남성 악양을 가리킨다. 동정호의 경치를 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주D-045]잠시 …… 나눠보니 : 원문의 ‘경개(傾蓋)’는 경개여고(傾蓋如故)의 준말로,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서로 마음이 맞아 옛날부터 사귀던 사이와 같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6]이준민(李俊民) : 1524~159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이다. 조식(曺植)의 자형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4)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 좌참찬 등을 지냈다.
[주D-047]도탄(陶灘)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던 여울이다. 정여창이 거처하며 학문을 강론하던 악양정(岳陽亭)과 추모하는 사당인 덕은사(德隱祠)가 있다.
[주D-048]이곳은 …… 아니겠는가 : 조식(曺植)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49]어관포(魚灌圃) : 어득강(魚得江, 1470~1550)으로,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 호는 자유(子游)ㆍ관포당(灌圃堂)ㆍ혼돈산인(渾沌山人)이다. 1492년(성종23)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 군수(曲江郡守), 산음 현감 등 외관직을 거쳐 장령, 대사간 등을 지냈다. 진주에 은거하였다. 저술로 《동주집(東洲集)》이 있다.
[주D-050]원숭이와 학이 원망했고 : 남북조 때 제(齊)나라의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혜장(蕙帳)이 텅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인(山人)이 떠나감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51]하천주(河天澍) : 1540~?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해숙(解叔), 호는 신계(新溪)이다. 남명(南冥) 조식에게 배웠고, 후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주D-052]응석사(凝石寺)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집현산(集賢山) 기슭에 있는 절이다.
[주D-053]광제사(廣濟寺) : 현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광제산(廣濟山)에 있던 절이다.
[주D-054]단속사(斷俗寺)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었던 사찰이다.
[주D-055]덕산사(德山寺)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에 있는 절이다. 신라 말기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중건되어 내원사(內院寺)라고 하여 오늘에 이른다.

[주D-056]초정(草亭) : 산천재(山天齋)를 가리킨다.
[주D-057]번천동(樊川洞)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反川里)를 가리킨다. 일명 ‘번내’라고도 한다.
[주D-058]어찌 …… 즐비한가 : 요동(遼東) 사람 정 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고 하자 허공으로 날아올라 배회하면서 “옛날 정 영위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소.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바뀌었나니,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즐비한가.〔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하고는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주D-059]늙은 …… 보았네 : 소식(蘇軾)의 〈주중청대인탄금(舟中聽大人彈琴)〉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60]심약(沈約)의 …… 바람 : 심약은 남조(南朝) 양(梁)의 문학가이다. 심약이 동양 태수(東陽太守)로 부임하여 원창루(元暢樓)에 대해 팔영시(八詠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쌍계를 비추는 밝은 달, 팔영루에 부는 맑은 바람.〔明月雙溪水, 清風八詠樓.〕”이라고 하였다. 훗날 원창루는 팔영루로 이름을 고쳤다. 《天中記 卷14 樓》

[주D-061]젊은 …… 노니네 : 당(唐)나라 엄유(嚴維)의 〈송인입금화(送人入金華)〉에 “쌍계를 비추는 밝은 달, 팔영루에 부는 맑은 바람. 젊은 시절 나그네로 머물던 곳, 오늘은 그대들 떠나보내고 노니네.〔明月雙溪水, 清風八詠樓.少年為客處, 今日送君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62]어관포(魚灌圃) : 어득강(魚得江, 1470~1550)으로,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ㆍ자유(子游), 호는 관포당(灌圃堂)ㆍ혼돈산인(渾沌山人)이다. 1492년(성종23)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 군수(曲江郡守), 산음 현감 등 외관직을 거쳐 장령, 대사간 등을 지냈다. 진주에 은거하였다. 저술로 《동주집(東洲集)》이 있다.
[주D-063]황필(黃㻶) : 1464~1526.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헌지(獻之), 호는 상정(橡亭)이다. 아버지는 황귀수(黃龜壽)이다.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다. 1486년(성종17) 약관의 나이로 생진과에 합격하였고, 1492년(성종23)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교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이 심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저술로 《상정일고(橡亭逸稿)》가 있다.
[주D-064]절묘한 문장 : 원문의 ‘황견유부(黃絹幼婦)’는 매우 뛰어난 시문(詩文)을 뜻한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이 유명한 조아비(曹娥碑)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고 써 두었는데, 삼국 시대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脩)가 이를 보고 파자(破字)하여 “황견은 ‘색이 있는 실〔色絲〕’이므로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므로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딸의 아들〔女子〕’이므로 호(好) 자가 되고 제구〔虀臼〕는 ‘매운 것을 받아들이는〔受辛〕’ 것이므로 사(辭)가 된다. 따라서 ‘절묘호사(絶妙好辭)’ 즉 절묘한 좋은 글이란 뜻이 된다.”라고 풀이하였다. 《世說新語 捷悟》
[주D-065]시집에 보인다 : 《부사집》 권2 〈쌍계사팔영루감구음(雙磎寺八詠樓感舊吟)〉이 실려 있다.

[주D-066]삼청(三淸) : 도교(道敎)의 이른바 삼동교주(三洞敎主)가 거처하는 최고의 선경(仙境)이다. 삼청경(三淸境)의 준말로,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말한다.
[주D-067]남태형(南泰亨)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길(元吉)이다. 진주의 진성리(晉城里)에 거주하였다.
[주D-068]하위보(河魏寶) : 1527~? 본관은 진주, 자는 미재(美哉)이다. 진주 단목(丹牧)에 살았다. 1558년(명종1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주D-069]하진보(河晉寶) : 1530~158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재(德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1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 좌랑, 장령, 선산 부사, 밀양 부사, 김해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주D-070]김대명(金大鳴) : 1536~1603. 본관은 울주(蔚州), 자는 성원(聲遠), 호는 백암(白巖)이다. 1558년(명종13) 생원이 되고, 1570년(선조3)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도사(都事)를 거쳐 풍기 군수, 봉산 군수, 괴산 군수 등을 지냈다.

[주D-071]정대함(鄭大咸) : 자는 희선(希善)이다. 1570년(선조3) 진사가 되었다.
[주D-072]공인박(孔仁博) : 자는 여약(汝約)이며, 현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모곡(茅谷) 마을에 거주하였다.
[주D-073]이인민(李仁民) :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원(子元),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이준민(李俊民)의 아우이다.
[주D-074]부사소선(浮査少仙) …… 적벽시선(赤壁詩仙) : 부사소선은 성여신(成汝信)이고, 옥봉취선은 정대순(鄭大淳)이고, 봉대비선은 강민효(姜敏孝)이고, 능허보선은 박민(朴敏)이고, 동정적선은 이중훈(李重訓)이고, 죽림주선은 성박(成鑮)이고, 매촌낭선은 문홍운(文弘運)이고, 적벽시선은 성순(成錞)이다.
[주D-075]남명 …… 기롱하였으니 :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史官)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혀질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두예(杜預)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 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주D-076]꿈 …… 않는다 : 《부사집》에는 이 꿈에 관한 글이 없다.
[주D-077]낭풍(閬風) : 신선 세계를 말한다.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의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주D-078]광성자(廣成子) : 중국 상고 때의 선인(仙人)이다. 공동산(崆峒山) 석실에 은거했는데, 황제(黃帝)가 찾아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다. 《莊子 在宥》
[주D-079]왼쪽엔 …… 부구(浮丘)이고 : 신선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다. 홍애(洪崖)와 부구는 고대 전설 속의 신선이다. 곽박(郭璞)의 〈유선시(遊仙詩)〉에 “왼손으로 부구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오른손으로 홍애의 어깨를 어루만진다.〔左挹浮丘袖, 右拍洪崖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80]적송자(赤松子) : 고대 전설상의 신선이다.

[주D-081]정군(鄭君) : 정희숙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82]흥공(興公) : 진(晉)나라 손작(孫綽)의 자이다.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었다.
[주D-083]벗에게 …… 것이네 : 훌륭한 글을 말한다. 손작(孫綽)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어 그의 벗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면서, “경은 땅에 던져 보시오. 금석 소리가 날 것이오.〔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孫綽傳》
[주D-084]성명(姓名)을 …… 것입니다 : 손유경(孫裕卿)의 이름은 ‘작(綽)’이고, 유경은 그의 자이다. 진(晉)나라 손작과 성명이 똑같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85]요지(瑤池) :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다는 신화 속의 못 이름인데,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주 목왕(周穆王)을 영접하여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穆天子傳 卷3 古文》

[주D-086]기수(琪樹) : 구슬을 드리우고 있다는 선경(仙境)의 옥수(玉樹)이다.
[주D-087]임궁(琳宮) : 신선이 거처하는 곳인데, 여기서는 신응사 절을 가리킨다.
[주D-088]호계(虎溪) : 중국 강서성 구강현 여산의 동림사(東林寺) 앞에 흐르는 시내의 이름이다.
[주D-089]영은사(靈隱寺) : 중국 절강성(浙江省) 황주 서호 가에 있는 절이다.
[주D-090]청허당(淸虛堂) : 서산대사 휴정(休靜)이다. 청허당은 그의 법호이다.

[주D-091]을축년 : 1565년(명종20)을 가리킨다. 이해 가을에 성여신은 쌍계사에 와서 독서하였다.
[주D-092]호계(虎溪) : 중국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개울 이름이다. 혜원이 손님을 전송할 때 호계를 절대로 건너지 않았는데,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에는 서로들 뜻이 맞아 무심코 호계를 건너 버렸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주D-093]평사(平沙)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이다.
[주D-094]손 상사(孫上舍) : 손유경을 가리킨다.
[주D-095]소촌 찰방(召村察訪) : 찰방은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관직이다. 소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진주의 동쪽 24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소촌리 문산초등학교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주D-096]정윤목(鄭允穆) : 1571~162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ㆍ노곡(蘆谷)ㆍ죽창거사(竹窻居士)이다. 아버지는 정탁(鄭琢)이다. 정구(鄭逑)ㆍ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술로 《청풍자집》이 있다.
[주D-097]시집에 보인다 : 《부사집》 권1 〈두류귀로우정찰방윤목음증일절(頭流歸路遇鄭察訪允穆吟贈一絶)〉을 가리킨다.
[주D-098]원운(原韻) …… 있다 : 《부사집》 권1 〈두류귀로우정찰방윤목음증일절(頭流歸路遇鄭察訪允穆吟贈一絶)〉 아래에 차운시가 붙어 있다.
[주D-099]문자음(文字飮) : 술을 마시면서 시문을 짓고 담론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시 한 수를 짓고 술 한 잔을 마시는 놀이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취증장비서(醉贈張秘書)〉에 “장안의 여러 부호의 자식들은, 비린 고기와 훈채를 가득 벌여 놓고, 문자를 논하며 마실 줄은 모르고, 오직 기생에 취할 줄만 아는구나.〔長安衆富兒, 盤饌羅羶葷, 不解文字飮, 唯能醉紅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00]동빈(洞賓)이 …… 때 : 동빈은 8선(仙)의 하나로 불리는 당(唐)나라 여암(呂巖)의 자(字)이다. 그의 시에 “악양루에서 세 번 취하여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맑게 읊조리며 동정호를 날아 지나네.〔三醉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01]청사검(靑蛇劍) : 보검의 이름이다.
[주D-102]세한(歲寒)의 마음 :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주D-103]하중오(河重吾) : 하홍의(河弘毅)로, 중오는 그의 자이다.
[주D-104]대야천(大也川) : 현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지역이다.
[주D-105]동곡(桐谷)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 있는 동곡 마을이다.

[주D-106]조여헌(趙汝獻) : 조경(趙璟, 1563~?)으로, 여헌은 그의 자이다.
[주D-107]곤산(昆山)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의 옛 이름이다.
[주D-108]후방(後方)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D-109]원당(元堂)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내리 원당 마을이다.
[주D-110]곤명(昆明)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이다.

[주D-111]약동(藥洞)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 약골 마을이다.
[주D-112]구름 …… 개 :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임종할 때 먹고 남은 단약 그릇을 뜰에 놓아두었다. 이에 그 집의 닭과 개가 핥아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犬吠于天上, 鷄鳴于雲中.〕”라고 하였다. 《神仙傳 劉安》
[주D-113]수우당(守愚堂) :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이 거처하던 곳으로, 진주 도동촌(道洞村)에 있었다.
[주D-114]황류탄(黃柳灘)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송백리에 있던 황류진(黃柳津) 앞 여울인 듯하다.
[주D-115]곤붕(鵾鵬)이 …… 것 : 북명(北溟)에 길이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큰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다. 이 곤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다. 이 새가 남명(南溟)으로 옮기려면 물 위를 3천 리를 치고 달리다가 날아올라 6개월 동안 9만 리를 날아가 쉬게 된다. 《莊子 逍遙遊》

[주D-116]자고(鷓鴣)가 …… 것 : 자고는 꿩과에 속하는 메추라기 비슷한 새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만 산다고 한다. 진(晉)나라 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에 “자고새는 남쪽으로 날아가 그 속에 그냥 머물고, 공작새는 오색 날개 펼치고서 높이 날아 올라간다.〔鷓鴣南翥而中留, 孔雀綷羽以翶翔.〕”라는 말이 있는데, 그 주(註)에 “자고새는 항상 남쪽으로 날지 북쪽으로는 날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주D-117]명도 선생(明道先生) : 북송(北宋) 때의 학자 정호(程顥)로, 자는 백순(伯淳)이고, 호는 명도이다.
[주D-118]옷소매의 …… 나오랴 : 시 제목은 〈하산우성(下山偶成)〉이다. 인용된 시가 《이정문집(二程文集)》의 원문과 달라 전문을 싣는다. “襟裾三日絶塵埃, 欲上籃輿首重迴. 不是吾儒本經濟, 等閒爭肯出山來.”
[주D-119]회암 선생(晦庵先生) : 남송(南宋)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로, 자는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이다.
[주D-120]유유히 …… 편안하리 : 〈재거감흥이십수(齋居感興二十首)〉중 열다섯 번째 시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飄飄學仙侣, 遺世在雲山. 盜啓元命祕, 竊當生死關. 金鼎蟠龍虎, 三年養神丹. 刀圭一入口, 白日生羽翰. 我欲徃從之, 脱屣謀非難. 但恐逆天道, 偷生詎能安?”

[주D-121]이삼성(李三省) : 1564~1624.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희성(希聖), 호는 구암(耈巖)이다. 아버지는 직장 이춘란(李春蘭)이다. 1599년(선조32)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여 형조 좌랑, 울산 판관 등을 지냈다.
[주D-122]칠송정(七松亭)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水谷面) 원계리(元溪里)에 있던 정자이다. 조정(趙珵)이 세운 것이다.
[주D-123]광탄(廣灘) : 덕천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주D-124]도인술(導引術) :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 몸과 수족을 굴신(屈伸)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주D-125]사마휘(司馬徽) : 삼국 시대 촉(蜀)나라 사람으로, 자는 덕조(德操), 호는 수경(水鏡)이다.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과 교유하며 은거하였다.

[주D-126]장자방(張子房) : 한(漢)나라 개국공신인 장량(張良)으로, 자방은 그의 자이고, 유후(留侯)는 그의 봉호(封號)다. 장량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고,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유후의 봉작을 받고 나서 “바라건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신선인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耳.〕”라고 말하고는 벽곡(辟穀)과 도인(導引)의 술법을 행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127]소하(蕭何)가 …… 것 : 소하는 한 고조(漢高祖)의 참모로, 한나라를 개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소하는 묘성(昴星)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주D-128]부열(傅說)이 …… 것 :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훌륭한 정승이다. 부열이 죽은 뒤에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타고 하늘에 올라 별이 되었다고 한다. 《莊子 大宗師》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김익재 (공역) | 2015







고전번역서 전체 (1)

번호서명권차문체기사저/편/필자간행년도
1부사집(浮査集) 부사집 제6권 잡저(雜著) 종유제현록〔從遊諸賢錄〕 성여신(成汝信) 2015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비슬산(琵瑟山)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정자 망우정(忘憂亭)이다. 현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있다. 세상을 …… 솟구쳤다 《부사집》 권5 〈(...  ...)〉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의춘현(宜春縣) 현 경상남도 의령군의 옛 이름이다. 안주(安宙)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고(太古), 호는 치암(恥庵)이다. 1516년(중종11) 진사가 되고, 1528년(중종23) 식...  ...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었다.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지은 〈장기현감강공묘지(長鬐縣監姜公墓誌)〉에는 공조 참의에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각촌(大覺村)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대각 마을이다. 파산(巴山




서지정보 (2)


번호서명저/편자역자발행처발행년도
1부사집(浮査集)성여신김익재, 정현섭술이2015
|이종영李宗榮-505계서록 鷄黍錄-512방장산 선유일기 -538금산동약 병서 琴山洞約 幷序-584내암집 제6권잡저雜著종유제현록 從遊諸賢錄-593남명 조 선생 南冥曺先生-594구암 이 선생 龜巖李先生-595약포 정 선생 藥...  ...부사집 浮査集 浮査先生文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번역총서 김익재, 정현섭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제56집 소재 《부사집(浮査集)》 최석기 (崔錫起)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술이 일러두기, 해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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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01(지리산기ㆍ유두류록ㆍ지리산일과ㆍ두류기행록ㆍ유두류록ㆍ두류산기행록ㆍ두류산일록ㆍ유두류산록ㆍ방장산선유일기)


서명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01(지리산기ㆍ유두류록ㆍ지리산일과ㆍ두류기행록ㆍ유두류록ㆍ두류산기행록ㆍ두류산일록ㆍ유두류산록ㆍ방장산선유일기)
원서명
저/편자이륙 (李陸 , 1438 ~ 1498) 등 저
저작시기15~17 세기
분류사항사부(史部) 지리류(地理類)
번역대본민족문화추진회 간행 한국문집총간 제13책 소재《청파집(靑坡集)》의 〈지리산기(智異山記, 광해저본)〉, 제12책 소재《점필재집(佔畢齋集)》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제16책 소재《추강집(秋江集)》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제17책 소재《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 , 제31책 소재《남명집(南冥集, 기유본)》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제53책 소재《청계집(靑溪集)》의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과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소장 《감수재집(感樹齋集)》 권6의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1832년 목활자 간행본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소장 《부사집(浮査集)》 권5의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원문판수
항x자
역자이정희 (李政喜)
양판석 (梁判石)
이영숙 (李永淑)
최석기 (崔錫起 , 1954 ~ )
강정화 (姜貞和 , 1969 ~ )
교열
윤문
해제작성최석기 (崔錫起)
색인/탈초작성
번역주관기관돌베개
발행지서울
발행처돌베개
발행년도2001(초판2쇄)
초판발행년도2000
형태사항423 p. ; 23 ㎝
ISBN89-7199-123-2 03810
총서사항참 우리 고전 ; 3
번역형태편역
원문수록방식권말 조판 수록
판형신국판 (224×152)
번역문형태한자병기
번역서본문(면)294
원문(면)73
주석(개)764
기타찾아보기 수록





































































































































고전번역서 서지정보





> 해제 > 고전번역서 > 부사집 부사집(浮査集)



《부사집(浮査集)》 해제(解題)




- 성세(聖世)의 일민(逸民)이었던 불우한 학자 -
                                                                                                       최석기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번역 저본의 서지 사항 및 간행 경위

   이 책은 조선 중기 진주에 살던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 저본인 《부사집》은 8권 4책의 목판본으로, 판심(版心)은 ‘부사집(浮査集)’으로 되어 있으며, 사주쌍변(四周雙邊)이 있고, 반곽(半郭)은 가로 23.8㎝ 세로 17.5㎝이며, 판심(版心)에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가 있다. 또한 계선(界線)이 있고, 반엽(半葉)은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매 행은 22자로 되어 있다. 앞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서문이 붙어 있으며, 권7~권8에 부록이 추가되어 있다.
   이 책은 1785년에 간행된 초간본으로 문중에 남아 있으며, 경상대학교 도서관 천각에는 복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도서번호: 811.98-성여신-부)은 권5~권6이 궐실된 것인데, 1990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국문집총간 제56책을 영인하여 간행할 적에 이 판본을 그대로 수록하여 권5~권6이 빠져 있다.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되지 못한 권5~권6은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에 소장된 것으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부사집》은 부사의 둘째 아들인 성용(成鏞)의 증손 성처회(成處會)가 부사의 유고를 수습하고, 성처회의 아들 성대적(成大勣)이 문체별로 편정하고 〈연보〉를 작성해 붙임으로써 문집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부사의 외손서인 안창한(安彰漢)의 아들 안시진(安時進)이 부사의 문인으로서 1687년경 〈언행록〉을 저술하여 성처회에게 보내, 부록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문집 간행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785년 성대적의 족질 성동익(成東益:成鏞의 5대손)과 족손 성사렴(成師濂)이 안시진의 족증손 안경점(安景漸)에게 찾아가 〈언행록〉의 교정을 부탁하는 한편, 안경점의 족인으로 당대 근기 남인계의 대학자였던 안정복(安鼎福)에게 시문집의 교정을 청하고 서문ㆍ행장ㆍ묘갈명 등을 받았다. 전에 편정해 두었던 원고에 이런 부록 문자를 첨부하여 그해 진주에서 간행하였다.

2. 저자의 생애와 학문

1) 가계 및 생애

   성여신의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査),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부사는 1546년(명종1) 정월 초하룻날 자시(子時)에 진주 동쪽 대여촌(代如村) 구동(龜洞) 무심정(無心亭: 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서 성두년(成斗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 초계 변씨(草溪卞氏)는 충순위 변원종(卞元宗)의 딸이다.
   부사의 집안은 고조부 성우(成祐) 때부터 진주에 살기 시작했다. 증조부 성안중(成安重)은 149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를 지냈고, 조부 성일휴(成日休)는 문장과 효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기묘사화 이후 출사를 포기하고 강호에 은거하였다. 부친 성두년은 자가 추지(樞之)인데, 유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인해 일찍 과거를 포기하였다.
   부사는 8세 때부터 이모부인 조계(槽溪) 신점(申霑)의 문하에 나아가 《소학》ㆍ사서삼경 및 역사서 등을 배웠다. 신점은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으로 조용히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던 인물이다. 부사는 15세 때 진주 향교 교수로 부임한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에게 《상서》를 배웠으며, 16세~17세 때는 인근의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춘추좌씨전》 및 당송고문(唐宋古文)을 읽었다. 18세 때 사천에 살던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을 찾아가 《근사록》을 배웠으며, 21세 때에도 찾아가 학업을 익혔다. 23세 때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처럼 부사는 젊은 시절 지역의 명유들 문하를 두루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는데, 특히 구암과 남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사는 15~6세를 전후해 기초적인 서적을 다 읽고 난 뒤, 인근의 응석사(凝石寺)ㆍ쌍계사(雙磎寺) 등 사찰에서 폭넓은 독서와 문장수업에 들어갔다. 16세 때부터는 응석사에서 《춘추좌씨전》 및 유종원(柳宗元)ㆍ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 등의 고문을 탐독하였으며, 19세 때부터 부친상을 당한 23세 때까지 쌍계사에 가서 독서하였는데, 《춘추좌씨전》ㆍ《사기》 및 당송고문을 즐겨 읽었다.
   23세 되던 해인 1568년 겨울 단속사에서 거접(居接)할 때, 승려 휴정(休靜)《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간행하고, 사천왕상을 새로 만들어 안치했다. 부사는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이 맨 뒤에 수록된 것에 분개하여 거접하던 유생들과 함께 승려들을 꾸짖고 책판을 불태웠으며, 사천왕상과 나한상을 끌어내 목을 잘랐다. 그리고 인근에 살던 남명 조식 선생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게 한 뒤, 다음 날 찾아가 배알하고서 《상서》를 배웠다. 이때부터 남명의 문하에 출입하여 동문들과 교유하였다. 당시 최영경(崔永慶)이 남명을 찾아왔었는데, 그때부터 교분을 맺고 종유하였다.
   부사는 18세 때 관찰사가 순시하다가 치른 시험에서 〈운학부(雲鶴賦)〉를 지어 장원을 차지하였다. 19세 때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인 향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후로 수십 차례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20세 때 만호 박사신(朴士信)의 딸 밀양 박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부사는 23세 때인 1568년 11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고, 1571년 남명과 구암을 찾아뵈었다. 그러나 동년 7월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부친상을 당하기 전 두 차례나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실의에 빠졌던 것 같다. 그러나 삼년상을 마친 뒤, 응석사ㆍ쌍계사에서 경전 및 《심경》ㆍ《근사록》ㆍ《성리대전》 등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의 공부가 주로 문장가들의 고문에 치중해 있었음을 반성하고, 경전 및 성리서를 정밀히 독서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사는 36세 때인 1581년 봄 창녕 선영에 가서 성묘를 한 뒤, 창녕군수로 있던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에 의령(宜寧) 가례(嘉禮)로 이거하여 약 5년 동안 처가에서 살았다. 이때 그는 곽재우(郭再祐)ㆍ이대기(李大期)ㆍ이대약(李大約)ㆍ이종영(李宗榮) 등과 교유하며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 때 사귄 벗들과는 평생 동지적 우의를 유지하였다. 그는 40세 때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 과거를 위한 공부에만 전념하지 않고 심성수양을 다짐하였다. 44세 때인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 동문 최영경ㆍ유종지(柳宗智) 등이 억울하게 죽자 매우 애통해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산 속으로 피난하였다가 1594년에 돌아왔다. 그때 김덕령(金德齡)이 인근 월아산(月牙山)에 진을 치고 있어 함께 군사(軍事)를 논의하였다. 1595년 김덕령이 무고로 구금되자, 신원소를 올려 적극 구원하였다. 1597년 왜적이 다시 침입하여 김천(金泉)으로 피난하였다가, 곽재우가 진을 치고 있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들어가 함께 군사를 도모하였다.
   54세 때인 1599년 고향으로 돌아온 부사는, 부사정 정사(浮査亭精舍)반구정(伴鷗亭)을 짓고 강호에 묻혀 지내는 은일의 삶을 지향한다. 한편 남명의 문인으로서 덕천서원을 중건하는 일에 동참하였으며, 동문 최영경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리는 데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남명이 정한 예를 가지고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예속을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 부사는 이 시기에 경세적 포부를 접고 강호에 은거하는 삶을 지향하지만, 사인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부사는 1602년 최영경을 신원하는 소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서회(鷄黍會)를 결성하였다. 이 계서회는 부사와 이대약ㆍ이종영이 주축이었다. 이 가운데 이종영《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속록(續錄)에 들어 있는 남명의 문인이며, 이대약최영경ㆍ하항(河沆)ㆍ정인홍(鄭仁弘)에게 배운 이대기동생이다. 이들은 모두 부사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불우한 사류로서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다. 부사는 이 계서회의 모임을, 뜻을 얻지 못하여 물러나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사귐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부사는 64세 때인 1609년 생원ㆍ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또한 1613년 68세의 나이로 문과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궤우지로(詭遇之路)’를 써 보라는 관인의 말을 듣고서 “지금 너의 말을 듣고 보니 세도를 알 만하다. 더구나 시사가 안정되지 못하여 삼강이 무너지려 하니, 과거에 합격한들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고서, 곧바로 귀향하였다. 당시의 정국은 이이첨(李爾瞻) 등이 토역(討逆)을 주장하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단하자는 논의가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였는데, 부사의 말은 이런 집권층의 처사를 삼강오륜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아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부사는 현실과의 불화가 깊어져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산수 유람에 빠져들었다.
   1614년 정온(鄭蘊)이 갑인봉사(甲寅封事)를 올렸다가 옥에 갇히자, 부사는 오장(吳長)ㆍ이회일(李會一)ㆍ이각(李殼) 등과 함께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만년에는 정인홍과 절교한 박민(朴敏, 1566~1630)과 가까이 지냈는데, 이 시기부터 집권층인 대북 정권에 동조하지 않고 중북의 입장에 섰던 듯하다.
   부사는 71세 때인 1616년 9월 24일부터 10월 8일까지 15일 동안 하동을 거쳐 쌍계사ㆍ불일암(佛日庵)ㆍ신응사(神凝寺)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동행한 사람이 정대순(鄭大淳)ㆍ강민효(姜敏孝)ㆍ이중훈(李重訓)ㆍ박민(朴敏)ㆍ문홍운(文弘運) 및 맏아들 성박(成鑮)과 넷째 아들 성순(成錞)이다. 이들은 팔선(八仙)이라 자칭하였는데, 성여신은 부사소선(浮査少仙), 정대순은 옥봉취선(玉峯醉仙), 강민효는 봉대비선(鳳臺飛仙), 이중훈은 동정적선(同庭謫仙), 박민은 능허보선(凌虛步仙), 문홍운은 매촌낭선(梅村浪仙), 성박은 죽림주선(竹林酒仙), 성순은 적벽시선(赤壁詩仙)이라 불렀다. 이 유람이 신선들의 놀이였기 때문에 부사는 이 유람록을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라고 이름을 붙였다.
   부사는 72세 때인 1617년 4월 이삼성(李三省)ㆍ박민ㆍ강윤(姜贇)ㆍ하장(河璋)ㆍ조경(曺炅)ㆍ하선(河璿)ㆍ최기(崔屺)ㆍ정위(鄭頠)ㆍ성박(成鑮)ㆍ박성길(朴成吉)ㆍ정시특(鄭時特)ㆍ최후식(崔後寔)등과 다시 지리산을 유람하였으며, 78세 때인 1623년에도 조겸(趙㻩)ㆍ진량(陳亮)ㆍ김옥(金玉)ㆍ조후명(曺後明) 등과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부사는 1622년 하징(河憕)ㆍ조겸ㆍ박민 등과 함께 《진양지(晉陽誌)》를 최초로 편찬하였다. 부사는 1632년 11월 1일 부사정에서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사에 대한 후인들의 인물평을 통해 인물 성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조임도(趙任道)는 만사에서 “문장과 글씨 당대 제일이었네.〔翰墨當年第一人〕”라고 하였으며, 정달겸(鄭達謙)은 만사에서 “문장으로 당대를 놀라게 한 지 구십 년.〔驚代文章九十年〕”이라 하였으며, 하홍도(河弘度)는 제문에서 “문장은 샘물처럼 솟구쳤으며, 글씨는 안진경의 생동하는 서체를 사모했네.〔文辭湧其如泉 字慕魯公之龍蛇兮〕”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부사는 당대 진주 지역에서 문장과 글씨 모두 제일로 칭송되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안정복이 지은 〈묘갈명〉에는 아, 선생이시여. 성스러운 세상의 일민(逸民)이셨네. 젊어서 어진 스승을 만나, 도학의 진면목을 깊이 즐기셨네. 학문은 마음에 근본을 두어, 경(敬)과 의(義)를 함께 병행했네. 행실이 몸에 드러났으니, 효제충신이었네. 교화가 향리에 행하니, 가르침이 젊은 유생들에게 젖어들었네. 뛰어난 재능과 빼어난 기량을 지니고서, 산림에 자취를 숨겼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백성들 복이 없었도다.”라고 하였다.
   안정복은 부사에 대해,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도학자이며, 마음에 근본을 두고 경의를 함께 실천한 유학자이며, 향리에 교화를 베푼 교육자이며, 빼어난 경세적 재능을 지녔지만 뜻을 펴지 못한 일민이었다는 점을 인물 성격으로 드러내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부사는 문장과 글씨가 당대 그가 살고 있던 지역에서 최고였던 인물이었으며, 경(敬)ㆍ의(義)를 함께 실천한 유학자로서 경세적 재능을 지니고서도 세상에 쓰이지 못한 인물로 정리할 수 있겠다.

2) 사회적 역할

   부사의 사회적 역할은 아래와 같이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리학적 이념을 굳게 견지하여 불교를 배척한 것이다. 부사는 23세 때인 1568년 10월 지역에서 선발된 9명의 유생들과 단속사에서 거접할 때, 승려 휴정이 편찬한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이 맨 뒤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책판을 불태우고 나한상과 사천왕상을 끌어내 목을 잘랐다. 그것은 유가의 도를 헐뜯고 선비들을 모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명종 때 승려 보우(普雨)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불교가 다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리학적 이념에 투철했던 젊은 선비들은 불교가 다시 부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니, 부사의 행동은 당대 사림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 시기는 선조가 갓 즉위하여 사림 정치가 열리던 시대였으니, 명종 때 위축되었던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부사는 분개하여 과격한 행동을 하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 신진 사림으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하고자 한 그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신원을 청한 것이다. 부사는 1595년 진주 유생을 대신하여 체찰사에게 김덕령 장군의 신원을 위해 상서하였으며, 1596년에는 김덕령 장군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2년 봄에는 정온(鄭蘊)ㆍ이육(李堉) 등과 함께 기축옥사 때 억울하게 화를 당한 최영경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으며, 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영암에 부처(付處)된 곽재우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1614년에는 갑인봉사를 올렸다가 화를 당하게 된 정온을 구원하기 위해 이대기ㆍ오장(吳長) 등과 함께 소를 올려 신구하였다.
부사는 이런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셋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도와 함께 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1594년 김덕령 장군이 인근에 와서 진을 치자 본가로 돌아와 함께 군사를 의논하였으며, 1597년 김천으로 피난하였다가 곽재우 장군화왕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군사를 의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 및 그들의 활약상을 기리는 글과 김시민 장군이 진양성을 온전히 지켜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넷째,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풍속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우선 후학들을 가르쳐 학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임무로 여겼으며,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이 불에 타 훼손된 것을 동문들과 함께 중건하였다. 또한 자신이 사는 마을의 동약(洞約)을 만들어 상부상조하는 풍속을 일으키려 하였다.
다섯째, 지방 문화에 관심을 갖고 지방지를 편찬한 것이다. 부사는 77세 때인 1622년 지역의 인사들과 함께 《진양지》를 처음으로 편찬하였다.

3) 학문 성향과 문학관

   부사의 학문은 구암 이정을 통해 계발된 효제충신의 도와 남명 조식을 통해 전수된 경의(敬義)로 요약될 수 있다. 구암은 그에게 유학의 근본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남명은 성리학과 심성수양의 요체를 일러주었다. 부사는 이 두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로 융합하여, “효제충신은 경의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경의는 효제충신이 아니면 확립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조선 성리학은 사화기를 거치면서 학자들이 재야에서 위기지학에 전념하여 도덕성을 드높이기 위해 심성수양을 중시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학문 성향을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남명 조식이다. 남명은 성리학이 꽃피는 16세기 중반에 심성수양을 통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론적 탐구에 치중하는 당시의 학풍을 경계하여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말한다.”라고 하면서, 인사(人事)에서 천리를 구하지 않으면 실득이 없다고 하였다.
   부사의 학문 성향도 남명의 이런 학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는 “학자들이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인(天人)의 이치를 말하며, 겉으로는 근엄하고 공손한 체하면서 안으로는 방탕하고 게으르다.”라고 하여, 당시 학자들이 일상의 실천을 외면한 채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함부로 말하는 병폐를 비판하였다. 부사가 퇴계의 문인인 구암에게 수학했으면서도 성리설을 전개한 것이 없는 것은 남명의 이런 학문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부사의 학문 성향이 남명의 학문과 유사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남명과 마찬가지로 광박한 학문을 추구하여 산수ㆍ병진(兵陣)ㆍ의약ㆍ천문ㆍ지리 등에 모두 마음을 두고 궁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부사는 학문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자들은 경전에서 널리 구하고, 백가의 글에 널리 통해야 한다. 그런 뒤에는 번다한 것을 수렴하여 간결하게 해서 자신에게 돌이켜 요약하는 데로 나아가서 스스로 일가의 학문을 이루어야 한다.

   이 말은 정인홍이 지은 남명의 〈행장〉에 있는 내용과 거의 같다. 이는 부사가 문인들에게 강조한 것으로, 그 역시 이와 같은 학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사의 이와 같은 학문관은 퇴계 이후 주자만을 존신하는 쪽으로 경도된 일반적인 학문 성향과 변별되는 성향으로, 남명의 학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부사는 거듭 과거시험에 낙방하자,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41세 때 지은 〈학일잠(學一箴)〉을 보면,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 ‘삼성(三省)’과 맹자(孟子)‘양호연지기(養浩然之氣)’와 자사(子思)의 ‘유일(惟一)’을 마음에 새기며 밤낮으로 고요히 심성수양을 다짐하고 있다. 이 잠의 말미에 “나의 천군(天君)을 섬겨, 마음을 전일하게 함을 주로 해 흩어짐이 없게 하라.”라고 한 것은, 성리학의 경공부(敬工夫)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군’은 ‘마음’을 비유한 것으로, 남명〈신명사도(神明舍圖)〉에 보이는 ‘천군’이다. 이 역시 남명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부사는 40세 이후 강호에 물러나 은거하는 삶 속에서 그의 학문은 심성을 수양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69세 때 자식들을 위해 〈성성재잠(惺惺齋箴)〉을 지었는데, 이 역시 심성수양의 두 축인 존양(存養)ㆍ성찰(省察)의 요지를 뽑아 만든 것이다. 이 잠에서도 남명의 경ㆍ의로 요약되는 수양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는 일신(一身)의 주인을 심(心)으로 보고, 일심(一心)의 주인을 경(敬)으로 본다. 그리고 이를 지키는 방법으로 ‘성성(惺惺)’을 거론하였다. ‘성성’송유(宋儒) 사량좌(謝良佐)가 제시한 경공부의 하나로, 남명〈신명사도〉에서 ‘혼(昏)ㆍ몽(夢)’과 상대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또 이 잠에는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방법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듯이〔鷄伏卵〕’와 ‘고양이가 쥐구멍을 지키고 있듯이〔猫守穴〕’를 인용하고 있는데, 전자는 남명이 삼가(三嘉) 토동(兎洞)에 세운 계부당(鷄伏堂)’의 당호의 의미와 같으며, 후자는 선가(禪家)의 말을 빌어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공부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부사의 학문이 남명경의학에서 연원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자료가 〈삼자해(三字解)〉이다. 이 〈삼자해〉는 부사가 62세 때 쓴 글로, 만년의 삶의 지표였다. 이 글에서 그는 삶의 세 가지 지표로 직(直)ㆍ방(方)ㆍ대(大)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의 효사(爻辭)에서 취한 것이다. 직(直)은 경(敬)에, 방(方)은 의(義)에, 대(大)는 성(誠)에 달려 있다고 보아 심지주(心之主)로, 사지주(事之主)로, 신지주(身之主)로 삼았다. 남명곤괘 문언(文言)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를 취해 자신의 경의학을 수립하였는데, 부사는 곤괘 육이효 효사의 ‘직(直)ㆍ방(方)ㆍ대(大)’를 바탕으로 직(直)ㆍ방(方)과 관련된 경ㆍ의는 물론 대(大)를 성(誠)과 연관 지어 자신의 학문 성격을 특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런 학문 성향은 만년에 완성된 것이다.

   부사는 젊은 시절 대부분 과거를 위한 독서와 문장 수업으로 보냈다. 곧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서 경세제민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포부 외에 또 문학으로 성취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포부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술회하면서, “나는 일찍이 두공부(杜工部)로 자신을 비유하고, 직(稷)ㆍ설(契)의 말로 삼가 나에게 비의했다.”라고 하였다. 곧 두보(杜甫)처럼 시대와 민생을 걱정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고, 순(舜) 임금 조정의 농사를 담당했던 후직(后稷) 또는 교육을 담당했던 설(契)과 같은 인물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포부는 결국 자신을 구속하는 장애요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을 높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부사는 만년에 자아와 세계의 괴리를 인식하고 자신의 포부를 접은 채 은일의 삶을 지향하였다. 그래서 그는 안연(顔淵)과 같은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하기도 하였는데, 〈도초사(舠樵辭)〉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강호에 한 늙은이 살고 있는데 / 江湖有一翁
학문을 해도 시대에 맞지 않아 / 學焉而不適於時
십 년 동안 비파 잡고 지내다 보니 / 十年操瑟兮
귀밑머리 하얗게 세고 바람만 쓸쓸하네 / 兩鬢華髮風蕭蕭
농사를 지어도 풍년을 만나지 못해 / 耕也而不逢於年
쌀독에는 남아 있는 쌀이 없어서, / 甁無儲粟兮
안자처럼 빈한한 삶 굶주리는 날만 느는데 / 一瓢顔巷日空高
걱정 없이 생업을 경영 않고 그럴 생각도 없이 / 休休焉無營無思
고서만 펴놓고 읽으면서 자득해 하네. / 對黃卷而囂囂

   이 글은 굴원(屈原)〈어부사(漁父辭)〉를 본떠 지은 것으로, 강호에 은거하는 삶의 지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글에서 부사는 안회(顔回)안빈낙도를 다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부사의 학문 성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부사는 젊어서 두보 같은 인물이 되고자 하는 문학적 지향을 하였고, 또 당대 진주 일대에서 제일의 문장으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적 성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 사림파의 문학관을 견지하고 있다. ‘시는 성정(性情)이 발하여 소리가 된 것으로……성정지정(性情之正)을 드러내야 한다.’라는 그의 시론은, 주자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는 생각이 성정에서 나와 조화자연의 기미를 참조하고, 읊조리는 것이 사물의 이치를 드러내 만변무궁의 지취(志趣)를 모범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당시(唐詩)의 화려함이나 송시(宋詩)의 섬세함을 탈피하여 아정(雅正)하고 평담(平淡)한 것을 추구하였는데, 특히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를 본받고 있다.

   한유변려문의 부화한 문장을 반대하고 박실한 고문을 주장한 사람이며, 구양수는 이상은(李商隱)의 서곤체(西崑體)를 반대하고 고문의 방법으로 시를 쓰는 새로운 풍격을 이룩한 사람이다. 구양수가 새로 이룩한 시풍은 당송고문과 마찬가지로 형식미보다는 내용미를, 화려함보다는 풍격을 중시하며 이론의 전개나 서사적인 서술도 피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부사는 한유와 구양수를 전범으로 함으로써, 기고(奇高)하고 부화(浮華)하기보다는 이아(爾雅)하고 평담(平淡)한 것을 주로 하여 이치를 수승(殊勝)하게 하는 문예의식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부사의 문학에 대해, 후대 박태무(朴泰茂, 1677~1756)는 “넉넉하고 법도에 맞으며 맑고 아름답고 반듯하여 전혀 경박하고 각박한 기상이나 조탁하고 수식한 자태가 없다.”라고 평하면서 평평한 길을 법도대로 달리는 것에 비유하였다.안정복(安鼎福)“공의 시문은 호건(豪健)하여 이치가 있다.”라고 평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부사의 문학적 성향은 한유구양수를 전범으로 하여 아정평담(雅正平淡)함을 주로 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3. 문집의 체제 및 내용

1) 문집의 체제

   《부사집》은 8권 4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서문과 목록이 실려 있다. 권1~권2는 시(詩)와 사(辭)ㆍ부(賦), 권3은 소(疏)ㆍ서(書)ㆍ서(序)ㆍ발(跋)ㆍ기(記), 권4는 상량문(上樑文)ㆍ잠(箴)ㆍ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ㆍ비명(碑銘)ㆍ묘지(墓誌)ㆍ제고축문(祭告祝文), 권5~권6에는 잡저, 권7~권8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이를 문체별로 보다 상세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권별문체별편수
권두서문1편
목록1편
권 1오언절구14수
오언율시10수
오언고시5수
육언절구1수
칠언절구96수
권 2칠언율시 22수
칠언고시8수
사(辭)1수
부(賦)2수
권 3소(疏)1편
서(書)6편
서(序)2편
발(跋)1편
기(記)7편
권 4상량문(上樑文)3편
잠(箴)3편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20수
비명(碑銘)2편
묘지(墓誌)1편
제고축문(祭告祝文)7편
권 5잡저(雜著)10편
권 6잡저2편
권 7부록(附錄)세계도, 연보
권 8부록언행록, 행장, 묘지명병서, 만사, 제문, 봉안문, 상향문


2) 내용 및 특징

   권1~권2에 수록된 시는 대개 만년의 작품으로 모두 150여 수 정도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절구가 110수나 된다. 이를 보면 부사는 율시보다 절구를 즐겨 지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부화한 것을 싫어한 그의 문학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부사의 시세계에 나타난 특징을 정리해 보면, 첫째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펴 보지 못한 이 서려 있으며, 둘째 만년에 불화가 극대화되어 선계(仙界)를 유람하는 선취경향(仙趣傾向)을 보이고 있으며, 셋째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사의식이 표출되어 있으며, 넷째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안빈낙도의 정신이 들어 있으며, 다섯째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며 지은 역사에 대한 회고가 많이 담겨 있다.

   첫째, 이상과 포부를 펴보지 못한 한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오언절구로 된 〈섭빈음(鑷鬢吟)〉의 서문에서 자신은 두보(杜甫) 같은 시인이 되고자 했고 후직(后稷)이나 설(契)처럼 공업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런 포부가 이미 어긋났다는 점을 말하고, 이어 만년에는 신선이 되기를 구했지만 그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면서 설(契) 등에 비유한 것 헛된 말이 되었고, 신선이 되길 구한 것도 이룩하지 못했네. 요순시대로 만들고자 했던 포부 이미 어긋났으니, 귀밑의 흰 머리털 뽑기를 그만두었네.”라고 읊조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빚어진 불화를 단적으로 드러낸 시이다.

   이런 그의 심경을 가장 잘 표현한 시가 〈아유일가(我有一歌)〉이다. 이 시는 모두 5장으로 된 오언고시체의 연작시로, 매 장은 20구로 되어 있다. 제1장부터 제4장까지는 시인이 자신의 재주를 거문고ㆍ옥ㆍ장검ㆍ천리마에 비유하면서 이런 재주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한하였고, 제5장은 세상에 쓰이지 못해 자연에 묻혀 사는 자신의 빈한한 삶을 노래하였다. 이 가운데 네 번째 시를 인용해 본다.

나에게 한 마리 천리마가 있으니 / 我有一良驥
덕으로 기르고 힘으로 다루지 않네 / 以德不以力
어떤 이는 이 말이 악와(渥洼)에서 왔다 하고 / 或云渥洼
어떤 이는 이 말이 형하(濚河)에서 왔다 하네 / 或云瀠河
두 귀는 가을 대나무를 벤 듯이 삐죽하고 / 兩耳批秋竹
두 발굽은 차가운 옥을 자른 듯 단단하네 / 雙蹄削寒玉
예천(醴泉)의 물을 목마른 듯이 마시고 / 醴泉水渴飮
옥산(玉山)의 곡식을 주린 듯 먹어 치우네 / 玉山禾飢食
달리고자 하면 하루에 천리 길을 가고, / 欲騁千里途
팔고자 하면 연성(連城)의 가치일세. / 欲買連城直
그런데 세상 사람들 천리마를 몰라보고, / 世人昧天才
모두 한통속으로 용렬한 말로만 보네. / 滔滔視之劣
세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값이 싼 말, / 所好就價微
보잘 것 없는 노둔하고 졸렬한 말이라네 / 駑駘之齷齪
방성(房星)은 부질없이 빛나고 / 房星空熒熒
용매(龍媒)는 마구간에서 늙어가네 / 龍媒老槽櫪
가을바람 불어오는 기나긴 밤에는 / 秋風吹永夜
허기져 머리 들고 울며 서성거리네 / 仰秣鳴跼踖
손양(孫陽)은 어느 곳에 있는가 / 孫陽在何處
고개 떨구고 소금수레에 엎드려 있네 / 垂首鹽車服

   이 시는 자신이 천리마의 재주를 지니고 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시골에 묻혀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부사는 중년 이후 이런 탄식을 자주 하였다. 인근에 있는 청곡사(靑谷寺)를 둘러보고 쓴 〈유청곡사(遊靑谷寺)〉 두 번째 시에서도 “젊은 시절 학문을 연마한 곳 바로 이 산중, 굶주리며 부지런히 공부한 것 부질없이 되었네. 만사가 지금은 한바탕 꿈이 되었으니, 백발로 추풍을 대하기가 부끄럽구나.”라고 하였다.

   둘째, 선유(仙遊)를 통한 선취경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자신의 포부를 펴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사의 불화는 1613년 대북 정권의 노선에서 이탈한 뒤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잠시 현실을 떠나 선계를 찾아 나서는 선취경향을 보인다. 산수벽이 있던 그에게 극대화된 불화는 급기야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선유의 길로 나서게 하였다. 그는 71세 때인 1616년 가을 15일 동안 쌍계사 등지를 유람하였는데, 곤양(昆陽) 땅을 지나면서 “나는 이 세상의 사람, 애초 물외의 사람이 아니었네. 가을바람에 높은 흥취 일어나니, 신선을 배우는 사람이 되리라.”라고 읊었다. 또 정대순(鄭大淳)의 시에 화답하면서 “이 한 몸 이미 늙었으니, 온갖 계책 긴 탄식만 자아낼 뿐. 소매 떨치고 진(眞)을 찾아 나서는 길, 아름다운 약속 어기지 않아 기쁘네.”라고 하였다.

   부사는 이런 마음으로 쌍계사ㆍ신응사 등지를 둘러보면서 신선세계에 매료된 듯한 의식을 보인다. 쌍계사에 이르러서는 “선원(仙源)으로 가고픈데 어느 곳일까, 향로봉 위에서 고운(孤雲)을 부르리라.”라고 노래하였으며, “난새를 곁말로 삼청(三淸)에 가려 하니, 누가 학을 타고 나와 함께 가려나.”라고 읊조렸으며, 불일폭포 근처 고령대(古靈臺)에 올라서는 “홍애(洪崖)를 좌로 하고 부구(浮丘)를 우로 하도다, 고운을 부름이여 진결을 묻노라.”라고 선유사를 지었다. 이런 시구를 보면 그 당시 부사는 신선이 되기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현실권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는 사의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유람을 마치고 돌아올 적에 불화가 어느 정도 해소되어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새롭게 자각하는 현실인식을 보인다. 그는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평생토록 경세제민 꿈꾸지 않았다면, 학을 몰고 난새를 곁말로 할 수 있었으리.”라고 노래하면서, 사인으로서의 경세적 본분을 환기시켰다. 그는 유람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사인의 한 몸은 경세제민을 그 계책으로 삼고, 사인의 한 마음은 남과 함께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으로 지향을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산에는 어찌 들어갈 수 없겠으며, 신선은 어찌 배울 수 없겠는가?

   현실세계에서 뜻을 얻지 못하여 현실권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는 사인으로서의 책무를 다시 각성한 것이다. 현실을 떠난 지식인은 유가에서 결신난륜(潔身亂倫)무리로 지탄한다. 즉 자신만 깨끗하기를 추구하여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부사가 현실의 불화 때문에 선계를 찾았지만, 그는 끝내 신선이 되기를 구하지 않고 사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사림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아 각성이 뚜렷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부사는 자신의 선유를 “이름은 선(仙)이지만 실제는 선이 아니다.”라고 그 의미를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런 사의식은 그가 최치원을 ‘유선(儒仙)’으로 부른 것이나, 경주에 가서 김시습(金時習)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그가 선가(禪家)로 도피한 것 누가 알리 그 속내를, 단지 옛 임금을 위해 끝내 잊지 못한 것일 줄을.”이라고 노래한 것이나, 곽재우에 대해 “솔잎 먹으며 신선술 일삼은 것 말하지 말라, 유후(留侯)가 어찌 신선을 배운 사람이리.”라고 노래한 데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부사의 선취는 신선세계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유학자로서 선유를 즐긴유선적 선취(儒仙的 仙趣) 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넷째, 은거하여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안빈낙도 정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아유일가〉 제5수는 앞의 4수와는 달리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자연에 묻혀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그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나에게 한 칸의 초가집이 있으니 / 我有一間屋
띠풀 집 집안이 항상 적막하구나 / 茅簷長寂寂
사람들은 천만 칸의 집을 좋아하지만 / 人喜千萬間
나는 무릎 펼 만한 이 집을 기뻐하네 / 我喜僅容膝
남들은 금과 비단 쌓아두길 좋아하지만 / 人喜積金帛
나는 한 섬 곡식을 비축한 것도 기쁘네. / 我喜貯甔石
시렁 위에 쌓인 만 권의 책 속에는, / 牀上萬卷書
요ㆍ순ㆍ공자ㆍ맹자의 말씀이 들어 있네 / 堯舜孔孟說
창가에 있는 다섯 이랑 정원에는 / 窓邊五畝園
설중매와 푸른 대가 심어져 있네 / 寒梅與綠竹
때가 되면 강가의 밭을 갈아 / 時耕江上田
벼와 삼, 콩과 보리를 심네 / 禾麻雜菽麥
때론 강에 나가 물고기를 낚기도 하니 / 時釣滄江魚
은빛 붕어와 누런 잉어, 그리고 쏘가리 / 銀鯽黃鯉鱖
집안에서 자손들을 가르치다 보니 / 室中敎仔孫
하루 종일 굶주림과 목마름을 잊네 / 昕夕忘飢渴
바라는 바는 질병이 없는 것 / 望以無疾病
힘쓰는 바는 과실이 적은 것 / 勉以少過失
이와 같이 남은 생을 보낸다면 / 如斯送餘年
길이 끝나도 통곡을 면할 줄 알리 / 途窮知免哭

   이 시는 자신의 재주와 포부를 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개탄을 노래한 앞의 4수와는 달리,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만년의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부사의 삶의 자세는 78세 때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뒤 쓴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86개의 입성(入聲) 운자로 쓴 172구의 장편고시로, 구양수〈여산고(廬山高)〉한유〈남산시(南山詩)〉를 본떠 지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자는 선유를 통해 얻은 정신적 청량감을 한껏 과시하고 나서 “고금의 인물이 같고 다른지는 내 모르지만, 다만 조물주와 한무리 되어, 산천의 언덕을 소요하기도 하고, 인간 세상에 마음껏 노닐기도 하니, 구애됨도 없고 얽매임도 없구나.”라고 노래하여, 만년의 걸림이 없는 삶의 지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부사는 만년에 현실세계에서 오는 불화를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극복하면서 자유로운 정신적 여유를 얻은 듯하다. 그는 만년에 선(仙)과 속(俗)을 물외와 현실의 영역에서 찾지 않고 마음속 진(眞)의 세계를 찾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금천구곡(琴川九曲)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武夷九曲)보다 못할 것이 없는 선구(仙區)로 여기며, 자연과 조화된 참된 즐거움을 찾았다. 이런 정서를 담은 시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노래한 〈구곡시(九曲詩)〉 9수와 〈양진당팔영(養眞堂八詠)〉 8수를 눈여겨 볼만하다.

   다섯째, 유적지를 돌아보며 역사를 회고하는 역사인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사는 젊은 시절 역사서를 즐겨 읽었으며, 노년임에도 《진양지》 편찬을 주도할 정도로 역사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하고 신라의 역사를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고, 평양을 둘러보고 12수의 절구를 남겼다. 이 외에도 〈동도회고(東都懷古)〉ㆍ〈서도회고(西都懷古)〉ㆍ〈용장사(茸長寺)〉 등 역사를 회고한 시가 몇 수 더 있다. 부사가 남긴 150여 수의 시 가운데 가 40여 편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의 역사인식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영사시는 민속이나 역사를 노래한 악부시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 시편들에는 역사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구제하려는 세사상이 들어 있다.

   이상에서 권1~권2에 실린 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권2의 말미에는 〈도초사(舠樵辭)〉ㆍ〈화횡황아병중술회부(和鐄黃兒病中述懷賦)〉ㆍ〈차별지부증별김동리윤안(次別知賦贈別金東籬允安)〉 등 3편의 사(辭)ㆍ부(賦)가 실려 있다. 〈도초사〉는 뜻을 얻지 못한 사인으로서 안회(顔回)처럼 안빈낙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글이고, 〈화횡황아병중술회부〉는 셋째 아들의 병중에 자신의 공부한 내력과 과거에 실패한 것 등을 돌아보며 아들에게 마음을 잘 조섭할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차별지부증별김동리윤안〉은 1611년 지은 것으로, 한유(韓愈)〈별지부송양의지(別知賦送楊儀之)〉에 차운하여 김윤안(金允安)을 전별한 글이다.

   권3에는 소(疏)ㆍ서(書)ㆍ서(序)ㆍ발(跋)ㆍ기(記)가 실려 있다. 소는 〈양전시진폐소(量田時陳弊疏)〉 1수가 실려 있는데, 양전(量田)할 적에 눈으로 목격한 폐단에 대해 상소한 글로 그의 경세제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서(書)는 대김장군덕령상체찰사이공원익서(代金將軍德齡上體察使李公元翼書)〉 등 6편이 실려 있다. 발은 〈연주시발(聯珠詩跋)〉 1편이 실려 있고, 기는 〈양직당기(養直堂記)〉 등 7편이 실려 있다. 〈연주시발〉은 원나라 때 만든 당ㆍ송의 대표적 시를 뽑아 평석을 붙인 《당송천가연주시격(唐宋千家聯珠詩格)》에 발문을 단 것으로, 부사의 시론(詩論)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기문 가운데 〈진양전성기(晉陽全城記)〉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온전히 보존한 김시민 장군공적을 드러낸 것이다.

   권4에는 상량문 4편, 잠(箴) 3편, 우리나라 역대 현인을 칭송한 20수의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 비명(碑銘) 2편, 묘지(墓誌) 1편, 제고축문(祭告祝文) 7편이 실려 있다.
3편의 잠은 〈학일잠(學一箴)〉ㆍ〈만오잠(晩寤箴)〉ㆍ〈성성재잠(惺惺齋箴)〉으로, 부사의 학문정신이 심성수양의 실천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방제현찬〉은 우리나라 현인 20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학문과 덕을 칭송한 시이다. 신라 시대 인물로는 최치원(崔致遠), 고려 시대 인물로는 정몽주(鄭夢周)ㆍ길재(吉再)ㆍ서병(徐甁)ㆍ이집(李集)ㆍ김주(金澍)ㆍ원천석(元天錫) 등 6인, 조선 시대 인물로는 김종직(金宗直)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일손(金馹孫)ㆍ서경덕(徐敬德)ㆍ정희량(鄭希良)ㆍ김정(金淨)ㆍ성수침(成守琛)ㆍ송인수(宋麟壽) 등 13인이 들어 있다. 고려 시대 인물 6인의 찬 뒤에 후지가 붙어 있고, 조선 시대 인물 13인의 찬 뒤에도 후지가 붙어 있는데, 이들에 대해 찬을 쓴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려 시대 인물 가운데 서병ㆍ이집ㆍ김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신라ㆍ고려 시대 인물 7인의 찬 뒤에 붙은 후지에 의하면, 최치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일 뿐 아니라 속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언급하였고, 정몽주길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도학을 연 성리학의 종장임을 드러냈다. 나머지 서병이집충성을, 김주와 원천석고려가 망하자 이조를 등진 을 각각 들었다. 부사는 오운(吳澐, 1540~1617)이 편찬한 《동사찬요(東史簒要)》에서 이 네 사람의 사적을 보고 그들에 대해 전해지는 것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충절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이들의 찬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 시대 인물 13인에 대한 후지에 의하면,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ㆍ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연원을 우선 중시하여 언급하고, 김일손정충(貞忠)한 점을, 정희량기미(機微)를 안 을 들었다. 그 이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남명 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남명ㆍ구암은 부사의 스승이기 때문에 자기 스승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사집》 권6에 실린 〈종유제현록〉을 보면, 남명ㆍ구암 등 스승으로부터 종유했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인적 사항을 차례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를 두고 미루어 보면, 남명이 퇴계와 동갑이지만 자신이 배운 스승이기 때문에 퇴계까지만 거론하고 남명은 넣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사의 학문 성향은 남명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성리학이 발양하던 시기에 남명처럼 수양론 위주의 학문을 택하였다. 그렇다면 부사가 우리나라 도학의 연원을 거론할 때 남명을 그 도통에 위치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왜 넣지 않은 것일까? 여전히 의문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그 뒤에 실린 비명ㆍ묘지는 김시민ㆍ강덕룡(姜德龍) 장군에 관한 전기이다.

   권5에는 잡저로 〈삼자해(三字解)〉ㆍ〈칠의와설(七宜窩說)〉ㆍ〈경계책(經界策)〉ㆍ〈문계기무론(聞鷄起舞論)〉ㆍ〈문(問)〉ㆍ〈계서약록서(鷄黍約錄序)〉ㆍ〈계서약록기(鷄黍約錄記)〉ㆍ〈계서록(鷄黍錄)〉ㆍ〈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ㆍ〈금산동약병서(琴山洞約幷序)〉 등이 실려 있다.

  삼자해〉《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에 나오는 ‘직(直)ㆍ방(方)ㆍ대(大)’‘경(敬)ㆍ의(義)ㆍ성(誠)’에 연관시킨 것으로, 부사가 추구한 학문의 요체를 드러낸 글이다. 〈경계책〉사마시의 시권(試券)으로 토지 제도와 세금 문제를 논한 것이며, 〈문계기무론〉시권으로 중국 진(晉)나라 때 조적(祖逖)의 고사를 통해 초야의 사인이 재능을 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함을 논한 글이며, 〈문(問)도 시권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성의정심(誠意正心)하여 존양성찰(存養省察)한 사람을 군자라고 정의하고서, 공자 문하에서 남궁괄(南宮适)ㆍ복부제(宓不齊)를 그런 군자라고 논한 글이다.

 〈계서약록기〉는 부사와 이대약(李大約)ㆍ이종영(李宗榮) 등이 매년 봄ㆍ가을에 만나는 계서회의 모임을 결성하게 된 배경을 기록한 글이고, 〈계서록〉은 그 실제 모임을 기록해 놓은 글이다. 〈방장산선유일기는 1616년 정대순(鄭大淳)ㆍ박민(朴敏) 등 자칭 팔선(八仙)과 함께 쌍계사 방면을 유람하고 남긴 장편의 유람록이다. 〈금산동약병서〉는 부사가 살던 금산 마을에 자신이 만든 향약을 시행한 내력과 그 규약을 기록해 놓은 글이다.

   권6도 잡저로 〈종유제현록(從遊諸賢錄)〉〈침상단편(枕上斷編)〉이 실려 있다. 〈종유제현록〉은 스승 남명ㆍ구암ㆍ약포로부터 종유했던 인물들을 대략 기록해 놓은 글로, 그의 사승 및 교유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맨 앞에 남명ㆍ구암ㆍ약포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 인물에 대해서만 ‘선생’으로 표기하여 사승 관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가 어려서 배운 신점(申霑)에 대해서는 ‘조계 신공(槽溪申公)’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 뒤로는 공(公)으로 칭하거나 성과 호만 기록해 놓았다. 그 뒤에 실린 인물로는 박승임(朴承任)ㆍ최영경(崔永慶)ㆍ정구(鄭逑)ㆍ곽재우(郭再祐)ㆍ이제신(李濟臣)ㆍ강심(姜深)ㆍ하항(河沆)ㆍ박제인(朴齊仁)ㆍ이로(李魯)ㆍ이염(李琰)ㆍ유종지(柳宗智)ㆍ이광우(李光友)ㆍ김덕령(金德齡)ㆍ이정(李瀞)ㆍ이대기(李大期)ㆍ이천경(李天慶)ㆍ하응도(河應圖)ㆍ진극경(陳克敬)ㆍ하항(河恒)ㆍ신가(申檟)ㆍ하징(河憕)ㆍ김윤안(金允安)ㆍ정승윤(鄭承尹)ㆍ한계(韓誡)ㆍ최여경(崔餘慶)ㆍ강언평(姜彦平)ㆍ강덕룡(姜德龍)ㆍ이흘(李屹)ㆍ이대약(李大約)ㆍ하천주(河天澍)ㆍ김우옹(金宇顒)ㆍ조종도(趙宗道)ㆍ정온(鄭蘊)ㆍ오장(吳長)ㆍ박민(朴敏)ㆍ한몽삼(韓夢參)ㆍ조임도(趙任道)ㆍ하홍도(河弘度)ㆍ하진(河溍)ㆍ정윤목(鄭允穆)ㆍ이육(李堉)ㆍ이각(李殼)ㆍ이곤변(李鯤變)ㆍ강민효(姜敏孝) 등이 있다.

 〈침상단편〉은 부사가 별세하기 직전 학문의 요체에 관해 언급한 내용으로, 태극(太極)ㆍ이기(理氣)ㆍ오행(五行)ㆍ오상(五常)ㆍ심통성정(心統性情)ㆍ지의(志意)ㆍ체용(體用)ㆍ중화(中和)ㆍ충서(忠恕)ㆍ성정(誠正)ㆍ경의(敬義)ㆍ신독(愼獨)ㆍ존양성찰(存養省察)ㆍ격물치지(格物致知)ㆍ효제충신(孝悌忠信)ㆍ위학지도(爲學之道)ㆍ교인지술(敎人之術)ㆍ역행(力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은 부사의 학문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권7은 부록으로 〈세계도〉〈연보〉가 실려 있는데, 〈연보〉는 부사의 현손 성처회(成處會)의 아들 성대적(成大勣)이 만든 것이다.

   권8은 부록으로 〈언행록〉ㆍ〈행장〉ㆍ〈묘지명〉ㆍ만사 등이 실려 있다. 〈언행록〉은 부사의 외손서인 안창한(安彰漢)의 아들 안시진(安時進)이 부사의 문인으로서 1687년 작성한 것이며, 1785년 외6대손 안경점(安景漸)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것이다. 〈행장〉〈묘지명병서〉는 1785년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것이다. 만사는 조임도(趙任道)ㆍ한몽삼(韓夢參) 등 10인이 지은 것이 실려 있으며, 제문하홍도(河弘度)가 지은 1편이 실려 있다. 또 이규년(李奎年)이 지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이 1편씩 실려 있다.

4. 자료의 가치

   부사는 남명 조식의 문인 가운데 진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이기 때문에 남명학을 다음 세대에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부사의 학문 성향이 남명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사집》은 남명학의 전개 양상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부사는 광해군 말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반대한 중북의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따라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인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살피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부사는 자신이 언급하고 있듯이, 두보처럼 문학적 성취를 하고자 하는 포부와 후직(后稷)ㆍ설(契)처럼 경세제민의 재능을 펴고자 하는 포부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비록 경세적 재주를 당대에 시험하지는 못했지만, 문학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취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와 산문 속에서는 매우 수준 높은 문학적 형상화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17세기 전반 진주 지역 문인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여겨진다. 특히 유학자로서 현실세계에서 오는 불화를 달래기 위해 선유(仙遊)를 하면서 느끼는 정서를 기록한 방장산선유일기는 이 시기 지식인의 성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17세기 전반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향촌에 살던 사인들의 정신적 지향과 사회적 활동 등을 그의 문집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문학 방면뿐만 아니라, 정치ㆍ사회 방면에서도 활용도가 높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부사의 시 속에는 역사를 노래한 시가 다수 있기 때문에 17세기 전반 사인의 역사인식을 살피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가 살던 곳에 경영한 금천구곡(琴川九曲)도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구곡이므로 구곡문화를 살피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2015년 4월 30일

[주-D001] 부사는 …… 하겠는가 : 
成汝信, 《浮査集》 권7, 〈年譜〉 참조.
[주-D002] 조임도(趙任道)는 …… 하였으며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만사.
[주-D003] 정달겸(鄭達謙)은 …… 하였으며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만사.
[주-D004] 하홍도(河弘度)는 …… 하였다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제문.
[주-D005] 안정복이 …… 하였다 : 
성여신, 《부사집》 권8, 부록, 〈묘갈명병서〉.
[주-D006] 효제충신은 …… 않는다 : 
성여신, 《부사집》 권6, 〈枕上斷編〉. “孝悌忠信, 非敬義, 則不行, 敬義, 非孝悌忠信, 則不立.”
[주-D007] 손으로 …… 말한다 : 
曺植, 《南冥集》 권2, 〈與退溪書〉. “近見學者, 手不知灑掃之節, 而口談天理.”
[주-D008] 학자들이 …… 한다 : 
성여신, 《부사집》 권8, 〈言行錄〉. “學者, 手不知灑掃之節, 而口談天理, 外爲莊恭, 而內實放惰.”
[주-D009] 학자들은 …… 한다 : 
성여신, 《부사집》 권8, 〈言行錄〉. “且學者, 博求經傳, 旁通百家, 然後斂煩就簡, 反躬造約, 自成一家之學.”
[주-D010] 정인홍이 …… 내용 : 
조식, 《남명집》 권두, 〈行狀〉. “盖先生, 旣以博求經傳, 旁通百家, 然後斂煩就簡, 反躬造約, 而自成一家之學.”
[주-D011] 나의 …… 하라 : 
성여신, 《부사집》 권4, 〈學一箴〉. “事我天君, 主一無適.”
[주-D012] 나는 …… 비의했다 : 
성여신, 《부사집》 권1, 〈鑷鬢吟幷序〉. “翁, 嘗用杜工部竊比, 稷契之語, 竊比於己.”
[주-D013] 강호에 …… 하네 : 
성여신, 《부사집》 권2, 〈舠樵辭〉. “江湖有一翁, 學焉而不適於時, 十年操瑟兮, 兩鬢華髮風蕭蕭, 耕也而不逢於年, 甁無儲粟兮, 一瓢顔巷日空高, 休休焉無營無思, 對黃卷而囂囂.”
[주-D014] 시는 …… 한다 : 
성여신, 《부사집》 권3, 〈聯珠詩跋〉. “詩者, 性情之發, 而爲聲者也. 人之心, 主一身而統性情. 聞善言, 則感發焉, 見惡事, 則懲創之. 其所以感發焉懲創之者, 無非性情之正也.”
[주-D015] 그의 …… 흡사하다 : 
《논어》 〈爲政〉 제2장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에 대해,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凡詩之言, 善者, 可以感發人之善心, 惡者, 可以懲創人之逸志, 其用歸於使人得其性情之正而已.”라고 하였다.
[주-D016] 생각이 …… 하였다 : 
성여신, 《부사집》 권3, 〈聯珠詩跋〉. “學之者, 苟能尋章而得其格, 逐句而中其調, 思出性情而參造化自然之機, 吟形物理而模萬變無窮之趣, 興於之訓, 學夫之戒, 遵而勿失, 則學者之初, 庶有益矣.”
[주-D017] 당시(唐詩)의 …… 있다 : 
성여신, 《부사집》 권3, 〈聯珠詩跋〉. “唐人環麗之習, 沿六朝也, 而韓愈氏痛正之, 宋朝纖巧之態, 襲西崑也, 而歐陽子力攻之, 然後絺繡之章, 化而爲爾雅, 靡曼之句, 換而爲平淡.”
[주-D018] 넉넉하고 …… 비유하였다 : 
朴泰茂, 《西溪集》 권6, 〈題浮査先生遺卷後〉. “先生所著述詩若文, 亦非拘曲士弄觚墨者所能幾及, 而紆餘典贍, 淸麗雅正, 了無輕浮刻薄之氣, 彫琢粉飾之態, 而比之如平路逸駕範驅而不失其馳, 則先生平日所養, 粹然而深, 卓然而高, 推之文章之末, 而自如是, 沖澹和平, 得性情而中軌度者耳.”
[주-D019] 공의 …… 있다 : 
성여신, 《부사집》 권8, 〈墓碣銘〉. “公之詩文, 豪健有理致.”
[주-D020] 설(契) …… 그만두었네 : 
성여신, 《부사집》 권1, 〈鑷鬢吟 幷序〉. “比契徒虛語, 求仙亦未詳, 君民計已左, 休鑷鬢邊霜.”
[주-D021] 악와(渥洼) : 
한 무제 때 용마가 나왔다는 감숙성 안서현의 강 이름.
[주-D022] 형하(濚河) : 
복희씨 때 용마가 나왔다는 황하.
[주-D023] 예천(醴泉) : 
태평성대에 솟아나는 단술처럼 맛이 좋은 샘물.
[주-D024] 옥산(玉山) : 
좋은 벼가 나는 산으로 곤륜산을 말함.
[주-D025] 연성(連城) : 
진 소왕(秦昭王)이 화씨옥(和氏玉)을 15개의 성과 바꾸고자 한 데서 나온 말로, 화씨옥을 연성옥(連城玉)이라 한다.
[주-D026] 방성(房星) : 
거마(車馬)를 담당하는 별.
[주-D027] 용매(龍媒) : 
준마를 가리킴.
[주-D028] 손양(孫陽) : 
말을 잘 알아본 백락(伯樂)을 가리킨다.
[주-D029] 젊은 …… 부끄럽구나 : 
성여신, 《부사집》 권1, 〈遊靑谷寺〉 제2수. “少年磨劒此山中, 暎雪啖蔬枉費功, 萬事如今成一夢, 羞將白髮對秋風.”
[주-D030] 나는 …… 되리라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我是寰中人, 初非物外人, 秋風動高興, 將作學仙人.“
[주-D031] 이 한 몸 …… 기쁘네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一身已潦倒, 百計入長嗟, 拂袖尋眞路, 佳期喜不差.”
[주-D032] 선원(仙源)으로 …… 부르리라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欲泝仙源何處是, 香爐峯上喚孤雲.”
[주-D033] 난새를 …… 가려나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驂鸞欲向三淸去, 駕鶴何人共我廻.”
[주-D034] 홍애(洪崖)를 …… 묻노라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左洪崖兮右浮丘, 喚孤雲兮問眞訣.”
[주-D035] 평생토록 …… 있었으리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平生倘不懷經濟, 鶴可駕兮鸞可驂.”
[주-D036] 사인의 …… 없겠는가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士之一身, 經濟其策, 士之一心, 兼善其志. 不然, 山何可不入, 仙何可不學.”
[주-D037] 이름은 …… 아니다 : 
성여신, 《부사집》 권5, 〈方丈山仙遊日記〉. “然則今我仙遊, 名雖仙也, 實非仙也.”
[주-D038] 그가 …… 부른 것 : 
성여신, 《부사집》 권1, 〈敬次灌圃魚先生雙磎寺八詠樓韻〉 제4수. “何年星隕矗荒原, 四字雙刻萬古存, 天爲儒仙留勝迹, 至今雲物護嵓石.”
[주-D039] 그가 …… 줄을 : 
성여신, 《부사집》 권1, 〈茸長寺〉. “逃禪誰識逃禪意, 只爲舊君終不忘.”
[주-D040] 솔잎 …… 사람이리 : 
성여신, 《부사집》 권2, 〈挽郭忘憂堂〉 제2수. “莫道茹松追異術, 留侯豈是學仙人.”
[주-D041] 나에게 …… 줄 알리 : 
성여신, 《부사집》 권1, 〈我有一歌〉 제5수.
[주-D042] 고금의 …… 없구나 : 
성여신, 《부사집》 권2, 〈遊頭流山詩〉. “古今人同不同未可知, 只與造物者爲徒, 而逍遙乎山川之阿, 放曠乎人間之世, 無所拘而無所縶.”
[주-D043] 부사는 …… 찾았다 : 
성여신, 《부사집》 권1, 〈九曲詩幷序〉. “今此琴川九曲之佳絶, 亦何異於武夷之仙區. 但因其地, 占其名, 摸寫風流 如晦菴者, 無之. 勝之埋沒, 迄無傳之者.⋯⋯今余旣名其地, 爲九曲水, 又詠其旨, 爲九曲詩, 係寫於洞約之後. 惟我一洞諸員, 共遵條約, 共成美俗, 共遊勝地, 共賞勝事, 熙熙然皥皥然, 自然流入於洪荒朴略之世界. 不知何者爲是, 何者爲非, 何者爲榮, 何者爲辱. 朝如是, 暮如是, 春如是, 秋如是, 今年如是, 明年如是, 不知年數之將至, 可以終吾生而倘佯矣. 天壤之間, 復有逾於此樂者乎.”
[주-D044] 고려 …… 있다 : 
성여신, 《부사집》 권4, 〈東方諸賢贊〉. “徐掌令李參議之作詩寓忠, 野服不屈, 籠巖之臨江不渡, 寄書訣家, 耘谷之踰垣避匿, 不受點汚, 則可以別立列傳, 輝映竹帛, 而尙未聞列諸史傳. 故深用慨然, 謹攷東史簒要, 拜記而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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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11-17 01:07
  
1616년 <성여신>선생의 [방장산 선유일기]
        
글쓴이 : 과일가게청년
     
조회 : 3,186  

▲일시 : 1616년(광해 8) 9월 24~ 10월 8일
▲동행 : 정대순∙강민효∙박민∙이중훈∙문홍운∙성박∙성순∙강이원∙하응일∙최비∙정시특 및 종 등
▲일정 :
•9/24 : 부사정→검호→이천→정촌→관율→구암마을→하영견의 초정(1박)
•9/25 : 초정→진현→박민의 낙천와(1박)
•9/26 : 낙천와→수곡 강사순의 집→유경지의 모정(1박)
•9/27 : 모정→봉계→맥동촌(1박)
•9/28 : 맥촌동→황현→횡포→공돌원→계동 하홍의의 집(1박)
•9/29 : 계동→하영견의 초정→손유경의 정사→흥룡 하응일의 집(1박)
•9/30 : 흥룡→군산→삽암→도탄→가정→쌍계사(1박)
•10/1 : 쌍계사 관람(1박)
•10/2 : 쌍계사→불일암→향로봉 고령대→쌍계사(1박)
•10/3 : 쌍계사→화개현→신응사(1박)
•10/4 : 신응사→가정촌→도탄→삽암→평사역 촌가(1박)
•10/5 : 평사역 촌가→흥룡촌→배를 타고 내려감→장변 나루→강가 정자(1박)
•10/6 : 정자→우현→하천→공돌원→횡포→황현→대야천→동곡 정희숙의 집(1박)
•10/7 : 동곡→후방→원당→곤명→박민의 낙천와(1박)
•10/8 : 낙천와→약동령→임천탄→황류탄→부사정 


그 누가 학을 타고 나와 함께 가려는가

   만력(萬曆) 병진년(1616) 가을에 부사야옹(浮査野翁)이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동지들과 약속하였다. 함께 가기로 한 사람은 옥봉 정희숙, 능허 박행원, 매촌 문여간이었다. 따라나선 사람은 성박과 성순이고, 소문을 듣고 좇아온 사람은 봉학대 강사순과 동정호 이근지가 바로 그들이다.


9월 24일(신묘).

   나는 부사정(浮査亭)에서 동복(童僕)을 데리고 피리 하나, 대지팡이 하나, 짚신 한 켤레, 시집 한 권을 가지고 망아지를 타고 길을 나섰다. 종이∙벼루∙붓∙먹∙ 등의 동구와 옷∙이불∙베개∙방석 등은 모두 문매촌의 말에 실었다. 문매촌은, 한 줄기 검푸른 털이 어깨를 두르고 네다리는 모두 누런 말을 타고서 짐 실은 얼룩 무늬 노새를 끌고 종 셋을 거느렸다.

성순은 먼저 박행원의 집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성박은 다음날 부사정에서 출발하여 낙천와(樂天窩)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문여간과 함께 사천(泗川)으로 갔다. 문여간은 서출(庶出) 숙부 문발(文勃)을 위해 구암(龜巖)마을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방(嘉坊)에서 출발하여 검호(劒湖)를 지나고 이천(伊川)을 건너 정촌(鼎村)을 지나 관율(官栗)의 제방 아래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아 매사냥을 구경하였다. 곧바로 구암마을에 이르러 이차일을
만나보고 사우(祠宇)에 배알하였다.

봉사(奉事) 하영견초정에 투숙하였다. 하군이 우리를 맞아들여 정성스레 대접했다. 때마침 국화가 만개해
있었다. 대청과 방 안에 화분이 놓여 있었는데 짙은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등불 아래서 술잔을 나누며 실컷 즐긴 뒤에 마쳤다. 이어변과 이차일이 와서 인사하고 갔으며, 문발도 함께 다녀갔다.

   25일(임진). 김대성과 윤방이 와서 인사하였다. 이차일이 술을 들고 왔다.
벽에 시가 걸려 있었는데, 주인이 화운(和韻)을 청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차운(次韻)하였다.

천지간에 한가로운 사람이 되니,
가는 곳곳 산과 계곡 새롭게 보이네.
동성(東城)의 한없는 술에 잔뜩 취해,
비스듬히 누워 흰 두건을 거꾸로 썼네.

- 여러 사람들이 지은 시가 많지만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와 같다.-

또 오언절구를 지어 이차일에게 주었다.

동성에 가을 해 저무는데,
백발로 국화를 마주보네.
술잔 드니 도리어 한스러움 더할 뿐,
산 남쪽의 친구 생각 가득히 밀려오네.

아! 이차일은 곧 세상을 떠난 나의 벗 상사 백인재 이자거의 서자다. 백인재에게는 본처의 자식이 없어 이차일이 그 집안 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지금 문 앞에 이르니, 옛 집은 황량하고 사당만 홀로 서 있었다. 나무는 늙고 마을은 텅 비었는데 낙엽만이 개울에 가득하였다. 머뭇거리며 둘러보니 자못 옛 친구 생각이 났다.


조반을 먹은 뒤에 강주(江州)를 지나 진현(晉峴)에 이르러 소나기를 만났다. 박행원의 집에 도착하니, 박행원은 이청을 위문하는 잔치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 성순만 와 있었다. 저녁에 박행원이 와서 함께 낙천와에서 잤다. 주인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주었다.

한가한 마음으로 고인을 배우는 사람,
집안 가득 정겨운 벗들 모였도다.
참된 성품 꾸밈없음을 비로소 알겠으니,
여기저기 노란 국화 진성(眞性)대로 핀 것처럼.


26일(계사).

   낙천와에서 출발하였는데, 다섯 사람이 동행하였다. 총각 강이원이 따라가기를 원해 허락하였다. 수곡(樹谷)에 도착하여 강사순을 방문하였다. 강사순 또한 따라가기를 원해 허락하였다. 다음날 아침 술병을 가지고 송림(松林)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주인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주었다.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찾아오니,
동쪽 울타리에 국화꽃이 피어 있네.
내일 송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그대는 이 약속을 저버리지 말게나.

   말을 달려 송림에 들어가 유경지모정에서 잤다. 유경지의 동생 유경진은 곧 우리 중씨의 사위다. 그는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처 성씨가 과부로 살면서 어린 고아 삼형제를 거두어 키웠으니, 유지억∙유지만∙유지천이다. 유지만은 나에게 글을 배우기 때문에 지금 부사정에 있고, 유지억과 유지천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 세 부자와 박행원은 먼저 그 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밥을 먹고 서쪽 초정에서 함께 잤다.
나는 곤양땅을 지나면서 절구 두 수를 읊었다.

나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애초 세상 밖 사람 아니었네.
가을 바람에 높은 흥취 이니,
선인을 배우는 사람이 되리.
곤산 서쪽 언덕에 송림이 우거지고,
그 아래 긴 버들 푸른 그림자 짙구나.
도잠이 문 밖에 심은 뜻을 이제 알겠네,
영웅심을 버리고 갈건을 쓰고 다녔다네.


27일(갑오).

   이웃에 사는 강우주∙강익주∙정지제∙강동립 등이 와서 인사를 했으며, 강사순도 왔다. 조반을 먹은 뒤 출발하여 봉계(鳳溪)를 지나서 맥동촌(麥洞村) 앞에 이르렀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날씨는 차가워져서 촌집에 들어가 편안히 쉬고 싶었으나, 전날 출발할 때 정희숙에게 편지를 보내 횡포(橫浦)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황현(黃峴)에 채 못 미쳤을 즈음, 멀리 북쪽에서 얼룩 무늬 황색 말을 타고 세 명의 종을 거느리고 오는 사람이 보였다. 서로 손을 흔들어 보인 뒤에야 그것이 정희숙의 행자인 줄 알았다. 드디어 맥동촌에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박능허의 종 명생으로 하여금 길에서 기다리다 정희숙 일행을 맞이해 오게 하였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바람을 등지고 따뜻한 곳에 앉아 기다렸다.

명생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저분들의 행차가 거의 고개 허리쯤 이르렀는데 제 목소리를 듣고 도로 10여 보 내려와 답하기를 ‘노새를 채찍질하여 높이 올라가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지금 나는 고개를 넘어갈 테니, 횡포의 촌집에서 만나기로 하자’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세 명의 종을 거느리고 얼룩무늬 황색 말을 탄 사람이 손을 흔들기에 우리도 손을 흔들어 응답했었다. 우리들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도 저들이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 다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날씨가 추우니, 거센 바람을 맞으며 높은 재를 넘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두렵습니다. 앞마을에 들어가 묵고 내일 출발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여, 모두 “그럽시다”라고 하였다.


28일(을미).

   아침에 날씨가 매우 추워서 일찍 출발할 수 없었다. 조반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황현(黃峴)을 넘고 횡포(橫浦)를 지났으나, 정희숙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공돌원(公突院)을 지나 계동(桂洞)으로 찾아들어 하홍의의 에 도착하니, 정희숙이 먼저 와 있었다. 기쁘게 마주 대하니, 눈썹이 허연 이가 정희숙임을 알 수 있었다.

   정희숙이 눈썹을 찌푸리고 나에게 말하기를 “며칠 전 감기에 걸려 거의 몸을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말렸으나, 내가 소매를 뿌리치고 왔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믿음직한 선비일세. 우리들의 산행은 신선놀이를 목적으로 하여 모두 신선으로 호를 부르기로 했네. 그대도 신선이라 호를 쓰게 되면 세속에서 생긴 병은 저절로 나을 걸세”라고 하니, 정희숙이 말하기를 “말은 참 좋다마는, 내 병이 낫지 않으면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걱정되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말을 들으니 내 병이 이미 나은 듯하네”라고 하였다.

서로 의논하여 절구 한 수씩 짓기로 하였다. 정희숙이 우리 일행에게 먼저 시 한 수를 지어주어, 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이 한 몸의 포부 이미 어긋나,
온갖 계책 긴 탄식만 자아낼 뿐.
소매 떨치고 진을 찾아 나서는 길,
아름다운 약속 어기지 않아 기쁘네.

   날이 저물어 나는 박행원과 같이 잤다. 한밤중에 우리 집 종 숙남이 매우 급히 불러 성박과 강사순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말이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가서 보니, 말이 코에 병이 생겨 거의 구제할 수 없었다. 강사순이 말을 치료하는 법을 대략 알고 있어, 코끝과 꽁무니에 침을 놓았다. 잠시 후에 말이 스스로 일어나 풀을 먹더니, 그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집에서 곤히 잠들어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어서야 그 얘기를 듣고 강사순에게 사례하기를, “그대의 손이 말의 병을 잘 고치면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지 못하며, 그대의 손이 말에는 능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는 능하지 못하구려. 나는 단잠에 빠져 종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벗이 말을 구제하는 것도 알지 못했으니, 나의 단잠은 진박과 견줄 만하구려”라고 하고서, 서로 함께 껄껄 웃었다.


29일(병신).

   아침에 하영견의 초정에 다시 모였다. 각각 안부를 물으니 모두 “편히 잤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여간만은 “간밤에 갈증이 매우 심했습니다. 만약 물을 가져다줄 사람이 없었다면 난감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시원한 한 사발 물에 온갖 감회가 인다는 것이다.

잠시 뒤에 정희숙이 왔다. 모두들 그에게 밤새 감기 증세가 어떠했는지를 묻자 정희숙이 말하기를 “가래가 전보다 배나 심하니, 그대들을 따라 산에 들어갈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고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모두들 정희숙이 병으로 따라갈 수 없으리라 여겨 저마다 서운한 감회가 있었다. 그의 시에 차운하였는데, 나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신선 세계 어느 곳에 신선 누각 있는가,
부구와 좋은 놀이 마련하였네.
유후는 무슨 일로 병을 핑계삼아 물러났던가?
가을날 학암에서 부질없이 옥퉁소를 메고 있네.

   정희숙과 작별하고 섬진강을 향해 떠나 손유경의 정사에 이르렀다. 손유경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정사를 지키는 종 필동만이 있었다. 그에게 주인의 소식을 물으니, 모른다고 하였다. 필동이 술을 내와 모두 서너 잔씩 마셨다. 편지를 써서 필동으로 하여금 급히 주인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 편지에 “내가 그대에게 편지를 전했고, 정옥봉도 안부를 전했었는데 그대는 듣지 못한 듯합니다. 섬진강 가 정사에 이르니 속세의 인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필동이 술을 내어 대접하니, 종이 주인보다 나은 것입니까? 주인이 종보다 나은 것입니까? 그믐날 석문(石門)으로 뒤따라오시게. 석문까지 올 수 없다면 호정(湖亭)에서 머물러 기다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자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서늘한 정자에서 맑은 호수 내려다보니,
호수와 산봉우리 사이의 별천지로세.
두서너 곡 노랫소리 나그네를 붙드는데,
푸르스름한 산 희미하여 있는 듯 없는 듯.

   오후에 강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구름이 쏜살같이 몰려갔다. 흥룡(興龍)을 향해 달려가다 도중에 눈을 만나 촌가에 들어갔다. 잠시 후 구름이 걷혀 흥룡에 있는 하응일의 으로 달려갔다. 새로 지은 기와집에 높은 누각과 온돌방이 있었는데, 온돌방이 매우 넓었다. 정희숙이 병이 조금 나아서 뒤따라왔다. 나는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누각은 푸른 풀 우거진 언덕을 바라보고,
대문은 백운봉을 마주하고 있구나.
하룻밤 신선 세계에서 자고 가게 되니,
지팡이가 용이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30일(정유).

   이웃에 사는 노인 이혜∙김숙남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혜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문여간이 그와 두 판을 두어 모두 패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군산(君山) 앞에 이르니, 삽암(鍤巖)의 머리에 천막을 치고 앉아 있는 이가 보였는데, 그가 분명 적선 이근지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삽암에 도착해보니, 그는 이근지가 아니고 이상이었다. 이상은 무인으로, 계미년(1583) 별시에 합격하여 강장기와는 같은 해에 급제한 사이였다. 그는 우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술 두 동이와 안주 여섯 광주리의 산해진미였다. 모두 둘러앉아 술을 마셨는데도 다 마시지 못했다. 해가 이미 기울어 술잔을 재촉해서 마시고 떠났다.

나는 삽암의 옛 자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눈 내리는 날 옛 시인을 찾아,
선철의 옛터에 올라왔네.
아래위로 닿은 하늘 소상강 물가 같고,
동남으로 열린 땅 악양과 흡사하네.
세상을 피한 맑은 기품 푸른 산처럼 우뚝하고,
담을 넘은 높은 자취 흰 구름처럼 떠갔네.
강산의 늙은이 한 줄기 긴 피리소리에,
갈대꽃 억새꽃 흩날려 가을이 깊어가네.

   술잔을 돌리며 시를 읊조린 지 얼마 안 되어 옛 화개현(花開縣)을 떠나 악양현을 지나 평사역(平沙驛)을 거쳐 군산(君山)으로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멀리 바라볼 때는 누군지 몰랐는데, 말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니 바로 이근지였다. 이근지의 이름은 중훈이다. 옛 상국 이준민의 조카다. 서울에 살고 있었으나 현달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푸른 산 속에 들어가 살고자 하였다. 일찍이 계동(桂洞)에서 만났을 때 나와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에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신 뒤, 도탄(陶灘)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나는 도탄을 지날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선생은 유림의 종장이시니,
만년에 시내 서쪽 고요한 곳에 살았네.
석양에 말 세우고 지난 일을 상심하노니,
구름도 물빛도 온통 처령하구나.


   그곳을 출발하여 가정(柯亭)에 이르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단교(斷橋)가에 이르자 아랫마을∙윗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왔는데, 거의 20명이나 되었다. 앞서 흥룡에 있을 때 하응일∙최기로 하여금 이곳을 유람하는 동안 필요한 사람∙말∙음식 등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최 두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기별하여 횃불을 들고 나와 맞이하게 한 것이다.


단교는 곧 쌍계사(雙溪寺)∙신응사(神凝寺)∙칠불사(七佛寺) 세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여 흐르는 곳이다. 시내는 넓고 돌은 험하였다. 예전의 다리가 지금은 허물어졌으므로 ‘단교’라고 한다. 말을 탄 사람이건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건 한 사람도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불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하∙최 두 삶이 부지런히 일을 주관했다 할 만하고, 마을 사람들도 선량하다고 할 수 있겠다.

화개현 앞의 내를 건너 석문(石門) 앞에 당도하니 쌍계사 수승(首僧) 삼보(三寶) 등의 승려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팔영루에 이르니 절의 승려들이 많이 나왔다. 요학루(邀鶴樓) 앞에서 말을 내려 누각에 올라 둘러앉았다. 절의 승려들이 등불을 밝히고 연회를 베풀며 합장을 하고 위로하였다. 호초다(胡椒茶)∙홍시∙다래∙잣 등의 과일을 대접하였다.

저녁밥을 먹고 사운시 한 편을 지었다.

가정마을 지날 적에 취기가 돌더니,
신선 세계 찾아드니 황혼이 뉘엿뉘엿.
횃불 밝히고 단교 건널 때 바윗돌이 울퉁불퉁,
옷자락 잡고 누각 오르니 저녁 종소리 들리네.
저녁 안개 내려앉아 어스름한 삼신동,
이끼 끼어 희미한 석문의 네 글자.
선원으로 가고픈데 어느 곳이 그곳인가?
향로봉 위에서 최고운을 불러보네.


10월 1일(무술).
   아침 해가 떠올라 창밖이 환해질 즈음에 요학루에 나아갔다. 높다란 난간이 공중에 높이 솟아 현기증이 나고 아찔하였다. 곧 법당으로 돌아왔다. 법당은 벌집처럼 깊숙했고, 붉고 푸른 단청에 눈이 부셨다. 먼저 봉래전(蓬萊殿)을 찾았다. 옛날에는 온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텅 빈 집안에 경판(經板)만 소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부사옹이 옛날 독서하던 곳이다. 지난 을축년(1565) 가을에 강득희 문경과 함께 와서 거처했고, 그 해 겨울 11월에는 유대명 이원, 강검 희약, 하조종 달원 등과 다시 와서 거처하다가, 다음 해 병인년(1566) 정월 그믐에 각자 헤어졌다.

   또 정묘년(1567) 가을에 최순흠 여일, 권세인 경초, 유장 여옥, 하천주 해숙 등과 응석사(凝石寺)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광제사(廣濟寺)∙단속사(斷俗寺)∙덕산사(德山寺) 등을 두루 탐방하였다. 그리고 남명 선생을 뵈려고 했는데, 선생이 김해(金海)로 가시어 뵙지 못하였다. 시냇가에 초정이 있었는데 정자 기둥에는 선생이 손수 쓰신 시 한 수가 있었다.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네.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게 될까.

우리들이 처음에는 그 뜻을 알지 못하다가, 한참 읊조리며 음미한 뒤에야 그 뜻을 조금 깨달았다. 서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생의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선생의 역량은 이 시를 통해 상상할 수 있겠네. 이번 걸음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도천(桃川)-지금의 서원 기초 자리이다-가를 거닐다가 번천동(樊川洞)을 지나 숙묵암(宿黙庵)을 거쳐 설봉(雪峰)을 넘어 불일암(佛日庵)에 가서 묵었다. 쌍계사로 내려가 겨울 석 달 동안 역사서를 읽고, 다음 해 봄에 산을 나왔다.

아! 을축년∙정묘년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이 지났다. 그때 함께 노닐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른바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으리. 무덤만이 올망졸망하네”란 구절이 생각난다. 난리와 전쟁통에 사찰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지금 새로 지은 절에 나 홀로 다시 와 옛터를 둘러보니, 이른바 “늙은 신선 죽지 않고, 흥망을 다 보았네”라는 말이 떠오른다.


다시 영주각(瀛洲閣)에 들렀다. 이 건물은 법당 뒤에 있어 항상 동방장(東方丈)∙서방장(西方丈)이라고 일컫는데, 옛 옥천사(玉泉寺)의 터이다. 내가 일찍이 노승에게 이 절의 유래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는 ‘쌍계(雙磎)’의 이름이 없었다. 최치원이 옥천사에 와 거처하면서 진감선사(眞鑑禪師)와 도우(道友)가 되었다. 이곳에 두 줄기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에 최치원이 바위에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네 글자를 썼다. 그 뒤 이 절의 승려가 옥천사 앞에 큰 사찰을 지어 쌍계사(雙磎寺)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옥천사를 동∙서 방장으로 삼았다. 이 절에 ‘쌍계사’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뒤에 팔영루를 지었는데, 심약의 시에 “쌍계사의 밝은 달, 팔영루의 맑은 바람”이라고 한 데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오늘 와서 보니 젊은 시절 나그네로 머물던 곳에서 오늘은 그대들을 떠나보내고 나 혼자 노니는 신세가 되었다. 팔영루는 이 절의 승려 중섬(仲暹)이 지었다. 팔영루의 시는 어관포(魚灌圃)가 먼저 짓고 제현들이 이어서 화운(和韻)하였는데, 황필(黃篳)의 시만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잊었다. 팔영루의 현판은 승려 영지가 쓴 것이다.


   정오 무렵, 여러 벗들과 허물어진 섬돌 가를 배회하다가 변생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면서 노닐었다. 마침 이창원의 종 일원이 술을 가지고 와서 모두들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셨다. 비전(碑殿) 문 밖에는 돌로 된 비석이 있었는데, 곧 최고운이 짓고 쓴 것이다. 진감선사를 위하여 지은 것인데, 문장이 절묘하지만 간간이 난해한 곳이 있었다. 줄줄이 이어진 빼어난 글씨는 글자 글자마다 정신이 깃들여 있고 기력이 있어서 어루만지며 아낄 만하였다. 내가 「감구유」한 편을 지었다. - 시집에 보인다 - 또 과객 - 정승 기자헌 - 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소롭구나 반구옹의 산수 벽이여,
두류산을 반평생 몇 번이나 찾았던가.
난새를 결말로 하늘에 오르고자 하니,
그 누가 학을 타고 나와 함께 가려는가?

보심이라는 승려가 시축(詩軸)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일대의 이름 있는 벼슬아치들이 지은 것이었다. 진양 사람 향장 남태형, 생원 하위보, 밀양 하진보, 봉산 김대명, 진사 정대함, 생원 공인박, 죽원 이인민 등이 이 승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남긴 시와 글씨는 완연히 어제의 일 같으니, 참으로 슬프도다.


요학루(邀鶴樓) 벽 위에 여덟 신선의 이름을 썼는데, 부사 소선, 옥봉 취선, 봉대 비선, 능허 보선, 동정 적선, 죽림 주선, 매촌 낭선, 적벽 시선이다. 또 두 신선을 추가하였는데, 요담 수선은 하응일이요, 학동 후선은 최비다. 강이원은 약 찧는 아이로 삼고, 정시특은 단약 만드는 아이로 삼았다. 글씨는 성박이 썼다.


2일(기해).

   날씨가 온화하고 좋아서 명승지를 찾기에 적합했다. 모두들 청학동을 찾아가고자 하였다. 절의 승려로 하여금 남여 네 대를 준비하게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남여 네 대가 준비됐습니다. 앉아서 가실 수 있으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늙은이와 병든 이가 타고나니 네 신선은 탈 수 없었다. 늙은 성부사와 병든 정옥봉과 살찐 이동정은 모두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 대에 먼저 타게 하였다. 오직 남여 한 대 만 남았는데 박능허는 문매촌보다 나이가
많고, 문매촌은 박능허보다 걸음이 둔해서 두 사람이 서로 타려고 하였다. 내가 이에 번갈아 타도록 하고, 한 사람이 먼저 타고 20여 보를 가서 내려 쉬면 다른 사람이 타고 오게 하였다. 이와 같이 바꾸어 타고 가게 되면 도보로 걷는 수고가 없을 수 있다.


드디어 진인(眞人)을 찾는 유람을 하기로 하고, 조반을 먹은 뒤 영주각 동쪽 문에서 출발하였다. 보심으로 하여금 길 안내를 하게 하였다. 남여 네 대에 나눠 타고 가는데, 젊은 승려 10여 명이 번갈아가며 남여를 메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쉬엄쉬엄 걸었다. 수십 보쯤 가니 큰 바위 하나가 있었다. 거기에 ‘을축년 가을 이언경∙홍연’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유람할 때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영구히 전하고자 한 것이다. 남명 선생이 유산록에서 이미 기록하였으니, 내 어찌 다시 말하겠는가.

   또 10여 보쯤 가서 남여를 세우고 내렸다. 붉은 낙엽을 깔고 땅에 앉기도 하고, 푸른 이끼 낀 바위 옆에 기대기도 하였다. 젊은 종을 시켜 나무 끝에 올라가 후도(猴桃)를 따게 하였다. 모두 후도를 먹었는데, 그 맛이 달고 향기로웠다.

‘후도’는 세속에서 ‘월라(月羅:다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열매가 서리를 맞아 익은 채 줄기에 달려 있었다. 나뭇가지를 흔들자 익은 다래가 저절로 떨어져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주웠다. 많이 주운 사람은 바구니에 다래가 가득 찼다. 또 배와 홍시가 절로 떨어져 낙엽 속에 묻혀 있었다. 낙엽을 헤치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종들이 다투어 주워 먹다가 싫증이나 서로 던지며 장난질을 하였다.

   피리 부는 두종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갔다. 오시(午時)가 채 되기 전에 비로봉(毘盧峰) 북쪽에 도착하였다. 학암(鶴巖)이 남쪽에 있고 잔도(棧道)가 그 동쪽에 가로놓여 있었다. 남여를 두고 걸어갔다. 이곳은 부사옹이 갑인년(1614) 가을 꿈속에 찾아왔던 곳이다. 꿈 이야기는 나의 서술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바위 허리로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 완폭대(翫瀑臺) 소나무 밑에 이르러 벌려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1백 척(尺)이나 되는 낭떠러지 위에 있고, 동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라고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鶴淵)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龍湫)가 있다. 완폭대 아래에 실같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나무를 부여잡고 곧장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선동(三仙洞) 석 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몸이 날렵하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불일암(佛日庵)에 이르렀다. 암자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 먼지만 방 안에 가득했다. 문매촌이 한 구절 읊기를 “학 떠난 소나무는 늙었고, 중 떠난 옛 절은 텅 비었네”라고 하여, 내가 “진인을 찾던 옛날 꿈속, 이 산중에 와 있었지”라고 읊어 두 구를 채웠다. 벽에 이 시를 써 붙였다.


잠시 후 향로봉(香爐峰)에 오르려는데 아들 성박이 옷깃을 당기며 말리기를 “저희들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겠으니, 이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부디 위험한 산봉우리에 오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난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네 아비 나이 백 살도 안 되었거늘, 어찌 향로봉에 오르지 못하겠느냐” 하고, 오죽장(烏竹杖)을 짚고 미투리를 잡아매고서 여러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올라갔다. 세 번 쉬고 봉우리 꼭대기 고령대(古靈臺)에 도착하였다.


승려 신섬이 대추와 후추를 넣고 달인 차 한 통을 가지고 먼저 봉우리에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두어 사발씩 차를 따라주고, 바구니에 담은 홍시∙다래 등의 과일을 내어놓았다. 갈증이 저절로 해소되었다. 봉우리는 깎아 세운 듯이 높았다. 모두 벌려 앉아 있다가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눕기도 하고, 늘어서 있다가 소나무 가지를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표연히 낭풍(閬風)에 올라 신선 세계에 가까이 온 듯하고, 공동(崆峒)에 올라 광성(廣成)을 방문한 듯하였다. 드디어 「선유사」한 장을 지었다.



산 높고 높음이여, 푸른빛을 모았도다.
몰 차디참이여, 푸른 물 흘러가네.
신선들의 모임이여, 옷소매 연이었네.
정갈한 여덟 밥그릇에, 푸른 옥 지팡이.
호랑이와 표범에 걸터앉음이여, 용을 타도다.
붉은 난새를 결말로 함이여, 백학을 끌어당기네.
홍애를 좌로 함이여, 부구를 우로 하도다.
고운을 부름이여, 참된 비결을 묻노라.
적송자를 잡아당김이여, 붉은 퉁소를 부네.
머리 위 지척의 거리여, 옥황이 사는 곳.


3일(정자).

   날씨가 또 화창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 신응사(神凝寺)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석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둘러보았다. 두 개의 큰 바위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서쪽엔 ‘쌍계(雙磎)’, 동쪽엔 ‘석문(石門)’이라고 씌어 있었다. 글자는 크기가 모두 사슴의 정강이만 하고 깊게 새겨져 있는데, 어제 쓴 글씨처럼 또렷하였다. 사람들이 두 바위 사이로 지나다니기 때문에 ‘석문’이라고 한다.


석문 가에는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놓았는데, 떼를 입혀 담요를 펴놓은 것 같았다. 그 옆에는 큰 소나무가 우뚝 서 있고 흰 돌이 즐비하였으며,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얼룩덜룩하였다. 한 줄기 시내가 청학동으로부터 흘러오다가 고여 맑은 못을 이루었다. 못 가의 한 바위에는 ‘진주(晉州)’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 쓴 글씨인지 알 수 없었다.


   손유경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답하기를 “아름다운 서찰을 받아보니 일의 전말이 상세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대의 신의가 범상치 않음을 알겠으니 고마움을 어찌 다 감당하겠습니까? 편지를 보내면서 만날 기일을 정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이 그대가 사는 서촌(西村)을 경유하게 되면 그대가 반드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선유(仙遊) 소식만 전할 뿐입니다. 그대가 전하는 말만 믿고 정군에 대해 문안하지 않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옛날 흥공이 천태산 적성을 밟아보지도 않고, 천태산을 그리고 「유천태산부」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벗에게 ‘이 부를 땅에 던지면 금석의 소리가 날 것이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천고에 전합니다. 그대가
우리들의 선유에 끼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성명이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대가 보낸 여덟 장의 시는 홍공의 「유천태산부」와 함께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어제는 향로봉에 올랐고, 오늘은 신응사에 들어왔습니다. 내일은 댓잎 같은 배를 타고 섬진강에 닿을 것이니, 그대는 기다리시게. 선유의 흥취를 읊은 허다한 시편들을 다 써서 보내줄 수는 없구려. 다 갖추지 않고 이만 줄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지었다.

무릉도원 들어오니 또 다른 세상 있어.
동구 밖 운무와 속세와 단절되었네.
세간 소식 그 누가 나에게 전하리.
기별 줄 어부는 낚싯배에 앉아있는데.

그리고 길을 떠나 옛 화개현 관아 앞을 지나 수홍교(垂虹橋)에 다다랐다.
옛날에는 내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신응사 승려 태능(太能) 등 5~6명이 나와 맞이하였다. 모두 말에서 내려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머리에는 받침돌이 있었다. 절의 문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능파각(凌波閣)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불태워버려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곧바로 법당에 들어갔다. 옛날에는 썰렁하던 불전이 지금은 온돌로 바뀌어 안온하였다. 모난 천장은 구름을 찌를 듯 높고, 금빛 푸른빛 단청은 눈이 부시게 찬란하였다. 법당 안은 수백 명을 수용할 만큼 넓었다. 이 절은 깊고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인간 세상과는 아득히 떨어져 있으니, 마치 몸이 요지(瑤池)에 올라 친히 옥황상제의 궁궐을 보는 것처럼 황홀하였다.


얼마 뒤에 법당을 나와 기수(璂樹) 밑에 둘러앉아 산세를 훑어보니, 뭇 봉우리가 사방에 둘러 있고 두 줄기 시내가 흘러와 합쳐지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절이 물을 굽어보고 있어, 이 절의 기이하고 빼어난 곳이라 할 만 하다. 여산(廬山)의 호계(虎溪)와 서호(西湖) 가의 영은(靈隱)도 이와 같은지 모르겠다.


절에서 나와 시내를 따라 1리쯤 올라가서 녹반암(錄磻巖) 가에 앉았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소나무에 기대어 위아래를 둘러보니, 잎이 떨어져 산의 모습이 앙상하였고, 물이 줄어 시내의 돌이 드러나 있었다. 시내는 옥소리를 내며 흰 물결을 뿜어내고, 산은 구름 속에 우뚝 솟아 있어 까마득히 선원(仙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었다.


수석의 기이한 모양과 유람의 정아한 지취에 대해서는 선현들의 기록에 남김없이 다 모사해놓았으니, 거친 내 솜씨로 어찌 그 1만 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난리가 끝난 뒤 산하는 옛날 그대로인데 누각은 모두 허물어졌고, 영웅은 새처럼 지나가버렸고 옛 일은 구름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서성이며 바라봄에 어찌 감회가 없을 수 있으랴.



   절의 서쪽에 또 ‘사당(社堂)’이란 한 암자가 있었다. 옛날 나는 벗과 함께 이 절에 와 공부할 적에, 그 그윽하고 고요함을 사랑하여 몇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절 앞에는 큰 대나무가 1천여 그루가 있어, 그 그림자가 창문에 어른거렸다. 문 밖에는 넓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가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푸른 잎 붉은 꽃봉오리가 문 밖까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신응사 승려에게 물었더니, 그 절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찾아갈 수 없었다. 돌아와 법당에 들어가 베개를 나란히 하고 한숨 잤다. 저녁에 등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절의 승려 태능이 절구 두 수를 지어 보여주기에 내가 그 시에 차운하였다.

산을 보고 물을 봄은 내 능히 잘하지만,
현묘•적멸 담론함 내 어찌 능하리?
이 집에 저절로 진여의 법 있으니,
태능은 이 법에 능한가 불능한가?
청허당 노장을 예전에 만나서,
여기서 을축년에 글을 논하였지.
오늘밤 선사 만나 옛 일을 담론하니,
청아한 시 백여 편이 눈앞에 선하구나.


4일(신축).

   바다에서 광풍이 불어와 온 산의 나무가 윙윙거렸다. 날씨가 매우 추워 갖옷을 껴입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그대로 머물고 싶었지만 30여 명이나 되는 일행의 식량과 말의 먹이를 조달하기도 매우 어려운 데다, 이미 서도장과 동정호(洞庭湖)에서 배를 띄우기로 한 약속이 있었고, 손유경도 편지를 보내 “초8일쯤 조수(潮水)가 높지 않으니 빨리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반을 먹은 뒤 추위를 무릅쓰고 억지로 출발하였다. 절 문을 나서며 손유경의 시에 차운하여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여산의 일주문에서 웃으며 작별하고,
머리 들어 호계의 구름 우두커니 바라보네.
멀리 산 밖엔 풍파가 세찬 줄 알겠으니,
누가 배를 대놓고 술통 끼고 있을까?


말을 타고 가면서 아홉 개의 ‘교(橋)’자로 운을 달아 절구 세 수를 지었다.

냇물에 꽃잎 떠오던 옛 무지개다리,
오늘은 어찌하여 외나무다리 되었나?
봄이 오면 천태산 길 들어올 수 있을까,
뉘 다시 내가 석교 건너는 것 보려나.

-이 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야윈 말에 몸을 싣고 다리를 건너는데,
단풍잎 바람결에 다리 위에 흩날리네.
옆 사람과 나란히 넓은 다리 건너네,
옆 사람은 호연교에 잘못 비유하네.
 
-이 시는 석문교(石門橋)를 지나면서 지은 것이다.-


산 속의 해 뉘엿뉘엿 끊긴 다리 비추는데,
단풍 비친 다리 위, 여기가 어디멘가?
강가의 어부 불빛 끝없이 반짝이니,
섬진강 호수 가의 다리 위에 와 있구나.

-이 시는 화개교(花開橋)를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가정촌(柯亭村) 앞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이 장막을 치고 맞아들여 점심을 대접하였다. 음식상을 정갈하게 잘 차렸는데 맛이 썩 좋았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의 이름은 지귀(智貴)로, 호남의 부자 나치리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덕천(德川)의 전곡(典穀) 손득전이 와 인사하여 함께 평사리(平沙里)로 가서 묵었다.


오후에 도탄(陶灘)을 지나 삽암(鍤巖)에 도착하니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서, 배도 바람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만나기로 약속한 손상사와 서도장도 배를 저어 올라오지 못하고 섬강(蟾江)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평사역 촌가로 달려가서 편히 쉬었다. 나는 술잔을 들면서 시를 지었다.

아침에 화개동을 떠나왔는데,
오후에 강바람이 더욱 매섭네.
석양 무렵 옛 역에 투숙하여,
고요히 앉아 바람 자길 기다리네.

저녁에 소촌찰방(召村察訪) 정윤목이 찾아와 이웃집에서 잤다.


5일(임인).

   바람이 잠잠해지고 하늘이 맑고 날씨가 화창하여 배를 타기에 적합하였다. 조반을 지으라고 재촉하였다.
소촌찰방도 두류산을 유람하고자 한다고 하여,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주었다.-시집에 보인다- 소촌찰방이 출발하려다 내 시를 보고 곧바로 찾아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떠났는데 그가 화답시를 지어 보내왔다. - 원운 아래에 붙어 있다.

조반을 먹은 뒤에 흥룡촌(興龍村)을 향해 달려갔다. 마을 앞에 장막을 치고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성(固城) 윤삼락(尹三樂)과 이혜(李蕙), 김숙남(金淑男) 등이었다. 윤삼락이 술 한 잔씩 돌린 뒤 이혜가 술잔을 반쯤 돌렸을 때 뱃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손진사가 앞 여울에 배를 대어놓고 여러분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후에는 조수가 점점 낮아지는데, 얕은 여울이 앞에 있습니다. 만약 배를 늦게 띄우면 운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술자리를 파하고서 일행을 거느리고 뱃머리로 향하였다.

뱃머리에 꽂아둔 국화가 아직 그대로 꽂혀 있었다. 손진사가 북, 피리,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들을 데리고 와서 호숫가에 세 척의 배를 매어놓고 있었다. 그 중에 배 한 척을 보내 우리들을 태우러 왔다. 우리들이 다투어 배에
오르니, 손상사는 뱃전에 기대어 시를 읊조리고 있었고, 서락 성수명 등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세 척의 배를 연결하여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잔물결도 일지 않아 수면은 거울을 닦아놓은 듯하였고, 강 양쪽의 산 모습은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울긋불긋하였다. 중간쯤에서 돛을 올렸는데 돛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술 한 잔씩 돌리며 시 한 수씩 읊었다. 북소리와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자 춤과 노래가 흥겹게 일어났다. 우리들은 술잔을 무수히 주고받았다. 나는 배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읊조리며 쓰는 붓 짧기만 한데,
뱃머리 춤추는 소매 길기도 하다.
석양에 이는 무한한 흥취,
모두 고인의 술잔에 부치노라.

이때 산에 걸린 석양이 강물에 비치고 푸른 산은 강물에 드리우고 먼 숲엔 연기가 깔려 어스름한 저녁 풍경을 한 자루 붓으로 그리기 어려웠다. 이에 술 한 잔씩 더 돌리고 풍악을 재촉했다.

손진사의 강가 정자에 거의 도착할 무렵 날은 이미 저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왔으나 모래톱까지 오지 못하여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가 장변(場邊) 나루까지 갔다가 돌아와 손진사 정자 밑에 배를 대었다. 고성 윤삼락이 적선 이근지와 함께 먼저 내리고, 동행했던 사람도 모두 각자 흩어졌다. 나머지 일곱 신선과 손유경은 노를 돌리며 노닐다가 한참 뒤에 배에서 내렸다.


   강가 정자로 들어가 등불을 밝히고 다시 술을 마셨다. 내가 일행에게 약속하기를 “오늘 유람이 매우 즐거웠으니 문자음을 하지 않을 수 없네. 술이 한 순배 돌 때 시 한 수를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에 술잔 하나를 가운데 두고, 시 한 편을 짓고 술 한 잔씩 마셨다. 돌아가며 번갈아 마시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쳤다.

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동빈이 날아서 동정호 가 지날 때,
소매 속의 청사검 얼마나 울었을까?
배 안에서 흥 일어 풍악이 울려 퍼지고,
강가에서 시 지으니 노사의 소리로세.
공부는 명예에 골몰하지 않았으니,
내 삶이 어찌 이익을 좇아 빠지리.
오늘의 이 선유 우연이 아니니,
그대들은 세한의 마음 저버리지 말게나.


6일(계묘).

   피곤하여 곯아떨어졌다가 늦게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뒤 홀로 호숫가 정자로 나와 나무에 기대어 둘러보았다. 아침해가 막 떠올라 호수 끝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으며, 경치는 무르익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술꾼들이 모두 손진사의 종 필동의 누추한 방에 모여, 술통이 비도록 술을 걸러 마셨다고 한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다.

먼 산 나무에 이내 서려 산 모습 고요하고,
높은 봉우리에 해가 뜨니 맑은 수면 붉도다.
범부들은 이 좋은 아침 풍경 모른 채,
술에 취해 방 안에서 거꾸러져 자고 있네.

술꾼들, 손유경과 낭선 문매촌, 주선 성박 등이 깜짝 놀라 뛰어나와 술이 깨었다고 하면서 불민함을 사과하였다. 또 정자 위에 술자리를 벌리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각자 내 시에 화답하였다. 내가 다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누대 안에 술이 있어 남들 먼저 취하였고,
호수 위 바람 없으나 낙엽 절로 떨어지네.
배회하는 이 늙은이 시 짓지도 못했건만,
갈매기 떼 또 다시 남쪽으로 날아가네.

조반을 먹은 뒤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한 번 유람은 실로 우연이 아니네. 뒷날 다시 유람하게 된다면 만나서 그 기일을 정함이 옳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낭선 문매촌으로 하여금 약속하는 글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에 “청학동 이번 선유, 맑은 흥취 흡족치 못했다. 가을에 다시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명년 봄으로 기약한다. 명년 늦은 봄 보름에 이곳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다. 손유경으로 하여금 후일 선유의 예를 행하게 하여, 배를 타고 유람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관현의 악기를 책임지고 준비하여 빠짐없이 갖추도록 한다”고 하였다.


   적선 이근지와 당선 문여간은 악양(岳陽)으로 가고, 손유경은 강가의 정자에 남고, 소선 성여신, 취선 정희숙, 비선 강사순, 보선 박행원, 주선 성박, 시선 성순은 말을 타고 줄지어 돌아왔다. 우현(牛峴)을 넘고 하천(霞川)을 건너 공돌원(公突院) 시냇가에 이르렀다.

아들 성박으로 하여금 작은 산머리에 올라가 하지평(河持平)의 묘를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지평의 이름은 하충으로, 나의 증조모 하씨의 부친이다. 이곳에 그분의 묘가 있다고 들었으나, 산머리에 세 개의 큰 무덤이 있는데 묘갈이나 묘지도 없고 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느 묘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중오, 성수명 등이 술과 안주를 먼 곳에서 보내왔다. 이에 여섯 신선이 모두 술에 취하였다. 피리소리와 노래가 함께 울려 퍼지자 모두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들판에서 벼를 베던 사람들이 낫을 들고 서서 바라보았다.



횡포(橫浦)를 지나 황현(黃峴)을 넘고 대야천(大也川)을 건너 동곡(桐谷)에 도착하여 옥봉(玉峰) 정희숙의 에서 묵었다. 조여헌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7일(갑진).

   흰죽을 먹고 아침 일찍 출발할 즈음에 곤산(昆山)에 사는 이름은 강숙 자는 백양이란 사람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인사하였고, 조여수도 와서 인사를 하였다. 후방을 지나 원당(元堂)을 거쳐 곤명을 지날 때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세 신선 삼선동 두루 구경하고,
천풍을 옆에 끼고 학을 타고 돌아가네.
문득 군산 북쪽 땅을 날아서 지나노니,
곤명 땅 병화에 거의 재가 되었구나.

저물녘에 보선 박행원의 낙천와에 도착하여 묵었다.


8일(을사).

약동령(藥洞嶺)을 넘으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산중에서 열흘 동안 좋은 경치 찾고 찾아,
계곡의 안개와 놀 소매 가득 담아오네.
종 녀석도 알아보고 산수를 환호하니,
구름 속의 별천지 거짓이 아니로세.


임천탄(林川灘)을 건너 수우당(守愚堂)을 지나면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숲 속엔 북서풍이 나뭇잎을 쓸어가고,
북녘 하늘 기러기떼 서리를 띄고 오네.
황량한 옛 집에는 지키는 이 하나 없고,
마른 대 찬 매화에 슬픈 마음 끝없네.


황류탄(黃柳灘)을 건너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좋은 경치 찾는 마음 붕새가 북해로 떠나는 듯,
속세로 나오는 몸 자고새 남쪽으로 돌아가는 듯.
평생토록 경세제민 꿈꾸지 않았으면,
학을 몰고 난새를 곁말할 수 있었으리.

저물녘에 부사정(浮査亭)에 도착하였다.


   산 속에 들어가서는 눈에 띄는 사람 모두 선인이었고, 산 밖으로 나와서는 만나는 사람 모두 범인(凡人)이었다. 한 몸이 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느냐에 따라 선인과 범인으로 달리 보이니, 마치 곤새나 붕새가 북해로 날아가는 것과 자고새가 산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차이가 있다. 그러니 한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어찌 높게 기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비의 한 몸은 경세제민을 그 계책으로 삼고, 선비의 한 마음은 남과 함께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으로 뜻을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산에는 어찌 들어갈 수 없겠으며, 신선은 어찌 배울 수 없겠는가?

명도 선생유산시에,

옷소매의 티끌을 삼일 동안 끊었다가,
남녀 타고 머리 돌려 돌아가려 하노라.
평생토록 경세제민 뜻을 두지 않았다면,
한가히 노니는데 어찌 산을 나가랴.

라고 하였으니, 이는 산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회암 선생감흥시에,

유유히 떠나 신선 되길 배워서,
세상을 버리고 구름 속에 노닐거나.
선약 담은 숟가락 입에 한번 들어가면,
훤한 대낮에도 날개가 돋는다네.
세속을 벗어나긴 어렵지 않으나,
구차하게 사는 삶 어찌 편안하리.

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선을 배우는 것이 불가함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仙遊)는 이름은 비록 ‘선(仙)’이나 실체는 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유람록 끝에 그 지취를 드러낸다. 같이 유람했던 벗들이, 내가 산수의 벽(癖)이 있고 또 산 속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하여 기록하게 하였다.

내가 보건대, 여덟 신선 가운데에는 노소(老少)가 있고, 부자(父子)가 있고,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좋은 경치를 찾아 무리지어 다닐 때는 노소, 선후의 순서를 잊었고, 흥에 겨워 시를 지을 때는 부자, 형제의 차례를 잃었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다투어 달려가 어른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시구를 얻으면 곧바로 써 보여 부형보다 뒤에 하지 않았다. 이 유람을 하면서 형체를 잊고 구속을 버리고서 꾸밈이 없는 태초의 세계로 자연스레 흘러 들어갔다. 모두 팔선이라고 이름했으므로, 서두를 지으면서 아비로서 자식을 칭찬하였다. 더구나 흥이 나고 장난이 지나쳐 도리에 어긋나게 비웃고 농담한 대목은 독자들이 너그럽게 보아주기 바란다.
부사야옹이 기록한다.


정사년(1617)

   봄에 진주목사 구암 이삼성이 단성 수령 및 진양 사람들과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옛날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다고 하여, 편지를 보내 같이 가자고 청했다. 4월 초순에 나는 큰아들을 데리고 구암 및 두세 고을 사람을 따라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이 날 칠송정(七松亭)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우리들이 진주 서쪽 광탄(廣灘)가에 이르렀을 때, 검은 구름 한 조각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몰려오더니, 바람이 몰아치고 소나기가 퍼붓고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모자를 쓰고 도롱이를 걸칠 틈도 없었다. 잠시 후에 개었는데,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고 붉은 기운이 동쪽과 북쪽 사이에 자욱히 끼었다. 일행이 서로 돌아보고 놀라 의아해 했다. 이는 실로 비상한 이변으로 아마도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11일 동안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같이 박민의 침류정에 들렀다. 밥상을 물리고 술상을 차리려 할 때 전 관찰사 망우 곽공의 부음을 듣고 헤어졌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광탄 가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던 때가 바로 그가 세상을 떠나던 시각이었다.

아! 공은 의리에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하였다. 공은 사직에 있고 이름은 역사에 드러났으니 어찌 감히 한 두 마디 말로써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공이 중년에 도인술을 하고 반평생 솔잎을 먹고 산 것에 대해서 공을 아는 사람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타고난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많고 많지만, 공이 그렇게 해옹한 은미한 뜻에 대해 어찌 일반인들이 그 전말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람에 옷깃을 날리고 달빛에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은거한 것은 후한 때의 수경 사마휘와 같았고, 명성과 벼슬을 얻은 것은 전한 때의 유후 장자방과 같았다.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오? 병도 없던 고사가 갑자기 구름을 타고 비바람을 몰고 우레를 재촉하여 떠나기를 이처럼 신비롭고 기이하게 할 줄 어찌 생각했으랴?

소하가 묘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과 부열이 기성을 타고 승천한 것을, 이를 통해 더욱 믿을 수 있겠다. 무지개 다리는 후일 북두칠성과 경우성 사이를 치달리며 일월(日月)의 광명을 도우리라는 것을 저승에서도 상상할 수 있겠다. 한 마디 말을 써서 기이한 자취를 기록하고, 또 공사간의 애통한 마음을 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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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기>님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발췌함.



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33&wr_id=18    지리산 아흔아홉골







[스크랩] 성여신| 역사 이야기
대산 강원기 | 조회 35 |추천 0 | 2016.02.25. 19:05

   진주선비<부사 성여신 1>


   단속사 삼가귀감 (서산대사). 천불전 등을 ( 단속사를 불태운 불지른 성여신)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자는 공실(公實)이고 호는 부사(浮査)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금산(琴山)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정월 초하루에 아버지 두년(斗年)의 아들로 진주(晋州) 구동(龜洞)의 무심정(無心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부사집(浮査集)』 4권 4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성여신은 12세(1557년)에 『통사』, 『소학』, 『사서』를 배워 문리가 크게 진보되고 제술에도 능하여 조계공‘이 아이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여 훗날 반드시 큰 유자가 될 것’ 이라고 칭찬하였다.


13세(1558년)에는 삼경(三經)과 외전(外傳)을 다 읽고 시(詩)·부(賦)·책(策)·론(論)을 능숙하게 지을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15세(1560년)에는 정탁을 찾아가 『상서』를 받고 이름있는 선생에게 나아가 배울 것을 권유받았고,

 

16세(1561년)에는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좌구명(左丘明), 유종원(柳宗元), 한유(韓愈), 구양수(歐陽修) 등 고문가의 책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으면서 지냈다. 18세(1563년) 봄에는 폐백을 갖추고 이정(李楨)을 찾아가 뵈었다. 이정(李楨)이 한 번 보고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서로 만나는 것이 이리 늦었는가?’ 하고 『근사록』을 주며 위기지학으로 면려하였다.

 

 

  급문 : 성여신은 23세(1568년)에 남명선생을 배알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 해 가을 정유길(鄭惟吉)이 진주 목사 최응룡과 함께 근처 고을의 유생을 모아 시부(詩賦)를 짓고 열 명을 선발해서 단속사에 모였다. 뽑힌 사람은 하면, 진극경, 손경인, 손경의, 정승윤, 정승원, 박서구, 이곤변, 하백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 성여신이 으뜸이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승 휴정『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이 절에서 판각을 하였다. 삼가(三家) 가운데 유가(儒家)를 제일 끝에 두었고, 또 불상을 만들어 사천왕(四天王)이라고 하였는데, 모양이 매우 기괴하였다고 한다. 모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그 책을 인출하므로 성여신이 마음으로 매우 분하게 여겨 일행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람을 꾸짖고 그 책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말하기를우리 도(道)를 훼손하고 우리 유가(儒家)를 모욕한 이 책과 불상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곧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 책판을 불지르게 하고, 또 명하여 오백 나한과 사천왕을 끌어내 모두 불태우게 하니 승려들이 모두 두려워 떨면서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26세(1571년) 3월에 덕산으로 가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5월에 사천으로 가서 이정(李楨)을 찾아 뵈었다.

 

 

  과거 : 성여신은 64세(1609년) 가을에 생원(生員) 및 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당시 이정구(李廷龜)가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집 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 않았는데 강산 천만리가 다 보이네’ 라는 구절을 읽고, ‘이는 반드시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이면서 시속의 풍격을 본 받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발탁하였다’ 고 한다.

  68세(1613년)에 별시 동당(東堂)에 장원하여 서울에 이르렀는데 객사의 관인이 정도에 의하지 않는 부귀의 길을 청하자,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은가? 내가 과업을 늙도록 폐하지 않는 것은 어버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평소의 포부를 한 번 펴 보고자 한 것인데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세도(世道)를 알 것 같다. 하물며 시사가 바르지 못하고 삼강(三綱)이 장차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데, 과거는 해서 무엇하리요!’ 하고는 돌아갔다.

  


강학 및 교유 : 성여신은 21세(1566년)에 쌍계사(雙磎寺)에서 돌아와 모친상을 받들고 돌아온 이정(李楨)에게 찾아가 학업을 익히고, 이정(李楨)의 손자인 호변(虎變), 곤변(鯤變) 등의 여러 문하생들과 더불어 공부하였다. 의리를 강론하는데 잠자거나 쉬기를 잊어버리니, 이정(李楨)이 매우 공경하며 중히 여기고, 경전을 읽어도 반드시 동부(東賦)를 같이 외우게 해서 과정을 익히게 하였다. 성여신이 특히 사서(史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이렇듯 조계공 신점이정(李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22세(1567년) 가을에는 덕산에서 쌍계사로 가서 독서하였다.

 

  30세(1575년)에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공부하였고, 32세(1577년)부터 34세(1579년)까지는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살면서 경전(經傳)과 『심경』, 『근사록』, 『성리대전』, 『대학』, 『소학』 등의 책을 차례로 강독하였는데, 혹시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문득 잠심(潛心)하고 묵회(黙會)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하였으며, 뜻이 풀린 뒤에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성여신은 제자백가를 포함하는 폭 넓은 독서를 통해 학문적 포용성을 길렀는데, 이 시기에 성리학에 침잠함으로써 성리학적 사상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외종손인 안시진(安時進)을 통해서 남긴 「침상단편(枕上斷篇)」에는 그의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36세(1581년) 봄에는 창녕의 선영(先塋)을 살피러 갔는데, 당시 창녕의 수령을 지내고 있었던 정구(鄭逑)가 찾아와서 만났다. 4월에는 장인인 박사신(朴士信)을 따라 의령의 가례(嘉禮)로 이사하였는데 근처의 곽재우, 이대기, 이대약(李大約), 이종영 등과 더불어 서로 강마(講磨)하였다.

 

37세(1582년)에는 자굴사(闍崛寺)에서 곽재우, 이대기와 더불어 강마하면서 겨울을 지냈다.

 

57세(1602년)에는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고, 이 해에 이종영과 이대약(李大約)과 더불어 계서약(雞黍約)을 하여 매년 봄 가을 양 계절 끝 보름에 돌아가면서 서로 방문하니 정온(鄭蘊)도 함께 참여하였다.

 

 58세(1603년) 3월 보름에는 「계서회(雞黍會)」부사정에서 열기로 하였다. 9월에는 친구인 선비들과 함께 덕천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는데, 이광우, 이천경, 진극경, 정승윤(鄭承尹), 하징, 하성(河惺), 신가(申檟), 하수일(河受一), 정승훈(鄭承勳), 이유함(李惟諴), 하광국(河光國), 조영한, 조겸(趙㻩), 이명고, 이각(李殼), 조영기, 문홍운(文弘運), 박인(朴絪) 등 여러 선비들이 모두 와서 모였고, 그 밖에 또 33인이 왔다(『凌虛集』).

 

59세(1604년)에는 이대기를 방문하였다(『雪壑先生文集』).

 

61세(1606년) 3월에는 이대약(李大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가을에 정구(鄭逑)덕천(德川)에서 찾아왔다.

 

 

  저술 : 성여신은 62세(1607년)에 「삼자해(三字解)」「만오잠(晩悟箴)」을 지었고, 69세(1614년) 여름에 「성성잠(惺惺箴)」을 지었으며, 71세(1616년) 봄에 「금산동약(琴山洞約)」을 이루고 가을에 두류산에 가서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으며 겨울에 보름 동안 두류산을 유람하고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를 남겼다. 73세(1618년) 봄에 관포(灌圃, 漁得江)선생의 쌍계사(雙磎寺) 팔영루 시판을 쓰고 여름에 두류산에 올라가서 「기소견장편(記所見長篇)」이라는 7언고시를 남겼다. 74세(1619년)에 「진양전성기(晋陽全城記)」 「상락군김공시민극적비명(上洛君金公時敏郤敵碑銘)」을 짓고, 77세(1622년)에 『진양지(晋陽誌)』를 펴냈고, 78세(1623년)에 『천자초예(千字草隸)』를 지었다. 다시 두류산을 유람하고 장편의 고시인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지었다. 87세(1632년)에 「침상단편(枕上斷編)」을 지어 가을에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을 이루었다.

 

 

  스승추존활동 : 성여신은 31세(1576년)에 최영경,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는데, 이 때 그도 함께 가서 의논하고 일을 도왔다. 56세(1601년)에는 병화로 소실된 덕천서원을 제현과 더불어 중건하고, 최영경을 배향하였다. 이 때 이정(李瀞), 진극경, 하징 등과 더불어 도모하였다(『茅村集』).

  성여신은 87세(1632년) 봄에 병으로 눕고, 동년 겨울 11월 초 1일에 부사정(浮査亭) 양직당(養直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朴  敏, 『凌虛集』 4권 2책.

  李大期, 『雪壑集』 4권 2책.

  成汝信, 『浮査集』 4권(『韓國文集叢刊』 56), 民族文化推進會, 1990.

  成汝信, 『浮査先生文集』 4권(飜譯本), 浮査亭, 檀紀 4327.

  『民族文化大百科辭典』 8·10·12·18.

  李商元, 「浮査 成汝信의 隱逸精神」, 『南冥學硏究論叢』 4, 南冥學硏究院, 1996.

  高順貞, 「浮査 成汝信 硏究」, 慶尙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5.


첨부파일 성여신.hwp

 


진주선비<부사 성여신2>

 

   고향 향약 만들어 풍속 바로잡아 부사는 임란· 정유재란을 겪고 54세 되던 해, 고향 금산으로 돌아와 이듬해 부사정(浮査亭),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강학의 장소를 마련하였다.    

이때는 전란이 막 끝난 뒤라 고향의 풍속은 변해 민심마저 어지러웠다. 고향에 돌아온 부사는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자 온힘을 다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비로서의 학문 정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현들의 유업을 잇는 일과 무고로 억울한 일을 당한 어진 선비들의 신원을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56세때 덕천서원을 중건하고 수우당(진주선비 최영경) 위패를 봉안하는 일에 참여 했으며, 이듬해는 수우당 신원소를 올리는 일에 동참하였다.

 

    61세때 덕천서원에서 한강을 만났으며, 69세때 영창대군의 일로 옥에 갇히게 된 동계 정온의 무고함을 상소하는 일에 고을의 선비들과 같이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용장 김덕령 이 억울한 일을 당하자, 이의 신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71세때 고향에서 금산동약(琴山洞約)을 만들었다. 마을의 덕이 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여씨향약과 퇴계선생 향약을 본받아 동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덕업을 서로 권한다. 2.잘못은 서로 바로잡아 준다. 3. 예속으로서 서로 사귄다. 4. 어려움이 있을 때는 서로 구휼한다. 이와같은 조목을 정해 놓고 또 따로 부모에게 불손한 사람, 형제간에 싸움하는 사람, 집안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사람, 망녕되게 위세를 부리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 남을 업신여기고 어른을 욕되게 하는 사람, 과부를 유혹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마을의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어지러워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또 양전시진폐소(量田時陳弊疏)를 지어 임란후 실정을 무시한 과중한 결세의 부담 때문에 백성들이 집을 떠난다는 점을 지적하여, 전란으로 황폐해진 전답에서 이전과 같은 양의 세금을 거두는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즉 부사는 자신의 학문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널리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


   행장을 보면, 공은 일찍이 남명 구암 문하에 수학하여 경의(敬義)효제충신(孝悌忠信)의 가르침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두 분의 말씀은 다른 것같지만 실상은 같다. 효제충신은 경의가 아니면 행할 수 없고 경의는 효제충신이 아니면 설 수 없다. 이것은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내마음의 마땅한 것을 다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종신토록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래서 자신을 닦고 남을 기르는데 이로써 먼저 힘쓸 일을 삼았다.

   부사가 스승인 남명과 구암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은 효제충신과 경의인데, 이것은 생활하는데 있어 자기 마음의 마땅한 것을 다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사는 경의와 효제충신을 학문의 요체로 삼아 이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생활에 활용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데 힘기울였던 것이다. 여기서 부사의 실천적 학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619년 부사는 '진양전성기급상락군김공시민각적비'를 지었다. 임란때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한 비이다. 임란 3대첩의 하나로 3,800여명의 군사로 2만여 적을 물리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상세하게 드러내었다.

" 아! 위난을 다급히 여기고 왜적을 물리친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며,죽음으로 지켜 달아나지 않은 것은 의로움에서 결단된 것이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치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비를 후대인들은 '김시민장군전공비'라 부르고 있으며 1972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진주성내 임진계사순의단 앞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으나, 이 비석의 글을 진주 선비 부사 성여신이 74세때 지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로부터 3년 후 '진양지'를 편찬을 의논하였다. 진양지는 부사를 중심으로 창주 하징 능허 박민, 봉강 조겸, 진사 정성훈, 진사 하흡 등 진주 선비들이 1622년(광해군 14년)부터 1632년(인조 10년) 에 걸쳐 편찬한 진주목 읍지이다.    

총 2책으로 된 이 책의 내용구성은, 1책에 건치연혁 진관 관원 속현 주명 풍속 산천 성곽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 2책에는 향교 서원 병사 명환 인물 사마(司馬)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구가 지은 함주지의 영향을 받아 그 체재를 그대로 따라 충신 효행 열녀 등 충효사상을 강조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진주 사림등이 편찬하였기 때문에 각 면리의 구역과 주민의 거주 신분 풍속 물산 등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진양지의 편찬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길이 남겨 후손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부사를 비롯한 진주 선비들의 애향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부사는 임종에 앞서 최치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등 우리나라 여러 선현들의 학덕을 기리는 글을 지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1632년 87세의 일기로 부사가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은 1702년(숙종 28년) 진주 금산임천서원을 건립하여, 1719년 부사를 비롯한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창주(滄洲) 하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위패를 모셨다, 그 후 대원군 서원 철폐때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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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41. 성여신(成汝信)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03-10-27 (월) 15:09 조회 : 4255


성여신(成汝信)
               
□ 약전(略傳)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자는 공실(公實)이고 호는 부사(浮査)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금산(琴山)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정월 초하루에 아버지 두년(斗年)의 아들로 진주(晋州) 구동(龜洞)의 무심정(無心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부사집(浮査集)』 4권 4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성여신은 12세(1557년)에 『통사』, 『소학』, 『사서』를 배워 문리가 크게 진보되고 제술에도 능하여 조계공이 ‘이 아이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여 훗날 반드시 큰 유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13세(1558년)에는 삼경(三經)과 외전(外傳)을 다 읽고 시(詩)·부(賦)·책(策)·론(論)을 능숙하게 지을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15세(1560년)에는 정탁을 찾아가 『상서』를 받고 이름있는 선생에게 나아가 배울 것을 권유받았고, 16세(1561년)에는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좌구명(左丘明), 유종원(柳宗元), 한유(韓愈), 구양수(歐陽修) 등 고문가의 책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으면서 지냈다. 18세(1563년) 봄에는 폐백을 갖추고 이정(李楨)을 찾아가 뵈었다. 이정(李楨)이 한 번 보고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서로 만나는 것이 이리 늦었는가?’하고 『근사록』을 주며 위기지학으로 면려하였다.
급문 : 성여신은 23세(1568년)에 남명선생을 배알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 해 가을 정유길(鄭惟吉)이 진주 목사 최응룡과 함께 근처 고을의 유생을 모아 시부(詩賦)를 짓고 열 명을 선발해서 단속사에 모였다. 뽑힌 사람은 하면, 진극경, 손경인, 손경의, 정승윤, 정승원, 박서구, 이곤변, 하백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 성여신이 으뜸이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승 휴정이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이 절에서 판각을 하였다. 삼가(三家) 가운데 유가(儒家)를 제일 끝에 두었고, 또 불상을 만들어 사천왕(四天王)이라고 하였는데, 모양이 매우 기괴하였다고 한다. 모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그 책을 인출하므로 성여신이 마음으로 매우 분하게 여겨 일행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람을 꾸짖고 그 책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 도(道)를 훼손하고 우리 유가(儒家)를 모욕한 이 책과 불상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곧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 책판을 불지르게 하고, 또 명하여 오백 나한과 사천왕을 끌어내 모두 불태우게 하니 승려들이 모두 두려워 떨면서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26세(1571년) 3월에 덕산으로 가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5월에 사천으로 가서 이정(李楨)을 찾아 뵈었다.
과거 : 성여신은 64세(1609년) 가을에 생원(生員) 및 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당시 이정구(李廷龜)가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집 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 않았는데 강산 천만리가 다 보이네’라는 구절을 읽고, ‘이는 반드시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이면서 시속의 풍격을 본 받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발탁하였다’고 한다.
68세(1613년)에 별시 동당(東堂)에 장원하여 서울에 이르렀는데 객사의 관인이 정도에 의하지 않는 부귀의 길을 청하자,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은가? 내가 과업을 늙도록 폐하지 않는 것은 어버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평소의 포부를 한 번 펴 보고자 한 것인데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세도(世道)를 알 것 같다. 하물며 시사가 바르지 못하고 삼강(三綱)이 장차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데, 과거는 해서 무엇하리요!’ 하고는 돌아갔다.
강학 및 교유 : 성여신은 21세(1566년)에 쌍계사(雙磎寺)에서 돌아와 모친상을 받들고 돌아온 이정(李楨)에게 찾아가 학업을 익히고, 이정(李楨)의 손자인 호변(虎變), 곤변(鯤變) 등의 여러 문하생들과 더불어 공부하였다. 의리를 강론하는데 잠자거나 쉬기를 잊어버리니, 이정(李楨)이 매우 공경하며 중히 여기고, 경전을 읽어도 반드시 동부(東賦)를 같이 외우게 해서 과정을 익히게 하였다. 성여신이 특히 사서(史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이렇듯 조계공과 이정(李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22세(1567년) 가을에는 덕산에서 쌍계사로 가서 독서하였다.
30세(1575년)에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공부하였고, 32세(1577년)부터 34세(1579년)까지는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살면서 경전(經傳)과 『심경』, 『근사록』, 『성리대전』, 『대학』, 『소학』 등의 책을 차례로 강독하였는데, 혹시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문득 잠심(潛心)하고 묵회(黙會)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하였으며, 뜻이 풀린 뒤에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성여신은 제자백가를 포함하는 폭 넓은 독서를 통해 학문적 포용성을 길렀는데, 이 시기에 성리학에 침잠함으로써 성리학적 사상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외종손인 안시진(安時進)을 통해서 남긴 「침상단편(枕上斷篇)」에는 그의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36세(1581년) 봄에는 창녕의 선영(先塋)을 살피러 갔는데, 당시 창녕의 수령을 지내고 있었던 정구(鄭逑)가 찾아와서 만났다. 4월에는 장인인 박사신(朴士信)을 따라 의령의 가례(嘉禮)로 이사하였는데 근처의 곽재우, 이대기, 이대약(李大約), 이종영 등과 더불어 서로 강마(講磨)하였다. 37세(1582년)에는 자굴사(闍崛寺)에서 곽재우, 이대기와 더불어 강마하면서 겨울을 지냈다.
57세(1602년)에는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고, 이 해에 이종영과 이대약(李大約)과 더불어 계서약(雞黍約)을 하여 매년 봄 가을 양 계절 끝 보름에 돌아가면서 서로 방문하니 정온(鄭蘊)도 함께 참여하였다. 58세(1603년) 3월 보름에는 「계서회(雞黍會)」를 부사정에서 열기로 하였다. 9월에는 친구인 선비들과 함께 덕천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는데, 이광우, 이천경, 진극경, 정승윤(鄭承尹), 하징, 하성(河惺), 신가(申檟), 하수일(河受一), 정승훈(鄭承勳), 이유함(李惟諴), 하광국(河光國), 조영한, 조겸(趙㻩), 이명고, 이각(李殼), 조영기, 문홍운(文弘運), 박인(朴絪) 등 여러 선비들이 모두 와서 모였고, 그 밖에 또 33인이 왔다(『凌虛集』). 59세(1604년)에는 이대기를 방문하였다(『雪壑先生文集』).
61세(1606년) 3월에는 이대약(李大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가을에 정구(鄭逑)가 덕천(德川)에서 찾아왔다.
저술 : 성여신은 62세(1607년)에 「삼자해(三字解)」와 「만오잠(晩悟箴)」을 지었고, 69세(1614년) 여름에 「성성잠(惺惺箴)」을 지었으며, 71세(1616년) 봄에 「금산동약(琴山洞約)」을 이루고 가을에 두류산에 가서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으며 겨울에 보름 동안 두류산을 유람하고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를 남겼다. 73세(1618년) 봄에 관포(灌圃, 漁得江)선생의 쌍계사(雙磎寺) 팔영루 시판을 쓰고 여름에 두류산에 올라가서 「기소견장편(記所見長篇)」이라는 7언고시를 남겼다. 74세(1619년)에 「진양전성기(晋陽全城記)」 및 「상락군김공시민극적비명(上洛君金公時敏郤敵碑銘)」을 짓고, 77세(1622년)에 『진양지(晋陽誌)』를 펴냈고, 78세(1623년)에 『천자초예(千字草隸)』를 지었다. 다시 두류산을 유람하고 장편의 고시인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지었다. 87세(1632년)에 「침상단편(枕上斷編)」을 지어 가을에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을 이루었다.
스승추존활동 : 성여신은 31세(1576년)에 최영경,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는데, 이 때 그도 함께 가서 의논하고 일을 도왔다. 56세(1601년)에는 병화로 소실된 덕천서원을 제현과 더불어 중건하고, 최영경을 배향하였다. 이 때 이정(李瀞), 진극경, 하징 등과 더불어 도모하였다(『茅村集』).
성여신은 87세(1632년) 봄에 병으로 눕고, 동년 겨울 11월 초 1일에 부사정(浮査亭) 양직당(養直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朴 敏, 『凌虛集』 4권 2책.
李大期, 『雪壑集』 4권 2책.
成汝信, 『浮査集』 4권(『韓國文集叢刊』 56), 民族文化推進會, 1990.
成汝信, 『浮査先生文集』 4권(飜譯本), 浮査亭, 檀紀 4327.
『民族文化大百科辭典』 8·10·12·18.
李商元, 「浮査 成汝信의 隱逸精神」, 『南冥學硏究論叢』 4, 南冥學硏究院, 1996.
高順貞, 「浮査 成汝信 硏究」, 慶尙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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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인들의 산행 경로| ●-- 고향의 역사 이야기
김용규 | 조회 41 |추천 0 | 2008.11.10. 19:49

 

  두류산 기행록 (양대박) 산행 경로


 

  두류산 일록 (박여량) 산행 경로


 

  방장산 선유일기(성여신) 산행 경로


 

 유두류록(김종직) 산행경로





   
유두류록 (조식) 산행경로




                              
 유두류산록(유몽연) 산행경로  

         

 지리산일과 (남효온) 산행 경로

 

 
관련

 




過勿憚改(과물탄개) 성여신, 허물 고치기를 꺼리질 말라
  • 승인 2017.07.19 14:31



人言我過我當思(남이 내 잘못을 말하면 나는 마땅히 생각해야 하니)
有則改之無自怡(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스스로 기뻐한다네)
子路喜聞能勇改(자로는 허물을 듣고 기뻐하며 용맹스레 잘 고쳐서)
端宜百世作人師(바르고 마땅함이 백세에 스승이 되었구나)


이 시는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이후 문란하고 투박해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성여신이 86세인 1631년에 지은 시입니다. 그는 당시 명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이 시는 쉽고 명확합니다. 일찍이 공자가 "허물이 있으면 고치길 꺼리지 마라(過則勿憚改)"고 했던 말이 주제이고,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남이 허물을 말해 주면 기뻐했다(子路人告之以有過則喜)'는 구절이 사례입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허물이 있고 실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반성하고 고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 즉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만든 세상을 결함계(缺陷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이 잘못을 고치고 나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형식적인 사과가 문제가 되는 상황을 자주 봅니다. 요식행위로 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허물을 듣고 기뻐하기는 고사하고,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하는 사과는 허물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없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여신은 심상하게 이런 말을 시에 담은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온축한 삶의 지혜를 원숙한 경지에서 다시 짚고 있는 것이기에 울림이 더 큽니다. 요즘 이 시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신승훈·경성대 교수


www.bstoday.kr/news/articleView.html?idxno=120001    비에스투데이 






『진양지(晉陽誌)』 수록 1616년 성여신(成汝信) 금산동약서(琴山洞約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C.1616.4817-20110630.Y1141804001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성여신
작성지역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작성시기1616
형태사항 크기: 16.5 X 23
판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2권 2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진양지(晉陽誌)』 수록 1616년 성여신(成汝信) 금산동약서(琴山洞約序)
조선시대 경상도진주 지역의 읍지(邑誌)인 『진양지(晉陽誌)』 수록된 서문으로, 1616성여신(成汝信)이 작성한 것이다. 동약은 몇 개의 마을 단위로 시행되던 향약(鄕約)으로 16세기 이후, 지역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시행이 확산되어 갔다. 1616년 제정된 금산동(琴山洞)의 동약은 임진왜란 이후 향촌사회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 인근 대여촌(代如村)금산동에 합치면서 새롭게 동약을 제정하였으며, 아울러 약원(約員)의 명부인 동안(洞案)도 만들어졌다. 성여신의 서문에는 전란 이후 새롭게 제정된 동약의 의의와 성격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광우

상세정보

慶尙道晉州牧琴山洞 일대에서 실시된 琴山洞約의 서문으로, 임진왜란으로 금산동代如村이 한 동리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1616대여촌 출신의 유학자 成汝信에 의해 작성
邑誌 晉州 上晉陽誌 卷之上 琴山洞約序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이 끝난 후 피폐해진 향촌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동약이다. 동약이 시행된 琴山洞은 원래 慶尙道晉州牧東面에 소속된 곳이었는데, 전란으로 고을이 크게 피폐해지게 되었고 17세기 초반 향촌복구 과정에서 代如村과 합쳐졌는데, 이곳은 지금의 晉州市琴山面 일대이다. 동약의 서문을 작성한 성여신南冥退溪에게서 수학한 대여촌 출신의 유학자로 동리 사람들의 청탁을 받아 서문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서문을 통해서 동약 복구 과정과 성격을 간략하게 파악 할 수 있다. 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琴山代如村과 더불어 한 마을로 합쳐진 것은 兵火로 인해 나머지 人煙이 소실되어 열 집에 아홉 집이 비었기 때문에 두 마을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 月牙 한 굽이의 경계가 서로 이어져 있어 마치 나라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기에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금산이라 하게 되었다. 이 금산의 땅은 남쪽의 鳳鶴으로부터 시작되어 북쪽의 松江에 접하였고, 북의 송강에서 시작되어 남쪽의 漸灘에 끝나니 연이어 뻗어 있기가 거의 30리가 된다. 劍湖의 푸른 물결이 출렁이고, 모래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어 閭閻이 땅에 대어 있다.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울리어 비록 ‘諸葛之隆中(諸葛亮의 隆中)’이나, ‘樂天之履道(樂天의 履道)’라 하더라도 이것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人士로 한 동네에 같이 사는 이만 5,60명에 이르니 洞案이 없을 수가 없다. 동안이 이미 만들어졌으면 洞約이 없을 수가 없다. 이 동약을 만드는 일을 나에게 맡기어졌고 바로 잡으라고 하니 내가 사양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이란 옛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면, 모두가 다 구차스럽게 되기 때문에 먼저 呂氏鄕約의 條目에 의지하고, 다음으로 退溪洞約의 규범을 모방한 연후에 우리 동네에 전해져 오던 옛 규약을 다시 복구하였다. 옛날의 것으로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이를 덮어버리고, 오늘에는 적합하나 옛날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이를 더하였다. 人情이 모두 싫어하는 것은 버렸으며, 人情이 모두 좋아하는 것은 취하였다. 또 綱이 되는 것은 크게 쓰고, 目이 되는 것은 다음에 쓰며, 나란히 써서 그 종류를 나누고 注를 달아 그 뜻을 풀이하였으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였다. 오호라! 마을에 仁厚한 풍속이 있으면 義가 되는 것인데, 우리 동네의 풍속은 예부터 아름다웠다고 일컬어 왔으니, 어찌 사람의 성품이 옛날에 아름다웠다면, 지금에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人傑이 나는 것은 地靈에 연유된 것이니 우리 동네의 인걸은 옛적부터 일컬어져 왔는데, 어찌 성품이 이전에 신령스러웠다가 뒤에 와서 신령스럽지 않겠는가? 德으로 薰習하고, 風化로 힘써 그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고상한 것을 잘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재주 있는 사람은 뽑아서 높이고 능력이 있는 자는 발탁해야 한다. 세상에 아름다움을 들추어내고 이를 더 盛하게 하는 것도 또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人事가 극진하면 天命 또한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인사의 당연함을 닦지 아니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거나 인걸이 나오게 한다는 것은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동약을 만드는 까닭이면서 반드시 계승시켜, 나가는 것에 인재를 作成해 나가는 한 규범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呂氏兄弟는 나라의 名賢이요, 退陶先生은 우리나라의 宿儒로 학문이 精純하고 言行이 본받을 만한 분들이다. 향약의 한 규칙이 千歲에 전해진다면 當世의 薰陶가 되고 점점 번져서 인심을 맑게 할 것이며 풍속을 잘되게 할 것이니, 어찌 근원으로부터 뻗어나지 않고서야 그렇게 되겠는가? 만약 本源의 실제에서 勉勉, 循循하지 않고 한갓 구질구질하고 천박스럽게 約文의 末節만 따른다면, 이는 呂氏와 退陶의 죄인이며 내가 여러 君子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萬曆 丙辰(1616) 淸和(4월) 念(20일)에 洞老 浮査野夫 伴鷗 昌山後人 成汝信이 삼가 序한다.
본 서문에서 주목할 점은 금산동약은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금산동대여촌은 별개의 동리였으나, 전란으로 크게 피폐해져 두 동리를 금산동으로 합치게 되었고, 종전에 실시되던 동약을 계승하여 새롭게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동약은 여씨향약을 기저로 하고 退溪鄕約을 참고했다고 한다. 퇴계향약은 16세기 중반 이래 그의 門人들로 인해 영남 지역에서 확산되고 있던 양상이었다. 두 선현의 향약과 더불어 옛 규약을 참조했다고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향약과 같은 동리의 자치규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향약 실시 이전부터 각 동리에는 자치적인 규약이 있었는데, 이러한 규약은 성리학의 보급과 더불어 재지사족들에 의해 향약으로 탈바꿈 해 나가던 추세였다. 금산동에서도 향약보급 이전 자치규약 운영의 가능성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서문 뒤에는 鄕約節目이 부기되어 있다. 四大綱領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네 개 조항을 부기한 다음 간략한 지침이 細注로 나열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 전후 경상도진주 지역 동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다. 금산동에는 17세기 이전부터 일종의 자치규약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향촌 복구와 더불어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가미된 새로운 동약이 마련되었다. 대여촌과의 합쳐짐으로써 명부인 동안도 새롭게 작성되었는데, 동약은 여씨향약과 퇴계향약을 기저로 하고 있다. 동약의 제정은 전란 이후 향촌사회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다. 전란으로 어수선해진 향촌질서를 동약의 시행으로, 종전과 같이 사족중심의 질서 체제로 환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晉陽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晉陽郡史』, 晉陽郡史編纂委員會, 晉陽郡, 1991
『17~18세기 南冥學의 繼承과 發展』, 金俊亨,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南冥學硏究院, 2008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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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진양지(晉陽誌)』 수록 1616년 성여신(成汝信) 금산동약서(琴山洞約序)
琴山洞約序琴山之與代如村合爲一里   兵火之餘人烟蕭瑟十室九

【空故幷二爲一也月牙一曲界境相連猶   之間於故又合爲一而總名之曰
琴山琴山之地南自鳳鶴北抵松江北自   松江南極漸灘延袤幾三十里釼湖綠漾
【平沙彌望閭閻擈地鷄犬相聞雖諸葛之   隆中樂天之履道無以過矣人士之同居
【一洞者數至五六十則不可無洞案洞案   旣成則不可無洞約洞約之修委諸不穀
【使正之不穀舜不獲已窃思之事不師古   皆苟而已故先依以呂氏鄕約之條次倣
【以退溪洞約之規然後追復吾洞流傳之   古例宜於古而不宜於今者損之合於今
【而不合於古者增之人情之所同惡者去   之人情所同好者取之綱則大書之目則
【次書之列書而分其類懸註而釋其義使   觀者易知焉嗚呼里有仁厚之爲義吾洞
【之風俗古稱美矣豈人之性美於古而不   義於今乎人傑久生由於地靈吾洞之人
【傑古稱盛矣豈地之性靈於前而不靈於   後乎德以熏之風以勵之美其俗而善其
【尙者在於人才以拔之能以擢之名於世   而盛於斯者亦在乎人人事盡焉則天命
【亦不外乎人矣不先修人事之當然而欲   使風俗美焉人傑生焉是不知本者矣此
【不穀之所以修洞約而必繼之以作成人   才之一規也呂氏兄弟室名賢退陶先
我朝宿儒學問精粹言行可法鄕約一   規千載流傳則當世之熏陶漸染淑人心
【善風俗者豈無所自而然哉如不能勉勉   循循於本原之實地而徒屑屑然硜硜然
【從事於約文之末節則是亦呂退之罪人   而非愚之所望於同約諸君子者也萬曆
丙辰淸和念洞老浮査野夫伴{丘+鳥} 閑翁昌山後人生員成汝信謹序
洞約節目
〇一曰德業相勸【德謂行善改過孝悌親睦
【守廉尙禮業謂敎子   接賓讀古書行古道

  二曰過失相規
【過失鬪訟
【誣毁營私酗愽交非其人   動止無儀不孝不悌等事

三曰禮俗相交
【禮俗謂婚喪祭祀之時或   賀之或吊之或賻之之類

四曰患難相恤
【患難謂水火也盜   也疾病也恤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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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여신(成汝信)

[생원] 광해(光海) 1년(1609) 기유(己酉)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7위(12/100)

[인물요약]

UCIG002+AKS-KHF_13C131C5ECC2E0B1546X0
자(字)공실(公實)
생년 병오(丙午) 1546년(명종 1)
졸년 임신(壬申)【補】(주1) 1632년(인조 10)
본인본관창녕(昌寧)
거주지진주(晉州)

[이력사항]

선발인원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유학(幼學)
부모구존영감하(永感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성두년(成斗年)
관직 : 참봉(參奉)
[안항(鴈行)]
형(兄) : 성여충(成汝忠)
형(兄) : 성여효(成汝孝)

[출전]

『만력기유동증광사마방목(萬曆己酉冬增廣司馬榜目)』(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이) 349.16 사마만])

[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이) 349.16 사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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