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8

2018. 4. 8. 17:14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8




양촌선생문집 제7권 / 시류(詩類) - 남행록(南行錄)    ㅡ 권근(權近)



매계 상인(梅谿上人)이 평전(平田)을 전송하는 시권(詩卷) 끝에 쓴다. 절구 6수 [題梅谿上人送平田詩卷末。六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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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머리에 집을 지으니 땅이 절로 외지고 / 卜築谿頭地自偏
대울타리 사립문이 추운 하늘을 가렸네 / 竹籬柴戶掩寒天
선옹을 우연히 만나 얼굴 펴고 웃으니 / 仙翁邂逅開顔笑
사람과 매화가 함께 환히 빛나네 / 人與梅花共粲然
섣달이 다 간 계곡에 눈이 개니 / 臘盡谿山雪向晴
찬 매화가 처음 피니 그윽한 향기가 풍기네 / 寒梅初綻暗香生
선옹을 우연히 만나 차 달이는 곳에 / 仙翁邂逅煎茶
성긴 그림자 가로 비꼈는데 물은 절로 맑네 / 踈影橫斜水自淸
위는 두 상인(上人)이 서로 만난 것을 기록하였다.

시냇가 찬 매화 두세 가지에 핀 꽃 / 谿上寒梅三兩枝
건곤의 맑은 기운이 뱃속까지 스미네 / 乾坤淸氣入人脾
선옹을 작별한 뒤 서로 생각하는 마음은 / 仙翁別後相思意
새 향기 토해 내매 스스로 시를 읊네 / 嚼出新香自詠詩
눈이 쌓였던 남쪽 시내에는 물이 절로 생기고 / 雪漲南溪水自生
가지에 가득한 봄기운에 꽃봉오리가 돋네 / 滿枝春意動芳英
선옹을 작별한 뒤에 꿈을 못 이루어 / 仙翁別後應無夢
밤마다 들보 사이에 지는 달빛만 밝으리 / 夜夜梁間落月明
위는 매계가 평전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였다.

해가 저문 빈 산에 눈이 쌓이니 / 歲暮空山雪作堆
추운 하늘에는 나는 새도 오가지 않네 / 天寒飛鳥不歸來
선옹을 작별한 뒤 서로 바라보는 곳에 / 仙翁別後相望處
시냇가 매화는 몇 그루나 피었는가 / 磎上梅花幾樹開
어제 지팡이 가는 대로 매화를 찾아 나섰더니 / 昨日尋梅信杖扶
맑은 향기는 코를 찌르고 찬 기운은 살에 닿네 / 淸香滿鼻冷侵膚
선옹을 작별한 뒤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 仙翁別後相思意
그대 돌아올 때쯤에 다 없어질까 염려일세 / 只恐歸時掃地無
위는 평전이 매계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였다.



  *** 권근(權近) :  1352(공민왕 1)  ~  1409(태종 9)

요약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이성계의 새 왕조 창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개국 후 각종 제도정비에 힘썼다. 하륜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했다.

개요

권근의 글씨

권근의 글씨, 〈 해동명적〉에서, 규장각 소장

이성계의 새 왕조 창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개국 후 각종 제도정비에 힘썼다.

그의 사상은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예기〉를 중시하여 강상의 확립을 통한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고려말의 활동

   본관은 안동. 어렸을 때 이름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할아버지는 검교시중 문정공(文靖公) 고(皐)이고, 아버지는 검교정승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정간공(靖簡公) 희(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관시, 다음해 문과전시에 급제했다. 우왕(1374~88 재위) 초년에는 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명나라와 잘 지내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북원(北元) 사절의 영접을 막으려고 하다가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의 뜻에 거슬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뒤 예문응교·좌사의대부·성균대사성·예의판서를 지냈으며, 1380년과 1385년 2번에 걸쳐 성균관시(成均館試)를 맡았다.

   1388년(창왕 즉위)에는 성균관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과거에 합격한 뒤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389년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의 황제가 '다른 성을 가진 사람으로 국왕을 삼음'[以異姓爲國王]을 문책한 자문(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미리 뜯어 보아 대간의 탄핵을 받고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1389년 공양왕 즉위 후에도 계속하여 영해·흥해·김해 등을 옮겨다니면서 유배생활을 계속했으며, 1390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히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유배생활을 하면서 〈입학도설 入學圖說〉을 저술했다. 이후 풀려나 충주에서 살다가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조선개국 후의 활동

양촌문집

〈양촌문집〉, 권근 지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393년(태조 2) 왕의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로 가서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짓고, 왕명으로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비문을 지었다.

   이후 새 왕조에 출사하여 예문관춘추학사 겸 대사성·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1년에는 표전(表箋)문제로 자청하여 명에 갔다. 이때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고,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응제시(應題詩) 24편을 지어 문명을 떨쳤으며, 외교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조선과 명의 관계를 호전시켰다. 다음해 3월 귀국하여 헌사(憲司)의 탄핵을 계기로 스스로 진정전(陳情箋)을 올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정종대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지내면서 오랜 폐단이었던 사병제도의 혁파를 건의하여 이를 단행함으로써 왕권 확립에 기여했다. 태종대에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401년(태종 1)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지고, 예문대제학 겸 성균대사성이 되었다.

   다음해 지공거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5년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다.

   1406년 유학제조(儒學提調), 1407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었으며 동시에 최초의 문과 중시(重試)에 독권관(讀券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뽑았다. 그동안 경연을 비롯한 각 관각(館閣)의 실질적 주권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세자 책봉 뒤에는 세자 좌빈객이사(左賓客貳師) 등을 겸임했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 東國史略〉을 편찬했다. 또 유학제조로 학식(學式)을 저정하여 유생의 독서를 규율하였으며, 권학사목(勸學事目) 8조를 올려 문교시책의 시정과 보완에 크게 이바지했다. 1409년(태종 9) 58세로 사망하였다.

권근 3대 묘소

위로부터 권근과 아들 제, 손자 람의 묘소이다.

   권근은 이와 기, 심과 성, 정과 의, 사단과 칠정 등을 이물로 보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여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사서에 못지 않게 오경, 특히 〈예기 禮記〉 를 중시하여 조선초 강상 확립을 통한 왕권강화에 기여했다. 저서로는 〈입학도설〉·〈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경서구결 經書口訣〉 등 유가류와 〈동국사략〉·〈동현사략 東賢事略〉 등의 역사책과 시문집인 〈양촌집〉 40권 등이 있으며, 정도전의 척불문자인 〈불씨잡변 佛氏雜辨〉에 주석을 더했다. 뒤에 세조대에는 보조공신 좌의정 길창부원군으로 훈증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출처 : < 다음백과 >





오산집 속집 제2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ㅡ   차천로(車天輅)


회곡(灰谷)이 준 시에 차운하여 2수 次灰谷見贈韻 二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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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을 손에 들고 만번을 송독하니 / 手把黃庭誦萬過
묵은 병 나은 듯이 마음이 상쾌했지 / 爽然如覺去沈痾
뼈 수련엔 단정이 필요하다 하였었고 / 久聞鍊骨須丹鼎
정신 보양은 도가에서 나오게 됐지 / 剛被頤神出道家
연적 따라 주사 갈아 문장을 고쳐보고 / 滴露硏朱閒點易
샘물 길어 나누어서 차 달이곤 하였지 / 汲泉分碧自煎茶
고음하는 유운이 그래도 나를 아니 / 苦吟柳惲猶知我
뜻밖에 보내온 명주 목하에 필적했지 / 投暗明珠敵鶩霞

섭섭할손 그대 떠나 발길이 끊겼을 때 / 感君離索斷經過
이 몸은 노쇠하여 묵은 병에 시달렸지 / 老我沈綿抱舊痾
난세에 인연 따라 손 되어 상심하다 / 亂世隨緣傷作客
부생이 정착하여 가정 꾸려 즐거웠지 / 浮生著處樂爲家
거미줄 친 용수석 이미 말고서 / 蟲絲已捲龍鬚席
속절없이 작설차만 보글보글 끓이었지 / 蟹眼空烹雀舌茶
비 내릴 때 그대의 좋은 시 받았는데 / 辱贈好詩看雨暎
그 지취 청하처럼 뛰어나고 고상했지 / 聖知奇意蔚靑霞
[주-D001] 황정(黃庭) : 
《황정경(黃庭經)》인데, 도가(道家) 경전의 한 가지이다. 양생 수련(養生修鍊)의 도를 강론할 때 비장(脾臟)을 중앙황정(中央黃庭)이라 일컫는데, 오장(五臟) 중에 특히 비토(脾土)를 중시하기 때문에 《황정경》으로 명명한 것이다. 하나는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인데, 대도옥신군(大道玉晨君)이 저술하여 위부인(魏夫人)에게 전한 것으로 36장(章)으로 되어 있고, 또 하나는 《황정외경경(黃庭外景經)》인데, 노자(老子)가 저술한 것으로서 3편(篇)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황정둔갑연신경(黃庭遁甲緣身經)》, 《황정옥축경(黃庭玉軸經)》이 있는데, 모두 《황정경》이라고 일컫는다. 《東觀餘論下 跋黃庭經後》
[주-D002] 단정(丹鼎) : 
단약(丹藥)을 제조하는 데 사용하는 솥이다.
[주-D003] 유운(柳惲) : 
양(梁)나라 사람인데, 자는 문창(文暢)이다. 젊어서 지행(志行)이 있었고 시를 잘 지었다. 양 무제(梁武帝)가 연회에 참여하면 반드시 불러 시를 짓게 할 정도로 매우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는 회곡(灰谷)을 말한다.
[주-D004] 뜻밖에 …… 필적했지 : 
뜻밖에 명주(明珠)를 보내온다는 것은 상대방이 뜻밖에 시를 보내온다는 뜻이다. 목하(鶩霞)는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를 말한다. 내용에 “저녁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한 것을 따온 것이다.
[주-D005] 거미줄 …… 말고서 : 
상대방이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백(李白)의 〈백두음(白頭吟)〉 시에 “용수석을 걷지 마오. 여기에서 거미줄이 생기리라.〔莫捲龍鬚席 從他生網絲〕”라고 하였다. 희자(喜子)라는 거미가 오면 반가운 사람이 온다는 속설을 근거로 거미줄이 생겨 벗이 올 수 있도록 용수석을 걷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는 용수석에 이미 거미줄이 쳐졌는데도 벗이 오지 않은 상황을 표현했다.
[주-D006] 그 지취 …… 고상했지 : 
《문선(文選)》 〈한부(恨賦)〉에 “성대한 푸른 노을의 빼어난 뜻〔鬱靑霞之奇意〕”이라고 한 구절을 변형하여 쓴 것인데, 그 주에 “청하기의(靑霞奇意)는 뜻이 고상한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이로 인해 청하기의를 고원한 지취라고 하였다.


  *** 차천로(車天輅) : 복원(復元), 오산(五山),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

요약 1556(명종 11)∼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松都) 출신. 고려의 간의대부 차원부(車原頫)의 6대손이며, 차계생(車繼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차광운(車廣運)이다. 아버지는 차식(車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가 있다는 이유로 용서되었다.

   이듬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한호(韓濩)·권필(權韠)·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다. 특히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오산집(五山集)』·『오산설림(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江村別曲)」 등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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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집 제1권 / 시(詩)    ㅡ 이원(李原)


은거하며 즉흥으로 짓다〔幽居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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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새벽에 세수하고 오사모(烏紗帽)를 쓴 뒤에 / 淸晨盥櫛戴烏紗
달팽이처럼 조그만 이 초가에 앉았네 / 坐此茅茨一殼蝸
술통에 술 내리니 빗소린가 의심하고 / 酒滴槽床疑有雨
뜰 나무에 눈 날리니 꽃잎이 날리는 듯 / 雪飄庭樹作飛花
창가에서 붓을 들어 그대로 시를 쓰고 / 明牕點筆仍題句
시내에서 얼음 깨어 스스로 차 끓이네 / 碧澗敲氷自煎茶
손이 오면 화를 내며 다시 문을 닫고서 / 客至從嗔還閉戶
근래에는 게을리 살며 조용함을 좋아하네 / 年來過懶愛無譁
[주-D001] 은거하며 즉흥으로 짓다 : 
1407년(태종7) 1월 30일 판한성부사에서 파직된 뒤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부터 권2의 〈진관사의 욕실에 짓다〔題眞觀社浴室〕〉까지는 1407년 1월부터 이듬해 2월 요동(遼東)에서 세자를 맞이하기 이전에 지은 시이다.



  *** 이원(李原)  :  1368(공민왕 17)  ~ 1429(세종 11)

   요약 이원은 조선 개국 초기에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제도를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특히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곧고 바르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근과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태종의 즉위에 협력하여 1401년(태종 1)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철성군에 봉해졌다. 공안부윤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 윤종을 구타해 파직되었다. 1408년 태조가 죽자 빈전도감판사가 되어 국장을 주관했으며, 1415년 외척간의 혼인을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이 재위기에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라 세종의 정치 이상실현에 공헌했다. 1422년 태종이 죽자 정탁과 함께 국장도감도제조가 되어 장례를 주관했다. 1426년 노비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모함을 받아 공신녹권을 회수당하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 <철성연방집>이 있다.


   본관은 고성.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할아버지는 수문하시중 암(嵒)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 강(岡)이며,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어려서는 매부인 권근(權近)에게 배웠으며, 정몽주(鄭夢周)에게도 배웠다. 1382년(우왕 8) 성균진사과,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어 사복시승·예조좌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392년(태조 1) 사헌부지평이 되어 10조의 상소를 올리고 노비를 속공할 것을 건의했다. 1396년 사헌부중승이 되었으며, 태종의 즉위에 협력하여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공안부윤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 윤종(尹琮)을 구타해 파직되었다.

   1402년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으며 1403년 승추부제학이 되었고, 이어 고명부사로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어 평양부윤·서북면도순문찰리사·예문관제학·대사헌·한성부사 등을 지냈다. 1408년 태조가 죽자 빈전도감판사가 되어 국장을 주관했으며, 이어 경상도순찰사·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411년 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415년 외척간의 혼인을 금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추충익대좌명공신 호를 받고 이어 예조판서·대사헌·판한성부사·의정부참찬·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417년 평안도·황해도의 응방인(鷹坊人)을 추쇄하여 군역에 충당시키고 1418년 군무사의를 논한 글을 올렸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한 후 영경연사를 겸임했으며, 이어 봉숭도감도제조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0년 집현전영전사를 겸임했다. 1421년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었으며 이어 좌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22년 태종이 죽자 정탁(鄭擢)과 함께 국장도감도제조가 되어 장례를 주관했으며, 1425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노비탈점 혐의로 공신녹권을 회수당하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1455년(세조 1)에 공신녹권을 돌려받았으며, 양헌(襄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 鐵城聯芳集〉이 있다.  /  < 다음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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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집 제2권 / 시(詩)



사가정의 시에 차운하다 4수 〔次四佳亭詩 四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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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고 바람 따뜻하자 고사리순 살찌고 / 雪消風暖蕨芽肥
들꿩은 사람 봐도 날지 않아 어여쁘네 / 野雉近人嬌不飛
어젯밤 정자 앞에 가랑비 내리더니 / 昨夜亭前微雨過
살구꽃 두루 피어 아침빛에 비치네 / 杏花開遍映朝暉

개구리가 개굴대고 보슬보슬 비 오는데 / 蛙聲閣閣雨絲絲
무수한 연꽃이 푸른 못에 가득하네 / 無數荷花滿綠陂
긴긴날 숲 그늘에 아무도 오지 않아 / 遲日樹陰人不到
맨머리로 다리 뻗고 홀로 시를 읊조리네 / 科頭箕踞獨吟詩

바람 이슬 서늘하여 나뭇잎에 단풍 들고 / 風露凄凄木葉黃
연꽃이 모두 지자 국화가 막 피네 / 芙蓉落盡菊初香
때로 맑은 강 굽이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 有時垂釣淸江曲
돌아보니 흰 갈대꽃이 언덕에 가득하네 / 回首蘆花滿岸霜

세모의 찬바람에 술값이 비싸져서 / 歲暮風寒酒價加
화롯불 마주하여 때로 손수 차 끓이네 / 對爐時復自煎茶
아이들은 가지 끝에 눈 내렸다 착각하지만 / 兒童錯料枝頭雪
뜰 매화가 벌써 폈다고 다투어 알려오네 / 爭報園梅已着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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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집 제2권 / 시(詩)   ㅡ 이원(李原)



관음사에서 자다〔宿觀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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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에 한 줄기 길뿐이라 / 千山一條路
걷고 걸어 나 홀로 찾아왔네 / 步步獨來尋
땅이 외져 사람 오기 어렵고 / 地僻人難到
산이 높아 해조차 빨리 지네 / 峯高日易沈
폭포수는 어지러운 바윗돌을 울리고 / 瀑流鳴亂石
풍경 소린 성긴 숲 너머로 퍼지네 / 寒磬出疏林
고요하여 속세 생각 없어져서 / 寂寂無塵想
차 끓이고 달을 보며 시를 읊네 / 煎茶對月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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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집 제2권 / 시(詩)    ㅡ 이원(李原)



허 상인에게 보내다〔贈虛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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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봄 산속에서 / 寂歷春山裏
소요하는 뜻이 많겠네 / 逍遙意味多
숲 속 헤쳐 새벽에 약을 캐고 / 穿林晨採藥
대를 태워 밤에는 차 끓이네 / 燒竹夜煎茶
숲 속 새는 긴긴 날에 울음 울고 / 幽鳥弄遲日
잔바람이 불어서 꽃이 지네 / 輕風吹落花
자주자주 왕래하게 되면 / 從令數來往
자리를 함께하여 시를 지어 보세 / 促席共吟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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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집 제4권 / 증유(贈遺) 관찰사 때 받은 것이다.



서경 사상이 찻그릇을 선물했기에 시로 보답하다 6수 〔西京使相惠石銚以詩答之 六首〕 [변계량(卞季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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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배에 용머리를 솜씨 좋게 쪼고 다듬으니 / 豕腹龍頭巧琢磨
약 달이고 차 끓이는 최적의 그릇이네 / 最宜煎藥與煎茶
용헌공이 정중히 역리를 보내어 / 容軒鄭重煩郵吏
멀리 병든 춘정의 집으로 보냈다네 / 遙惠春亭病者家

언제나 안고서 그대를 그리는데 / 區區常抱憶君情
찻그릇을 보고 나니 한이 다시 생기네 / 石銚看來恨又生
어느 저녁 등불 아래 무릎을 맞대고서 / 何夕一燈相促膝
화로 끼고 시 지으며 한밤중을 보낼까 / 擁爐聯句盡三更

부녀들이 너의 모습 보고서 웃더라도 / 縱然婦女笑形模
쓰임새는 도리어 솥의 용도 갖추었네 / 見用還將鼎鼐俱
작은 집에서 차만 끓인다고 하지 말게 / 莫謂小齋徒煮茗
국을 끓여 임금님께 드리고 싶다네 / 調羹直欲獻天廚

향긋한 차에 불을 지펴 산 샘물을 끓이고 / 香茶活火煮山泉
차 한 사발 기울이자 뼛속까지 신선이 되려 하네 / 一椀才傾骨欲仙
어찌하면 집집마다 이 맛을 나누어 / 安得家家分此味
천하의 누린내와 독향을 씻어 낼까 / 頓令天下洗葷羶

한자는 돌솥 아껴 연구(聯句)와 시서(詩序)를 지었고 / 韓子愛聯曾有序
파공은 사례하며 또한 시를 남겼네 / 坡公謝惠亦留詩
병이 든 춘정 노인 뭐하는 사람인가 / 春亭病叟何爲者
오직 차나 끓이는 어리석은 사람 같네 / 唯解煎茶似大癡

어릴 적에 함께 놀던 십여 년에 / 孩提同隊十年餘
삼 일만 못 만나도 소원하다 여겼네 / 三日違離也謂疎
오랜 이별에 모진 마음 감당을 못 하는데 / 久別不堪懷抱惡
강산을 돌아보니 또다시 초가을이네 / 江山回首又秋初


[주-D001] 찻그릇 : 
원문의 ‘석조(石銚)’는 도기(陶器)로 만든, 차를 끓이는 작은 찻그릇이다.
[주-D002] 국을 끓여 : 
원문의 ‘조갱(調羹)’은 간을 맞추어 국을 끓이는 것으로, 재상이 되어 임금을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비유한 말이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내가 만일 국을 조리하려 하거든 그대는 소금과 매실이 되어라.〔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다.
[주-D003] 한자(韓子)는 …… 지었고 : 
한자는 당나라의 한유(韓愈)이다. 한유는 〈석정연구시(石鼎聯句詩)〉와 함께 시서(詩序)를 지었다. 《韓昌黎集 補遺》
[주-D004] 파공(坡公)은 …… 남겼네 : 
파공은 송나라의 문인이자 학자였던 소식(蘇軾)을 말한다. 소식은 〈시원전다(試院煎茶)〉에서 “관아에서 차 끓이는 법이나 잠시 배워서, 벽돌 화로와 돌 찻그릇이나 좇아다닐까 싶네.〔且學公家作茗飮 磚爐石銚行相隨〕”라고 읊었다.




 

*** 변계량(卞季良 ) : 1369(공민왕 18) ~ 1430(세종 12)

요약 변계량은 정도전과 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 진덕박사 등의 벼슬을 담당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다.


   정도전·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 호는 춘정.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 옥란(玉蘭)이며,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 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 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편찬했다. 저서에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숙이다.  / < 다음백과 >


 

[인물]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글쓴이 : 밀양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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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는 구경, 호는 춘정(春亭)이며, 밀양군 초동면 구령리에서 변목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려 우왕 11년에 17세로 등제(登제)하여 전교서(典校署)주박, 진덕박사(進德博士)를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 병을 핑계로 벼슬을 하지 않다가, 태조 5년(1396년)에 비로소 교서감승(校書堪勝)으로 나아갔다.
 
  태종 8년(1408)에 문관들은 친시(親試)하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뽑혀 예조 우참의 겸 수문전직제학 지제고(修文殿直提學 知制誥)로 특배되었다. 동 17년에 예문과 대제학 겸 대사성으로 승배되고, 다음 해에는 우변객을 겸하고 다시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로 옮겨졌다. 세종 때 집현전을 세우자 동 2년에 공이 그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동 8년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배되었다.

  20년간 대제학으로서 국초 전장문물에 공헌이 많았고, 중국과의 외교를 전담하였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세종 때 중국에 대한 금은의 예물을 바치던 것을 영원히 면하게 된 것도 공(公)의 공이로다.

  여러 차례 대소 과거의 고시관을 맡아 엄정하게 인물을 선발함으로써, 고려말기 문란했던 과거제도를 바로 잡았다. 공은 도량이 넓어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는데 힘썼다. 저서로는「춘정집(春亭集)」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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