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고대역사서는 왜 존재않는가요?

2018. 2. 12. 15:38잡주머니



          :: 네티즌 자유게시판




  지스카(2005-11-18 20:15:10, Hit : 2176, Vote : 16
 삼국 고대역사서는 왜 존재않는가요?


신라 고구려 백제의 기원과 망국에 관한 기나긴 시간을 고려해볼때...환단고기외 몇종류 빼곤 일반사학계

에서 말하는 역사서가 존재 하지 않는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고구려만 해도 900년에 가까운 역사인데...조선 500년 남짓한 기간동안 왕실에서 직접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문서로 작성해 놓으니 프랑스해군이 강화도를 침공했을 당시 집집마다 책이 있는것과 수많은 서고의

책들을 보고 놀랐다는 얘기를 알고있습니다..

종이가 없어서 그들 자신이 써놓은 역사서나 관련서적이 없는걸까요..아님 망국과 동시에 스파르타나

카르타고 처럼 승전국이 멸절시킨것일까요? 왕이든 황제든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선

법치를 세울 필요가 있죠...정관의 치 처럼 왕이 직접 관련법을 적극독려하여 치세를 이룬경우도 있는데

왜 그들 자신에 관한 것들을 중공이나 일본 의 역사서 그리고 몇종류의 후대 역사서에 의존해야할까요..

분명 사람이 살면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고 그걸 말이나 글로써 후대에 전해지게 마련인데...삼국시대

역사는 있지만 그들 자신이 저술한 역사서가 없는 이유가 궁금합니다...비밀을 알려주세요..



지스카 (2005-11-18 20:30:37)  
의문점을 갖는 이유가 군대와 전투문제 때문에 생각하다 글을써본것입니다..
전쟁시 전략과 전투의 세세한것들을 조율하자면 말보단 글을 전달하는 방식이 명령체계 효용성이 높기 때문이죠..

또한 만리장성 축조시 우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경우와 같이 구간별로 공사총책임자와 그밑 책임자들이
있어 장성 축조를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그러자면 글로써 공사를 감독 하고 명령을 했다는데..고구려의 경우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그런데...그런 거대한 장성을 축조하면서 아무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고려의 경우 고구려를 승계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시간차이 많이 있고 발해의 경우 기와나 토기 그런것들은 발굴되었지만

발해또한 역사서가 외부에 의존해야합니다..어떻게 조선 이전의 역사서든 뭐든 극소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발굴이 안되서 인가도 생각되었지만 어떤 음모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팔도유람 (2005-11-19 17:10:30)  
제가 예전에 올린 글 중 일부인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그럼

상속되어서는 안될 반달리즘



내가 문자를 알고 역사와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진 후 귀가 따갑게 들었던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들이 우리와는 먼 거리에서나 존재하는 다른 문명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강자에 의한 기록의 산물인 역사! 강자의 문명이 대부분인 인류문화사의 오만함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세계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수메르·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양강(兩江)-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대해 한없는 호기심과 신비함이 교차했고, 이해하고 싶었고, 배우고 싶은 애정이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라크 내에 있는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화유적은 이라크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와 문명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아쉬운 것이 있었다. 여러 가지 중에 대표적으로 '반달리즘'으로 불리는 상속되어서는 안될 야만적 이념이 있다는 것이다.


반달리즘(전쟁과 야만으로 인한 문명파괴)의 어원은 5세기경 반달, 훈족의 로마제국 침입시 야만적인 문화유적파괴로부터 유래하지만 이미 역사 이전부터 인간의 사적 욕심, 문화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자파 이념중심, 종교적 광분(신념) 등의 이유로 자행되었다.


기록으로 보여지는 반달리즘의 대표적인 경우는 기원전 356년 고대 그리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방화,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있다. 특히 훈족에 의한 로마제국의 물리적 유적파괴는 유럽의 정신적 암흑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나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이런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고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집트 등의 근동·중동(유럽에서 가까운 이라는 이 표현도 서구 제국주의 중심 역사학자들이 주장이기도 하다)의 문화유적과 아시아의 역사문화유산을 마구잡이로 훼손하거나 약탈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문화유산들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약탈품이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전리품이라고 주장하지만(피에르 깜봉-Pierre Cambon-프랑스 파리 기메아시아 미술관 수석학예관-2003년 2월18일 경기도박물관 강연에서 밝힘) 전리품과 약탈품의 사전적 의미는 분명히 다르다. 전리품이란 쌍방간의 전쟁 과정에서 노획된 것을 말한다. 18세기 유럽은 제국주의였고 힘없는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한 결과 강탈해간 것이므로 약탈품으로 규정해야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외세와 내부의 반달리즘은 존재했다. 백제사의 파괴, 몽골의 황룡사 9층탑 방화, 임진왜란 때(1592년 4월) 왜군들의 사고(史庫)파괴와 정유재란 때(1597년)는 임진왜란보다 더욱 악랄한 불교유적(임진왜란 패인의 원인을 승병의 활약으로 판단)의 파괴와 약탈이 있었다.


경기 양주 회암사 등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불교유적 파괴,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외규장각 문서 약탈, 일제에 의한 수많은 약탈과 만행, 한국전쟁으로 인한 문화유적 파괴, 특정 종교집단의 소행으로 보이는 초등학교의 단군상 훼손 등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신자유주의 주도국인, 겨우 200년 역사의 미천한 미국으로부터 자행된 이번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야만적 파괴는 인간성과 철학성이 없는 과학문명 즉 디지털문명의 야만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주고 있는가에 대한 경고이다.


과학기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휴머니즘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과학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는 것은 "욕망의 부를 계승(미국 중심의 석유 확보)할 것이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해야 한다."


반면 7000년 이라크의 수메르·메소포타미아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자로 간주되는 점토판 문서/ 인류 최초의 도시 우르(Ur)-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태어났다/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원형 지구라트/3대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발생처/동양과 서역의 문명을 연결하던 실크로드의 중심/아라비안나이트와 신밧드 모험의 무대인 바그다드 등 나열할 수 없는 역사·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인류문명의 보고이다.


이런 소중한 7000년 인류문명이 200년 역사의 신자유주의 미국이 마구잡이로 유린하고 있는 것은 비단 디지털 과학기술에 의한 폭격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1954년 헤이그협정(무력 충돌시 문화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103국이 가입했지만 미국, 영국, 일본, 남북한은 가입하지 않았으며 폭격 후 미국은 바그다드박물관 약탈을 방조했거나 약탈의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고고학자 맥과이어 깁슨 교수에 의하면 1960년대 중반까지 이라크 유물은 높은 가격에 불법 거래되었다고 했다. 1958년 이라크 혁명 이후부터 유물의 국외반출을 금지한 후 이라크 국외에서 유물을 볼 기회가 없어졌다.


그러나 걸프전 후 이라크에 가해진 경제제재로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우르 등 유적지에서의 도굴과 심지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까지 훔쳐갔다.


유물 밀수꾼 조직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요르단으로 빼돌리고 런던, 뉴욕, 도쿄 등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이라크 요르단 국경에서 압수된 유물만으로 국립박물관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깁슨은 이라크 전쟁 후 수집가들에게는 미술품 수집의 황금기일 것이며 몇몇 수집가는 이미 목록까지 작성해둔 상태라는 증언도 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폭격 특히 수메르·메소포타미아문명(바그다드박물관)에 대한 폭격은 구제국주의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정치·군사의 힘에 더해 경제의 힘, 자본의 힘으로 지구(세계)를 오로지 미국의 생산과 소비만을 위해 존재시키고자하는 신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의 야만적 폭격인 것이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이라크내 박물관과 도서관의 약탈이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되자 약탈의 주체인 미국과 영국이 피해 유적 조사와 유물의 환수에 신경을 쓰겠다는 것이다. 1991년 걸프전 이후 약탈된 유물 4000여 점 중 돌아온 유물은 4개에 불과한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미국은 침공 전 유네스코의 이라크내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간곡한 요청을 무시했으며 침공 후 약탈된 유물의 최대 수집가와 수혜자가 될 것이 자명하다.


아무리 유네스코에서 조사단을 파견하고 인터폴이 불법거래 방지에 나서도 개인 소장가 위주로 은밀히 거래되는 유물을 회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탈레반 정권의 바미얀 석불 파괴라는 반달리즘을 "문화적 야만 행위"라고 비난하며 아프카니스탄의 침공의 빌미로 삼았다.


600년 역사 조선 왕조 최초의 능인 정릉(신덕왕후 강씨)의 혼유석을 파티용 음식물 진열대로 사용하는 미국의 문화적 야만행위와 주재국의 문화유산을 볼모로 덕수궁터에 자국의 15층 대사관과 아파트를 신축을 강행하겠다는 행위도 문화적 야만행위인 반달리즘으로 규탄 받아야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와 한국에서 자행되는 야만행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상대국의 인명을 살상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했던 18세기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즉 세계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일련의 미국측 행위들은 신제국주의, 신자유주의의 반달리즘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취약하고 자기모순에 가득 차 있는 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미국의 신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덮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가 이라크의 재건 사업에 마치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다.


문화적 야만행위인 반달리즘으로 파괴된 이라크내의 주요 유적지의 현상을 정리하고 약탈된 유물을 회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그다드박물관의 현재의 모습은 그대로 보존하여 미국의 문화적 야만행위를 후대와 역사앞에 두고두고 고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 문명 파괴의 현장을 7000년 고대 문명의 발생지인 이라크에 두어 '속죄의 순례코스'를 형성할 일에 양심적인 세계의 인사들이 나설 차례이다.


조선문화 콤플렉스가 야만적 수탈행위로 표출


세계사상 유례없이 가혹했던 일제의 식민통치는 우리의 문화유산에도 원상회복이 힘들만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먼저 직접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해진 문화재 약탈을 들 수 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경멸하면서도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조선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는 감출 수가 없었다. 이들의 조선문화에 대한 경외에 가까운 숭배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배경으로 야만적 수탈행위로 변질되어 나타났다. 문화재에 대한 약탈, 도굴, 파괴, 일본으로의 반출 등은 질량에 있어 대략적인 추정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전방위로 이뤄졌다.

문화재 수탈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진행됐다. 도자기·서화 등 소품에서부터 불상·동종·탑파·고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문화재가 망라됐다. 그런데 이러한 약탈행위를 식민통치기구의 권력자들이 앞장서 자행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고분 도굴의 공공연한 조장자인 동시에 가장 유명한 고려청자 장물아비였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역대 총독들은 예외 없이 무소불위의 힘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범죄행위를 지원했다. 총독 각자가 약탈의 수괴였으며 총독부는 충실한 수행기관이었다.


진흥법사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일제 초기에 일본인에 의해 서울로 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까지 그 반입시기 및 경위가 명확치 않다. 특히 일본인 조작에 의해 탑의 원위치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없다.
총독부 직원들이 개입하여 실록을 포함한 오대산 사고의 소장본을 밀반출하였으며, 최대의 문화재 약탈범이었던 오쿠라는 총독부의 지원 아래 경복궁 자선당을 통째로 옮겨가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화재로 불타버려 영원히 멸실되고 말았다.


극심한 도굴로 우리민족에 심한 상처 남겨

이렇게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선을 문화적인 야욕을 채우는 장소로 삼아 철저히 유린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굴행위는 전통윤리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우리 민족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와 자괴감을 남겨주었다. 송산리 고분 등 수많은 고분들이 연구라는 미명아래 공공연히 도굴됐으며, 그 외 한탕을 노린 도굴은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나아가 일본인들은 '굴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산골짜기의 절터라든지, 한 두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는 몰락한 명찰(名刹), 그 밖에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유적지에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화재를 빼내고, 그것을 팔아 큰 돈을 챙기는 불법행위를 감행했다.

대대적인 불법적 문화재 약탈이 있었건만 해방 후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 당시 한국정부는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 개인이 약탈한 문화재 4479점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개인 소유를 제외하고 국공유 1432점만 반환하는데 그쳤다. 현재 일본 내의 우리 문화재는 공개된 목록만으로도 3만4000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개인이 은닉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하면 실제 숫자는 수십 배에 달할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재를 둘러싼 과거사 청산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미해결 과제인 것이다.


충주 탑평리 7층 석탑(국보 제6호): 국내에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최고(最古) 최대 석탑. 1917년 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일제는 기단부의 탱주를 없애고 면석만 나란히 맞추어 복원하는 등 완성도를 의도적으로 훼손했다.


다음으로 일제는 조선 국가의 전통과 문화적 자부심을 말살하기 위해 집요하게 유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훼손에 착수했다. 그 대표적인 희생물이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이었다. 이미 1910년부터 소네 통감 아들의 지휘하에 경복궁의 공원화 작업이 시작됐으며 1915년에는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물산공진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경복궁까지 훼철, 공원화로 민족 자존심 짓밟아

총독부는 공진회를 핑계로 경복궁을 마구 훼철시켜 민족의 자존심을 아예 짓밟으려 획책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 도처의 문화재를 이전하여 공진회장에 전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주에서 옮겨온 철불 등이다. 원주는 예로부터 철불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고적조사를 담당한 세키노의 조수인 야츠이 세이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주군에서는 제법 수확이 있었답니다. 원주읍 부근에는 신라 말의 철불, 석불, 석탑이 흔해 빠지게 널려 있는 것이 경주도 놀라 맨발로 도망을 갈 정도입니다. 철불은 좌상으로 5구가 있고, 석불도 좌상의 것이 7구 가량 있는데 ……"
여기에 나타난 철불·석불·석탑 등 대부분을 공진회장으로 싹쓸이 해가는 바람에 철불의 고장인 원주에는 더 이상 철불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원주 철불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전국 각지의 문화재가 이러 저러한 사유로 인해 현재 그 위치를 떠나있고, 그 이후의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는 것도 부지기수다. 공진회 이후 경복궁은 각종 박람회 전람회 등의 단골 행사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창경궁은 유원지화하였으며 창덕궁도 도로공사 등에 의해 훼손됐다. 유서 깊은 성곽이 파괴되는 등 수많은 문화재가 근대화의 미명아래 수난을 당했다. 또 남산의 국사당을 철거하고 신궁을 세웠듯이 전국에 걸쳐 명당을 골라 신사를 조영했다. 이는 능욕에 가까운 정신적 침해라 할 수 있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강원시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의 법천사에 있었던 승탑.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무단 반출됐다가 1915년 반송돼 경복궁에 세워졌다 1990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일본의 발악적인 문화재 파괴는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1943년 조선총독부가 각도 경찰부장에게 내린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 지시는 반달리즘적인 폭거였다. 항일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는 민족적인 사적들을 모조리 파괴하려고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철거대상으로 지정한 왜적 격멸 기념비는 ‘명량대첩비’·‘좌수영대첩비’·‘행주전승비’·‘타루비’·‘사명대사석장비’·‘황산대첩비’·‘정발전망유지비’·‘김시민전성각적비’ 등 20여기에 이르렀는데 이 중 일부는 실제 폭파되거나 명문이 훼손되는 일대 수난을 겪게 됐다.

극히 일부 사례를 예시했지만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수난사는 민족문화 나아가 민족 말살정책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 전모에 대한 연구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광복60주년이라는 전기를 맞아 일제에 의해 반출되거나 파괴되고 변형되어버린 문화재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자료로 남기는 한편, 그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명명백백하게 알리는 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중요한 의무라 할 것이다.

끝으로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지금 유형문화재에 대한 복원사업은 많은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더불어 일제에 의해 오염된 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점검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종묘제례악무와 같은 무형문화재나 민속 등에도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고 변형된 부분이 없는지 철저히 조사하여야 한다.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에 일제잔재가 남아있다면 문화입국을 표방하는 나라의 자존심에 관계되는 문제일 것이다.


뺏아가고, 얻어가고 싸게 사가고…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7년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고 약탈 당했으며 인쇄와 도자기 기술자까지 강제로 끌려갔다. 당시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열등했 던 일본은 우리의 전적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약탈해갔다.》
문화유산은 그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문화유산중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되며,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면면히 이어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하는 것은 뭐니해도 전적(典籍) 문화유산이 단연코 으뜸일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찍부터 고도의 문화를 소유한 슬기로운 문화민족이었다. 신라시대에 벌써 목판 인쇄술이 싹터 751년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해정(楷正)한 서법으로 정교하게 새겨, 질긴 닥으로 뜬 한지에 아름답게 찍어냈다. 특히 상품(上品)의 한지는 두껍게 떠서 닥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했으 므로 반드럽고 빳빳하고 희고 윤이 나며 사뭇 질겨 오래 견딜 수 있었다. 천년이 지나도록 전적문화재가 전래된 것도 바로 질이 좋은 종이 덕분이라 하겠다. 이렇게 싹튼 신라시대의 목판인쇄술은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격상시킨 고려로 접어들자 우후죽순과 같이 세워진 사찰에 의해 계승돼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초인 1007년에 개경의 총지사(摠持寺)에서 판각한 보협인다라니경은 이보다 앞서 중국 오월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판각술이 월등 정교한 독자적 판본이다.

초기부터 이렇듯 고도로 발달한 목판 인쇄술을 소유했기 때문에 외침에 시달리면서도 마침내 저 방대한 『초조대장경』에 이어 『속장경』 그리고 『재조대장경』을 훌륭하 게 판각해냈던 것이다.

또한 사찰에서는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격조높은 판각술로 불서(佛書)를 다양하게 간행하여 오늘에 물려주고 있다. 관서에서도 과거시험과 유생들의 면학을 위해 정종조부터 관판 간행에 착수해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사자집(經史子集) 등 많은 책을 찍어 냈다. 그리고 13세기부터는 중앙관서의 서적포(書籍鋪)에서 활자를 주조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내기도 했다.

조선조는 숭유우문책을 적극 펴기 위해 고려 서적원의 제도를 본따 태종 3년(1403)에 주자소를 새로 설치했다. 이 주자소에서는 조선말기까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숱한 종류의 활자를 정교하게 주조하고 각종 분야의 책을 고루 찍어 여러 관서와 문신들에게 내려 주면서 면학에 힘쓰도록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다량으로 생산된 귀중한 전적들이 잦았던 외침과 전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약탈·유출되어 국내보다도 오히려 해외에 더 많이 소장되고 있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귀중한 전적이 가장 많이 유출된 나라는 일본이다. 그 다음이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될 것이다. 그 유출은 대체로 수탈, 불법반출, 사급(賜給), 수탈식 저렴수집반출 그리고 음성적 유출 등으로 구분해 볼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유출 사정을 꼼꼼히 살펴 자성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여러므로 검토, 강구해야 할 것이다.


고려후기∼조선초기 왜구의 수탈
원나라의 정사 간섭으로 우리나라의 질서가 어지럽게 되자 13세기 후기인 충렬왕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시작됐다. 일본 국내가 가마쿠라막부의 멸망으로 천황측과 아시카 가막부측이 남북조로 갈라져 서로 싸우는 난세로 접어들자 왜구는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무사들은 치열한 싸움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연 불교를 숭상했 다. 중앙과 지방의 호족들은 무사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투어 사원을 짓고 불상과 불경을 구하려 헤맸다.

이들은 우리 나라 해안 전역에서 오지로 깊숙이 침입함은 물론 멀리 중국의 연안까지도 왕래하면서 약탈행위를 자행했다. 약탈행위는 15세기초인 무로마치(室町)초기까지 게속됐다. 왜구의 근거지로는 일본의 3도, 즉 대마도(對馬島), 일지도(壹岐島), 마쓰우라(松浦)가 손꼽혔다.

왜구들의 약탈행위가 어떻게나 심했던지 고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은 대마국 수호(對馬國 守護)는 악도 90명을 잡아 고려사신의 면전에서 참수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단속에 지나지 않았다. 왜구들은 작게는 2, 3척에서 크게는 5백척 정도의 대선단을 조직해 우리나라의 연해지방은 물론 내륙까지 깊숙히 쳐들어 와서 물건운반선을 약탈하고 관서 곡물창고의 곡식, 사찰의 불경, 부녀노비 등을 탈취 또는 나포해 갔다.

왜구의 침탈 기록은 조선 세종의 대마도 정벌이 있기전까지 빈번하게 나타난다. 3도 중 상·하지역으로 구분된 마쓰우라의 해적 일당이 특히 악명이 높았다. 일본의 유명 작 가 후지와라(藤原定家)는 그의 일기에서 이들이 고려에 쳐들어가 민가의 재물을 탈취해 팔거나 물물을 교환하며 살았다고 적고 있다. 그 일족이 바로 시사(志佐)가문으로 성이 미나모토(源)였다.

이들 일당은 약탈품을 서해도와 큐슈(九州)를 다스리는 다자이후(太宰府)에 헌납하거나 내륙의 부호들과 거래하기도 했다.

다자이후를 통해 거래된 대표적인 전적으로는 나라(奈良) 동대사(東大寺) 소장의 유명한 고려속장 초간본인 『황엄경수소연의초』 20권 완질과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도쿄 다이토큐(大東急)문고로 들어간, 역시 고려속장 초간본인 『정원신역화엄경소』 상권을 들 수 있다. 우리 국내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국보급의 유일한 초간 귀중본이다. 다자 이후를 통해 거래되었는지 혹은 다른 경로를 통해 거래되었는지 자세치 않으나, 교토 남선사(南禪寺)로 들어간 전적에 우리의 귀중한 『초조대장경』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 진 것 중 가장 많은 수량이지만, 거래된 경전에 결질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역시 약탈품임을 알 수 있다. 정식으로 거래된 수입품이라면 완질이라야 맞기 때문이다. 이 결질의 초조대장경이 송·원본과 함께 배열돼 있음을 확인했다.

약탈된 초조대장경 중 『대반야경』만 전래되고 있는 곳은 대마도의 장송사(長松寺)와 일지도의 안국사(安國寺)다. 앞의 것은 본시 같은 섬 금조산(琴照山)에 있던 강덕사(江德寺) 주지가 입수해 봉안해온 것인데, 그뒤 절을 운영하던 지방유지의 몰락으로 절이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은 대마역사민속박물관(對馬歷史民俗博物館)으로 이관, 보존중이다.

뒤의 것은 마쓰우라 일당이 약탈해온 것으로 본래 나가사키(長崎) 마쓰우라 반도 히젠(肥前)의 나가하마(長濱) 오소명신(五所明神)에 바친 것으로 1486년 이 지방의 마유미 (眞弓)가가 일지도 수호대관(守護代官)으로 부임할 때 가지고 와서 안국사에 봉안했다. 간본(刊本) 여섯 군데에 고려국 김해부호장(金海府戶長) 겸 예원사(禮院使) 허진수( 許珍壽)가 정종 12년(1046)에 어머니의 수복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복(佛腹)에 공양한 기록이 있다.

이 간본은 총 6백권 중 2백19권으로 빠진 부분은 비구·비구니에게 나누어 쓰게 한 묵사경(墨寫經)으로 보충하고 있는데, 이에는 한결같이 「서백사장」(西伯寺藏)이 권머리에 표시되어 있다. 경상도 김해 근처에 있던 서백사(西伯寺)의 두 구의 불복에 공양된 것 중 하나를 몽땅 약탈해 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뜻밖에도 작년 봄 그 일부가 국내로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2차에 걸쳐 책을 실사했다. 일본에서 이 책은 튼튼하게 만든 자그마한 벽돌집에 봉안해 철문을 굳게 닫아 놓았고, 그 지방의 교육위원회와 절 주지가 동시에 참석해야만 열고 닫을 수 있는데 어떻게 반출되었을까. 그들의 공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우리로서는 약탈당한 것이 되돌아 왔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그 중 몇 점이 벌써 성급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문화 청에서 조사·등록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괜히 긁어 부스럼 내는 게 아닐까 적이 염려된다. 서지 전공이 아닌 이들이 지정에 관여해 그런 사정을 몰랐던 듯하다. 이들 환품 중에는 연대를 가필 조작한 것도 있으므로 그 감식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새 갈래로 흩어진 고려사경
약탈된 전적문화재 중에는 호화장엄하게 꾸민 『고려사경』 또한 적지 않다. 이것은 대체로 세 갈래로 거래되어 흩어졌다. 그중 한 갈래는 왜구의 소굴 근처인 규슈지방의 사찰 신사와 호족들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 그 전래본을 조사한 바로는 후쿠오카(福岡) 현의 관음사(觀音寺)·동장사(東長寺)·다자이후(太宰府)천만궁(天滿宮)·구로다(黑田)가, 나가사키(長崎)현의 상락원(常樂院), 사가(佐賀)현의 가가미신사(鏡神社)·경은사(慶誾寺), 나베도리(鍋鳥)가에서 소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사경은 감지(紺紙) 또는 상지(橡紙)에 금·은니(金·銀泥)로 정성껏 쓰고 변상(變相)을 그리고 표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으로, 호화정엄한 불교미술 작품들이다.

특히 동장사의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은 1135년에 사성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감지은니경이고, 가가미신사의 『법화경(法華經)』은 두터운 양질의 장지에 큰자로 정성들여 묵서한 것으로 그 품이 우아정교하나 아깝게도 불에 탄 조각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로다가의 『능정일체안질병다라니경』(能淨一切眼疾病陀羅尼經)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간 국한문 조선사경으로 감지에 금니로 써서 이채롭다.

나베도리가의 『법화경』은 7권7첩본과 7권8첩본의 2종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감지에 금니로 사성한 우아미려한 비식경(賁飾經)이다. 그중 특히 7권8첩본은 우리나라 사경에서도 별로 볼 수 없는 특이한 변상도다. 이러한 화법이 그뒤의 일본사경에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 갈래의 경로는 일본 서해안을 연하여 산간의 여러 사찰과 거래해고 또한 와카사만의 쓰루가(敦賀)를 거쳐 내지의 여러 사찰과 거래한 것을 들 수 있다.

왜구의 소굴에서 가까운 시마네(鳥根)현의 마쓰에(松江) 천륜사(天倫寺)에서 감지에 은니로 화려하게 사성한 『법화경』을 접하고 그 품격 높은 꾸밈에 감탄했으며, 한편 경내에 고려종이 아직도 버젓이 걸려있는 것을 보는 순간에는 격분의 감회에 젖기도 했다. 후쿠이(福井)현의 고바마(小濱) 우하사(羽賀寺)에도 감지은니의 고려사경 『법화 경』 7권 완질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어 필자를 흥분케 했다.

해안을 따라 더 올라간 가나자와(金澤)현의 대승사(大乘寺)에는 천륜사(天倫寺) 소장의 감지은니 『법화경』 권1이 분산 거래돼 간직되고 있었다. 그리고 쓰루가를 거쳐 내지로 거래된 것으로는 시가(滋賀)현의 서복사(西福寺)에 백지 묵서의 『칭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佛攝受經)』, 서명사(西明寺)에 감지금니의 『소실지갈라공양경(蘇悉地羊曷羅供養經)』이 그 초입에서 거래된 것에 해당한다. 그중 뒤의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의 것으로 오래된 품격을 지닌 귀중한 사경이다.

좀 더 내지로 거래된 것으로는 교토의 각 사찰을 비롯해 고베(神戶)의 복상사(福祥寺), 도요하시(豊橋)의 태평사(太平寺) 그리고 간사이·긴키(關西·近畿)지방의 여러 박물 관으로 들어간 많은 사경을 들 수 있다.

그 모두가 불교미술의 극치를 이룬 격 높은 고려사경이지만, 그중 특기할 것으로는 교토박물관 소장의 감지금니 『대보적경(大寶積經)』이 우선 손꼽힌다.

고려 목종 9년(1006)에 왕태후 황보씨(皇甫氏)와 김치양(金致陽)이 동심발원하여 최성삭(崔成朔)이 사성한 가장 오래된 비식경이다. 나라(奈良)의 야마토문화관(大和文化館)과 나고야(名古屋)의 도쿠가와(德川)미술관 소장의 감지금니 『화엄경』 잔권들은 표지의 장식, 경문의 서법, 변상도의 화법이 천하일품의 정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약탈된 사경이 흘러들어간 세번째 갈래의 경로는 다자이후에서 거래돼 육로를 거쳐 내지로 공급된 것. 현재 도쿄의 네쓰(根津)미술관에 있는 감지은니의 『법화경』 7권 7첩 과 『화엄경』 1첩이 어느 경로로 몇사람의 손을 거쳐 들어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것들도 격찬사가 저절로 되풀이 되는 뛰어난 정수작품이다.


임진란 때 왜구의 수탈
전국의 난세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란을 일으켜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약탈품으로 으뜸을 차지한 것이 바로 전적문화재였다.

정유재침 후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패권쟁탈 싸움이 벌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승리로 돌아가자, 약탈해간 전적 또한 거의 그에게 들어갔다. 이에야스는 이들 전적 중 2백부를 그의 학승 산요(三要元佶)가 경영하는 후시미(伏見)학교에 기증하고, 그밖의 것은 모두 자기 수중에 넣었다. 이것이 바로 후지미테이(富士見亭)) 문고를 거쳐 만년에 설치된 스루가(駿河)문고의 장서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들 장서는 이에야스가 죽은 뒤 일부가 에도(江戶)성의 모미지야마(紅葉山)문고로 들어가 오늘의 내각(內閣)문고와 궁내청서능부(宮內廳書陵部)장서의 토대가 되었다.

그중 내각문고에는 에도 막부의 유학교관인 하야시(林羅山)의 개인문고로 유명한 창평판학문소(昌平坂學問所)의 구장서를 비롯하여 붕고(豊後)의 사에기(佐伯)번주 모리( 毛利高標)의 구장서 등 4~5개 문고본이 합쳐졌다. 그리고 스루가 문고의 대부분은 이에야스의 세 아들에 분양되었다. 오와리(尾張)가의 호사(蓬左)문고(나고야), 기이(紀伊)가의 난키문고(와카야마현), 미토(水戶)가의 쇼코칸(彰考館)문고(이바라기현)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 난키 문고본은 흩어졌고, 쇼코칸 문고본은 2차세계대전 때 대부분이 유실됐 다. 호사문고본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이 간직되어 있다.

이에야스가 학승 산요의 후시미 학교에 기증한 전적중 일부는 그뒤 산요가 교장으로 부임한 아시카가(足利)학교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임진·정유양란에 약탈해 간 전적중 그 일부분은 번주의 여러 장수와 참모 또는 시의들이 그대로 소유한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도요토미의 막료로 참전한 마에다(前田利家)번주가 탈취해간 전적은 그 가문이 대대로 이어 받아 존경각(尊經閣)문고를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대항하다 굴복한 우에스기(上杉景勝)번주의 흥양관(興讓館)장서도 현재 요네자와(米澤)도서관에 그 일부분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도요토미의 비서겸 시의였던 마나세(曲直瀨正淋)에게 준 전적에는 그의 증손이 「양안원장서」(養安院藏書)라는 인장을 찍었다. 그 책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간직되어 있으며, 멀리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까지 발견됐다.


일제의 불법 반출
일제가 불법 반출해 간 전적중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오대산사고본』이다. 1911년 3월 조선총독부는 모든 사고본을 강제로 접수했는데, 오대산사고본은 바로 강릉군 주문진을 거쳐 도쿄대학으로 반출해 갔다. 그것이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으로 그 대부분이 소실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실록을 비롯한 전적의 일부분은 잔존, 비장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중 실록 27책이 1932년 5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관되었으나, 그밖의 실록과 전적의 일부에 대해서는 문화재반환때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필자는 1966년 유네스코연수계획에 따라 일본 전국에 걸쳐 한국전적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도쿄 대학에서도 전적을 조사하였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해 5월 우리의 문화재 반환이 이루어진 직후여서 잔존 또는 미반환 전적이 발각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적 문제가 걸린 전적은 요구하지 않을 터이니 그밖의 것을 잘 보여줄 것을 부탁하며 일주일여에 걸쳐 실사했다.

그런데 우연한 일이 있었다. 1987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개최된 국제도서관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정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 오는 기차칸에서 일본대표단중 한 사 람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청해 왔다. 그가 바로 도쿄 대학에서 한국전적을 조사했을 때 도서과장을 지낸 분이었다. 그는 자기가 백제인 피를 이어받은 후예라면서 조사 당 시 진실을 말하지 못했음을 못내 미안하게 여겼다. 그리고 귀국 후에도 정초 때마다 꼬박 연하장을 보내왔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볼때 지금도 반환되지 않은 잔존 자료가 남아 있을 것으로 믿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지게 되길 기대한다.

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일제 통감부가 구한말 때 불법 대출후 반환하지 않은 전적들이다. 1905년 12월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통감의 명의로 규장각에서 대출해간 책중 반 환되지 않은 것을 문서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搏文)가 일본 궁내청도서료로 보내준 규장각본 33부 5백 63책과 통감부가 초기에 강제로 접수한 44부 4백 65책, 합계 77부 1천 28책에 대하여 반납하지 않고 「왕족과 공족의 실록 편수상 필요하니 양도해 달라」는 공문과 그 목록, 그리고 소네 아라스케가 통감으로 있을 때 불법으로 대출해준 책의 목록이 각각 규장각 도서관계 서류철에 보존되어 있음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이 모두 문화재반환 때 누락되었다. 그박에도 여기에는 불법으로 대출해간 우리 전적이 더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기필코 이들 전적을 조사하여 돌려 받아야 할 것이다.


사급(賜給)에 의한 유출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에 걸쳐 일본 국왕을 위시한 오우치(大內氏) 등의 여러 수호대명(守護大名),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대마도주(對馬島主), 일지도주(壹岐島主)등이 왜구의 약탈 행위를 단속하고 피랍된 사람들을 송환한다는 조건으로 토산물을 진상하며 『대장경』 『대반야경』을 비롯한 불교서적의 사급을 요청해 왔다.

고려 창왕 원년(1388) 7월과 공양왕 4년 1392) 6월에 요청해 온 『고려대장경』이 사급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조 3년(1394) 12월 구주절도사 미나모토(源了俊)가 청구해 온 것에 대해 태조는 회례사 김적선(金積善)을 파견하기까지 하면서 2부를 사급해 주었다.

이것이 조선왕조에서는 최초의 대장경 사급인 듯 싶다. 그뒤 태종 13년(1413) 3월과 동왕 16년(1416) 8월에 대마도주가 또 사급을 신청해 왔다. 충청 경상도의 여러 사찰이 소장한 『고려 대장경』에서 가려내어 완질을 사급해 주었다. 대마도주는 세종 16년(1434) 3월에 이어 동왕 27년(1445) 5월에도 사급을 요청해와 국내소장에서 한 질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이번에는 일본 국왕이 성종 11년(1480) 5월에, 그리고 야마나(山名)씨가 동왕 17년(1486) 4월에 각각 대장경의 사급을 요청해 왔다.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 각처에서 빈번히 청구해 가서 남은 것이 없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음 해에 대마도주는 아버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신당에 봉안할 것이라며 사급을 각별히 청해 왔다. 정부는 그 효성심을 가상하게 여겨 개인소장에서 구하여 또 한 질을 특사해 주었다.

대마도주와 대마도의 수직왜인(受職倭人)은 대장경 외에도 6백권으로 된 『대반야경』을 무려 9차례나 사급을 요청해 왔다. 몇번이나 사급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종 10년(1428) 8월, 동왕 17년(1435) 2월, 동왕 26년(1444) 윤7월과 세조 10년(1464) 7월에 각각 특별히 사급된 것만은 뚜렷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밖에도 대마도주는 피랍될 사람의 송환조건으로 일반 불교서적의 사급을 빈번히 요청해 왔다. 태종 14년(1414) 9월에 이어 세종 19년(1437) 2월과 동왕 23년(1441) 1월에 세차례 『법화경』을 요청하여 하사 받았고, 세조 7년(1461) 4월에는 모친상을 이유로 『법화경』, 『번역명의』, 『기신론』, 『금강경』, 『증도가』, 『반야심경』, 『능업 경』, 『대비심다라니경』, 『천태사교의』, 『성도기』, 『원각경』등 많은 불교서적을 요청해 하사 받았다.

또 세조 10년(1464) 2월과 7월에도 『법화경』, 『금강경오가해』, 『성도기』, 『번역명의』, 『능엄경』, 『기신론』, 『영가집』, 『증도가』, 『신주법화경』, 『천태시교 의』, 『범망경』등이 특별히 하사되는 은전이 베풀어졌다. 이들 불교서적은 대부분이 세조 즉위 이후에 간행된 목판본과 활자본들이며 그 일부분이 지금도 대마도주 종가의 만송원(萬松院)에 간직돼 있다.

그리고 일본국왕은 대담하게도 해인사의 『고려대장경판』의 사급을 요청하기도 했다. 세종 5년 (1423) 12월 25일 조의 실록기록을 보면, 일본국왕이 정사 규주(圭籌)외 1백35명과 배 10척을 보내어 그 사급을 간청해 왔다.

세종은 대장경판이 우리나라에도 오직 한벌밖에 없으므로 응할 수 없으며, 그 대신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 『한자대장경』 전질 1부를 주겠다고 하였다. 일본정 사는 자기네들은 대장경판을 구하러 온 것이며, 떠나올 때 경판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으므로 그냥 돌아가면 반드시 식언죄를 받을 것이 뻔하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단식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타일러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 세종이 애지중지하던 『인왕호국경』, 『아미타경』, 『석가보』, 『화엄경』의 금자사경과 『고려대장경』 1부를 더 주고 회례사까지 파견해준 일이 있었다. 위의 하사품 중 특히 『주화엄경판』은 고려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구법활동을 할 때 판각을 주문해 수입해 온 무려 2900여판에 달하는 거질의 귀중한 속장경판이다. 이들 경판과 장경은 교토 상국사(相國寺)로 들어가고, 금자사경은 막부어소로 들어갔음이 문헌에서 밝혀지고 있다.

우리 전적의 사급은 그뒤로 임진란을 겪고 통교가 다시 이루어진 17세기초에 시작해 19세기초까지 이루어졌다. 12차에 걸친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예물로 내려준 전 적과 대마도주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내려준 전적들이 대마도주 종가문고에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중에는 「운각장」(芸閣藏)의 인장이 찍힌 다양한 판본들이 두터 운 장지에 정교하게 인쇄 장책되어 있어 그 품위가 한결 돋보인다.

그리고 이들 장서 중 경학서, 성리학서, 역사지리서, 정법서, 시문학서, 의학서, 산법서 등 많은 책이 에도막부와 막부에서 세습적으로 관학을 맡아온 하야시(林羅山)가문 그리고 개인에게까지 차람 또는 대여된 후 반납되지 않았음을 대출장부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학문과 문화가 일본의 문교(文敎) 개척과 진흥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정부가 사급한 전적 중, 현재 고려재조대장경이 간직되어 있는 곳으로는 대마도의 관음당(觀音堂), 도쿄의 증상사(增上寺), 와카야마(和歌山)의 금강봉사(金剛峯寺), 가가와(香川)의 법연사(法然寺), 오카야마(岡山)의 길비진(吉備津)신사, 도치기현의 윤왕사(輪王寺), 교토의 건인사(建仁寺) 등을 들 수 있고, 일반전적이 많이 간직되어 있 는 곳으로는 대마도주 종가 만송(萬松) 문고를 비롯해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대마도경룡원(慶龍阮) 등을 들 수 있다.


수탈식 염가수집에 의한 유출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자를 말살하고 황민화 교육을 강행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수탈정책을 써서 일본인에게 기본급여의 몇갑절이나 되는 식민지수당을 지급해 우리와의 빈부 차이를 극대화시켰다. 게다가 연구자와 교수들에게는 연구비조로 분에 넘치는 대우를 했다. 그리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해진 그들은 우리의 귀중한 고문서와 전적을 저렴한 값으로 서로 다투어 사들였다.

그들에게 우리 전적의 구입은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 실례를 하나 들어 보자. 일제시대부터 광복 후 60년대까지 고서적상을 경영해온 모서림의 주인은 경성제대 일본 인 교수들은 상대로 우리 전적의 공급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는데, 특대우를 받는 그들에게는 책값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책값을 군말없이 지불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연말이 되면 사례조로 금일봉까지 주며 끊임없는 책 공급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 가난에 쪼들린 우리로서는 이것이 기실 눈 뜨고 당하는 식민지적 수탈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전적에 매료된 그들은 우리나라 강점초기부터 「조선고서간행회」를 마련해 우리의 희귀한 고문서와 전적에 대한 정보를 전국적으로 수집하는 한편, 전국의 경찰서에 연락해 그들의 사전 조사와 안내를 받고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샅샅이 발굴했다. 그리고 수집한 자료가 많이 쌓이자 서물동호회(書物同好會)를 조직, 정기적으로 모임을 개최해 조사한 책의 서지적 문제를 토론하고 그 내용을 회보에 발표하기를 제20호에 이르렀다. 그 결과 굴지의 일본인 장서가들이 속출하여 우리의 귀중한 전적을 거의 휩쓸다시피 헐값으로 거둬들였으니, 그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제시대 우리의 전적을 다량으로 수집한 굴지의 장서가와 한국전적을 소장하고 있는 곳을 열거하여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쪾마에마(前間恭作):재산루(在山樓) 장서목록(동양문고 조선본)

쪾아사미(淺見倫太郞):아사미문고목록(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쪾사토(佐藤六石):사토한국본목록(오사카부립도서관 소장)

쪾가와이(河合弘民):가와이문고 한국본목록(교토대학도서관소장)

쪾도쿠토미(德富蘇峰):세이키도 선본서목(오차노미즈도서관 소장)

쪾가네사와(金澤庄三郞):조선서적목록(다쿠소쿠안문고소장)

쪾시데하라(弊原坦):조선정쟁지(政爭志) 수록

쪾아가와(阿川重郞):아가와문고 조선본목록(도쿄대학도서관 소장)

쪾오구라(小倉):오구라문고 조선본목록(도쿄대학도서관 소장)

쪾이마니시(今西龍):이마니시 수집 조선본 목록(텐리대학도서관 소장)

쪾니시오(西尾)시립도서관 이와세(岩瀨)문고조선본

쪾텐리(天理)대학도서관소장 조선본

쪾동양(東洋)문고 이와자키(岩崎)문고 조선본

쪾일본국회도서관조선관계자료

쪾교토(京都)대학부속도서관 다니무라(谷村)문고 조선본

쪾교토(京都)문학부도서관 조선본

쪾교토(京都)인문과학연구소 조선본

쪾아이치(愛知)대학도서관 간사이(簡齊)문고 조선본

쪾쓰쿠바(筑波)대학 도서관조선본

쪾도후쿠(東北)대학도서관 조선본

쪾야마구치(山口)여자대학도서관 데라우치(寺內)문고 조선본

쪾야마가타(山形)현립 요네자와(米澤)도서관조선본

쪾히로시마(廣島)시립도서관아사노(淺野)문고조선본

쪾세카도(靜嘉堂)문고 조선본

쪾류코쿠(龍谷)대학도서관조선본

쪾교토(京都)부립종합자료관 조선본

쪾미야기(宮城)현립도서관 조선본

쪾닛코산(日光山) 지간도(慈眼堂) 조선본

쪾다이토큐(大東急)문고 조선본

쪾게이오 기슈쿠(慶應義塾)도서관 조선본

쪾에산(睿又山)문고 조선본

쪾요메이(陽明)문고 조선본

쪾가나자와(金澤)현립도서관조선본

쪾토쿄 우에노(上野)박물관(보협인다라니경)

일본 다음으로 우리의 귀중한 전적을 헐값으로 마구 수집해간 나라는 프랑스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94~1935) 이 엮은 대작 『조선서지』(Bibliographie Cor e럑ne) 3책과 그 부록(Suppl럐ent) 1책의 내용을 살펴 보면 한국에서 유출된 전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병인양요 때(1866) 프랑스함대가 강화에 내침하 여 약탈해 간 강도외각(江都外閣)소장의 전적이지만, 대부분은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염가로 수집해 간 전적들이다.

강도외각의 장서는 두터운 양질의 장지로 크고 늠름하게 장책한 대형의 의궤들이다. 총 1백91종 2백97책인데 그중 우리국내에 전혀 없는 것이 38종이나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가 상호 영구대여 전시계획을 추진중에 있으므로 이 정도 소개로 그치겠다. 플랑시 장서는 그가 1886년 한불통상우호조약문서의 교환임무를 띠고 1887년 우리나라에 와서 그대로 서울주재 프랑스공사가 된 이후 1906년까지, 그간 4년간의 도쿄 전속시기를 제외한 16년간 수집한 것들이다. 그의 수집방법은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한 프랑스 여행자가 프랑스공사관에 자리잡고 한국에서 생산된 모든 물건을 산다』는 소문을 우선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일찍부터 상인들이 떼를 지어 오면 조선인 비서에게 물어 물건 내용을 검토한 다음 사들였다. 그는 값을 싸게 불러 응하지 않으면 흥정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으례 다시 와 전날 거절했던 값으로 팔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빈곤한 우리의 현실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헐값으로 사들인 장서를 1887~1891년과 1895~1899년에 두차례 동양어학교도서관에 기증하고, 중요한 전적은 갖고 있다가 1911년 3월 27일과 30일에 파리의 드루 오 경매장(Hotel Drouot)에서 앙리 브베(Henri Vever, 1854~1943)라는 골동품 수집가에게 팔아넘겼다.

이 전적들은 브베가 죽은 뒤 그의 상속인에 의해 1950년 국립도서관에 기증됐는데, 그중 1377년 7월 청주목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주자로 찍은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1972년 「세계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도서전시회에 처음으로 출품돼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이 온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서는 즉시 원본 크기의 흑백 영인본을 만들고 고증적 해제를 국문·일문·영문·독문·불문으로 써서 1973년에 널리 폈냈으며, 1987년에는 이를 다시 컬러영인 본으로 발행하여 우리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인쇄술을 발명한 슬기로운 문화민족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 원본의 국내 반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청주시민은 「직지」 찾기에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 숙원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문화재 보호법의 규제를 떠나서라도 우리들을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잘 가꾸고 간수해 후손에 길이 물려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왕왕 이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여러해 전의 일이다. 나는 고(故) 효성 조명기박사의 연락을 받고 박사의 연구실에서 고려 고종41년(1254)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간행한 유간(惟簡)의 『종문척영집(宗門 英集)』 상·중·하권 1책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처음으로 접하는 유일본으로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였다. 그런데 몇해가 지난 뒤 그 책의 소장처를 확인하려 했으나, 이미 음성적 거래를 통해 국외로 나갔다는 것이다.

조박사는 이윽고 그 행방을 추적해 여러날 일본에 체류하면서 되돌려줄 것을 설득했으나 그 복사물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영인해 그의 『효성선생팔십 송수고려불적집일(曉城先生八十頌壽高麗佛籍集佚)』에 실어 펴내고 타계하셨다. 그 원본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 후손에게 부끄럽고 면목없는 일이 아니 겠는가. 국민 개개인은 물론 관계당국에서도 이런 사례를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여러모로 대책 강구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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