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2. 01:37ㆍ美學 이야기
런던 미술관 산책
클로드 모네
〈꽃병〉
Vase of Flowers
빛과 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인상파 화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단 ‘인상파’라는 명칭부터가 모네의 작품 〈해돋이-인상〉(1872)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모네는 1회 《인상파전》(1874)을 비롯해 르누아르, 피사로 등과 함께 열심히 《인상파전》에 작품을 출품했던 인물이었다. 모네는 대다수의 동료들과는 달리 80세 넘게 장수했고, 그 덕에 자신의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는 장면을 목격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인상파 화가들 중 유난히 모네를 좋아해서 파리에 있는 그의 개인 미술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 일부러 찾아가 본 적도 있었다. 그 미술관 1층 전시실에는 모네가 쓰던 팔레트와 그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산타클로스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만년의 모네가 지베르니 집의 정원에 서서 맑은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60살은 훨씬 넘어 찍은 사진 같아 보였는데, 그렇게나 오래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모네의 눈빛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처럼 맑고도 깨끗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모네의 작품뿐 아니라 모네라는 한 인간까지도 좋아하게 되었다.
코톨드 갤러리에도 물론 모네의 작품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모네가 유난히 집착했던 빛과 물결을 원숙한 솜씨로 그려 낸 〈앙티브에서〉(1888)도 있고, 이 책에 소개한 마네의 그림 〈아르장퇴유의 센 강변〉과 같은 시기에 그린 〈아르장퇴유의 가을(Autumn Effect at Argenteuil)〉(1873) 같은 명작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보기에도 ‘made by Monet’인 이 풍경화들보다 1880년대 초반에 그려진 모네의 정물화 〈꽃병〉에 마음이 끌렸다. 〈꽃병〉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모네의 정물화다. 모네는 일생 동안 풍경화에만 마음을 쏟았고 인물이나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1881년부터 2, 3년간 정물화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네의 궁여지책이었다. 그의 풍경화와는 달리 정물화는 시장에서 조금씩 팔려 나갔고 찾는 사람도 있었다. 모네는 어떻게 해서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1879년에 아내 카미유가 죽었지만, 모네에게는 장례식 비용을 낼 돈도 없었다. 더구나 1880년부터 그는 후원자의 아내인 알리스 오슈데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두 사람에게는 모네가 둘, 알리스가 여섯, 해서 도합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었다. 결국 모네는 팔기 위해 몇 점의 정물화를 그려야만 했다. 코톨드 갤러리의 〈꽃병〉 역시 그중 하나다.
그러나 “마네는 마네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듯”이 모네 역시 빛과 물의 화가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려야 했던 이 정물화를 결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결국 모네는 〈꽃병〉을 화랑에 넘기지 못했다. 아무리 손을 대고 또 대도 그림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881년에서 1882년 사이에 그려진 〈꽃병〉은 1880년대 후반까지 시장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꽃병〉을 보면 모네가 고객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특유의 빠르고 거친 붓 터치를 최대한 자제하려 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속도감 있게 쓱쓱 문지르던 개성적인 터치 대신 고전파 화가들처럼 매끈하고 얌전한 정물화를 그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모네는 전통적인 기법에 스스로를 맞출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모네의 정물화를 사려 했던 고객들이 모네 특유의 활달하고 현대적인 느낌으로 가득한 정물화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모네는 1년 넘게 그린 이 그림을 팔지 못하고 작업실 구석에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랏빛 꽃들이 화병 가득 피어난 이 정물화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화가 스스로도 자제할 수 없었던 활달한 붓 터치로 그려진 꽃과 잎들에서는, 훗날 모네가 열광적으로 탐닉하게 되는 지베르니의 정원과 연못이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의 본능과 자존심을 결국 굽히지 못했던 모네의 인간적인 고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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