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⑤⑥⑦⑧

2018. 2. 26. 21:57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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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 묘사에는 그림보다 유기(遊記)”…강세황의 금강산 유람기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⑤


▲ 강세황과 금강산 유람을 함께 한 김홍도의 그림 ‘해금강 전면’.



[한정주=역사평론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후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나 일삼는 시보다는 차라리 ‘유기(遊記)’가 진경을 묘사하는 데 더 낫다고 말한 강세황은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지은 바 있다.


특히 강세황은 금강산을 그린 정선과 심사정의 그림은 진경을 묘사하는 데 부족하다는 비평과 함께 자신이 비록 금강산의 진경을 그려보고 싶지만 붓이 낯설고 솜씨가 모자란 것이 한이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글과 그림에 모두 탁월한 솜씨가 갖고 있었던 강세황조차도 금강산의 진경을 비슷하게나마 묘사하기에는 그림보다 차라리 글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당시 문인들의 ‘진경 산문’에 대한 애착을 읽을 수 있다.


이때 김홍도 또한 강세황의 금강산 유람에 동행했다. 이 해가 1788년(정조 12년) 가을 무렵으로 강세황의 나이 76세이고, 김홍도의 나이 44세 때였다.


두 사람 모두 그림에 관한 한 이미 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완숙미(完熟美)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그림보다 ‘유기(遊記)’가 진경 묘사에 더 낫다고 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을 유람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세상 제일 나쁜 일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금강산이 유람할 만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은 삼신산에 속하는 신선 지역이요 영험한 진인(眞人)들의 거처로 온 나라에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어린 아니라 부녀자들까지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연스레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 생각건대 옛날에 이 산이 중들의 꼬임에 당한 탓에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어 요즘보다 더 많을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장사치, 걸인, 시골 할망구들이 줄을 이어 동쪽 골짜기를 찾는데 저들이 어찌 산이 어떤 의미를 가진 줄 알겠는가. 다만 죽어도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한 마디 말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사대부 중에 유람하는 사람들이야 어찌 걸인이나 시골 할망구와 모두 같겠는가마는 산의 모양과 물의 기세 중 어떤 것이 기이하고 장대하며 또 어떤 것이 매우 특별한지를 저들이라고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또한 다만 여러 사람을 따라 평생 동안에 단 한 번 유람한 것을 자랑으로 여겨 다른 사람에게 과장하기를 마치 하늘 신선의 궁에나 간 듯 한다. 유람하지 못한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사람 축에 못 낄까 두려워하듯 하니 내가 싫어하면서 세상 제일의 나쁜 일이라고 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중년에 간혹 사람들 중에 이 산을 함께 유람하고자 나에게 청하는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식량과 여비까지 준비하여 굳이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고자 하지 않았다. 속됨을 싫어하는 마음이 산을 좋아하는 것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신년(1788년) 가을 아들이 회양(淮陽) 부사에 임명되었으므로 나도 따라서 회양 관아에 이르렀다. 금강산은 회양에 속한 땅이니 부치(府治)와의 거리가 130리이다. 이때 마침 찰방 김응환과 찰방 김홍도가 영동 아홉 개 군의 명승을 두루 다 유람하면서 들르는 곳마다 그 경치를 그린 후 장차 이 산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가 이때에는 속됨을 싫어하는 마음으로도 산을 좋아하는 성질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9월13일 관아를 떠나서 김흥환, 김홍도 두 김군과 막내아들 빈(儐), 서자 신(信), 친구인 임희양, 황규언 군과 함께 신창(新倉)을 향해 출발했다.


이튿날에도 계속 가다 보니 산길에는 단풍잎이 비단처럼 알록달록했다. 바람이 갑자기 서늘해지더니 때마침 눈발이 날려 옷깃을 때렸다. 아들 신과 김홍도는 말 위에서 퉁소를 불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하면서 서로 화답하였다.


… 날이 저물고 나서야 비로소 장안사에 도착했다. 절은 예로부터 이름난 사찰로 지금은 이미 스러져 다리는 끊기고 누대는 무너졌다. 중들도 뿔뿔이 흩어져 큰 집에 주인은 없고 다만 별 볼일 없는 종들 몇만 남아 서로 의지하며 지키는 듯하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 이튿날은 15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법당 불상을 대강 보았다. 이른바 사성전(四聖殿)이라는 곳 안에는 십육나한상이 있었는데 솜씨가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들었으니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사찰은 산의 초입에 있어서 금강산의 문 역할을 한다. 산의 기세와 시내 소리에 이미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김씨는 대략 모양을 그렸고 나도 절 뜰에 나와 앉아 보이는 것들을 그렸다. 산 높이가 몇 백 길이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장엄하고 훌륭하여 빼어나게 큰 사람이 아무 데도 의지하지 않은 채 우뚝이 서있는 듯하였다.


상봉(上峰) 오른편에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가파르게 깎고 새긴 듯한 모양이라 다른 봉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상봉 왼편에는 조그마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있는데 첩첩이 쌓인 봉우리 옆으로 약간 드러나 있다. 그 빛깔은 은을 녹인 것 같았으니 이것이 혈망봉(穴望峰)이다. 금강산 전체로 보자면 이것은 하나의 저민 고기와 같다.


밥을 먹은 후 옥경대라는 곳으로 향하였다. 하나의 둥근 모양 돌이 백 칸짜리 집채만 하였다. 그 위에 오르자 깎아지른 듯한 벽이 보였는데 의지한 곳 없이 홀로 우뚝하였다. 위는 널찍하고 아래는 좁아서 마치 거울 자루를 경대에 새워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을 명경대라 한다. 터를 이룬 둥근 바위는 이름이 옥경대라 한다. 대 앞 맑은 못이 거울 같으므로 옥경이라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이른바 황천강(黃泉江)이니 지옥문(地獄門)이니 하는 것은 모두 비길 데 없이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붓으로 기록할 만한 것이 못된다.


… 길 옆에는 커다란 바위벽이 서 있었다. 위쪽에 세 개의 불상을 새겼고 왼쪽 면에도 여러 개의 불상을 그렸으며 또 그 옆으로 53개의 작은 불상을 새겼다. 중의 설명이 번다하여서 다 물을 수는 없었다.


또 백화암을 지났는데 암자는 이미 빈 채, 중 하나만 지키고 있다 한다. 암자 옆 땅이 자못 평탄한 곳에 큰 비석 서너 개와 부도 대여섯 개가 있었다. 모두 옛날의 유명한 승려의 유적이라 한다.


표훈사에 들어 조금 쉬고는 길을 꺾어 만폭동(萬瀑洞)으로 향하였으나 폭포는 하나도 없고 큰 시내에서 물이 내리쏟아지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바위벽의 기세가 기이하고 웅장하여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았다. 아래로는 흰 돌이 쭈욱 어지러이 깔려 있었다. 바위 면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커다란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양이 가까워 오므로 서둘러 정양사(正陽寺)로 향하였다. 절은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갈수록 가마꾼이 땀을 흘리며 헐떡거렸다. 길도 매우 위태로웠다. 헐성루 앞에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렸다. 누대에서 금강산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있다고들 하므로 재빨리 누대에 올라 앞 난간에 섰더니 많은 봉우리가 겹겹이 쌓여서 형상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중들이 막대기 끝으로 가리키며 저건 무슨 봉우리, 저건 무슨 골짜기라 하는데 모두 분별할 수는 없었다. 오직 산의 동북쪽 가장 먼 곳에 흰 색 돌기둥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위는 둥근 봉우리가 덮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중향성과 비로봉임을 알 수 있었다.


누대 앞에 온갖 봉우리가 비록 매우 웅장하고 기이할지라도 이것들은 산에서는 예사롭게 볼 수 있는 경치이다. 옥 같은 죽순이 다투어 솟아 있는 듯, 서릿발 드러내는 칼날이 늘어서 있는 듯한 중향봉 같은 것은 이 산 제일의 기이하고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경치이다.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곳임은 물론이요, 중국의 이름난 중에서 보더라도 또한 다시 찾을 수는 없을 곳이다. 몇 폭에다 대략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는데 날은 이미 저물었다.


급히 누대에서 내려와서 표훈사로 돌아오려는데 벽에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육면으로 된 누각 벽에 비단에 그려진 불상이 있는데 그만그만한 중 무리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필적도 매우 최근 것이어서 논할 가치도 없었다.


이미 가마에 올랐는데 가마꾼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천일대까지는 몇 걸음밖에 되지 않으니 올라 보지 않으시렵니까?’ 하기에 곧 웃으며 허락하였다. 길옆에 계수나무가 있다기에 사람을 시켜 꺾어 오게 하여 보니 익가목(益加木)이었다. 그 맹랑하고 거짓됨이 이와 같았다. 그제서야 표훈사에 가서 머물러 잤다.


16일 아들 빈(儐)과 여러 사람들은 수미탑과 원통암 등 여러 곳을 다녔으나 나는 매우 피곤하여서 쫓아갈 수 없었다. 아들 신(信)과 함께 절에 머물며 쉬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다시 만폭동에 갔다. 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는데 날이 저물어서 절로 되돌아왔다. 어두워진 후에야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보고 온 경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또 길이 너무 험하여 가마를 탈 수 없으므로 모두 걸어서 오가느라 매우 지쳤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편안히 앉아 쉰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한밤중에 두 김군이 백탑에서 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표훈사에서 잤다. 17일 우리 일행은 곧장 관아로 돌아왔고, 두 김군은 유점사로 가서 여러 승경을 두루 유람한 후 회양의 관아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였다.


내가 산에 들어가 불과 세 밤을 잤는데 표훈사에서 두 밤을 잤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였다. 유람한 것이 겨우 하루 이틀인데 몇 폭의 진경(眞境)을 그려서 돌아왔다. 금강산을 대강 유람한 사람 중에 마땅히 나와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을 유람한 사람들은 으레 시를 짓는데 혹 하나의 봉우리나 하나의 골짜기, 각 절이나 암자마다 제목을 붙여 각기 한 편씩을 지으니 마치 일정을 기록한 일기와 같다. 만이천봉이 옥색 눈 같다거나 비단결 같다는 표현은 사람마다 똑같으므로 읽고 싶지도 않다. 이런 시들을 읽혀서 이 산을 못 가본 사람들이 마치 이 산 속에 있는 듯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만약 모습을 비슷하게 표현한 것으로 말한다면 오직 유기(遊記)가 가장 좋다. 그러나 이따금은 늘려서 지나치게 설명을 하여 두꺼운 분량으로 만들다 보니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므로 보는 사람을 더 싫증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오직 그림만은 모습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나중에라도 누워서 보며 즐길 수 있을 것인데, 이 산이 생긴 이래 그림으로 나타낸 사람이 없었다.


근래에 정선과 심사정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이름이 났다. 각자 그린 것을 보면 정선은 평소 익숙한 필법으로 자유롭게 휘둘러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상까지도 한결 같이 열마준법(裂麻皴法)으로 어지럽게 그렸으므로 진경을 묘사하는 데에는 논하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반면 심사정은 정선보다는 약간 뛰어나지만 그 역시 고아하고 넓은 식견이 없다. 내가 비록 그려보고 싶지만 붓이 낯설고 솜씨가 형편없어서 할 수 없었다.”



강세황, 『표암유고(豹菴遺稿)』,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강세황 지음, 김종진‧변영섭‧정은진 옮김,『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인용)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강세황의 진경 산문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⑥


▲ 1781년 한종유가 부채에 그린 강세황의 69세 때의 초상(왼쪽)과 강세황의 『표암유고』 권1 시(詩) 부분.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를 어릴 때부터 가르친 그림의 대가(大家)답게 강세황의 진경 산문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다.


전북 부안군에 위치하고 있는 해안인 격포(格浦)를 유람하면서 쓴 진경 산문이 대표적인 경우다.



“오시에 해창에 이르렀다. 해창은 변산 바깥에 있다. 그 앞이 포구와 가까웠다. 포구 밖의 기이한 봉우리는 뾰족하기가 바짝 세운 붓과 같았다. ‘바다 위 뾰쪽한 산 칼날과 같네’라는 시구를 읊조리며 유주의 산수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만조라 물이 점점 불어나 앞길이 물결에 잠겨 있어서 나아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은 후 같이 유람하던 나군과 함께 한가히 이야기하면서 조수가 빠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해가 기울자 물살이 점차 줄므로 말을 재촉하여 떠났다. 길은 매우 질척거렸으며 깨진 돌과 조개껍질이 땅 가득히 쭉 깔려 있었다. 산기슭이 조수에 씻기어서 바위들이 다 드러나 있었는데 영롱하면서도 기묘하여 마치 조각한 듯 아름다웠다. 어떤 곳은 십 리 넘게 쭉 이어지기도 했고, 더러는 끊겼다가 다시 나오기도 했다. 만일 미불을 여기에 불러온다면 일일이 다 절할 겨를이 없을 것이었다.


포복해서 지나가려니 그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조수가 다 빠지지 않은 곳도 있어서 말이 물속을 걷기도 했다. 말 앞의 검푸른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물의 신선이 용을 타고 수면을 다니더라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따금 조수를 피해서 봉우리에 오르기도 하고, 더러는 진창을 만나 정강이까지 빠지기도 하였다. 석양이 바다에 가라앉자 엷은 구름이 그것을 감쌌다. 빛깔은 연지 같고 크기는 수레바퀴 같았다.

일출과 비교해보면 어느 것이 더 기이한 장관인 줄 알지 못하겠다.”


강세황, 『표암유고』, ‘격포유람기(遊格浦記)’

 (강세황 지음, 김종진‧변영섭‧정은진 옮김,『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인용)



아울러 동작나루를 마주하고 있는 한강 가에 있던 자신의 별장 주변 풍경을 묘사한 ‘두운지정기(逗雲池亭記)’는 빠뜨리고 가기에 너무나 아까워 소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멋들어진 산문이다.

글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한양성 남문을 나와 꺾어 약간 동쪽으로 10리를 채 못가면 둔지가 있다. 봉우리나 바위 골짜기는 없는데 산이란 이름은 있고, 둔전은 없는데 둔전이란 이름은 있지만, 이것은 진실로 따져 물을 것이 없다.


들길은 구불구불하고 보리가 웃자란 가운데 수백의 농가가 있다. 두운지정은 그 마을을 서북쪽에 자리 잡았으며 수십 칸 기와집이라 앉거나 눕는 것을 감당할 만하다. 한 칸짜리 작은 누대에서 크고 작은 두 못이 굽어보이는데, 연을 심어 놓아 물고기를 기르고 축 늘어진 버드나무가 둘러싸고도 있다.


앞으로는 관악산과 동작나루를 마주하고 있다. 첩첩의 봉우리는 병풍 같고 흰 모래사장은 명주 같다. 뜰에는 온갖 꽃이 펼쳐져 있고 동산에는 밤나무 숲이 있으니 때때로 들꽃을 따기도 하고 덜 익은 밤을 꺼내기도 할 수 있다. 진실로 오래도록 소일하면서 남은 생을 보낼 만한 곳이다.”



강세황, 『표암유고』, ‘두운지정기(逗雲池亭記)’

 (강세황 지음, 김종진‧변영섭‧정은진 옮김,『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인용)





필운대 꽃구경에 취한 18세기 문사(文士)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⑦


▲ 정선의 ‘필운대상춘’ 27.5x33.5cm.



[한정주=역사평론가]

북학파의 일원인 유득공은 한양의 세시(歲時)와 풍속(風俗)을 자세히 연구해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의 세시와 풍속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최초의 개인 저작이라고 할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여기에는 모두 19가지의 풍속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유상(遊賞), 곧 ‘놀이와 구경’에 관한 한양의 풍속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東大門) 밖의 버들, 천연정(天然亭)의 연꽃, 삼청동(三淸洞)과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에는 산보객이 모두 여기로 몰린다.”


인왕산 아래 필운대는 오늘날 서울 종로구 필운동 88번지 일대로 현재 배화여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다. 이 필운대 옆의 언덕이 육각봉(六角峰)인데 필운대와 육각봉은 봄날 한양에서 꽃구경을 하기에 가장 빼어난 장소였다고 한다.


한양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문사(文士)들은 매년 봄이 되면 필운대와 육각봉을 찾아 서촌(西村), 북악(北岳), 궁궐 그리고 북촌(北村)을 가득 덮은 살구꽃과 복사꽃을 한 눈에 담아볼 수 있는 풍류를 누렸다.


특히 연암(燕巖) 박지원, 다산(茶山) 정약용, 청장관(靑莊館) 이덕무는 물론이고 정조대왕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필운대의 꽃구경’에 관한 시편을 남겼을 정도로 필운대의 산수 풍광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나비가 꽃을 희롱함을 어찌 극성맞다 나무라는가 /

사람들이 오히려 나비 따라 꽃과 인연 맺으려고 달려드네 /

아지랑이 아롱대는 저 너머 한낮 봄은 푸르고 /

마을은 떠들썩하고 도성 큰 길 앞에 먼지가 자욱하네 /

새 울음과 모양새 각각인 건 제 뜻이지만 /

도처에 만발한 꽃은 저 하늘 하고 싶은 대로네 /

이름난 정원에 앉아 둘러보니 어린애는 없고 /

백발의 노인들만 즐기니 작년과 달라진 게 가련하구나.”


박지원, 『연암집』, ‘필운대의 꽃구경(弼雲臺賞花)’



“대나무 사립문은 대낮에도 항상 아니 열어놓고 /

계곡의 다리 내버려두니 푸른 이끼 길게 자랐네 /

갑자기 성 밖에서 손님이 찾아와서 /

꽃구경 하려고 필운대로 간다네.”


정약용, 『다산시문집』, ‘봄날 체천에서 지은 잡시(春日棣川雜詩)’



“구름 개인 서쪽 성곽에 봄 옷 차려입고 거니니 /

눈에 아른대는 아지랑이 백 길이나 날아오르네 /

연일 해 저물도록 늦어지는 것 사양 말라 /

꽃피어 이 놀이 얼마나 행복한가 /

물고기 비늘 같은 만(萬) 채의 가옥에 꽃향기 피어오르고 /

연꽃처럼 솟아 있는 세 봉우리 햇무리를 품었네 /

경복궁의 땅 밝아 백조(白鳥)가 날아오르니 /

내 마음 너희와 더불어 노닐며 모든 걸 잊었네.”


이덕무, 『청장관전서』, ‘필운대(弼雲臺)’



특히 정조는 국도(國都) 한양의 승경(勝景) 여덟 가지를 시로 노래하면서 그중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弼雲花柳)’를 첫 번째로 꼽았다.


필운대와 더불어 정조가 꼽은 한양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이란 압구정의 뱃놀이(狎鷗泛舟), 삼청동의 녹음(三淸綠陰), 자하각의 등불 관람(紫閣觀燈), 청풍계의 단풍놀이(淸溪看楓), 반지의 연꽃감상(盤池賞蓮), 세검정의 얼음 폭포(洗劍氷瀑), 광통교의 비 갠 뒤 달(通橋霽月) 등이다.



“필운대 곳곳마다 번화함을 자랑하니 /

만 그루의 수양버들에 세상 온갖 꽃이네 /

아지랑이 살짝 끼여 좋은 비를 맞이하고 /

새로 지어 빤 비단은 밝은 노을 엮어 놓고 /

백 겹으로 곱게 꾸민 이들 모두 시(詩)의 반려자고 /

푸른 깃대 비껴 솟은 곳 바로 술집이네 /

홀로 문 닫고 글 읽는 이 누구의 아들인가 /

춘방(春坊)에서 내일 아침 다시 조서 내리겠지.

(이상은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를 읊은 것이다.)”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국도팔영(國都八詠)’



유득공의 큰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던 유본학은 ‘유육각봉기(遊六角峰記)’라는 글을 통해 봄날 한양도성과 궁궐과 민가(民家)에 가득 곱게 피어 있는 살구꽃과 복사꽃을 구경하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계해년(癸亥年: 1803년·순조 3년) 봄, 나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나 잘 낫지 않았다. 춘삼월 늦봄, 꽃은 흩어져 날리건마는 여전히 지게문을 걸어 닫은 채 누워 지냈다. 이번 봄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3월10일 선비 한대연(韓大淵)을 찾아갔다. 과거에 떨어진 대연은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도 나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하였다. 함께 서대문 성곽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北山: 인왕산)의 육각봉(인왕산 아래 필운대 옆의 언덕)까지 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때마침 밤새 내린 비가 아침나절 개어 성곽을 등진 인가마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한창 곱게 피었고, 성 밑으로 호젓하게 이어진 오솔길은 향기로운 풀이 뒤덮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서 너무도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골짜기 시냇물을 건너고 솔숲을 뚫고서 잰 걸음을 뽐내며 놀다보니 저도 모르는 새 벌써 육각봉에 이르렀다. 잔디 위에 앉아 잠깐 쉬면서 서울 북쪽 동네에 피어 있는 꽃을 구경했다.


또 오씨(吳氏) 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노닌 사람 모두가 술에 취했다. 나만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 혼자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연이 강권하여 억지로 술 세 종지를 마셨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에 오히려 크게 취했다. 이날의 봄놀이에 나보다 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대문 성곽부터 육각봉까지는 서울에서 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빼어난 장소이다. 이제 모조리 찾아가 구경했으므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봄놀이를 즐긴 해가 올해보다 나은 때는 없을 것이다.


함께 논 사람은 누구인가? 한대연과 강인백(姜仁伯)이다. 강인백의 자(字)는 유경(酉敬)으로 대연의 조카이다. 계행(季行)은 내 막내 동생이다.”


유본학, ‘육각봉에서 노닌 기록(遊六角峰記)’

(안대회 지음,『고전 산문 산책』, 휴머니스트, 2008. p516〜517. 인용)




섬세한 감성 돋보이는 유득공의 한양 진경 산문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⑧


▲ 탑동연첩. <자료=서울역사박물관>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소개한 대로 『경도잡지』를 따로 저술할 만큼 한양의 자연 풍경과 민간의 풍속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유득공이 이덕무와 박지원 등과 어울려 봄이 한창 무르익은 한양도성의 구석구석을 유람하면서 기록한 ‘춘성유기(春城遊記)’ 또한 18세기 당시 한양의 진경(眞景)을 묘사한 걸작 산문이다.


“경인년(庚寅年) 3월 3일, 연암(박지원)과 청장관(이덕무)과 어울려 삼청동으로 들어가 창문(倉門) 돌다리를 건너 삼청전(三淸殿)의 옛터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내버려두어 황폐해진 밭이 있었는데, 세상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자리를 잡아 앉았더니 녹색 물이 옷을 물들였다.


청장관은 풀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 내가 이런 저런 풀을 뜯어 물어보았다. 청장관이 대답하지 못하는 풀은 없었다. 이에 수십 종의 풀이름을 기록했다.


청장관은 어떻게 그토록 해박하고 고상할까? 해질녘에 술을 사서 마셨다.


다음날에는 남산에 올라갔다. 장흥방(長興坊)을 거쳐서 회현방(會賢坊)을 뚫고 걸어갔다. 남산 부근에는 옛적 재상들이 거처했던 집이 많다. 무너진 담장 안에는 늙은 소나무와 전나무가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험 삼아 바라보았다. 백악(白岳 : 북악산)은 둥글고 뾰족하게 서 있는 형세가 마치 모자를 뒤집어 쓴 모양과 같다. 도봉산은 삐죽삐죽 솟은 형세가 마치 투호 병에 꽂혀 있는 화살이나 필통에 붓이 놓여 있는 모양과 같다. 인왕산은 마치 사람이 인사하면서 두 손을 놓았지만 그 어깨는 아직 구부정하게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삼각산은 사람의 무리가 공연을 관람하는 자리에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는데, 여러 사람의 갓이 그 사람의 턱에 닿아있는 모습과 같다.


한양도성 안의 집들은 마치 검푸른 빛의 밭을 새로 갈아서 반짝반짝하는 모양이고, 큰길은 마치 기다란 하천이 들판을 갈라놓고 굽이굽이마다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형세다. 사람과 말은 그 하천 속에서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새우와 같다.


도성의 가구 수는 8만 호이다. 그 속에서 이 순간 함께 노래하고, 함께 울고, 함께 술 마시고 밥 먹고, 함께 장기나 바둑을 두고, 함께 칭찬하고, 함께 헐뜯고, 함께 어떤 일을 하고,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다. 높다란 곳에 있는 사람에게 그 모습을 관람하게 한다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또한 그 다음날에는 태상시(太常寺)의 동쪽 누대에 올라갔다. 육조(六曹)의 누각, 궁궐의 하천 가 버드나무, 경행방(慶幸坊)의 백탑(白塔), 동대문 밖 아지랑이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낙산(駱山) 일대였다. 모래는 하얗고 소나무는 푸르다. 그 밝고 고운 모습이 마치 그림과 같다.


여기에 다시 작은 산 하나가 마치 엷은 먹물 색의 까마귀 머리와 같이 낙산 동쪽에 솟아 있다. 그 산이 구름 속으로 보이는 양주(楊州) 지방의 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이날 밤 나는 술에 아주 취해 서여오(徐汝五 : 서상수)의 집의 살구나무 꽃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 그 다음날에는 경복궁의 옛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궁궐의 남문(南門) 안에는 다리가 있다. 다리 동쪽에는 천록(天祿) 석상 두 개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한 개가 있다. 그 천록의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 조각이 훌륭하다. 남별궁(南別宮)의 뒷마당에는 등에 구멍이 뚫린 천록이 한 마리이다. 남문 다리에 있는 천록과 꼭 닮았다. 필경 다시 서쪽에 있던 천록 석상을 옮겨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갔다. 근정전(勤政殿) 옛터가 보였다. 근정전의 섬돌은 3층으로 동쪽과 서쪽 모서리에는 암컷과 수컷 개의 석상이 놓여있다. 암컷 개의 석상은 새끼를 한 마리 안고 있다. 신승(神僧) 무학대사가 남쪽 왜구가 침략하면 짖도록 만든 석상이다. 세상에는 개가 늙으면 그 새끼가 뒤를 이어 짖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의 화마(火魔)를 모면하지 못했다. 저 돌로 만든 개의 죄라고 해야 할까? 전해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근정전의 좌우에 놓인 돌로 만든 이무기의 위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다. 나는 최근에『송사(宋史)』를 읽었다. 그래서 그 웅덩이가 제왕의 좌우에 자리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연지(硯池)라는 사실을 알았다.


근정전을 돌아서 북쪽으로 갔다. 일영대(日影臺)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영대를 돌아서 서쪽으로 갔다. 경회루(慶會樓)의 옛터가 나타났다. 이 옛터는 연못 가운데 있다. 부서진 다리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 경회루의 옛터로 갈 수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건너자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누각의 기둥과 주춧돌은 높이가 세 길 정도 되었다.


무릇 기둥이 48개 인데, 그 가운데 여덟 개는 부서졌다. 바깥 기둥은 네모진 모양이고, 안쪽 기둥은 둥근 모양이다. 기둥에는 구름과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말한 이른바 세 가지 장관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연못의 물은 푸르고 맑아서 살살 부는 바람에도 잔물결이 일었다. 연꽃송이와 가시연 뿌리가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흩어졌다가 합해졌다. 작은 붕어들이 물이 얕은 곳에 모여서 거품을 뿜고 노닐다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라도 듣게 되면 얼른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연못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그곳에 심어놓은 소나무가 쭈뼛 솟은 채 무성한 잎을 뽐내고 있었다. 소나무 그림자가 물결을 갈랐다. 연못 동쪽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연못 서쪽에는 궁궐을 지키는 내시가 손님과 어울려 과녁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다.


동북쪽 모서리의 다리에 의지해 물을 건넜다. 풀은 모두 죽대의 뿌리고 돌은 모두 오래된 주춧돌이다. 주춧돌에는 웅덩이가 있는데 기둥을 꽂은 곳 같아 보였다. 빗물이 그 웅덩이를 채우고 있었다. 이따금 마른 우물이 보였다.


북쪽 담장 안에는 간의대(簡儀臺)가 자리하고 있었다. 간의대 위에는 방옥(方玉)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간의대 서쪽에는 검은빛이 나는 돌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 길이가 족히 대여섯 자는 되고 넓이는 세 자 가량 되었는데 연달아 물길을 뚫어놓았다. 간의대 아래 돌은 마치 벼루 같아 보이기도 하고, 모자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마치 한쪽이 터진 궤(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간의대는 뛰어나게 높고 시원하게 트여서 북촌의 꽃과 나무를 조망하기에 알맞다.


동쪽 담장을 빙 돌아 걸었다. 삼청동의 석벽(石壁)이 구불구불 모습을 나타냈다. 담장 안의 소나무는 모두 열 길이나 되고 황새와 참새와 해오라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 빛깔이 순백(純白)인 새도 있고,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새도 있고, 연한 붉은빛이 도는 새도 있었다. 머리에 볏을 드리운 새도 있고, 부리가 마치 수저와 같은 새도 있고, 꼬리가 마치 솜과 같은 새도 있었다. 알을 품고 엎드려 있는 새도 있고,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 들어오는 새도 있었다. 서로 다투기도 하고 어울려 노닐기도 하는데 그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소나무 잎은 모두 시들어 있었다. 소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깃털과 빈 새알껍질이 가득했다. 우리의 도성 유람에 따라 나선 윤생(尹生)이 돌팔매질을 해 순백의 빛깔을 지닌 새 한 마리의 꼬리를 맞추었다. 새떼가 놀라 일제히 날아오르자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가득 덮은 눈(雪)과 같았다.


서남쪽으로 걸어가자 채상대(採桑臺)의 비석이 놓여 있었다. 정해년(丁亥年)에 임금님께서 몸소 누에를 치던 곳이다. 그 북쪽에는 폐허가 되어버린 못이 있다. 내농포(內農圃)에서 벼를 심어 농사짓던 곳이다.


위장소(衛將所)에 들어가 찬 물을 퍼서 마셨다. 마당에는 수양버들이 많았다. 수양버들에서 떨어진 버들섬이 비로 쓸어야 할 정도로 수북했다. 그곳의 선생안(先生案)을 빌려서 보았다. 호음(湖陰) 정사룡이 첫 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편액 위에 또한 정사룡이 지은 시가 있었다.


다시 궁궐도(宮闕圖)를 꺼내 살펴보았다. 경회루는 무릇 서른다섯 칸이었다. 궁궐의 남문(南門)은 광화문(光化門)이다. 북문(北門)은 신무문(神武門)이다. 서문(西門)은 연추문(延秋門)이다. 동문(東門)은 연춘문(延春門)이다.” 유득공, 『영재집(泠齋集)』 ‘봄날 도성(都城)을 유람하다(春城遊記)’


1770년 나이 23세가 되는 봄날 며칠 동안 삼청동, 남산, 경복궁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노닌 한양의 명승지 풍경을 유득공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한 진경 산문이다. 특히 남산의 높은 언덕에서 바라본 백악(북악), 도봉산, 인왕산, 삼각산(북한산)에 대한 형상 묘사는 절묘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직 복구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아 있는 경복궁의 여러 유적의 실경(實景)과 석벽(石壁)을 따라 삼청동을 거닐면서 담장 안 소나무에 앉아있는 황새와 해오라기의 다채로운 모습을 기묘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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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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