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안지역 떡차의 해로유입에 관한 역사성

2018. 4. 13. 00:59차 이야기



      

전남 해안지역 떡차의 해로유입에 관한 역사성 / 정서경| 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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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동북아 문화연구 제42집, 2015.3, 105-126 (22 pages)

 


첨부파일 정서경.pdf



전남 해안지역 떡차의 해로유입에 관한 역사성

【목 차 】ㅡ
1. 머리말
2. 전남 해안지역 떡차의 발굴과 복원
3. 해로유입설을 근거로 한 다양한 논거의 제시
3-1. 학자들의 견해를 근거로 보는 해로
유입설의 논증
3-2. 청해진을 통한 한국 떡차의 해로유입설
3-3. 백제시대 불교의 도입과 궤를 같이
하는 해로유입설
4. 해양 경로를 통한 차의 전래와 유입의
재조명
5. 맺음말


1. 머리말

   본 연구는 전남 해안지역에서 음용되었던 떡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1) 한국 차의 기원의 문제가 현재까지 미결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떡차의 해로유입을 조명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떡차파래, 청태, 해안, 고뿔, 약차 등과 관계가 깊다. 이러한 용어들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해양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정황은, 현재까지 정사로서 인정되는 자료와 축적된 연구가 없다보니 추정만 있을 뿐 명징하게 밝혀내지 못했던 한국 차의 해로유입설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로부터 전남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약용으로 음용되었던 차의 전승에 관한 문제는 1930년대 일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최근 청태전(靑苔錢)2)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어 보급하고 있.3) 떡차는 찻잎을 떡처럼 찧어 엽전 모양으로 만든 덩어리 차(團茶)의 일종이다.

* 이 논문은 2013년 8월 개최된 “-바다와 섬, 소통과 교류 그리고 지속가능성-제 4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서 전남 해안지역 돈차의 해로유입과 전승, 그 배경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 국립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전․민속학 전공.

1) 흔히 단차의 형태로 유통되고 있는 다양한 명칭의 통일성이 필요하다. 제다과정이 떡을 만드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여 우리말로 떡차이다.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지만 만드는 과정과 유입된 이름을 그대로 풀이하여 필자는 떡차라고 정의하겠다. 먼저 떡차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최초의 차의 형태인지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당대의 餠茶와 음용방법인 煮茶風을 고려하고 남아 있는 차문화의 기록을 분석하면 떡차의 해로유입설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우리 차의 기원에 대한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고, 해로유입에 관한 분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다양한 자료발굴과 더불어 향후 발전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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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코쿠와 미얀마 바둑돌 차, 중국 푸얼 지방의 보이차, 티베트, 몽골과 시베리아 지방에서 음료로 상용하는 벽돌차도 이런 덩어리 차류로 구분할 수 있다. 덩어리차는 餠茶, 떡차, 團茶, 固形茶, 硏膏茶, 綱茶, 곶차(串) 등으로 불린다. 또 형태에 따라 돈차(錢茶), 月團, 磚茶 그 명칭이 다양하다. 명칭만큼이나 떡차의 음용동아시아 전역에서 음료 또는 약용으로 음용되어 온 역사성을 지닌다.

   떡차의 유입과 전래․활용의 고대 자료 구를 통하여 미결로 남아 있는 우리 차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해양사와 해양문화를 위시하여 다양한 각도로 연구되고 있는 많은 자료를 참고로 해로유입설을 가급적 넓게 열어 두고 그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이는 해법을 찾기 위한 과정이 될 수도 있고, 더 발전된 연구를 도출해내는 도약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연구의 필요성을 두었다. 한국 차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침과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연구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향후 차문화 연구 발전에 일조하고자 한다.

   차문화가 해양 경로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기존의 학회에서 발표된 바 있었으나 이론적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동아시아연구나 해양과의 학제 간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미흡한 부분도 없지 않다. 각 지역에서 떡차의 전승이 실용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떡차의 유입과 전승의 분석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먼저 고대 전남 해안 지역의 포구와 항로의 민간교역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고대부터의 해양 관련 문헌과 역사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근대까지 상음되었던 전남 해안지역의 영암, 해남, 강진, 장흥, 보성, 구례 지역을 포함하여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제다되었던 현장과 재현된 떡차를 찾아 분석하였다. 예컨대 이 떡차의 시론은 해양 루트를 통해 본 동아시아 차문화 교류 연구로 확장 가능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2. 전남 해안지역 떡차의 발굴과 복원

   돈(엽전)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돈차4)이고, 전남 해안지역에서는 바다에서 나파래5)와 비슷한 색깔에 엽전모양이라 하여 청태전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청태전은 차에 파란 이끼가 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餠茶(떡차), 돈차, 團茶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맑고 투명한 탕색과 부드러운 맛이 돋보이는 기호음료로써 뿐만 아니라 눈을 밝게 하고, 해독, 변비예방, 해열 등에 그 효능이 있어 약이 귀했던 시절 약으로 음용되었던 차이다. 이하 떡차
로 표기한다.

3)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茶詩에는 녹태전(綠笞錢)1)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一拱穿破綠苔錢 오로지 지팡이로 녹태전을 뚫어 깨니...>, 정서경, 고려 차시와 그 문화, 이른아침, 2008, 156쪽.
4) 1970년대 광주민속박물관장으로 떡차를 복원한 우리 차의 재조명을 쓴 최계원 역시 청태전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5) 녹조류 갈파래과에 속한 해조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몸은 대부분 원통 모양을 한 엽상이며, 민물이 흘러들어 오는 웅덩이의 바위에 붙어 산다. 보통 늦가을부터 초여름까지 번식한다. 향기와 맛이 좋아 식용으로 쓰인다. 속명은 Enteromorph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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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떡처럼 빚어 엽전 모양으로 만든 떡차

    시간이 5흐를수록 녹색에서 노랑, 자주, 검정색으로 변하면서 맛과 향도 달라지는 떡차는 조선 말 이서민들이 몸살과 두통 등의 상비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마치 엽전 꾸러미 모양처럼 지푸라기로 묶어 처마 밑에 보관하였다가 약용으로 상음하였다. 이것은 한국에 茶經의 제다법과 음차법이 일찍이 유입되어 떡차의 음용이 성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陸羽가 780년경에 저술한 다경三之造에는 떡차(餠茶)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6) 우리 차문화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부분이 3장 三之造와 7장 七之事이다.

   육우의 단차고려 말 이규보, 이색, 조선의 김시습, 정약용 등에 의해 제다되거나 시음된 기록이 있고,鮮の茶と禪에서 보듯이 탕수에 끓여 먹는 청태전으로 변신하여 오랫동안 우리에게 사랑 받은 차이다.7)  중국 당나라 때 유행한 餠茶(떡차)
한반도에 전래되어 귀족사회에 빠르게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지명에 句茶國이란 말이 나오고 생활 속에서 그 자취도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도 차를 무덤에 넣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차가 일상생활에 많이 사용됐다는 증거다. 불전이나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차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집안의 조상이나 사찰의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생활에서 우리가 쓰는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올리게 되어 있고 무덤에 부장으로 넣는 것 역시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육로 유입설보다 먼저 떡차가 유입되어 음용되었다는 사실을 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떡차가 고증한다.분에서 출토된 떡차는 지름이 4cm, 돈 모양으로 중량은 1.8g이다.8)  무덤의 부장품으로서 발견된 차이며, 4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향과 다기가 있었으니 우리의 음차생활은 늦어도 3,4세기를 상회한다고 볼 수 있다.9)

   1925년 나까오 만조우(中尾萬, 1882~1936)장흥군 관산면 죽천리에서 陸羽의 茶經 나오는 당나라의 단차와 같은 차를 보고서 놀라 소개한 이래, 1937년 이나바이 와키치(稻葉岩吉, 1876~1940)장흥군 유치면 보림사 쪽에 와서 이 차를 청태전이라고 한다는 것을 비로소 배운 것이다. 그러나 유치면 구석리 사람들청태전을 그냥 차라고 하여 1919년경까지 마을 사람들이 만들었으나 작설차를 마시게 되면서 중단되었다고 하였다.

6) “음력 2월과 4월 사이에 상아 모양의 이삭처럼 솟아 오른 것을 맑은 날에 따서 시루에 넣고 찐 뒤 절구통에서 찧는다. 그리고 일정한 틀에 헝겊을 깔고 빻은 찻잎 덩어리를 넣고 두드려서 떡차를 찍어낸다. 건조대(焙爐)에 불에 쬐어 말려서 중앙부에 구멍을 뚫고 볏짚(지푸라기)으로 꿰어 보관 한다”-육우, 茶經, 三之造.
7) 정영선 편역, 육우의 茶經, 너럭바위, 2011, 1쪽.
8) 靑木正兒, 靑木正兒全集 8권, 1971.-재인용, 류건집, 한국차문화사 상권, 이른아침, 2008, 58쪽.
9) 류건집, 위의 책, 2008,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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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떡차를 복원․재현한 김봉금 할머니와 손자 문병길

   이것은 장흥 관산 방촌리 주민과 강진읍 목리 주민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라고 한다거나 보통 ‘떡차, 돈차’고 한다는 구술이었다.10)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마을이나 해남 연동에서도 이것은 ‘차’라고 해서 보통 가정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11) 당시에는 약차로 음용하였다.

  청태전을 보고 일명 餠茶(떡차)라고 해서 작설을 딴 뒤의 잎으로 만든다. 품질이 나쁜 것이다. 4, 5년 전까지 이 마을에서도 만들었다. 백 개쯤 새끼에 꿰어서 8전~10전에 팔고 있었다고한다.(1939년 2월 당시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윤재청의 구술.)12) 이것은 5월 상순부터 5월 15일 경까지 딴 차로 만든 것으로서, 餠茶라고 해서 4, 5년 전까지 월하리 사람은 누구나 만들어서 마시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팔리지 않아 중지하였다. 차 치고는 나쁜 것으로서 旗茶보다도 나쁘다. 이 차는 산에서 따 온 잎을 집에서 찌고, 공이로 찧고, 대나무 테 속에 끼워서 틀을 만들어 대곶이(竹串)로 구멍을 뚫고 새끼줄로 백 개쯤을 꿰어서 집의 어디에나 매달아 두고, 필요할 때 마신다. 팔러 다닐 때는 백 개에 5전 내지 10전으로 팔고 있었다.”

   이렇게 떡차(청태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떡차는 전남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성행구례에서도 음차하였으며, 장흥과 영암, 강진 에서는 차시장에 떡차를 팔러 나온 사람도 있었다. 그런 연후에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鮮の茶と禪의 조사지역을 찾아 당시 청태전을 제다했던 사람들을 찾은 것은 1972년 5월이었다. 광주민속박물관 관장이었던 최계원(崔啓遠)이 차를 몰 장흥 보림사를 찾았고 보림사 주변에서 차를 제다했던 인물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김봉금(金鳳金, 1908~1983, 당시 65세)13)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17살(1924년)에 보림사......

10) 당시 백련사 주지는 청태전을 보였더니 "이것은 차라해서 자기가 어렸을 때(강진읍 목리 출신) 만덕사에서 노닐었을 무렵에 이 절에서 보았다. 옛날에는 각지의 절에서 만들었으나, 지금은 만들지 않는다는 구술이다.
11) 이한영 翁구술-1939년 2월 25일 당시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우리나라에서 최초를 차를 상표 등록해 판매했던 장본인이다.
12) 모로오까 다모쓰(諸岡存, 1879~1946)․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 1900~1982) 共著, 金明培譯, 朝鮮の茶と禪, 保林社, 1991,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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