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쌍계사에서
28. 六祖頂相塔 是非
화개동수(花開洞水)를 내려오다가 지금 한창 교축역사(橋築役事) 중에 있는 곁으로 목교를 건너 왼편 송림 속으로 접어드니 사문 좌우에 기괴한 장승 2기를 만나는데, 이것이 유명한 ‘쌍계사장승’이란 것이다.
고운(孤雲) 제각(題刻)의 ‘쌍계석문(雙溪石門)’ 안으로 몸을 넣어 양장(羊腸)으로 돌아 들어가는 폼이 과연 고찰명찰(古刹名刹)의 체모에 어울림 같아서 기대 위에 또 한 번 더 기대하게 함이 있다.
과연 사문 안으로 들어서니 ●●의 팔영루도 굉걸(宏傑)하고 ●比한 전우(殿宇)가 안배(按排)도 좋으려니와 고색도 창연하여 진실로 범궁(梵宮)[절간]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년주지 환화상(煥和尙)의 영접으로 잠깐 ●●한 뒤에 우리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을 ●●하기로 하여 금당전으로 올라갔다. 육조혜능대사의 정상[머리뼈]이 동래(東來)한 데 대한 시비는 차치하고, 먼저 <전등록>, 사기(寺記) 등에 의하여 육조정상동래의 유래를 말하기로 하자.
신라 문무왕 16년 병자(676)에 의상선사의 문하에서 수구(受具)한 삼법화상이란 이가 있었다.
총혜(聰慧)가 있고 경률(經律)을 능해(能解)하더니 일찍 중국의 육조혜능대사의 도망(道望)을 듣고 참문(參聞)코자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던 바, 성덕왕 12년(713)에 육조가 입적하였다는 말을 듣고 심히 통한하던 것이었다.
그 후 6년이 또 지나 금마국 미륵사 승려 규정이란 이가 당으로부터 돌아오자 그가 가져온 <법보단경>을 읽으매, 거기 “내가 멸한 후 5, 6년이 지나면 내 머리를 가져갈 이가 있으리라”한 육조의 말이 적혀 있었다.
삼법이 그윽히 생각하되, 내가 나서서 그 머리를 모셔와 동방만대의 복전(福田)을 삼으리라 하고, 김유신 부인 법정니(성덕왕 11년에 낙발하여 비구니가 되고, 호를 法淨尼라 함)에게 가서 2만금을 꾸어 상선에 싣고 당으로 들어갔다.
홍주 개원사에 가 머물더니, 때에 본국(本國) 백율사 승려 대비선백이 거기 있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의론하고 그 절에 기류(寄留)하는 장정만이란 사람에게 그 돈을 주어 육조의 정상을 취해오게 하니, 성덕왕 22년(723)이었다.
사승(寺僧)이 사(師)의 정골(頂骨)이 상하였음을 알고 주현(州縣)에 소(訴)하였더니, 때의 현령 양간, 자사 유무첨이 엄탐(嚴探)하여 5일만에 석각촌에서 포득(捕得)하였다.
죄인을 소주로 보내어 국문하니 성명은 장정만이요, 여주 양현 사람인데, 홍주 개원사에서 신라승 김대비로부터 2만금을 받고 육조정상을 취하여 가져가는 것임을 말하고, 또 해동으로 모셔가 공양하리라는 말을 전하였더니, 유수가 듣고 몸소 조계(曹溪)에 이르러 사(師)의 상족(上足)[맏제자] 영도(令韜)에게 처단할 방법을 물으니, 도(韜)의 말이, 만약 국법으로 논하면 마땅히 주(誅)함이 옳겠으나 불교의 자비함으로써 말하면 원친(寃親)이 평등인 데다 더구나 그들이 모셔가 공양코자 함이라 하니 가서(可恕)할 바이라 하므로, 유수도 찬탄하였다.
그리하여 육조의 정상을 모셔다가 처음에 법정니의 영묘사에 봉안하고 공양하더니, 후에 한 승려가 현몽하여 시 한 수로 고하되,
吾歸此國土 佛國有因緣
康州智山下 葛花雪裡天
人境同如幻 山水妙如蓮
我法本無心 幽宅卜萬年
이라 한다.
삼법이 이에 김대비와 함께 이곳 지리산을 찾아오니, 때는 12월인데 갈화(葛花)[칡꽃]가 난개(爛開)하였으므로, 돌을 파 함(函)을 만들어 깊이 봉안하고 깨끗한 난야(蘭若) [승려들이 있는 고요한 곳, 즉 절을 가리킴] 1좌(座)를 세우고 선정을 전수(專修)하다가 18년 후 효성왕 38년 기묘(739) 7월 12일에 목욕하고, 단경(壇經)을 좌송(坐誦)하면서 장서(長逝)하니 문인 인혜, 의정 등이 삼법의 전신을 받들어 운암사에 귀장(歸葬)하였다.
이것이 삼법의 전기인 동시에 육조정상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경로라는 것이다.
후에 진감국사가 이곳에 와 육조의 영당을 세운 일이 있고, 근세의 금석대가 추사 김정희도 여기 와 육조상탑에 일련의 액(額)을 썼으되 “세계일화(世界一花), 조종육엽(祖宗六葉)” (현존)이라 한 이후로 산승(山僧) 세인(世人)이 모두 다 탑 안에 육조의 정상이 들어 있는 것으로만 확신케 되었다.
그러나 낭공영(郎公瑛) 7조(條) ●稿에는 육조 육신이 황소의 난에 상하였을 따름임을 말하였고, 또 감산덕청선사[중국 명나라의 학승]의 ●●通志에는 “진신위수탑보호(眞身爲守塔保護) 일무소손(一無所損)”이라 하였다.
또 10여년 전에 ●夫씨의 필록(筆錄)에 의하여 육조의 목내이(木乃伊:미라)가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설까지 읽은 기억이 있거니와, 이 목내이설은 그것대로 못 미더운 이야기여니와, 정상 동래의 전설도 또 그것대로 믿지 못할 이야기가 아닐는가.
그러므로 최치원의 진감비문 중에도, 육조정상 동래의 말은 명기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진감의 육조영당을 짓고 추사가 서액(書額)하여 이래 정상탑 운운으로 전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공화(空花)에 결실(結實)함이 이러한 것이어니와, 이 정상탑이야말로 천고의 의안(疑案)이 된 것이다.
그는 그러하려니와 나는 이제 바꾸어 생각건대 이 천고의 의안을 가지고 정상이 이 탑 속에 들었느니 안 들었느니를 시비할 것이 없다고 본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여기 분명히 그의 정상이 들어 있다 하여도 웃고 지나는 이 마음에는 정상이 여기 없는 것이요, 여기 분명히 그의 정상이 들어 있지 않건만은 믿고 절하는 이 마음에는 정상이 여기 봉안된 것일지니 이제 시비를 멈출 것이다. 자기마다 믿을 자(者) 믿을 것이요, 안 믿을 자 안 믿을 것뿐일 줄 안다.
다만 그것이 공화(空花)라 하자 공화대로 이상도 하여 여기 봄바람이 불 적마다 피어나고 그 가지 끝에 열매가 맺혀온 것만이 사실임을 생각할 따름이다.
29. 眞鑑의 梵唄 전설
육조의 정상탑은 천고의 의안이어니와 실로 이 쌍계사는 저 신라의 말엽에 처(處)하여 조도(祖道)를 선양한 진감국사의 ●基한 바니, 당시의 문호 최치원이 찬한 진감비(眞鑑碑)가 지금, 당시의 정중(庭中)에 섰다.
귀부, 비신, 이수가 구비한데, 이수는 쌍룡이 반권(蟠卷)하여 연좌(蓮座) 위의 보주를 이었고, 귀부는 방형(方形)의 지복 속에 놓였는데, 귀갑 위에는 장방(長方)의 비좌를 설하여 비석을 받치고 있다.
비신은 흑색의 석재를 썼는데, 비의 총높이는 3m 63cm의 대비(大碑)로서, 혜소(慧昭)[진감의 법호] 일대(一代)의 사적(事蹟)을 새기었다.
이 비명에 따르면, 혜소는 속성 최씨로 금마(金馬:지금의 익산) 사람이니, 신라 혜공왕 50년(774)에 나서, 31세에 입당사(入唐使)의 뱃사공으로 창주에 이르러 신감선사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형모(形貌)가 암연(?然)하므로 뭇사람이 일러 흑두타라 하더니, 37세에 숭산 소림사에서 동향의 승 도의(道義)를 만나 같이 사방을 참심(參尋)하다가, 도의는 먼저 본국으로 돌아오고, 혜소는 종남산으로 들어가 지관에 머문 지 3년. 후에 나와 짚신을 삼아 여인(旅人)에게 보시한 지 또 3년. 57세에야 본국에 돌아왔다.
흥덕왕이 그를 영로(迎勞)하여 먼저 돌아온 도의와 함께 ‘2보살’이라 부르더니, 처음에 석(錫)을 상주 설악 장백사에 걸매 내학(來學)이 사방으로부터 운집하였고, 이어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 화개곡을 찾아 삼법화상의 유기(遺基)에 당우를 세우고 여기 머무니, 민애왕이 혜소(慧照)라 사호(賜號)하였다.(昭는 聖王의 諱라 이를 피하여 照자로 바꿈)
승적을 대황룡사에 올리고 징(徵)하여 입경(入京)케 하였으나 악립(岳立)하여 뜻을 옮기지 아니하고, 유서(幽棲) 수년에 청익(淸益)의 중(衆)이 도마(稻麻) 같아, 드디어 기승(奇勝)의 땅을 역전(歷詮)하여 이 산 남령(南嶺) 기슭에 선찰(禪刹)을 창(創)하고, 육조의 영당을 세우니 사(師)는 육조의 현손(玄孫)이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에 절을 세우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으며, 문성왕 12년(850)에 “만법이 다 공하니 내가 가려 한다. 일심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노력하라. 탑을 만들어 형상을 보존하지 말고 비명으로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는 말로 문인들에게 언탁(言託)하고 마침내 비(?)하니, 보령(報齡)이 77세.
뒤에 헌강왕이 추익(追謚)하여 진감선사라 하고, 탑명은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며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명을 찬술케 하였다. 그리고 옥천사를 개칭하여 쌍계사라고 사액(賜額)하니, 이것이 사명의 시초였다.
당(唐) 조계육조(曹溪六祖)로부터 남악회양에게로, 다시 강서마조에게로, 또다시 창주신감에게로 전법하여 남악혜소 진감국사에게 이르렀으매, 전대(前代) 법계의 훌륭함이 이와 같고, 그로부터 법량과 지증국사에게로, 다시 백엄양부에게로, 또다시 정진대사에게로 유전되었으니 후대(後代) 법계의 자랑스러움이 이같은 것이다.
명인의 뒤가 적막치 아니하고, 대덕의 뒤가 소조(蕭條)하지 아니하여 오늘껏 조계의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함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흔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중에, 주지 환화상이 팔상전 ●寮 일실(一室)에 범해라는 노사(老師)가 있어 범패에 최능(最能)함을 말하기로, 나는 너무나 반가워 그를 만나 고조(古調) 일창(一唱)을 청하여 진감이 끼친 음성을 들으려 하였다.
최치원의 진감비문 중에, “선사는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이나 옥처럼 아름다웠다. 곡조와 소리는 치우치듯 날듯 경쾌하면서도 애잔하여 천인들이 듣고 기뻐할 만하였다. 소리가 먼 데까지 전해져서 절이 배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나, 싫은 내색 없이 이들을 가르쳤다. 지금 중국 어산의 아름다운 범패를 배우려는 자들이 앞다투어 콧소리를 흉내내어 옥천사에 전해져 온 소리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이 어찌 소리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한 것을 보면, 진감이 어패(魚唄)의 선창자(善唱者)이었던 것을 알려니와, 실로 동국(東國)의 어패도 지리산으로부터 남상(濫觴)이요, 지리산 중에서도 이곳 옥천사(쌍계사)의 진감으로부터 시원(始源)이었으니, 이제 이곳에 범해노사가 있어 범성(梵聲)의 뒤를 이음이 조금도 기이할 것 없는 일이다.
노사에게 청하여 몇 곡을 듣자하매, 늙은 몸인 채로 올리고 내리는 마디마디가 맑고도 그윽하여 실로 영성비구(鈴聲比丘), 묘성존자(妙聲尊者)의 칭(稱)을 들음직하다.
패익(唄匿)은 곧 찬탄이라, 그 소리는 반드시 심상음곡(尋常音曲)이 아니요, 그 속에 깔려 있고 차여 있는 위대한 신앙의 힘과 향기와 거룩함과 어여쁨이 게송의 무한한 뜻과 아울러 사람의 마음을 느끼어 말지 못하게 한다.
과거세(過去世)에 불탑(佛塔)에다 금령(金鈴)을 공양하여 저러한 묘음을 얻은 것인가. 법당 안에 합장하고 서서 명목찬송(瞑目讚頌)하는 노사의 범패성(梵唄聲)은 황혼의 산사에 그윽히 울리고 있었다.
쌍계의 옥을 굴리는 물소리가 저 옥보고의 거문고와 진감국사의 범패로 하여금 그같이 유명하게 한 것이요, 또 그 전설이 오늘까지 전함이라.
하좋은 쌍계옥류(雙溪玉流) 흘러 어디로 가옵던가
옥보선(玉寶仙) 거문고로 한 갈래 옮기옵고
진감사(眞鑑師) 어패소리로 또 한 갈래 드옵더라.
거문고 고운 곡조 야외(野外)로 흘러가고
어산패(魚山唄) 슬픈 소리 어디로 보내든가
진세(塵世)로 나가기 싫어 산 속에만 감돌더라.
30. 孤雲과 쌍계석문
쌍계사의 주인은 실로 진감국사라 하겠지만은, 그와 아울러 최치원이 없었더라면 쌍계사가 이같지 못할는지도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고운의 쌍계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서 진감이 있고 뒤에 고운이 있어 실로 쌍계의 쌍절(雙絶)이라 하려니와, 그야말로 금상의 첨화요, 산휘이천미(山輝而川嵋)라, 청허선사도 일찍이 '쌍계사중창기'에 이 두 분의 병존을 감격하여,
“고운은 유생이요 진감은 스님이다. 진감이 절을 세워 비로소 사람과 하늘의 눈을 뜨게 하였고, 고운이 비(碑)를 세워 유교와 불교의 핵심을 널리 드러내었다. 아, 이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줄 없는 거문고이다. 그 곡은 봄바람에 제비가 그 가락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고 푸른 버들에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 같아서 하나가 날줄이라면 또 하나는 씨줄이요, 하나가 거죽이라면 또 하나는 속이 되어 서로 도운 것이다.”라 하였다.
고운이 일찍 12세에 입당(入唐)하여 그 발군의 대재(大才)를 중토에 휘날리고, 청년에 벌써 명문천하(名聞天下)하여, 26세에 귀녕(歸寧)의 뜻을 품고 헌강왕 11년(885)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헌강왕이 시독겸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서서감지사(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瑞書監知事)를 삼았으나 그 뜻을 행하기 어려웠고, 나악 대산군(大山郡:지금 전북 태인) 태수가 된 일도 있었으나 서당(西唐)과 동고국(東故國)으로 오나가나 난세에 처하여 오히려 그 일신변(一身邊)이 허물입기가 쉬우므로 스스로 불우(不遇)를 상(傷)하고, 다시 근사(近仕)의 뜻이 없어 산림 속에 소요하고, 강호(江湖)가에 자방(自放)하여, 혹은 서사(書史)를 침적(枕籍)하고 혹은 풍월을 소영(嘯詠)하니 저 경주 남산과 강주 빙산이 다 그의 책장지(策杖地)요, 협주 청량사와 합포 월영대가 다 그의 유화처(遊化處)이었다.
만년에는 가야산에서 서지(棲遲)[은둔을 말함] 언앙(偃仰)[편안하게 한가로이 쉼]하다가 종로(終老)한 것이로되, 그의 일생 중 중대한 유적지로 하여 기억할 만한 곳은 여기 이 쌍계사를 중심으로 한 일대다.
세기의 말에 처하여 수읍(愁?)의 일생을 보낸 불우의 문호가 이곳에 은복(隱伏)하여 봄날의 새벽에 “파내동류수불회(叵耐東流水不回) 지최시경뇌인래(只催詩景惱人來)” [어찌할거나 세월은 동으로 흐르는 물 돌아오지 못하거니 애꿎게 시경을 재촉하여 사람을 괴롭히느니]를 탄식하고, 가을비 오는 밤에 “추풍유고음(秋風唯苦吟) 거세소지음(擧世少知音)” [가을바람에 처량한 이 읊조림만 / 온 세상에 지음(知音) 적네]이라 통상(痛傷)하던 것임을 헤아리면, 즈윽이 시대가 재현(再現)한지라 인물의 복견(復見)도 있음직하지 않은 바 아니어니와, 그럴수록 그의 유적이 그립고도 눈물겨웁다.
지리산의 한 노승이 산중석굴 속에서 이서(異書) 몇 질(帙)을 얻어보매 그 중에 최치원의 친필 시고(詩稿) 한 첩(帖)이 있어, 16수일러니 그 반이나 없어진 것을 말하고, 구례 졸(?) 민대윤이 그 여고(餘稿)를 얻어 이지봉에게 보내었으므로, 지봉이 그것을 받아 최치원의 진적(眞蹟)임을 알고 귀중히 여겨 그의 저서 <지봉유설> 13권에 그 시고를 수록한 것이다.
동국화개동(東國花開洞) 동쪽이라 이 나라에 화개동이 예 있으니
호중별유천(壺中別有天) 술항아린 양 그 가운데 별세계가 있더구나.
선인퇴옥침(仙人堆玉枕) 선인이 예 있으니 옥베개를 베인 채
신세숙천년(身世忽千年) 그 신세 어떻던고 천년이 잠깐이라.
만학뢰성기(萬壑雷聲起) 일만 골짜기에 우뢰 소리 일고,
천봉우색신(千峯雨色新) 일천 봉우리엔 비에 젖은 초목 빛이 새로워라.
산승망세월(山僧忘歲月) 산승도 세월 잊고,
유기엽간춘(唯記葉間春) 오직 나뭇잎 사이에 봄을 기억하네.
우여다죽색(雨餘多竹色) 비온 뒤 대나무 빛 더욱 푸른데,
이좌백운개(移坐白雲開) 자리 옮겨 앉으니 흰 구름 열리네.
적적인망아(寂寂因忘我) 적적하여 나를 잊고 있는데,
송풍침상래(松風枕上來) 솔바람 베갯머리에 찾아오네.
춘래화만지(春來花滿地)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추거엽비천(秋去葉飛天) 가을이 가니 하늘에 낙엽 흩날리네.
지도리문자(至道離文字) 지극한 도는 문자를 여의고
원래시목전(元來是目前) 원래부터 이는 눈앞에 있었다네.
간월초생처(澗月初生處) 시냇가에 달이 처음 나는 곳
송풍부동시(松風不動時) 솔바람도 움직이지 않을 때
자규성입이(子規聲入耳) 소쩍새 소리 귀에 들어오니
유흥자응지(幽興自應知) 그윽한 흥취 절로 알겠노라.
의설림천흥(擬說林泉興) 자연 속의 흥을 비기려 해도,
하인식차기(何人識此機)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랴.
무심견월색(無心見月色) 무심히 달빛을 보고,
묵묵좌망귀(默默坐忘歸) 말 없이 앉아 돌아가는 길도 잊었네.
밀지하로설(密旨何勞舌) 비밀스런 진리를 어찌 애써 말하리.
강징월영통(江澄月影通) 강이 맑으니 달 그림자 환히 비치네.
장풍생만학(長風生萬壑) 긴 바람 일만 골짜기에서 나고
적엽추산공(赤葉秋山空) 빈 가을 산엔 붉은 잎뿐이라.
송상청라결(松上靑蘿結) 소나무 위엔 푸른 담쟁이덩굴 얽히고,
간중유백월(澗中有白月) 시냇물에는 흰 달빛 담겼네.
석천후일성(石泉吼一聲) 돌샘에서 폭포 소리 크게 울리고,
만학다비설(萬壑多飛雪) 일만 골짜기에 휘날리는 눈이로다.
이 8수의 잔고(殘稿)가 과연 이곳 산중석굴 속에서 나오고, 또 고운의 작(作)이 분명한지 그는 오늘 와 증고(證考)할 길이 없거니와, 그가 외국의 유학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자기의 포부를 펼 곳이 없어 마침내 이같은 산중으로 몸을 숨겨서, 아침저녁 그 고민, 상정(傷情)을 다만 천석(泉石) 사이에 노래로 흘려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천년 후에 오히려 같은 정을 참기 어려운 바 있지 않으냐.
學●이 연박(淵博)하고 문장이 순란(純爛)하여 신라 명승(名僧)의 비문이 거의 그의 손에서 지어진 것인 중에, 이곳 쌍계사의 진감국사비는 더 한층 저명한 것이요, 또 그의 필적으로 이 절 초입의 석면에, 좌(左)에는 ‘쌍계(雙溪)’, 우(右)에는 ‘석문(石門)’이라 대자(大字)로 각(刻)한 것이 있음도 다 그의 얼굴을 보는 듯한 유적이다.
<명산기> 중 “쌍계석문(雙溪石門), 획대여록경최고운필야(劃大如鹿脛崔孤雲筆也)”의 ‘녹경’[사슴의 정강이]의 크기란 것은 과장일지 모르나, 거획(巨劃)인 채로 필력이 동직(動直)함은 볼수록 든든한 생각이 든다.
고운이 이 절에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기(寄)한 시가 있으니,
종일저두농필단(終日低頭弄筆端)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인인두구화심난(人人杜口話心難)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원리진세수감희(遠離塵世雖堪喜)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쟁나풍정미긍란(爭奈風情未肯闌)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영투청하홍섭경(影鬪晴霞紅葉逕)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성련야우백운단(聲連夜雨白雲湍)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음혼대경무기반(吟魂對景無羈絆)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심기억도안(四海深機憶道安)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이라 한 그 무한상의(無限傷意)를 이곳에서 받은 것이니, 그가 있었으므로 여기가 있고, 여기가 있으므로 그가 또한 있을 것이라, 이것이 바로 ‘인생구화(人生具和)’가 아닐 것이냐.
<택리지>에, “쌍계사에는 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의 화상이 있고, 시냇가 석벽에는 고운이 쓴 큰 글자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도를 통해, 지금까지도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를 오간다고 한다.”라 하였거니와, 그가 과연 지금껏 이 산 속에 살아 있는가. 그렇지. 살아 있지. 육신은 죽었을 것이로되 영혼이야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갔으랴.
31. 雙溪方丈의 星夜
팔상전 노승의 범패소리로 진감의 묘성을 짐작한 후에, 다시 팔영루 앞에서 한 줄기 맑은 바람으로 고운의 선정(仙情)을 헤아릴러니, 문득 울려나오는 쌍계의 저녁 종소리에 무한한 정한(情恨)이 부질없이 머리를 쳐든다.
인간(人間)에 맺은 번거로운 누(累)를 잊어버리라는 종소리련만, 그런 것이먀 도리어 매듭매듭이 더 괴로운 것임을 어찌 하랴. 황혼이 시작되면서는 소걸음같이 느릿느릿 걸어드는 어둠일러니, 팔영루 앞 광정(廣庭)을 거니는 사이 황혼은 문득 홍수처럼 급히도 밀려든다.
천왕문 통로에 불이 켜짐을 보면서, 사문 바깥 여사(旅舍)로 돌아와 일행과 함께 헛웃음 속에 저녁끼니를 먹는 듯 마는 듯, 나는 다시 나서 고요함을 즐기려고 사문 안으로 올라갔다.
어느 구석엔지 섬돌 한 끝에 홀로 앉아 고사(古寺)에 깊어오는 밤을 데리고 연인같이 사랑하다가, 주지화상과의 약속이 늦어가기로 털고 일어나 그의 방장(方丈)을 두드렸다.
끓여놓고 기다리는 탕조(湯槽)[일본의 전통 나무욕조인 '유부네''를 말하는 듯]의 호의를 입고, 다시 치자(緇紫)가 연상(聯狀)하여 환흡(歡洽)의 하룻밤을 지내기로 한다.
아랫 여사로부터 올라오는 소식이 지금 한창 일행들은 ●●로 피로를 달랜다 한다. 노중(路中)의 피곤, 진세의 번뇌를 푸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저들로 하여금 ●村의 즐거움 속에서 이 밤의 회포를 풀려고 한다. 나는 나대로 방장의 서광(瑞光) 아래 도우(道友)로 더불어 이 밤을 보내리라.
명월쌍계팔영루(明月雙溪八詠樓) 고운유간단비적(孤雲遺簡短碑蹟)
창망만겁삼한회(滄茫萬劫三韓外) 벽수무언폐사류(碧岫無言廢寺留)
라 한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의 팔영루 시를 읽기도 하고
백설전후령(白雪前後嶺) 명월동서계(明月東西溪)
승좌낙화우(僧坐落花雨) 객민산조제(客旼山鳥啼)
라 한 청허선사의 쌍계방장 시(詩)를 이야기도 하였다.
방장(方丈)에 밤은 깊어간다. 엊그제까지 ●● 속의 청객(請客)일러니 수고롭지 않게 오늘밤은 산 속의 도인이 된 듯도 하여 스스로 ●●한양 경(經)도 외어보고 시도 지어보고 또 말없이 ●● 속에 잠겨도 본다. 누가 있어 지금 본다면 ●●를 분간키 어려우리라.
智異高高三萬丈 지리산 높고 높아 삼만 길 우뚝한데
上頭碧巘平如掌 꼭대기의 푸른 뫼는 편평하기 손바닥
有一草菴雙竹扉 그 가운데 암자 하나 대사립이 두 짝이요
有僧白毫垂緇幌 흰 눈썹의 스님이 검은 법복 걸치었네
松葉稀麋或沾喉 솔잎으로 미음 끓여 간혹 목을 축이고
葛絲煖帽常覆顙 칡덩굴로 모자 엮어 항상 이마 가렸는데
喃喃念經千百遍 중얼중얼 천백 번 불경을 외우다가
忽爾寂然無聲響 갑자기 고요해져 아무 소리 들리잖네
三十三年不下山 서른이라 세 해를 산을 아니 내려오니
世人那得識容顔 세상 사람 어느 누가 그 얼굴을 기억하리
花開花落了不省 피고 지는 꽃잎일랑 전혀 아니 살펴보고
雲來雲去只同閑 오락가락 흰 구름과 한가롭기 일반일레
文豹牽裾戲庭畔 표범은 소매 끌며 뜰앞에서 장난하고
斑鼯聽偈遊牕間 다람쥐는 염불 들으며 창틈에서 놀고 있네
蔘芽滿地無人採 인삼이 땅에 널려도 캐는 사람 없고요
麂鹿呦呦自往還 노루 사슴 울어대며 제멋대로 다닌다네
此僧名字將誰識 이 스님의 이름자를 장차 누가 알 것인고
煙霞疊鎖蒼山色 안개 노을 겹겹이 푸른 산을 덮었거니
太白藏龍衆共疑 태백산에 용 가둔 일 뭇사람이 의심하고
少林面壁愚莫測 소림사에 면벽한 일 우매한 자 이해 못해
吾聞雪坡入禪定 듣자하니 설파대사 선정에 들었다는데 註) 설파대사(雪坡)는 유일(有一)의 법형(法兄)이다.
無乃高蹤此逃匿 혹시 그의 높은 행적 여기 숨지 않았나요
蓮公俛首不肯答 연공은 고개 숙여 대답하려 하지 않고
但道別來無消息 그분과 헤어진 뒤 소식 없다 이를 따름
이 시는 정다산(鄭茶山)이 유일(有一) [조선 후기의 승려. 1720~1799]에게 보인 지리산승가(地異山僧歌)로 자못 유명한 것이어니와, 유일이 쌍계 칠불의 사이에 머문 일이 있었던 이라, 이 시가 오늘밤 이 자리에 와서 더한결 ●● 듣는 고상한 ●●를 나타낸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詩●禪心意不堪”이라 한 청허선사의 쌍계 시구가 결코 헛된 문자가 아니었던 줄을 알겠다.
달 지고 별만 남아 雙溪에 내리는데
이슬에 젖은 바람 方丈으로 드는구나
가뜩이 잠 없는 나그네 밤 깊은 줄 몰라라.
방안에 켜놓은 불이 몇 更이나 되었는지
燈盞에 채운 기름 半 남아 줄었구나
山僧은 말없이 앉았다가 불을 문득 낮추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