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해사발이야기

2018. 2. 8. 09:33도자 이야기

정겨움을 자아내는 가야토기
정겨움을 자아내는 가야토기. 경주박물관 소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담긴 사발 김해사발(파격미의 고향 김해) 조선사발 이야기에 앞서 가야국의 도자기 문화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가야는 낙랑으로부터 도자기 신기술을 습득하여 그 당시 유행했떤 무문토기 문화를 뛰어넘어서, 토기문화에 혁명을 가져온 나라입니다.


 

이 지역은 독특한 토기인 와질도기(瓦質土器)의 발생지이며, 이 와질도기를 김해식 토기라 부르기도 합니다. 수준 높은 토기문화를 대표하는 이 와질도기는 삼국시대의 뛰어난 토기인 도질(陶質)도기의 탄생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자기 전통을 이어받은 김해는 조선 초기에는 ‘김해 장흥고’란 이름으로 분청 사기를 궁중에 납품을 했고, 지방백자의 생산지로도 유명합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차사발의 고장으로 예부터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400-500여년 전, 조선시대 김해 땅에서 빚어져 일본으로 건너가 유명한 차사발이 된 김해의 사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쇼마루(御所丸)다완이라고 불리는 각굽사발(角高台)

흑백 각굽사발
흑백 각굽사발. 미쓰이당 문고 소장.
1592-1598 임진왜란
끝나고 조선과 일본은 1603년 수교회담을 시작하여 1609년에 수교를 맺습니다. 이때 조선의 대일본 창구는 동래부이며 일본은 쓰시마였습니다. 이때 동래부의 기록인 변례 열집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609년에 일본이 다기보아를 만들어 달라고 하도 부탁을 해서 김해의 사기장을 통해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 간사이 대학 연구보고서 참조.) “

그러면 이 기록에 있는 사발을 알아볼까요?

바로 이것이 일본인이 고쇼마루라고 부르는 각굽 사발로 추정됩니다.
각굽사발이란 이름은 우리 사발에 관심이 있는 분에게도 아주 생소한 이름일 것입니다.
이 각굽사발이 고쇼마루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된 것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정설로 되어 있는 유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고쇼마루는 일본 어용선 이름입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정벌하고 나서 조선으로 타고 갈 배의 이름이 고쇼마루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 그리고 명나라 군대에 의해 패배한 토요토미는 조선 땅에 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토요토미가 죽은 후 일본에는 도쿠카와 정권이 탄생합니다. 이때쯤 조선은 일본의 간청을 받아들여 정식 수교하게 되고(1609년), 그 당시 후리타 오리베(古田織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선생이기도 하지만, 권력을 새로 잡은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차선생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은 지금의 나고야시 부근인 미노 지방의 영주이면서 새로운 도자기 디자인을 창조한 사람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사람의 디자인 풍의 도자기를 오리베야끼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디자인하여 김해에 차사발을 주문 제작한 사발이 고쇼마루라 불리는 각굽사발입니다.

후리타 오리베가 소장했던 활굽사발

사진) 후리타 오리베가 소장했던 활굽사발. 하타케야마 기념관 소장.
이 사발은 와리고다이 자완이란 분류명만 있지 이 사발의 이름(명)은 없습니다. 오리베가 이 사발을 보고 오리베야끼를 창안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오리베풍의 사발은 입대는 전부분을 비틀어 놓고 이것을 마치 주병. 즉, 해변의 모래사장의 기분을 준다며 주병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많이 비틀어 진 것을 답형이라고도 합니다.

백 각굽사발
백 각굽사발. 유키미술관 소장

또한 이 사발을 운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용선 이름이 고쇼마루이기에 일본 이름을 고쇼마루라고 정했던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조선을 정벌하지 못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을 그의 어용선인 배의 이름을 차사발에 부쳐 그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은 이 사발의 전설입니다. ‘고쇼마루’라는 배를 연구한 학자는 도요토미가 조성한 어용선이 조선에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단지,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의 무역항이었던 하까다의 큰 상인이 무역을 하고 있었고 이 상인이 가지고 있는 무역선의 이름이 고쇼마루이며 일본은 이 배를 통해 중국 명나라에도 차사발을 주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사발의 옛 가마터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김해의 사기장을 시켜 빚어 주었다는 조선의 기록과 이 사발의 옛 상자와 또 일본의 옛 책에도 김해에서 주문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해지방의 가마터에서 이 사발을 빚은 것으로 확신합니다.

현재 일본에는 이 각굽사발이 12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조선 사기장들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해의 각굽사발은 ‘흑백각굽사발’과 ‘백각굽사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흑백각굽사발의 특징은 굽이 육각, 칠각, 팔각 등으로 깎여져 있으며, 굽부분은 유약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일본 도자기에서 느끼는 인위적 조작을 통한 변칙적 형태이며, 이런 형을 일본은 답형(畓形)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흑백각굽사발의 화장기법은 붓으로 산화철을 부분적으로 칠하여 추상적으로 마무리하였으며, 전부분(도자기에서 입술이 닿는 부분으로서, 구연(口緣) 부분이라도 한다)을 두툼하게 하여 말차를 마시는데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습니다.
몸체는 물레선 자국을 선명히 남겼으며, 부분적으로 요철 처리하여 차를 마실 때 손맛을 느끼게 했습니다. 질(도자기를 만드는 흙의 순수한 우리말. 태토라고도 함.)은 연질백자의 부드러움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백각굽사발의 형태는 흑백김해각굽사발과 유사하나 화장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질(태토)에서 느껴지는 백색미를 최대한 살린 특징이 있습니다.

김해라고 각인된 김해사발

일본에서 김해다완이라 부르는 김해사발
일본에서 김해다완이라 부르는 김해사발

 

1조선과의 수교를 과시하기 위해 일본의 권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시가 권력을 잡고 에도 시대를 엽니다.

“일본의 권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시가 권력을 잡고 에도 시대를 엽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완전히 일본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돌파구가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자기의 정통성을 인정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교가 되자 조선과의 수교를 과시하기 위해 사발을 빚은 조선의 장소를 차사발에 각인하여 이것을 알리려고 노력한 결과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김해에서 만들어진 사발 중 각굽사발과 긴까이 불리는 김해사발들은 오리베풍이라 불립니다. 이 사발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태토가 반자기질(정선되지 않은 백자토)입니다. 김해 각굽사발과 같이 작위적인 형태입니다.
김해 사발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굽은 칼로 분할한 게 대부분이나 전만 비틀어 놓은 것도 있습니다. 몸체에 선문을 자연스럽게 남기기도 했고, 대부분 전체를 비틀어 놓은 것처럼 보이며, 전체적 형태는 조선의 제기를 흉내낸 것이 대부분입니다.
대체로 굽은 높은 편이며, 전체적으로 기벽(사발의 두께)은 얇습니다. 질은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는 연질 백자토이며, 자연스럽게 유약을 입힌 것을 보면 조선 사기장의 자유정신이 느껴집니다.

 

일본에서 김해다완이라 부르는 김해사발
김해선문활굽사발기타무라 미술관 소장.

 

오리베풍의 김해 주병 다완
오리베풍의 김해 주병 다완
여기서 주병의 의미는 전부분이 해변처럼 구부러져 있다는 뜻입니다.
세이가토 문고장 소장.

 

김해는 백자를 빚는 백토와 분청을 빚는 점토의 생산지입니다. 김해의 흙에 대한 옛 기록은 일본책에 있습니다. 이 책에는 왜관이 1639년에 부산에 개설되고, 1644년에는 부산의 왜관 내에 일본의 주문에 맞춰 사발을 빚는 가마가 지어 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마에서는 진주백토, 김해 적감토 그리고 김해 옹토를 썼다고 합니다. 김해 적감토는 찰기(점력)가 없는 백토에 찰기를 주고, 또한 약간 부드럽고 붉은 맛을 위해 백토에 섞어 쓰는 흙으로 생각됩니다. 김해 옹토도 역시 백토에 섞는 흙이나 때로는 약토유(흔히 말하는 이라보유)처럼 유약으로도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약은 물토와 재를 섞은 투명유를 썼다고 생각됩니다. 불때기(소성)가 환원성이 강한 중성불이라 여겨집니다.

임진왜란 때, 김해는 왜군의 주둔지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카라츠야끼라는 유명한 도자기 마을이 있습니다. 이 지방의 도자기의 시조는 나가자또라는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14대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나가자또 가문이 김해 아니면 웅천에서 납치된 사기장입니다. 그리고 이 나가자또의 조선 이름이 ‘또칠(又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리따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어서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 참평이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일부학자는 고향이 충청도라 하고 혹은, 김해라고도 합니다.

아리따에는 이참평 못지 않은 사기장이 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남편과 함께 김해에서 납치되어 남편은 일찍 죽고 이 분이 여자의 몸으로 아리따의 백자 제조에 큰 공헌을 했다 합니다. 일본 기록에 이분의 일본 이름은 ‘백파선’, 머리가 흰 나이든 여자 신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백자는 대부분 경질(硬質)백자가 많습니다.
연질(軟質)백자사발을 골동상에서는 ‘긴까이’(김해의 일본식 발음)라 부르고, 경질백자사발은 백자라 부릅니다.
일본에서는 이 연질백자사발을 ‘카타데자완(堅手茶碗)’라고 부릅니다.
경질백자는 유약의 빙열(氷裂:균열이라고도 함.)이 적으며 태토가 자화(磁化)되어 강한 느낌을 주는 단단하고 견고한 백자입니다.

연질백자는 김해를 비롯한 경상도지방에서 다수 발굴됩니다.
그러나 이 연질백자는 경상도 뿐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에서도 수는 적으나 발굴되었습니다.
김해에서만 발굴되는 연질백자가 아님에도 골동상에서는 관습적으로 ‘긴까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따라서 ‘긴까이’라는 지역명 보다는 도자기 특성을 제대로 살린 ‘연질백자’라고 불려져야 할 것입니다.

 

지방백자사발
지방백자사발 (카타테 자완)후쿠오카 시립미술관 소장.

 

카타테 자완의 사금파리
카타테 자완의 사금파리김해 대감리 출토.

 

천종실(千種實)이란 이름을 가진 일본을 대표하는 차인(茶人)

2002년 11월에 천종실(千種實)이란 이름을 가진 일본을 대표하는 차인(茶人)이 김해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에 “일본 다도계의 거장이 김해사발을 주목한다”는 타이틀 기사가 있었습니다. “천종실이 혹시 김해를 임나(任那)라는 옛날 일본 땅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조선사발의 아름다움은 일본인들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그 당시에 필자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그들이 외국에 주문한 도자기 중 최고로 평가한 사발이 김해사발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중국에도 많은 도자기를 주문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변형된 도자기 형태의 주문에 대해서도 멋지게 도자기를 빚어낼 수 있었던 조선 사기장의 기술과 정성에 대하여 감탄을 하지않을 수 없음입니다. 김해의 사기장이 김해의 흙으로 빚은 김해의 토속미가 살아있는 사발에 차를 마시고 싶은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출처 : 소설 미술 도자기 사랑
글쓴이 : 꼬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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