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7

2018. 4. 7. 14:38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7




상촌선생집 제12권 /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99수   ㅡ 상촌(象村) 신흠(申欽)



동고의 우가장 운을 차하다[次東皐牛家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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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에다 차 끓이던 파선처럼 할 것 없네 / 不待坡仙活火烹
천연의 특이한 산물 너무나도 맑고말고 / 天然奇種十分淸
정말로 황금솥에서 나왔는가 의심되고 / 直疑出自黃金鼎
아울러 백옥병에 담을 만도 하구나 / 且可盛之白玉甁
진품이라 진실로 상계에 바칠 만하니 / 珍品端宜供上界
경장이 어찌 꽃다운 명예를 독차지하랴 / 瓊漿那許占芳聲
양주의 한 말 술을 부러워하지 마소 / 涼州一斗休須羨
넋과 뼈 상쾌한 기운 오경까지 미쳐가네 / 魂骨冷冷到五更
[주-D001] 동고의 우가장 운을 차하다 : 
샘물이 매우 나빠 마실 수 없으므로 눈으로 갈증을 풀고 동파가 강물을 길어다가 차를 다린 운을 차하였다. 우가장은 산동 광요현(廣饒縣) 북쪽 70리 소청하(小淸河)의 북쪽에 있는 역(驛) 이름으로, 동창보(東昌堡)라 불리기도 한다. 본 제목의 소주(小註)는 최립이 지은 시 제목의 일부로, 본디 ‘우가장에서 샘물이 매우 나빠 …… 차하다[牛家庄泉水甚惡不可飮 取雪救渴 次東坡汲江煎茶韻]’라고 되어 있다.
[주-D002] 숯불에다 …… 없네 : 
파선(坡仙)은 동파 신선으로 소식(蘇軾)에 대한 미칭이다. 《蘇東坡詩集 卷43 汲江煎茶》에 “생수 찻물 모름지기 숯불로 끓여야기에 스스로 낚시터 임해 깊고 맑은 강물을 떴네[活水還須活火烹 自臨釣石取深淸].” 하였다.
[주-D003] 천연의 특이한 산물 : 
눈을 뜻함.
[주-D004] 상계 : 
천상의 세계. 곧 신선의 세계를 뜻함.
[주-D005] 경장 : 
맛좋은 술의 별칭.





상촌선생집 제18권 /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46수


눈 내린 뒤에[雪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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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니 산길은 온통 다 하얗고 / 望中山逕白漫漫
주점 밖에 푸른 기 여기저기 서 있구나 / 店外靑帘幾處竿
우스워라 도곡의 집 너무나 멋이 없지 / 却笑陶家太寥落
차만 달이는 그 풍미가 얼마나 차가울까 / 煎茶風味不勝寒



  *** 상촌 신흠(象村 申欽) : 경숙(敬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 문정(文貞)

요약 1566(명종 21)∼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증판서 신세경(申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사람)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으며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에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자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으며, 곧 집의(執義)에 초수(超授: 뛰어넘어 제수됨)되었다. 같은 해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ㅡ 중략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술활동

   저서 및 편서로는 『상촌집』·『야언(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樂民樓記)」·「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계집 제4권 / 시(詩)○보유록(補遺錄)  ㅡ 박세당(朴世堂) :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가인문답전다흥(佳人問答煎茶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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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홍불을 버리고 호사스러운 집을 작별한 뒤 / 一抛紅拂別豪家
다행히도 학사의 차를 달이게 되었네
/ 幸得烹煎學士茶
풍표가 비범함을 일찍 알았으니 / 早識風標異傖俗
격조 있는 사람을 호사한 사람에 어찌 비기랴
/ 那將格韻比驕奢
금박 휘장은 어두워 사람 눈을 흐리게 하고 / 銷金帳暗迷人眼
약설차 향기는 짙어 객의 입을 상쾌하게 하네 / 瀹雪香濃爽客牙
두 가지 일의 운치를 곰곰이 생각해 보매 / 細細思量兩般意
어찌 유하주를 천천히 마시며 취하랴
/ 容渠淺酌醉流霞
[주-D001] 가인문답전다흥(佳人問答煎茶興) : 
당(唐)나라 이정(李靖)이 이세민(李世民)의 창업을 돕는 과정에 장씨녀(張氏女)를 만나고 규염객(虯髥客)의 도움을 받는 과정을 소설로 그린 《규염객전(虯髥客傳)》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은 시이다.
[주-D002] 한 번 …… 되었네 : 
홍불(紅拂)은 붉은 먼지떨이개이다. 학사(學士)는 이정(李靖)이다. 세도가 양소(楊素)의 집에 이정이 처음 찾아가 경륜의 방책을 말할 때 붉은 먼지떨이개를 쥐고 이정을 응시하던 미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장씨녀이다. 그녀는 이정의 선비다움과 기개를 보고서 첫눈에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는 양소의 집을 몰래 나와 이정을 따라갔다. 《虯髥客傳》
[주-D003] 풍표(風標)가 …… 비기랴 : 
장씨녀가 이정을 보고 한눈에 비범한 사람임을 알았으니, 사치스럽고 거만하기만 한 양소를 어찌 품격 있는 이정에 비길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양소는 서경 유수(西京留守)로서 경륜의 재주도 없이 세도가의 후예라는 것만 믿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이 굴었던 인물이다. 《虯髥客傳》
[주-D004] 두 가지 …… 취하랴 : 
도곡(陶穀)의 고사와 《규염객전》의 이야기를 섞어 사용한 것이다. 좋은 호사가의 집에서 유하주(流霞酒)를 마시며 취하는 것보다 훌륭한 명사를 따라 눈 녹인 물로 차를 달이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 박세당(朴世堂) : 계긍(季肯), 잠수(潛叟),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西溪), 문절(文節)

요약 1629(인조 7)∼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개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박응천(朴應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정(朴炡)이며, 어머니는 양주윤씨(楊州尹氏)로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증광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박태유(朴泰維)와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했다 해서 노론(老論)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 생활을 통한 개혁 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경험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 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박세당이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 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 의식을 토대로 해서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박세당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근본 입장은 당시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 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 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해 사상적 자주 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했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며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박세당과 윤휴(尹鑴)·윤증(尹拯)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 비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지만 학문 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 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南人)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해 채용해보려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 사상을 도입해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 계통이었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해서 지방(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린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양반 지배 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 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요역(徭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했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했으므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 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 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蠹]이라고 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 대륙의 세력 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 추구에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朴尙衷)에 관한 평가도 고려에 대한 충절보다는 원나라·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 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 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했던 것이다.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 의식을 가졌던 박세당은 관직을 버린 뒤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 등 사서와 『도덕경(道德經)』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박세당은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해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박세당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유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해, 공자가 말하는‘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 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가 ‘왕도(王道)’란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주   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해,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라고 보았다.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러나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도심(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실학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도를 밝히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는 다스리려 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백성의 생활 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노장학도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되고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 사상이 차별 사상이 아니고 민중 중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지배 욕구의 포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도덕경(道德經)』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 태도라고 보았다.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 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 현실에 전연 무관심하지 않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해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 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과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상서(尙書)』·『시경(詩經)』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과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이 전한다.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주집 제7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ㅡ 권필(權韠)

병중(病中)에 밤비 소리를 듣고 초당(草堂)이 생각나서 평생의 일을 서술하다 24수
[病中。聞夜雨。有懷草堂。因敍平生。二十四首。 ]

서재에 가지 못한 지도 스무 날 가까운데 / 不到書齋近二旬
절서가 벌써 깊은 봄 되어 홀연 놀랐노라 / 忽驚時序已深春
한밤에 누워서 꽃 재촉하는 빗소리 들으니 / 中宵臥聽催花雨
산류를 심고 싶어도 병든 몸을 어이하리 / 欲種山榴奈病身
늘 물가 기슭을 따라 산류를 죽 심어 놓으려 했는데, 이제 병이 들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되었다.

밤비가 처마에 걸려 새벽까지 우니 / 夜雨懸簷到曉鳴
병중에 울적한 생각이 홀연 이누나 / 病中幽思忽然生
가장 마음이 가는 건 바위 앞 대나무 / 關心最是巖前竹
소슬하게 잎새 때리는 소리 들리지 않아라 / 不聽蕭蕭打葉聲

만고의 구지라 작은 동문에는 / 萬古仇池小洞門
한 쌍의 시냇물이 운근에서 쏟아진다 / 雙泉咽咽瀉雲根
무단히 하룻밤 일천 봉우리에 비가 내리니 / 無端一夜千峯雨
바위에 부딪쳐 요란할 폭포 누워서 상상한다 / 臥想飛流觸石喧
초당으로부터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백 보(步) 남짓 가면 작은 석문(石門)이 있고 한 쌍의 폭포가 겨우 몇 척 높이로 어지러운 바위 사이에서 아래로 작은 못에 떨어지며, 산세가 빙 둘러 있어 하나의 별세계를 이룬다. 내가 일찍이 두보(杜甫)의 “만고에 구지의 굴은, 가만히 소유천과 통한다.〔萬古仇池穴 潛通小有天〕”는 구절을 따서 그 땅의 이름을 소유동(小有洞)이라 지었다.

작은 시냇물 졸졸 밤낮으로 울고 / 小澗潺潺日夜鳴
한 이랑 맑은 못물은 본래 잔잔해라 / 澄潭一畝向來平
지금 봄물이 알지 못하겠다 어떠한가 / 卽今春水知何似
날랜 피라미들이 떼 지어 다니겠지 / 應有輕鰷作隊行

작은 집을 시냇물 가에 이제 막 지었나니 / 小屋初營澗水潯
화초와 나무 새로 심어 숲을 못 이루었어라 / 新栽花木未成林
은근히 버들을 심어 이웃집을 가렸으니 / 殷勤種柳遮隣舍
보드라운 빛이 지금쯤 깊어졌는지 아닌지 / 嫩色如今深未深

앵두나무 언덕 아래에 새로 우물을 팠나니 / 櫻桃坡下井新開
물 길어 차 달이느라 하루에 몇 번 오가는지 / 汲取煎茶日幾回
먹지 않는 것을 가지고 슬퍼하지 않노니 / 未將不食爲心惻
다만 원두에서 활수가 오는 것을 사랑하노라 / 但愛源頭活水來
당(堂) 서쪽에 언덕을 따라 앵두를 심고 이름을 앵두파(櫻桃坡)라 하였으며, 그 아래 작은 우물을 팠는데 물이 달고 차서 먹을 만했다.

산 아래 방당이 위아래로 이어졌는데 / 山下方塘上下連
진흙을 밟으며 막 육지의 연꽃을 심었도다 / 踏泥初種陸池蓮
늘 생각노니 지난여름 황매우 내릴 때 / 長思去夏黃梅雨
밤마다 술 취해 잘 때 청개구리 시끄러웠지 / 夜夜靑蛙聒醉眠
시내 남쪽 산기슭에 옛날 무논의 터가 있기에 지형에 따라 위아래의 못을 만들었다.

시냇가 작은 채마밭이 풍단에 가까우니 / 溪邊小圃近風湍
듣건대 밭의 채소가 아직도 추위 겁낸다네 / 聞說畦蔬尙怯寒
어느 날에나 비 개고 산에 햇살 따스해 / 何日雨晴山日暖
짙푸른 파와 부추로 봄 반찬거리 도울꼬 / 紫蔥靑韭助春盤

동손을 이제 막 역양에서 옮겨 심었더니 / 桐孫初自嶧陽移
뜰 가에 겨우 몇 척 가지가 가로 뻗었구나 / 庭畔纔橫數尺枚
조만간 맑은 그늘이 땅을 짙게 덮으면 / 早晩淸陰濃滿地
푸른 잎을 따다가 앉아서 시를 적으리라 / 摘來靑葉坐題詩

동쪽 뜰에 포도 넝쿨 형상도 기이하기에 / 東庭葡蔓狀離奇
빈 처마 쪽에다 작은 가지를 끌어다 주었지 / 爲向虛簷引小枝
소반 가득 마유를 쌓아둘 필요는 없나니 / 不要滿盤堆馬乳
푸른 잎이 아침 햇살 막는 게 몹시 좋아라 / 最憐蒼翠隔朝曦

복사꽃을 구해서 물가에 심었더니 / 覓得桃花向水栽
올봄엔 다시금 몇 가지 꽃 피었어라 / 今春更復幾枝開
정녕코 동쪽 물길 따라 가지 말라 / 丁寧莫逐東流去
고깃배가 동구로 들어올까 걱정일세
/ 恐有漁舟入洞來

삭거하매 벗이 드묾을 몹시 깨닫노니 / 索居偏覺故人稀
숲 속이 적요하고 풀숲 길은 희미해라 / 林壑寥寥草逕微
고맙게도 동쪽 이웃이 인정 많아 / 賴有東隣能好事
늘 술을 가지고 내 집 사립을 찾아주네 / 每携春酒款柴扉
내가 초당에 단정히 거처하니 찾아오는 사람 없이 적적했는데, 오직 동쪽 이웃 윤이성(尹而性)만이 늘 술을 가지고 찾아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렬한 몸이 허명 얻어 몹시 부끄러운데 / 多慙蹇劣得虛名
천리 밖에서 상종하는 이 송생이 있어라 / 千里相從有宋生
물 긷고 땔나무 하는 일에 부지런하니 / 汲水採薪勤服役
묻노라 그대 고생하여 무엇을 이루려나 / 問渠辛苦欲何成
송씨(宋氏)로서 이름이 희갑(希甲)인 유생이 호외(湖外)로부터 책상자를 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제자로서의 예(禮)를 매우 공손히 지켜 비천한 일을 하면서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지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현재 초당을 지키며 10년 동안 공부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북창에 맑은 새벽 성근 발을 걷으니 / 北窓淸曉捲疎簾
첩첩이 높은 산이 푸른빛으로 솟았구나 / 重疊雲山露碧尖
간밤에 빗줄기 소리 들리는 듯하더니 / 前夜似聞行雨過
아침에 시원한 기운이 빈 처마에 가득해라 / 朝來爽氣滿虛簷
초당에서 북쪽 방문을 열면 천마산(天磨山)이 정면으로 보인다.

취한 몸 높은 정자에 오르니 푸른 봉우리 가까워 / 醉上危亭近碧峯
홀로 비낀 석양빛 속에 외로운 솔을 어루만지노라 / 獨臨斜日撫孤松
망망히 펼쳐진 큰 들판이 푸른 바다를 삼키니 / 茫茫巨野呑滄海
평생에 운몽의 가슴을 후련히 씻을 만하여라 / 可盪平生雲夢胸
월출봉(月出峯)의 일맥(一脈)이 구불구불 휘감아 돌고 세차게 뻗어서 당(堂)의 남쪽 수십 보(步) 거리에 와서 그친다. 그 위는 평평하고 넓어 사람이 앉을 만하기에 잡초를 벤 다음 소나무를 심고 반환정(盤桓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헌함 밖에 반송은 한 그루 푸른 일산 / 檻外蟠松一蓋靑
가지마다 늙은 용의 모습을 지으려 한다 / 枝枝欲作老龍形
미풍이 짐짓 맑은 음향을 일으키니 / 微風故作冷然響
서늘한 기운이 얼굴에 불어 술이 쉬 깨누나 / 爽氣吹顔酒易醒

좋은 국화 수십 포기 나누어 심었더니 / 佳菊分栽數十叢
묽은 황색 옅은 백색과 짙은 붉은색 꽃들 / 淡黃微白與深紅
사람들아 부지런히 가꾼다 괴이쩍어 말라 / 傍人莫怪勤封植
맑은 서리 내리는 구월이 오기를 기다리리 / 會待淸霜九月中

섬돌 위 붉은 해바라기 간간이 흰 해바라기 / 階上紅葵間白葵
인연 따라 피고 지며 홀로 많은 때 누린다 / 隨緣開落獨多時
사람들아 그저 심상한 꽃으로 보지 말라 / 傍人謾作尋常看
해를 향한 깊은 충성은 꽃 스스로 알 뿐일세 / 向日深誠只自知

젊을 때는 선경을 읽으며 백양을 사모했고 / 少讀仙經慕伯陽
중년에는 술을 탐닉하며 풍광을 구경하였지 / 中年耽酒趁風光
지금은 늙은 나이 몸에는 병만 많은데 / 秪今老大身多病
만사에 마음 쓰여 머리털이 세려 하누나 / 萬事關心髮欲蒼

평소 마음 원래 영화와 명리에 있지 않고 / 素心元不在榮名
밝은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을 이루고 싶었지 / 欲佐明君致太平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이로써 그만이라 / 人莫我知斯已矣
백발의 몸 평생의 뜻 저버렸음을 거듭 깨닫노라 / 白頭重覺負平生

오십가의 병서들을 모두 독파했나니 / 讀破兵書五十家
소년 시절 호기를 남들에게 자랑했었지 / 少年豪氣向人誇
뒤늦게야 궁검이 나의 일 아닌 줄 알고 / 晩知弓劍非吾事
돌아가 맑은 강가 모래톱에서 낚시하노라 / 歸去淸江釣淺沙

잘못 글공부를 하여 시 짓는 것을 배웠나니 / 誤將鉛槧學題詩
몸 밖의 덧없는 명성 마침내 자신을 속였어라 / 身外浮名竟自欺
육 년 동안에 거듭 서새로 가게 된 뒤로는 / 六歲再煩西塞後
임천에서 속진의 굴레를 벗을 길이 없구나 / 林泉無計脫塵羈
내가 신축년(1601, 선조34) 겨울, 백의(白衣)로서 원접사(遠接使)를 따라 의주(義州)에 갔는데 지금 또 제술관(製述官)으로 의주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 신병(身病)이 있어 미처 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반생 동안 헛되이 굽은 길로 다녔나니 / 半生虛作曲岐行
지극한 이치는 원래 육경에 있는 것을 / 至理元來在六經
이 마음으로 이 본성 보존하게 한다면 / 能使此心存此性
가슴속의 풍월을 그 누가 다투리오
/ 胸中風月有誰爭

소씨는 당시에 이 환을 희롱했나니 / 邵氏當年弄此丸
붓을 잡고 문장 따위에 힘쓴 적 있으랴 / 何曾把筆事朱丹
오묘한 이치 무궁한 곳을 알고 싶다면 / 欲知妙理無窮處
모름지기 선천을 향해 자세히 보아야 하리 / 須向先天仔細看
내가 바야흐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다.

 * 산류(山榴) : 두견화 즉 진달래의 별칭이다.  / 출처 : yetgle.com/chaizip/bbs/board.php?bo_table=yetglezip&wr_id=518&p..    옛글닷컴 동양고전..

[주-D001] 운근(雲根) : 
산에 있는 바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송나라 매요신(梅堯臣)의 〈차운답오장문내한유석기(次韻答吳長文內翰遺石器)〉에 “석공(石工)이 날마다 그릇을 깎으니, 나무하기나 목축과는 전혀 일이 다르네. 땅을 파서 운근을 가져다, 단단한 돌 쪼개는 게 옥을 쪼개는 것 같아라.〔山工日斲器 殊匪事樵牧 掘地取雲根 剖堅如剖玉〕” 하였다.
[주-D002] 두보(杜甫)의……구절 : 
두보의 〈진주잡시(秦州雜詩) 20수〉 중 열넷째 수인 ‘만고구지혈(萬古仇池穴)’의 첫째와 둘째 구이다. 그 주에 “당나라 성주(成州) 동곡현(東谷縣)에 구지(仇池)라는 못이 있고 구지에는 땅굴이 있어 소유동(小有洞)과 통한다. 이곳에 신어(神魚)가 나는데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한다. 소유동천(小有洞天)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하였다. 《杜詩澤風堂批解 卷7》
[주-D003] 보드라운……아닌지 : 
한유(韓愈)의 〈조춘정수부장십팔원외(早春呈水部張十八員外)〉에 “그대가 먼저 강가에 가서 봐 주시구려. 버들 빛이 지금 깊어졌는지 아닌지.〔憑君先到江頭看 柳色如今深未深〕” 하였다. 버들 빛이 깊어졌다는 것은 버들이 우거졌음을 뜻한다.
[주-D004] 먹지……않노니 : 
《주역》〈정괘(井卦) 구삼(九三)〉에 “우물을 쳐서 물이 깨끗한데도 먹지 않으니, 내 마음에 슬픔이 된다.〔井渫不食 爲我心惻〕” 하였다. 이는 훌륭한 재능을 갖춘 인재가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슬퍼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신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함을 슬퍼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주-D005] 원두(源頭)에서……것 :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묻노니 이 못은 어이하여 이렇게 맑은가. 원두에서 활수가 흘러오기 때문일세.〔問渠那得如許淸 爲有源頭活水來〕” 하였다. 원두는 물의 근원이고 활수는 맑고 싱그러운 물로 맑은 심성을 비유한 것이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며 살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주-D006] 방당(方塘) : 
네모난 못이다. 주자의 시 〈관서유감〉에 “반 이랑의 방당이 거울 하나로 펼쳐지니, 하늘빛 구름 그림자 그 속에 배회하누나.〔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하였다.
[주-D007] 황매우(黃梅雨) :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 내리는 비로, 보통 6월 중순부터 7월 초순에 걸쳐 내리는 장맛비를 말한다.
[주-D008] 풍단(風湍) :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이는 시내 또는 강물이다. 두보의 〈장부성도초당도중유작선기엄정공(將赴成都草堂途中有作先寄嚴鄭公)〉에 “늘 모래가 무너져 약초밭 무너뜨릴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강가 헌함으로부터 바람 부는 물에 떨어지누나.〔常苦沙崩損藥欄 也從江檻落風湍〕” 하였다.
[주-D009] 동손(桐孫) : 
오동나무 가지인데, 여기서는 오동나무 묘목을 가리킨다.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영수(咏樹)〉에 “풍자를 남겨 두어 법식을 삼고, 동손은 거문고 만들 때 기다리리.〔楓子留爲式 桐孫待作琴〕” 하였다. 풍자(楓子)는 단풍나무 열매이다.
[주-D010] 역양(嶧陽) : 
좋은 오동나무의 산지이다. 《서경》〈우공(禹貢)〉에 “역양에는 특출한 오동〔嶧陽孤桐〕”이라 하였다. 당나라 왕발(王勃)의 〈한오서봉부(寒梧棲鳳賦)〉에 “벽오동은 역양의 진귀한 나무이고, 봉황은 단혈의 신령한 새 새끼일세.〔梧則嶧陽之珍木 鳳則丹穴之靈雛〕” 하였다.
[주-D011] 푸른……적으리라 : 
오동잎에 시를 적었다는 고사를 원용했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 양 귀비(楊貴妃)가 총애를 독차지하니 궁녀들이 고독과 원망을 참지 못해 오동잎에 시를 적어 궁궐 밖으로 흐르는 물에 띄워 보냈는데, 고황(顧況)이 두세 명의 시우(詩友)와 금원(禁苑)에 노닐다가 그 시에 화답하는 시를 적어서 역시 물결에 띄워 보냈다 한다. 《本事詩 情感》
[주-D012] 마유(馬乳) : 
포도의 일종으로, 당 태종(唐太宗)이 고창(高昌)을 정벌하고 가져온 것이라 한다. 《事文類聚 卷25 葡萄》 여기서는 포도알을 가리킨다.
[주-D013] 정녕코……걱정일세 :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어떤 어부가 시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복사꽃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무릉도원을 만났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작자 자신이 사는 곳을 무릉도원에 비긴 것이다.
[주-D014] 삭거(索居) : 
벗들과 떨어져 외로이 사는 것을 이군삭거(離群索居)라 한다. 자하(子夏)가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가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 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
[주-D015] 운몽(雲夢)의 가슴 : 
가슴속이 매우 드넓음을 뜻한다. 소식(蘇軾)의 〈차운정정보유벽락동(次韻程正輔游碧落洞)〉에 “가슴속에 몇 개의 운몽택이 있느뇨. 그리고도 남은 곳이 많이도 넓어라.〔胸中幾雲夢 餘地多恢宏〕” 하였다. 운몽택(雲夢澤)은 중국 남방에 있는 큰 호수로 동정호(洞庭湖) 남쪽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소식의 〈동정보표형유백수산(同正輔表兄游白水山)〉에 “길이 부질없는 세상 분쟁을 사절하여, 가슴속 구운몽을 한바탕 씻노라.〔永辭角上兩蠻觸 一洗胸中九雲夢〕” 하였다.
[주-D016] 백양(伯陽) : 
노자(老子)의 자이다. 한편 《참동계(參同契)》를 지은 한나라 신선가의 이름이 위백양(魏伯陽)이기도 하다.
[주-D017] 오십가(五十家)의 병서(兵書) : 
병법가(兵法家) 50명의 병서로, 많은 병서를 뜻한다. 두보의 〈송종제아부하서판관(送從弟亞赴河西判官)〉에 “병법 오십가의 서책은 네 배가 그 상자가 되었도다.〔兵法五十家 爾腹爲筐笥〕” 하였다.
[주-D018] 이……다투리오 : 
자신의 본성에 갖추어진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물리치면 자신의 내면에 무한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외물(外物)에서 명리(名利)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주-D019] 소씨(邵氏)는……희롱했나니 : 
북송(北宋) 때의 학자 소옹(邵雍)이 〈자작진찬(自作眞贊)〉에 “환을 희롱하는 여가에 한가로이 가고 한가로이 오노라.〔弄丸餘暇 閑往閑來〕” 하였는데, 그 원주(原註)에 “환(丸)은 태극(太極)을 말한다.” 하였다. 《擊壤集 卷12》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인 소옹이 태극의 이치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주-D020] 선천(先天) : 
우주의 본체와 만물의 본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송의 소옹이 진단(陳摶)의 학문을 터득하여 《주역》을 설명하면서 복희(伏羲)의 역(易)을 선천, 문왕(文王)의 역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圖)〉를 만들었다. 그래서 소옹의 역학을 선천학(先天學)이라 한다.



  *** 권필(權韠) : 여장(汝章), 석주(石洲)

요약 1569(선조 2)∼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권벽(權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광해군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고,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현전한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재집 제3권 / 시(詩)    ㅡ 노수신(盧守愼)


차가운 새벽에 스스로 율무죽을 끓여 먹고 글을 읽다〔寒曉自湯薏苡喫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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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새벽 물결에 어안이 번득여라 / 暗浪飜魚眼
곱게 대낀 마주로 죽을 쑤어 먹으니 / 精糜瀉馬珠
얼어서 움츠렸던 몸이 살살 풀리고 / 微微解凍蹙
마르고 텅 빈 속으로 술술 내려가누나 / 汨汨走枯虛
머나먼 변방에 삼동은 다 저물었고 / 絶徼三冬暮
덧없는 인생은 한 병든 이 몸이로다 / 浮生一病軀
차가운 새벽에 즐거운 낯으로 앉았는 건 / 愉顔坐寒曙
다만 서책을 읽을 줄 알기 때문일세 / 都只解觀書
[주-D001] 어안(魚眼) : 
물이 끓어오를 때 생기는 물고기 눈알만 한 기포(氣泡)를 지칭한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원전다(試院煎茶)〉 시에 “게의 눈을 이미 지나서 물고기의 눈이 나오니, 설설 소리가 솔바람 소리와 흡사하구나.[蟹眼已過魚眼生, 颼颼欲作松風鳴.]”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8》
[주-D002] 마주(馬珠) : 
여기서는 곧 ‘마원(馬援)의 명주(明珠)’라는 뜻에서 곡류(穀類)의 한 가지인 의이(薏苡), 즉 율무를 지칭한 것이다. 후한(後漢)의 명장(名將) 마원이 일찍이 교지(交阯)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항상 율무를 복용하여 장기(瘴氣)를 이겨 낸 경험이 있어, 돌아올 적에 그곳의 율무를 종자(種子)로 삼기 위해 한 수레 싣고 왔는데, 그가 죽은 뒤에 혹자가 이것을 남방의 명주(明珠)와 문서(文犀) 등 진괴(珍怪)한 보물이라고 천자(天子)에게 참소함으로써 천자의 노염을 사서 끝내 신식후(新息侯)의 봉작이 추탈(追奪)되기까지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 노수신(盧守愼) : 과회(寡悔), 소재(蘇齋), 이재(伊齋), 암실(暗室), 여봉노인(茹峰老人), 문의(文懿), 문간(文簡)

요약 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31년(중종 26)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2)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 전해지고 암송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마침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祥)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하여 국상(國喪) 때와 같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녔다.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다. 한편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서경』을 강론할 때에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명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에는 이전의 학설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ㅡ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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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집 제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ㅡ 조준(趙浚)

영통사 의침 법사가 부채와 시를 선물로 주어 시운을 빌려 사례하다〔靈通義砧法師惠扇並詩次韻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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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其一〕
오송강 물처럼 맑고도 그윽하니 / 吳松江水兩淸幽
유월 맑은 바람을 사는 것도 좋겠네 / 六月淸風可買求
세상 풍진은 열뇌만 많은데 / 萬事紅塵多熱惱
도인의 큰 은혜는 산처럼 무겁네 / 道人嘉惠重山丘

둘〔其二〕
달빛 솔바람에 절 더욱 그윽하고 / 月色松聲寺轉幽
물에 잠겨 다한 마음 담담해 욕심 잊었네 / 水沈銷盡澹忘求
병든 몸은 진실로 시대 바룰 계책 없으니 / 病夫固乏匡時略
다음에 스님 찾아 물러나 살 곳 구해야지 / 他日尋師卜一丘

[주-D001] 영통사(靈通寺) : 
경기도 개풍군(開豐郡) 영남면(嶺南面) 현화리(玄化里) 영통동(靈通洞) 오관산(五冠山) 아래에 있었다. 고려 현종(顯宗) 18년(1027)에 창건되었으며, 고려의 인종(仁宗), 의종(毅宗) 등 역대 왕들이 자주 이 절에 거둥하여 분향하였다.
[주-D002] 의침 법사(義砧法師) : 
미상(未詳)이다.
[주-D003] 오송강(吳松江) : 
소주하(蘇州河)라고도 하는데 태호(太湖)에서 시작되어 동북으로 흘러 소주(蘇州), 가정(嘉定)을 거쳐 상해(上海)에서 황포강(黃浦江)으로 흐른다. 당나라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煎茶水記)〉에서 물의 품질을 논하며 오송강수(吳松江水)를 16번째에 두었다.
[주-D004] 열뇌(熱惱) : 
사람의 속을 태우는 고뇌를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에 “우리들은 세 가지 고통 때문에 생사의 가운데 열뇌를 받아서 마음이 미혹되어 알지 못한다.〔我等以三苦故 於生死中 受諸熱惱 迷惑無知〕”라고 하였고, 《화엄경(華嚴經)》에 “백전단향을 몸에 바르면 일체의 열뇌를 물리쳐서 청량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以白旃檀塗身 能除一切熱惱而得淸涼也〕”라고 하였다.


  *** 조준(趙浚) : 1346(충목왕 2) ~ 1405(태종 5)


요약 조준은 고려말 개혁파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에게 중용되었다. 철저한 제도개혁과 체제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고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경제육전>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자책봉과 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했다.


   고려말 개혁파 사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송당(松堂).

충렬왕 때 재상을 역임한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덕유(德裕)이다. 1374년(우왕 즉위) 문과에 급제한 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사헌장령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82년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인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징벌했다.

이듬해 밀직제학을 지낸 뒤 도검찰사(都檢察使)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쳐 그 공으로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올랐다. 이후 두문불출하며 경사(經史)를 익히고, 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우왕의 폐위를 도모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철저한 제도개혁과 체제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려 한 그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성을 얻고 그해 7월 최초로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했으며 아울러 관제·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曺敏修)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켰으며,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공양왕 2)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 일파의 탄핵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가 되었으며, 그해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그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었으며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자책봉·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자연히 이방원(李芳遠)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로 있으면서 한때 투옥되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그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제도의 재편을 통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녹과전(祿科田)·구분전(口分田)·군전(軍田)·투화전(投化田)·외역전(外役田)·위전(位田)·백정대전(白丁代田)·사사전(寺社田)·역전(驛田)·외록전(外祿田)·공해전(公廨田) 등의 제전(諸田)을 분급하여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토지개혁론). 또한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했다.

그는 요순 이래의 하·은·주 3대를 이상적인 사회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즉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또한 〈주례 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즉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쳐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다만 적합한 재상을 얻어 그와 함께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또 주자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학교교육, 사회윤리의 보급에 주력했다. 우선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고 국가의 치난(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관련되는 곳이므로 근실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을 교수관(敎授官)으로 삼아 학교교육에 힘쓰도록 했다. 이때 교수관의 임무는 고려 초기 이래의 사장(詞章)이 아닌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경서를 읽도록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품 이하의 관원을 모아 시험을 보게 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제교(製敎)를 관장하게 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는 좌천시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또한 〈주자가례 朱子家禮〉의 보급을 통한 유교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지내도록 했으며 효자와 절부(節婦)를 뽑아 조세를 감면하고 정표(旌表)를 세워 사회 교화를 이루도록 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