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이 사랑한 여인들과 인간철학 外

2017. 12. 20. 17:29잡주머니



       


모바일 작성글 퇴계 이황이 사랑한 여인들과 인간철학| ◐ 자유글 방 ◑


양기용 | 조회 47 |추천 0 | 2017.05.22. 04:42


퇴계 이황!
이황의 여인들과 이분이 남긴 교훈



   조선의 유교사상,즉 성리학은 형식적인 예와 생산성이 없는 인간도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당파싸움에 국력을 낭비하고 망국으로 몰았으며 여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인식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황의 삶을 살펴보면 우리의 선입견도 바뀌게 됩니다.고리타분한 유교의 형식주의가 아닌 실천속에서 인간이고 싶어한 그분을 존경하게 됩니다.

상경여빈(相敬如賓)이란!
퇴계선생은 결혼을 앞둔 자녀와 제자들에게 편지글로 써서 강조했습니다
"부부란 서로 손님 대하듯 공경하라."



   첫번째 여인은 그의 어머니가 되시는 춘천 박씨 입니다.
퇴계선생은 1501년 온혜 노송정에서 칠남매 중 막내로 "공자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태몽꿈" 을 꾸고 태어 났다고 합니다.
그가 세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는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릴 들을까 봐 엄하게 키웠으니 퇴계 묘갈명에서도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나의 어머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두번째 여인은 21살에 장가를 간 영주의 초곡마을 출신 허씨 부인입니다.
아들 준을 낳고 둘째 아들 채를 낳은 뒤 산후조리 휴유증으로 일곱달만에 세상을 떠나니 겨우 육년을 함께하였습니다.

   세번째 여인은 둘째아들 채를 얻자마자 홀아비가 된 이황의 핏덩어리에게 젖을 먹여줬던 이름도 성도 없는 묘령의 여인 유모입니다.
퇴계도 남자인지라 둘 사이에서 아들 적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을 호적에 올릴 수 밖에 없었고 또 뼈를 깍는 아픔을 퇴계의 가슴에 묻을 수 밖에 없었던 성도 이름도 없는 여인이요.

  네번째 여인으로는 두번째로 맞이한 가일마을의 권질의 딸 권씨부인입니다.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예안으로 유배를 온 권질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잇따라 가문에 사화로 인해서 가까운 혈육들이 죽어가자 충격으로 미쳐버린 것입니다.
권질은 상처하여 홀로 된 이황을 예안으로 불러들여
"자네가 상처를 했다는데 우리 딸을 맡아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라는 어른의 간곡한 부탁에 거절을 못해 그 자리에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혼 후 권씨는 제삿날 제상에서 떨어진 배를 치마폭에 숨겨 나오거나 제기 위의 대추를 집어먹다가 걸리는 등 정신 나간 일로 퇴계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퇴계는 그런 부인을 한 번도 꾸짖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이황의 도포자락을 빨간색 댕기로 기워주지만 이황은 태연히 도포를 입고서 제자들을 교육했다고하는 유명한 일화도 전합니다.관직에 있을 때도 아내 권씨의 매끼니를 손수 챙겨주는 자상함까지~ 사별할 때까지 16년간 그의 따듯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첫째 부인 허씨 소생의 아들들에게 친모상처럼 시묘살이를 하게 했으며, 자신은 권씨의 묘지가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일년 넘게 무덤을 지켰습니다. 장인도 깍듯이 모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권질은 사위가 지어준 자신의 초당 당호 사락정(四樂亭)을 아호로 삼았습니다.


   다섯번째 여인은 맏며느리 봉화 금씨입니다
이황의 장남 준은 이웃마을인 외내의 자칭 명가 금재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혼례 때 퇴계는 상객으로 사돈댁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퇴계는 사돈 이외의 모든 금씨 일가친척들로부터 홀대를 당했답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사위를 봤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지요. 퇴계가 일어서자 그들은 퇴계의 뒤통수에 대고
"퇴계가 앉았던 자리를 물로 씻어내라" 하고, 심지어 "대패로 밀어버려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금씨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낯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뵐 것인가….’ 그러나 퇴계는 일체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혹시 며느리가 상처를 받을까봐 더 자상하게 챙겼줬답니다. 때때로 머리핀이나 실패, 골무 등 가사 용품도 보냈고, 금씨가 아프면 약을 직접 챙겨 보냈으며,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금씨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잊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시아버님 묘소 밑에 나를 묻어라. 죽어서라도 그 분의 혼을 모시겠다.”
봉화 금씨가 죽어서 남편 옆에 묻히지 않고 시아버지 이황의 곁에 묻혀있는 이유입니다.

   여섯번째 여인으로는 관기 두향입니다.
두번째 부인까지 상처로 잃고 홀아비의 처량한 신세로 단양군수로 부임을 하 게 되는데 환영식때 관기인 두향이가 퇴계선생을 보는 순간 첫눈에 마음을 송두리채 뺏겨 상사병을 앓아 몸져 눕게 되었답니다.
   퇴계는 특히" 청매화를 좋아하니 청매화 분재을 하나 길러 선물을 해보라" 는 말을 듣고 곱게 손질한 매화분을 선물로 건넸더니 안동포보다 더 빳빳한 퇴계마음을 얻게 되었답니다.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게 되자 두향이가 준 청매화분과 남한강의 수석 두개만 품안에 품고 풍기로 오고서도 퇴계는 청매화분을 두향이 어루만지듯이 애지중지 했다 합니다 벼슬을 그만두고 도산 한서암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두향이의 얼굴은 살아 생전 볼 수 없었으나 매화분을 곁에 두고 매화시를 108수나 남겨 애절한 조선판 선비의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선생이 떠나자 두향이는 관기에서 스스로 물러나 남한강에서 운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는데. 선생이 보고싶어 사흘 밤낮을 걸어 도산에 오니 공교롭게도 건지산 위로 퇴계선생의 시신을 옮기는 꽃행여가 훠이 훠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두향이는 그 길로 단양으로 돌아가 남한강 위에 신발을 벗어 치마를 뒤집어 쓴 채 생을 마감하니 지금도 충주호 옥순봉 앞에는 "두향이지묘"가 있으며 단양 문화원에서는 아직까지 두향이제를 지내고 있답니다.


   퇴계선생은 70세에 청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사후에 왕명으로 영의정에 추존되었으나 생전에 그의 뜻에 따라서 화려한 석물이나 큰 비석은 생략하고 도산에서 물러나 숨어 살았던 진성이씨의 묘라는 지극히 작고 초라한 비문이 있을 뿐입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사상| 문사철_자료실
靑嶽 | 조회 164 |추천 0 | 2001.03.24. 23:03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사상
                                              (배재현)

   유교는 윤리도덕을 중심으로 한 사상체계이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서는 제왕의 권위를 뒷받침하거나 집권세력의 억압성을 가리는 지배적 정치이념으로서 큰 역할을 차지했었다. 이렇게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왕도사상(王道思想)과 충효사상(忠孝思想)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전통 유학은 송(宋)나라에 들어와 당시 폐단을 노정하고 있던 불교와 노장사상들의 이론적 성과물들을 흡수함으로써 유학의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송의 학자들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하였다. 그 중 주자(朱子 1130~1200)는 자연의 구조와 인간의 심성구조가 동일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주 자연의 질서가 곧 인간 사회의 도덕적 당위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기론(理氣論)을 폈는데, 그 목적은 우주 자연의 근본 이치(理)와 인간의 본성(性)이 일치한다는 것(性卽理)을 밝히는데 있었다. 중국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곧 하늘의 의지(天命)이므로 인간이 본성을 회복하여 그것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논리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정치경제의 피폐와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들여온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하늘과 사람이 애초에 분리되지 않는 하나였다는 '천인무간(天人無間)'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래모습을 회복하여 성인이 되자는 수양철학과, 인간사회의 본래모습인 지상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가 발전한다.

   유학을 토대로 하여 천인일체의 이상사회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지치주의가 실패로 끝남과 동시에 15C말~16C초 훈척과 왕의 비리를 경험하면서 도덕적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는 수기(修己)인간교육을 통한 이상사회 실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수기의 기본조건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의 학자들이 이(理)와 기(氣)로서 우주자연과 인간본성을 설명하기도 했지만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되는 사단(四端)이나 칠정(七情)과 같은 심학에 대해서는 깊이 탐구하지 않았었다. 이와 같은 심성의 문제에 관한 연구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이후 퇴계 이황(退溪 李滉)에 의해 심화되었다.

   퇴계가 중요시했던 사상의 기본내용은 인간다움을 위한 수양이었고, 스스로가 완벽한 도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인격자가 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고자 했던 퇴계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였다. 그는 '理는 귀하고 氣는 천하다'고 생각했다. 理란 '옳은 것' 또는 '지당한 것'으로서 영원 불변의 진리,모든 사물과 관련된 법칙,원리 또는 이치의 도리의 뜻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란 모든 구체적 사물과 관련된 질료(質料)·형질(形質)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요한 '현상적 요소'라 말할 수 있다. 퇴계는 理를 배워 理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理는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직접 인식할 수가 없으므로 성현이 理라고 한 것이 理이다. 그래서 퇴계는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고 해도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율곡이 퇴계를 가리켜 "주자를 한결같이 따랐다(一從朱子)"라는 말에서 보이 듯이 퇴계의 학문하는 방법을 '본받는 것(依樣)'이라 한다. 원래 송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천명을 인식하기 위한 주론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인데, 이 이기론이 우리 나라에 수입되면서 인간학적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전통 사상에 따르면 '하늘과 내가 이미 하나'이므로 따로 하늘을 알기 위한 인식론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의 큰 성질이 내포되어 있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밝히고 내면의 수양을 통하여 심성의 이를 밝혀 실현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심성의 이가 바로 성(性)인데, 성의 내용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그러나 이 인의예지는 우리의 본성에 구비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理이기 때문에 감각이나 의식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양의 대상은 인의예지가 직접 드러난 네 가지 마음으로 옮겨간다. 어진 마음인 인이 발현된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로운 마음인 의가 발현된 '수오지심(羞惡之心)'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인 예가 드러난 '사양지심(辭讓之心)', 지혜로운 마음인 지가 발현된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바로 그것인데, 본성의 네 가지 측면이 마음의 단서로 나타났다 하여 '사단(四端)'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성의 理사단의 마음과, 사사로운 마음이 개입되지 않은 도심(道心)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양심'이다. 이 양심을 잘 지켜 확충해 나가고 인간의 일곱가지 정(情)인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잘 다스려 욕심을 제거하자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인 '경(敬, 居敬) -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달아나지 않게 한다는 것으로, 거경이란 마음을 거울같이 맑고 깨끗하게 가져 사사로운 마음이나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함을 말함-'사상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사상에 따르면 경건한 태도로 마음가짐을 성실히 하면 영원 불변의 진리요 당위인 理는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퇴계"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하여 理는 순수한 선이지만 氣는 선악의 구분이 있으며 언제나 理가 氣보다 선행하고 능동적인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즉, 당위가 존재보다 우선할 뿐 아니라 우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은 이에 반대하여 "발현되지 않은 것은 '性'으로서 이라 할 수 있으나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발현한 것이니 똑같이 '情'- 곧 氣의 발현-"으로 보았다. 이에 퇴계"사단은 理가 발하여 거기에 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氣가 발하여 거기에 理가 올라타는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정이라는 제자의 견해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양심이고, 칠정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움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마음은 잘 보존하여 발현되도록 지켜야하는 것이고, 칠정은 잘못될 수도 있으므로 잘 다스려서 치우치지 않도록 수양해야 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하였다.

   자연계의 사물현상은 물론 봉건사회의 모든 통치질서와 봉건도덕 규범을 절대적인 理의 발현으로 보는 그의 도학정치사상은 봉건통치질서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합리화하고 변호하며 피압박대중을 영원히 그에 얽매여두자는 명분론(名分論)적 질서의식이라 하여 북한학계에서는 비판받고 있지만,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통하여 '천인일체(天人一切)'의 본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적인 수양법을 완성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조 성리학이 퇴계의 사상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한국화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퇴율(退栗)의 이기론에 관한 견해의 차이는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고, 이들 학파에 의한 각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 연구와 교육이 활발해지면서 성리학은 17c 학문 사상의 지배적인 조류로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전통 유학과 실학의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퇴계의 철학사상은 국내뿐 아니라 널리 국외에까지 영향을 주어 후지와라(藤原)에의해 일본 주자학을 창시하게 하였고, 그 후 일본에서는 주자(朱子)의 직제자로 떠받들 정도였다. 현재 東京과 臺灣에 퇴계학 연구소가 있으며, Washington, Newyork, Hawaii등에 퇴계 연구회가 조직되어 있다. 1976년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거의 해마다 국제학술회의가 열려, 퇴계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철학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02.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의 생애와 사상| 우리歷史 이야기
관운 | 조회 199 |추천 0 | 2016.05.12. 18:39


02.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의 생애와 사상

 

  

사상과 신념

 

이황의 저서 퇴계문집

이기 이원론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鄭仁弘)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 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体)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읍니다. 신이 일찍이 찬성 이황(李滉)이 조식(曺植)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中道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曺植成運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에 살았읍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읍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읍니다. 이황은 과거(科擧)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老莊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出仕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中道)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老莊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기대승과의 논쟁 ; 47 논쟁

 

   추만 정지운[천명도설]을 지었고, 이를 우연히 본 이황이 몇 구절을 고쳤다. 정지운"4= 發於理, 7= 發於氣" (4단은 리에서 드러나고, 7정은 기에서 드러난다"고 한 것을 이황 "4= 理之發, 7= 氣之發" (4단은 리의 드러남이고, 7정은 기의 드러남)이라고 고쳤다. 우연히 이것을 본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이황에게 보내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황은 당시에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황에게 편지로 문의했다. 기대승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황과 논쟁을 했다. 기대승은 리와 기가 '함께 있음, 붙음'(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황의 명제는 리와 기를 서로 갈라놓는다.

 

   이에 이황은 기대승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4= 理發而氣隨之, 7= 氣發而理乘之" (4단은 리가 드러나면 기가 그것을 따르고, 7정은 기가 드러나면 리가 그것을 올라탄다)고 명제를 바꾸었다. 이 명제는 '' 이하의 뒷부분을 빼면 "4-리발, 7-기발"이고, 이황의 원래 명제와 다를 것이 없다. 이황은 리와 기의 '떨어짐, 분리됨, 구별됨'(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을 주장했다. 붙음과 떨어짐, 이것은 기대승과 이황의 기본적 차이이다.

 

   기대승은 붙음을 주장해서 리와 기를 하나로 만든다. 그 결과 리가 드러남을 부정하고 기만 드러남을 주장한다. 이황의 두 명제 가운데 氣發만 인정한다. 반면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시킨다. 따라서 리발과 기발을 다 인정한다. 2원론이다. 이렇게 되면 논쟁은 리발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나간다.

 

   이황은 주희의 강의록 모음인 [주자어류]를 읽다가, 주희가 "4= 理之發, 7= 氣之發" 이라 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틀리지 않았으며, 주희의 말을 따르자고 기대승에게 제안한다. 기대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대승의 입장은 뒤에 율곡 이이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이이는 성혼과 논쟁하면서 기대승의 입장을 반복한다. 성혼은 약간 양자 절충을 한 이황의 입장에 선다. 이후 이이가 창시한 서인들은 기발 하나만 인정하는, 리와 기의 붙음을 당론으로 정한다. 나아가 한원진 [주자 언론 동이고]를 써서, 주희가 "4= 理之發, 7= 氣之發" 이라 한 것은 제자들이 잘못 기록한 말이라 부정한다. 호승심에 사로잡혀 이기려고 집착하다 보니 원문까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이는 너무 어려서 이황과 논쟁한 적이 없다. 이황이 죽기 전에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방문해서 며칠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다. 돌아가서 편지를 몇 통 주고 받는다. 60대 대학자에게 20대 학생이 묻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일본 유학에 영향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92(선조 25)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이단시

 

   이황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후에 최명길은 퇴계에 의하여 이단으로 지목되었던 양명학을 남몰래 공부하여 양명학적인 사상을 저술에서 암암리 드러낸다.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傳習錄)>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문하생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등을 문하생으로 배출한다. 김효원은 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들 중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들, 제자들은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양반가의 자제들 외에 상민의 자제들도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수업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소수서원에서 성리학 강학을 할 때면, 대장장이 배점이 뜰에 꿇어 엎드려 배우기를 간청하자 그는 이를 허락한다. 그가 죽자 배점은 3년간을 상복을 입고 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했다.

 

불행한 가정사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성장했다. 그러나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로 친형 이해가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첫 부인 허씨를 27세에 잃고, 재혼한 둘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46세에 사별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째 부인을 무척 가여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48세 때 만난 기녀 출신 소실 두향 외에는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1548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는 정혼한 후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한성부에 분가한 그의 손자 내외가 아이에게 고열이 있어서 위중하자, 그에게 도움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의 증손자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보다 앞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제자 중 학봉 김성일은 선생께서 산과 계곡을 거닐 때면 마치 '신선 같다'고 평하였다.

 

   유홍준'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라고 평하였다.

 

당대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경상좌도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영향력이 있었다.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의 도산서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었고, 동인과 남인, 북인 학자와 정치인들을 양성한 요람으로서 1910년 이전까지는 성역화 되었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을 비판하던 경상북도의 공산주의자들은 도산서원을 도산서원(盜産鼠院)이라 하여 도둑들을 생산하는 쥐새끼들의 소굴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여 물의를 빚게 되었다.

 

사림 확산에 기여

 

   풍기군수 재직 중 서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으며, 백운동 서원의 현판을 왕의 사액 하사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킨다. 이후 서원의 보급과 사액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림파(士林派)의 세력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또한 조식의 문하생인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나뉜 뒤, 소북이 대북에게 숙청되고 대북은 서인에게 숙청되면서 그의 문하는 쇠퇴했고, 이언적은 많은 제자를 내지 못하여 이황의 제자들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성호학파에 영향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이황에게서 찾으려 했다. 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윤휴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윤휴와의 관계를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던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통을 퇴계 이황이 근원임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이익 가문의 학문은 17세기까지 북인 계열의 윤휴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하진이나 이잠 형제, 조하주 등은 윤휴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이익의 6촌 형인 유형원은 윤휴와 자주 만나며 연락하던 사이였다.

 

반면 뒷날 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699년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서우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성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성호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가 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1715년에서 1720년 사이 성호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으로 규정하였다. 서인 노론이 율곡 이이를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로 삼은 것에 대항해서, 이익은 서울 지역(近畿) 남인들의 학문적 근원을 이황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이익은 47 논쟁에 관한 책을 쓰고, 또 이황의 글을 발췌한 [이자 수어]도 편찬한다. 이러한 시도는 서울지역 남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

 

   이익은 이황의 사상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으나 이익의 스승 중 한명인 이서우가 허목의 문인이고, 허목의 스승인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서도 배웠고, 조식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이익은 이 점을 들어 퇴계 이황과의 관련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북인계 학문의 전통을 가진 윤휴에게 영향을 받은 성호 학파는 지속적으로 퇴계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완성되었다.

 

기생 두향

 

   그에게는 소실로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1548(명종 3)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만난 기생 두향은 이후 그가 떠나간 뒤에도 그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1571(선조 27) 그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은 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 뒤 매년 10월이면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에 대한 절개를 지켜 순사한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일화

 

   그가 도산서원에 있을 때 어느 행인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시중을 들던 제자들과 하인들이 지나가는 이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선생님, 저 사람 행동이 지나칩니다. 선생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내버려 두어라, 말 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냐?'라며 하인과 제자들에게 자신을 못알아보는 행인을 내버려 두라고 지시한다.

 

   이문형,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했던 훈구파 권신 이감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찾아 문안인사를 드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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