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鷺山 이은상 선생님의 지리산탐험기 - 上

2017. 10. 27. 17:24산 이야기



*산행기의 원본 일부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1. 지리산의 지명과 계보 | ‥[산행이야기]
원미산 김길주 | 조회 61 |추천 0 | 2017.09.25. 09:29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1. 지리산의 지명과 계보
 글쓴이 : 산돌림
조회 : 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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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사는 연례(年例)를 잉습(仍襲)하여 올 여름에는 산악순례의 제3회로 영호(嶺湖)의 거악(巨岳) 지리산을 등척(登陟)하기로 하고 동도(同道)의 사(士)를 부르기로, 나는 병약한 몸을 일으켜 이 탐승단에 참가하여 다행히 말미(末尾)의 일원이 된 것이다. 영산예첨(靈山禮瞻)의 본회(本懷)를 푸는 것만도 한껏 즐거운 일이겠는데, 아울러 지상(紙上)에 졸문(拙文) 유기(遊記)를 명촉(命囑)함에 대하여 동사(同社)에 감사하는 바이다.            / 노산(鷺山) 이 은 상

 

 

1. 지리산의 지명과 계보 

 

 

1. 지리산의 名號考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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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으로 향하는 전기(前記)로 하여 무엇보다 먼저 그 명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산의 조종(祖宗)은 백두(白頭)라 하여, 백두산으로써 역내 산악의 수반을 삼는 것이나, 이는 조선사의 출발점임과 아울러 지리적인 관찰에 의하여 하는 말이요, 실로 인문발달상으로 보아서는 이 지리산으로써 두위(頭位)를 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명칭자면(名稱字面)만 하여도 한둘에 그치지 않고 자못 10종의 다(多)에 이르는 바, 여기 그 명칭 하나하나에 대하여 평일의 우견(愚見)을 피력하리라.

  

   지리산의 별칭으로 두류산(頭流山) 또는 두류산(頭留山)이란 이름이 있다. 고려 고종 때의 사람 이인로<파한집> 상권에,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하는데,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 [현재의 남원]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智異山, 或名頭留, 始自白頭山而起, 花峰萼谷, 綿綿聯聯至帶方郡, 磻結數千里] 운운이라 하여, 진작부터 ‘두류(頭留)’라는 글자가 보이고, 이륙<유산기>, 김종직<두류록>을 비롯하여, 저 조남명[남명 조식] 처사의 '두류산 양단수'4)라는 이름 높은 시조[두류산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도 있어 ‘두류’라는 글자를 널리 쓰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런데 頭流 혹은 頭留라 쓰는 그 까닭에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문헌에서 같은 해석을 볼 수 있는 바, 이제 대표적으로 <여지승람> 남원조(南原條)의 설을 좇으면,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流자는 留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女眞白頭山之脈, 流至于此, 故又名頭流, 或云, 其脈至海而窮, 停留于此, 故流作留爲是]라 하였고, 문헌비고의 해석을 적건대, 백두산의 영숙한 기운이 여기에 흘러 쌓인 까닭에 두류산 [白頭靈淑之氣, 流蓄於玆, 故曰頭流] 운운(19권)이라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의 산맥을 살피건대, 역내의 대소군산(大小群山)이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한 것임은 물론이요, 지리산에 이르러 종언(終焉)된 것도 사실이다.

   남사고(南師古) [조선 중기의 학자. 역학과 천문지리에 통달해 예언에 능했다고 함]의 설과 같이, 백두산맥이 지리산에 와 그친 것이 아니라 바다 속으로 은복(隱伏)하여 제주도의 한라산을 짓고, 또 일본열도를 이루었다고도 보지 못할 바는 아니나, 반도륙내(半島陸內)로만 한하여는 이 지리산으로써 산맥의 최남단 종단락(終段落)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의미에서 頭流라, 頭留라 하였겠느냐는 것은 얼른 수긍되지 아니한다.
   頭流, 頭留가 백두산이 흘러내렸다거나, 백두산이 머무른 곳이라거나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는 이것을 조선어의 음역자(音譯字)로 밖에 해석하고 싶지 아니하다.

   여기에 있어서도 頭流, 頭留를 ‘마리’, 즉 ‘머리’로 해독하여, 留와 流는 ‘리’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그보다는 ‘두리’라는 음(音) 그대로 읽으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고대인이 한문 수입되기 이전에 하등의 사상적 관념이 없이, 다만 지리산의 거대한 외관을 바라보고 ‘두리뭉툭’ 또는 ‘두리벙벙’한 산이라 부르던 그 상형적(象形的) 명칭이 그대로 한자화된 것으로 봄이 가장 평명(平明)하고 안당(安當)한 해석일 것으로 믿는다.

   ‘두리뫼’라 부르던 그 이름을 왜 구태여 頭流, 頭留로 역하였느냐는 것은 다시 말할 것 없이 유자(儒者) 스스로 백두산에 계통을 닿게 한다고 음의(音義)에 가장 부합하는 자면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한 점에 입각하고서야 지금 우리가 부르는 ‘지리산’이라는 그 ‘지리’를 해명할 수가 있게 된다.
 
   ‘지리’에 대한 한자도 자못 많아서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는 ‘地理山’ 이라 썼고, 최치원찬 진감선사비(眞鑒禪師碑)에는知異山’ 이라 썼고, 동인(同人)의 '찬법장화상전'을 비롯하여, <삼국사기> 중에서도 ‘최치원전’에는 현재 쓰는 글자대로 ‘智異山’ 이라 적었고, 기타 모든 잡종문적(雜種文籍)에서 ‘智利’, ‘地利’ 등 글자로 씌어져 있음도 본다.

   이 ‘지리山’이란 것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智利’ 라 쓰는 것이 가장 가(可)하니, 그것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을 약칭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이는 물론 말세승도(末世僧徒) 간에 행하는 궤변이어니와, 대지문수사리를 ‘智利’라 약칭한 불전(佛典)도 절대로 없을 뿐더러, 또 설사 그렇게 약칭할 수 있다손치더라도 이는 다만 총림(叢林) 간의 한담에만 그칠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가(可)나 오(誤)나 ‘지(智)’자를 쓴 까닭만큼은, 유자(儒者)가 ‘두(頭)’자로 번역하는 반면, 불가(佛家)는 세간사무의 시비정사(是非正邪)를 변별하는 절대최고의 기능인 ‘지(智)’로써 그 근사음을 취하여 대역(對譯)한 것임은 명확한 일이겠다.

 

   그러나 역자(譯字)는 서로 어떻게 되었든지 ‘지이(智異)’라 써놓고, ‘지리’라 發蔭해 놓은 가장 중대한 이유가 곧 나의 우견(愚見)인 그 본명 ‘두리뫼’라는 ‘두리’를 인습(因襲)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頭流, 頭留, 地利, 智利, 知異, 智異, 地理 등이 죄다 ‘두리’라는 그 고호(古號)를 대역한 것으로 보려 한다.

   대방(大方)은 다시 이를 시정하여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현대를 허물없이 살기 위해서는 시대의식에 휩쓸리어 시대에 매몰하기보담도, 승전(勝戰)의 역사의식의 견지에서, 시대를 굽어보면서 지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끝으로 사과할 것은, 이곳에서 풍부한 역사사상(歷史事象)을 건조한 지성의 논리적 구조에 결박하여 해석한 것이다. 사상(事象)의 이러한 논리화는 물론 관념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필요한 의상(衣裳)이며 또는 고의로 선택한 의상이라 하는 것을 양해하여주기 바란다.


 萼 : 꽃받침 악, 

 

2. 지리산의 名號考 (하)

 

   지리산, 두류산 등 모든 명칭이 자면(字面)은 비록 여러 가지로 보여 있지만, 필경은 그것이 ‘두리’라는 상형적 속호(俗號)에 근거한 음역자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함은 위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이어서 지리, 두류 등 이외에도 또한 여러 종의 이칭(異稱)이 있기에 또 거기 대하여 약간의 해설을 가하려 한다.

 

   지리산의 별칭을 방장산(方丈山)이라 함은 이미 주지하는 일이어니와, 여기 방장산이라는 그 명칭의 유래를 말하건댄 이러하다.

   <습유기> [중국의 전설을 모은 지괴서(地怪書)]에 따르면,
   “부상(扶桑) 오만리에 방당산(磅山)이란 산이 있는데, 산 위에 백 위(圍)[위(圍) : 양 팔을 벌려 낀 둘레. 아름.]나 되는 복숭아나무가 있어 만년만에 한 번씩 결실하며, 방당산 동쪽에는 울수(鬱水)[앵두나무]가 있어 천 상(常)[1常은 16자(尺)]이나 되는 벽우(碧藕)[푸른 연뿌리]가 있으므로 ‘萬歲永桃, 千常碧藕’ 의 설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이수광은 그의 <지봉유설> 2권에 이 방당산이란 것을 음상(音相) 비슷한 점에서 방장산과 같은 것으로 말하였다. 방당산과 방장산이 같은 것이냐 아니냐는 것은 더 논란할 필요가 없거니와, 그보다는 이 방장산을 지리산의 별칭이라 말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토설화의 삼신산을 모두 조선에서 그를 구하여 금강봉래(蓬萊)라 하고, 지리방장(方丈)이라 기록하였고, 한라영주(瀛州)라 함은 세상이 거의 결정적으로 말하는 바이나, <향산이적기(香山異蹟記 )>에 따르면, 평안북도 묘향산방장산이라 기록하였고, 또 이수광<지봉유설> 2권“석일(昔日)에 어떤 이가 강원도 고성 해변에서 물 속에 있는 한 와석(臥石)을 보니, 거기 방장산비(方丈山碑)라는네 자가 제각(題刻)되어 있더라” 한다는 세전(世傳)을 기록하고, 혹시 금강산방장산이라고도 한 일이 있는 듯하다고 개의(介擬)하였다. 

 

   그리고 더욱이 <습유기>에 말한, 소위방당산 동(東)에 울수(鬱水)가 있다” 한 그 울수는 울릉도(鬱陵島)를 말함이 아닌가 하는 의견까지를 적어 두었다.  

   또 지봉은 계속하여 두시(杜詩)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 라는 구절을 해석하되, 본시 삼산의 설이 서복(徐福)에게서 나온 말인 바, 서복이 일본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신(神)이 되었은즉, 삼산이 응당 동해의 동(東)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이와 같이 방장산을, 혹은 묘향산의 이칭이라, 혹은 금강산의 별칭이라, 또 혹은 동해의 동에 있을 것이라 하여 여러 종류의 해석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도 또한 더 구명(究明)할 필요도 없고, 또 구명해야 할 성질의 것도 아니니 실로 이는 신선가(神仙家)의 이슬 먹는 입으로 논란케 하고, 우리는 다만 지리산을 방장산이라는 몽환계(夢幻界)의 명칭으로까지 대신 부르도록 이 산이 명산이라는 것만 알면 족할 것이다.

 

   또 이밖에도 ‘남악(南岳)’이라고 적은 곳이 많으니, 이 명칭은 신라시대의 칭호로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근거하여 남악이라 함은 단순히 그 위치가 신라도성의 남방에 있기 때문이니, 당시 오악(五嶽)에 중사(中祀)[<삼국사기>에 따르면, 명산대천을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함] 를 설하되, 동에는 토함산, 서에는 계룡산, 북에는 태백산, 중앙에는 팔공산에 대하여, 남에는 지리산(地理山,智異山)에 그 제단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남방에 있는 산이므로 남악이라고 불렀던 것이더니, 후일엔 그것 그대로 조선불교발달사상에 있어서 법문구별상(法門區別上)의 칭호가 된 것이다.

 

   의상의 전교십찰(傳敎十刹)로 헤아려진 남악 이후에 신라구산문의 하나로 홍척선사에 의하여 일컬어진 남악으로부터는 분명히 법문상의 벌역(閥域)[가문이나 문중의 영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니, 도의(道義)북산에 대칭한 홍척남악이기 때문에 지리적 위치로 명명된 처음의 남악과는 일원이의(一元二義)의 지칭(指稱)으로 변화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총림간에서나 또 혹, 사자(士子)들 중에서 ‘월유산(月遊山)’이란 일칭이 있다고 현학(衒學)하는 이 있음을 본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이 일칭이 꼭 한 곳에서 볼 수만 있는 바, 김정언이 찬한 <보운동진대사비명> 중에 “…나이 열여덟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年十有八, 稟具於月遊山華嚴寺]…”라 한, 한 곳뿐이다.  그러나 이를 지리산의 별칭으로 해석함은 필경 일종의 오(誤)에 지나지 않으니, 월유는 지리산의 별칭이 아니라 산중(山中) 일봉(一峰)의 부분명칭을 가져다가 화엄사의 소재를 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지리산의 제칭명호(諸稱名號)에 대한 우견과 간고(間考)를 시(試)하였거니와, 이같이 10종의 이칭을 가진 산인만큼 이 산이 과연 인문과의 교섭이 얼마나 번영하고, 긴밀하고, 또 심각하였던지를 짐작하기에 족할 것이다.

 

 

3. 지리산의 系譜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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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우형 선생이 1980년대 후반에 복원한 백두대간 산경도>

  


    지리산의 명호에 대한 고찰을 이어서, 다시 지리산의 지리적 계보를 따져보려 한다.

지리산이건 무슨 산이건, 조선역내의 산이 어느 산이나 다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렸다 함은 다시 말할 것이 없지마는, 백두산이 면면련련(綿綿聯聯)하여 수천리 아래에 지리산을 이루기까지 그 내맥(來脈)이 어떻게 되어 왔느냐 하는 것을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리산으로 가는 자, 모름지기 가지지 않으면 안될 기초지식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 북부고지백두대간(北部高地白頭大幹)

 

    백두의 영산(靈山)이 한쪽으로 소위 관북고지(關北高地)에 일맥을 벌리면서, 거대한 본간(本幹)은 남으로 분수령, 연지봉, 허항령이 되어 길주 서쪽, 갑산 동쪽의 원산이 되었다.

 

    이 원산은 장백산으로 향하는 한 가지와 마천령으로 뻗어가는 한 가지를 흘린 채로 그 종맥은 서하(西下)하여 마등령, 조가령을 이루면서 후치령이 되었다가, 다시 그대로 서남주(西南走)하여 화피산 부전령을 일으키고, 함흥 북에 와서 황초령이 된다. 

    이 황초령은 북으로 설한령을 거쳐 폐사군(廢四郡)[세종대왕 때 만든 8진6군 중 세조 때에 몽골족의 침입을 우려하여 철폐한 압록강 근처의 행정구역. 여연, 무창, 우예, 자성군의 4개 군 지역을 일컬음]의 모든 산에 이르는 한 가지를 던지면서, 역시 그 대간은 서(西)로 영원북(寧遠北)의 낭림산에 이르렀다가 다시 청남지대행(淸南地帶行), 정평지계행(定平地界行)을 가르고, 제대로 내려 횡천령에 이른다.

 

    횡천령은 다시 철옹산, 오강산, 무라발, 장좌령의 고악(高岳)을 솟치면서, 본간은 동남으로 달려 재령산을 거친 후에 고원(高原) 화여산이 되었다가 다시 동남하하여 문천 서쪽의 두류산이 된다.

 

    두류산은 서남으로 일파의 분맥을 다스리면서 동남으로 내려 노동령, 마식산을 지나 다시 남하하여, 안변과 이천 경계의 박달령이 되니, 저 백두산으로부터 이 박달령까지 산맥을 구분하여 말하되 ‘북부고지백두대간(北部高地白頭大幹)’이라 일컫는 것이다.

 

(2) 동부고지백두대간(東部高地白頭大幹)

 

    동부고지의 산맥은 박달령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박달령은 평강(平康)의 기산석왕사(箕山釋王寺)의 설봉(雪峰)으로 가는 양 가지를 나누면서, 정맥은 궁예고도(弓裔古都)의 설운령을 지나 평강 북쪽의 분수령이 된다.

    분수령도 또한 주빙(朱氷), 백빙(白氷)의 두 물결을 흘려 한북(漢北)의 제산을 이루게 하면서, 정간은 동북으로 청하령을 지나 안변 남의 기죽령이 된다.

 

    기죽령으로부터는 동해에 연하여 통천의 저유령이 되고, 여기서 총석으로 향하는 한 가지를 벌리면서 대간은 의연히 남하하여 추지령을 지나 판막을 일으킨 뒤에 회양 동쪽의 쇄령이 되고, 쇄령으로부터 말휘령으로 하여 단발령을 짓는 한 가지를 따로 보내고, 정통은 동으로 온정령을 거느리면서 저 유명한 금강산을 이룬 것이다.

 

    금강산은 그 영묘한 기운을 동남으로 전하여 회전령을 일으키고, 여기서 인제 복룡산, 춘천 우두산 가는 맥을 추리면서 제대로 동남하하여 회령, 진부령, 흘리령으로, 양양의 설악산이 되어 이름 다른 또 하나의 금강의 빼어난 경치를 만든 것이다.

    설악산은 오색, 구룡을 거쳐서 유명한 오대산이 되고, 오대산은 다시 치악산으로, 용문산으로 몇 가닥을 벌리면서 정간은 역시 그대로 내려 대관령, 백복령, 건의령을 지나 다시 서남으로 구비 돌려 청옥산을 지으면서 봉화 태백산에 이르니, 저 박달령으로부터 태백산에 이르기까지의 산계(山系)를 ‘동부고지백두대간(東部高地白頭大幹)’이라 일컫는 것이다.

 

(3) 남부고지백두대간(南部高地白頭大幹)

 

    남부고지의 제산맥은 태백산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 태백산은 낙동 제산 가는 길을 따로 보내고, 정맥은 서쪽으로 수다(水多), 백병(白屛)을 지나 순흥 서쪽의 소백산이 된다.

 

    소백산은 성산석굴 가는 한 가지를 내던지면서 제대로 서주하여 문경 대미산, 계립령, 조령 높은 재를 만들고 이어 저 유명한 희양산이 되었다가 보은 속리산에 이른다.

 

   그리하여 속리산은 구봉, 고산을 허위지나 서로 달려 추풍령을 짓고, 이어 삼도봉을 거쳐 남으로 대덕산이 되었다가, 여기서 합천의 가야산 가는 한 가지를 보내면서 대간은 무주 남에 이르러 덕유산이 된다.

 
   이 덕유산은 낙남 여러 산으로 향한 길과 적상산 되는 맥을 따로 흘리며, 정간은 다시 남으로 달려 봉황봉, 육십령으로, 장안치에 이른다.

 
   이 장안치의 한 가지는 노령을 지나 호남제산에 이르고 또 한 가지는 마이산을 거쳐 금남(錦南) 제산에 이르는데, 그 정간은 백운산으로 유치(柳峙), 여원(女院)을 지나 저 거대한 명산 지리영봉을 이루니, 저 태백산으로부터 이 지리산에 이르기까지를 ‘남부고지백두대간(南部高地白頭大幹)’이라 부르는 것이다.

 
(4) 낙남고지봉황간지(洛南高地鳳凰幹支)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까지의 산계는 그 정통적 내맥을 위에 간단히 설명하였거니와, 여기 이어 지리산이 그 꼬리를 어디로 흘렸는지 그 후계를 붙여 말하려 한다. 이것은 소위 ‘낙남고지봉황간지(洛南高地鳳凰幹支)’라 일컫는 지대로서 여기 필요한 일부분만을 설명하겠다.

 
   지리산은 한 가지를 동으로 흘려 단속산에 이르고, 정간은 남으로 취령을 지나 다시 동으로 소곡, 옥녀, 망진산을 이루고, 다시 팔음산이 되었다가, 여기서 사천의 두음산 가는 맥을 던지며, 본간은 남주하여 천금산, 무량산이 되고, 다시 동북으로 돌려 여항산을 지나, 창원의 불모산이 되며, 여기서 웅천의 한 가지를 나누면서, 정맥은 동남으로 구지봉이 되어 김해의 분산에 이르러 그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것이 지리산에 대한 조계혈통(祖系血統)의 보계(譜系)다.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2. 화엄사까지의 행로 | ‥[산행이야기]
원미산 김길주 | 조회 40 |추천 0 | 2017.09.27. 09:05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2. 화엄사까지의 행로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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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엄사까지의 행로

 

 


4. 구례행 도중 吟 數章

 

   먼 길 떠나는 마음이라 아침부터 긴장하더니 황혼이 들자 난데없는 뇌우(雷雨)가 창 밖에 뿌리는데, 무엇인지 창연(愴然)한 생각에 목침을 높이 고이고 곤하여 깊이 잠든 자 같이 서창(西窓) 아래 누웠다가, 정각이 가까워 떫떠리고 일어나니 하늘엔 또다시 난데없는 별들이 반짝인다.

 

   一匏●, 일여장(一藜杖)1), 천애표박(天涯漂迫)의 손인 듯이 홀홀히 집을 나선 7월 28일의 밤.

 

   지리영산을 향하는 채로 궁자(窮子)의 외로운 생각을 누를 길이 없건만은 11시가 지나 발차한 후에는 20명 동도(同道) 순례자들과 더불어 담론사념(談論思念)이 오로지 지리산뿐이라, 궁자의 외로운 생각도 지리영산을 향하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약함을 저기 가서 강함으로 바꾸리라. 암담(暗澹)을 저기 가서 광명으로 돌리리라. 이러한 생각에 차바퀴 구르는 소리조차 신비한 운의(韻意)로 들리고, 깊어오는 밤도 오히려 광명으로 향한 돌진으로 믿어지자, 좁고 더운 차창 밑이 도리어 양풍고각(凉風高閣)의 편안한 자리 같아서 젖 먹은 어린 아기처럼 고요히 잠들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천리강산을 수삼매(睡三昧)로 지나고 깨어나니 이리역.

   여기서 차를 바꾸어 경전북부선이라는 여수행을 타고 가다 구례에서 내리려는 것이 이번 우리의 노정(路程)이다.

 

   29일의 아침은 왔다. 차는 다시 떠난다.

 

   광명한 아침빛 아래 너른 평야를 지나노라니 생각이 한 가슴 차고 넘는다. 차창 아래 묵연히 앉았다 말고, 내 입은 기어이 제 본성따라 사면경개(四面景槪)를 그대로 두지 아니하련다.

 

 

   지리산 우리님께 몸을 바치려

   가까이 가는 걸음 흥겨로운데

 

   만경강 술을 삼아 盃山이 여기

   날더러 아침부터 취하라시네

 

   ●●라 한 벌판에 익어가는 벼

   생강도 만오천석 자랑하는데

 

   德津池 잔물 위에 연꽃이 한창

   취향정 화수각에 놀다나 갈까

 

   어느덧 완산주라 슬픈 옛생각

   名産이 종이라네 적어볼까나

 

   두어라 영웅충신 인 곳이 없고

   바람만 오목대를 불고 지나네

 

   만덕산 내린 줄기 깊은 골 속에

   정수사 짙은 녹음 좋다건만은

 

   雲水도 萬疊靑山 그늘 속이라     

   뽕따는 큰애기들 더 좋은 景을

                                                (※ 雲水는 임실의 별칭)                            

   삼방산 돌아내린 오수천 물아

   盖仁의 義狗塚이 어드메 있나

 

   오늘은 犬墳曲도 들을 길 없어

   쓸쓸히 무심한 듯 지나가노라.

                                                (※ 盖仁은 고려초의 金盖仁. 犬墳曲은 당시 樂府 중의 歌曲)

 

   蛟龍山 산성 아래 남원 옛고을

   열녀라 우리 춘향 보고싶구나

 

   요천을 끼고 내려 고룡봉 넘어

   金池를 지나서니 남도 땅일세

                                           (南道는 全南을 말함)

 

   곡성도 桐裡山 어드메 있나

   禪門이 오늘은 어떠하온고

                                          (桐裡山은 新羅禪門九山의 하나)

 

   섬진강 끼고 내려 구례가 여기

   지리산 우리님이 저기 뵈시네.

 

 

   우리 일행은 구례구라는 역에서 하차하여 구례읍을 향하는 자동차에 탑승한다.

 

   여기서부터도 우리는 벌써 지리산의 ●愍 그득한 그늘 아래 싸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번뇌를 다 여기에 풀어버리고, 적나(赤裸)한 청정일수신(淸淨一修身)으로 저 거룩한 님의 품속에 들 것이다.

 

  

5. 섬진 長流와 오산

 

<반야>님의 작품 중에서.

 

   멀리 구름 속으로 지리산의 위용성자(偉容聖姿)를 바라보면서 구례읍을 향하여 들어가는 우리는 지금 오직 감격으로만 가슴을 두근거리며 산악여래(山岳如來)의 설법에 귀를 기울인다.

 

   조선은 실로 산악국이다. 2천5백미터 이상의 고악(高岳)으로 말하면 2,744미터의 백두산을 최고로 하여 역내에 네 곳밖에 없지마는, 5백미터 이상 2천미터 이하의 산은 자못 2천6백65 곳이나 된다.

 

   그 위에 5백미터 이하의 산까지를 합계하면 실로 그 수효가 삼천을 넘어 조선 총면적 14만 방리(方里)에 대하여 45방리마다 산 하나씩이 궐기(蹶起)한 비례가 된다.

 

   이러한 숫자는 그만두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바에도 가는 곳마다 고악군산이 연옹기복(延擁起伏)하여 언제나 산 속에서 사는 느낌을 가지게 되거니와, 그러므로 조선의 문화, 조선 정취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산악을 이해하고 또 연구함이 가장 긴중(緊重)한 일사(一事)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른편 곁으로 끼고 가는 섬진의 장류(長流)! 남해사면지대에 이 섬진이 없었다면 생활과 문화가 어떻케나 적막하고 빈약할 뻔하였겠느냐.

 

   “나라 안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의 성주, 진주 등 몇 곳이다. 이런 곳에선 논에다 볍씨 한 말을 뿌려서 최상은 140말을 거두고, 그 다음은 100말을 거두며, 최하 80말을 거둔다. 그러나 다른 고을들은 그렇지 못하다.”2)라 한 <택리지>의 기록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구례평야의 기름 같은 양전옥토가 농사 모르는 ●●선비의 눈에도 탐스럽고 복스럽지 아니하냐.

 

   蟾津水 내린 물이

   굽이쳐 돌아 흘러

 

   南海로 가는 길에

   鳳城3)을 지나거다

 

   沃野에 구수한 벼 향기를

   마을 아래로 전하더라

 

   이제 다시 이 섬진강의 원류를 간략히 말하리라.

 

   섬진강은 진안 마이산과 전주 웅치(熊峙)로부터 온다.

   마이산으로부터 오는 물이 서남으로 흘러나가다가 진안 서천(西川)을 합하여, 임실 북에 이르러 오원천이 된다.

   오원천은 좌로 갈천을 거두어 서쪽으로 새원산, 운남산을 돌아 오른편으로 양발천을 모으고, 남으로 흐르다가 또 오른편으로 점암천, 구고천 등을 만나 갈담이 된다.

 

   그리하여 다시 동남으로 내리다가 좌로 순천(川)을 합하여 적벽강이 되고, 이어 남류하다가 우로 이천을 넣어 연탄(淵灘)이 되고, 다시 서남으로 내리다가 우로 선각천을 합하여 동으로 아니도(阿尼島)에 이르러 좌로부터 오는 요천(蓼川)을 만나 순자강이 되었다가, 동남으로 굽이쳐 압록진에 이르러 순천의 낙수(洛水)가 재회한다.

 

   그런데 여기 이 낙수의 원(源)은 장흥(長興) 남의 웅치와 중대산에서 나와 장택고현에서 모여, 동으로 보성에 이르러 북으로부터 오는 정자천과 동복(同福)의 적벽강을 합하여 낙수진이 되고, 다시 동북으로 압록원에 이르러 대황진이 되어 본류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양수(雨水)의 합류가 동으로 잔수진(潺水津)과 죽연(竹淵)이 되고, 좌로부터 오는 소아천(所兒川)을 모아 구연(九淵)이 되고, 우(右)로 쌍계(雙溪)의 물을 거두어 화개동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고, 남으로 구례 동(東)에 이르러 비로소 섬진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이것이 섬진의 원류요, 이로부터 섬진수의 가는 곳은 좌수영반도(左水營半島)와 남해도(南海島)의 만(灣)내로 빠져 입해(入海)하니, 대개 이 지대의 수계를 남해사면섬진수계(南海斜面蟾津水系)라 일컫는 것이다.

 

   자동차로 달리는 대로 오른편에 천인돌봉(千突峰)4)으로 솟는 것이 오산(鰲山)이란다.

   어허!  저게 오산이로구려.  백운산 내린 끝이 섬강 가에 와 우뚝 솟은 저 이름난 오산이 이거로구려.

   원효, 의상을 비롯하여 무의자(無衣子), 원감(圓鑒)이 정수안선(精修安禪)한 곳이 여기로구려.

   도선(道詵)이 여기 상주하여 천하지리를 궁구하던 곳도 여기로구려.(輿覽5) 求禮條)

 

(☜오산의 사성암)

 

   오산의 경(景)과 역사가 다 요만조만한 것이 아니건마는 차가 머물지 아니함에 후일을 약속하는 수밖에 없고, 다만 <원감록>에서 읽은 압선암, 행●석이 다 저기 청풍(淸風) 속에 놓였으리라 생각할 따름이요, <봉성지>에 적힌 원암십이대를 지점(指點)도 없이 바라보며 지나갈 따름이다.

 

   鰲山 十二臺에 누구누구 앉으신고

   淸風 滿月에 들면 날 이 없으리라

   俗人이 仙緣을 못 얻어 그냥 지나가노라.

 

 

6. 천은동의 天隱寺

 

   우리의 지리산 순례는 구례로부터 시작한다. <고려사> 악지(樂志)의 백제가곡에 구례미녀의 지리산곡이 등재되어 있음을 보면, 이곳이 진작 고대로부터 인물과 문화가 범수준이 아니었던 줄을 알겠거니와, 저 일대의 지사요 시인이던 이해학, 황매천의 유적을 중심으로 하고 이곳이 사상과 문한(文翰)으로도 범향(凡鄕)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모(敬慕)의 눈으로 천은사로 향한다.

   구례평야의 시원한 맛이 끝나자 매천의 구거(舊居)에 절하면서 연파정, 방광리를 지나매 계곡이 차차 깊이를 더하기로, 이름 높지 아니한 천은사가 도리어 심상(尋常)한 난고(?苦) 아닐 줄을 짐작하겠는데, 동곡(洞谷)이 넓어지는 끝에 일주문이 여기라고 앞을 막는다.        

 

   차를 돌려 세워두고 우리는 일주문 앞에 모여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 쓴 이원교6)의 신필을 우러러보며 섬세치밀한 건축미를 탄찬하면서 몸을 밀어 문 안으로 들어서니, 계곡 위에 무지개다리가 놓였고, 이어 ‘극락대’라 이름한 돌계단을 올라서니 오른편 사루(寺樓) 위에 ‘보제루’라 쓴 것도 역시 원교의 붓이므로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cafe.daum.net/k2270kim/Hyaq/1754   산의 변용





       

작성일 : 05-12-02 14:46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3. 화엄사에서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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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엄사에서



7. 緣起의 四獅石塔

 

   구례와 천은사간 내왕(來往) 16km(40리)를 자동차로 주귀(走歸)하여 읍중인사의 다연(茶宴)에 참례하였다가 오후 두시반에 다시 자동차로 화엄사를 향하니 읍에서 5km(15리) 상거(相距)[서로 떨어져 있는 두 곳의 거리]다.
   이름만 들어도 시원한 냉천리 앞을 지나 우전(牛田)으로, 서촌(西村)으로 개울물 따라 오르노라니, 지리산 품 속이 광명과 예술로 외로운 자의 마음을 위무함이 벌써부터 이같으신가 하여 감격으로만 대자연 앞에 정례를 드리면서 수림 속을 뚫고 올라 산문 앞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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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의 대가람 화엄사를 오래 그리다 이제야 보는 바쁜 마음에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올라 나무그늘 아래 차려 놓은 냉차의 접대를 받은 후에 우리는 사승(寺僧) 한 분을 앞세우고 경내 구경을 재촉하였다.

   화엄사사적기에 따르면 “新羅 眞興王 5年 甲子, 緣起祖師, 傳 華嚴圓頓之幽玄, 流通于海東, 於是 鷄林之大乘佛敎始此”라 하였으니, 진흥왕 5년 갑자(서기 544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창건임을 알겠는데, <여람>에는 연기를 '煙氣'라고 썼고, 또 어느 때의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연기의 행적이 상전(詳傳)하지 아니함에 그가 어떠한 이었던지를 말할 길은 없으나, 지금 이 화엄사가 그의 창건임은 다른 기록으로도 분명한 사실이며 또 여기 효대(孝臺)라 일컫는 유적물로 하여 그의 심인(心印)이 천추에 전함을 본다.                          

   수축(修築) 중에 있는 각황전 배후의 소강(小崗)[작은 산등성이] 위로 오르니 '삼층4사자석탑' 이라는 고탑(古塔)이 서 있는 바 이것이 곧 '효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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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람>남추강[추강 남효온(1454~1492). 생육신의 한 사람.김종직의 문하]의 기(記)를 거(據)하면, 연기가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으로 들어와 절을 세우고 삼천여명의 제자를 데리고 화엄묘지를 유통하였는데, 이 탑은 그 어머니의 명복을 빌어드린 것이므로 세상이 전하여 효대라 부른 것이니, 일찍이 고려 때에 대각국사가 남으로 지리산을 찾아와 놀던 '유제화엄사(留題花嚴寺)' 시(詩)에

 

   寂滅堂前多勝景          적멸당 앞에는 경치도 빼어나고
   吉祥峰上絶纖埃          길상봉 높은 봉우리 티끌도 끊겼네.
   彷徨盡日思前事          진종일 방황하며 지난 일 생각하니
   薄暮悲風起孝臺          저문 날 가을 바람 효대에 감도네. (대각집 17권)

 

라 한 것을 보면 효대라는 명칭이 그 당시부터 전함인 줄 알겠다.
  

   또 '예연기조사영(禮緣起祖師影)'이란 詩에

 

   偉論雄經罔不通          기신론과 화엄경을 통달하고
   一生弘護有深功          일생을 호법(護法)함에 공이 깊다.
   三千義學分燈後          삼천 학도에게 불법의 등불 나눠 준 뒤에
   圓敎宗風滿海東          원교(圓敎)의 종풍 해동에 가득했다. (대각집 17권)

 

라 한 것을 보면 이 연기조사란 이가 화엄기신유현묘지(華嚴起信幽玄妙旨)로써 삼천대중을 교양하여 동방에 유통함이 얼마나 홍대하였던지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마음이 여기 이 효대에 남아 천오백년을 '비풍(悲風)' 속에 홀로 선 것이다. 이제 이 효대사사(四獅)석탑을 미술상으로만 볼지라도 그 의장(意匠)의 묘함과 수법의 정(精)함이 저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신라시대 이 종류 탑파(塔婆)의 쌍벽이라 일컫는 국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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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사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세운 삼층탑으로서, 높이는 약 24척이다. 단하에는 4면 각 3구(區)의 격협간(格狹間) 안에 천인상을 양각(陽刻)하고, 상단은 석주를 대신하여 네 모퉁이에 사자상을 세웠고, 중앙에는 연기조사 모당(母堂) 입상을 세워 상층을 떠받들고 있다.
   초층 탑신의 4면에는 호형(戶形)을 지었고 그 남북에 사천왕상을 분각하였으며, 동면에는 두 보살, 서면에는 인왕상을 각하였다. 각 층의 ●軒은 극히 경쾌하며 정상에는 보주, 노반을 봉안하였다.

 

   그런데 이 사사석탑에 관하여 세키노(關野) 박사는 탑 안의 입상을 자장(慈藏)이라 하여 총독부 제간행물이 전부 그 말을 준하였으나, 이는 본사 사적 중의 착오된 기문(記文)을 맹독함에서 기인한 오류라 할 것이오, 실로 이는 연기조사모당니상(尼象)이며 배석(拜石)을 사이에 두고 그 앞에 있는 소탑 안의 상은 연기조사의 상이라 본다.

   남추강해동명승기(海東名勝記) 중에 "……中庭有石塔, 塔四隅有四柱戴塔, 又有婦人中立頂戴狀, 僧曰, 此緣起母尼者也, 其前有小塔, 塔四隅亦有四柱戴塔, 亦有男子中立頂戴, 仰向於戴塔婦人狀, 此緣起也" 운운이라 한 것이 무엇보다 적실(的實)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러하거니와 탑은 과연 권형(權衡)[저울추와 저울대. 사물의 가볍고 무거움을 고르게 함][저울추와 저울대. 사물의 가볍고 무거움을 고르게 함]의 수려함과 수법의 정교함이 진실로 보는 자의 눈을 황홀케 한다 하겠는데 이도 또한 생각하면 그 시대 그네들의 위대한 신앙이 끼쳐놓은 거룩한 자취가 아니고 무엇이랴.

 

   일유봉(日遊峰) 월유봉(月遊峰)에 해 돋고 달이 지고
   천년(千年) 비풍(悲風)이 효대(孝臺)을 지나건만
   님 위해 복(福) 빈 탑(塔)이라 변함없이 섰구나
   뒤 언덕 동백(冬栢)나무 사시(四時)에 푸른 뜻은
   다락에 큰 종암(鍾岩)이 밤낮에 우는 뜻은 
   님 위해 복(福) 비는 마음 끊이잖아 그러노라.

 

   일유봉, 월유봉은 화엄사 앞의 동서봉(東西峰) 이름인데, <봉성지>에는 유(遊)를 유(留)로도 썼으나, 동진비(洞眞碑)유(遊)자가 더 좋기로 유자를 취한 것이며, 또 ‘월유(月遊)’란 것도 ‘다루’라고 해석하려는 점에서 ‘두루’, 즉 ‘두류(頭留)’의 전칭(轉稱)으로 지리(智異)와 다 같은 역자(譯字)로 보는 것이다.

 


8. 無二珍寶의 經壁

 

   연기의 탑을 배관(拜觀)하고 내려와 우리는 이 절의 무이진보(無二珍寶)라 할 석경(石經) 잔편(殘片)을 보여달라 청하였다. 연기의 찬(撰)이라 하여 ‘대승기신론주망’, ‘화엄경개종결의’, ‘진류환원락도’ 등의 제목이 있음을 보면 연기의 학덕이 얼마나 하였던지를 더욱 한번 알려니와 어찌 이것이 연기만에 한한 이야기랴.
   고인은 재(才)로나 덕으로나 신앙으로나 무엇으로든지 금인의 추수(追隨)를 허락하지 아니함을 보는 바이니, 그 뚜렷한 호개증좌(好個證左)를 여기 석경의 잔편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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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석경의 잔편>

 

   화엄사의 각황전은 본시 전벽(殿壁)을 토벽으로 하지 않고 청석(靑石)을 벽돌같이 귀를 맞추어 쌓고, 그 석벽 전면에 화엄경을 새겼던 것이다.
   그 의도부터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냐. 이제 그 파편을 보매 측면에 번호까지 새겨 순서 있게 쌓아 그대로 미관, 장관을 이루었던 자취가 소연(昭然)하거니와, 일찍이 임란시에 이 전각이 불타면서 따라 그 벽경도 파괴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람> (구례조)에 따르면, 이 석경을 말한 끝에 “여러 해가 되어 벽이 무너지고, 글자가 지워져서 읽을 수가 없다”[歲久壁壞, 文字沒不可讀]라 하였으니, 이 벽경이 파괴되기는 임란을 기다리기 이전에 벌써 국초(國初)에서부터 파상(破傷)을 입었던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잠깐 화엄경의 한역(漢譯)에 관하여 말하리라.
   화엄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무릇 세 번이었으니, 첫째는 동진 불태발타라가 역한 육십권화엄경이니, 이것이 소위 진화엄(晋華嚴) 혹은 육십화엄, 또 혹은 진경(晋經)이니 구경(舊經)이니 하는 것이요, 둘째는 당조(唐朝) 보차난타가 역한 팔십권화엄경이니, 이것은 당경(唐經)이라 또 신경(新經)이라 또 혹은 팔십화엄이라 하는 것이요, 셋째는 당조(唐朝) 삼장반야(三藏般若)가 역한 사십권화엄경이니, 이것은 정원경(貞元經)이라 또 혹 사십화엄이라 일컫는 것이다.

 

   본시 동일한 화엄경을 가지고서 왜 이같이 여러 번 역출(譯出)하게 되었느냐는 것은 별문제로 해두고, 여기 이 화엄사의 전벽각경(殿壁刻經)은 진경(晋經) 육십화엄과 정원경 사십화엄 두 종류라고 하나, 이번 우리 일행은 범자화엄경(梵字華嚴經) 원본의 잔편까지 보았다.

 

   석질(石質)은 연활한 납석(蠟石)으로 지리산중의 소산이라 한다. 천청색(淺靑色)을 띠었고, 그 중에는 박적연와색(薄赤煉瓦色)의 것도 섞였는데, 이는 경전이 불 붙을 때에 타서 그같이 변색한 것이라 전하며, 석경의 자체(字體)는 매 행간에 괘선을 긋고, 전부 해서(楷書)로 썼는데 잔편의 필적이 비록 서로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보아 우군서법(右軍書法)[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의 서체를 가리키는 듯함]에 혹사(酷似)함을 볼 수가 있거니와, 경(經)자는 극히 정교하며, 서법(書法)과 도법(刀法)이 아울러 묘경에 든 것이라, 참으로 무이의 진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석경전각년대(鐫刻年代)에 있어서는 두 설이 있으니, 하나는 의상이 십찰(十刹)에 전교할 때에 그가 이 절에 와 왕명으로 각경(刻經)하였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신라말엽 정강왕 대에서 전대(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刻造)한 것이겠다는 것이니 이제 양설(兩說)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기 위하여 먼저 의상의 전교십찰을 말하려 한다.

 

   화엄도량에 관하여 최치원이 찬(撰)한 <법장화상전협주(法藏和尙傳挾註)>해동화엄(海東華嚴), 대학지소(大學之所), 유십산언(有十山焉), 중악공산미리사(中岳公山美理寺), 남악지리산화엄사(南岳智異山華嚴寺), 북악부석사(北岳浮石寺), 강주(康州:합천) 가야산해인사(迦耶山海印寺), 보광사(普光寺), 웅주(熊州:공주) 가야협보원사(迦耶峽普願寺), 계룡산갑사(鷄龍山岬寺), 괄지지소운(括地誌所云), 계람산시(鷄藍山是) 삭주(朔州:춘천) 화산사(華山寺), 양주(良州:지금의 양산)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비슬산옥천사(琵瑟山玉泉寺), 전주 모산국신사(全州母山國神寺), 경유(更有) 한주(漢州:지금의 廣州) 멱아산(覓兒山:삼각산) 청담사(靑潭寺), 차십소(此十所)”라 하였거니와, 여기 이 화엄사는 연기조사의 창건 이후, 특히 의상의 전교십찰 중의 하나로 의상이 이 절에 이르러 해장전(海藏殿)으로써 화엄대학당을 삼았던 것이므로 여기를 화엄종찰(華嚴宗刹)이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석경에 있어서 당(唐) 의봉 2년(신라 문무왕 17년, 서기677)에 상사(湘師:의상대사)가 왕명을 이어 각경하였다고 하는 것이 그 일설이니(화엄사사적기), 신라 문무왕 17년이라는 것은 의상대사가 왕명에 의하여 영주 소백산에 부석사를 짓고 화엄일승을 개연(開演)한 다음 해이니 53세의 고령에 달한 때이다.

 

   그리고 또 일설은 이 벽경이 의상의 각한 바가 아니라 신라말엽 정강왕조로부터 경순왕조간(서기 886~935)에 전각된 것으로 보는 이가 있으니 그 근거는 이것이다. 

   화엄경사원문(華嚴經社願文)“당 희종 광계 2년(신라 정강왕 원년, 서기 886) 7월 5일에 조신(朝臣) 종친들이 왕의 형 되는 전대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화엄경사(華嚴經社)를 결하고, 최치원이 원문을 찬하며 치원의 모형(母兄) 되는 별대덕(別大德) 현준(賢俊)화엄경을 송하고, 군신에게 권유하여 사경천복(寫經薦福)케 하기를 상언하므로 왕이 가납하여 시서(侍書) 중에서 선서자(善書者)를 택하여 화엄경정안품제일(華嚴經淨眼品第一)을 명사(命寫)하며 다시 서발[서발(舒發) : 신라 때의 관직 이름] 김공임보(金公林甫)와 소판순헌(蘇判順憲) 김일 등이 의희[의희(義熙)는 동진(東晋) 안제(安帝)의 연호]육십화엄경(義熙本六十華嚴經)을 사(寫)하고, 국통(國統)과 승록(僧錄) 등이 정원본 사십화엄경을 사하였다” 운운 한 것을 보아, 이 석경은 현준대덕의 상언이 동기가 되어 조각된 것이리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다.(이나다 순스이(稻田春水), 石壁經考)

 

   이제 두 설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어느 대방(大方)의 특별한 고구(考究)에 맡기려니와, 나는 이제 벽경의 파편을 손에 들고 마음의 깊은 속으로부터 감격의 송가를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華嚴經 靑石壁도 無常하여 깨어졌네
   깨어진 조각돌을 손에 들고 읽으오매
   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여기 분명 적혔구나.
   종이에 쓴 經은 불나면 타버리고
   돌에 새긴 經은 비바람에 부서져도
   마음에 박은 經典은 사라질 줄 모르나니.
   劃마다 글자마다 금금이 소리 있어
   點 하나 남김없이 다 삭아 없어져도
   알뜰한 임의 마음은 千秋萬世 傳하리라.

 

 

9. 長命의華鬘燈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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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황전은 화엄석벽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제 거의 전부를 개축하는 중에 있다.
   건축도 예술인 이상 예술은 반드시 기술만을 요구하지 아니한다. 깨어진 일곱덩이 돌에서 로마의 문명을 읽을 수 있음과 같이, 부서진 일만육천매의 벽경 잔편에서 신라의 문명은 너무도 자세히 알 수 있으니 영혼 없는 현대인의 손으로 이 각황전이 얼마나 훌륭히 신축될는지 나로서는 민망하고 답답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벽경 파괴 이후에도 이 각황전은 이조후기의 건축물 중에 저 법주사 대웅전, 장안사 대웅전 등과 더불어 대표적 중층불전(重層佛殿)으로 굴지하던 것임을 기억하여 구안자(具眼者)[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안식을 가진 사람] 의 웃음꺼리가 되지 않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각황전은 이제 숙제의 건축물이라 말할 것이 없거니와, 여기 현존한 대웅전도 각황전과 함께 인조년간의 건축으로 역내, 단층불전으로는 저 전등사의 대웅전, 동화사의 대웅전, 석왕사의 대웅전, 보현사의 대웅전, 해인사의 대적광전 등과 더불어 이조후기의 대표작이라 치는 것이므로 나는 유심히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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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 앞 서5층석탑>

 

   그러나 그것보다는 못 한 개 쓰지 않고 짜서 만들었다는 닷집이 더 희관(希觀)이었으며, 또 그보다는 전(殿) 앞에 있는 동서(東西) 2기의 5층 석탑이 발을 빼앗는다.
   동탑(東塔)도 국보로 지정되기는 하였으나, 서탑(西塔에) 비하여는 가치가 일단(一段)이나 저락(低落)됨을 면하지 못하겠고, 서탑은 과연 우미(優美)한 작품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었는데, 2층 기단 위에 5층탑을 세운 것이다. 더욱이 기단석의 4면에 각 면 3체(體)씩 12체의 조각이 있음은 소위 12지신의 상이며, 상단에는 8금강신을 각하였고, 탑신 제1층의 4면에는 사천왕상을 반육조(半肉彫)로 각하여 있음이 어떻게나 서로 조화되고 아담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국보로 하여서는 이보다 오히려 그 곁에 있는 각황전 앞의 석등(石燈)이라 할 것이다.
   이 석등은 높이가 21척이나 되는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석등으로는 이것이 가장 큰 것이라 하겠고, 또 그 정비된 권형, 고아한 수법상으로 보아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이것이 최고의 지위를 점령하기에 족하다.
   지복석은 8각으로서 그 위에 복련화를 새기었고, 다시 ●?覆蓮?文의 좌석(坐石)을 첩놓아 간석(竿石)을 세웠는데, 그 간석은 보병상(寶甁像)을 지었다. 그리고 중기석에는 앙연화를 새겼고 개석(蓋石)에는 보주, 보개, 륜, 수화(受華), 노반(露盤) 등으로 된 상륜(上輪)을 이었다. 

 

*** 전재자 註 :  ●?覆蓮?文과 ?雲?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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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황전 앞 석등>

 

   이 석등을 별칭으로 ‘화만등롱(華燈籠)’이라고도 하니, 화만이라는 것은 ‘Kusumamala’의 역(譯)으로서, ‘구소마마라(俱蘇摩摩羅)’라고도 음역하는데 본시는 실(絲)로써 끝을 많이 엮어 몸에 거는 장식품이었더니, 이러한 인도 고유의 풍습이 차차 불공양(佛供養)에 쓰게 되고, 후일에는 금속제로 바뀌게 된 것인 바, 그 이름을 등롱에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

 

   또 등롱이란 것도 본시 불재세시(佛在世時)에는 대개 죽롱(竹籠)이었고, 거기 박포(薄布)나 운모(雲母)를 첨부하였던 것이 후일에 석등롱, 금등롱 등으로 행하게 된 것이어니와, ‘이파(●播)’[등(燈)을 범어로''dipa''라 하는데, 그 음을 따서 표현한 한자인 듯함] 즉 ‘등(燈)’의 원 뜻이 불(佛)의 광명지혜를 표시하여 중생의 내왕에 그 길을 비춤에 있는 것인 즉, 석등을 예술적 관찰로부터 다시 종교적 감수(感受)로 옮겨보면, 이제 무명전도(無明前途)의 중생이 이 앞에 엎드려 미망의 어지러움으로부터 분명 일조로(一條路)로 향하여 가는 최상의 제도(濟度)를 입을 수 있을는지. 나는 마음의 손을 모으고 이 ‘이파’의 지로(指路)를 받고 싶었다.                                                   *** 전재자 註 :이 (儞播) / 동국대 역경원 불교용어사전

 

   밝으신 지혜등(智慧燈)이

   님 켜신 자비등(慈悲燈)이

   미망 중생을 부르시는 지로등(指路燈)이

   비추어 주시는 대로 밟아가려 하옵니다.

 

   번뇌로 백년 살아 무엇에 쓰오리까

   반일(半日) 광명이 소원임을 사뢰오니

   님이여 이 뜻 알으사 불을 높이 드옵소서

 

   나는 이같이 등롱의 감화를 느끼면서 연(連)하여 보물을 찾아 거닐다가 문득 그 곁에 있는 원통전 앞의 ‘노주(露柱)’를 바라보았다.

   관음은 대의왕(大醫王)이라 감로로써 중생의 모든 병을 고친다 함에서, 관음을 모신 원통전 앞에 ‘노주’를 세운 모양이다.

   병든 중생이매 ‘노주’의 고마우심이 어떻게나 느꺼운지 모르거니와 이를 다시 예술적으로만 볼지라도 기대(基臺) 위에 4사자를 앉히고 그 위에 중대석을 얹은 다음, 다시 그 위에 석주를 세우고 석개(石蓋)를 덮었는데 권형과 수법이 신라시대의 제작일 뿐 아니라 여기 이 절에 지정된 여타 국보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이것만은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다한다.

    국보지정의 권리를 쥔 이는 이것을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이 노주도 국보로 보아 의심하지 아니한다.

  

  *** 전재자 노주(露柱) -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求禮 華嚴寺 圓通殿 앞 獅子塔) 보물 300호 / 문화재청 자료

 

10. 碧巖의 華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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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시 뜰 아래에 서 있는 찰간유물(刹竿遺物)의 양개(兩個) 석주(石柱)를 바라보며 이 절의 일천오백년간의 역사를 생각한다.

   산사(山寺)도 또한 무상하여 몇 번이나 헐리고 불타고 다시 짓고, 고승대덕이 머물고 지나가고, 헤아리면 헤일수록 처연한 생각만 든다.

   사기(寺記)를 뒤지매 창건 이후, 신라 경덕왕조에 칙령으로 중창하고, 헌강왕조에 도선국사가 3창하고, 고려 문종왕조에 4창하고, 이조 인조시에 5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한다.

 

   추강(秋江)의 기록에 따르면 절이름을 황둔사(黃芚寺)라 한 적도 있는 모양이며, <봉성지>에 의하면 법류사(法流寺)라 부르기도 한 모양인데, 이같이 사명과 사적이 여러 번 변하는 동안 여기 주석하여 연설한 대덕도 자못 그 수가 적지 아니하다.

   해회당에서 화엄묘지를 강설한 이는 원효요, 해장전으로써 화엄대학당을 삼은 이는 의상이었으며, 도선이 여기와 담선연교(談禪演敎)하여 총림의 대도량을 만들었고, 현준이 또한 화엄경사(華嚴經社)를 결하여 사경(寫經)에 그 힘을 바친 것이다.

    고려조에서도 홍경선사정인, 조형 두 왕사(王師)가 여기 와 전교하고, 이조에 들어서도 지리산중 타사유연제사(他寺有緣諸師)가 다 한번씩 다녀갔을 것은 물론이며, 그 중에서도 중관해안, 청매인오계파성능, 혜암윤장이 다 여기 와 교중찬사(敎衆撰史)에 힘들인 이들이다.

 

   그러나 이 화엄사를 화엄사 되게 한 이는 누구보다도 인조 때의 벽암선사(碧巖禪師)라 할 것이다. 과연 그가 아니었다면 이 절의 면목이 오늘에 어떠한 조잔(凋殘)[빼빼 말라 시들어 떨어짐]을 보이고 있을는지조차 의문일 만큼, 그는 화엄사의 유일한 공로자이며, 아니 그보다는 화엄사의 인물만이 아니라 이조후기의 불교사에 크나큰 업적을 끼친 위인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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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의 화엄사 전경>

  


   지금 여기 사문(寺門) 앞에 벽암선사 가 서 있고, 미술품으로도 손꼽는 묘탑도 있음을 보거니와 그는 호서 보은군 사람으로, 속성은 김씨요, 법명은 각성(覺性), 자는 징원(澄圓), 자호(自號)하여 벽암(碧巖)이라 한 이다.

   선조 8년(1575)에 태어나서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으로 들어가 설묵에게서 출가한 후 14세에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으로 갔다가 덕유, 가야, 금강 제산을 전답하고 다시 휴사(休師)[浮休大師를 가리킴]를 따라 이 산으로 들어오니 때에 운곡, 소요, 송월의 삼걸(三傑)과 만났는데, 시(詩)에 있어서는 삼걸도 오히려 그를 불급(不及)하였었다.

 

  또한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하고, 초예(草隸)[초서와 예서]에 능할 뿐더러 이 산중(山中) 저 칠불사에 결하(結夏)[하안거(夏安居)의 첫날]하고 병(病)중의 부휴를 대신하여 등좌토론(登座討論)하였으며, 휴문(休門)에 수업한 지 20여년 입실전법(入室傳法) 계행청백(戒行淸白)으로 부급래학(負○來學) 하는 이 운집할 새 항상 '사불망(思不忘), 면불괴(面不愧), 요불굴(腰不屈)'삼잠(三箴)으로써 가르쳤다.

 

   광해군 때에 무소(誣訴)를 입어 좌옥(坐獄)되었다가 다시 놓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總攝)으로 봉은사에 머물렀고, <남한지>를 따르면 인조 2년 갑자(1624)에 팔도도총섭이 되어 치도(緇徒)[僧徒]를 거느리고 남한산에 축성하여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를 받았다.

 

   병자의 난에 청병(淸兵)으로 인하여 왕이 남한산성에 파천함을 듣고, 여기 이 절을 근거로 하고 남승(南僧)에 비격(飛檄)하여 수천인의 승군을 모아 관군과 더불어 기각(角)[앞뒤 서로 응하여 적을 견제함]의 세(勢)를 지으니 이것이 곧 저 유명한 항마군(降魔軍)으로, 서산(西山)의 의기를 재현한 자라 할 것이다.

   병역이 파(罷)한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가, 적상산으로, 조계산으로, 백운산으로, 보개산으로 변유(遍遊)하며, 가는 곳마다에 교괴(敎魁)가 되고 이르는 곳마다 법석(法席)을 대장(大張)하며 다시 이 절로 돌아와 여생을 누리다가 현종 원년(1660)에 유게일제(遺偈一題)로 좌화(坐化)하니 기세(寄世) 8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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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이 하사받은 금란가사>

 


    지금 여기에 그의 유품이 사보(寺寶)로 진장(珍藏)되어 있거니와 광해 하사의 금란가사(※金襴袈裟 : 지금 寺寶記 중에 적은 인조 하사라 함은 착오이니, 師의 행장에 의하면 광해 11년(1619)에 광해군청계사에 설재(設齋)하고, 오대산 상원암에 유하는 벽암에게 관리를 보내어 맞아와 설법케 하고 금란의 가사를 하사하였다 하였으니, 당사(當寺)는 이를 참호정오(參互正誤)하라), 그리고 인조 하사의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 어석봉황석(御席鳳凰席), 어배(御杯) 일습(一襲) (※이 어배도 인조 하사품이라 하였으나 배각(杯脚)에 ‘무술가례시’라는 각자(刻字)가 있음을 보아 인조 연간에는 무술(戊戌)이 없고 효종 9년, 즉 벽암이 입적하기 전 3년에 해당하니 이 어배는 효종조의 하사품인 듯), 이와 같이 왕실의 우악(優渥)[은혜가 매우 넓고 두터움]이 극(極)하였던 자취가 역연할 뿐더러, 예조문첩(禮曹文牒)을 보매 효종 원년(1650)에 이 절을 특히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 하였으니, 이는 오직 벽암선사가 이 절에 주석한 연고이었고, 또 그가 입적한 후에도 그 덕이 남아 있어 숙종 27년(1701)에는 일대(一大)를 더하여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음을 보면 벽암 일인(一人)이 걸출하여 화엄사가 크게 드러나고, 화엄사가 크게 드러남으로 하여 총림 전반이 그 영향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화엄사의 벽암이라기보다 오히려 벽암의 화엄사라 함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알괘라.["알겠구나!"의 옛말] 한 사람의 큼이 이러한 줄을.





작성일 : 05-12-09 11:13
[RE] 검토와 해설
 글쓴이 : 가객
조회 : 2,720  
       
   천은사와. 화엄사를 관람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는 문단으로서, 화엄계곡 및 노고단 주변의 지명탐구에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단원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청련대>는 지금의 <집선대>임을 알수 있으며, 주변에 <청련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그 곳을 그렇게 불리워졌다는 <청련대>의 지명유래 기록은 지리산 지명탐구에 있어 더 없아 소중한 자료입니다.

지금까지 노고단 8대중의 하나인 <청련대>의 위치에 대해서

[“청련대는 노고단 남쪽 400m지점 즉 형제봉 능선에 있다.” ]

[“노고단 상봉의 바위군락을 청련대라 한다” ]

등의 여러 가지 이설을 잠재울 수 있는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실제 99탐구팀이 확인해 본 바 여러 주변정황을 봐서 지금의 <집선대>가 <청련대> 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편 <청련암>은 서산대사의 스승이셨던 숭인장로(崇仁張老)의 주식처이기도 했던 곳으로 당시에 이름이 있었던 암자였던 것  같습니다.


[숭인장로(崇仁長老)와 <청련암>에 관한 자료]

   인장로청허휴정(淸虛休靜서산대사)의 은사로서 지리산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수행은 물론 도중(徒衆)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우렸고 중종 15년(1520)에 숭인스님은 석희(釋熙), 신명(信 明), 유공(六空)의 세장로와 함께 도우(道友)를 맺고 길상봉(吉祥峰 .노고단의 옛 이름)) 아래의 청련암(靑蓮庵)에서 수선(修禪)하고 선회(禪會)를 열었다.(화엄사 사적에서 발췌)


<코재>를 굳이 한자음에 맞추어 “鼻峙嶺”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우번대>의 전설 또 한 생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번대사가 “묘령의 여인의 자태에 끌려 성직자의 신분도 망각한 채 그 여인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어쨌다“ 하는 다소 경망한 전설보다 이 본문에서의 설화가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본문 설화에 의하면 <종석대>의 또 다른 이름이 <우번대>인 듯 하며, 소가 껍질을 벗었다는 면우당은 과연 어디 쯤인지....아마 지금의 <상선암>부근인 듯 합니다.

지리산 지명탐구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부분은 논증을 통해 그 구체적 의미를 풀면 되지만, 설화부분은 온갖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여 쉽사리 해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노산선생의 <우번대> 설화는 현재 <우번대>의 행정구역인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와 현존하는 산내암자(우번대)를 소재로 한 정사 같은 야사가 상당히 흥미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노산선생께서도 참고를 하신 듯 한 <우번대”'> 창건설화의 자료가 있어 올립니다.


   천은사에서 조금 올라가면 상선암(上仙岩)우번대(牛飜臺)가 있다.

문수보살을 수행하던 길상동자가 들길을 지나다가 탐스럽게 잘 익은 조의 알곡을 손바닥 위에 놓고 바라보다가 조 알곡 세 알이 손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길상동자는 알곡을 버릴 수가 없어서 입안으로 털어 넣고 먹어버렸다.

그것을 바라다보던 문수보살이 동자에게 "너는 농부가 애써서 일군 곡식을 세 알아나 먹었으니 그 업보로 3년 동안은 소가 되어 그 밭 주인집에서 업갚음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길상 동자는 소로 변해버렸다.

소가 되어 그 밭 주인집에서 일 한지 어느덧 3년이 되던 어느 날 해질 무렵 그 밭 주인이 방에 있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보니 소가 주인을 돌아보면서

"주인장! 3년 동안 일을 하여 빚을 갚았으니 떠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보니 소가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주인은 깜짝 놀라 소를 따라가 보니 상선암(上仙岩) 위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앉아 있어 소를 못 보았느냐며 물어보니 노인이 하는 말이

"소의 껍질은 저기 죽어 있고 주인은 이 쪽에 있는 오두막에서 자고 있소"라고 하여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니 잘 생긴 동자가 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노인에게 물어보려고 상선암 위를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현신했던 문수보살도 없어 졌고 다시 보니 어린 동자도 오두막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 후에 그 자리에 문수의 현신을 기리기 위하여 우번암을 창건하였다

*위의 자료는 아쉽게도 출처가 분명하지가 않은 자료로서 "법보신문"에서 어느 기자가 쓴 기사 입니다.





       

작성일 : 05-12-08 21:13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4. 화엄사 → 코재 → 노고단
 글쓴이 : 산돌림
조회 : 3,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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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엄사-코재-노고단 

 

 

11. 華嚴洞府의 無礙境

  
   기약 없이 다니는 걸음이던들 화엄사에 하룻밤 잠들면서 저 청허선사(淸虛禪師)가 이 절을 지나가며 지은

 

   山川當落照       산천은 청승맞게 해가 떨어지는데
   秋草臥龍龜       가을의 풀밭에는 깨진 비석이 뒹구네
   古殿月應吊       낡은 대웅전에 비치는 달은 슬프고
   破窓風亦悲       부서진 창에 부는 바람 또한 애닯고나.

 

라 노래한 그 애틋한 마음 경지를 그윽히 어루만져 보련마는, 오늘밤을 노고단 앞에서 잘 것이라 해는 저물어가고 갈 길은 이십리니 섭섭한 채로 떠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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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숲길(옥돌님 사진 중에서)>

 

   오후도 벌써 네시다. 여기서부터 등산의 첫길이 시작된다. 절의 오른편으로 하여 계곡을 끼고 오르는 산협로(山峽路)를 잡아드니 발길은 빠르고 마음은 느리다.
   화엄경 독송강독의 법회가 어찌 따로 어느 날에만 한정되어 행하는 의식이겠느냐. 여기 이 화엄동부에 흐르는 물소리, 나뭇가지에 불고 쉬지 않는 바람소리가 일초일각도 끊임이 없이 법계연생(法界緣生) 원융무애(圓融無㝵) 성상회융(性相會融)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무휴법회(無休法會)가 아니고 무엇이랴.

 

   법장20권 <탐현기>도, 여기 자연으로 굴려 있는 바위돌 한구석에 일어났다 꺼지는 물벅금 속에 자세히도 적혔으며, 징관9권 <현담>도 여기 이 풀 끝에 맺혀 피어났다. 떨어지는 마른 꽃잎에 역력히도 적혀 있지 아니하냐.
지엄의 ‘오십문답’을 따로 어디 가 찾을 것 없다. 수림 사이로 들려오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화엄원교(華嚴圓敎)의 묘의를 전하지 않느냐.
   두순(杜順)[당나라의 승려. 중국 화엄종의 개조]<법계관문>을 굳이 좀먹은 종이를 뒤져 읽을 것 없다. 저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나타나 보이는 새파란 하늘이 진공절상관(眞空絶相觀), 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을 여실히 설하지 않느냐.

   자행화타(自行化他)의 대자연불 앞에 몸과 마음을 온통 맡기고서 만유무애의 지경을 맛보고자 함이 오늘 나의 최대희원이요, 최고행복인 것이다.
   만행(萬行)의 근본의지인 화엄삼매(華嚴三昧)에, 너와 나, 지금 여기 이 모든 유정무정이 다함께 안식의 최상은전을 입을 수 있다면은, 오늘 이 석양 앞에 지순지미한 만유(萬有)의 본체생명이 빛나는 그 면모를 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산로(山路) 중의 느티나무 아래서 땀을 잠깐 드리우고 다시 걸어 얼마쯤 오르노라니 평간(平澗)한 빈 터가 집 섰던 자리인 것이 분명한데, 물으니 ‘국사당(國師堂) 터’라고 한다.
   이 산중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또는 그 이후 지금까지 천왕(天王) 숭배의 민신민속(民信民俗)이 다른 어디서보다 가장 성하고 가장 뚜렷하여 그 유지(遺址)와 현장이 한 군데, 두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여기 이 ‘국사당터’라는 것은 우리의 노정 중에서 첫 번으로 만난 그 적확한 형적이다.

   이 국사당터를 지나 ‘중재’를 넘고 다시 송림 우거진 그늘길을 오르노라니 오른편으로 계곡이 내려가고, 노변(路邊) 계(谿) 위에 넙적뭉툭한 바위가 솟았는데 이것을 ‘청연대(靑淵臺)’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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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대'로 추정되는 바위>

 

   그리고 계곡의 이름도 청연동(靑淵洞)이라 부르니 암명동칭(岩名洞稱)이다. 개울 건너 저쪽 송림에 있던 청연암(靑淵菴)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겠는데, 지금도 암지(菴址)가 있다고 하건마는 길이 어긋나기에 찾아 들어갈 여유가 없음이 유감스럽다.

   여기서부터 차차 송림은 그 자취를 감추고, 벌써부터 키 작은 나무들이 행인의 어깨 밑에서 돈다.

   오르고 오르는 길이 화엄사를 떠난 지 벌써 두 시간이나 넘었다. “인제 다 왔소” 하는 말은 사탕발림에 불과하고, “아직도 멀었나보다” 하는 답답한 생각에 펄썩 주저앉으니 산로에 가로놓인 한 커다란 암석이 궁뎅이를 떠받는다.

   기왕 쉬는 길이라 좌우연봉(左右連峰)을 바라보매, 어허 여기서 안 쉬었더라면 어쩔 뻔이나 하였는지, 눈을 감으니 한창 노래하는 꾀꼬리 소리에, 삼독번뇌(三毒煩惱)가 일시에 풀어지고, 눈을 뜨니, 장(壯)하다! 연봉첩장(連峰疊?)에 서리고 얼크러진 송림의 바다.
   위엄스러운 채 부드럽고 밝은 빛이 거기 곁들어서, 차고도 따스한 맛이 가슴 속으로 스며들고, 눈 안으로 들어오는 영묘한 경상(景相)이 시원하고도 갸륵하여 인생의 장정사막(長程沙漠)에 여기가 분명 일구(一區)의 피난소임을 깨닫자 오욕파랑(五慾波浪)이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여기서 얼마 아니하여 코재’에 오르니 우로(右路)변에 이상하게도 냇물이 흘러 고개 넘어로 떨어지는데 이것을 일러 ‘무넘기’라 한다. ‘코재’라 함은 노고단을 표준으로 한 ‘중턱’임을 표시한 이름이겠고, ‘무넘기’라 함은 분수령임을 말함이겠는데, 나는 이 고개 위에서 다시 한번 령하(嶺下) 군봉(群峰)을 조망하면서 장엄한 산상의 황혼을 노래한다.

 

   골이 깊더라니 령상(嶺上)이 높더구나
   여읜 진환(塵)[티끌의 세계, 속세]이 도로 예 와 보이다니
   천공(天公)도 내 뜻을 알아 해를 이제 점그시네.

  

   천산(千山)에 해는 저물고 구름만 나르는데
   나그네 막대 세우고 무슨 생각에 잠겼는가
   무엇인지 나도 모르매 이를 길이 없노라.

 


12. 雲霧 속의 종석대
 
   비치령(鼻峙嶺: 코재) 위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이 노고단 가는 길이요, 또 오늘밤 우리가 여기 있는 서양인 피서촌 중의 산막에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왼편으로 우뚝 솟은 봉은 종석대(鐘石臺)인데, 첫날 길에 지친 일행은 산막을 찾아 들기에도 몹시나 피곤한 모양이다.
그러므로 일행 중에서 정예(精銳)한 건각자(健脚者)만 선발하니 겨우 5~6명, 몇 사람만이 왼편으로 종석대까지 올랐다 내려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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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종석대> 


   황혼을 아끼어 급보(急步)로 달리는 우리 5~6명은 행여나 한 군데라도 삐질세라 어두워 오는 풀길을 헤치고서 마침내 종석대에 이르렀다.

   종석대는 교학(磽确)[모래나 돌이 많이 섞인 거친 땅]한 암석이다. 제멋대로 생긴 바위들이 뭉치어 제멋대로 고대(高臺)를 이루었는데, 고요한 밤이면 이 바위가 소리내어 울므로 이름하여 ‘종석대’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올라선 종석대는, 날으는 운무 속에 싸여 지척을 분간키 어렵다. 주먹이 쥐어지고 가슴이 떨리도록 통쾌하구나. 그러나 장절(壯絶)[장대하고 뛰어남]한 채 무엇인지 비한(悲恨)[슬픈 원한]한 생각에 심장과 혈관이 지금 곧 터질 것만 같다.

 

   종석(鐘石)아 울려무나 소리쳐 울려무나 
   돌같이 뭉친 설움 터치고 울려무나
   산악(山岳)이 깨어지도록 우렁차게 울려무나. 

  

   너 따라 나도 울마 목 놓아 나도 울마
   평생에 쌓인 설움 흐트려 나도 울마
   강만(江灣)[강과 만]이 찢어지라고 크게 한번 나도 울마
  

   발 뻗고 울자 하나 울 곳이 없었노라

   붙들고 울고파도 울 사람이 없었노라
   돌잡고 운무 속에서 실컷 울고 가려노라.

 

   사십년 쌓이고 쌓인 만단번뇌(萬端煩惱)를 종석대 앞에 울음으로 풀어주기를 부탁하고, 운무로 인하여 조망이 못됨을 섭섭히 여기며 내려오자하매, 천의(天意)는 과연 헤아리기 어려워라! 


   운무는 문득 걷어지고 봉만동곡(峰巒洞谷)[꼭대기가 뾰족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와 그에 따른 계곡들]이 군데군데 나타나며, 행여나 점고(點考)에 빠질세라고 “여기요, 날 보오” 동서남북이 얼굴을 보이는데 바른편 서쪽 아래로 보이는 것이 천은동. 동(洞) 북쪽의 남악사(南岳祠) 어드메 있나. 지금 지도에 ‘당동(堂洞)’이라 적힌 곳이 거기요, 성창산<동국명산기>에는 이를 고모당(姑母堂)이라 적었거니와, 고신앙(古信仰)의 유적을 다시 한번 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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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번암>



   명산기에 있는 “당남(堂南), 유우번대우번선사도량야(有牛臺牛禪師道場也)”라 한 우번대는 어느 곳인가.

   지로우인(指路友人)의 손가락 끝에 눈을 내어 보내면서 전설에 귀를 기울이니, 가로되 “옛날에 소 한 마리가 있어 그 소가 선근을 닦았던지, 똥을 누는데 거기서 서광이 나는지라 그곳이 지금 저 방광리(放光里)요, 그 위에 올라오다 껍질을 벗게 되니 그곳이 면우당(免牛堂)이요, 다시 그 위에 올라와 완전히 사람으로 화한 곳을 우번대(牛臺)라 부르는데, 번신화인(身化人)한 그 이가 곧 우번조사(牛祖師)라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설화는 불전(佛典)에서 그 유례를 얼마든지 보는 것이오, 또 그 우의(寓意)하는 바가 교화정신에 있음이언마는, 이제 고해인간(苦海人間)으로서 이를 다른 각도로 본다면 “조사여. 왜 굳이 괴로운 인간으로 화하였소.” 하는 생각이 든다.          

 

   “야화소부진(野火燒不盡),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 [백거이의 시 <</span>賦得高原草送別>중의 한 구절. "들불이 다 태우지 못하니, 봄바람 불면 또다시 돋아나네."] 하는 너른 산야(山野)를, 싸울 이 없는 양식을 앞에 놓고 배 고프면 풀을 뜯고 배 부르면 꼬리치고, 곤하면 잠들고 하여 일체 번반(煩絆)을 벗어나서 행주좌와에 시비 없는 홀몸으로 부동부정(不動不靜)의 제 일생이 그대로 묘심(妙心)이요, 묘상(妙相)이어서 지금 같은 운무리담(雲霧裡潭) 우중(雨中)에서는 그 행복을 덮을 자 다시 없거늘, 조사여, 왜 굳이 무진번뇌의 인간으로 화하였던가.

   원컨댄 조사여, 사람을 번신(身)하여 옛날의 ‘소’로 돌아갈지어다. 그 무심무사한 ‘소’, 소로 돌아갈지어다.

 

   저 소야 몸을 뒤쳐 사람으로 화하다니
   인간 번뇌를 사서 원(願)해 무엇하오
   저 스님 잘못 오셨소 소로 도로 돌아가오
   천은동(泉隱洞) 깊은 골에 풀 먹고 물 마시고
   날으는 운무 속에 꼬리치고 누웠으면
   제대로 화엄선정(華嚴禪定)에 드실 텐데 그러셨소.

 

 
13. 입산 초야의 山幕
 
   초수(草藪) 속의 황혼을 헤치면서 종석대를 내려 노고봉(老姑峰) 아래 양인(洋人) 피서촌 중의 산막을 찾아들었다. 몸을 감고 휘돌던 구름안개가 밤들자 폭우로 변하여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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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의 선교사 수양관 흔적>



   저녁공양(供養)이 들어온다. 공연히 즐거워 담소하는 일행들은 웃음 속에서 저녁공양을 받는 것이다. 상 위에는 더덕, 고사리, 도라지 곰달류 등 이 산 소산의 일미(一味) 산채들이 젓가락을 기다린다. 구례에서 참가한 인우(人友)들은, 지리산 산채가 유달리 살지고 맛있음을 자랑한다.
   더구나 지금 상 위에 놓인 산채 중에서도 ‘곰달류’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북으로 바라보이는 묘봉(妙峰) 아래 심원달궁이란 데서 나는 것인데, 산중에서도 이름이 높다 한다.

 

   심원달궁 큰애기들은
   곰달류 장사로 다 나간다
   한갓 두갓 엮어다 놓고
   값만 통통 올린다.

 

   한갓 두갓의 ‘갓’은 한 묶음 두 묶음하는 ‘묶음’의 뜻이요, 심원달궁이라는 것은 물론 심원(深源) 달궁(達宮)이겠는데, 이 노래는 지리산 특산민요 중의 일절이다.
   이 심원달궁이라 부르는 곳은 지금 지도에 ‘심원(深元)’이라 표시되어 있는 옛 마한시대 유적지라 전한다.

 

   <청허집> 3권 '지리산황령암기' 에 의하면, 한소제(漢昭帝) 즉위 3년(마한 효왕 30년 서기전 84년)에 진변(辰卞)[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도성을 쌓을 때에 황(黃), 정(鄭), 장수가 그 축성을 감독하였기 때문에 좌우 양봉 이름을 황령, 정령이라 불러왔는데, 그 도성을 72년간 보전하였다고 하고, 후일 신라 진지왕 원년(576)에 운집대사라는 이가 중국으로부터 이곳에 와 황령 남쪽에 한 정사(精舍)를 짓고, 역시 봉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菴)이라 하였었다고 기록한 것이 있다.

 

   이 황령, 정령의 유래와 마한 효왕의 피난설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 그것은 이제 증고(證考)할 길이 없으나, 다만 지금도 봉명을 그렇게 부르고, 또 그 동곡인 심원달궁 마한왕의 유적이라고 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육칠십호의 주민이 있으나, 산심수원처(山深水源處)에 찾아올 사람이 없어 그들은 자연히 호세(戶稅)를 물지 않는 백성들이라 하니, 세상과 더불어 서로 버리고 사는 것이 적막하게 보는 이에겐 한껏 적막할지 모르되, 자연으로 보는 이에게는 또 그렇게 안 보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택리지> '복거총론'이 지리산을 말한 중에 “산 안에 100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바깥쪽은 좁지만 안쪽은 넓다. 가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도 있어서, 관청에 세금도 바치지 않는다” [山內多百里長谷, 外俠內廣, 往往有人不知處, 不應官稅]라 한 것이 있음을 보면, 불응관세(不應官稅) 하는 자가 옛날부터 많았던 것이 사실이요, 아니 지금같이 샅샅이 뒤지는 세상에도 이런 태고부락(太古部落)이 있거늘 옛날이야 이런 심곡(深谷)에 관세쯤 줄 녀석, 받을 녀석이 다 없었을 것도 물론이다.

 

   세상을 버릴꺼가

   버리고 여기 들어

   심원 동곡

   올 이 없이 갈 이 없이

   감자랑 곰달류나 먹고

   한세상을 지날까나.

 

   숨어살진댄 가난할 것이요, 가난할지언정 차라리 다 버리고 이런 곳에 와 숨어삶이 오히려 편안할 듯한 생각이 드는 것도 금세(今世)의 어지러운 탓일른가.

 

   산막에 밤은 깊었다. 깜박이는 촉화(燭火) 아래 피곤한 일행의 이야기소리는 차차 적어간다. 어두운 창 밖에는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 입산초야의 감회 깊은 밤이다. 다른 막에서는 어떠한지 모르나 내가 들어 자는 산막은 몹시도 춥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잠 못드는 까닭은 반드시 산막의 추운 탓만이 아닌 것이다.

 

   산막을 찾아 들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어두운 촛불 아래   발낭(鉢囊)[바랑] 베고 누웠는데

   봉창(蓬窓)에 비바람소리   남의 애를 끊는구나.

 

   인생의 가는 길이   멀더냐 짧더냐

   괴로운 하룻밤을   산막에 새우노니

   밤 가면 높은 재 넘어   또 하루를 가리로다.

 



 

작성일 : 05-12-14 23:54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5. 노고단→반야봉
 글쓴이 : 산돌림
조회 : 2,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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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고단-반야봉 

 

 

14. 老姑原頭의 百合

 
   제2일.

 
   노고단 - 반야봉(6km).

   반야봉 - 稷洞계곡(14km).

   직동계곡 - 연곡사(4km).            금일 행정 24km(60리)

 
   노고단 밑의 산막에서 하룻밤을 쉬고 난 7월 30일의 아침. 비는 그치고 아침 안개 속으로서 광명한 햇빛이 우리의 오는 길을 축복하여준다.

 
   숲 사이 군데군데 양인주택(洋人住宅)은 미웁고도 부러웁고, 또 다시 생각하매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제가 가진 명산승경(名山勝景)을 남에게 빌려주면서, 저는 도리어 고한(苦汗)과 악취 속에서도 잘 못사는 못난 내 얼굴을 두루’님 앞에 무슨 염치로 내어밀겠느냐. 잘난 자, 똑똑한 자, 눈 있는 자, 발 있는 자만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임을 놀란 듯 다시금 깨닫는다.

 
   내 땅에 지은 그네들 집 사이로 주인인 듯 나그네로 고개 숙이고 돌아오르니 널따란 평원이 경사진 곳에 세엽(細葉) 척촉(躑躅)[철쭉나무]은 떨기떨기 짓더라. 짙은 녹색에 제몸이 터질 것만 같고 노랑이 고산백합(高山百合)[원추리]은 한창 피어나 이제야 춘사(春事)를 치르노라고 남 몰래 저 혼자 바빠 한다.

 
   물결같이 넘실거리는 청향(淸香)이 먼지에 병든 눈을 부드러이도 씻어줌 같아, 혹은 파랑 풀잎에, 혹은 노랑 꽃송이에 한참씩이나 눈을 잠그다, 구부렸던 허리를 다시 펴고 앞뒤를 바라보매 그대로 창망한 화해(花海) 같아서 우리 일행은 마치도 ●帆이 떠가는 그림과 같다.

 
   회색(晦塞) [깜깜하게 꽉 막힘]하였던 마음이 바야흐로 명랑해지는 줄을 깨닫겠는데, 장숙한 채 미묘한 대자연의 진제현의(眞諦玄義)를 색독(色讀)할 수 있고 미감(味感)할 수 있는 지금 이 백합 원두의 청복(淸福)을 우리 몇 사람만이 누리다니. 아깝고 벅차고 너무 넘치매 진환(塵寰) 중의 모든 사람에게 이 청고(淸高)한 복록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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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장(萬丈) 홍진(紅塵) 속에

   분주한 저 분네들

   애쓰고 잘난대야

   솔로몬을 더 오르랴

   보아라 고산백합(高山百合)이

   웃고 여기 피었구나

 
   한 송이 고산백합

   이슬 아래 자란 꽃이

   뉘보다 고귀한 줄

   세상에 알리려고

   청향(淸香)을 손으로 거두어

   바람결에 날리노라.

 
   뚜렷한 고개마루에서 바른편으로 오르는 봉정(峰頂)이 바로 노고단의 유지(遺址)인데, 표목(標木)을 세워둔 가장자리에 축단(築壇)의 자취가 분명하고 또 무수한 돌무더기가 지금껏 전래하는 민신(民信)을 여실히 증거한다.

 
   노고단이란 것은 다시 말할 것 없이 ‘할미당(堂)’의 역(譯)이다. 조선의 민간신앙 중에 여신 숭배의 자취로 가장 대표적 유적지라 할 곳이 지리산임을, 이 노고단이 한번 더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는 이 산중에서 여신숭배의 현저한 자취를 많이 볼 수 있스려니와, 노고, 즉 ‘당(堂)할마이’ 가 곧 지리산 성모(聖母)의 다른 이름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또 이 노고단길상봉(吉祥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있으니, 이는 물론 불교가 들어와 이같이 별칭케 된 바이니와 대각(大覺)의 시구(詩句)에서부터 보임을 보면 그 이름도 벌써 오래 된 줄을 알겠다.

   '길상'이라는 것은 범어 Sri의 한역으로서 실리(室利)라고도 음역하는 것이니 선조(善兆), 길조(吉兆), 구덕(具德) 등의 뜻을 가진 것이다.

 
   더구나 이 노고단, 즉 할미당의 ‘할미’를 길상으로 역칭(譯稱)케 된 이면을 살피건대, 길상천녀(吉祥天女)의 여성임을 대조하여 볼 필요가 있다.

   Sri-mahadevi,마하실리(摩訶室利), 실리천녀(室利天女), 길상천녀(吉祥天女), 길상공덕(吉祥功德)이라고도 부르는 공덕천, 길상천은 여신의 이름인데, 본래 인도신화 중의 'Lakms(洛乞史茗)' 이라는 이의 다른 이름으로서 비슈누[창조신 브라흐마 및 파괴신 시바와 함께 힌두교 3대 최고신의 하나. 세계를 지키고 유지하는 神]의 비이더니, 후에 불교로 들어와 북방비사문천의 거소(居所)를 주처(住處)로 하고, 내내(來來)에 성불하여 길상마니보생여래라 호(號)한 것이라 한다.

   밀교에서는 금강계대일의 변신인 비사문천왕의 아내라고도 하나, 현도만다라에는 비사문의 곁에 나타나 있지 않고 도리어 허공장원천수관음의 권속 중에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 길상천녀에 대한 해석이요, 그의 여성임이 노고할미의 여성임과 부합하는 점에서 호대(好對)의 역칭(譯稱)이라 할 것이다.

 
 
15. 林傑年의 馬原

 
   제2일.

 
   1506m의 노고단 위에 서서 운무가 걷히기를 기다리나 모처럼 얻은 산상(山上)의 신비감을 좀더 맛보라 하심인지 좀체 걷히지를 아니한다.

   바람부는 대로 동서로 날리는 운무 속에 섰으매, 몸만 아득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득하여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삽시간에 운무는 걷혀지고, 발 아래의 일경일물(一景一物)이 차례로 눈앞에 와 대령한다. 멀리 남으로 섬진강 굽이친 물은 스스로 도취하여 춤추는 듯, 무낭(舞娘)의 옷자락같이 산(山)이라 백사장을 감돌아가고, 가까이 발 밑으로 문수동 휘어진 골은 홀로 묵념하여 조용한 듯, 성자(聖者)의 품 속같이 장송(長松)이라 기암(奇岩)을 포용하였다.

 
   서남의 긴 골은 화엄동이요, 동하(洞下)에 잘도 놓인 저 유리궁(琉璃宮)은 물을 것 없이 화엄대찰(華嚴大刹). 어허! 이러한 가경묘취(佳境妙趣)를 보이심이 다 여기 이 ‘할머니’의 덕이신가 하매, 국사대자연(國師大自然), 노고대자연(老姑大自然), 길상대자연(吉祥大自然), 이 성모대자연(聖母大自然) 앞에 고고(孤苦)한 궁자(窮子)의 감격이란 언어가 끊긴 곳에까지 이르렀음을 알겠다.

 
   여기서 다시 원두(原頭)로 돌아와 올라오던 고갯길에서 직로로 넘어 내리는 길을 따라간다.

   울림(鬱林) 사이로 푸른 이끼를 밟고 산록을 돌아 돌아 어둑하고 깊숙하고 무시무시한 좁은 길을 타고 나가는 여기가 대체 어딘지 알고 싶다. 지금 우리가 돌아 내리고 있는 이 산록의 판로(坂路)[비탈진 길]를 이르되 ‘대판(大坂)’이라고 한다. 큰 언덕이라는 말이겠는데 이 큰 언덕이 왜 무슨 까닭으로 이같이 깊숙한고 하였더니, 큰 언덕이 끝나자 넓으나 넓은 평원이 되는데 이 평원이 대도(大盜) 임걸년(林傑年)이 말 달리던 곳이기 때문인 줄을 알았다.

 
   임도(林盜)가 여기서 수백의 종당(從黨)을 거느리고 말을 달리던 근거지다. 호서(湖西)의 대도는 박장각(朴長脚)이요, 호남의 대도는 임걸년이어서, 전자는 마침내 축발(祝髮)[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가 됨] 돌아가고, 후자는 드디어 형로(刑露) [형장의 이슬]로 끝맺었음이 다를지언정, 일대의 쾌남들이었던 점은 마찬가지다.

 
   문벌용인(門閥用人)의 제도가 시작된 후에 여항(閭巷)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의 한천(寒賤) [가난하고 천함]으로는 비록 그들 중에 영재준걸이 있을지라도 세상에 등용될 길이 없어 녹림양산(綠林梁山)[도적들의 소굴]에 낙초(落草)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강호의 호한 쾌남이 불행하게도 수호(水滸)에 오수(誤隨)하여 일시에 자쾌(自快)하다가 초장(草葬)에 민몰(泯沒)되고 만 자가 어찌 여기 이 임도(林盜) 한 명으로만 헤일 것이랴.

   그들을 쓸 곳 있어 쓰기만 하였더라면 반드시 빈빈(彬彬)하여 가관(可觀)할 자가 많았을 것이요, 또 그로 인하여 참된 복민이중(福民利衆)의 큰 업적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것이다. 시세(時勢)는 원망스럽고 인물은 아까웁다.

 
   임걸년의 마원은 넓기도 하다. 철쭉, 백합 널린 사이로 전나무도 기걸(奇傑)하고 전야(全野)에 우거져 바람에 나부끼는 길찬 띠풀들, 오히려 그날의 한마(悍馬)들을 그리는 양하다.

 
   사나이 잘나건만

   쓰일 길 바이 없어

   칼 갈아 둘러메고

   녹림(綠林)으로 다니다니

   백마(白馬)로 재오치던 냥을

   보는 듯도 하여라

 
   한 들판 적막(寂寞)하다

   한가(閑暇)한 구름 앞에

   길 넘는 모초만이

   바람에 나부끼네

   평생에 큰 고함 한번

   질러보고 가노라

 
   걸년이 비록 도적이란 이름 아래서 살고 죽고 하였을지라도 남아장부 그만하면 또한 시원하였던 것이어니와, 기걸한 그 담남(膽男)도 이 지리산의 장엄한 지기에 힘입은 바 많았을 것이어니 하고 생각하매, 사나이 나거들랑 이 지리산의 대영기를 받아가 그를 선용(善用)함으로써 장부의 면목을 세울 것이라 한다.

 
   이 마원에서 다시 수림 울창한 산록의 길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도적같이 출몰이 자재하다.

   그러나 시원히 열린 평원을 지나온 우리로서는 임로(林路)의 답답함이 마치 열병에나 걸리는 듯하다.

   “답답해 하지마오. 여기 찬샘이 있소.” 하고 위로하는 지로인(指路人)의 말에 등골과 이마의 땀이 얼마쯤 마르는 듯한데, 정작 한 모퉁이 녹음 속 바위 밑에서 ‘찬샘’을 만나, 숨이 막힐 듯 마시고나매 마음 속의 땀까지 식는 듯하다.

 
 
16. 반야봉의 皆空觀

 
   ‘찬샘’의 감로수에 목을 축이고, 녹음 흔드는 바람결에 땀을 드리웠으나 반야봉 남은 길이 예서도 아직 오르는 10리라 함에, 가도 않고 선 자리에서 목이 다시 마르고 땀이 되흐르는 듯하다.

 
   오른쪽으로 초수(草藪)를 헤쳐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첫목서부터 오르는 길이 벽같이 앞을 막는다.

   나뭇가지에 자주 얼굴 찔리움은 땀기운에 눈앞이 흐려진 탓이요, 다섯 걸음에 한번은 아랫도리가 허둥대기 때문이리라.

 
   이같이 오르는 길이란 어려웁고나. 이같이 어려운 오름길을 얼마나 올랐는지. 내리고 오르고를 몇 번이나 거듭하여 또 다시 비같이 날리는 운무 속으로 들어가매, 여기가 반야봉두(般若峰頭) 직전의 고목(枯木) 임중(林中).

 
   여기저기 녹각고목(鹿角枯木)도 일경(一景) 아닌 바 아니언만은 반야봉 머리를 얼른 밟고 싶은 급한 마음에 수목을 뚫고 오르매 어허! 여기로구려. 반야봉 머리가 여기로구려. ‘1751m 반야봉상불묘지(般若峰上佛廟址)’ 라 쓴 표목 아래, 제단이던 무수한 돌무더기를 밟는 순간, 우리의 무상환희는 도리어 침묵으로 화한 것이다.

 
   ‘반야’라는 것은 범어 prajna의 음역자(音譯字)이니 반야(班若), 파야(波若), 발라야(鉢羅若) 등으로도 쓰는 ‘최상의 지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얻은 자는 곧 불타(佛陀)라, 반야는 제불(諸佛)의 스승, 제불의 어머니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리산 동서 주봉(主峰)에 대한 명칭을 생각해보매 여간 흥미있지 아니하다.

 
   동의 주봉을 천왕(天王)’이라 부르는 그 최고명칭에 대하여, 서의 주봉을 ‘반야’라 불러 거기 대립시킨 자취가 역연하다.

   천왕(天王)고교적(古敎的) 전통명칭에 대한 ‘반야’ 불교적 명명(命名)이 비록 서로 다르기는 하나, 그 실질에 있어서 최고존엄 앞에 경앙심을 드러냄에도 일치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상불묘(上佛廟)하불묘(下佛廟)니 하는 것도 필경 광명대왕(光明大王)을 숭배하던 제장(祭場)이던 것이요, 그것을 까닭없이 불(佛)과 묘(廟)의 연결 없는 한자를 함부로 가져다 음역해 놓은 것일 따름이다.

 
    여하간 여기가 이 산의 서주봉(西主峰)이라 숭신경불(崇神敬佛)을 겸행(兼行)하고 있는 영장(靈場)임은 의심할 것 없거니와, 이제 봉명(峰名)을 반야라 하는지라, 절대평등의 최고지혜(반야) 앞에 그 덕을 찬양 아니할 자 누가 있으랴.

 
   대반야경 십육회 육백권서가 여기 이 봉두(峰頭)의 경관 속에 차고도 오히려 빈 구석이 남은 것이다.

   서진 법호(法護)광찬반야바라밀도 여기에 있고, 요진 라습(羅什)마하반야바라밀도 여기에 있고, 월파수나승천왕반야, 보리유지실상반야도 다 여기에 있다.

 
   오온, 삼과, 십이인연, 사제의 법을 괴로이도 중얼거린 ‘반야심경’이 필경은 ‘제법개공(諸法皆空)’을 말함일진댄, 여기 이 산상의 일순간에 저하(底下)의 범부로도 능히 깨달을 수 있는 일이라, 그는 한낱 도로일권서(徒勞一券書)를 못 면한 것이 아니겠느냐.

   탁복독곡선신이 지금 내 오른편에 섰고, 희선신이 내 왼편에 섰고, 제일체장난선신이 내 앞에 섰고, 구호일체선신이 내 뒤에 섰고, 그 밖에 능인선신, 용맹심지선신들, 반야수호십육선신이 여기 이 주위를 옹호하여 이 시간 일체포외(一切怖畏)로부터 구증(救拯)된 자기의 안심경(安心境)을 무슨 말로 표현하여 족할 것인지.

 
   서로 왜 마주보고 말이 없는가. 입 있는 벙어리 되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우리 아닌 남이 보면은 웃을른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이언(離言)’경지를 맛보는 것이리라. 이 신비한 대자연의 묘망(渺茫)한 전개 앞에 과연 무엇이라 말할 것이며, 무엇이라 생각할 것인가. 우주의 본체인 진여(眞如)는 말로 표시할 수도 없으며, 마음에 사려할 수도 없으므로 이르되 ‘이언진여(離言眞如)’라 하는 것이다.

   다만 침묵하라. 이 높은 산상에서 저 깊은 물 속 같은 침묵을 지켜 반야봉의 진미를 맛보련다.

 
   이윽고 일행 중 애주(愛酒)의 벗이 곁으로 와 반야등척(般若登陟)의 축배를 들자 한다. 아무렴 들고말고. 이 술이 이르는 바 반야탕(般若湯)이라. 대환희의 한 방울을 맛보아야 하고말고.

   침묵의 제호[불교에서는 가장 숭고한 부처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 쓰임]미(醍醐味). 반야탕의 고감미(苦甘味). 원컨댄 내 기억에 오래 머물러 언제나 내 입술을 황홀에 잠겨 있어 진세(塵世)의 저열(低劣)한 미각을 모르게 할지어다.

 
대반야 이마 위에

입맞춘 내 입술이

거룩한 황홀 속에

언제나 잠겨 있어

다시고 다실 제마다

새맛나게 하여이다.

 



작성일 : 05-12-15 00:42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6. 피아골→연곡사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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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피아골-연곡사 

 


17. 夢境의 稷田谿谷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날아내리는 반야봉 위 운무의 장막 속에서, 일배(一杯)의 신선한 반야탕에 무외환희(無畏歡喜)로 취하여 내려가는 우리 걸음은 보보청고(步步淸高)하여, 밟히는 것이 땅인지조차 모를 만큼 온몸이 우모(羽毛)와 같이 가뿐함이 참으로 유쾌하다.

   뒷날에 다시 온다면 이 반야봉에서 저 운봉, 하동의 계선(界線)인 ‘배암샛재’로 칠보주산(七寶主山) 등을 밟아 마당재, 부자(父子)바위벽소령을 가로질러 세석, 천왕으로 오르는 지리산 주맥 답파를 한번 시험해보리는 심약(心約)을 남기고서, 이번은 ‘찬샘’ 터를 향하야 도로 내려가기로 한다.

 

   구름이 이따금 세우(細雨) 되어 뿌리는 속에 활개만 펼치면 춤으로 볼 뻔한 가벼운 걸음으로 잠깐 사이에 봉 아래를 내려와, ‘찬샘’을 얼마쯤 남겨두고 좌하(左下)하는 길이 우리가 갈 ‘피앗골’(稷田谿谷)이라 하기로, 이 갈림목에서 시장한 배를 잠깐 위로하기로 한다.

 

   노고봉 아래 산막에서 떠나올 때 가져왔던 인도(印度)식 주먹밥 한 덩이씩을 나누어 들고 십지저(十指箸)[열 손가락]로 탐스러이 먹은 뒤에, 호로병(胡蘆甁) 한 병 물이 조르륵 소리가 나도록 들이키고서 큰 일이나 치른 듯이 손을 털고 일어서는 꼴들이 우습다면 우습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가(禪家)의 ‘식부지포(食不至飽)’란 말은 다른 날의 이야기. 오늘은 북, 장고(長鼓)같이 배불리 먹고, 사슴같이 이 30리 장곡(長谷)을 뛰어내려 갈 야생아(野生兒)임을 어찌 하랴.

 

   내리기를 시작한다. 뛰어도 해가 모자를 장곡이다. 그러나 이 직전계곡의 동복(洞腹)을 뚫고 나가는 오늘 우리의 코스는 이번으로써 새 노정(路程)을 짓는 길이라, 전인(前人)에게서 들은 바 없는 모험노정(冒險路程)임을 즐거워 하여, 나는 연방 지도를 펴들고 보며 무한한 흥미로 내려가는 것이다.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건마는, 쉬운 길은 탐하고 싶지 아니하고, 조망은 저 최고봉상의 과목(課目)이라, 오늘 우리는 오히려 이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을 바닥으로, 바닥으로만 밟아내려, 지리산 복중별취(腹中別趣)를 맛보자는 것이다.

 

   풍우(風雨) 천년(千年)을 내로라 비웃으며, 저속한 너희들에게 신비가 무엇인지, 숭엄이 무엇인지를 알리려고 여기 이같이 섰노라 하는 말이 임간(林間)으로서 들려오는 듯하다. 가고 가도 밀림 그대로 특이한 질서가 있고, 특이한 안배가 있고, 특이한 조화가 있어, 현혹적(眩惑的) 광경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건숙(虔肅)한 기운을 돋우어 준다.

   더구나 임하(林下)에는 전면에 깔린 수촌(數寸) 두께의 창태(蒼苔)! 돌이란 돌마다 태의(苔衣)[이끼옷]를 입지 않은 것 없고, 한 줌의 직적토(稷赤土)도 여기서는 허락하지 아니하여 일촌(一寸)도 빈 구석 없이 부드럽고 포근한 태의의 청모전(靑毛氈)[푸른 비단]을 깔았다.

 

   그대로 이 속이 금전벽궐(金殿碧闕)! 세상에 하노라 해놓은 현란의 대장식인들 여기 이 계곡의 청모전(靑毛氈) 대임영(大林營)을 따를 것이냐.
   몸에 법의(法衣)를 두르고, 촛불을 들고, 조용조용히, 가만가만히, 눈을 뜬 듯이 감고 숨소리조차 쉬는 듯이 죽이며, 사뿐사뿐 혼자서 다만 혼자서 걸어갈 꿈 속 같은 길이다.

 

   저 완석(頑石)도 이제 영혼을 얻어 고요히 엎드려 묵도(黙禱)하고 말 많은 새들도 제 목소리를 잊어버렸는가. 동곡의 위압(威壓)이 어떤 것인 줄을 처음으로 맛보는 듯하다. 아니, 참으로 이같은 심후미(深厚美)는 다른 아무 데서도 맛본 적이 없다.

   행부행(行復行), 임우림(林又林), 번음(繁陰)[무성한 나무그늘] 속에서 번음 속으로, 끝없는 장곡의 길을 내려만 간다. 황홀한 밀림 중의 신성한 감명이 비같이 몸을 적시는 요지(瑤池)의 꿈길이다. 이것이 직전계곡 상부의 인상이다.

 

   피앗골 깊은 골이
   어찌어찌 되었더냐
   끝없이 늘어서고
   누비듯 내리는 길을
   청모전으로 깔았더라.
   엄숙한 대삼림이
   너무도 거룩하여
   법의(法衣) 두르고
   촛불 켜 손에 들고
   발걸음 조용조용히
   혼자 내려갈 길일러라.


 

18. 興趣의 稷田谿谷

 

   우리는 아직 직전계곡의 밀림 속을 끝없이 내려간다. 청모전 창태의 길이 아무리 미관이기로서니 십리를 이같이 내림에는, 사람의 눈이 단조로이 보기가 쉬울 것이라 어느덧에 예비하였다가 보랏빛 수국(水菊) 떨기를 군데군데 보이심은 졸리는 눈을 번쩍 하고 뜨게 하심이 아니냐.

   호록(嫭綠)이요, 심록(深綠)이요, 연록(軟綠)이 아니면 농록(濃綠)이어서 천지가 온통 녹색으로만 꾸며 있는 이 계곡 속에 흰 빛, 보라빛 저 수국 떨기는 너무나 아담하고 너무나 청초하여 도리어 얄밉도록 마음을 찌른다.

   색조(色調)로만 신선케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아니하다. 썩어 넘어진 거목이 저절로 타래도 틀고, 교가(橋架) [다리의 기둥 위에 가로질러 맞춘 나무]도 놓아 연방 기어나가고 타고 건넘이 순탄치 아니한 채로 사람을 데리고 희롱하는 곳에 이 계곡의 잔재미가 있다.

 

   가다가 산죽도 일경(一景)이요, 가다가 목련도 일경이나 두어 군데 전나무 껍질이 보기 흉하게도 벗겨진 것이 이상도 하여 물으니, 곰의 장난이라고 한다.
   먹을 것을 구하여 헤매던 곰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수체(樹體)에서 흐르는 감즙(甘汁)을 빨아 그 주린 창자를 채우던가. 저것들에게도 먹는 근심이 저러하구나. 아니, 먹는 근심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할 것이니, 이게 다 일체중생의 번뇌일른가.

 

   반수직(半垂直)이나 되나 보다. 땅 속으로 내리고, 바닷속으로까지 내리나보다. 오를 제는 차라리 내려가고 싶도록 어려울 터니, 내려갈 제는 도리어 올라가고 싶도록 어려웁다. 인생의 가는 길은 오르기도 어렵거니와 내리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도 또한 화택기생(火宅寄生)의 번뇌일른가.

   어디로선지 이 신성한 전당 속으로 새어들어온 진세(塵世)의 우수(憂愁). 등산임수(登山臨水)에 가는 곳마다 제가 지고 다니는 근심의 그물을 꺼내어 쓰고 속으로 눈물짓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곁에 가던 친구! 문득 걸음을 멈추고 저것을 보라 한다. 바라보매 창태 덮힌 바위 사이길 위에 집을 잃어버린 달팽이가 빈 몸뚱이를 굴려 남은 생을 죽지 못하여 꼬물거리고 있다.
   나는 처음 보는 이 가련한 정경(情景)에 발을 옮길 수가 없다.

 

   길 위에 저 달팽이
   집 없는 저 달팽이
   너도 나와 같이
   괴로운 역려(逆旅)로다
   오늘밤 어디서 자려느냐
   내일은 어디로 가려느냐.                                 

 

   “천지무가객(天地無家客), 건곤하처변(乾坤何處邊)”['천지에 집 없는 나그네, 세상 어느 곳으로 향하는가?]의 구(句)로써 남 모르는 나의 전기(傳記)를 삼더니, 구태어 이 산중 이 계곡 속에서 저 집 없는 달팽이를 만나 ●●하고야 마는구나.

   연청색 송락(松絡) 타래가 저 머리 위 높은 가지 끝에 서로 얼크러진 것도 쳐다보고, 문득 들리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던져 사서 들여온 번뇌 뭉치를 저기다 걸고 제가 묻혀온 우수의 때를 저기 씻고서 다시 가뜬한 몸으로 이 아름다운 계곡의 남은 길을 즐겨야겠다.

 

   시냇가에 내려갔다. 대번에 우화(羽化)라도 시킬 듯이 일진청풍(一陣淸風)이 골 안으로부터 불어 나온다. 곡풍(谷風)의 참맛을 또 여기 와서야 알았다.              
   후끈거리는 눈가를 청류에 씻고나매 팔백중안예(八百重眼翳)가 일시에 풀리는 듯 시원하고, 가슴을 열어제끼고서 량풍(凉風)에 식힘에 일평생 비적(痞積)[체한 증상]이 순간에 사라진 듯 편안하다.

 

   한번 시내를 만나서부터는 길이 애써 시내와 떨어지지 아니하려 하여 혹 잠깐 여의어도 물소리만은 귀에 끊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좌우를 건너고 되건너고, 옥류옥석(玉流玉石)을 벗하여 흥(興)치고 노래하며 가는 길이다. 이것이 직전계곡 하부의 인상이다.

 

   피앗골 긴긴 골이
   어찌어찌 되었더냐
   십리를 창태 밟고
   계복(溪腹)으로 나려서니
   물소리 골바람 따라
   우화할 듯 하더구나.

 

   백옥류(白玉流) 물소리 따라
   십리를 내릴 적에
   건너고 되건너고
   막대로 바위 치며
   흥겨워 노래하면서
   춤추며 내리는 길일러라.

 


19. 燕谷洞의 매미소리

 

   어디에선지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저 혼자 가을을 즐기나보다. 제비를 봄의 선구자라 한다면, 매미는 가을의 전창자(前唱者)다.
   높으나 높은 나무에 이슬을 받고 앉아, 세상은 어지러운데 저 혼자 태평곡을 부르는 매미 소리.

   이제 우리도 어지간히 내려왔나 보다. 매미 소리에 인가가 멀지 않음을 깨닫자 문득 보니 언덕 위에 산촌(山村) 두어 집. 여기가 직전계곡이 끝나는 직동(稷洞). 지도를 펴 보니 5백미터다. 어허, 우리가 저 반야봉에서 1천2백미터나 내려온 것이다.

 

   여기를 왜 ‘피앗골’이라 하였는지. 옛날엔 피 농사를 하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오늘은 이 화전민들이 피 대신 감자를 심고 담배를 심었다. 감자는 먹고, 담배는 팔고, 산중에서 살다가 산중에서 죽는 것이다.
   매미 소리는 끊이지 아니한다. 가련한 인생의 고난일생(苦難一生)을 비웃는 듯, 매미 소리는 끊이지 아니한다.

   여기서부터 10리 연곡동(燕谷洞). 동하(洞下)의 연곡사를 향하여 걸음을 재촉한다.

 

   석양 그늘이 동부(洞府)에 그득히 깔려 온다. 어쩐지 매미 소리조차 우리 걸음을 따라 급히 우는 듯한데, 나는 이 매미 소리와 같이 걸어 연곡동을 내려오며 수창(酬唱)[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음] 두어 수(首)를 구음(口吟)하야, 석양 산로의 즐거움을 도우련다.

 

   매미 급한 울음
   내 걸음을 맞춤인가
   허허 저 나그네
   당신이 뉘신지 내가 아오
   우리는 석양이 넘기로
   아까워서 그러하오.

  

   나그네 흥난 걸음
   내 노래 탓인가요
   허허 저 매미
   네가 뉜 줄을 내가 아냐
   오늘은 천산만수가
   내것이라 그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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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제(戱題) 두어 수를 읊는 동안에 석양은 재를 넘고 우리는 연곡사의 경내로 들어섰다.

   바른편으로는 계곡이 그대로 뚫려 내리고, 시냇가에 논을 이루어 놓은 사문(寺門) 앞에 다다르니 명성은 고찰이요, 당우(堂宇)는 신축이라 얼마쯤 낙심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여기 있는 새 건축을 통하여 역사의 참적(慘跡)을 헤아릴 수 있음에도 풍치 없는 새 당우도 비창(悲悵)한 생각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절의 초창(初刱)은 저 화엄사의 초창자인 연기의 손에서 되었다 전하고, 또 승려들 사이에 서로 전하되 특히 청허 서산대사의 낙발(落髮)이 이 절에서 된 듯하다 하여 그로써 이 절의 큰 자랑을 삼는다고 하지만, 서산이 십오세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숭인장로의 권유를 받고 영관선사의 가르침을 입어 출가하게 된 것은 사실이로되, 그가 “홀문사우제창외(忽聞社宇啼窓外), 만안춘산진고향(滿眼春山盡故鄕)”[소쩍새 소리 듣고 창밖을 보니, 봄빛 가득한 저 동산이 내 고향 같구나]의 구(句)를 음(吟)하고서 은도(銀刀)를 쥐고 자단청발(自斷靑髮)한 곳이 꼭 여기라고 할 증고(證考)는 없다.

 

   뿐만 아니라 <불조원류(佛祖源流)>“입지리산의숭인대사락발원통암(入智異山依崇仁大師落髮圓通庵), 즉시의신남록(卽是義信南麓)”이라 한 것이 있음을 보아, 서산대사를 연곡사에 관계하여 말함은 오히려 부당한 듯하다. 다만 그가 연곡동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있으매(淸虛集), 이 절에도 머물렀던 일은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에 대한 추모는 이 산중 다른 곳에 가서 말할 데가 있는만큼, 그를 연곡에서 내세울 것은 없다고 본다.

 

   나는 오히려 지금 여기 씌어진 이 연곡사의 신축된 당우 앞에서 누구보다도 삼십년 전 이 절에서 최후를 마치고, 또 절마저 그로 인하여 화마(火魔) 속에 들게 된 고광순(高光洵) 대장을 생각게 되는 것이다.
   광순(1848~1907)은 충렬공 제봉(霽峰)[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을 말함]의 후손으로, 전남 창평 유천에서 생을 얻은 조선 최근세사상(最近世史上)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 사람이다.

 

   전통적 수구사상 속에서 깨지 못하던 동방의 은사국(隱士國)도 갑오, 을미, 병신년간에 큰 갓 쓰고 도포 입은 채 나라를 위하여 발벗고 나서는 학자님네들을 내고야 말았다.
   그가 바로 그들 중의 일인으로서 남도에 비격(飛檄)하여 사중(士衆)을 모아 여러 곳에서 충돌하고 마침내 정미년 8월에 이 연곡사로 들어와 책원지(策源地)[전선의 작전부대에 대해 보급, 정비 등의 후방지원을 하는 병참기지]로 정하고 활약하려 하였음은, 여기가 지세만이 험준할 뿐 아니라 영호(嶺湖)의 인후(咽喉)가 되는 요새지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월 11일의 밤. 그는 이곳에서 비탄(飛彈) 아래 최후를 마치고 말았으며, 연곡사의 웅전거우(雄殿巨宇)도 그날 밤에 재 되고 말아 오늘은 촌가 같은 이러한 몰풍경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20. 燕谷寺의 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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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전경>

 

   집은 있으나 폐허로만 보이는 연곡사에 해가 저문다. 수십 년 된 당우(堂宇)야 볼 것이 없고, 60리 산길에 지친 다리는 피로하여도, 국보 많기로 이름난 연곡사라 그냥 머물 수가 있을까 보냐.
   막대를 세운 채 다시 끌고 절 앞, 절 뒤로 돌아다니며 탑과 부도를 순례하여 이 절의 옛 면목을 찾아 보리라.

   연곡사의 지정된 국보들은, 삼층석탑, 현각선사탑비, 서부도, 북부도, 동부도, 동부도비(東浮屠碑)이다. 이 여섯 국보를 일일이 순례하며 신라의 예술과 문화에 다시금 탄앙(嘆仰)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세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것이니, 각층 입석이 파손된 채로 그 경쾌한 묘취(妙趣)로 남의 발을 세우고, 그리고 대웅전 서쪽 밭 가운데의 현각비탑은 비신(碑身)을 잃어버려 이수(螭首)[건축물이나 공예품에서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새긴 형상. 비석 머리 등에 쓰임],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만 남았어도 운룡부조(雲龍浮彫)가 남의 눈을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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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연곡사 동부도>

 

   그리고 서부도, 북부도도 다 동부도에 형상 비슷하나 그 중에 특기할 자는 동부도라 하겠는데, 이 동부도는 방형(方形)의 지복석 위에 팔각이접(八角二接)의 기대를 놓고, 각 단에 운룡과 사자를 새겼으며, 그 위의 각 협간(狹間)에 동물 무늬를 조각한 팔각의 주형석(柱形石)을 놓은 다음, 이중앙련변(二重仰蓮辨)을 새긴 중대(中臺)를 얹었다.

   그리고 중대 위에는 구란형급조문(勾欄形及鳥文)을 새긴 또 일대(一臺)를 놓고, 팔각의 탑신을 안치하였는데, 개석(蓋石)은 팔각모형(八角模形)으로, 이마에는 사면에 날개 펼친 서조(瑞鳥)[봉황]를 각출(刻出)한 것과 연화무늬 조각한 돌을 몇 단이나 앉혔다.

  그 조각의 정묘함과 형태의 안정함이 실로 이런 종류의 부도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특작(特作)이라 하기에 주저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곁에 있는 비(碑)는 비신을 잃어 가고(可考)[참고할 만함]할 길이 없으나, 동부도의 사연을 적었던 비일 것이 분명하다. 여기 이 동부도를 이르되 ‘연기원탑(緣起願塔)’이라 불러오는 모양이매, 만일 이 비신을 얻어 읽을 수가 있다면 혹 연기에 관계된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었을 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이수귀부만 하여도, 귀부는 귀갑(龜甲)에 양익(兩翼)을 지고 등 위에 구름무늬 조각의 비좌(碑座)를 만든 것이라, 조선에 있어서 희유(稀有)의 형식임을 보는 점에서 어떻게나 주의(注意)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같이 경내를 산책하는 동안에 문득 보니 장명등(長明燈)에 불이 켜 있다.

 

   밤 들자 저녁 공양. 공양을 마치고 객실 한 모퉁이에 누웠으니, 몸은 비록 곤하여도 일행의 등하담소(燈下談笑)는 끊이지 아니한다.
   맞추어 밖에는 비가 내리고 경경(耿耿)한 등불 아래 한밤은 깊어간다. 우리가 좀더 늦게 가을철 들어 왔더런들 연곡동 알밤을 주워 가운데 놓고, 밤 까며 이 밤을 좀더 즐길 수 있으련만은…….

 

    화개연곡 큰애기들은
    알밤줍기로 다 나간다
    알밤 줍다가 뚝 떨어지며
    자갯돌 줍기가 일쑤라지

 

   이것은 지리산 특산민요 중의 일절(一節)이어니와, 이 산중에서도 저 화개동과 이 연곡동이 밤나무 많기로 이름 들린 곳임을 말함이다. 그러기에 황매천(黃梅泉)도 연곡사에 시를 남기되,

 

   寺古佛堂無煩惱  唯存一塔倚雲孤
   曉天星漢政搖落  空谷水風相激呼
   村近竹間通吠犬  齋林殿角集神鳥
   萬株洞栗誰栽得  樹樹靑黃景絶殊

 

라 하여 이곳의 밤나무 많음을 말하고, 수수청황(樹樹靑黃)의 추경(秋景)을 자랑하였던 것이다.

 

   이 밤이 비록 가을밤이 아니어서 알밤 벗기는 즐거움은 맛보지 못하여도, 창 밖에 내리는 고요한 빗소리에 목침을 세웠다, 뉘었다 하며, 두어 친구와 더불어 조용한 목소리로 도담세화(道談世話)를 주고 받느라 밤이 깊은 줄을 알지 못한다.




작성일 : 05-12-19 21:45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7. 칠불사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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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칠불사

21. 玉寶高의 雲上院
 
   연곡사 - 칠불암(6km)
   칠불암 - 쌍계사(10km)
   금일 행정 16km(40리)

    * * *

   연곡사에서 자고난 7월31일의 아침.
   밤새도록 내리던 세우(細雨)가 아침도 연(連)하여 곱게 뿌린다. 비는 내려도 갈 길은 가야겠다. 칠불암을 들러서 쌍계에까지 가야 한다.
   어젯길에 다리를 상한 사람들이 일행 중에 반이나 되므로 그들은 부득이 쌍계사로 직행하라 하고, 건각자만이 칠불암 들러가는 길을 취하기로 한다.
   나는 다리 상한 건각단원(健脚團員)이 되어 칠불암 경유대에 따라 나섰다. 절의 동으로 풀길을 헤치고서 논두렁길로 나와 당(堂)재[현 농평마을 당재]를 향하여 올라간다.

 

   땅 좋고 물이 좋아 산 속에, 산 위에 밭을 이루고 논을 푼 것이 지리산의 특색 중 한 가지일 것이니, 이중환<택리지>에도 “지역이 남해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따뜻하여 산 속에 대나무가 많고, 또 감나무와 밤나무도 매우 많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기장이나 조를 높은 산봉우리 위에 뿌려두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란다. 평지 밭에도 모두 심으므로, 산 속에선 촌 사람들이 중과 섞여 산다. 중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가 넉넉하다. 농부와 공장(工匠)도 역시 힘써 일하지 않아도 살림이 넉넉하다. 이리하여 온 산에 사는 백성들이 풍년인지 흉년인지 모르므로, 부산(富山)이라고 부른다.” 운운이라 하였다. 가랑비 내리는 산길을 오르며 오르며, 군데군데 이루어진 촌락을 비 속에 지나가는 맛도 여기 와서야 받을 수 있는 청복(淸福)인가 한다.

 

   떠난 지 한 시간 남짓하여 당치(堂峙)에 오르니, 이 당치는 구례와 하동의 군경(郡境)이자 또 그대로 전남과 경상의 계선(界線)이다.
   명일충청도(明日忠淸道), 금일경상도(今日慶尙道)라더니, 이야말로 우각전라도(右脚全羅道), 좌각경상도(左脚慶尙道)다.
   여기서 골짜기를 타고 동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논에는 벼가 살이 찌고, 밭에는 담배잎, 콩잎이 가는 비에  젖은 채로 바람에 나부낀다.

   수차(水車) 돌리는 목통리 앞을 지나, 죽림을 헤치고 다시 오르니, 대숲 속 평활한 자리에 어느 분의 것인지는 알 수 없스나 한 기(基)의 부도와 수 편의 와전(瓦塼)이 남아 있어 전날에 암자 있던 자리인 것을 알려준다.

   죽림을 벗어나 돌아드니, 여기가 바로 동국(東國)의 제일선원 칠불암이다.
   사람 하나 없는 듯이 조용도 하다. 선원(禪院)의 풍미(風味)가 온몸에 곁들여짐을 깨닫겠다.

   이 절에 와 역사적으로 처음 찾을 곳이 운상원(雲上院) 터라, 거기가 어디냐 물었더니 주승(主僧)이 앞을 나서며 따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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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보대 터 / 사진제공 : <태산>님>

 

   암자의 뒤편 작은 언덕 위에 조그만한 빈 터가 있어 옥보대(玉寶臺)라 하는데, 저 초의(草衣) 의순선사<동다송주> ‘옥부대(玉浮臺)’라 한 곳이 바로 여기요, 좀더 들어가 우거진 풀밭 속에 복분자 한창 익은 열매를 따먹노라니 주승이 빙긋 웃으며 바로 여기가 운상원 터라 한다. 무언지 분간 못할 우거진 풀밭이다.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에 의하여 이 운상원이 조선음악사상에 얼마나 중대한 장소임을 알 것이니, 신라의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란 이가 이 운상원에 들어와 거문고를 오십년이나 연구한 곳임을 생각하매, 지금 여기 이 풀밭 속에 선 것이 바로 거문고 줄 위에나 올라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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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칠불사 운상선원(雲上禪院)>

 

   옥보고자제신곡(自製新曲) 30곡이 이 터에서 나왔고, 제자 속명득에게 전하여 또 그 제자 귀금선생에게 전하였으나, 그가 이 산을 나가지 아니하므로 때에 진흥왕금도(琴道)가 끊어질 것을 걱정하여 이찬 윤흥을 시켜 그 음을 전득(傳得)케 하였더니, 윤흥이 남원공사(南原公事)가 되어와 안장, 청장 두 소년을 뽑아 데리고 아내와 같이 이곳을 찾아 귀금선생에게 예를 다하여 그 음곡을 배우게 하니, 표풍곡 등 3곡의 비전곡을 전하였고, 안장은 그 아들 극상, 극종에게 전하였는데, 극종이 또 일곱 곡을 지었으며, 그 후에는 학금자(學琴者)가 한, 둘에 그치지 않았다 하거니와, 평조(平調), 우조(羽調) 함께 1백87곡이 유전(流傳)되었다 하니, 당시 악계(樂界)의 정황을 짐작하기에 족하다.

 

   오늘은 비록 이 자리가 우거진 풀밭이로되, 여기가 조선음악의 노촉지(盧觸地)요, 또 화육지(化育地)이어서 그날의 운상원은 실로 음악의 전당이자 또 악사의 학원이었던 것은 물론이니, 예술 내지 문화발달사적으로 보더라도 이곳을 황무(荒蕪) 속에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제 문화의 원류에 대한 금인(今人)의 무성무심(無誠無心)함이 이같으매, 무엇으로 제 문화의 장래를 기약할 것인가. 다만 나그네 막대를 세우고서 운상원 빈 터에 서서 옛일을 생각하고 처창(悽悵)[몹시 슬프고 원망스러움]한 마음을 품을 뿐이다.

 

   옥보고 옛 성인이

   세상을 버리고서
   운상원 구름 속에
   오십년을 보내면서
   거문고 무릎에 안고
   무슨 한을 푸시던고.

   봄 아침 가을 저녁
   죽암(竹庵)에 홀로 앉아
   원앙(鴛鴦) 옛 사랑을
   눈물로 그리다가
   귀 밑의 흰머리 만지며
   먼 산 바라 보더신가
                     (註 : 春朝, 秋夕, 竹庵, 鴛鴦, 老人, 遠峰 등의 곡이 그의 新製 30곡 중에 있음)

 

   저 악성 삼십곡을
   아는 이 누구신가
   타시던 거문고는
   어느 뉘게 전하신고
   바람과 물소리만이
   유곡(幽谷)에서 들리더라
                     (註 : 그의 30곡명 중에 幽谷, 淸聲曲이 있음)


 

22.  駕洛 七王子 說話


   옥보고운상원 에 서서 그대로 다시 생각나는 것은 칠불암의 기원인 락국 칠왕자 설화이다.
   이 칠왕자 설화는 각 문헌이 서로 달리 전하여 혼란케 되어 있어 분변(分辨)하기가 심히 어려웁거니와 먼저 그 설화의 경개(梗槪)[간추린 대략의 줄거리]를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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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열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왕위를 이어갈 이요, 둘째, 셋째는 “내 성이 동토(東土)에 부전(不傳)함이 슬프다” 하고 말하는 왕후 허씨의 성을 따르게 하고, 넷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일곱 왕자는 진세(塵世)에 뜻을 끊고 왕후 동생 보옥선사를 따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수도하고, 3년 후에 의령의 수도산, 사천의 와룡사, 구룡사 등을 변행(遍行)하다가, 드디어 이곳으로 들어와 운상원을 결(結)하고 좌선한 지 2년, 가락국 태조 62년(신라 파사왕 24년, 서기 103) 팔월 십오일밤에 보옥선사의 주장(柱杖) 아래 칠왕자가 동시에 현지(玄旨)를 대철(大澈)하니, 제일금왕광불, 제이금왕당불, 제삼금왕상불, 제사금왕행불, 제오금왕향불, 제육금왕성불, 제칠왕공불이 되었으므로 칠불암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왕과 왕후가 그 일곱 아들이 그리워 찾아왔더니 일곱 아들이 부모께 전고(傳告)하되, “저희들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상면하는 것이 불합(不合)하니이다”하고, 다시 “그러나 산 밑에 못이 있어 우리 그림자는 들여다보실 수가 있습니다”하므로 부모가 그 못 속을 들여다보매, 과연 대면한 듯이 일곱 아들의 그림자들이 다 나타난다.

   그래서 그 못을 영지(影池)라 하였다는 것으로, 그 영지라는 곳이 지금 이 암자 앞에 있다.

 

   그런데 여기 대하여 각 문헌의 서로 다른 점을 비교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가락국 수로왕사적고에는 “…기여칠자(其餘七子), 별지절타건(別志絶墮蹇), 종보옥선(從寶玉仙), 입가야산(入伽倻山), 학도승선(學道乘仙)”이라 하여 보옥선사라 부르는 이를 보옥선이라 하였고, 그래서 일곱 왕자도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둘째, <진양지>에는 “칠불암일명진금륜(七佛庵一名眞金輪), 유옥부선인은차(有玉浮仙人隱此), 취옥적(吹玉笛), 신라왕심기성내금륜사야(新羅王尋其聲乃金輪寺也), 어시솔칠자(於是率七子), 여선동유(與仙同遊), 칠자성불(七子成佛), 자위범왕(自爲梵王), 고신흥(사명)상유범왕촌(故神興(寺名)上有梵王村), 기하유천비촌(其下有天妃村), 비즉왕비(妃則王妃)” 라 하여 신라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옥적 부는 옥부선인을 찾아온 것으로 적었다.

   그리고 셋째, 연담유일(蓮潭有一)[조선 후기의 승려. 1720~1799]칠불암 상량문에는 이를 신라 신문왕조의 일로 기록하고, 영지의 이야기도 그들의 일로 적었다.

   그리고 넷째, 김선신<두류전지>에는 “신문왕의 두 아들이 궁모 5인을 데리고 입차성도(入此成道)하였기로 칠불암이란 이름을 얻었다” 설도 있음을 수록하여 두었다.

   이같이 두서가 혼란하므로 어느 것이 정고(正稿)인지 알기에 힘들지 않은 바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 칠왕자 문제보다 ‘보옥’이란 이를 구명(究明)할 필요가 있거니와, 위에 말한 이 모든 문적을 대조하여 보면, <삼국사기> ‘옥보고’는 신라의 현금가(玄琴家)요, <수로왕사적고>의 ‘보옥선’은 허씨왕후의 동생이요, <진양지> ‘옥부선인’옥적 불던 신라인이요, <유일찬칠불암상량문>의 ‘옥부’는 신라 신문왕대의 옥적 대가니, 옥보고, 보옥선, 옥부선인, 보옥선사 등이 혹은 명자(名字)가 와도(訛倒)되고, 혹은 선사, 선인이 혼용되었을 따름이요(또 선사란 명칭은 후대 선교 발달 이후에 붙여진 이름일 것은 물론이나) 동일인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리고 옥적가로, 현금가로, 도가로, 불가로 나타나 있으나, 역시 이것도 일인이 그를 다 겸전(兼全)하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가락국 수로왕시대로, 신라 진흥왕 이전 미상년대(訥氏王代頃)로, 신라 신문왕대 등 시대의 차이가 생겨 있는 바, 이에 있어서 나는 옥보고를 신라인으로 보기보다는 가락국인으로 보는 바다.

 

   그러면 가락국 수로왕대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바, 지금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불교전래의 연대인 서기 372년보다 앞 서기 270년이라 이를 가신(可信)키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도 그 이전에 벌써 불교가 있었던 자취가 증고(證考)될 뿐 아니라, 가락국의 불교는 삼국의 어느 것을 통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별도로 전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이는 후일의 또다른 논제가 되려니와, 현금과 옥적에 능하고 선도와 불교를 양전(兩全)하던 ‘옥보명인과 그를 따라온 칠제자(즉 칠왕자)들은 다 가락국의 인물들이요, 또 설사 수로왕대까지는 못 올라간다 하더라도 이 지리산이 가락국 판도(判圖) 중에 있던 시대의 일로 보아 무방할 줄 안다.

 

   또 혹은 옥보(玉寶)도 저 가야금의 악성 우륵과 마찬가지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었던지도 모르려니와 그는 여하간, 당시 가야의 예술과 문화가 어떻게나 현란한 것이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고 본다.
   나는 대강 이만큼 생각하여 이 칠왕자 설화의 번란(煩亂)함을 정돈해두고 싶다.


 

23. 七佛庵의 亞字房
 
   운상원 빈터옥보대를 내려와 다시 우리는 칠불암의 대표적 명물이라 할 아자방(亞字房)을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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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방>

 

   이 아자방이란 것은 이름자 그대로 아자(亞字)형으로 온돌방을 만든 것인데, 철획(凸劃)의 부분은 좌선처(坐禪處)요, 요획(凹劃)의 부분은 행경(行徑)으로 되어 있다.
   즉 이중온돌이니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이 균온(均溫)하도록 되어 있고, 높은 부분의 사방 오처(奧處)[아랫목]에서 좌선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참으로 묘안이요, 특안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방은 화도(火道)가 막혀본 적이 없으므로 성인불사의(聖人不思議)의 유적인 소치(所致)라고까지 일컫는 것이어니와, 이 아자 선방(禪房)은 첫째 그 규모형식부터가 이양(異樣)으로 되어, 보는 자에게 무엇인지 이상한 감명을 주는 것이다.

 

   이 아자방은 전하기를, 신라 담공화상(曇空和尙)의 소조(所造)라 한다.
   칠불선원사적기를 따르면, “新羅祗摩王八年己未, 曇空禪師造此溫突”이라 하였는데, 이 ‘지마왕 8년 기미’라는 것은 서기 119년이니 불교전래 이전이라 가히 믿기 어려운 바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칠불암 전신운상원을 가락국인(駕洛國人) ‘옥보’의 정수탄금처(靜修彈琴處)라고 보느니만큼, 만일 담공화상이 그때 사람이라고 한다면 담공도 역시 신라인이 아니라 가락국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음도 아니다.

 

   그러나 담공이 어디 사람이냐고 하는 것을 밝히는 것보다, 그 시대에 조선에서 온돌이 있었겠느냐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조선의 온돌에 관하여는 구당서고려전(舊唐書高麗傳 : 고려는 고구려를 이름)의 “고(구)려인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불을 지펴 방을 데웠다.” [冬月皆作長坑, 下燃火以取煖]라 한 기록이 최고(最古)한 기록인 바, 이에 의하여 북방고구려에서는 온돌이 진작부터 있던 것임을 알겠으나, 여기 같은 남방지대에는 언제부터 온돌이 시작된 것인지를 가고(可考)할 길이 없다.

 

    조선의 문적으로는 고려 최자(崔滋) <보한집> 하권에 ‘돌(堗)’이란 것을 말한 것이 있고, 또 세종 때의 <구황촬요>에 ‘온돌(溫突)’이란 자면(字面)이 나오고, 명종조같은 책 역본에 ‘구들’이라 쓴 것이 있고, 김안로<용천담적기>‘유전(油, 즉 기름 먹인 장판)을 말한 것이 있음 등을 본다.
   이러한 문헌으로 보면 고려 중엽으로부터는 전국적으로 온돌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이 남방에도 진작부터 온돌이 있었던 증좌(證左)로는, <삼국유사> 2권 백제조에 돌石’이란 자구(字句)가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방에도 일찍부터 온돌제도가 있었던 자취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아자방 같은 것은 온돌 중에서도 특히 신발명적(新發明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온돌제도가 시작된 이후로도 오랜 시험과 발달과 연구를 경과한 후대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아자방담공선사의 소조(所造)인 것은 믿을 수 있다손치더라도, 담공이 신라인이라 함과 또 신라시대에서도 지마왕대(2세기초)의 사람이라 함은 믿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또한 <호봉집(琥峰集)>에 의하면 호봉의 ‘제아자방(題啞字房)’ 시가 있는 바,

 

   담공수예문우당(曇空手藝聞于唐)

   자래금관축아방(自來金官築啞房)
   교제기공규부득(巧制奇功窺不得)

   영인천만비상량(令人千萬費商量)

 

이라 하였으니, 담공지마왕시대라는 것은 가락국 태조년간이요, 지나(支那)로는 동한안제(東漢安帝)의 시대에 당(當)함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까지 담공의 특기가 들렸다” 한 것은 또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한대(漢代)를 일러 막연히 당(唐)이라 하였음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신라통일 이후(唐代)의 사람으로 말함인가. 역시 이를 다 구명할 길이 없다.

 

   다만 내가 보기는 이 아자방이 온돌 중에서도 유일무이한 제도요, 또 극히 발달된 과학적 산물이라 신라시대에서도 일통(一統)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못할 것인 듯하다.

   그리고 아자방의 ‘亞’를 ‘啞’라고도 씀은, 표면적으로는 ‘연돌구(煙突口)’의 일구(一口)를 가한 것이라고 하고, 내면적으로는 선(禪)의 무언면벽(無言面壁)을 나타낸 것이라 하여, 산중 승려 간에서는 아(啞)자로써 통용하고 있음을 보는 것도 궤변적(詭辯的)인 점에 오히려 일종의 재미까지를 느낄 수가 있다.

 

 

24. 大隱의 律宗 수립

 

   아자방이 그 모형(模型)으로써 유명해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자방은 여기서 출신(出身)한 여러 고덕(高德)으로 말미암아 이름이 드러난 것으로 봄이 더 옳을 것이다.

   이조 중종년간에 벽송선사의 제자로 추월조능선사라는 이는, 낮이면 이 선실에서 ●足而參하고, 밤이면 큰 돌을 지고 20리 쌍계사로 내려가 육조탑에 예첨(禮瞻)하여 제수마참선(除睡魔參禪)을 하던 이니, 그 무서운 정성 앞에 어느 뉘가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것이랴. 지금 암(庵)의 문전에 그의 부석(負石)이라 부르는 돌이 유물로 남아 있거니와 수도(修道)에 있어서나 다른 일에 있어서나 정성이 이만한 곳에 이를진댄, 각자의 소기(所企)가 헛된 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저 스님 누구신고
   어인 정성 저러한고
   돌 지고 예배(禮拜)하여
   크신 도를 이룬다네
   우리도 무거운 돌을 지고
   제 소원을 이루리라.

 

   이밖에 인허(印虛), 무가(無價) 같은 이도 이 선방의 출신이요, 특이한 자연석 부도(浮屠)의 주인인 월송당도 다 대덕 아님이 아니로되, 이 칠불암 아자방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하지 않으면 안될 대인물은 누구보다도 대은선사(大隱禪師)라 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조선의 율종(律宗)이 그 명맥을 다시 잇고 서릿발 같은 계율로 불교 전반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한 그 계행장(戒行場)이 바로 여기 이 선방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계라는 것은 삼학(三學) 중에서도 수위를 점령하는 것이어서, 제가 어떤 종파에 속하든지 참선을 하거나, 간경(看經)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공통적으로 봉지(奉持)하는 것이 계인 것은 물론이다.

   백제의 겸익법사를 위시하여 일본에까지 건너가 계법을 전한 혜총법사 등이 백제의 율종을 설명하는 이들이요, 신라에 있어서는 진평왕대의 지명을 필두로 원효율부(律部)저서를 가졌거니와 승장, 의적, 태현, 원승, 도성, 경흥 등 모든 법사가 다 높은 저술(著述)을 가졌다.

 

   그러나 신라 내지 조선불교사상에 나타난 율종의 이대지표(二大指標)는 자장율사진표율사라 할 것이니, 자장의 계맥(系脈)<해동불조원류>에 의하여 승실, 조일곡성 등 10여명에게 전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진표의 파류(派流)<삼국유사>에 의하여 영심, 신방, 체진 등 아홉 제자에게 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영취산지통이 이름 높은 율사이어서 그 스승 낭지선사가 오히려 정례(頂禮)한 이며, 고려에는 대각국사 같은 이가 계를 강의하였고, 이조에 있어서도 암사 백파 문하 패엽사 하은 문하용연사 만하 문하청화산 석교 문하 등이 다 이름난 율종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이들을 제켜두고 자립한 조선적 율종을 수립한 이가 곧 이 아자방대은선사인 것이니, 그는 일찍이 월출산에서 출가하여 모든 대덕을 변참(遍參)한 후 드디어 교(敎)를 버리고 선(禪)을 배우려 하여 순조 28년(1828)에 스승 김담과 함께 이 선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함께 하안거를 마치고서 서로 먼저 기도의 서응(瑞應)[하늘을 감응시켜 나타난 복스러운 조짐]이 있는 이가 계사(戒師) 되기를 약속하더니, 7일만에 한 줄기 상서로운 빛이 대은의 정수리 위에 와닿으므로 어제까지 사전(師傳)[스승으로부터의 전수]이던 김담이 오늘은 도리어 제자이던 대은에게 계를 받은 것이다.

 

   장하지 아니하냐. 저 사제의 아울러 거룩함이여.
  

   대은의 자립한 계법이 그 스승 김담에게 전하고, 초의를 거쳐 범해에게 전하고, 그 이후로 제산, 호은, 금해, 만암 등에게도 전하여진 것이다.
   더구나 그리 멀지 아니한 순조년간에 이같은 법고행정(法高行淨)의 대덕이 나타났다는 것이 어떻게나 말세총림(末世叢林)을 놀라게 하는 대사실이 아닐까보냐.

   그가 능히 저 자장, 진표, 지통 등의 대도(大道)를 이어 밟아 조선불교사에 큰 탑을 쌓았던 것이니 쇠미(衰微)와 민멸(泯滅)이 보는 바와 같은 오늘에 있어서는 더 한층 그의 자취를 고평(高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구나 고대의 율사들은 입당수법(入唐修法)[당나라에 가서 佛法을 배움]하였던 것이로되, 이 대은선사야말로 스스로 계법을 받았으니, 가장 엄극(嚴極)한 의미에서 조선율사의 참된 초조(初祖)라 할 것이요, 조선율종(朝鮮律宗)의 참된 수립(樹立)이라 할 것이니 이 점에 그의 위대함이 있고, 이 선원의 자랑이 있는 것이다.

 

   禁制의 큰 힘으로
   衆善奉行 하오시니
   거룩한 머리 위에
   祥光이 내리시다
   東方에 밝으신 빛을
   님이 다시 펴시니라.

 

 

25. 竹露茶의 본원지

 

   아자선방에 잠깐 앉아 제제고덕(濟濟古德)[많고 많은 옛날의 대덕스님들]을 헤아리며 다리를 쉬노라니 주승(主僧)이 문득 다구(茶具)를 들고와 끽다(喫茶)를 권하기로, 나는 시중의 쓴 차에도 맛을 붙인 다당(茶黨)이라 놀란 듯 받아드니 향기가 먼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유명한 지리산의 죽로차요, 겸하여 조주(趙州)권다(勸茶) [당나라 조주화상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다 “차 한 잔 들게!”하고 권했다는 禪家의 얘기]라 일끽(一喫)을 어찌 사양하랴.

 

   신라사에 적힌 바대로 흥덕왕 3년(828)에 입당사(入唐使) 김대렴이 당으로부터 차 씨앗을 수입하여,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어 번식시킨 것이 조선다사(朝鮮茶史)의 첫 페이지라, 우리는 소위 기분상으로 이 산에 와 이 산 소산(所産)의 죽로차를 마신다는 것이 어떻게나 유쾌한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산에서도 칠불암에서, 칠불암에서도 선방에서 일끽하는 맛이란 어느 곳에서 어떠한 고가차를 마심보다 더 귀하고 맛있는 것임을 나로서는 깨닫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의의순<동다송주>“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에 걸쳐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더 넓은 차밭은 없다. 화개동에 옥부대가 있고, 그 아래 칠불선원이 있다. 그곳 중들은 차나무의 늙은 잎을 때늦게 따서…” [智異山花開洞, 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土茶田地廣, 料無過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坐禪者常晩取老葉]라 하였으니, 이 산중에서도 이 근처가 제일다산(第一多産)이요, 이 선원이 바로 끽다도(喫茶道)최고령장(最高靈場)이요, 또 본원지라 할 것이다.

 

   육안(陸安) [중국의 지명]의 차는 맛으로 승(勝)하고, 몽산(蒙山) [중국의 지명]의 차는 약(藥)으로 승하다 하지마는, 동다(東茶)는 이들을 겸하였다 함이 초의의 다평(茶評)이어니와, 그의 <봉화산천도인시(奉和山泉道人詩)> 중에 말한

 

알가진체궁묘원(閼伽眞體窮妙源)
묘원무착바라밀(妙源無着波羅蜜)

 

이라 한 그대로 알가(argha, 茶의 범어) [부처나 보살에게 공양하는 물] 일완(一椀)으로써 무소집착의 지경을 잠깐이나마 맛보자 하며 다완을 들고 장조(長調) 한 수를 읊는다.

 

   맑은 밤 이슬 아래
   竹露茶葉 따와 두고
   바윗길 돌아올라
   玉泉水 떠오더니
   老僧의 三昧手로
   돌솥 열고 넣을 적에
   처마끝 風磬 소리
   솥 속으로 떨어졌네

  

   靑솔불로 끓여내여
   茶●에 부어 들고
   걸음도 조용할사
   禪室로 드시더니
   하늘빛 靑磁椀에
   따르나니 瑪瑠水라
   길 가는 먼 나그네
   마시라 권하시네

 

   감돌고 입 안으로 외이노니
   七佛禪院竹露茶 波羅蜜.

 

   일완(一椀) 신차(新茶)로 세미(世味)[세상의 맛]를 다시 씻고, 점심이 될 동안을 틈타서 나는 다시 암자의 서쪽 산기슭에 있는 칠불암 유연제덕(有緣諸德) 중에서도 사상(史上)의 인물이라 할 부휴선수당부도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열반한 저 서산휴정선사의 법제(法弟) 되는 분으로, 나는 일찍이 백곡처능홍각등계[광해군이 부휴에게 내린 시호] 비명(弘覺登階碑銘)을 읽어, 부휴선수의 일생을 알고, 고제(高弟) 각성이 편집한 <부휴당집>을 뒤져 그의 사상과 감회를 들을 때에, 실로 마음에 그리운 바 많았었더니 이제 이 칠불암에 와 초수(草藪) 사이에서 그의 부도를 만남에 한층 더 심각한 인상을 받는 것이다.

 

   그는 광해년간의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이 산으로 들어와 신명(信明)에게서 연식(蓮飾)하고, 부용영관을 찾아 법을 배우고, 상국(相國)[정승의 벼슬] 노수신장서를 차람(借覽)[당시의 재상이던 노수진에게서 7년간이나 책을 빌려 읽었다 함]하여 경서에도 통한 것이었다.

   혹은 덕유산에서 임난(壬亂)의 병과(兵戈)를 치르고, 혹은 지리산에서 광승(狂僧)의 무소(誣訴)를 입어 옥에 갇히고, 때로는 가야산을 배회하며, 때로는 조계산을 소요하고, 마침내 이 칠불암에 와서 머물다가 73의 보년(報年)을 여기 남기고 초원으로 돌아가기까지 그는 다만 흉차청백(胸次淸白), 식기망심(息機忘心)으로 지냈던 것이니 여기에 시를 남기되,

 

   浮休一老翁 活計淸無物
   日暮弄松風 夜深●山月
   機息絶營謀 心灰無所別
   避世入深居 何人寄問說
   吾法有自來 一言具殺活

 

이라 하였다.(부휴당집)

 

   홀로 심산에 앉아 만사를 가벼이 하고 한 사발 신차와 한 권의 경으로써 무사한적(無事閑寂)을 맛보던 이다.
   춘화추국(春花秋菊)을 대하여 고학한원(孤鶴閑猿)을 불러 ●中事를 연담(演談)하려던 심경을 더듬어보고, 일신다병(一身多病)으로 상(床) 위에 누워 연년불사(延年不死)를 근심하던 일들을 생각하면, 혹 생사에 우유(優遊)하지 못하였음을 흠(欠)할는지는 모르나, 그의 고상한 고민은 심회(心會)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서산선사도 부휴자(浮休子)를 노래하되

 

   臨行情脈脈, 桂子落紛紛   떠날 때 말없이 서로 보나니, 계수열매 어지러이 지고 있네
   拂袖忽歸去, 萬山空白雲   소매를 날리며 문득 돌아가니, 온산엔 속절없이 흰구름만 이네.

 

이라 하였거니와, 과연 그 위인의 청고(淸高)함을 이로써도 알 것이다.

 

   산창(山窓) 아래에 취심정좌(取心靜坐)하여 도의 어디 있음을 생각하다, 구원(求遠)할 것도 아니요, 구천(求天)할 것도 아니요, 오직 내게 있음을 갈파한 이라, 고선(古禪)의 신보행(信步行)을 느꺼이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풀 속에 묻힌 길이
   어드러로 뚫렸는고
   謎頭 狂客이
   길 찾기 어려워라
   헤매어 이 산속이리니
   발 따라만 가오리라.



   

자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