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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영정(影幀)보물 제547-5호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 종가에서 보관해 오고 있는 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정희 선생은 순조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고증학과 금석학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말년에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이 초상화는 머리에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으며,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전신상이다. 두 손은 소매 속에서 마주잡고 있어 보이지 않으며 두 발은 여덟 팔(八)자로 벌리고 발받침 위에 가지런히올려놓았다. 그림의 위쪽에는 “추사 김공상(秋史 金公像)”이란 그림의 주인공 이름과 영의정을 지낸 권곽인이 쓴 글이 있고,아래쪽에는 이한철이 철종 8년(1857) 베껴그린 그림임을 알려주는 문장이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자화상(自畵像)
생애(生涯)
원래 충청도(忠淸道) 서산(瑞山) 대교리(大橋里 : 한다리)에 자리를 잡아 ‘한다리 김문(金門)’으로 통하던 추사(秋史)의 집안은고조부(高祖父) 김흥경(金興慶 : 1677~1750)의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증조부(曾祖父)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은 영조(英祖)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면서 더욱 명문(名門)으로발전하였다.
그러다가 김한신(金漢藎)이 39세에 후사(後嗣)도 없이 세상(世上)을 떠나고 화순옹주(和順翁主)도 남편을 따라 같이 세상(世上)을떠나자 조카 김이주(金頤柱 : 1730~1797)를 양자(養子)로 들여 집안을 이어가게 했으니 추사(秋史)의 조부(祖父)였고,김이주(金頤柱)는 외할아버지인 영조(英祖)의 비호(庇護) 아래 출세(出世)를 거듭해승지(承旨)․광주부윤(光州府尹)․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 등 높은 벼슬을 지냈고, 아들을 넷 낳아 집안을 안팎으로크게 일으켰는데, 장남(長男)이 김노영(金魯永 : 1757~1797)으로 추사(秋史)의 양부(養父)이고, 막내인 넷째 아들김노경(金魯敬)이 생부(生父)이다.
출생(出生)
정조(正祖) 10년(1786) 6월 3일 충청도(忠淸道) 예산(禮山) 용궁리(龍宮里), 오늘날 ‘추사고택(秋史古宅)’이라고 부르는경주 김씨(慶州 金氏)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향저(鄕邸)에서 훗날 판서(判書)를 지낸 유당 김노경(酉堂 金魯敬 :1766~1837)과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낸 유준주(兪駿柱 : 1746~1793)의 딸인 기계 유씨(杞溪 兪氏 :1766~1801) 사이에 장남(長男)으로 출생(出生)하였다. 출생(出生)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어머니가 회임(懷妊)한 지 24개월 만에 낳았다고 하는데, 추사(秋史)의 어머니는 본래회임 기간(懷妊 期間)이 비정상(非正常)이었던 듯 아우인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 1788~1857)도 18개월 만에낳았고, 막내 동생 금미 김상희(琴麋 金相喜 : 1794~1861)는 약간 빨라서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성장기(成長期)
추사(秋史)는 신동(神童)답게 어려서 기억력(記憶力)이 뛰어났고 일찍 글을 깨우쳐 여섯 살 때는 벌써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글씨를 써서 대문(大門)에 붙일 정도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북학파(北學派)의 거두(巨頭)인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가 지나가다가 이 글씨를 보고 추사(秋史)의 부친(父親)을 찾아뵙고는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學問)과예술(藝術)로 세상(世上)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또 하나의 전설(傳說)은 치당 강효석(痴堂 姜斅錫 : ?~?)이 펴낸『대동기문(大東奇聞)』에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일곱 살 때 입춘첩(立春帖)을 써서 대문(大門)에 붙였다.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 1720~1799)이 지나가다 이것을 보고들어와 누구 집이냐고 물으니 참판(參判) 김노경(金魯敬)의 집이라 했다. 본래 번암(樊巖)과 김노경(金魯敬) 집안은 세혐(世嫌: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의 질시(嫉視))이 있어서 만나지 않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특별히 방문하니 김노경(金魯敬)은 깜짝 놀라 “각하(閣下), 어이해서 소인(小人)의 집을 찾아주셨습니까.”하니, 번암(樊巖)이 말하기를 “대문(大門)에 붙인 글씨는 누가 쓴 것이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노경(魯敬)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번암(樊巖)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명필(名筆)로서 이름을 한세상(世上)에 떨칠 것이요.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運命)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文章)으로 세상(世上)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하였다고 한다.
양자(養子)로 입적(入籍)
김노영(金魯永)과 김노경(金魯敬)은 모두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출세(出世)를 했으나 백부(伯父)에게 뒤를 이을 아들이없자 추사(秋史)는 8살 때 백부(伯父)의 양자(養子)로 들어가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종손(宗孫)이 되었으며, 12세에양부(養父)가 갑자기 세상(世上)을 떠나고 뒤이어 조부(祖父)마저 타계(他界)하면서 가장(家長)이 되었고, 15세 때에는이희민(李羲民)의 딸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결혼(結婚) 1년 만인 1801년 친모(親母)가 34세에 갑자기 세상(世上)을 떠났고 스승 박제가(朴齊家)는 윤가기 흉서사건(尹可基 凶書 事件)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拷問) 끝에 함경도(咸鏡道) 종성(鐘城)으로 유배(流配)를 가게 됐으며, 4년후에는 부인(夫人)이 20세의 나이로 사망(死亡)하고 스승이 유배(流配)에서 풀려났다가 이내 사망(死亡)했으나, 그 해 가을부친(父親)이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는 집안의 경사(慶事)가 생겼으나, 다시 1806년 양모(養母)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마저 서거(逝去)하였으며, 23세 때인 1808년 둘째 부인 예안 이씨(禮安 李氏)와 결혼(結婚)하는 등 많은곡절(曲折)을 겪었다.
청년기(靑年期)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생원(生員)이 된 1809년 겨울, 호조참판(戶曹參判)이던 아버지가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北京)’)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동행(同行)하였고, 두 달 정도 머무는 동안 평생 가슴에서 떠나지않은 두 분의 선생, 즉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 1733~1818)과 운대 완원(芸臺 阮元 : 1764~1849)을 만나게되었는데, 담계(覃溪)로부터 보담재(寶覃齋 :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書齋)’란 뜻으로, 이는옹방강(翁方綱)이 자신의 서재(書齋)를 ‘소동파(蘇東坡)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書齋)’라는 뜻에서 ‘보소재(寶蘇齋)’라 한것에서 본 따 지은 것이며, 나중에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집도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 명명)라는 당호(堂號)를얻고, 운대(芸臺)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雅號)를 얻었다.특히 담계(覃溪)는 추사(秋史)와 마주 앉아 필담(筆談)을 나누었는데, 담계(覃溪)가 지향(志向)하던 경학(經學)은 청대(淸代)의다른 학자(學者)들처럼 한대(漢代)의 경학(經學)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입장(立場)에서 송대 경학(宋代經學)에 비중을 두었으며, 추사(秋史)를 비롯한 조선 유학자(朝鮮 儒學者)들 역시 송대 철학(宋代 哲學)에 관심이 많았기에담계(覃溪)는 추사(秋史)의 학식(學識)이 마음에 들었고, 또 대화(對話)를 나눌수록 그의 박식(博識)과 총명(聰明)함에 놀라“해동(海東)에 아직도 이와 같은 영물(英物)이 있었는가?”라며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 칭찬하는 한편,구양순(歐陽詢) 글씨의 진수(眞髓)로 일컬어지는 ‘화도사비(化度寺碑)’ 진본(眞本)을 보여주고 그 모각본(模刻本)까지선물(膳物)하는 등 각별한 애정(愛情)을 보임으로써 추사(秋史)가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에 전념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귀국(歸國) 후에는 ‘추사(秋史)’라고 부르는 것보다 ‘완당(阮堂)’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행적(行蹟)에 더 어울리며, 또한실제로 중년(中年)에 들어서면 ‘추사(秋史)’라는 낙관(落款)은 거의 쓰지 않고 ‘완당(阮堂)’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장년기(壯年期)
34세 때인 1819년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면서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리기 시작해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를 거쳐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으며. 65세의 부친(父親) 또한 평안감사(平安監司)를 마치고 막 물러난 때인 1830년에 부사과(副司果) 김우명(金遇明)이 비인현감(庇仁縣監) 시절 당시 암행어사(暗行御史)였던 김정희(金正喜)에게 파직(罷職)당한구원(舊怨)에 대한 앙갚음으로 거짓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순조(純祖)의 분노(忿怒)를 사서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했다.
이일이 있은 지 이틀 만에 역시 부사과(副司果) 윤상도(尹尙度 : 1768~1840)가 호조판서(戶曹判書)박종훈(朴宗薰)․전(前) 유수(留守) 신위(申緯)․어영대장(御營大將) 유상량(柳相亮) 등을 탄핵(彈劾)하다가 오히려추자도(楸子島)로 귀양을 가는 일이 발생하면서, 임금은 사주(使嗾)하는 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겨 엄한 비답(批答)을내렸으나 김우명(金遇明)의 상소(上疏)로 시작된 정쟁(政爭)은 요원(遼遠)의 불길처럼 번져 김노경(金魯敬)이 그 해 10월 8일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당하는 결과(結果)를 낳았다.
55세이던 1840년 6월, 병조참판(兵曹參判)이던 추사(秋史)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任命)되기도 했으나, 김우명(金遇明)이대사간(大司諫)이 되고 경주 김씨(慶州 金氏)와 악연(惡緣)이 있던 안동 김씨(安東 金氏)들이 양사(兩司)를 장악하자, 10년전의 ‘윤상도 사건(尹尙度 事件)’을 다시 끄집어내어 고인(故人)이 된 김노경(金魯敬)을 공격하고 나섰고, 이리하여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추자도(楸子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돼 있던 윤상도(尹尙度)를 다시 국문(鞠問)하는한편, 김노경(金魯敬)에게도 마땅한 처분(處分)을 내리겠다고 하교(下敎)하여 추사(秋史)의 관직(官職)을 빼앗고 죽은부친(父親)의 관직(官職)까지 삭탈(削奪)하였다.윤상도(尹尙度)는 국문(鞠問) 도중 전(前) 승지(承旨) 허성(許晟)이 시켜서 한 일이라 했고, 허성(許晟)은 건옹 김양순(健翁金陽淳 : 1776~1840)의 위협(威脅)과 사주(使嗾)를 받았다고 자백(自白)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추사(秋史)를 줄기차게모함해온 안동 김씨(安東 金氏)가 얽혀든 꼴이 되었지만, 궁지에 몰린 김양순(金陽淳)은 추사(秋史)가 시킨 일이라고발고(發告)하였다가 양자간(兩者間) 대질 심문(對質 審問)에서 거짓말임이 드러나자 다시 죽은 이화면(李華冕)을 끌어들이는 등집요하게 추사(秋史)를 물고 늘어지던 중, 계속된 국문(鞠問)으로 인한 고문(拷問)으로 8월 27일에 사망(死亡)했고,허성(許晟)과 윤상도(尹尙度) 또한 역적모의(逆賊謀議)에 참여한 죄(罪)로 죽임을 당하니 추사(秋史)만 남아 국문(鞠問)을 받게되었는데, 관련자(關聯者)들이 모두 죽을 정도의 혹독한 고문(拷問)으로 추사(秋史)도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을 때,추사(秋史)와 절친했던 우의정(右議政) 조인영(趙寅永 : 1782~1850)의 “관련자(關聯者)들이 모두 죽고 없는 상황에서의고문(拷問)은 잘못이라”는 상소(上疏) 덕택에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해 1840년 9월 2일 제주(濟州) 대정현(大靜縣)에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벌(罰)을 받아 기약없는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말년기(末年期)1842년 11월 13일 둘째 부인이 지병(持病)으로 세상(世上)을 떠났고, 헌종(憲宗) 14년(1848) 12월 6일 8년 3개월간의유배(流配)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며, 철종(哲宗) 2년(1851) 철종(哲宗)의 4대조(四代祖)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형(兄)인 진종(眞宗)의 위패(位牌) 문제로 안김 세력(安金 勢力)과 반김 세력(反金 勢力) 간에 권력투쟁(權力鬪爭)이 벌어져이재 권돈인(彝齋 權敦仁 : 1783~1859)이 패배(敗北)하자, 권돈인(權敦仁)의 둘도 없는 친구(親舊)였던 추사(秋史)는북청(北靑)으로 2차 유배(流配)를 떠나게 됐다가 1년 만인 철종(哲宗) 3년 8월 13일 다시 해배(解配)되어 돌아온 후,1837년 72세의 나이로 임종(臨終)한 친부(親父)의 묘소(墓所)가 있는 과천(果川) 주암리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묻혀 살다가1856년 10월 10일 임종(臨終)하였다.
학문적(學問的)․예술적(藝術的) 평가(評價)
서예(書藝) ‘조선시대 4대 명필(朝鮮時代 四大 名筆)’ 중 한 사람이자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서예가(書藝家)’로 평가(評價)받을 수 있을뿐 아니라, 동양 서예사(東洋 書藝史)라는 세계사적(世界史的) 지평에서 평가(評價)할 때도 추사(秋史)가 활동하던 19세기전반(前半), 즉 청(淸)나라 가경(嘉慶 : 1796~1820)․도광(道光 : 1821~1850)․함풍(咸豊 :1851~1861) 연간에 청(淸)나라 서예가(書藝家)로서 추사(秋史)에 필적(匹敵)할만한 인물은 찾아볼 수가 없다.
청조학(淸朝學) 실학(實學) 중에서도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에서 당대(當代) 최고(最高)의 석학(碩學)으로 일본인(日本人)동양철학자(東洋哲學者) 후지츠카 지카시[등총린(藤塚鄰 : 1879~1948)]는 추사(秋史)가 연경(燕京)의 학자(學者)들과얼마나 깊이있게 그리고 열정적(熱情的)으로 교류(交流)하였는가를 치밀하게 고증(考證)한 후, “추사(秋史)는 청조학 연구(淸朝學硏究)의 제일인자(第一人者)”라고 결론(結論)을 내렸는데, 특히 추사(秋史)는 단지 국제적(國際的)인 사조(思潮)에 휩싸여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體化)․육화(肉化)․토착화(土着化)시킨 진실한 의미(意味)의국제파 학자(國際派 學者)였다.
시문(詩文) 추사 시대(秋史 時代)의 시인(詩人)인 위사 신석희(韋史 申錫禧 : 1808~1873)는 “추사(秋史)는 원래 시문(詩文)의 대가(大家)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名聲)이 천하(天下)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려지게 되었다”고 평(評)했다.
경학(經學) 경학(經學)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성리학(朝鮮 性理學)의 정도(正道)로서 실제로 추사(秋史)가 쓴『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역서변(易筮辨)』같은 논문(論文)이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게 경학(經學)에 대하여 진지하게물음을 구한 글, 또는 추사(秋史)가 제주도(濟州道) 유배(流配)시절에 이재 권돈인(彝齋 權敦仁 :1783~1859)과『주역(周易)』에 대해 깊이 토론(討論)한 서찰(書札) 등은 경학자(經學者)로서의 추사(秋史)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불교(佛敎) 불교학자(佛敎學者) 신암 김약슬(薪菴 金約瑟 : 1913~1971)은『추사(秋史)의 선학변(禪學辨)』이라는 논문(論文)에서추사(秋史)의 학문(學問)과 예술(藝術)은 그 핵심(核心)이 모두 불교(佛敎)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실제로 추사(秋史)는 당시해동(海東)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 불릴 정도로 불교 교리(佛敎 敎理)에 밝았고, 초의(艸衣 : 1786~1866)를 비롯한많은 스님들과 교유(交遊)하면서 백파(白坡 : 1767~1852)같은 당대(當代) 대선사(大禪師)와 한 차례 논쟁(論爭)을벌이기도 했으며, 그 뿐 아니라 추사(秋史)의 시(詩)․서(書)․화(畵)에는 불교 정신(佛敎 精神)이 매우 깊이 서려있어 “추사(秋史)는 유(儒)를 학(學)하고 석(釋)에 입문(入門)한 진실한 애불(愛佛)의 제일인자(第一人者)였다”고 평가(評價)하였다.
추사(秋史)의 인재론(人材論)
추사(秋史)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身分)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開放的)이고 진보적(進步的)인 생각을 갖고 있어 신분(身分)이아니라 인간(人間)의 능력(能力)과 노력(努力)을 중시(重視)하였는데, 이런 생각은 추사(秋史)가 지은「인재설(人材說)」의 다음내용(內容)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늘이 인재(人材)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아이 적에는 대개는 총명한데, 겨우 제 이름을 기록할 줄 알 만하면 아비와 스승이 전주(傳注)와 첩괄(帖括)로 그를미혹(迷惑)시키어, 종횡무진(縱橫無盡)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전적(古典的)인 글을 보지 못하고, 한번 혼탁한 먼지를 먹음으로써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다행히 제생(諸生)이 되었더라도 머리가 둔하여 민첩하고 통달하지 못함으로써 아무런 보람도 없이 어렵사리과거시험(科擧試驗)에 출몰하다가 오랜 뒤에는 기색(氣色)조차 쇠락(衰落)해져 버리니, 어느 겨를에 제한된 테두리 밖을 의논할 수있겠는가. 이것이 그 둘째이다. 사람이 비록 재주는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의 생장(生長)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하여산천(山川)․인물(人物)․거실․유어(遊御) 등에서 크고 드러나고 높고 웅장함과 그윽하고 특이하고 괴상하고 호협(豪俠)한 일들을직접 목격하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胸襟)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이목(耳目)이 이미 협소(狹小)함에 따라수족(手足)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셋째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재능[재력(才力)]이 꺾여 버려서 비통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왕왕 이와 같다.훌륭한 문의 묘(妙)는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自然)의 영기(靈氣)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주요 제자(主要 弟子)들
첫번째는 양반(兩班) 출신의 문인(文人)들로 이당 조면호(怡堂 趙冕鎬 : 1803~1887)․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1~1884, 나중에 ‘헌(櫶)’으로 개명(改名)하였음)․유재 남병길(留齋 南秉吉 : 1820~1869, 뒤에상길(相吉)로 개명(改名))․추당 서상우(秋堂 徐相雨 : 1831~1903)․표정 민태호(杓庭 閔台鎬 :1834~1884)․자기 강위(慈屺 姜瑋 : 1820~1884)․이재 유장환(頤齋 兪章煥 : 1798~1872)․묵란(墨蘭)에능했던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 : 1820~1898) 등이 있고, 두 번째인 역관(譯官)들로는 우선이상적(藕船 李尙迪 : 1804~1865)․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 1831~1879)․소당 김석준(小棠 金奭準 :1831~1915) 등이고, 세 번째 유형(類型)은 서화가(書畵家), 특히 화가(畵家)들로 매화(梅花)를 사랑했던 우봉조희룡(又峯 趙熙龍 : 1797~1859 또는 1789~1866)․추사(秋史)가 가장 아꼈던 제자(弟子)이나 스물아홉에요절(夭折)한 고람 전기(古藍 田琦 : 1825~1854)․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 1783~1837)․나이 삼십이 넘어추사(秋史)댁 사랑에 머물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 : 1809~1892)․초상화(肖像畵)를 잘 그렸던희원 이한철(希園 李漢喆 : 1808~?)․청조(淸朝) 문인화풍(文人畵風)과 전통적(傳統的)인 조선(朝鮮) 고유(固有)화풍(畵風)을 더불어 갖춘 혜산 유숙(蕙山 劉淑 : 1827~1873)․학석 유재소(鶴石 劉在韶 :1829~1911)․화풍(畵風)이 간결 담박했던 북산 김수철(北山 金秀哲 : 1800(?)~1862(?)) 등이 있다.
대표적(代表的) 문인화(文人畵)
추사(秋史)의 문인화(文人畵)에서는 직업화가(職業畵家)인 북종화가(北宗畵家)처럼 생계(生計)를 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사상(思想)이나 철학(哲學) 등 내면(內面)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표출(表出)하기 위해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사용하여그린 격조(格調) 높은 그림을 일컫는 이름 그대로인 남종 문인화(南宗 文人畵)의 진면목(眞面目)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제주도(濟州道)에 유배(流配)온 지 5년이 지난 추사(秋史) 나이 59세(1844년) 때 그린 최고(最高)의 명작(名作)이자 우리나라 문인화(文人畵)의 최고봉(最高峰)으로 손꼽히는 그림으로, 당시 집권 세력(執權 勢力)이던 안동 김씨(安東 金氏)일파(一派)의 미움 때문에 이미 10년 전에 종결(終結)된 사건(事件)인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헌종(憲宗)6년(1840)부터 9년동안 제주도(濟州道)에서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처음엔 자주 찾아주던 제자(弟子)들의 방문(訪問)도 점차뜸해졌지만, 그래도 역관(譯官)이었던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 1804~1865)만큼은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에계복(桂馥)의『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槀)』를 북경(北京)에서 구해 보내주었고, 이듬해에는또다시 하우경[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자, 제자(弟子)의마음 씀씀이에 감동(感動)하여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작품(作品)이다.
이그림의 가치(價値)는 실경(實景)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秋史)의 마음 속 이미지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그림에 서려 있는격조(格調)와 문기(文氣)가 생명(生命)으로, 추사(秋史)는 갈필(渴筆)과 건묵(乾墨)의 능숙한 구사로 문인화(文人畵)의최고봉(最高峰)을 보여주었던 원(元)나라 황공망(黃公望)이나 예찬(倪璨) 류(類)의 문인화(文人畵)를 따르고 있는데, 구도만을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典型的)인 예찬(倪璨)의 필법(筆法)이지만, 필치(筆致)는 추사(秋史)특유(特有)의 예서(隸書) 쓰는 법(法)으로 고졸미(古拙美)를 한껏 풍기고 있어 매력이 있다.
이그림이 사람을 감격(感激)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는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秋史體)의 발문(跋文)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있는데, 추사(秋史) 해서체(楷書體)의 대표작(代表作)으로 예서(隸書)의 기미(氣味)가 남아 있는 반듯한 이 해서체(楷書體)는글씨의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嚴正)한 질서(秩序)를 유지하고 있어 심금(心琴)을 울리는 강도(强度)가 아주 진하다. 그리고 이 그림에 더욱 감동(感動)케 되는 것은 그러한 서화(書畵) 자체의 순수(純粹)한 조형미(造形美)보다도 그 제작 과정(製作過程)에 서린 처연(悽然)한 심정(心情)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인데,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강조한 추사(秋史)의 예술 세계(藝術 世界)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는 것이 이 그림의본질(本質)이라 할 수 있다.
藕船是賞 阮堂[우선에게 그려 줌. 완당] 화제(畵題)
개인(個人)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크기 23.7×70.2㎝의 이 그림은 선비의 지조(志操)와 의리(義理)를 상징적(象徵的)으로표현하고 있어 추사(秋史)의 회화관(繪畵觀)이 잘 드러난 작품(作品)이며, 그림 뒤에는 장문(長文)의 화제(話題 : 크기23.7×38.1㎝)가 붙어 있는데, 다음은 이 화제(話題)의 전문(全文)이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 해에 두 가지 <만학>, <대운>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우경문편>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써서 구한 것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추세하는 것과 같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군도역시 이 세상에 살고있는 사람일텐데, 권력에 추세하는 테두리를 초연히 떠나서 권리를 좆아 들어가지 않으니, 나를 권력으로 대하지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잣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된다" 고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는데, 지금 군은 전이라고 더한 것이 없고, 후라고 덜한 것이 없구나.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세한 이전의 군을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갖 시들지 않음의 정조와 근절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같은 것은 박절이 너무 심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완당(阮堂) 노인(老人)이 쓰다.
한편, 이 화제(話題) 속에『논어(論語)』「자한(子罕)」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 날씨가 추워진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디 시듦을 안다)’라는 유명한 경구(警句)가 등장해 그림의 주제(主題)를 함축적(含蓄的)으로 표현하고있는데, 참고로『논어(論語)』에 나오는 원문(原文)은 ‘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여기서‘조(凋)’와 ‘조(彫)’는 ‘시든다’는 같은 의미(意味)이다.
대표적(代表的) 서예작품(書藝作品)
추사(秋史)는 ‘조선시대 4대 명필(朝鮮時代 四大 名筆)’ 중 한 사람이자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서예가(書藝家)로평가(評價)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양 서예사(東洋 書藝史)라는 세계사적(世界史的) 지평에서 평가(評價)해볼 때도추사(秋史)가 활동했던 19세기 전반(前半), 즉 청(淸)나라 가경(嘉慶 : 1796~1820)․도광(道光 :1821~1850)․함풍(咸豊 : 1851~1861) 연간에 청(淸)나라 서예가(書藝家)로서 추사(秋史)에 필적(匹敵)할만한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31.9㎝×137.8㎝ 크기에 개인(個人)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이 작품(作品)은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書齋)”라는 뜻으로 제주도(濟州道) 유배(流配) 후 강상(江上) 시절의 대표작(代表作)인데, 추사(秋史) 글씨 중 추사체(秋史體)의 멋과 개성(個性)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최고 명작(最高 名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글씨 전체(全體)의 구도(構圖)를 보면 위쪽은 가로획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타냈고, 하부는 여러 가지 형태(形態)의 세로획을들쭉날쭉하게 써서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한 변화를 주고 있어 고르지는 않지만 전체(全體)의 조화(調和)가 잘 이루어져있는데, 이런 구도(構圖)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書藝家)들이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形態)이며, 또한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의 필법(筆法)이 다 갖추어져 있어 중후(重厚)하면서도 호쾌(豪快)하고멋스러우면서도 기발(奇拔)한 작품(作品)이다.
77.0㎝×181.0㎝ 크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소장(所藏)하고 있는이 작품(作品)은 봉은사(奉恩寺) 경판전(經板殿)을 위해 추사(秋史)가 세상(世上)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大字 懸板)이기에 추사(秋史) 최후(最後)의 작품(作品)인데, 고졸(古拙)한 가운데 무심(無心)의 경지(境地)를 보여주는 명작(名作)으로 칭송(稱頌)되고 있다.당시 봉은사(奉恩寺)에는 남호 영기(南湖 永奇 : 1820~1872) 스님이『화엄경수소연의본(華嚴經隨疎演義本)』80권을 직접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木板)으로 찍어 인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856년 9월 말 경판(經板)이완성(完成)되어 경판전(經板殿)을 짓고 보관하게 되니 현판(懸板)글씨가 필요하여 추사(秋史)에게 부탁했던 것이다.추사(秋史)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대자(大字)로 ‘판전(板殿)’ 두 글자를 욕심 없는필치(筆致)로 완성(完成)하였고, 그 옆에 낙관(落款)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 하였는데,추사체(秋史體)의 졸(拙)함이 극치(極致)에 달해 있어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하지만,졸(拙)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天然)스럽게 살아 있어 불계공졸(不計工拙,:잘 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도 뛰어넘은 경지(境地)로 보인다.
일로향실(一爐香室)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 일지암(一枝庵) 소장(所藏)의 이 작품(作品)은 추사(秋史)가 초의(艸衣) 스님을 위해 써준현판(懸板)으로 ‘화로(火爐) 하나 있는 다실(茶室)’이라는 뜻인데, 예서체(隸書體) 중에서도 전한 시대(前漢 時代)의고졸(古拙)하면서도 힘있는 글씨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글자의 구성(構成)을 현대적(現代的)인 감각(感覺)으로 디자인해추사체(秋史體)의 참 멋을 느끼게 하며, 뜻도 좋고 글씨도 아름다워 추사(秋史) 현판(懸板) 중 명품(名品)으로 손꼽히고 있다.
산숭해심(山崇海深) 유천희해(遊天戱海)
산숭해심(山崇海深)은 폭42㎝․길이 207㎝의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 소장(所藏)으로 현존(現存)하는 추사(秋史) 작품(作品) 중 최대(最大)일 뿐만아니라 전서(篆書)․행서(行書)․예서체(隸書體)가 함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아 마치 홀리는 듯한 귀기(鬼氣)까지느껴지는 추사(秋史)의 대표작(代表作)인데, 혹자(或者)는 이 글씨가 추사(秋史) 글씨의 졸(拙)한 맛보다 ‘괴(怪)’가 강한작품(作品)이라고 평(評)하기도 한다.“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라는 이 글귀의 근거(根據)는 옹방강(翁方綱)이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精神)을 풀이한 글 속의 한 구절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공리공론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객관적 학문 태도를 이른 것으로,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실학파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천희해(遊天戱海)는 본래 ‘산숭해심(山崇海深)’과 한 작품(作品)이거나 또는 대련(對聯)의 쌍폭(雙幅)으로 씌어진 것을 각각 따로 주인(主人)을 달리하다가 결국은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서합쳐진 추사(秋史)의 기념비적(記念碑的)인 명작(名作)으로 역시 폭 42㎝․길이 207㎝로 산숭해심(山崇海深)과 크기가 같은데,추사(秋史)의 기괴(奇怪)한 글씨가 얼마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으로 넘쳤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화제(畵題)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글은 원래 운학유천(雲鶴遊天) 군홍희해(群鴻戱海), 즉 “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갈매기 떼가 바다에서 노닌다”는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양무제(梁武帝)가 종요(鍾繇)의 글씨를 평(評)한 말이다.
명선(茗禪) 간송미술관 소장
115.2㎝×57.8㎝ 크기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所藏)의 이 그림은 추사(秋史) 작품(作品) 중 가장 사랑스럽고 또 가장가지고 싶은 작품(作品)으로 추사(秋史)의 ‘입고출신(入古出新)’ 정신(精神)을 잘 보여주는 기념비적(記念碑的)인작품(作品)인데, 특히 중후(重厚)하고 졸(拙)한 멋의 ‘명선(茗禪)’ 두 글자 양 옆에 작고 가늘며 흐름이 경쾌한행서(行書)가 치장(治粧)되어 있어 작품(作品)의 구성미(構成)도 가히 일품(逸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경지(境地)는‘명선(茗禪)’이 다선일치(茶禪一致)를 말하듯 서선일치(書禪一致)라고 말해도 될 듯하다. 초의선사(艸衣禪師)가 보내준 차(茶)에 대한 답례(答禮)로 쓴 이 글씨의 필의(筆意)는「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에 있음을 협서(脇書)로 정확히 밝혀두었는데, 그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초의(艸衣)가 스스로 만든 차(茶)를 보내왔는데 몽정차(蒙頂茶)나 노아차(露芽茶) 못지 않았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報答)하는데「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筆意)로 쓴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는 (漢)나라 광화(光和) 6년(183)에 하북성(河北省) 직례현(直隷縣) 원씨(元氏) 마을 백석산(白石山) 산신(山神)의 덕(德)을칭송(稱)하기 위해 세운 비(碑)로서 지금은 원씨여자고등학교(元氏女子高等學校) 교정(校庭)에 있다고 하는데, 이 비문(碑文)의글씨는 위․아래로 조금 긴 형태(形態)이지만 용필상(用筆上) 기괴(奇怪)함이 전혀 없고 포치(布置)가 정연하여 지순(至純)한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글씨에 순후(淳厚)하면서도 예스러운 멋이 넘쳐 졸(拙)한 가운데 교(巧)한 맛이 숨어 있음에 착안하여추사(秋史)가 ‘명선(茗禪)’ 두 글자를 쓴 것이다.
후학(後學)들의 모방 열풍(模倣 熱風)추사(秋史)로부터 뜻하지 않게 천하(天下)의 명작(名作)을 선물(膳物)받은 우선(藕船)은 너무도 기뻐, 그 해 10월연경(燕京)에 갈 때 가지고 가서 이듬해(1845) 정월(正月) 22일,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장원(莊園)에서 벌어진 잔치에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좌객(座客)들에게 내보이니 그곳에 참석한 17명 모두가 격찬(激讚)을 아끼지 않으며 다투어 제(題)와찬(讚)을 혹은 시(詩)로, 혹은 문(文)으로 붙였는데, 이것이「세한도(歲寒圖)」에 붙어 있는 ‘청유 십육가(淸儒 十六家)의제찬(題讚)’이다. 이렇게 귀국(歸國)한 우선(藕船)이 이재 권돈인(彝齋 權敦仁 : 1783~1859)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자, 권돈인(權敦仁)은 이 그림의 이미지를 본받아「세한도(歲寒圖 : 22.1㎝×101.0㎝로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소장(所藏))」한 폭을 그린 것이 전하는데, 이것은「세한도(歲寒圖)」를 방작(倣作)한 것이 아니라 화제(畵題)에서도밝혔듯이「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로 바꾸어 송죽매(松竹梅)가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인간미(人間美) 넘치는소재(素材)로 바뀌었다.
또한 소치 허련(小痴 許鍊)도 추사(秋史)의「세한도(歲寒圖)」를 방작(倣作)한 아담한 산수화(山水畵)를 그렸는데,「방완당의산수도(倣阮堂意 山水圖 : 31.0㎝×37.0㎝로 대림화랑 구장(舊藏))」가 그것으로서 화제(畵題)에 “추사(秋史)의필의(筆意)를 본받았다”라고 써놓아 더욱 이 그림의 뜻이 살아나고 있다.
불이선란(不二禪蘭)
제목 수정 이유(題目 修訂 理由)추사(秋史)의 난초(蘭草) 그림이 파격(破格)을 넘어 ‘불이선(不二禪)’의 경지(境地)에 다다른 작품(作品)으로 그림의화제(畵題)가 “부작란화(不作蘭畵)……”로 시작되어「부작란(不作蘭)」이라고 불렀지만, 이 말이 어법(語法)에 맞지 않아근래(近來)에는 화제(畵題)의 내용(內容)에 따라「불이선란(不二禪蘭)」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작품(作品)에 쓰여진 다양한 화제(畵題)와 낙관(落款)
화제(畵題) 이작품(作品)은 오른쪽 아래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뻗어 오른, 꺾이고 굽고 휘고 구부러진 담묵(淡墨)의 난엽(蘭葉) 열두어 줄기에화심(花心)만 농묵(濃墨)으로 강조한, 아주 간결한 구도로서 대지(大地)를 나타내는 풀이나 돌도 그려 넣지 않았고, 난초(蘭草)그림에 늘 나오는, 잎과 잎이 어우러져 만드는 이른바 ‘봉의 눈’․‘메뚜기 배’ 같은 형상도 없이, 오직 거친 풀포기 같은조야한 멋과 그로 인한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 뿐이지만, 추사(秋史)는 오히려 바로 이 그림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난초(蘭草)그림의 이상(理想)을 비로소 구현(具顯)한 대만족(大滿足)을 느껴 그런 감정(感情)을 한껏 담아 제시(題詩)를 썼는데, 이제시(題詩)는 글씨 자체도 파격(破格)이지만 화제(畵題)를 왼쪽에서 시작하는, 정판교식 역행법(逆行法) 또한 파격(破格)이다.다음의 내용(內容)은 이 작품(作品)에 담겨진 각종 시제(詩題)의 내용(內容)들이다.
不作蘭畵二十年 (부작란화이십년)
난초(蘭草)를 안 그린 지 스무 해인데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天然)의 본성(本性)이 드러났네
閉門覓覓尋尋處 (폐문멱멱심심처)
문(門) 닫고서 찾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 (차시유마불이선)
이게 바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불이선(不二禪)이라네.
하지만 추사(秋史)는 이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시(詩)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파격적(破格的)인 화제(畵題)는 다시 이어졌다.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약유인강요 위구실우당이비야 무언사지. 만향.) 만약 누군가가 강요한다면, 또 구실을 만들고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維摩)의 말없는 대답(對答)으로 거절(拒絶)하겠다. 만향
그리고는 또 그 아래 난(蘭) 잎이 꺾이며 만든 여백(餘白)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又題.
(이초예기자지법위지 세인나득지 나득호지야. 구경우제.)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의 기자(奇字)의 법(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제하다.
왼쪽하단에 또 화제(畵題)를 달았는데 그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시위달준방필 지가유일 불가유이. 선객노인.)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 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선객노인.
끝으로 나중에 얼마간 시기(時期)를 달리해서 또 한 번 화제(畵題)를 달았다.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오소산견이호탈. 가소.)
오소산(吳小山)이 이를 보고 얼른 빼앗아가니 가소롭다.
*.낙관(落款):이 작품(作品)은 이처럼 많은 화제(畵題)가 씌어 있어 더욱 유명한데, 낙관(落款) 또한 그에 못지않아, 마치 명작(名作)이라는 징표(徵標)를 더 얻은 듯한 분위기도 있다.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24.9㎝×29.7㎝의 크기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소장(所藏)인 이 그림은 원(元)나라 문인화풍(文人畵風) 이래의 간일(簡逸)한필치(筆致)와 문징명(文徵明 : 1470~1559)․심주(沈周 : 1427~1509)․동기창(董其昌 : 1555~1636)이즐겨 쓴 수지법(樹枝法)으로 그려졌으며, 마른 붓질[갈필(渴筆)]과 까실까실한 초묵(蕉墨)이 구사되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특징(特徵)이 없는 작품(作品)인데, 그래도 추사(秋史)의 그림다운 일격(逸格)의 명품(名品)이자 추사(秋史)의 산수화(山水畵)중 인물(人物)이 묘사된 유일(唯一)한 그림으로 갈필(渴筆)의 구사가 유현(幽玄)한 분위기(雰圍氣)를 자아낸다.
번상촌장(樊上村庄)
완당이 제주 시절에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으로 '번상촌장'(樊上村庄)은 번리(樊里)에 있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다. 또한 이 작품을 받아든 권돈인은 너무도 흡족한 지라 다음과 같은 시로 작품 상단 넓은 여백을 메웠다.
蘭花蘭葉在山房
난초꽃과 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何處秋風人斷腹
어디에서 부는 가을 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若道風霜易摧折
바람과 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山房那得長留香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2007년 6월 5일[화요일]
♧진주성회 염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