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는 조선후기 중흥을 이끈 정조가 당시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그림으로 보고 규장각 관원들에게 짓게한 시(詩)이다.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번창했던 당시 한양의 모습을 표현한 것들로 현재는 13편이 전해진다. 정조가 직접등수를 매겼는데 병조좌랑 신광하가 1등, 검서관 박제가가 2등을 차지했다. 왕조의 번성과 도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내용으로 작자에 따라서 다양한 관점에서 수도 한양의 번창을 표현하고 있다.
백탑파의 한양노래, 성시전도시로 본 18세기 서울
수도 한양을 노래하는 문화는 정조시대에 절정을 맞이합니다. 정조는 1792년 신하들에게 번성하는 서울의 모습을 묘사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한양의 지세, 연혁부터 시끌벅적한 시장풍경, 유흥문화 등 당시 일상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도(王都)를 이렇게 대규모로 조감한 시도는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갖가지 개혁과 탕평을 통해 정국의 화합을 도모했던 정조는 찬란한 태평성대를 기록하게 함으로써 백성의 실정을 살피는 한편, 왕권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북학파 실학자들의 시각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18세기 역동적인 한양의 모습을 세밀하게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금척(金尺)으로 정한 우리 강산 일만리
한경(漢京)의 웅장한 모습 황도(黃圖) 속에 담겼네
한 폭의 황도 대도회를 그렸는데
역력하게 펼쳐져 손슴을 보는 것 같네
조선왕조 만세토록 기틀 흔들리지 않고
번화한 문물 모두 다 여기에 있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
승정원 우승지 이집두(李集斗)의 시다. 보통 성시전도시가 문집에 실려 전하는 데 반해 당시 시권(試券, 시험답안지) 원본의 형태로 남아 있다. 정조로부터 차상(次上)의 점수를 받았으며 상으로 종이 한 권을 받았다. 칠언백운고시로, 전반부는 구폭요도(九幅瑶圖), 후반부는 성시전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성시전도시, 18~19세기, 신광하
1등을 차지한 병조좌랑 신광하(申光河)의 시를 필사한 것이다. 정조로부터 ‘소리가 있는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다. 신광하의 시는 한양의 풍물을 중국풍으로 묘사하여 장중한 분위기를 갖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 사람들의 나들이 명소
한양에 만연된 유흥의 분위기는 명승지에 대한 열광적 애호를 낳았습니다. 인격 수양을 위해 산 속에 은일하는 것이 아니라 도성 주변의 경치 좋은 곳에서 모임을 갖거나 유람의 즐거움을 만끽하였습니다. 18세기에는 그 이전에 주목되지 않았던 인왕산 기슭과 북악 일대가 최고의 경승지로 꼽힙니다. 이는 우리 산천의 감흥과 정취를 표현하고자 했던 정선과 김홍도 등의 화폭에도 담겨집니다. 백탑파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역시 이러한 명승명소를 유람하며 그 풍광을 성시전도시에 담아 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붉은 정자 세검천(洗劍川)으로 둘러 싸여 있고
빈 골짝에 백추지 다듬는 방망이 소리 울리네
세심대(洗心臺)의 꽃 필운대(弼雲臺)에 어리니
천송이 만송이 꽃들 영롱하게 빛나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필운대 행화(杏花), 북둔의 복사꽃, 흥인문밖 버들,
천연정 연꽃, 삼청동 탕춘대의 수석(水石)이
술과 노래를 즐기려는 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만에 두루 돌면서
성내외의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
- 유득공, 『경도잡지』-
유숙이 그린 ‘세검정도’.
조선후기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명소 중 하나인 세검정과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세심대신해갱재축(洗心臺辛亥赓載軸, 1791년)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정조의 어제(御製)를 모아 엮은 문집으로, 권1~4에는 정조가 세손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춘저록(春邸錄)」이 수록되어 있다. 춘저록에는 조선 도읍지 한양의 팔경을 읊은 ‘국도팔영(國都八詠)’이 실려 있다. 세심대신해갱재축(洗心臺辛亥赓載軸, 1791년), 세심대에서 왕과 여러 신하들이 감회를 읊은 시를 모은 것이다. 세심대는 조선후기에 부상한 명승명소 중 한 곳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합(酒盒), 조선후기.
술과 안주용 반찬을 담는 휴대용 그릇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여행을 할 때 간단하게 술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찬합(饌盒), 조선후기
반찬을 여러 층의 그릇에 담아 포개어 간수하거나 운반할 수 있게 만든 용기이다. 목궤에 3개의 서랍과 문판으로 구성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세시풍속
18세기에는 자국의 고유한 문화와 풍속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세시풍속을 기록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백탑파의 한 사람인 유득공이 한양의 세시와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景都雜志)』를 저술하여 그 선구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성시전도시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이들은 액(厄)자를 종이연에 써서
해가 질 때 줄을 끊어 날려 보낸다.
매년 정월13일이나 14일에는 수표교 주변 위 아래로
연싸움을 보러온 구경꾼들이 담을 쌓은 듯 모이다.
- 유득공, 『경도잡지』
김준근,지연(紙鳶). 연날리기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한무리의 소년들이 무리지어 몰려가니
팔뚝위에 보라매가 털과 부리 으스댄다.
- 박제가, 「성시전도시」-
김홍도,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 매사냥을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신윤복, 연소답청(年少踏靑)
부채(扇), 조선후기
산수화가 그려져 있고 상아로 장식된 합죽선(合竹扇)이다. 조선후기에는 문인 취향이 부채에 반영되어 합죽선이 더욱 유행하였고, 장식품을 다는 등 더욱 화려해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풍속도병(風俗圖屛, 복제), 18세기, 김홍도
한양의 남산과 성곽, 가옥과 거리의 모습이 그려진 풍속화로, 선비들과 기생, 일반 백성의 유흥과 세시풍속 등 일상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백자양각시문병, 19세기
이백이 쓴 「장진주(將進酒)」의 글귀가 적혀 있는 술병이다. 술을 권하는 내용으로, 음주의 즐거움과 영웅의 호방함을 읊조리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화로, 조선후기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겨울철 난방기구나 음식을 데우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담뱃불을 붙이거나 인두를 달구는 인두 꽂이로도 활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도시적 삶, 도시문화의 싹틈
18세기 도시경제의 성장은 군자적 삶의 이상보다는 현실의 인간본성을 따르는 새로운 도시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일상 사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꽃, 새, 골동품의 수집 등 새로운 감각의 생활 취미가 유행하는데, 이는 그 이전 ‘완물에 정신을 판다(玩物喪志)’고 하여 경계되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술집과 기방 같은 유흥 문화가 발달하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합니다. 도시문화의 주역이기도 했던 백탑파의 성시전도시에는 절약 대신 소비, 유흥,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도시적 감성이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인두 그림 담뱃대는 길이가 한길이요
나전칠기 담배합은 가볍고도 어여뻐라.
- 박제가, 「성시전도시」 -
벼슬한 자들은 반드시 담배합을 지참하는데
쇠로 주조한 것이고 은동으로 매화와 대나무를 새겼으며
자색 녹피로 끈을 달아 재떨이와 함께 말 뒤에 달았다.
- 유득공, 「경도잡지」 -
신유복이 그린 상춘여흥. 한양의 부유한 양반들이 유흥을 즐기는 장면이다.
담뱃대, 대통마개.대통받침, 19세기
담배합
담배합.담뱃대(19세기). 담배는 조선 중기에 유입되면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경도잡지」에 “벼슬한 자들은 반드시 담배합을 지참하는데, 쇠로 주조한 것이고 매화와 대나무를 은으로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긴 담뱃대는 장죽(長竹)이라고도 한다. 대통마개.대통받침(19세기),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부분인 대통부분을 덮는 뚜껑과 받치는 용기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타구(唾具), 19세기.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이다.
제등(提燈), 조선후기
밤길을 다닐 때나 의식에서 사용한 휴대용 등이다. 자루를 달아 들고 다니기 편리하게 만들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생황(笙簧), 근대.
고려.조선시대 궁중음악에 쓰였던 아악기의 하나로, 문인들의 풍류 악기로도 쓰였다.
안경, 19세기
안경은 조선 후기 일반 백성에게도 상당히 보급되었으나, 재질과 장식이 화려하여 고급 사치품에 속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별전(別錢), 조선후기
별전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옆전 모양의 장식품 혹은 기념화폐다. 꽃무늬.부채모양.채색된 것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집비둘기 이름이 수십종이 넘어가니
아로새긴 새장에 깃발이 펄럭이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태평성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후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도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중국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그림으로 실제 풍경이 아닌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벽(癖)이란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 박제가, 「백화보(百花譜)」-
거래는 다 끝나고 연극얘기 청하니
배우의 복장은 놀랍고도 망측하다
우리나라 사당놀이 천하에 짝 없으니
허공 달려 줄 걸으니 거미가 매달린 듯
- 박제가, 「성시전도시」 -
김준근이 그린 ‘창배보삭’. 외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늙고 젊은 온갖이들 지패(紙牌) 뽑아 소리치니
심한이는 미친 듯이 저물도록 앉았구나
- 박제가, 「성시전도시」-
성협이 그린 ‘투전’
투전(鬪錢), 19세기
투전은 각종 문양.문자가 표시된 패를 뽑아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중국에서 유입되었다. 조선 후기 바둑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된 쌍륙.투전.골패 등 노름의 열풍은 도박성 게임이 양반계층의 향락성 여가문화로 자리잡혀 갔음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쌍륙말.주사위, 조선후기
두 개의 주사위와 서른 개의 말을 가지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대한제국 시기까지 널리 유행되었다. 이 주사위는 숫자대신 문(文).무(武).훈(勳).덕(德).연(軟).빈(貧) 여섯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바둑판.바둑돌, 20세기초
사대부들의 수양을 위한 여가활동이었던 바둑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면서 유흥적 오락으로 변모되었다. 박지원의 친구가 밤늦게까지 바둑을 두다가 취침했는데 그 다음날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바둑에 대한 애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다양한 한양사람들
맨발에 큰 버선은 황문의 내시이고
흘깃보며 치마걸음 누구일까 기생이라
- 박제가, 「성시전도시」-
기생집 앞 풍경을 그린 신윤복의 그림.
초헌(軺軒)이 빠르게 지나가니 액예(掖隸)들 ‘물럿거라’ 소리치고
작은 가마 돌아갈 떄에 여러 비녀들 에워쌌네
한가롭게 노니는 공자들 어찌 하나같이 아름다운가
번쩍이는 안마(鞍馬)는 화려함을 다투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
숭양(崧陽) 땅 초립(草笠)에다 다홍적삼 입고서
하인들 씩씩하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두눈을 껌뻑이며 거간꾼을 불러대고
혹 다툼 풀어주며 잘 지내라 권한다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저자거리에서 거래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개백정 옷 갈아 입어 사람들 몰라봐도
개는 쫓아 짖어대며 성난 듯 노려보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개를 끌고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
화암수록(花庵隨錄), 18세기말, 유박
유박이 자신의 화훼 재배 경험과 철학을 담아 저술한 책이다. 기이한 화훼가 있으면 천금을 주고라도 구해왔다는 기록을 통해 그의 화훼벽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 18세기, 심사정
정선 문하의 18세기 화가 심사정의 그림이다. 괴석과 꽃, 귀뚜라미를 화보풍으로 그렸다. 조선후기에는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주변 사물을 많이 그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7언(言).100운(韻)의 장편시인 성시전도시는 현재 13편이 전한다. 1792년 신광하.박제가.이만수.이덕무.유득공.서유구.정동간.이희갑.김희순.이집두가 지은 10편과 신택권.이학규.신관호가 후에 이를 모방해 지은 3편이 있다. 당시 정조가 직접 등수를 매겼는데 병조좌랑 신광하가 1등, 검서관 박제가가 2등을 차지했다. 이어 검교직각 이만수와 승지 윤필병이 3,4등을 각각 차지했고 검서관 이덕무와 유득공은 공동5위였다. 상을 받은 신하만도 17명으로, 하나의 시제를 두고 이렇게 다량으로 창작했다는 것도 드문 일이다. 왕명으로 지어진 시인 만큼 대체로 왕도의 번성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지만, 창작자마다 이를 다르게 구현하였다. 어떤 시는 중국의 시를 따른 듯 의고적이고 장중하며, 어떤 시는 한양 특유의 풍경을 조선의 색채로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내용은 대체로 수도 한양의 형세와 위상을 찬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궁궐.육조.운종가 등 도성 내 모습과 한강.명승지 등 도성밖까지 균형있게 묘사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같고,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같다.
-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裝館全書)』 -
동시(東詩, 19세기, 신광하 등).
신광하.박제가.이희갑의 성시전도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이다.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조선후기, 박제가), 2등을 한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다. 정조의 우수한 평가를 받은 여섯신하는 정조의 명으로 다시 ‘금강일만이천봉(金剛一萬二千峰)’ 칠언시를 지어 바쳤는데, 이것이 성시전도시 뒤에 실려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영재서종(冷齋書種), 19세기말~20세기초, 유득공
고종대 장서가 심의평이 필사한 유득공의 문집으로, 5등을 한 유득공의 성시전도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은 정조의 어평이 남아 있는 유일본으로서 가치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가(漢陽歌), 1844년
한글로 된 풍물 가사로, 조선왕도인 한양의 연혁.풍속.문물.제도 등을 노래하였다. 정조 재위기간에 만개한 한양 찬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활기찬 상업도시
조선후기 한양은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상업도시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국에도 수용되어 마침내 정조는 1791년 상업활동의 자유를 열어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종루 운종가와 동대문 밖 이현, 남대문 밖 칠패의 큰 시장 외에도 도성 밖으로 한강을 끼고 상권이 더욱 발달하여 많은 상품이 산처럼 쌓이고 인파로 붐볐습니다. 상업을 중시하였던 백탑파의 인물들은 성시전도시에 시장 속 모습을 생생히 담아 내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시장풍경
배오개와 종루와 칠패 등 세곳은
이 바로 도성의 세 곳 큰 저자로다
온갖 장인 일하는 곳 사람들이 붐비나니
온갖 물화(物貨) 이문 쫓아 수레가 연이었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김홍도가 그린 ‘장터길’
비단가게 울긋불긋 눈부시게 펼쳐졌으니
사라(紗羅).연견(練絹).능(綾).곡(穀).기(綺)비단이요
어물가게 싱싱한 생선 통통하게 살이 올랐는데
갈치.농어.준치.쏘가리.숭어.붕어.잉어라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김춘근, 시장
주점은 본래 인간 세상으로 웅백 성홍의 술빛 잔에 가득하네
행상과 좌고 헬 수 없이 많아
자질 구레한 물건도 갖추지 않은 것 없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신윤복, 주사거배(酒肆擧盃)
‘태평성시도에 표현된 이상적인 모습.
거리 좌우로 천보(天步)나 길게 늘어선 행랑들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소설 탐독에 빠진 한양 사람들
도시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서적의 유통은 서민계층으로까지 광범해졌습니다. 18세기가 되면 상업적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도서가 발간되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유행합니다. 특히 운종가와 청계천은 서책과 서화의 주요 유통공간으로, 운종가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즉 전기수(傳奇叟)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한편 통속소설류가 사대부 남녀노소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하면서, 위정자들은 음란하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담배 가게 앞에서 소설 낭독이 벌어졌는데,
영웅이 뜻을 잃고 방황하는 대목에 이르자
듣고 있던 사람이 낭독자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다.
- 이덕무, 「아정유고」-
앉아서 수호전을 읽는 자가 있는데,
뭇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듣고 있다.
…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건만
외기에 익어서 입이 미끄럽게 내려간다.
- 박지원, 「열하일기」-
김홍도가 그린 ‘담배썰기’에 소설로 보이는 책을 읽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시전지.시전지판, 조선후기
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와 여기에 무늬를 찍어내는 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명주.모시, 20세기
시전의 으뜸 품목 중 하나로, 각가 면주전과 전포전에서 판매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돈궤.
상평통보, 조선후기
‘상평통보’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공평하게 쓸 수 있는 돈’을 뜻하며 1678년 국정화폐로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를,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넣었다. 조선후기 화폐경제의 발달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 1822년
위백규가 저술한 『환영지』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궁궐.성곽.문루 등 주요 요소가 간략히 잘 담겨 있다. 시전행랑이 T자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진신(油鞋),
생가죽을 기름에 절이고 바닥에는 징을 박아 젖은 땅에서도 신을 수 있도록 만든 신이다. 운혜(雲鞋), 홍색의 화문단(花紋緞)으로 만든 신이다. 구름무늬를 장식한 여성용 신의 하나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부녀자가 신었다.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 20세기초, 김준근
조선후기의 사회 풍속을 98장의 그림으로 묘사한 화첩이다. 여러 판본이 수출되어 해외에도소장되어 있다. 농경생활부터 장사.수공업.의식주.종교.형벌.관혼상제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풍속을 보여주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산통.산가지, 조선후기
상인들이 거래시 셈을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가는 대나 뼈를 가로.세로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하여 셈을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산의 보급과 함께 사라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까지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되(升), 조선후기
곡물 등의 부피를 재는 용기다. 당시 부피를 세는 단위로는 작(勺).홉(合).되(升).말(斗).석(石) 등이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저울(枰).자(尺), 조선후기.
물건의 무게와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저울과 자다. 저울대에 점선으로 눈금을 표시하고, 끝에는 물건을 올려 놓아 평형을 이룰 때 무게를 측정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산(書算), 일제강점기.
글을 읽은 횟수를 세는 도구다.
동몽선습, 명심보감,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교재들이다.
천자문. 명필 한석봉의 글씨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한 교재이다.
한글 소설책, 사씨남정기, 초한지 등이 있다.
책을 보관하는 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