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鷺山 이은상 선생님의 지리산탐험기 - 下

2017. 10. 27. 23:02산 이야기


       


 


작성일 : 05-12-20 11:44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8. 쌍계사에서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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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쌍계사에서


 

28. 六祖頂相塔 是非
 
      화개동수(花開洞水)를 내려오다가 지금 한창 교축역사(橋築役事) 중에 있는 곁으로 목교를 건너 왼편 송림 속으로 접어드니 사문 좌우에 기괴한 장승 2기를 만나는데, 이것이 유명한 ‘쌍계사장승’이란 것이다.
   고운(孤雲) 제각(題刻)의 ‘쌍계석문(雙溪石門)’ 안으로 몸을 넣어 양장(羊腸)으로 돌아 들어가는 폼이 과연 고찰명찰(古刹名刹)의 체모에 어울림 같아서 기대 위에 또 한 번 더 기대하게 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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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사문 안으로 들어서니 ●●의 팔영루도 굉걸(宏傑)하고 ●比한 전우(殿宇)가 안배(按排)도 좋으려니와 고색도 창연하여 진실로 범궁(梵宮)[절간]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년주지 환화상(煥和尙)의 영접으로 잠깐 ●●한 뒤에 우리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을 ●●하기로 하여 금당전으로 올라갔다. 육조혜능대사의 정상[머리뼈]이 동래(東來)한 데 대한 시비는 차치하고, 먼저 <전등록>, 사기(寺記) 등에 의하여 육조정상동래의 유래를 말하기로 하자.

 

   신라 문무왕 16년 병자(676)에 의상선사의 문하에서 수구(受具)한 삼법화상이란 이가 있었다.
   총혜(聰慧)가 있고 경률(經律)을 능해(能解)하더니 일찍 중국의 육조혜능대사도망(道望)을 듣고 참문(參聞)코자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던 바, 성덕왕 12년(713)에 육조가 입적하였다는 말을 듣고 심히 통한하던 것이었다.

   그 후 6년이 또 지나 금마국 미륵사 승려 규정이란 이가 당으로부터 돌아오자 그가 가져온 <법보단경>을 읽으매, 거기 “내가 멸한 후 5, 6년이 지나면 내 머리를 가져갈 이가 있으리라”한 육조의 말이 적혀 있었다.
   삼법이 그윽히 생각하되, 내가 나서서 그 머리를 모셔와 동방만대의 복전(福田)을 삼으리라 하고, 김유신 부인 법정니(성덕왕 11년에 낙발하여 비구니가 되고, 호를 法淨尼라 함)에게 가서 2만금을 꾸어 상선에 싣고 당으로 들어갔다.

 

   홍주 개원사에 가 머물더니, 때에 본국(本國) 백율사 승려 대비선백이 거기 있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의론하고 그 절에 기류(寄留)하는 장정만이란 사람에게 그 돈을 주어 육조의 정상을 취해오게 하니, 성덕왕 22년(723)이었다.
   사승(寺僧)이 사(師)의 정골(頂骨)이 상하였음을 알고 주현(州縣)에 소(訴)하였더니, 때의 현령 양간, 자사 유무첨이 엄탐(嚴探)하여 5일만에 석각촌에서 포득(捕得)하였다.

   죄인을 소주로 보내어 국문하니 성명은 장정만이요, 여주 양현 사람인데, 홍주 개원사에서 신라승 김대비로부터 2만금을 받고 육조정상을 취하여 가져가는 것임을 말하고, 또 해동으로 모셔가 공양하리라는 말을 전하였더니, 유수가 듣고 몸소 조계(曹溪)에 이르러 사(師)의 상족(上足)[맏제자] 영도(令韜)에게 처단할 방법을 물으니, 도(韜)의 말이, 만약 국법으로 논하면 마땅히 주(誅)함이 옳겠으나 불교의 자비함으로써 말하면 원친(寃親)이 평등인 데다 더구나 그들이 모셔가 공양코자 함이라 하니 가서(可恕)할 바이라 하므로, 유수도 찬탄하였다.

 

   그리하여 육조의 정상을 모셔다가 처음에 법정니영묘사에 봉안하고 공양하더니, 후에 한 승려가 현몽하여 시 한 수로 고하되,

   吾歸此國土 佛國有因緣
   康州智山下 葛花雪裡天
   人境同如幻 山水妙如蓮
   我法本無心 幽宅卜萬年

이라 한다.                                                                                                

 

   삼법이 이에 김대비와 함께 이곳 지리산을 찾아오니, 때는 12월인데 갈화(葛花)[칡꽃]가 난개(爛開)하였으므로, 돌을 파 함(函)을 만들어 깊이 봉안하고 깨끗한 난야(蘭若) [승려들이 있는 고요한 곳, 즉 절을 가리킴] 1좌(座)를 세우고 선정을 전수(專修)하다가 18년 후 효성왕 38년 기묘(739) 7월 12일에 목욕하고, 단경(壇經)을 좌송(坐誦)하면서 장서(長逝)하니 문인 인혜, 의정 등이 삼법의 전신을 받들어 암사에 귀장(歸葬)하였다.
   이것이 삼법의 전기인 동시에 육조정상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경로라는 것이다.

 

   후에 진감국사가 이곳에 와 육조의 영당을 세운 일이 있고, 근세의 금석대가 추사 김정희도 여기 와 육조상탑에 일련의 액(額)을 썼으되 “세계일화(世界一花), 조종육엽(祖宗六葉)” (현존)이라 한 이후로 산승(山僧) 세인(世人)이 모두 다 탑 안에 육조의 정상이 들어 있는 것으로만 확신케 되었다.

   그러나 낭공영(郎公瑛) 7조(條) ●稿에는 육조 육신이 황소의 난에 상하였을 따름임을 말하였고, 또 감산덕청선사[중국 명나라의 학승]●●通志에는 “진신위수탑보호(眞身爲守塔保護) 일무소손(一無所損)”이라 하였다.

 

   또 10여년 전에 ●夫씨의 필록(筆錄)에 의하여 육조의 목내이(木乃伊:미라)가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설까지 읽은 기억이 있거니와, 이 목내이설은 그것대로 못 미더운 이야기여니와, 정상 동래의 전설도 또 그것대로 믿지 못할 이야기가 아닐는가.
   그러므로 최치원진감비문 중에도, 육조정상 동래의 말은 명기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진감육조영당을 짓고 추사서액(書額)하여 이래 정상탑 운운으로 전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공화(空花)에 결실(結實)함이 이러한 것이어니와, 이 정상탑이야말로 천고의 의안(疑案)이 된 것이다.

 

   그는 그러하려니와 나는 이제 바꾸어 생각건대 이 천고의 의안을 가지고 정상이 이 탑 속에 들었느니 안 들었느니를 시비할 것이 없다고 본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여기 분명히 그의 정상이 들어 있다 하여도 웃고 지나는 이 마음에는 정상이 여기 없는 것이요, 여기 분명히 그의 정상이 들어 있지 않건만은 믿고 절하는 이 마음에는 정상이 여기 봉안된 것일지니 이제 시비를 멈출 것이다. 자기마다 믿을 자(者) 믿을 것이요, 안 믿을 자 안 믿을 것뿐일 줄 안다.
   다만 그것이 공화(空花)라 하자 공화대로 이상도 하여 여기 봄바람이 불 적마다 피어나고 그 가지 끝에 열매가 맺혀온 것만이 사실임을 생각할 따름이다.

 


29. 眞鑑의 梵唄 전설


   육조의 정상탑은 천고의 의안이어니와 실로 이 쌍계사는 저 신라의 말엽에 처(處)하여 조도(祖道)를 선양한 진감국사의 ●基한 바니, 당시의 문호 최치원이 찬한 진감비(眞鑑碑)가 지금, 당시의 정중(庭中)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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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부, 비신, 이수가 구비한데, 이수는 쌍룡이 반권(蟠卷)하여 연좌(蓮座) 위의 보주를 이었고, 귀부는 방형(方形)의 지복 속에 놓였는데, 귀갑 위에는 장방(長方)의 비좌를 설하여 비석을 받치고 있다.
   비신은 흑색의 석재를 썼는데, 비의 총높이는 3m 63cm의 대비(大碑)로서, 혜소(慧昭)[진감의 법호] 일대(一代)의 사적(事蹟)을 새기었다.

 

   이 비명에 따르면, 혜소는 속성 최씨로 금마(金馬:지금의 익산) 사람이니, 신라 혜공왕 50년(774)에 나서, 31세에 입당사(入唐使)의 뱃사공으로 창주에 이르러 신감선사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형모(形貌)가 암연(?然)하므로 뭇사람이 일러 흑두타라 하더니, 37세에 숭산 소림사에서 동향의 승 도의(道義)를 만나 같이 사방을 참심(參尋)하다가, 도의는 먼저 본국으로 돌아오고, 혜소는 종남산으로 들어가 지관에 머문 지 3년. 후에 나와 짚신을 삼아 여인(旅人)에게 보시한 지 또 3년. 57세에야 본국에 돌아왔다.

 

   흥덕왕이 그를 영로(迎勞)하여 먼저 돌아온 도의와 함께 ‘2보살’이라 부르더니, 처음에 석(錫)을 상주 설악 장백사에 걸매 내학(來學)이 사방으로부터 운집하였고, 이어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 화개곡을 찾아 삼법화상의 유기(遺基)에 당우를 세우고 여기 머무니, 민애왕혜소(慧照)라 사호(賜號)하였다.(昭는 聖王의 諱라 이를 피하여 照자로 바꿈)

   승적을 대황룡사에 올리고 징(徵)하여 입경(入京)케 하였으나 악립(岳立)하여 뜻을 옮기지 아니하고, 유서(幽棲) 수년에 청익(淸益)의 중(衆)이 도마(稻麻) 같아, 드디어 기승(奇勝)의 땅을 역전(歷詮)하여 이 산 남령(南嶺) 기슭에 선찰(禪刹)을 창(創)하고, 육조의 영당을 세우니 사(師)는 육조의 현손(玄孫)이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에 절을 세우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으며, 문성왕 12년(850)에 “만법이 다 공하니 내가 가려 한다. 일심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노력하라. 탑을 만들어 형상을 보존하지 말고 비명으로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는 말로 문인들에게 언탁(言託)하고 마침내 비(?)하니, 보령(報齡)이 77세.

   뒤에 헌강왕이 추익(追謚)하여 진감선사라 하고, 탑명은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며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명을 찬술케 하였다. 그리고 옥천사를 개칭하여 쌍계사라고 사액(賜額)하니, 이것이 사명의 시초였다.

 

   당(唐) 조계육조(曹溪六祖)로부터 남악회양에게로, 다시 강서마조에게로, 또다시 창주신감에게로 전법하여 남악혜소 진감국사에게 이르렀으매, 전대(前代) 법계의 훌륭함이 이와 같고, 그로부터 법량지증국사에게로, 다시 백엄양부에게로, 또다시 정진대사에게로 유전되었으니 후대(後代) 법계의 자랑스러움이 이같은 것이다.

   명인의 뒤가 적막치 아니하고, 대덕의 뒤가 소조(蕭條)하지 아니하여 오늘껏 조계의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함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흔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중에, 주지 환화상이 팔상전 ●寮 일실(一室)에 범해라는 노사(老師)가 있어 범패에 최능(最能)함을 말하기로, 나는 너무나 반가워 그를 만나 고조(古調) 일창(一唱)을 청하여 진감이 끼친 음성을 들으려 하였다.

 

   최치원진감비문 중에, “선사는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이나 옥처럼 아름다웠다. 곡조와 소리는 치우치듯 날듯 경쾌하면서도 애잔하여 천인들이 듣고 기뻐할 만하였다. 소리가 먼 데까지 전해져서 절이 배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나, 싫은 내색 없이 이들을 가르쳤다. 지금 중국 어산의 아름다운 범패를 배우려는 자들이 앞다투어 콧소리를 흉내내어 옥천사에 전해져 온 소리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이 어찌 소리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한 것을 보면, 진감이 어패(魚唄)의 선창자(善唱者)이었던 것을 알려니와, 실로 동국(東國)의 어패도 지리산으로부터 남상(濫觴)이요, 지리산 중에서도 이곳 옥천사(쌍계사)의 진감으로부터 시원(始源)이었으니, 이제 이곳에 범해노사가 있어 범성(梵聲)의 뒤를 이음이 조금도 기이할 것 없는 일이다.

 

   노사에게 청하여 몇 곡을 듣자하매, 늙은 몸인 채로 올리고 내리는 마디마디가 맑고도 그윽하여 실로 영성비구(鈴聲比丘), 묘성존자(妙聲尊者)의 칭(稱)을 들음직하다.
   패익(唄匿)은 곧 찬탄이라, 그 소리는 반드시 심상음곡(尋常音曲)이 아니요, 그 속에 깔려 있고 차여 있는 위대한 신앙의 힘과 향기와 거룩함과 어여쁨이 게송의 무한한 뜻과 아울러 사람의 마음을 느끼어 말지 못하게 한다.

   과거세(過去世)에 불탑(佛塔)에다 금령(金鈴)을 공양하여 저러한 묘음을 얻은 것인가. 법당 안에 합장하고 서서 명목찬송(瞑目讚頌)하는 노사의 범패성(梵唄聲)은 황혼의 산사에 그윽히 울리고 있었다.
   쌍계의 옥을 굴리는 물소리가 저 옥보고의 거문고와 진감국사의 범패로 하여금 그같이 유명하게 한 것이요, 또 그 전설이 오늘까지 전함이라.

 

하좋은 쌍계옥류(雙溪玉流)  흘러 어디로 가옵던가
옥보선(玉寶仙) 거문고로  한 갈래 옮기옵고
진감사(眞鑑師) 어패소리로  또 한 갈래 드옵더라.

거문고 고운 곡조  야외(野外)로 흘러가고
어산패(魚山唄) 슬픈 소리  어디로 보내든가
진세(塵世)로 나가기 싫어  산 속에만 감돌더라.

 


30. 孤雲과 쌍계석문
 
   쌍계사의 주인은 실로 진감국사라 하겠지만은, 그와 아울러 최치원이 없었더라면 쌍계사가 이같지 못할는지도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고운의 쌍계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서 진감이 있고 뒤에 고운이 있어 실로 쌍계의 쌍절(雙絶)이라 하려니와, 그야말로 금상의 첨화요, 산휘이천미(山輝而川嵋)라, 청허선사도 일찍이 '쌍계사중창기'에 이 두 분의 병존을 감격하여,
   고운은 유생이요 진감은 스님이다. 진감이 절을 세워 비로소 사람과 하늘의 눈을 뜨게 하였고, 고운이 비(碑)를 세워 유교와 불교의 핵심을 널리 드러내었다. 아, 이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줄 없는 거문고이다. 그 곡은 봄바람에 제비가 그 가락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고 푸른 버들에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 같아서 하나가 날줄이라면 또 하나는 씨줄이요, 하나가 거죽이라면 또 하나는 속이 되어 서로 도운 것이다.”라 하였다.

 

   고운이 일찍 12세에 입당(入唐)하여 그 발군의 대재(大才)를 중토에 휘날리고, 청년에 벌써 명문천하(名聞天下)하여, 26세에 귀녕(歸寧)의 뜻을 품고 헌강왕 11년(885)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헌강왕이 시독겸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서서감지사(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瑞書監知事)를 삼았으나 그 뜻을 행하기 어려웠고, 나악 대산군(大山郡:지금 전북 태인) 태수가 된 일도 있었으나 서당(西唐)과 동고국(東故國)으로 오나가나 난세에 처하여 오히려 그 일신변(一身邊)이 허물입기가 쉬우므로 스스로 불우(不遇)를 상(傷)하고, 다시 근사(近仕)의 뜻이 없어 산림 속에 소요하고, 강호(江湖)가에 자방(自放)하여, 혹은 서사(書史)를 침적(枕籍)하고 혹은 풍월을 소영(嘯詠)하니 저 경주 남산과 강주 빙산이 다 그의 책장지(策杖地)요, 협주 청량사와 합포 월영대가 다 그의 유화처(遊化處)이었다.          

 

   만년에는 가야산에서 서지(棲遲)[은둔을 말함] 언앙(偃仰)[편안하게 한가로이 쉼]하다가 종로(終老)한 것이로되, 그의 일생 중 중대한 유적지로 하여 기억할 만한 곳은 여기 이 쌍계사를 중심으로 한 일대다.

   세기의 말에 처하여 수읍(愁?)의 일생을 보낸 불우의 문호가 이곳에 은복(隱伏)하여 봄날의 새벽에 “파내동류수불회(耐東流水不回) 지최시경뇌인래(只催詩景惱人來)” [어찌할거나 세월은 동으로 흐르는 물 돌아오지 못하거니 애꿎게 시경을 재촉하여 사람을 괴롭히느니]를 탄식하고, 가을비 오는 밤에 “추풍유고음(秋風唯苦吟) 거세소지음(擧世少知音)” [가을바람에 처량한 이 읊조림만 / 온 세상에 지음(知音) 적네]이라 통상(痛傷)하던 것임을 헤아리면, 즈윽이 시대가 재현(再現)한지라 인물의 복견(復見)도 있음직하지 않은 바 아니어니와, 그럴수록 그의 유적이 그립고도 눈물겨웁다.

 

   지리산의 한 노승이 산중석굴 속에서 이서(異書) 몇 질(帙)을 얻어보매 그 중에 최치원친필 시고(詩稿) 한 첩(帖)이 있어, 16수일러니 그 반이나 없어진 것을 말하고, 구례 졸(?) 민대윤이 그 여고(餘稿)를 얻어 이지봉에게 보내었으므로, 지봉이 그것을 받아 최치원의 진적(眞蹟)임을 알고 귀중히 여겨 그의 저서 <지봉유설> 13권에 그 시고를 수록한 것이다.


   동국화개동(東國花開洞)  동쪽이라 이 나라에 화개동이 예 있으니
   호중별유천(壺中別有天)  술항아린 양 그 가운데 별세계가 있더구나.
   선인퇴옥침(仙人堆玉枕)  선인이 예 있으니 옥베개를 베인 채
   신세숙천년(身世忽千年)  그 신세 어떻던고 천년이 잠깐이라.

   만학뢰성기(萬壑雷聲起)  일만 골짜기에 우뢰 소리 일고,
   천봉우색신(千峯雨色新)  일천 봉우리엔 비에 젖은 초목 빛이 새로워라.
   산승망세월(山僧忘歲月)  산승도 세월 잊고,
   유기엽간춘(唯記葉間春)  오직 나뭇잎 사이에 봄을 기억하네.

   우여다죽색(雨餘多竹色)  비온 뒤 대나무 빛 더욱 푸른데,
   이좌백운개(移坐白雲開)  자리 옮겨 앉으니 흰 구름 열리네.
   적적인망아(寂寂因忘我)  적적하여 나를 잊고 있는데,
   송풍침상래(松風枕上來)  솔바람 베갯머리에 찾아오네.


   춘래화만지(春來花滿地)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추거엽비천(秋去葉飛天)  가을이 가니 하늘에 낙엽 흩날리네.
   지도리문자(至道離文字)  지극한 도는 문자를 여의고
   원래시목전(元來是目前)  원래부터 이는 눈앞에 있었다네.

   간월초생처(澗月初生處)  시냇가에 달이 처음 나는 곳
   송풍부동시(松風不動時)  솔바람도 움직이지 않을 때
   자규성입이(子規聲入耳)  소쩍새 소리 귀에 들어오니
   유흥자응지(幽興自應知)  그윽한 흥취 절로 알겠노라.

   의설림천흥(擬說林泉興)  자연 속의 흥을 비기려 해도,
   하인식차기(何人識此機)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랴.
   무심견월색(無心見月色)  무심히 달빛을 보고,
   묵묵좌망귀(默默坐忘歸)  말 없이 앉아 돌아가는 길도 잊었네.

   밀지하로설(密旨何勞舌)  비밀스런 진리를 어찌 애써 말하리.
   강징월영통(江澄月影通)  강이 맑으니 달 그림자 환히 비치네.
   장풍생만학(長風生萬壑)  긴 바람 일만 골짜기에서 나고
   적엽추산공(赤葉秋山空)  빈 가을 산엔 붉은 잎뿐이라.

   송상청라결(松上靑蘿結)  소나무 위엔 푸른 담쟁이덩굴 얽히고,
   간중유백월(澗中有白月)  시냇물에는 흰 달빛 담겼네.
   석천후일성(石泉吼一聲)  돌샘에서 폭포 소리 크게 울리고,
   만학다비설(萬壑多飛雪)  일만 골짜기에 휘날리는 눈이로다.
 
   이 8수의 잔고(殘稿)가 과연 이곳 산중석굴 속에서 나오고, 또 고운의 작(作)이 분명한지 그는 오늘 와 증고(證考)할 길이 없거니와, 그가 외국의 유학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자기의 포부를 펼 곳이 없어 마침내 이같은 산중으로 몸을 숨겨서, 아침저녁 그 고민, 상정(傷情)을 다만 천석(泉石) 사이에 노래로 흘려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천년 후에 오히려 같은 정을 참기 어려운 바 있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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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學●이 연박(淵博)하고 문장이 순란(純爛)하여 신라 명승(名僧)의 비문이 거의 그의 손에서 지어진 것인 중에, 이곳 쌍계사진감국사비는 더 한층 저명한 것이요, 또 그의 필적으로 이 절 초입의 석면에, 좌(左)에는 ‘쌍계(雙溪)’, 우(右)에는 ‘석문(石門)’이라 대자(大字)로 각(刻)한 것이 있음도 다 그의 얼굴을 보는 듯한 유적이다.

   <명산기>“쌍계석문(雙溪石門), 획대여록경최고운필야(劃大如鹿脛崔孤雲筆也)”의 ‘녹경’[사슴의 정강이]의 크기란 것은 과장일지 모르나, 거획(巨劃)인 채로 필력이 동직(動直)함은 볼수록 든든한 생각이 든다.


    고운이 이 절에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기(寄)한 시가 있으니,


   종일저두농필단(終日低頭弄筆端)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인인두구화심난(人人杜口話心難)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원리진세수감희(遠離塵世雖堪喜)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쟁나풍정미긍란(爭奈風情未肯闌)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영투청하홍섭경(影鬪晴霞紅葉逕)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성련야우백운단(聲連夜雨白雲湍)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음혼대경무기반(吟魂對景無羈絆)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심기억도안(四海深機憶道安)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이라 한 그 무한상의(無限傷意)를 이곳에서 받은 것이니, 그가 있었으므로 여기가 있고, 여기가 있으므로 그가 또한 있을 것이라, 이것이 바로 ‘인생구화(人生具和)’가 아닐 것이냐.
 
   <택리지>에, 쌍계사에는 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의 화상이 있고, 시냇가 석벽에는 고운이 쓴 큰 글자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도를 통해, 지금까지도 가야산지리산 사이를 오간다고 한다.”라 하였거니와, 그가 과연 지금껏 이 산 속에 살아 있는가. 그렇지. 살아 있지. 육신은 죽었을 것이로되 영혼이야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갔으랴.
 

31. 雙溪方丈의 星夜
 
   팔상전 노승의 범패소리로 진감의 묘성을 짐작한 후에, 다시 팔영루 앞에서 한 줄기 맑은 바람으로 고운의 선정(仙情)을 헤아릴러니, 문득 울려나오는 쌍계의 저녁 종소리에 무한한 정한(情恨)이 부질없이 머리를 쳐든다.
   인간(人間)에 맺은 번거로운 누(累)를 잊어버리라는 종소리련만, 그런 것이먀 도리어 매듭매듭이 더 괴로운 것임을 어찌 하랴. 황혼이 시작되면서는 소걸음같이 느릿느릿 걸어드는 어둠일러니, 팔영루 앞 광정(廣庭)을 거니는 사이 황혼은 문득 홍수처럼 급히도 밀려든다. 
   천왕문 통로에 불이 켜짐을 보면서, 사문 바깥 여사(旅舍)로 돌아와 일행과 함께 헛웃음 속에 저녁끼니를 먹는 듯 마는 듯, 나는 다시 나서 고요함을 즐기려고 사문 안으로 올라갔다.

   어느 구석엔지 섬돌 한 끝에 홀로 앉아 고사(古寺)에 깊어오는 밤을 데리고 연인같이 사랑하다가, 주지화상과의 약속이 늦어가기로 털고 일어나 그의 방장(方丈)을 두드렸다. 
    끓여놓고 기다리는 탕조(湯槽)[일본의 전통 나무욕조인 '유부네''를 말하는 듯]의 호의를 입고, 다시 치자(緇紫)가 연상(聯狀)하여 환흡(歡洽)의 하룻밤을 지내기로 한다.
   아랫 여사로부터 올라오는 소식이 지금 한창 일행들은 ●●로 피로를 달랜다 한다. 노중(路中)의 피곤, 진세의 번뇌를 푸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저들로 하여금 ●村의 즐거움 속에서 이 밤의 회포를 풀려고 한다. 나는 나대로 방장의 서광(瑞光) 아래 도우(道友)로 더불어 이 밤을 보내리라.
 
   명월쌍계팔영루(明月雙溪八詠樓  고운유간단비적(孤雲遺簡短碑蹟)
   창망만겁삼한회(滄茫萬劫三韓外)   벽수무언폐사류(碧岫無言廢寺留)
 
라 한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팔영루 시를 읽기도 하고
 
   백설전후령(白雪前後嶺)  명월동서계(明月東西溪)
   승좌낙화우(僧坐落花雨)  객민산조제(客旼山鳥啼)
 
라 한 청허선사쌍계방장 시(詩)를 이야기도 하였다.
 
   방장(方丈)에 밤은 깊어간다. 엊그제까지 ●● 속의 청객(請客)일러니 수고롭지 않게 오늘밤은 산 속의 도인이 된 듯도 하여 스스로 ●●한양 경(經)도 외어보고 시도 지어보고 또 말없이 ●● 속에 잠겨도 본다. 누가 있어 지금 본다면 ●●를 분간키 어려우리라.
 
   智異高高三萬丈   지리산 높고 높아 삼만 길 우뚝한데
  上頭碧巘平如掌   꼭대기의 푸른 뫼는 편평하기 손바닥
   有一草菴雙竹扉   그 가운데 암자 하나 대사립이 두 짝이요
   有僧白毫垂緇幌   흰 눈썹의 스님이 검은 법복 걸치었네

   松葉稀麋或沾喉   솔잎으로 미음 끓여 간혹 목을 축이고
   葛絲煖帽常覆顙   칡덩굴로 모자 엮어 항상 이마 가렸는데
   喃喃念經千百遍   중얼중얼 천백 번 불경을 외우다가
   忽爾寂然無聲響   갑자기 고요해져 아무 소리 들리잖네

   三十三年不下山   서른이라 세 해를 산을 아니 내려오니
   世人那得識容顔   세상 사람 어느 누가 그 얼굴을 기억하리
   花開花落了不省   피고 지는 꽃잎일랑 전혀 아니 살펴보고
   雲來雲去只同閑   오락가락 흰 구름과 한가롭기 일반일레

   文豹牽裾戲庭畔   표범은 소매 끌며 뜰앞에서 장난하고
   斑鼯聽偈遊牕間   다람쥐는 염불 들으며 창틈에서 놀고 있네
   蔘芽滿地無人採   인삼이 땅에 널려도 캐는 사람 없고요
   麂鹿呦呦自往還   노루 사슴 울어대며 제멋대로 다닌다네

   此僧名字將誰識   이 스님의 이름자를 장차 누가 알 것인고
   煙霞疊鎖蒼山色   안개 노을 겹겹이 푸른 산을 덮었거니
   太白藏龍衆共疑   태백산에 용 가둔 일 뭇사람이 의심하고
   少林面壁愚莫測   소림사에 면벽한 일 우매한 자 이해 못해

   吾聞雪坡入禪定   듣자하니 설파대사 선정에 들었다는데              註) 설파대사(雪坡)는 유일(有一)의 법형(法兄)이다.
   無乃高蹤此逃匿   혹시 그의 높은 행적 여기 숨지 않았나요
   蓮公俛首不肯答   연공은 고개 숙여 대답하려 하지 않고
   但道別來無消息   그분과 헤어진 뒤 소식 없다 이를 따름
 
   이 시는 정다산(鄭茶山)유일(有一) [조선 후기의 승려. 1720~1799]에게 보인 지리산승가(地異山僧歌)로 자못 유명한 것이어니와, 유일이 쌍계 칠불의 사이에 머문 일이 있었던 이라, 이 시가 오늘밤 이 자리에 와서 더한결 ●● 듣는 고상한 ●●를 나타낸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詩●禪心意不堪”이라 한 청허선사 쌍계 시구가 결코 헛된 문자가 아니었던 줄을 알겠다.
 
달 지고 별만 남아 雙溪에 내리는데
이슬에 젖은 바람 方丈으로 드는구나
가뜩이 잠 없는 나그네 밤 깊은 줄 몰라라.
방안에 켜놓은 불이 몇 更이나 되었는지
燈盞에 채운 기름 半 남아 줄었구나
山僧은 말없이 앉았다가 불을 문득 낮추더라.




  작성일 : 05-12-20 12:30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9. 불일폭포를 찾아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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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일폭포를 찾아


32. 佛日瀑의 天來聲
 
   제4일.
   쌍계사 - 불일폭(4km)
   불일폭 - 쌍계사(4km)
   쌍계사 - 대승동(大勝洞)(12km)
   금일 행정 : 50리(20km)

 

   쌍계에 불일(佛日)이 광명한 8월 1일의 아침. 우리는 사(寺)의 동(東)으로 하여 산중 최대의 폭포 불일폭(佛日瀑)을 향한다.
   아침부터 울어내는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율수(栗樹) 송림(松林) 우거진 사이로 올라간다.
   왼편 송림 사이로 새어보이는 옥창(屋蒼)은 진감의 별원(別院)이던 국사암(國師庵)인데, 얼마 아니하여 길 오른편에 솟은 마적대(馬迹臺)라는 바위 앞을 지나간다.

   이 마적대는 최치원이 놀던 바위라 하며, 말 발자국이라 부르는 것이 석면에 패여 있다.
   이 골짜기의 어느 곳도 고운의 놀던 곳 아님이 없으려니와, 이 마적대라는 것을 말 발자국이라 하여 우회적으로 전설(傳說)하기보다는 고승 마적(馬迹)과 연관된 곳이 아닌가 한다.
   마적이란 이가 어느 때 사람인지는 명기된 데가 없으나 <여람>에 의하면 이 산중 함양 유가대(瑜?臺) 위에 마적사라는 그의 액찰(額刹)까지 있던 이이므로, 혹 이곳으로도 내왕하는 동안 그로 인하여 생겨진 이름일 것으로 생각한다.

 

   깊은 동곡(洞谷)을 끼고 오르락 내리락, 쉬운 듯이 쉽지 않은 길을 가는 동안에, 어디선지 꾀꼬리 소리도 아름답다.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과 함께.
   “불일암, 서쪽으로 쌍계사와 10여리 거리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파라서 길을 낼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운운(輿覽)이라 하여 옛날부터 불일암 가는 길이 험요(險遙)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구렁에 걸친 나무토막 위로 돌아나가고, 벽에 붙어 다람쥐 시늉도 하는 길이다.

   그러나 머리 위에는 구슬 같은 꾀꼬리 소리를 받아 이고, 발로는 구슬 같은 아침이슬을 밟고 가는 길이매, 험한 채로 험한 것을 잊어버리고 보주(寶珠)의 전당 속에 든 것만 같다.

 

   佛日庵 깊은 골이 天地가 온통 구슬일네.
   千樹 萬樹에 잎잎이 아침이슬
   어디서 꾀꼬리소리 빗방울 듯듯 떨어지네.

   흰구슬 노랑구슬 五色구슬 꿰어내어
   목에 걸고 팔에 걸고 어인 호강 이러한고
   님주신 선물이라니 平生 벗지 않으리라.

 

   불일대자연(佛日大自然), 조화주의 빈틈없는 사랑으로 몸과 마음을 장엄케 한 영락(瓔珞)인 줄을 깨달으면서 돌아돌아 오르노라니, 앞으로 큰 동곡을 차지하고 앉은 불일암이다.
   탁영(濯纓) 김일손기(記)에, “이름은 불일암(佛日庵)이다. 절벽 위에 있어 앞을 내려다보면 땅이 없고, 사방의 산이 기묘하게 솟아서 상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서쪽에 향로봉(香爐峯)이 있어 좌우로 마주 대하고, 아래는 용추(龍湫)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라 한 대로 지금 여기 이 불일암에서 정면하여 좌우에 옹호의 세(勢 )로 미리 나온 봉명(峰名)이 향로봉인 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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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로봉 밑에 장숙(壯肅)하게도 뚫려 나간 큰 동곡으로 내려간다.
   두 발은 물론이요, 두 손까지 발노릇하고, 그도 부족하여 엉덩이까지 발이 되어야 하는 벼랑길인데, 반쯤 돌아나가니 동학(洞壑)의 오처(墺處) 절벽 위에 소리치며 떨어지는 백홍(白虹)의 장관.
   몇 단에 꺾이어 떨어지니 이는 다시 기관(奇觀)인데, 귀를 때리는 물소리에 눈과 귀가 아울러 황홀하여 반벽(半壁)에 붙은 채 제 몸을 어찌할 줄 모르겠다.

   급한 대로 말하면 날아내리지 못함이 원망스럽지만은, 승관(勝觀)일수록 얼른 보이지 않음이 매양 조화(造化)의 하는 일이라, 뻔히 보면서도 발 밑에 가까이 이르기가 이리도 어려웁다.
   폭하(瀑下)에 내려서매 날으는 수연(水煙)이 온몸에 세례를 깃들이고, 상기도 다 못버린 열뇌(熱惱)를 마저 씻는다. 이 장폭이 불일폭이요, 그 아래 고인 못은 ‘용추’라 또는 ‘학연’이라 부른다.

 

   조남명의 시에 “한 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 나라로 올라갔고, 구슬이 흐르는 한 가닥 시내는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獨鶴穿雲歸上界, 一溪流玉走人間)”라 한 그대로, 여기 이 골짜기에 이름 높은 청학은 간 곳이 없고, 백홍이 땅에 떨어져 소리칠 따름이다.

 

   하늘땅 멀다마라  白虹이 이었나니
   못 아래 귀를 대면  하늘 소식 들으련만
   들어도 알 길 없으니  그게 야속하여라.

   물소리 듣노라다  좋다 하고 외치노라
   다시금 듣노라다  서러운 생각 절로 이네
   하늘이 땅에 전하는 말  哀樂인가 하노라.

 


33. 전설에 남은 靑鶴

 

   탁영 김일손기(記)를 거(據)하면 불일암 승(僧)이 말하기를 매년 늦은 여름에 청신(靑身) 적정(赤頂) 장경(長脛)의 새가 향로봉으로 날아와 송수(松樹) 위에 놀다가 용추에 내려와 물을 마시고는 다시 어리론지 가버린다 하더라” 하고, “이것이 청학이라는 것이다.…비천(飛泉)이 있어 눈을 뿌리며, 천 길을 내리 떨어져 학연(鶴淵)으로 들어가는데 이거야말로 경치 좋은 곳이다.”이라 하였다.

   이 말에 의하면 청학이 분명 여기 오고 가고 한 것이 사실이라고도 할 것이요, 또 청허불일암 에,

 

   심원화홍우(深院花紅雨)      깊은 산속 암자, 붉은 꽃 비처럼 흩날리는데
   장림죽취연(長林竹翠烟)      긴 대숲에 어린 안개는 푸른 연기일레라
   백운응령숙(白雲凝嶺宿)      흰 구름은 산 고개에 엉기어 잠을 자고
   청학반승면(靑鶴伴僧眠)      푸른 학은 스님 벗삼아 졸고 있네.
   
이라 한 것을 보면 문자대로 직해(直解)한다면 청학이 여기 와 깃들인 것으로 말할 수 있지만은, 고승(古僧)이 오인으로 한 말인지도 모를 것이요, 허시(虛試)가 아화(雅化)하여 쓴 것인지도 모를 것임에 청학의 내부(來否)는 판단할 길이 없다.
  
   조남명“청학은 가고 유옥(流玉)만 떨어진다”는 시구를 썼거니와, 양성지(梁誠之)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도 여기 와 시를 남기되,

 

   지리창창의반공(智異蒼蒼倚半空)    지리산의 푸르름은 반공에 기대어 있고
   천암만학쇄비종(千巖萬壑灑飛淙)    천암만학은 물거품을 흩뿌리네
   동중청학응기아(洞中靑鶴應欺我)    골짜기 안에 청학이 산다는 것은 응당 나를 속이는 것이리라
   호불래문악사종(胡不來聞岳寺鐘)    어찌 와서 산사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이라 하여 청학을 보지 못하고 고전(古傳)하는 말만 들은 듯하다.

 

   그러나 여기 이 지리산중에는 청학동의 이름이 가장 드러나고, 또 청학동의 고사(故事)가 오래 전부터 있음이 사실이니 청학동 고사에 대한 최고(最古)한 기록은 고려 고종 때의 사람, 이인로<파한집>이다.
   고로(古老)[李仁老를 말함]가 전하되,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어, 길이 좁아 겨우 사람이 통해 나다님 즉한데, 부복하여 몇 리를 지나가면 허광(虛曠)한 곳을 만나니, 사우(四隅)가 다 양전옥양(良田沃壤)이라 파종하기에 좋은 위에, 거기 청학이 서식하므로 동명(洞名)을 청학동이라 한다" 하였다.
   "옛날의 둔세자들이 여기에 많이 거(居)하여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오히려 형자(荊棘) 속에 남아 있더라" 하고, 이어 또 기록하되, 그는 그의 당형 최상국과 함께 불의장왕(拂衣長往)의 뜻을 가지고 이 청학동을 찾으려 하여 저 화엄사로부터 이곳 화개현까지 이르러, 신흥사에서 자고 다시 나서서 청학동을 찾다가 마침내 찾지 못하고 돌아가며 암석 위에 시를 남겼으되,

 

   頭流山逈暮雲低    두류산이 깊어 저녁구름 나직한데
   萬壑千巖似會稽    만학 천암이 회계와 비슷해라
   策杖欲尋靑鶴洞    막대를 짚고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隔林空聽白猿啼    건너편 수풀에 흰 원숭이 울음이 들리네
   樓臺縹渺三山遠    누대는 아득한데 삼산은 멀고
   苔蘚依俙四字題    이끼낀 넉자 글씨 아직도 희미하네
   始問仙源何處是    도원이 어디냐 물어 보렸더니
   落花流水使人迷    낙화만 흘러 내리어 어딘지 모르겠네.

 

라 하였다.

   이는 물론 이인로가 청학동을 탐승한 실제 고사여니와, 청학동은 고래로 일컫는 조선의 도원경(桃源境)이라 桃源●●의 아름답고 꿈 같은 설화와 시장(詩章)이 많은 것도 마땅한 일일 것이다.

 

   <택리지>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기를 만수동청학동이 있다고 한다. 만수동은 즉 오늘날의 구품대(九品臺)요, 청학동은 즉 오늘날의 매계(梅溪)로서, 근래에 비로소 조금씩 사람이 통행하는 흔적이 보인다.”라 한 것을 따르면, 청학의 이야기는 같은 것이로되 청학으로 인하여 득명(得名)한 청학동은 바로 이 불일폭 아래의 동곡이 아니라 여기서 동남하(東南下)하여 있는 악양면의 계곡임이 분명하니 지금껏 거기 매계리, 청학리의 동명이 남아 있다.

   청학동의 청학이거나, 불일동의 청학이거나 간에 이 청학은 그 이름부터가 아름다운 것일 뿐더러, 전설이건 실재이건 간에 이 기승(奇勝)한 계곡들의 수호조(守護鳥)로 받들어온 것도 괴이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봉유설> 2권에, “살고 있는 승려가 나를 위하여 이야기하기를, 태평하였을 때에 호협한 젊은이가 있어서 돌을 던져 학의 날개를 상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학은 그 때문에 다시 오지 않았으며, 학이 떠나간 지 얼마 안되어 임진란이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 기틀을 미리 살피고 떠나간 것일 것이다.”7)라 하였다. 민심의 일단을 이로써도 짐작할 바이러니와 다만 ●●뿐으로도 얼마나 그리운 청학이냐. 행복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청학을 기다린다.

 

   향로봉 솔가지에 청학이 와 놀더라네
   일 없은 옛사람이 뷘 말씀을 하돗던가
   기다려 천년을 지나거니 참말 되어 오려므나.

 

   洞天이 하좋으니 청학이 오련마는
   인심이 수상하여 오다가 도로 간다
   斷●을 끊노라 도노라 흰구름만 나르더라.

   불일폭 벼랑 밑에 어이한 仙子들이
   鶴淵에 머리 감고 노래하며 누웠고나
   저 분들 靑衣를 입었던들 청학일랜 하여라.

 



작성일 : 05-12-20 13:06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10. 신흥동 주변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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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흥동 주변


 

34. 신흥동의 洗耳岩
 
   불일암(佛日庵) 방주(房主)가 삶아주는 산(山)감자로 점심을 어이고, 다시 쌍계사로 돌아와 그 길로 천왕봉을 향한다.
   전라도쪽 화엄사에서 발정(發程)하여 지리의 서주봉(西主峰) 반야에 올랐다가 경상도쪽 쌍계사로 내려와, 다시 여기서 지리의 동주봉(東主峰) 천왕으로 오르는 것은 지리산을 두 번 오르는 셈이다.

 

   에서 쌍계로 내려오던 길을 다시 밟아 화개동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서 둔세군자(遁世君子)도 생각해보고, 풍류남아도 헤아려 본다.
   신흥까지 이르러서는 칠불 오르는 직로(直路)를 버려두고 오른편으로 신흥유지(神興遺址)본동(本洞)을 가로건너 고목 있는 곳에서 신흥사의 유기(遺基)를 살펴보면서 그대로 신흥동 청류(淸流)를 복판으로 타고나가매 금강옥류동(金剛玉流洞)의 가장 기묘한 일 부분을 가져다놓은 듯한 곳이 전개되는데, 여기가 곧 저 유명한 고운(孤雲)세이암(洗耳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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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동 계곡과 세이암 각자 / 사진: <조박사>님
    

                                    
   향(向)하여 바른편으로는 기장(奇壯)한 절벽이 둘리었고 ●●에는 ●角의 대석괴(大石塊)와 제 마음대로 눕고 앉은 난석(亂石)들이 백라(白裸) 같은 옥류를 혹은 사이로, 혹은 앞으로, 혹은 위로, 혹은 아래로, 여기서는 굽이치게, 저기서는 쏜살같이 건너서는 푸르도록 깊게, 발 아래는 희도록 얕게, 물 하나를 가지고 형형색색의 종종상(種種相)을 보이고 있다.
   멋쟁이의 ‘멋’이란 ‘멋’은 여기 이 바위와 돌들이 다 차지하고, 얄궂은 ‘짓’이란 ‘짓’은 여기 흐르는 청류가 죄 까불어내는 중에, 웅장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유미(幽微)한 뜻이 감초렸고, ●●하면서도 속속들이 玄●하여 그 성용(聲容)과 색태로는 풍류가락을 내이기에 족할 터니, 다시 그대로 그 정신과 氣●으로서는 상심은자(傷心慇者)를 숨겨주기에 넉넉한 곳이다.

 

   이렇길래 고운이 여기 와 귀를 씻었나 보다. 영욕과 ●●의 모든 시비를 떠나서 일곡산수(一曲山水)에 한많은 생을 기탁하여 신보자적(信步自適)의 그날 그날을 보내며 여기 이르러 붓을 털고 세이암의 세 글자를 바위에 쓰던 그날,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 하면 분명히 그의 입가에 괴로운 웃음이 흘렀을 것이리라.

 

   孤雲子 이 세상이 얼마나 싫었관대
   山 속에 들고서도 귀를 다시 씻던 게오.
   오늘도 이 물에 귀 씻는 이 또 한 사람 지나노라.

   일없이 분주하여 켜켜이 앉은 먼지
   이 물에 씻어 흘려 山 밖으로 되보내고
   새같이 가뿐한 몸이 바위 끝에 앉았노라.

  흐르는 시냇물에 입 넣어 물을 풋고
   갓 벗어 등에 깔고 돌 베고 누웠나니
   세상아 나를 잊으라 나도 너를 잊었노라.

 

   사람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사람이다. 우화(羽化)도 못할 것이어니와, 도피란 것도 속찬(續撰)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 고상한 뜻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때로는 누구든지 이 둔세(遁世)의 심경을 스스로도 맛보는 것이며, 사람을 따라서, 시대를 따라서 의연히 이 길을 걷는 것도 꾸짖지 못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유방선(柳方善) [고려말~조선 초기의 학자. 1388~1443]이 유시(有詩)하되

 

   疑是昔時隱者居    아마도 여기는 옛날 은자가 살던 곳
   人或羽化仙仍空    사람은 신선되어 가고 산만이 남은 듯
   神仙有無未暇論    신선이 있고 없고야 논할 틈이 없지만
   只愛高士逃塵籠    그저 진세에서 도망한 고사가 좋아라

 

이라 하였다. 더러는 이러한 고사(高士)를 약자로 돌려 비웃을지도 모른다. 또한 약자 아님도 아니다. 그러나 강자라 하여 강함을 보이지 못할 때에는 물러나 약자가 되어 홀로 강함만 못한 것이다. 이들 중에 진실로 강한 자 누구라 하랴. ●●의 사람●點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택리지>“땅이 너무 깊고 막혀, 촌에는 망하여 온 유민들이 많고…”라 한 그대로 지리산 도처에 이러한 둔세고사(遁世高士)가 많았던 것이요, 또 그들을 통하여 그 개성과 그 시대의 사회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은(牧隱)도 일찍이지리산다선인석자 단률기회(智異山多仙人釋子 短律寄懷)”라 제(題)한 시에,

 

   頭流山最大 羽客豹皮茵  지리산이 가장 커서 신선이 호피방석 깔았네
   木未飛雙脚 雲間出半身  나무 끝에 두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만 내놓네
   人譏困三武 或說避孤秦  사람들은 삼무[삼무당을 통솔하던 무관]에게 곤란당했음을 알고 혹은 진나라를 피했다 말하네.
   豈乏幽棲地 風塵白髮新  어찌해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이라 하였다. 여기 시대를 통하여 세상을 유(遊)했던 이가 누구 누구인가. 그들이 다 무슨 까닭으로 존귀와 영광을 버리고서 산수와 풍로(風露)로 더불어 적요한 일생을 보냈던 것인지.

   이미 숨은 자임에 몸을 숨기고 뜻을 숨겼으니 후인이 그 마음을 알 길이 없거니와, 오늘 여기 귀 씻고 말없이 누운 자의 마음도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외로운 존재다. 홀로 왔다, 홀로 살다, 홀로 가버리는 것인가 보다.


 

35. 隱者와 毛人설화

 

   지리산이 이모저모로 이름난 산이어니와 청학동, 화개동, 신흥동으로 인하여는 둔세자(遁世者)의 피난처로 이름이 높은 산이요, 또 수많은 은자들 중에 신라대에는 고운(孤雲)으로 대표할 것이요, 이조에는 남명(南冥)으로 굴지(屈指)할 것이로되, 그들보다는 고려의 한유한(韓惟漢)이 본격적 은자라 할 것이다. 이름이 전해졌으니 그도 또한 참은자(隱者)가 못되었지만.

 

   고려조에 한 명사(名士)가 있어 이 산중에 은거하여 조행(操行)이 고결하고 인간사를 불섭(不涉)하므로 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일어나게 하였더니, 거절하며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지라 사자가 방 안으로 들어가보매 벽 위에 시 한 구를 썼으되,

 

   일편사래륜입동(一片絲來綸入洞)   임금의 한마디 말씀이 산골에 들려오니
   시지명자락인간(始知名字落人間)   비로소 내 이름 인간세상에 남아 있는 줄 알았네.
    
이라 하고 북창(北窓)을 열고 도피하여 버렸는데, 후인이 그것을 ‘한유한의 고사(故事)’라 말하거니와, 한유한이란 이는 송경(松京)에 세거(世居)하던 이로, 일찍부터 사진(仕進)[벼슬아치가 정해진 시각에 출근함]을 즐겨하지 않더니 때에 최충헌이 천정매관(擅政賣官)하는 것을 보고 미리 깨달아, 처자를 데리고 이 산으로 들어와 고절(苦節)을 청수(淸修)하며 외인과 더불어 사귀지 아니하매, 왕이 불러 사대비원록사(西大悲阮錄事)를 삼으려 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아니할뿐더러, 도리어 더 깊이 들어가서 돌아나오지 않은 이다.(고려열전 12권二)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역험의등대화봉(歷險疑登大華峯)    험한 것 겪으면서 태화봉 오르려 했더니
   귀도환겁석양홍(歸途還怯夕陽紅)    돌아올 길 붉은 저녁 볕 도리어 겁났네
   우인왕사유방외(偶因王事遊方外)    우연히 나랏일로 방외에 노니
   환괴당년양차공(還愧當年楊次公)    도리어 부끄럽고나 당년의 양차공

 

이라 한 것과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제반직상최고봉(?攀直上最高峯)    더위 잡고 치달려 최고봉에 올라
   회수진환십편홍(回首塵?十片紅)    머리 돌리니 티끌 세상 십편홍일세
   사의연하득유취(徙倚煙霞得幽趣)    연하에 기대니 그윽한 운치
   풍류불괴진양공(風流不愧晉羊公)    풍류는 진양공에 부끄럽잖네.

                    [진나라의 양호(羊祜)가 형주 자사로 있을 때,가벼운 갖옷, 느슨한 띠로 현산에서 놀았다 함]

이라 한 것이 아울러 유한의 고사에 대한 노래로서, 한 분은 그를 부끄러워 하였고, 한 분은 그를 부럽지 않게 본 말이로되 모두 다 한도인(韓道人)의 풍모를 노래한 것임에는 일치함을 본다.

 

   저 사람 진세를 피해 이 산으로 들더니만
   어이다 그 이름이 인간에 도로 떨어졌나
   숨으려 숨는 날이면 숨는 줄인들 알릴라고.

 

   아니 숨으면 모르거니와 숨는 날에는 숨는 줄도 조차 알려서 될 말이겠느냐. 진실로 이 산중에 후인이 알지 못하는 무명인들이 있었을 것이니, 그들이 참된 은자일 것이다.   또한 이 산은 은자의 피난소만이 아니요, 기인, 이인, 괴인의 서식처였다. 문헌상에는 모인(毛人)의 설화를 적은 것이 있으니, 이야말로 조선의 ‘타잔’이리라.
   <순오지>에 적힌 지리산 모인(毛人) 설화를 기술한다.

 

   지리산에 겨울이 오면 산승(山僧)이 아궁이 속에 불을 모아두는데, 매일 밤 어떤 자가 있어 불을 뒤적거려 꺼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승(寺僧)이 심히 괴로워하던 끝에 어느날 밤 가만히 엿보노라니, 나는 물건인데 크기는 사람만한 무엇이 절 문으로부터 부엌으로 들어와 역시 불장난을 하고 있다.
   거승(居僧)이 뛰쳐나와 잡으렸더니 그 물건은 후닥닥 날아가버리고 말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뒤에 거승은 한 꾀를 내어 절 문에다 그물을 치고,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올 수는 없이 만들어두고 은신하여 엿보노라니 그 물건이 또 날아들어가는지라, 그제는 영락없이 붙들어보니 그 모양은 면목지체(面目肢體)가 꼭 사람인데, 전신에 긴 털이 났다.

   “네가 사람이냐, 신선이냐? 대관절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이리로 들어오느냐?” 하고 물어보니, 그 물건은 분주히 혀를 놀려 지껄이기는 하되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득이 몇날 동안 가두어 두었다가 놓아주메, 바람을 박차고 절각 끝으로 날아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설화는 물론 支郡●●의 것이라 하려니와, 이 설화를 통하여서도 이 산에 신선가(神仙家)류의 출입 흔적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

   옛날 수대(隋代)의 ●● ●●●이 화산(華山)에서 사냥하다가 한 모녀(毛女)가 나무 끝을 새같이 날아다님을 붙들어 물어본즉, 그 모녀는 진시황의 궁녀로서 항우가 입궐하던 날에 몸을 화산 안으로 피하여 들어와, 배가 고프므로 송엽(松葉)을 먹고 지나더니 마침내 세월이 바뀌어도 죽지 아니하고 살아있다 하였는데, 진대(秦代)로부터 수대(隋代)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간을 살았던 것이어니와 지리산의 비모인(飛毛人)도 그러한 자이어서 삼한(三韓) 적에 들어와 송엽 먹고 영생하는 기물(奇物)이나 아니었던지. 그러나 그럴 리야 있으리라고.

 

   새같이 나는데 새도 아니라 하고
   짐승인 듯 사람인 듯 귀신은 분명 아니라네.
   저 僧이 잔나비를 보고 털난 사람이라 傳하더라.

 


36. 청허의 能仁遺基

 

   세이암 물소리에 길을 잊고 앉았다가, 도리어 무심한 짐꾼들의 재촉을 받아 일어섰다.
   신흥동 계곡을 오른편으로 끼고 길을 따라 돌아오르니 구비도 많으려니와, 구비마다 더하는 정취에 진색(塵索)의 생각이란 다시 또한 여지가 없다.
   눈으로 보는 경(景)도 경이려니와, 귀로 듣는 경도 경이려니와, 천석(泉石)의 비파소리를 입으로도 맛보고 가슴으로도 대어보는 때에 참된 경을 아는 것이다. 무엇인지 모르는 맛이 입 안으로 씹히고, 무어랄지 모를 부드러움이 가슴에 안겨짐을 깨달으면서 매미 소리를 데리고 나무다리를 건너서니, 좌우에 큰 洞●이 이수(二水)가 합류되는 곳을 만나는데, 여기까지가 신흥동이요, 이수(二水)는 산을 향하여 왼쪽 계곡이 저 벽소령으로부터 오는 의신동수(義神洞水)요, 오른쪽 계곡은 저 천왕봉으로부터 내려오는 능인동수(能仁洞水)다.
 
   의신동(義神洞)을 지금 지도에는 의신(義信)이라 적었고, 또 저기 육칠십호의 계촌(溪村)이 있어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의신동을 들여다보며 그대로 오른편 길을 잡아다녀 능인동(能仁洞)으로 들어간다. 산중에도 산이라더니 천왕봉에 대면 주먹만큼씩 하다 할 봉만(峰巒)들이 넘으면 또 나서고, 돌아나면 또 가로막아 웃자 하지도 못하겠고, 울자 하지도 못하겠다.
   깊고 괴롭고 어려운 이곳이 필경 능인암(能仁庵) 하나를 만들려 하였던가. 이 심곡 속에 저 능인암이 있던 것도 고선(古禪)과 함께 빈 터가 되고, 지금은 산촌인(山村人)이 밭을 갈았다. 이 밭 위에 섰던 능인암은 특히 저 청허선사의 주석처(駐錫處)라, 석양의 나무그늘 아래 잠깐 앉아 쉬노라니 고덕(古德)의 면모가 눈 앞에 나타난다.

   이조불교의 명맥을 그로 인하여 다시 이은 불교사상(上)의 은인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인이라 할 청허대사가 이 산으로 들어와 삭발하기는 15세 때였다. 그 후 잠깐 도솔산으로 갔다가 도로 이 산으로 돌아와 의신, 원통, 원적 등 제암(諸庵)으로 다니며 수삼년(數三年)을 지나기는 20세 때였다.
   용성(지금 남원) 역성촌을 지나다가 낮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발백비심백(髮白非心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금청일성계(今聽一聲鷄),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머리는 희었으되 마음은 늙지 않았다고 고인은 일찍이 말하였거니,
   이제 닭 우는 소리 한 번 들으매 장부의 할 일을 다했네.
 
이라 하고, 또 一偈● 짓되
 
   홀득자가저(忽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만천금보장(萬千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홀연히 나를 알고 보니 모든 일이 다만 이렇거니,
   만천금의 보장이 본래가 하나의 빈 종이일세.
 
라 한 때도 이 산의 시내를 마시고 있던 22세 때였다.
   그 후에 문득 유방(遊方)의 뜻을 일으켜 금강오대(金剛五臺)를 노답(路踏)하고, 향촌으로, 낙양으로 주유하다가 이 산으로 다시 온 때는 38세였다.
   38세로부터 41세까지 3년 동안은 저 내은적암(內隱寂庵)에서 지냈는데, 내은적의 유기(遺基)를 찾아보지 못함은 유감이나, 전하되 칠불암에서 반야봉으로 들어가는 심곡(深谷) 중의 어디라 한다.
   그가 지리산 속에서 오래 머물렀으니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려니와, 그러므로 절마다 제 절 사람으로 내세우는 것이 당연치 않은 듯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로되, 실로 이 지리산 속에서는 내은적 3년, 능인암 3년이 가장 유연(有緣)의 땅일 것이다. 
    그의 손으로 내은적신구모연문(內隱寂新構募緣文)개와모연문(盖瓦募緣文)을 짓기까지 하였거니와 3년을 거기서 지내며 자기의 염불생활을 노래로 표하였으되,
 
   유승오육배 축실오암전(有僧五六輩 築室吾庵前)
   신종즉동기 모고즉동면(晨鐘卽同起 暮鼓卽同眠)
   공급일간월 자차분청연(共汲一澗月 煮茶分靑烟)
   일일논하사 염불급참선(日日論何事 念佛及參禪)
 
   도반 대여섯이 내은암에 집을 지었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저녁 북소리 울리면 함께 자네.
   시냇물 속의 달을 함께 퍼다가 차를 달여 마시니 푸른 연기가 퍼지네.
   날마다 무슨 일 골똘히 하는가. 염불과 참선일세.
 
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솔바람과 구름을 더불어 환심(歡心)의 벗을 삼던 것을 다시 노래하되
 
   두류유일암 암명내은적(頭流有一庵 庵名內隱寂)
   산심수역심 유객난심적(山深水亦深 遊客難尋迹)
   동서각유대 물착심불착(東西各有臺 物窄心不窄)
   청허일주인 천지위막석(淸虛一主人 天地爲幕席)
   하일애송풍 와간운청백(夏日愛松風 臥看雲靑白)
 
   두류산에 암자 하나 있으니 이름은 내은적암이라네
   산 깊고 물 또한 깊은지라 떠도는 선객 찾아오기 어려워라
   동서로 각각 누대 있으니 재물 없다고 마음마저 가난하랴
   맑음과 비움의 상징 청허라는 주인공은 천지를 요 이불 삼아 유유자적 산다네
   여름날 소나무 밑에 누워 솔바람 즐기며 푸른 하늘 흰 구름 바라본다네
 
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지척(咫尺)이라 할 이 능인암에 와 43세까지 3년을 지내니, 이곳이 그가 지리산을 떠나가던 최후의 주처(住處)였다.
   그 후로는 다시 관동을 돌아다니다, 서산(묘향산)으로 들어가기는 45세 이후였으니, 대개 그의 80년 일생을 둘로 나누어보면 전반생은 지리산 수도요, 후반생은 묘향산 정관(靜觀)이었다.
   지리산 중에서도 그가 인생의 한 반(半) 나이를 지나며 능인의 진리를 체득하려던 이곳, 천봉이 방방(尨尨)하고 만수(萬水)가 냉랭(冷冷)한 중에 지리산 주석의 최후기를 보냈던 이곳에서, 나그네도 잠깐 머물러 쉬는 것이라 추모와 감회를 막을 길이 없다.

   더구나 전부(田婦) 두셋이 밭을 매고 있는 여기가 바로 거기라 하니 성괴변이(成壞變移)의 법(法)을 실물로 설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뜻있는 냥하기는 고덕(古德)의 유기가 말세의 절이 되는 것보다 오히려 산맹(山氓)의 주린 목을 위하여 감자밭이라도 되어줌이 옳을 것이니, 이 어찌 무상(無常)으로만 돌릴 일이냐. 이게 도로 능인의 참뜻이리라.
 
   禪窓에 지새던 별 밭머리에 夕陽일네.
   누비옷 쥐던 柱仗 치마 아래 호미로다.
   옮기고 바뀌는 법은 山中에도 있는가봐.
   변하고 다르다고 無常이라 하질마오.
   古德이 끼친 터에 末世僧이야 들일라구
   차라리 감자밭 되어 山氓의 배를 불림이니.
 
   능인암지의 몇 경전(傾田)을 지나서 다시 또 몇 고개를 넘고 산허리를 돌아 바른편으로는 깊은 계곡을 거느린 채 왼편 영상(嶺上)에 뾰족 우뚝 솟아오른 ‘선바위’를 쳐다보면서 산허릿길을 얼마나 올랐던지 잊어버렸던 운무가 또다시 몸 가까이 날려오기 시작하는데, 계곡 왼편으로 오목한 일경지(一傾地)를 얻어 수십호의 촌락이 생겼으니, 이것이 지도에는 대성(大成)이라 적은 대승동(大勝洞)이요, 우리가 오늘밤 성광(星光)과 월채(月彩)를 더불어 하룻밤 잠자리를 부탁할 곳이다.





 


작성일 : 05-12-27 20:52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11. 대성~음양수~세석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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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성 → 음양수 → 세석


 

37. 鬱林路와 陰陽泉
 


   제5일.
   大勝 - 細石坪(10킬로미터)
   細石坪 - 天王峰(6킬로미터)
   금일 行程 16킬로미터(40리)

    

      *          *          *

    대승 촌가의 마당에서 멍석을 자리하고 풍로(風露)를 맞으며 하룻밤 새는 동안에 경경(耿耿)한 별들은 자취를 감추고, 지새는 새벽빛이 가슴 안으로 물밀듯 닥쳐드는 8월 2일.
   대승동 계곡을 타고 오른다. 동천(洞天)이 온자(溫藉)하다. 침착하고 단아한 산용수색(山容水色)이 소박하고도 정숙한 처녀를 대함과 같아, 조심스럽고 경건한 마음이 절로 일어 자기의 발걸음마저 얌전히 놓여진다.

   물소리가 어제 달리 제법 차다. 눈앞에 불리는 산(山)갈대와 잡초들도 갑자기 쓸쓸해 보인다. 옳지, 오늘이 음력으로 7월 7석이라 가을이 이 동곡을 찾아 들었나 보다.
   잔디풀이 누렇게 물들고, 마른 풀잎이 바람결에 부시대는 소리를 듣는 깊은 가을보다도, 이제 바야흐로 가을이 오려 하여 풀잎마다 푸른 빛 속에 공포와 애수의 빛이 남몰래 섞여들고 눈물 같은 이슬을 머금은 양 햇빛과 바람에 청춘의 마지막 제사를 드리는 듯, 혹은 고개를 숙이고 혹은 허리를 굽히는 광경이 오히려 더 애닯은 현상이다.

 

   바람에 불리는 잡초 물소리도 여물구나
   막대를 문득 세워 먼 하늘 바라보니
   하늘도 하룻밤 사이 두어자(尺)나 높은가봐.

 

   벌써 가을인가 하고 생각함에 거의 습관적인 감상이 공연히 마음을 흔들런다. 발걸음은 가는 길이 있는데, 마음은 갑자기 지향(指向)이 없어진다.  

   스스로 이 값싼 생각을 막으려 하여 ‘이는 가을이 아니라 산이 높아 그런 게다’ 하고 짐짓 장부의 웃음을 지으면서 외따로 있는 산막 한 채를 만나자 시내를 건너 바른편 숲속으로 들어간다.

   산이 깊은 것, 골이 긴 것을 여기 와서야 알겠다. 얼마나 깊고, 얼마나 길더냐고? 깊고 긴 것을 말할 수나 있다 하면 깊고 길단 말이 헛소리게요. 울창한 수림 속에 끝없이 끝없이 오르는 길이다.

   천지의 ‘고요함’은 여기 이 골이 도맡은 듯하여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태고의 적막 속에 꿈지락거리는 채로 암석같이 ‘멍’하게 하고, 만겁(萬劫)의 한정(閑靜) 속에 움직이는 채로 수목같이 ‘뚱’하게 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멍’‘뚱’함은 정신과 혼백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마음의 거룩한 침정(沈靜)으로부터 나타나는 표정인 것이니, 그러므로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다가 얼마쯤 지난 다음에는 도리어 든든한 생각조차 일어난다.

 

   올려다 보아도 장숙(狀肅)한 삼림 중에 한 줄기 세로(細路)뿐이요, 돌이켜 보아도 수림 사이로 누벼놓은 한 줄기 좁은 길뿐이라 좌우도 없고 상하도 없고 다만 전후라 할 것이 겨우 인식 속에 들어올 따름이다.
   이러한 길 일마장(一馬場)이 흥청거리는 수석로(水石路)의 십리 맞잡이로 어렵지마는, 또박또박 잡념없이 가기만 하는 길이라 난험한 채로 10리란 게 얼른 뒤로 물러나감이, 지나놓고 보매 시원도 하고 섭섭도 하다.

   군데군데 나무 밑 풀 속에 곰의 똥, 돼지의 똥들이 혹은 열흘 전에 지나간 것, 혹은 간밤에 지난 듯한 것들을 보면서 중턱마루에 올라서니 하늘을 비로소 우르겠는데, 하늘 아래 구름 밖에 하늘인 듯 구름인 듯한 수평선이 보임은 미묘한 선화(線畵)의 섬세미(纖細美) 앞에 선 듯하다.

   아무 데서고 망해(望海)의 경관이란 장활한 것이 통칙인데, 여기서 바라보는 바다는 가인(佳人)의 그린 눈썹을 보는 듯한 것이 처음 보는 특색이다.

   길은 다시 왼쪽으로 꺾이어 그대로 또 수목 속으로 몰아넣는다. 지금까지 올라온 심원한 임로는 내가 스스로 오자고 온 길이어니와, 여기서부터 다시 들어가는 수림 속의 잡초길은 분명히 끌려가는 길인 듯함이 벌써 정오도 되기 전에 그만큼 몸이 피로해진 것을 증거하는 것이리라.
   지리산이 육산(肉山)이요, 겹산이요, 험한 산이매 사람을 쉽게 지나보내지 아니할 줄은 처음부터 안 것이로되, “이거야 너무하지 않소” 하는 소리가 이 입 저 입에서 연달아 호소된다.

 

   그러나 산공(山公)도 이 못난이의 호소를 가엾다 함인지 얼마 아니하여 수림을 드뭇드뭇 틔우면서 이 높은 산 위에 어디에서인지 물소리를 마중보냄은 분명히 어디 무슨 영천(靈泉)의 성구(聖區)가 있음이겠다. 어리둥절한 채로 눈을 귀 따라 급히 힘두르매 길 왼편에 큰 바위가 솟고 암극(岩隙) 사이로서 새어 떨어져나오는 석천(石泉)이 대번에 지금까지의 모든 난고를 돈망(頓忘)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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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소위 ‘음양수(陰陽水)’이다. 두 갈래의 천류(泉流)가 있기 때문이어니와, 때때로 자식을 원하는 남녀들이 여기에 분집(?集)하여 이 물을 먹고 하늘에 빌어 득자(得子)의 기쁨을 얻는다 한다.

 

   이 물을 마십시다  하늘에 비옵시다
   내 마음 이어나갈  뒷사람을 얻읍시다
   한 잔은 못 미덥구려  실컷 量껏 마십시다.


 

38. 대표적 累石祭壇
 
   이 음양천이라 함은 벌써 그 이름부터가 민간신앙의 기도장임을 정(定)함이려니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음양천 바위 뒤에 돌로 쌓은 제단이 꽤 대규모적이요, 방금도 한 노파와 장정 두셋이 말로는 병을 빙탁(憑托)하나 무슨 소원을 기도하러 왔는지 밥을 지어 먹으며 머물고 있음을 본다. 민신(民信)을 실증하는 일단이다.
 
   <택리지>“온 산에 잡귀신을 모신 신당이 많아서, 봄 가을마다 사방의 무당들이 모여들어 기도한다”라 하였거니와, 특히 이 산중에 민간신앙의 제장(祭場)이 가장 많고, 또 그 제전(祭典)이 속행하고 있음은, 그만큼 이 산이 영산이라 함을 증좌(證左)함이요, 또 이 산이 민간신앙의 전통을 얼른 버리지 못함으로써다.
   제정이 일치하였던 상고시대에 있어서는 또한 별개문제이겠지만은 고려대에서부터는 이 산을 제장(祭場)으로 하여 미신, 잡신의 민속이 성행하였던 것이므로, 당시의 불교도 이에 감염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고려 중엽이 가까운 때에 특히 불교에 있어서도 망신(妄信)의 유행이 현저한 바 있었다.
   숙종왕대에 도선의 술(術)을 전한다는 김위제의 주청으로 도(都)를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천(遷)하자 한 것이며, 광명사 승려 광기가 음양서를 위조하였다가 장류(杖流)된 사실과, 평주의 요승 각진이 음양을 망신하여 중인을 현혹하다가 곡주로 귀양간 일이 다 당시의 교계를 증거하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유망(流亡)이 전체적으로 한심(寒心)한 바 있었으니, <동국통감> 19권에, “지금 여러 도(道)ㆍ주(州)ㆍ군(郡)의 수령으로 청렴하며 백성을 근심하고 구휼하는 자는 열에 하나 둘도 없고, 이익을 부러워하고 명예를 구하여 대체(大體)를 손상하며, 뇌물을 좋아하고 자기 이익만을 꾀하며 백성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유리(流離)하여 도망하는 백성이 잇달아 열 집에 아홉은 비었다고 하니, 짐은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라 한 조서(詔書)에 의하여도 짐작할 것이다.

 

   예종왕도 즉위하여 불사(佛事)를 남설(濫設)하고, 승 ●眞에 명하여 기우(祈雨)케 하는 등, 관정(官廷)의 불교는 선도(禪道)의 정신과는 전연 떠나서, 오직 자복(資福)과 용재(龍災)로만 본령을 삼았던 것이다.
   인종도 역시 선왕의 예를 준하여 ●僧顔煩하고 전후반승(前後飯僧) 3만에 범 13회에 거(巨)하였으며, 요망한 무리가 승발(乘撥)하여 간악을 감행하고, 소위 아타파구신도량(阿陀波拘神道場)을 설(設)하느니, 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을 설하느니 한 것이 혹설(酷說)의 극한 자인 채로 요승 묘청의 말을 좇음이요, 마침내 왕신(王臣)의 미신과 교법의 문란 등은 국가를 위경에 빠뜨려버렸던 것이다.

 

   당시 불교도의 사상이 저열하였던 자취를 이곳 지리산에서 찾을진댄, <동문선> 64권, <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社記)>“사(社)의 주장은 이름이 진억(津億)이며 세속의 성은 이씨(李氏)다.……지리산오대(五臺)라는 허물어진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대사가 이 말을 듣고 용감히 갔으며, 가서는 희망하던 곳을 얻어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터를 닦았다.……불당과 거처방이 깨끗이 정돈되어……사(社)에 모인 모든 사람은……함께 서방정토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였다.…… 모든 사(社)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그가 생존했거나 사망하였거나 불문하고 나무쪽에다 이름을 새겨두었다. 15일마다 점찰업보경에서 말한 바에 의하여, 나무쪽을 꺼내어 바퀴에 던져서 선악의 보응을 점쳤다. 점쳐서 나온 대로 선과 악을 두 개의 상자에 나누어 놓고 그 악보(惡報)에 빠진 사람은 회원들이 그를 위하여 대신 참회하고 다시 바퀴에 던져서 선보(善報)를 얻게 한 후 그만둔다.……대사는 곧 수정(水精) 한 개를 찾아내어 무량수 불상 앞에 걸어서 밝은 믿음을 표시하고, 그것으로 사(社)의 이름을 지었다.…”라 한 것을 보면 당시 정토왕생의 사상이 점찰선악(占察善惡)의 망신(妄信)과 조화하여 유행한 것을 볼 것이니, 불교가 타락하였던 자취를 이로써도 볼 것이어니와, 이것이 이 산중의 다른 민간신앙과 아울러 한창 병행하여 승인(僧人)의 타락을 조장하였던 한 시대적 특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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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쌓은 누석제단(累石祭壇)이 신앙상에 있어서 어떤 논란을 받든지 그는 여하간에, 미상불 위치의 청정함과 명랑함이 산중에서도 손꼽을 절승처인 것에는 그들의 눈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천작(天作)의 석대 위에 서서 바라보매 오른편으로는 대승(大勝)의 긴 계곡이 봉만(峰巒) 사이로 꼬리를 감추었는데, 그 너머 굽이쳐 돌아나간 섬진강의 흰 선이 거의 눈부신 경색이요, ●●한 봉수(峰岫)에 ●●를 곁들여서 ●意와 시상(詩想)이 거기 서리어 있음을 누구나 보게 하고, 왼편으로는 멀리 광양, 하동, 여수의 ●面이 하늘을 잡아당겨 손목을 마주잡았음이 장엄코 호탕하여 삼촌흉걸(三寸胸傑)이 천지로 더불어 같이 넓어지게 함을 깨닫겠다.

 

   몸을 돌려 배경을 바라보니 고산지대의 오리나무, 씽갈나무들이 청백상자(靑白相資)하여 얽히고 설킨 채로 만고의 뜻을 거기 머금었음이 어디 하나 꾸지람할 데 없는 특절(特絶)한 조망대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곳에서 하늘에 빌면 제 아무리 어려운 소원을 가져 오더라도 이루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나지 않는 바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에 있어서는 기도의 도량 선택이란 것이 어떻게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겠다.
   또 여기 이것은 그 위치의 빼어남으로나, 석단의 규모적인 것으로나, 기도가 현행되는 점으로나, ●場 되기에 적응(適應)한 석천이 함께 있음으로나, 누석제단으로는 산중의 대표자로 볼 것이다.

 


39. 細石坪과 通天門
 
   노방(路傍) 석단 위의 누석제단 뒤로 돌아오르니, 이제부터는 광막한 고산야원(高山野原)이다.
   바른편으로 바라다보이는 원두(原頭)가 이른바 세석평(細石坪)인데, 길은 왼쪽으로 돌아올라야 한다.
   사람이 가니 길이지, 길은 없는 수림 속으로 헤치고 간다. 어디서 흘러와 고였는지 질퍽거리는 누수(漏水)를 그대로 밟으며 무릎을 묻는 잡초 속으로 지나간다.

   지금 여기 이 고원에는 새소리도 없고, 짐승도 없고, 다만 구름과 햇빛과 키 작은 마른 나무들과 우거진 풀과 그리고 말없이 행진하는 우리들뿐이요, 다른 무엇이 또 있다 하면 영원하고 위대한 적막이 고원 위에 무겁게 깔렸을 따름이다.
   침통한 철학이 여기 이 고원에 감초렸건만 이를 해오(解悟)하는 자도 없고, 해오하려는 자도 없이 영원한 불가해의 철학 그대로 이 고원에 바람이 불고, 잡초가 흔들리고, 나무등걸이 썩은 것이다.
   나무란 나무는 썩고 마르지 아니한 것이 없어 모두가 녹각(鹿角) 모양으로 넘어진 양 백골(白骨)을 내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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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석평 전경/사진:<유랑자>님

 

   이 일대를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 부르는데 ‘평’은 물론 ‘’의 와오(訛誤)일 것이요, ‘전’은 ‘坪’을 다시 한번 더 역(譯)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석평(細石坪)이라 쓴 것이 옳은 것이려니와, ‘세석’이란 것은 지금 속(俗)이 ‘잔돌밭’이라 하니 세석은 분명히 세석이겠지마는 실제에 있어서 ‘잔돌’이라고는 한 덩이도 없으니 그 원뜻이 자못 의심스럽다.

   오히려 잔돌 대신 산청, 함양 군경(郡境)의 등척이로 나가며 키 큰 바위들이 서 있음을 보아 ‘선돌’의 ‘서’ 음이 ‘세(細)’로 역전(譯轉)하고, 그것이 다시 ‘잔돌’로 재역(再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등산의 ‘서석(瑞石)’이라는 ‘서’와 동일한 택자(擇字)로 보아 일종의 입석문화의 유적으로도 해석하여 보았으나, 그 역시 위태한 해석법이기로, 그 명칭에 대하여는 의혹만을 품고 지날 따름이다.

 

   여기가 벌써 1682. 얼마 남지 아니한 최고봉 ‘천왕’이 저기 보인다. 성자(聖姿)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절을 드린다.
   세석평은 제 자신이 적막한 들판이라 제 자신의 경치도 남에게 뒤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여기서 천왕을 정면으로 똑바로 가까이 볼 수 있기에 세석평의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몸을 다시 돌이켜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내려다볼 때, 옳지, 세석평의 진실한 값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천왕 상봉이 흘러내려 기관(奇觀), 장관(壯觀), 웅관(雄觀), 성관(盛觀)의 지리영산을 만들기 위하여 그 호걸찬 기상을 여기에 한 번 축적하였다가, 한 번 호령으로 크고 적고 넓고 깊은 온갖 봉수동곡(峰岫洞谷)을 삐쳐내린 그 저기적(貯氣的)인 곳에 이곳의 위대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겠다.
   천왕의 모든 명령을 이 세석평이 맡아 전하고, 천왕께 사뢰는 모든 탄원도 이 세석평이 대언(代言)하는 곳이라 하겠다.

 

   여기서 다시 천왕봉을 향하여 왼쪽길로 꺾여 내린다. 물론 지금 내려가는 길은 마지막으로 채어오르려는 준비인 것이다.
   촉도(蜀道)의 어려움이 얼마나 한지 그것은 우리가 모르거니와, 고목(枯木) 사이로, 잡초 사이로 흩어진 돌 틈으로, 산중의 가장 난험한 길을 만난 것이다.
   열 걸음에 한 언덕, 다섯 걸음에 한 구비라, 앞선 이 머리 위로 오르는가 하면, 고대 뒤선 이 발 밑으로 내가 깔리는 듯하는 유동적인 길이다.
   세석평에서 바라볼 때 뛰어오름직하던 천왕성봉이 도루 가까워질수록 보이지도 않고 멀어만 간다.

 

   침엽수의 긴밀한 속을 지나 길 오른편에 큰 바위가 제대로 한 봉을 이룬 곳으로 올랐다가, 잠시 쉬고 다시 내려, 바쁜 마음을 못 이기는 초조한 걸음으로 달리듯이 오르니 중간에 천성(天成)의 석문(石門)이 있어 ‘통천문’이라 제각(題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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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봉 정상까지 6백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의 기쁨은 이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통천문. 누가 명명하였는지는 모르나, 득의(得意)한 이름이라 하겠다.
   이 길로 들어가면 하늘로 간다 함이다. 천당으로 간다 함이다. 천왕의 품 속으로 간다 함이다.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낙원으로 간다 함이다.

 

   천당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하다 이르더라
   천왕 낙원이 고대 여기 있다 하네
   통천문 어려운 길도 달게 여겨 지나노라.

   의 깊은 사랑 함부로 얻을라구
   에덴의 큰 행복을 쉽게야 누릴라구
   險關이 百이요 千이라도 넘고넘어 가오리다.

 


작성일 : 05-12-27 21:05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12. 천왕봉에 서다
 글쓴이 : 산돌림

     
조회 : 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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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천왕봉에 서다


 

40. 만세! 天王聖峰
 

   통천문을 넘어서매 촉촉(矗矗)한 암석이 상봉을 이루었고, 땅딸이 철쭉들이 떨기를 지었다. 강한 바람 앞에 자라지 못한 탓이련만은, 강한 바람 앞에서도 제 생명을 향유한 것이 어떻게나 느꺼운 일이겠느냐. 산 밑의 온대(溫帶)에서 백 척의 키를 자랑하는 것보다, 산 위의 한대(寒帶)에서 몇 촌의 생명을 제대로 지닌 자랑이 더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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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 사진:<유랑자>님

 

  이륙의 유산기(遊山記)에,
   “이 산은, 아래에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쪽에는 온통 홰나무뿐이다. 홰나무숲 위쪽에는 삼나무, 회나무 숲인데, 절반이나 말라죽어 푸른   나무와 흰 고사목이 사이사이에 섞여 있다. 멀리서 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단지 철쭉뿐인데, 키가 한 자도 안된다.”라 한 그대로, 점차 달라져 올라오는 식물의 분포 속에서도 나는 느꺼운 생각을 금하지 못하였다.

 

   한 걸음 한 한 걸음이 필경은 시킨 이 없는 만세를 높이 부르는 1915미터의 최고봉두(最高峰頭)에 완연히 서고 말았다.
   만세, 만세! 지리산 천왕봉 만세. 우주 대자연 만세를 고함껏 높이 외친다.
   장엄하다는 말, 거룩하다는 말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여기 와 천왕봉 위에 서보기 전에, 어디서 조그마한 것을 보고 장엄이라 외치고, 하찮고 초라한 것을 보고 거룩하다 일컫던 것이 오늘 이 자리에 와서는 어떻게나 죄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진실로 장엄하구나. 천왕봉 위가 장엄하구나. 진실로 거룩하오이다. 천왕봉 위가 거룩하오이다.

   나는 이제 당당한 대장부의 풍모를 가졌나니. 누가 이 세상에 나와 더불어 위엄을 다툴 자며, 행복을 겨룰 자이냐. 이제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가장 우뚝한 자요, 가장 영광스러운 자임을 어찌 하랴.

   우주의 대원광(大圓光)에 대자애(大慈愛), 대생명과 함께 나의 위대함을 누를 자가 누구냐. 누가 인생을 무상하다 말하였으며, 누가 인생을 적은 것이라 이르더냐.

   주회(周回) 8백리의 지리산 천봉만학이 나볏이 모두 엎드려 발아래 경건한 예배를 바치고, 팔황(八荒)의 끝없는 운물(雲物)이 오늘은 모두 다 내 것 된 것이 얼마나 장쾌하냐.
   성현(成俔)이 김종직의 <두류록> 뒤에 시(詩)를 제(題)한 중에,

 

   身登最高頂              몸이 절정에 올라가니           
   群岫如磨鐕              뭇 봉우리가 못을 갈아 꽂은 듯      
   手捫星漢去尺五     손으로 별 만지니 상거가 한 자 가웃     
   天風吹髮寒鬖鬖     천풍이 머리를 흩날려 써늘도 해라       
   扶桑若木是何許     부상과 약목이 어디쯤인고           
   滄溟萬里浮晴嵐     창명 만리에 노을만 떴네        

 

라 한 노래의 실경(實景)을 앞에 놓고야 어느 누가 시인이 아닐 것이냐.

 

   지금 나는 천왕봉 머리에 섰노라
   세상에 가장 높은 자 되어 천왕봉 머리에 섰노라
   내가 오르고 올라 구름 안개를 지나고
   여기 이 하늘까지 올라온 지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속에 감초인 모든 것
   적은 모래알과 부스러진 나무껍질까지라도
   나를 위하여 있는 것임을 나는 여기 와 비로소 알았노라

   세상에 높다는 자들아 가멸하다 복스럽다 하는 자들아
   네 행복이 그것뿐 아니어늘 티끌보다도 더 적고 천한 것으로
   어리석은 만족을 느끼더냐

   세상에 약하다는 자들아 가난하다 불행하다 하는 자들아
   하늘이 따로 네게 불행을 준 적이 없었거늘
   어찌하여 스스로 네 행복을 버리고
   눈물과 괴로움으로 그 짧은 일생을 보내려느냐

   창생들아 근심하지 말라 이제 너희 울음을 그치라
   너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싸움과 슬픔의 테를 지금 곧 벗어나라
   인생은 결코 슬픈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로다
   이제 저 하늘 밖으로 꺼져가는 저녁해
   붉고 누르고 푸른  오색 영롱한 장엄한 빛이
   위대한 즐거움과 영광스런 찬송가를
   내게 전하여 가로되-
   인생은 싸움이라 인생은 슬픔이라
   인생은 잠깐이라  모두 다 틀린 말이
   인생도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여기 복된 자니라.


 

41. 聖母石像의 遺存
 
   내가 받은 천왕봉 위의 감격은 인생의 소극적 암흑면(暗黑面)에 대한 증오와 회한과 비애가 아니고, 대자연과 함께 영원하고 광명하고 즐거운 인생임을 독송(讀頌)한 것이다. 지금 저 신비한 낙조의 경(景)과 상량(爽凉)한 산상의 장풍(長風)이 내 얼굴에 정열과 환희의 불을 질러 사해의 망무제한 벽공(碧空) 위로, 내 마음은 해방과 자유와 여의(如意)의 빛나는 날개를 펼치고 원무(圓舞)의 즐거운 비상을 시작한다.

 

   여기에 무슨 권리가 있고, 무슨 의무가 있고, 무슨 억압이 있고, 무슨 굴욕이 있을 것이냐. 선이란 것도 저 하계에 있는 구린내나는 노리개요, 악이란 것도 저 하계에 있는 비린내나는 장난감이니, 여기 이 끝없이 아름다울 뿐인 벽허(碧虛)에야, 선이라 지목할 아무것도 없고, 악이라고는 관념부터 생겨 있지 아니하다.

   얼마나 엄숙하냐. 얼마나 명쾌하냐. 자연과 인생이 본시 차별될 것도 아니요, 분리될 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 분명히 자연과 인생이 일원적(一元的)임을 깨닫는다. 결코  둘이 아니요 하나이어서, 그 내재(內在)와 외표(外表)의 모든 성상(性狀)과 호흡이 조금도 다르지 아니한 것임을 믿는 것이다.
   자연은 아름다운데 인생은 추하다 하고, 자연은 영원하되 인생은 순간이라 하였던 과거의 해석과 모든 설법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다 도로(徒勞)이었던 것을 웃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간의 모든 어리석은 해석과 그릇된 설법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 산상(山上)으로 올라와, 비로소 자기를 구제받고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게 된 것이니, 여기 이 봉정에 세워놓은 성모사(聖母祠)의 유존(遺存)이야말로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성모사는 밖에 석원(石垣)을 두르고, 그 속에 목조로 조그마한 집을 짓고 다시 그 속에 청석으로 성모의 상을 만들어 주벽(主壁)에 모시었다.

   이것은 조선의 여신숭배에 대한 유일한 유존으로서 저 신라역사상의 선도성모와 그 의의를 같이 하는 민신민속상의 중대한 참고가 됨은 물론이어니와, 이 지리산에서 천왕봉, 반야봉, 노고봉(길상봉) 하는 모든 명칭이 결국은 ‘성모’라는 이름의 이칭(異稱), 역칭(譯稱)에 불과하는 것임과, 또 그것이 죄다 여성으로 표현되어 있음에 깊은 주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창산(成昌山)의 <동국명산기>에, “天王之頂有聖母祠, 聖母乃石像而塗粉黛, 俗稱之母麻耶釋迦夫人”이라 하여 이 성모의 상을 석가여래의 모친 마야부인의 상이라 하는 속전(俗傳)을 적어 두었고,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에는, “聖母像則高麗太祖威肅王妃也”라 하였다.
   이와 같이 성모의 상을, 혹은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 일컫고, 혹은 고려태조의 위숙왕비라고도 일컬었으나, 이는 하등의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는 오설(誤說)임은 재론할 여지도 없다.

   이는 물론 조선 고유신앙상의 천모(天母), 천왕(天王), 성모(聖母)일 것이자, 성내(城內) 무격(巫覡)의 근본영장(根本靈場)이자 총본영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에는 이 천왕봉 바로 밑에 향적사(香積寺)라는 절이 있어, 특히 이 성모상의 향화를 위하여 세웠던 것이어니와, 이 성모사에 대한 민간의 숭신(崇信)은 자못 소홀치 않았으며, 지금도 사우와 성상이 유존하여 토인(土人)의 귀의를 받고 있을 뿐더러, 원근 무격의 순례도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어떻게나 전통의 힘이 큰 것을 알 것이다.

 

   <여람>에, “천왕봉 꼭대기에 성모상이 있는데, 이마에 칼 흔적이 있다. 속설에는,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격파당해서 궁하게 되자, 천왕이 도우지 않은 탓이라 하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찍고 갔다.’ 한다.”라 한 것은 물론 조선 민간의 전설이라 보려니와, 천왕성모가 그대로 곧 호국여신이었던 것임도 분명히 설명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 선민(先民)이 여기 이 천왕봉상의 성지에 사우를 짓고, 개인과 국가의 행복을 기원하던 그것도, 실상은 인생으로 하여금 천지대자연과 같이 영원하고 광명하고 즐거운 자가 되게 해달라는 열망으로 인하여 출발된 것이었다.

   모든 종교와 신앙이란 것을 해부한다면 필경은 ‘자연즉인생, 인생즉자연’이라는 일점(一點)에 그 최고최종의 목표가 있고, 거기까지 이르려는 노력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즐거운 인생을 누릴까, 어떻게 하면 영원하고 광명한 인생을 누릴까 하는 욕망과 이상이 이같이 신성한 대자연을 대할 때에 더한층 강렬하게 타오르고, 그 희원(希願)이 성모라는 한 여신에게 귀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났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성모사라는 것은 선민의 신앙상 통속인 것임이 물론인 채로 나는 오히려 그 학적(學的)인 해석과 관찰에 급급하지 아니하고 인생의 본질, 인생의 이상이 “인생도 하나의 자연”이라는 것임과, 또 거기에 도달하여 최고의 행복을 누리려 함에 있음을 생각하는 눈으로 여기에 전개되어 있는 화장찰해(華藏刹海)의 대자연 및 인생고민의 피촉(披囑)으로 유존한 이 성모사를 아울러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구름 나는 산상의 황혼 속에 홀로 서서 ‘인생즉자연 자연즉인생’이란 말을 몇 번이나 뇌인 것이다.

 


42. 頂上의 七夕 一夜

   천왕봉 위에 해도 이미 저물었다. 청명한 조망도 이제 어둠 속에 감추이고, 바람은 점점 차워온다. 일행은 준비하였던 외투를 꺼내입고 군데군데 자기의 천막을 친다.
   정상에 산막을 지어둔 것도 있기는 하나 운치도 이만 못하려니와, 그 산막 속에는 불을 피우고 우리들을 따라온 인부들이 거기서 지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3~4인씩이 작대(作隊)하여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천막을 치는 것이다.

   장작불을 지핀다. 화염은 하늘로 피어오른다. 소 곰국으로 몸을 덥히긴 하였으나 늦가을같이 점점 낮아져가는 기온에 그냥으로는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이 장엄한 산상의 어두워가는 저녁을 실컷 즐기려고 떨리는 몸을 그대로 암각(岩角) 위에서 세워 아득한 하늘 끝을 멀리 바라보며, 아직은 천막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아니하다.
 
   “일령근천작고조(一嶺近天作高祖), 천봉렬지위아손(千峰列地爲兒孫)”[우뚝한 한 봉우리는 하늘에 가까워 고조가 되고 천봉은 땅에 줄지어 서서 손자아이 되누나]이라 한 휴정의 천왕봉 시도 조망할 수 있는 시간에 개론(開論)할 이야기요, 이제 어둠이 천지를 덮은 지금은 높은 곳도 없고 낮은 곳도 없고, 먼 곳은 어디며 가까운 곳은 어디냐.
   홍무(紅霧)와 벽해(碧海)가 서로 머금어 찬란하던 경관도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다만 어두운 빛만이 천지에 가득차 흰 것도 없고 붉은 것도 없고 누르고 푸르고가 다 한빛 속에 동화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느 것이 하늘인지, 땅인지, 바다인지조차 알 길이 없고, 그뿐이겠느냐. 사람인지, 바위인지, 나무인지도 분간할 길이 없고, 오직 방위도 없이 불어 지나는 바람 속에 서서, 창조 이전에 나 홀로 신과 같이 생겨나 있는 듯할 따름이다.
   혼돈이랄까 홍몽(鴻濛)이랄까. 다만 아득한 속에서 마침내 자신마저도 있는지 없는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을 이윽고야 깨달았다.

 

   일행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자기들의 천막 속으로 들어가 누웠나보다. 어둠 속이나마 한 사람도 보이지를 아니한다. 나는 지팡이를 끌고 서너 곳 천막을 돌았다.
   천막 속에서는 조용히 이야기하는 소리, 또 혹은 벌써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한 밤, 이러한 곳에서까지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저들은 얼마나 행복된 사람일까. 무슨 이야기인지 소곤거리는 저 분들 틈에 나도 한 몫 끼어나볼까.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시간은 고상하다. 나같은 사람이 누리기에는 너무나 정결하고 엄숙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만큼 너무나 고적하지 아니하냐. 어둠 속에 보는 이는 아무도 없건만은, 옷깃을 단정히 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러나 고적(孤寂)이 나를 사로잡아 이 시간의 제단 앞에 향화로 쓰려 하지 아니하느냐.
   싸늘한 산상의 밤바람에 구름은 흩어져 날아내리고, 보아라. 신비하게도 바다 같은 하늘에 떨어진 조각달이 내 고적을 위로하려 나타나는 첫 순간, 나는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 놀란 듯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도 7월. 7월에도 칠석이라. 오늘밤을 이 최고의 산정에서 지내는 우리 행복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만 할 것이랴. 은하를 건너 우랑(牛郞) 직낭(織娘)이 만나는 로맨틱한 오늘밤. 그들은 1년 1도(度)에 한 번씩 만나는지라 이 밤의 애닲음과 즐거움이 얼마나 크랴마는, 나는 여기 이 산상의 자연낭자(自然娘子)와 품고 지냄이 일생에 오늘밤뿐일 것을 생각하면 내 즐거움과 애닲음을 어찌 저 우녀(牛女)의 옅은 정으로야 비길 것이냐.
   가장 거룩하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자비하고, 가장 신비하고, 내가 아는 모든 최고의 찬사를 바쳐도 표현하기 어려운 이 ‘자연 아씨’의 불가칭설(不可稱說)의 품 속에 안겨 내 과거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하고, 내 앞날의 생명을 고작 영광스럽게, 고작 행복스럽게 살려갈 수 있도록 약속받으려 하는 것이다.
 
   별빛은 봉마다 흩어지고   조각달 그림자 그윽한데
   오늘밤 산상의 은하(銀河)가에   님 더불어 같이 누워
   지난 날 상한 자취를   씻는 이 마음 아옵소서.
   님과 만남이 일생에 한 번   오늘밤뿐이기로
   찬바람 장막 속에   뜬눈으로 새렵니다.
   앞날에 내 외로운 생명   이 기억으로 살 것이오매.



 
작성일 : 05-12-27 21:43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13. 백무동-마천-실상사
 글쓴이 : 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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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백무동 → 마천 → 실상사

 

  

43. 하산하는 일백리

 

   천왕봉 - 백무동(9km)

   백무동 - 마천(6km)

   마천 - 실상사(3km)

   실상사 - 남원(36km)

   금일 행정 : 보행 15km(40리), 차행 40km(1백리)

 

* * *

 

   8월 3일. 천왕봉 위의 신선한 아침. 우리는 어제밤으로써 최고봉 등척과 산중 최후의 노영(露營)까지 완전히 마치고, 오늘은 단걸음에 하산하여 남원까지 들어가기로 한다.

   여기서 일행 중 몇 분은 우리와 방향 다른 벽송사로 내려간다 하며 몇 날의 동도(同途) 인연을 따뜻한 악수로써 나누려 한다. 기약 없이 나뉘는 친구들이다. 나는 본시 소정(疎情)한 사람이라 그들의 존명을 기억하지 못하나, 그들 중에 태극선을 들고 봇짐지고 말없이 다니던 봉두(蓬頭)의 독학자(篤學者) 한 분은 손목을 나누고도 잊어지지 아니한다.

 

   고려의 정명국사가 지리산 우인(友人)을 보내면서

 

   聞君直入千峰裏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知在煙霞第幾重    몇 겹의 연기와 노을속에 있겠네.

   流水落花迷去路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他年何處訪高?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라 한 노래가 머리에 떠오른다.

   마음으로 몇 번이나 “잘 가오” 인사하며 우리는 어제 올라오던 통천문을 다시 나가 소허(小許)[작음. 협소함]에 우하(右下)하는 길로 거의 수직을 타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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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쯤 좁은 골짜기를 내리노라니 길 오른편에 한마당 빈 자리를 만나는데, 이것은 제석당(帝釋堂) ●墟이다. 물론 이는 천왕봉의 성모사와 꼭같은 제장(祭場)이었을 것으로, 여기에는 천수(泉水)의 편의가 있음을 이용한 것일 따름이겠다. 여기서 우리 선민(先民)이 그들의 소원을 하늘로 보내던 곳이었다.

   우리는 이 빈 터를 가로질러 오른편 잡초 속을 헤치고 끝없이 내려간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기쁨과 자랑과 씩씩함을 품고, 걸음걸음 든든히 뚜벅뚜벅 하계(下界)를 향하여 내려간다.

 

   지리산 상상봉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큰애기 손길에  다 닳는다.

 

   앞서가는 짐꾼들이 부르는 민요에 귀를 기울이면서, 광덕사(廣德寺) 가는 길을 왼편으로 비켜두고, 그대로 북하(北下)하는 길을 취하여 밀림 속으로 끝없이 내려간다.

 

   전봉암(展峰岩)이라 제각(題刻)한 바위 앞을 지나 번음(繁陰) 속으로 얼마쯤 내리노라니, 물 없는 큰 계곡을 만나는데 이것이 백무동(白武洞)이다.   

   동곡을 내림에 따라 물도 차츰 살져가고, 곡중의 한 요지를 택하여 고요한 산촌이 열렸으니 이는 묻지 않아도 백무(白武)로써 이름한 마을일 것이다.

   고교(古敎) 지명의 통례대로, ‘천왕’의 이름 아래 ‘백무’로써 이름한 마을이 생겨 있음은 당연한 채로 반가운 이름이어니와, 그러나 우리의 이번 길이 지리산의 북록(北麓) 일대에는 발걸음을 구석구석 드려놓지 못함이 한갓 유감스럽다.

 

   백무를 지나 그대로 물 따라만 강청리(江淸里)라는 데로 내려가건만, 마음은 못내 왼편 산봉을 더듬어 영원사 위, 무주암을 찾는 것이다. 거기가 크게 무엇을 찾을 것은 없다더라도 만수동(萬水洞) 깊은 곳에 유수(幽邃)한 경개를 만져도 보고 싶고, 부용, 청허, 청매 세 조사의 영전도 보고 싶거니와, 저 고려의 목우자가 내관(內觀)을 전정(專精)하여 득법의 서상(瑞相)을 얻은 저 이름난 상무주암, 그리고 또 고려의 대혼자(大昏子) 무기화상이 일납(一納) 30년으로 이 산에 머무는 동안, 산중 70여 암을 돌아다니다 상무주암에 이르러

 

   此境本無主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何人起此堂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惟餘無己者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去住本無妨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라 하여 저 최자(崔滋)[고려시대의 문신. 1188~1260]가 그의 <보한집>에 “어약소이(語若疎易), 이기의고심(而寄意高深)”이라 하고, 거의 한습(寒拾)[당나라 중엽의 유명한 중 한산(寒山)과 습득(習得)을 약칭한 것으로, 그들은 기행(奇行)으로유명하고, 또 시승(詩僧)으로 유명하였다.]의 류(流)라고까지 절찬한 그 시경(詩境)을 나도 한 번 어루만져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길이 한 사람의 독특한 발걸음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아니하므로, 그대로 같이 따라 마천(馬川)이란 곳으로 내려간다.

 

   <택리지>에, “지리산 북쪽 골짜기의 물이 합쳐서 임천과 용유담이 되었다가 고을 남쪽에 있는 엄천에 이르는데, 시냇가 위 아래의 경치가 아주 뛰어나게 아름답다”라 한 그대로 소광(昭曠)한 천석(泉石)이 천변의 논과 함께 내리다가, 마천에 이르러서는 왼편으로부터 오는 인월의 물과 합하여 바른편으로 꺾여 내려간다.

   이 물이 내려가는 아랫목에도 지금은 문수사(文殊寺)란 것이 있기는 있지만은, 전에는 김종직의 기록에 나타나는 선열암, 고열암, 신열암 등이 있었으며, 용유담 위에 마적사(馬迹寺)까지 있어서 함양 경내의 큰 자랑을 삼던 명찰들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마천에 내리자말자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에 몸을 싣고 급하게도 실상사를 향해 왼편 대로로 달린다.

   여기에서도 지금 군자리(君子里)란 이름을 가진 마을의 개울 건너편에 전일 군자사(君子寺)라는 절이 있어 <택리지>에도 “산 북쪽은 모두 함양 땅인데, 영원동, 군자사, 유점촌이 있어 남사고가 복지라고 하였다”라 하여, 경승(景勝)으로도 대단하게 보는 곳이어니와, 과연 명랑한 천석(泉石)과 지품(地品)의 비옥함이 칠 만한 곳이라 하겠다.

 

   또한 군자사는 <여람>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이 왕위를 피해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환국한 자리라 전하나, 속전(俗傳)의 가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유호인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會夜拂窓松桂冷, 臥看明月印輕風)” 한 군자사 시구(詩句)만을 외이며 지나갈 따름이다.

 

 

44. 신라禪 실상사

 

   마천을 떠난 자동차가 군자리 앞을 지나 연방 청계(淸溪)를 거슬러 왼편으로 약수암을 지점(指點)하는 동수리(東水里) 옛마을을 만나는 동안에, 우리는 경상도 함양 땅을 벗어나 전라도 남원 경내로 들어선다.

 

   얼마 아니하여 백일리(白日里)라는 노변에서 잠깐 차를 머물고 왼편으로 내를 건너 기괴한 석장승 1위(位) 앞에 웃음 던져 예(禮)하면서 수림 속으로 들어서니, 여기가 유명한 실상사이다.

   얼른 보아 야지(野地)에 자리를 잡은 것이 마치 경주 성내의 제 고찰의 유적과 같은 취(趣)를 가진 자(者)라, 일종의 신라 풍미(風味)인 듯도 하였다.

 

   이 실상사는 지금 남원군 영내에 속하는 신라시대의 거찰(巨刹)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국사가 개산한 곳인 바, <조당집> 19권에 따르면, 홍척을 홍직(洪直)이라고도 썼으며, 그는 일찍이 헌덕왕조에 입당(入唐)하여 서당(西堂)에게서 심법(心法)을 받고, 흥덕왕 즉위 초에 환국하여 이 산에 휴족(休足)하매 선강태자가 그에게 귀의하였고, 이어 이 실상사를 칙수주지(勅修住持)케 하니 그의 문하에는 편운, 수철 등 천여 명의 제자가 배출하였다.

 

   <적조탑비기>에 따르면, 남악홍척국사의 입당구법이 비록 북산도의국사의 뒤라고는 할지라도, 환국한 뒤에 가람을 창립하고 문파를 형성하기로는 이 실상사산(實相寺山)으로써 신라선문구산의 최선(最先)이라 할 것이니, 그러므로 해동의 전선(傳禪)으로는 홍척국사로써 초조(初祖)를 삼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구산선문은 실로 장관(壯觀)할 바 있었거니와, 특히 이 남악의 홍척은 저 북산의 도의와 서로 전후하여 해동에 선(禪)을 전했던 것이요, 또 둘 중에서도 <경덕전등록> 등에 따르면 홍척의 화익(化益)이 도의보다 더 깊은 것이었고, 도의는 어느 정도까지 불우(不遇)를 입어 “자취를 호중(병 속)에 감추어 전법할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의 북쪽에 은둔하였으니…”(적조탑비기)이라 함과 같이, 설악산의 진전사에 몸을 숨기고 선도의 홍통(弘通)에는 오히려 성효(成效)를 못 보인 듯하되, 이 홍척은 궁중과 민간에 융숭(隆崇)한 경모를 받아 당시 가장 우뚝한 선문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지금 조선에 현행하는 <선문예참의문>에 대가섭 이하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의 법계(法系)를 기술하고, 이어 선문구산의 조사들을 열기(列記)하였으되, 도의(가지산), 범일(사굴산), 철감(사자산), 무염(성주산), 현욱(봉림산), 도헌(희양산), 혜철(동리산), 이엄(수미산), 홍척(실상산).

    이것이 당시의 구산선문이었는데, 이 실상산(지리산)이 거갑(居甲)이었던 것이라, 여기로 인하여 또 그로 인하여 신라불교문화의 찬란한 빛이 얼마나 더하여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 실상사의 존재가 지리산의 문화적 가치를 얼마나 높이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실상산의 제2조(祖)라 할 이는 홍척의 사법(嗣法)[불교 선가에서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이어받는 일, 또는 그 사람] 수철국사이니, <능가보월탑비>에 의하면 경문왕, 헌강왕의 경신(敬信)을 입었으며, 칙명으로 영원사(瑩源寺)에 머물다가 제자 수인, 의광 등을 보내어 지리산 북쪽의 승지(勝地)를 복(卜)하여 이 실상사에 들어온 것을 알겠고, 또 동비(同碑)에 “조서당장부남악척(祖西堂藏父南岳陟)”이라 한 것을 보면, 그 법계가 남악홍척의 제자이었던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비가 실상사부도탑 뒷담 아래 서 있거니와, 이 비문을 <금석총람>에 기술하였으되 중요한 착오가 생겨 있음은 정오(正誤)하지 않을 수 없다.

 

   비자(碑字)가 완결(頑缺)되고 문리(文理)가 부독(不讀)됨은 물론이나, 첫머리에 새긴 사명(寺名)에 대하여 영원사의 ‘영(瑩)’자를 ‘심(深)’자로 오독(誤讀)하였음은 중대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영’자가 ‘심’자로 착인된 것에서 시작하여, 혹 학자 중에서 실상사의 옛이름이 심원사(深源寺)였던 것처럼 보는 이도 있게 되었음은 큰 착오이니, 그러면 ‘영원사수철화상비’라고 제(題)한 까닭은 무엇이냐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철화상이 본시 밀양 자씨산(慈氏山)[재약산] 영원사의 개조이기 때문에 그 법계를 이어 홍척의 실상사에 그 비를 세우면서도 그의 본사였던 영원사의 이름을 관(冠)하였을 따름이니, 그러므로 심원사라는 것은 본시부터의 착인(錯認)이요, 영원사라는 것도 실상사와는 상관없는 수철국사의 본 근거지였던 밀양 자씨산의 절이름일 뿐임을 주의할 것이다.

 

 

45. 智異山에의 고별

 

   이 실상사가 신라시대에 있어서는 홍척국사를 개조로 하고, 선문구산 중의 중요한 일처(一處)가 되었었고, 고려에 있어서는 태종(台宗)의 근거지가 되었던만큼,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불교역사상에 큰 공적을 끼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절에 공인된 국보적 보물이 먼저 그 수효로만 남에게 지지 않는다. 홍척국사의 응요탑과 탑비며, 수철국사의 능가보월탑과 탑비는 물론이요, 그 외에도 저명한 것은 석등과 부도와 철제여래좌상과, 또 백장암의 석등과 삼층석탑이라 할 것이요, 그 중에도 장관인 것은 실상사 삼층석탑이다.

 

   남북에 2기의 3층석탑이 있는데, 양 탑의 석단이 12미터의 거리에 서로 떨어져 있다.

   남북탑이 총높이 8.4의 같은 키를 가졌고 그 구조형상도 대동한데, 다같이 제3층의 입석 위에 방형(方形)의 돌을 얹고 복발, 청화, 상륜, 수연이 있어 긴 철주(鐵柱)로써 그것을 꿰어 세운 것이 탑파의 모양을 기묘하게 함만으로도 미관임을 허(許)할 수밖에 없다.

   대개 이같은 사보(寺寶)도 배관(拜觀)하고, 경내도 밟아본 다음 우리는 주마간산의 탄(嘆)을 발(發)하면서도 산문 밖으로 벗어난다.

 

   냇물머리에까지 나와 들어갈 때 웃으며 대한 석장승 앞에 발을 머물고 서서 나는 마침내 이별의 정을 고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속진(俗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지리산도 이 실상사 문 앞의 석장승으로써 끝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없이 서 있는 장승이언만 지리산의 수직(守直)장승만 같이 생각되어, 논귀틀가에 서 있는 채로 멀리 천왕봉을 위하여 드는 이 나는 이를 묻는 듯도 하다.

 

   지리산 그리워 왔더니라

   그리워 왔건마는

   봉봉(峰峰)이 골골이 보았노라

   다 밟아 보았건만

   또다시 그립고 모르고

   그냥 돌아가노라.

 

    여기선 돌장승아

   네가 차라리 부럽구나

   듣도보도 말도 없이

   지리산 밑에 홀로 서서

   빙그레 웃고 산다면

   그 행복이 얼마이랴.

 

   여기다 두고 갈까

   다시야 언제 오리라고

   버리고 그냥 갈까

   그리워 어일이거나

   지리산 팔백리라건만

   업고 안고 가노라.

 

   내를 건너 대로로 나서 다시 자동차에 몸을 싣고 인월로, 운봉으로, 고전장(古戰場)을 바람같이 지나 남원으로 들어오자 오늘 해도 즐거운 웃음을 띄고 누엿이 산을 넘는다.

 

    저 휴정선사가 뒷날에 북령(北嶺)에 올라 두류산을 생각하며 노래하되,

   북지신위객(北地新爲客)   북녘땅의 새로운 나그네 되니
   남천구주인(南天舊主人)   남녘 하늘은 옛주인일세.
   십년산독재(十年山獨在)   십년을 산은 홀로 있건만
   천리월상친(千里月相親)   천리를 떨어진 달은 서로 친하네
 
이라 하였다. 오랫동안 현명한 독자 앞에 졸렬한 이 기행을 적어 시정을 받고, 이제 붓을 놓으려 함에,글을 떠나서 거룩한 그 자연 거기서 받은 위무(慰撫)와 훈책(訓責)의 모든 엄숙하고도 자비하던 그 감명이 다시금 그립고 느꺼움을 깊이 깨닫는다.
   그와 아울러 왕반연로(往返沿路)에서 담소를 같이 하던 산수우(山水友)들과 영송의 노(勞)를 아끼지 아니한 산하열읍(山下列邑)의 결체(結締)들과, 짐을 저나른 여러 짐꾼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다시 독자 제위 앞에 문중(文中)의 오락(誤落)은 후일 단책(單冊)으로 공간(公刊)하게 되는 때에 성의껏 정교하고자 함을 부언하여 두는 바이다. <끝>



   

자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