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청사우 乍晴乍雨 (金時習 1435 ~ 1493)

2017. 11. 29. 23:50



        


사청사우 乍晴乍雨 (金時習1435 ~ 1493)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잠깐 개었다 비 내리고 내렸다가 도로 개이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하늘의 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 인심이야 


譽我便是還毁我(예아편시환훼아)

나를 칭찬하다 곧 도리어 나를 헐뜯으니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명예를 마다더니 도리어 명예를 구하게 되네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을 봄이 어찌 하리오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불쟁)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는 것을 산은 다투질 않네 


寄語世人須記認(기어세인수기인)

세상 사람에게 말하노니 반드시 알아두소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기쁨을 취하되 평생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김시습 초상.jpg
출생1435년
조선 한성부
(現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1493년 (59세)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
(現 대한민국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무량사)
직업학자문인불교 승려시인소설가
국적조선
학력1447년 중시 백일장에 장원 급제
활동기간1437년 ~ 1493년
장르한시시조소설
부모김일성(부), 선산 장씨 부인(모)
배우자남씨 부인
종교유교(성리학) → 불교

일생[편집]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한 그는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무반 출신으로 충순위를 역임했다.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년기에 그는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김반윤상 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은둔과 방랑 생활[편집]

금오신화
(조선중기 문신 윤춘년이 필사한 필사본)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조 정변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신숙주과 정인지정창손의 행차를 보게 되면 서슴없이 욕설을 날리며 조소하였다. 한편 그가 만나 교유하던 인물로는 서거정김담김종직 등이었다.

생애 후반[편집]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1466년(세조 12)에 김시습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증축한 건물은 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1472년에는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명회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그의 해학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의 무량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사후[편집]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된다. 향년 59세(1493년).

가계[편집]

  • 증조부 : 김윤주(金允柱)
    • 할아버지 : 김겸간(金謙侃)
      • 아버지 : 김일성(金日省)
      • 어머니 : 울진 장씨
        • 부인 : 남효례의 딸

저서[편집]

  •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
  • 《관동일록(關東日錄)》: 100여편의 
  • 금오신화(金鰲新話)
  • 《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법화경을 찬미했다.
  • 《산거백영(山居百詠)》(1468년): 시집
  •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1476년)
  • 《신귀설(神鬼說)》
  • 《애민의(愛民議)》
  •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
  • 《유호남록(遊湖南錄)》
  • 《유관동록(遊關東錄)》
  • 《유관서록(遊關西錄)》
  • 《유금오록(遊金鰲錄)》
  • 《천형(天形)》
  •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 《태극설(太極說)》
  • 《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華嚴一乘法界圖註幷書)》: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주석한 것이다.

사후에 지어진 김시습 관련 저서[편집]

  •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 : 기자헌이 김시습의 시를 중심으로 폈다.
  • 《매월당집(梅月堂集)》: 김시습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처음 완성됐다.

관련 항목[편집]

참고 문헌[편집]

  • 세종실록
  • 금오신화
  • 육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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