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2018. 4. 13. 01:32차 이야기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 전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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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4.11.22 07:00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개성공단에서 발굴한 연암 박지원의 글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신성헌 기자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개성공단에서 발굴한 연암 박지원의 글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신성헌 기자

    “야! 넌 사내자식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네?”
    “뭔 말이 그렇게 많냐구!”
    지도교수가 논문을 탁 집어던졌다. 석사 학위 논문 심사 때 일이었다. 학생이 제출한 논문에 권필(權韠·1569-1612)의 한시를 적은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걸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라고 옮겼던 것. 우연히 그 쪽을 펴든 교수 입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학생이 “왜 그러세요?” 물었다.
    “이거 무슨 자야?”
    “빌 공(空)입니다.”
    “거기 ‘텅’자가 어딨어!”
    ‘빈 산’ 하면 될 것을 ‘텅 빈 산’이라고 늘여 썼다는 얘기였다. 질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뭇잎이나, 잎이나!” 하면서 ‘나무’를 싹 지우고, “‘떨어지고’나, ‘지고’나!” 그러고는 ‘떨어’를 없앴다. “비가 부슬부슬 하면 내리는 거여! 부슬부슬 올라가는 비도 있나?” 그러면서 ‘내리는데’까지 떨어냈다. 결국 남은 것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처음 번역문의 딱 절반이 돼 있었다.

    ‘아, 글이란 보태는 게 아니라 줄이는 거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쩔쩔 매던 대학원생의 이름은 정민. 오늘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정평이 난 고전 인문학자다. 그의 간결한 글쓰기는 그날의 대오각성에서 시작됐다. “그 후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는 마지막 한 달을 문장 줄이기에만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논문 분량은 1400매에서 200매가 줄더군요. 글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어딜 찔러도 들어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나이 서른에 박사가 되고 이듬해 그는 모교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전임교수가 됐다. 얼마 전엔 인문대 학장까지 맡아 더 바빠졌다. 지난 8월부로 그의 집무 공간이 된 학장실에서 그를 마주했다. 새로 출간된 그의 책 ‘새 문화사전’(글항아리)을 들고 찾아간 길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얻은 인터뷰 시간.(평소 그의 꼼꼼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생산물을 생각하면 허튼 대화로 시간을 뺏기가 미안해진다) 물음을 책에만 가둘 수는 없었다. 정 교수도 시계를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걸려오는 여러 통의 전화들을 미뤄가며 질문에 끝까지 답했다. 글만큼이나 정돈된 말들 사이로 그의 글과 책 쓰기, 학문의 지나온 길과 나아가는 길이 보였다. 문답을 소개한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책이 600쪽 가까이 된다. 어떤 책인가?

    "옛 한시와 설화, 그림 속의 새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책이다. 2003년에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절판된 것을 내용 추가하고 도판도 대폭 교체했다. 서문에서도 썼지만, 한시에는 새 울음소리를 갖고 쓴 특별한 시체가 있다. 일명 금언체(禽言體)다. 가령 노고지리를 한자로 ‘노고질(老姑疾)’이라고 적고, 뜻은 ‘늙은 시어머니 병 났네’로 푸는 식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서 받은 스트레스를 푼 거다. 까마귀 경우에도 ‘시어머니 고(姑)’자에 ‘악할 악(惡)’자를 붙여 ‘고악(姑惡) 고악’이라 적고는 ‘시어머니 못됐다’는 뜻을 표현했다. 새 울음을 음차해서 쓴 건데, 이런 시가 굉장히 많다.

    ‘고악’을 우리는 까마귀로 생각하기 쉽지만, 중국 사람들은 읽을 때 ‘꿔어꿔어’라고 해서, 이게 실은 물새 이름이다. 이런 식으로 울음만 가지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들도 많다. 또 ‘죽계(竹鷄)’ 같으면 ‘대나무닭’이란 뜻인데 중국 고문헌을 찾아보면 나오긴 하지만, 이게 오늘날 무슨 새를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1999년 대만에 연구 안식년으로 갔을 때 그곳 야생조류협회까지 찾아갔다. 새 관련 문헌 정리한 것 하고 새 울음 담은 녹음 테이프를 잔뜩 사 왔다. 결국 중국조류도감까지 뒤져 죽계라는 새의 라틴어 학명을 찾은 후에 다시 우리 역어를 찾아보니 이게 따오기더라. 이렇게 힘들게 연구하다 보니 어느새 80-100수가 모였다. 그때 모은 자료로 논문 한 편을 썼는데, 자료가 아까워 책까지 내게 됐다."

    -문학에서 그림, 조류까지 자연스럽게 통섭에 비교문화 연구까지 아우른 작업이 됐다.

    "예전부터 그림의 아이콘에 관심이 많았다. 그게 뭘 뜻하는지 연구하는 게 도상학(圖像學)이다. 미국에 갔을 때도 보니까 아이콘에 관한 책들이 굉장히 많았다. 우리는 옛 그림의 의미에 대한 정리가 너무 안 돼있거나 아주 초보적이다. 이런 작업이 필요하겠다 싶어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아이콘 사전을 만들고 싶은 거다.

    새 그림도 다 아이콘이다. 같은 닭이라고 해도 뜻이 같은 게 아니다. 닭이 의미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림 속 닭 주변에 놓인 세트들이 의미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수탉이 바위에 올라가 있으면 '석상대계(石上大鷄)가 되는데, '석상'이 중국음으로 실상(室上)과 같다. 그러니까 ‘실상대길(室上大吉)’이란 말로 ‘집에 큰 길한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암탉과 수탉이 같이 있을 때 뜻이 다르고, 수탉 옆에 맨드라미가 있으면 또 다르다. 방아깨비가 들어가면 ‘자식 많이 낳으라’는 뜻이 된다. 이런 조합에 따른 의미 해석이 아주 복잡하다. 이게 다 문화 코드다.

    처음엔 이런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미술학계 논문을 봤는데 해석을 제대로 못하더라. 이게 전부 시경 같은 옛 문헌을 기반으로 나온 거니까. 그런 문헌에 대한 이해는 없이 그림만 해석하다 보니, “색깔 좋고 구도 좋고 묘사 정확하고, 생활 속에서 그렸다”는 식의 평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 안에 세트로 그려진 것들은 한 시절에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여름 철새하고 가을 꽃이 같이 그려져 있는데 이걸 어떻게 ‘생활 속’이라고 할 수 있나. 모두가 코드다.

    가령, 백두조(白頭鳥) 두 마리가 산초 나무 위에 앉아있는 그림이 많다. ‘백두’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라’는 뜻이고, 산초나무는 씨가 많기 때문에 ‘자식 많이 낳으라’는 뜻으로 결혼을 축하하는 그림이다. 조류학자한테 물어보면 백두조는 알고, 식물학자는 산초나무까지는 아는데 왜 이렇게 그렸는지는 설명을 못한다. 문화 코드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런 거다.

    난점은 또 있다. 옛 그림 속 새들은 관습화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 그 새를 보고 그린 게 아니라 전해오는 새 그림을 보고 그리다 보니 변형이 된다. 꼬리가 짧은 새를 길게 그려놓으면 딴 새처럼 보이는데 실은 같은 새를 그린 거다. 이런 걸 조류학자들이 보면 ‘뭐 이런 새가 다 있지’ 한다.

    고구려 ‘유리왕(瑠璃王)’도 실은 ‘꾀꼬리왕’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꾀꼬리가 ‘황율루’ ‘황유리’ 등으로 표기된다. 그가 황조가를 짓지 않았나. 꾀꼬리 노래를 지었다는 얘기다. ‘황유리’에서 유리왕이 나왔다.

    이번 작업은 다른 분야에도 의미가 있다. 조류학자들은 우리 문헌에 이렇게 많은 새 기록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고, 회화 하는 사람들은 옛그림이 코드 읽기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새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꽃이며 곤충 같은 것도 다 의미가 다르다. 또 이것들이 조합을 이룰 때 의미의 증폭은 정말 놀랄 정도다. 얼마 전 TV 드라마에도 민화 작가가 나왔던데, 민화가 실은 전부 코드다. 지난번 경주 세계민화학회에서 코드의 도상성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발표했더니 외국 학자들도 놀라더라. 접근 방향이 다르니까. 이걸 시작으로 여러 작업들을 하고 있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서양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정벽화다 뭐다 해서 그림을 해석한 책들이 국내에도 많이 들어와 있는데, 우리 그림은 그런 게 드문 것 같다.

    “우리 옛그림에 대한 꼼꼼히 보기가 안 돼 있다. 중국에는 20미터짜리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가 있다. 중국인은 횡으로 가는 반면 우리는 병풍으로 간다. 문화의 차이다. 중국은 길 따라 횡으로 가는 군상이 나오는데 우리는 층층이 올라가면서 나온다. 청명상하도에 대한 책만 해도 수십 권이 나와있다. 미국에도 있더라. 하지만 우리 그림도 가치로 보면 세계적인 자료인데 마땅한 해설서가 없다. 알고 나면 서양도 중국도 놀랄텐데. 이런 건 그림에 대한 해석과 문헌에 대한 이해가 만나야 힘이 생긴다. 글로 쓴 건 이번 책 하나지만 이런 쪽 작업은 15년째 꾸준히 해왔다.

    지금 하고 있는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읽기 작업도 그 중 하나다. 19세기 혹은 18세기말 그림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8폭짜리 병풍이다. 궁중 기록화 같은데 아주 세밀하다. 이 안에 근 1000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고, 당시 도시의 디테일들이 다 나온다. 별의별 게 다 있다. 여기 앵무새, 비둘기 그림도 나온다. 앵무새 사육에 관한 옛 문헌에 ‘네모난 격자에 얹어서 기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여기 정확히 나온다. 비둘기도 종류별로 다 그려져 있다. 당시엔 이름도 다 있었다. 지금 시청앞 비둘기를 누가 이름 갖고 부르나. 이뿐 아니라 부녀들의 가정 생활, 서당의 교육 활동, 놀이기구, 온갖 가게와 국수틀까지 다 나온다. 심지어 낙타도 있다. 이 그림을 가지고 ‘태평성시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시대 문화사를 복원하려고 한다.”

    -선생의 작업 방식은 복화술 같다. 옛것을 불러내 말을 하게 한다. 이런 스타일의 글은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

    "옛것을 불러내 대화한다는 느낌을 늘 갖는다. 옛글을 읽다 보면 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장면, 뭉클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나만 알게 된 이 장면에 일반 독자들을 가닿게 하려면 매개가 필요하다. 이런 식의 글은 명청 시대 ‘청언소품(淸言小品)’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짧은 글인데, 일종의 아포리즘이다. 중국에는 굉장히 발달해 있다. 대표적인 게 채근담이다. 짧지만 큰 울림을 주는 글이다. 우리는 이런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오히려 너무 많았다. 그동안 이덕무나 성대중의 소품들을 찾아내 번역해서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냥 번역만 해서는 느낌이 안 산다. 울림이 오게 하려면 뭔가 설명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 설명을 달아 쓰기 시작한 것이 당시엔 새로운 시도였고 반응이 좋았다. 교수 4-5년차 때였다. 그때 나는 30대 초에 교수가 돼서 힘들었다. 마음 고생에다가 식도에 문제도 생기고 해서 먹기만 하면 토하고 체중이 20킬로 줄었다. 바지가 내려와서 멜빵을 했다. 수업도 앉아서 하고, 끝난 후에는 쓰러져서 한시간씩 자고. 저러다 죽겠다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한 4-5년 죽을 고생을 했다. 그때 청언이 내 마음을 붙들어줬다. 하나씩 읽을 때마다 ‘힘을 내야지’ 아, 이런 거구나’ 했다. 그때 감상을 하나씩 블로그에 올리면서 마음을 조금씩 추스렸다. 그게 반응이 좋아서 책으로도 냈고, 비슷한 작업들을 꾸준히 해왔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옛글에 대한 통역자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같은 글을 읽어도 어떤 느낌을 잡아내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한문 해석에 더해, 그런 감성이 접촉되는 지점을 끄집어내 지금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은 색다른 일이다. 그 일에 흥미를 많이 느꼈다. 이런 걸 나라면 어떻게 설명할까,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배경에는 내가 맨처음 한시로 논문을 썼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한시라는 게 압축된 언어 속에서 마음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보니 많이 도움됐던 것 같다. 그게 한 흐름으로 가서 만난 거다.”

    정민 교수가 직접 만든 자료 파일 /신성헌 기자
    정민 교수가 직접 만든 자료 파일 /신성헌 기자

    -조선일보에 연재 중인 칼럼 ‘세설신어(世說新語)’도 그런 방식인데, 지난 번 ‘허착취패(虛著取敗)’ 편은 퇴계의 글을 다산이 보고 쓴 글을, 다시 선생이 풀고 더한 글이다. 이 경우엔 뭘 염두에 두고 썼나?

    “글을 쓸 때에는 뭔가 구체적인 것을 두고 쓰기도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칼럼이 나가는 순서도 있고. 평소 글을 읽다가 좋은 걸 보면 항목별로 분류해 파일로 저장해 둔다. 간단한 메모와 함께. 글을 쓸 때가 되면 이번엔 뭘 할까 생각해서 골라낸다. ‘허착취패’ 칼럼은 그 무렵 어떤 인사의 발언을 염두에 두고 썼다. 그걸 지금 내 입으로 거명하기는 좀 그렇다. 아무리 잘 나가도 한번에 추락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글이었다.”

    -그런 글이 읽는 사람에게는 숨은그림찾기 풀이처럼 행간의 의미를 유추하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어떤 때는 나도 깜짝 놀란다. 그런 뜻으로 쓴 게 아닌데, 전혀 다르게 유추한 댓글이 달리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다. 그건 읽는 사람 몫이니까. 그런 점에서 고전은 열려 있다.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칼럼 연재에 저술까지 늘 장단기 작업을 병행하는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또 뭐가 있나?

    “‘차의 세계’에 연재하는 게 있다. 동다기(東茶記)와 동다송(東茶訟)인데, 예전 차문화에 관한 글이다. 추사와 초의선사, 다산이 얽힌 이야기다. 앞서 차 문화의 중요 고전인 ‘동다기’를 내가 발굴했는데 당시 차계(茶界)가 발칵 뒤집혔다. 그 후 18년이 지났는데 그 책을 빨리 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 문헌에서 찾아낸 내용이 그동안 차계 주류 얘기와 180도 달랐다. 지금은 설록차 같은 게 잎차이고 추출해서 마시지만, 옛날에는 빻아서 만든 떡차였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그전까지 자신들이 초의선사의 전통 차법대로 만든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의 권위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반발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차계 전문가들은 차는 잘 만들지만 옛 문헌까지 전문가일 수는 없다. 회화 하는 사람이 문헌을 모르니 옛그림 못 읽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차는 다 엉터리니까 떡차로 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예전엔 저장법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차는 요즘 게 더 맛있다. 차계 사람들도 내 말에다 접점을 찾아서 더 키워가면 될텐데, ‘도 아니면 모’라는 식으로 나오니 안타깝다. 배우는 사람들로서는 혼란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차 문화가 커피에 밀려 말도 아닌 상황인데.

    동다송에 관한 책은 지금 열 종 넘게 나와 있지만 동다기는 하나도 없다. 더구나 두 책을 합쳐 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동다기에서 동다송까지 하나로 묶고 그 주변의 다산과 초의 같은 분의 차 문화를 한번에 깊이있게 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7-8회 나갔다. 매달 원고지 50매 분량을 쓰니까 2년 정도 하면 두꺼운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으로 논란이 수그러들길 바란다. 지금은 너무 어지럽다. 처음에 한 사람이 어거지로 잘못 해석해 놓으면 30년이 답습된다. 가령, 동다기에 ‘구방지상마(九方之相馬)’라는 말이 나온다. 이걸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몰고’라고 번역을 해놨다. 하지만 실은 ‘구방’은 ‘구방고’라는 옛 사람 이름이다. 말 감별의 최고수였다. ‘상마’는 말의 관상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원문은 ‘구방고가 말 관상 보듯이’ 차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문하생들이 엉터리 해석을 수십 년간 들어오다가 아니라고 말을 들었으니 어떤 느낌을 받겠나.

    또, 초의가 백운동서원에 가서 ‘백학령(白鶴翎)’을 보고 느낌이 있어 시를 쓴 대목이 나온다. 이걸 두고 ‘백학이 나는 것’을 보고 느낌이 있어 시를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백학령은 국화 품종 이름이다. ‘꽃술이 학날개처럼 길게 늘어뜨린 국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원뜻은 ‘백운동에 갔다가 백학령이라는 신품종 국화를 보고 기가 막히다 싶어, 주인한테 한 그루만 줘서 씨를 받아 키우게’라고 했던 것이다. 이걸 처음 번역한 사람이 ‘백학이 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그 다음 ‘또 한 그루 얻어서’를 ‘차나무 한 그루’라고 둔갑시켜 놓으니, 이걸 본 딴 사람은 이 시를 한국의 대표 차 시선집에다 넣어놨다. 국화꽃을 노래한 시인데도. 이런 식의 오류가 수십 년 되풀이돼 왔다. 한문학을 한 사람이 거기에 제대로 달려든 적이 없으니까.

    지금 나는 초의선사 평전까지 쓸 구도로 작업하고 있다. 차문화를 썼고 동다기 동다송도 했고 그 다음 초의평전으로 가는 거다. 여기에는 초의만이 아니라 다산이 많이 들어가게 될 거다. 이게 결국 추사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18세기 문예공화국에서 19세기 문예공화국으로 넘어가는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슬슬 워밍업을 해서 추사로 갈 생각이다. 추사는 너무 커서 함부로 건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초의나 그 주변 인물들을 좀 하고 나서 그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 싶다.

    다른 한쪽으로는 연암 그룹에 대해 할 게 있다. 사실은 18세기 문예공화국에 대해 쓰기 전에 연암을 좀 더 섬세하게 보려고 했었는데 도중에 이게 걸리는 바람에 붙들려서 못했다. 연암과 박제가, 이덕무, 이때는 참 멋있는 시대였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아직도 더 할 게 있나?

    “더할 게 있는 게 아니라 아직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 만남은 정말 멋지다.(이 때부터 정 교수의 음성은 약간 들떴고 눈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20-30대 때의 그들을 보면 정말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 그룹이 보석 같은 시기에 얼마나 아프게 만났고, 아름답고 따뜻하게 교류했던가,(이 대목에서는 내가 뭉클했다) 그걸 한번 좍 필름처럼 복원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연암을 했다가 다산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18세기로 올라갔는데, 여기서 다산을 타고 초의와 추사로 내려가면 19세기로 진입하는 거고, 다시 연암 쪽으로 올라가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다. 이게 다 내겐 열려있는 공간이다. 아까 말한 태평성시도가 바로 이 시기의 시정 공간이다. 그 그림에 담긴 정보들이 이 사람들 책에 나오는 정보들이다. 이게 따로 노는 게 아니다. 모두가 그 시기 문화사이자 19세기 지성사로 넘어가는 접점이다. 다 만나는 작업이다. 연구자로서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러고 보면 연구의 주 무대가 18세기다. 18세기 학회도 따로 해온 것으로 안다.

    “한 학기에 한 번씩 모이는데 이번 주말에도 있다. 이번엔 18세기의 장인과 명품이 주제다. 지난번엔 1차로 18세기의 맛을 했고.”

    -어쩌다 18세기에 빠지게 됐나?

    “2000년초 인터넷이 폭발하던 시기에, 그때가 18세기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고 쏟아져 들어오니까, 정보 자체보다 품질을 판단하는 게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8세기도 중국에서 사고전서, 고금도서집성 같은 책들이 한 짐씩 들어왔다. 한 질에 오천권씩 하는 것들이 막 쏟아져 들어오니까 예전엔 정보였던 것들이 갑자기 지식 쓰레기가 돼버린 거다. 그렇잖아도 성리학적 가치, 이런 토론이 지겹게 느껴지던 차에, 비둘기 사육 같은 게 부가가치 있는 정보가 된 거다. 서울에 비둘기 사육이 유행하면서, 어떤 게 값나가고 어떻게 길러야 하고 품종은 어떻게 개량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가치있게 됐다. 유득공 같은 사람은 ‘발합경(鵓鴿經)’이라는 비둘기 책을 냈고, 이서구는 ‘녹앵무경(綠鸚鵡經)’이라는 앵무새 사육서를 썼다.

    이 사람들 지식 편집 방식이 똑같다. 가령, 이서구가 북경에서 앵무새를 갖다 키우면서 중국 앵무새 관련 책들을 정리하고 사육 경험을 합쳐 책을 써서 보여주니, 박제가가 거기다 새로운 사실을 주석처럼 덧붙여 주고, 이게 다시 이덕무한테 가서 또 추가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한바퀴 돌고 나면 텍스트가 세 배쯤 늘어난다. 이걸 재편집한 다음 연암에게 가서 “선생님, 서문~” 하면 책 한 권이 나오는 식이었다. 이건 완전히 정보 사냥 대회였다. 이들의 직업이 책을 검사하는 검서관이었다. 요즘 정보검색사쯤 된다.

    2000년대 밀레니엄 시작될 때, 인터넷 정보 혁명이다 해서 위기감이 팽배했던 차에, 18세기 지식인의 대응 방식이 그때 정보화 담론과 맞아떨어졌다. 18세기 지식인들은 어떻게 작업했을까. 그 메커니즘이 궁금했고 그걸 찾다 보니 결국 다산의 지식 편집론으로 가게 됐다. 그런 관점에서 18세기를 들여다 보니 새로운 게 많이 보였다. 거기에 더해 서양의 18세기 경험을 담은 담론을 자꾸 접하다 보니까,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18세기가 있었고, 오히려 더 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8세기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선험적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지금 우리가 혼란스럽다면 그 시기를 벤치마킹해서 뭔가 길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도 18세기적 지식 경영으로 하는 것이다.”

    -그때 나온 게 ‘다산의 지식경영법’이었나?

    “2005년 미국 갈 때 생각하고 가서 쓴 것이다. 그 전에 연암 그룹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고 논문을 썼는데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이라는 논문집으로 나왔다. 그 중에서도 출중한 다산을 집중해서 들여다본 게 다산의 지식경영법이었다.”

    -그러니까 다산의 지식경영법은 ‘지식을 경영하는 법’이란 뜻인가? ‘지식으로 경영하는 법’이 아니라?

    “그렇다. 서문에도 썼지만 원래 대학원생 논문 작성법으로 쓴 것이다. 그걸 경영의 맥락에서 읽으면서 가져간 것이다. 옛글이라는 게 읽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산의 지식경영을 경영 이론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그까지 나설 생각은 없고. 그걸 가져다 발전시키는 것은 그 쪽에서 할 일이다. 내가 곁눈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동안 다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맨날 목민심서 어쩌고 기중기 뭐 이런 얘기만 했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 컨텍스트 얘기가 없었다. 목민심서만 해도 애민정신, 공무원의 청렴만 강조하는 식이다. 언젠가 남양주 시청에서 찾아와서 강연을 좀 해달라고 했다. 다산이 자신들의 멘토인데, 다른 강연자들은 와서 하는 얘기가 맨날 공무원 청렴 이야기다, 우리가 무슨 도둑놈 집단인가, 그런 훈계만 들으니 불편하다고 했다. 그런데 내 책을 보니 다산한테 정말 배워야 할 것, 적용할 게 많다면서 무조건 해달라는 거였다. 하도 부탁을 하고, 사정도 이해가 가고 해서 거기 가서는 강연을 한 번 했다.

    다산이 대단한 과학자였고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인간형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다 안다. 하지만 그게 그 시대에 얼마나 강력한 콘텐츠였고, 그가 그 많은 작업을 어떻게 동시다발로 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좀 바꿔 이야기한 거다. 그러면 다산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걸 두고도 기존 다산학계에서는 내가 경영인 입맛에 맞춰 돈 벌려고 쓴 책이라고 의심하는 것 같다. 다산 연구자들은 그 책은 인용 안한다. 안타깝다.”

    정민 교수가 '새 문화사전' 본문에 수록된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신성헌 기자
    정민 교수가 '새 문화사전' 본문에 수록된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신성헌 기자

    -요즘 인문학이 붐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감마저 있다. 예전엔 짝퉁인지 아닌지가 비교적 명확했는데, 요즘은 편집 기술 덕에 묘하게 가려진다. 말하자면 지식 생산자보다 편집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콘텐츠가 많아지니까 골라서 에디팅만 하는 식이다. 지난번에도 어떤 분이 세종과 다산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서 책을 냈는데, 보니까 세종대왕 책하고 내가 쓴 다산 지식경영법 둘을 합쳐 썼더라.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내 책 몇 단락을 인용하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책 나온 걸 보니까 거의 반은 내 책이고 반은 다른 사람 책을 갖고 에디팅만 하는 식이었다.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편집이 중요해지긴 했는데 편법으로 남용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특히 자기계발서 쪽이 그런 것 같다. 자기 표절에 혼성 모방도 많고. 독자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제목이 근사하니까 현혹된다. 하지만 이책 저책에서 좋은 것만 뽑아서 자기 글인 것처럼 펼쳐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책은 신뢰를 높인답시고 원문을 달아놨는데 보니까 오자투성이다. 편집자도 그럴 능력이 못 되니까 못 잡아낸다. 그러면 출판 시장 자체가 혼탁해진다. 독자들도 이제는 으레 또 그렇고 그런 책이겠지 하고 말게 된다. 그런 식으로 시장이 얇고 좁아지게 된다. 그럴 경우 새로 진입하는 저자에 대한 신뢰도가 약하니까 지명도 있는 저자들에게 자꾸 기대게 되고, 이런 저자들은 대량 생산하게 되고 그러다가 선을 넘고 품질이 떨어지고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인문학 강연 연사로 0순위일텐데, 다 거절하는 걸로 안다. 어떤 원칙이 있나?

    "지금도 수시로 요청 전화가 온다. 하지만 다 거절한다. 그런 데 갔다 오면 여러가지로 마음이 붕 뜬다. 가령 조찬 강연만 해도 그 전날 잠을 설치게 된다. 남의 회사 일인데 늦잠이라도 자면 어떡하나 싶어 깨고 나면 두 시 반이고 깨고 나면 세 시고 이러니까. 또 강연 전에 PPT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걸 준비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갔다가 학교 오면 멍하다. 최소 이틀이 나가떨어진다. 그런 거 하면 공부를 못 하겠더라. 그동안 강연도 열심히 다니고 했으면 누구처럼 돈도 많이 벌고 책도 더 많이 팔았겠지만.(웃음) 하지만 그랬으면 지금처럼 생산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냥 소진되고 마는 거지. 내가 주도해서 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서 소모되는 것은 싫다.”

    -만일 경영자들 앞에서 강연을 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그냥 다산 얘기만 들려줘도 충분히 자극 받을 것이다.”

    '태평성시도(제1폭)'. 비단에 채색, 113.6X49.1cm,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태평성시도(제1폭)'. 비단에 채색, 113.6X49.1cm,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남양주시 강연에서는 뭘 얘기했나?

    “다산식 작업의 위력을 들려줬다. 대세를 장악하거나 정보를 장악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되는지 설명했다. 사실 그 과정이라는 게 아주 간단하다. 정조가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능)에 나무를 8년간 심게 했다. 다 심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어느 고을에서 어떤 나무를 몇 그루 심었는지 보고하라고 했다. 8년 동안 심은 수 천 그루를 어떻게 아나, ‘못 하겠는데요’ 하니까, 정조가 다산을 불러 ‘네가 해결해라’고 했다. 단, ‘보고서가 한 권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다산이 ‘알겠습니다’ 하고는, 각 고을에 나무 심은 공문을 다 모아다 날자 순으로 분류했다. 그걸 가지고 표를 만들어 항목을 만들고 각 수치를 기입하게 했다. 그 결과를 한 장으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엑셀을 한 것이다. 다산은 액셀의 원리를 이미 그때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얘기는 이런 것이다. 현륭원에서 임무 받고도 안된다고 할 때 다산은 책 한 권이 아니라 표 한 장으로 끝냈다.

    또 정조가 화성 지을 때 다산에게 중국의 기기도설을 주면서 거중기를 만들라고 했다.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프린스턴대에 갔을 때 원본을 봤다. 거기 나오는 그림을 보니 다산의 고민이 명확히 이해됐다. 서양의 기기도설은 전부 구리나사로 이빨을 맞물리게 한 기아 방식이다. 이게 도르래와 연동돼서 물건을 들어올리는 건데, 다산은 도르래 열두 개로만 연동시켜 들어올리게 했다. 이건 완전히 조선형 거중기다. 다산은 강도 높은 구리 나사를 만들 기술력이 조선에 없다고 보고, 다르게 만든 것이다. 이 두 그림을 보여 주면서 이게 다산이라고 얘기했다.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이런 미션을 줬을 때 다산은 창의적으로 맞춰서 해냈다고. 경영자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런 말 할 필요도 없다. 다산은 이렇게 했다고 설명하면 나머지는 자기들 언어로 알아듣는 거니까.

    예전에 에버랜드 사장이 쓴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언론에도 나서 화제가 됐다. 그가 에버랜드를 세계적인 놀이공원으로 만들려고 외국 벤치마킹을 열심히 하다가 내가 쓴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책을 읽고는 ‘아, 내가 왜 이걸 몰랐지’ 했다는 내용이다. ‘디즈니랜드를 벤치마킹해 봐야 비슷한 가짜지 새로운 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다 백지화하고 우리식 공원 개념으로 바꿔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랬다고 한다. 연암이 그렇게 파워풀하다. 그 정도의 지적 자극을 준다. 그렇게 해서 큰 회사가 방침과 정책을 흔들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리지널 텍스트를 넘겨주는 사람도 필요하고, 이걸 받아서 가공해 전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걸 다시 받아서 경영자들에게 맞춰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내가 그쪽에 가서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콘텐츠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계속 보여주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역할과 다양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인문학의 품이다. 그런 역할들을 서로 인정하는 여유들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에 대한 상호존중이 요즘 좀 미약한 느낌이 든다.”

    -선생은 인문학의 실용적 힘을 일찍 보여준 경우인데, 요즘은 누구나 인문학을 얘기한다.

    “너무 많아진 감이 있다. 문제는 어쨌거나 콘텐츠의 신선도가 중요한데 이건 전문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오리지널 텍스트에 접근하는 능력은 없이 남이 해놓은 걸 뽑기만 해서는 절대 콘텐츠의 힘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건 그냥 간식 하듯이, 재밌네 하고 지나가는 것일 수는 있지만. 대중성이라는 것은 독자를 끌어올려야 하는 거지, 자기가 내려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쓴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과 그의 제자 황상 이야기를 쓴 책인데, 가벼운 게 아니다. 어려운 한시 인용해가며 정보를 재조직해서 충실히 쓴 것 뿐인데, 그걸 교육 현장에서 읽고 감동했다는 것은 별개 문제다.

    콘텐츠의 품질과 신선도가 살아있다면 독자들의 사랑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잠깐 ‘어’ 하다가 ‘에이’ 하게 된다. 요즘은 ‘오’ 했다가 ‘에이’ 하는 게 너무 많아지니까 ‘오’ 할 것도 다 ‘에이’로 끝나버린다. 그러면 좋은 것도 지레 ‘그런 걸 꺼야’라며 간과해 버리고 만다. 그럴수록 인문학자들이 콘텐츠의 선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전문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깊이가 있는 정보를 가졌거나, 질문의 방향이 새로워야 한다. 다산의 애민 정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들은 많이 했지만 지식경영법에 대해 쓴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 나는 다산의 작업 과정에 초점을 맞춘 거였다. 다산 자체는 새로운 콘텐츠가 아니다. 질문을 바꾸니 새로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문학자들이 할 일이 앞으로도 굉장하다.

    또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사실 나는 문장론 전문가다. 글쓰기 말이다. 문장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대만에서 연구 마치고 들어올 때 번역해서 갖고 온 옛 문장 이론 텍스트만 3000매 분량이다.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막론했다. 그걸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다. 이거면 지금 논술도 해결된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글쓰기로 시험보고 인재 선발한 나라 아닌가. 형법 민법 시험 본 나라 아니다. 글쓰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한데. 이 대단한 글쓰기 이론을 현대적으로 써주면 좋을 텐데. 옛날에 글쓰기 주제와 구성은 어땠고 개요 작성은 어떻게 했고, 문장에서 탄력을 넣는 기술은 어떤 게 있었고. 얼마나 굉장한지 모른다. 그것도 해야 한다. 할 게 참 많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선생이 주목 받는 이유도 옛 문헌에 대한 전문성 외에 간결한 글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장론을 전공했다고 하지만 이론적 기반과 실행은 다른 문제다. 글쓰기의 비결이 있나?

    “나는 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간결성이라고 생각한다. 군더더기를 빼는 것이다. 옛 글이론에서 한결같이 하는 얘기다. 절대로 형용사와 부사를 적게 쓰라는 것이다. 한 글자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맨날 들려주는 얘기가 있다. 내 석사학위 논문 심사 때였다. 권필의 한시 중의 ‘空山木落雨繡繡(공산목락우수수)’라는 대목을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라고 옮겼다. 지도교수가 이걸 보더니 호되게 야단을 쳤다. 불필요한 단어가 많다고. 곁가지를 다 쳐낸 끝에 결국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절반이 줄었다. 거기서 진짜 충격을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쓸 때는 한 달 동안 문장 줄이는 것만 했다. 그랬더니 1400매에서 200매가 줄더라. 물론 글도 좋아졌고. 옛글이 다 그렇다. 그걸 원리화한 게 문장론이다. 내 글에 그런 게 많이 들어가 있다.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절대 다 말하면 안된다’ ‘드러낼 듯 감춰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의미가 전달되는 글을 써라’ 이런 금언이 수도 없이 많다.”

    -정민의 글쓰기 책이라면 사람들이 관심 많을 것 같다.

    “슬슬 시작하려고 한다. 그동안 학생들과 수요일 저녁마다 한문 원전 읽기를 해왔다. 3개월이나 6개월에 하나씩 끝내는데, 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소리내 읽히고 번역해서 다시 읽히고, 그걸 내가 바로잡아 주고 다시 읽고 나면, 마지막에 그걸 받아 쳐서 파일로 쌓아두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같은 원문을 모두 다섯 번 읽게 된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때 훈련 받은 친구들이 그 방식대로 해서 책도 내고 한다. 그렇게 하면 한문 실력이 금방 느는 걸 느낀다. 처음엔 완전 초보였다가도 6개월 지나면 조금 찾는 법도 알고, 내가 중간에 보충 설명을 하고 문장의 기교 같은 것도 설명해주면 훨씬 더 좋아지는 걸 본다.”

    -인문학의 토대가 고전이고 결국 고전의 해독이 중요하다면 한문 고전은 원어로 읽는 게 좋은가?

    “일반 대중이 꼭 한문을 깊이 알 필요는 없다. 셰익스피어를 반드시 당대 원어로 읽고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괴테를 읽으려고 독어를 배우지는 않지 않나. 한서를 읽겠다고 한문을 배울 필요는 없다. 고전 번역서를 선택할 때 기준은 언어의 결이 잘 살아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말로 잘 풀어내야 한다. 이덕무 전서만 해도 완역된 지도 오래됐지만 내가 낸 번역본을 읽고 처음 만났다는 사람이 있다. 예전 것은 가공 안 된 날 것 그대로여서 잘 이해가 안 된 거다. 전문가들이 볼 때 콘텐츠가 충실하지만 사실 오역도 많다. 나는 오늘날 언어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했다.

    무엇보다 우리 글은 소리내 읽었을 때 술술 읽혀야 눈으로 읽었을 때도 이해가 쉽다. 나는 세설신화 쓸 때도 꼭 세 번 네 번 소리 내 읽고 송고한다. 소리를 내면서 읽다 보면 꼭 문장이 몇 개 걸린다. 같은 표현 빼고, ‘그리고’가 두 번 나와도 빼고, ‘것이다’ ‘있다’가 두 번 나오면 ‘이다’로 고치거나 아예 뺀다든가, 호흡이 길면 자르고. 이런 작업을 읽으면서 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독자들은 글이 매끄럽다고 생각하는 거다. 나는 잘라낸 부분을, 읽는 사람은 여운이라고 여긴다. 뒷맛이 남는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사실은 처음에 내가 썼다가 덜어낸 부분이다.”

    -언젠가 가장 후회되는 일이 일찍 영어 공부를 안 한 것이라고 했다.

    “해외에서도 발표할 기회가 늘다 보니까, 내가 가진 콘텐츠가 저쪽에 가서도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저번에 18세기 문예공화국 냈을 때도 그 내용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발표하니까 사람들이 ‘아, 우리가 귀한 보물 갖고 있으면서 보는 눈이 없었다. 부끄럽다’고 했다. 하버드의 쟁쟁한 동아시아 학자들이 쓴 글도 들여다 보면 우리가 뒤지지 않는다. 좀 다른 방식이 있긴 하지만, 그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거기서는 석학이라고 평가 받는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어떤 것은 저 정도면 나도 쓰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차이라는 게 단지 언어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내가 그들의 언어로 자유자재로 정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겠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든다. 하지만 말이 잘 안되니 발표를 하라면 반벙어리가 되고, 써서 읽는다고 해도 읽는 것까진 좋은데 질문을 제대로 못 알아듣거나 답을 못하면 바보가 된다. 그런 게 속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무기까지 갖추면 좋겠다. 요즘 40대 초반 교수들은 언어들이 다 잘 된다. 그 친구들 보면 참 부럽다. 지금 와서는 어쩔 수 없지만.

    다행히 중국어는 대학 때부터 했다. 그래서 회화도 좀 된다. 영어보다 훨씬 낫다. 중국 논문이나 책 보는 데도 별 어려움 없다. 국문학자 중에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 이게 국문학계에서는 내가 가진 큰 경쟁력이긴 하다. 중국 사람 논문들을 진작부터 봐왔고 그 사람들 질문 방식 같은 걸 눈여겨본 것이 우리 한문학에서 질문을 바꾸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뭔가 새롭게 보려면 새로운 질문법을 배워야 하는데 같은 울타리 안에서는 잘 안 나온다. 늘 보던 대로 보니까. 아까 차계도 30년 오류가 답습되는 것처럼. 우리 시대는 정말 국가간 소통이 필요한 시대다. 중국 학자들에게도 우리 걸 보여주면 굉장히 자극을 받는다.

    하버드에서 만난 중국 학자들 말로는, 요즘 자기들은 연행록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데 한국에서 어떤 연구가 이뤄지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일본 것은 자기들이 다 읽지만 한국어는 모르니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년 한국내 연행록 연구를 조사해서 보내주면 중국어로 실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해주겠다고 했다. 중국 학생과 공동작업해서 그쪽으로 보내주려고 한다. 지난번에는 고려대에서 연행록 관련 학술회의가 있었는데, 중국학자가 발표한 것을 두고 국내 학자가 왜 남의 연구 결과를 인용도 하지 않고 쓰느냐고 중국어로 닦아 세우는 것을 봤다. 그것도 소통의 부재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한국어는 해외 학계에서 시민권이 없다. 일본이나 중국 것만 해도 서양학자들이 배워서도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것도 중간 연결자가 필요하다.”

    -선생은 지금 같은 역할을 예감했나. 원래 꿈은 시인이라고 들었다.

    “시인 얘기는 학부 때 이야기고.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언제 이런 방향을 결심했나?

    "나는 한시로 석사를 했다. 시 비평에 관한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 '한국역대시화유편'이라고 해서, 한시를 주제별로 분류한 570쪽짜리 자료집을 낸 적이 있다. 현대시학이라는 잡지에서 현대시 독자를 위해 옛날 한시 비평이나 한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목월 선생을 추모하는 어떤 자리에 우연히 합석했다가 나를 한시 전문가라고 소개하니까, 현대시학 주간이 부탁해서 한 편 쓰게 됐다. 그 글이 그 다음달 평론 세 군데에서 인용됐다. 옛날 시인들이 이런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나는 그냥 옛글에서 시화 에피소드 몇 개를 모아 정리한 것이었는데, 이걸 시인들이 인용하고 난리가 났다. 유안진 선생이나 박희진 선생 같은 분은 폴 발레리의 ‘정신의 체조’라는 시가 생각났다며 ‘팬 레터’를 보내오기도 했다. 바로 두 달 뒤, 현대시에서 연재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쓴 게 ‘한시미학산책’이었다. 2년 반 연재했다. 그때 반응이 대단했다. 지금도 시인들이 시집을 많이 보내온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에피소드 중심으로 썼는데 내용들이 재밌다는 반응이 많았다. 중국의 시학이론은 많았지만 우리는 없었는데 그 공백을 메운 셈이다. 내 책의 이론은 중국이론이었고 예시를 우리 걸로 들었는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식의 글쓰기는 못 보던 거니까. 그전까지 한시에는 관심이 있지만 막상 한시 책을 보면 뭔지 모르니까 짜증이 났던 상황에서 내가 행간을 풀어줬으니까. 그때 처음으로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식으로 책이 나오고, 심지어 시인들도 시창작론 강의 교재로 쓰기도 했다. 그때 상당히 고무가 됐다.

    그러다 연암에 매료돼 빠져들면서, 3년 뒤 현대시학에서 다시 연재했다. 그게 ‘비슷한 것은 가짜다’였다. 연암의 산문미학을 갖고 쓴 것이었다. 예술미학에 관한 내용이어서 한시미학보다 더 어려웠는데 더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옛날 사람들 사유가 이렇게 대단하구나 하고 사람들이 실감하게 됐다. 정말이지 연암은 막강하거든. 거기에 사람들이 다 한방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두 번 연재를 하면서, 몸이 아픈 중에 짬짬이 위안으로 쓴 아포리즘도 편승이 되고 하면서, 이런 식의 글쓰기가 한 범주로 자리잡게 됐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독서론도 여러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가?

    “독서에서 가장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다독의 개념이다. 흔히 구양수가 말한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을 얘기한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독을 그저 이책저책 많이 읽는 거라고 생각하고, 1년에 백권 읽기 같은 운동도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은 독서법 중에 제일 나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 있고, 그냥 한 번 보고 지나가야 할 책도 있다. 또 목차만 봐도 대개 알 만한 책도 있고, 한두 장만 읽어 보면 더 볼 것도 없는 책도 있다. 그걸 어떻게 똑같이 다 읽나. 1년에 백 권이면 사흘에 한 권씩 해치우는 각오로 읽는 건데, 그런 어거지로 읽는 독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하나를 읽어도 곱씹어서 읽을 책과 되풀이해서 읽을 책도 있고, 소리내 읽을 때 훨씬 더 위력이 있는 책들도 있다. 아무데나 가까이 두고 틈 날 때마다 읽어서 환기해야 할 책도 있다. 종류별로 갈라서 읽어야지 획일적인 방식으로는 읽어서는 안된다.

    한 책을 되풀이해 읽는 것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너무 간과한다. 적어도 몇 권 정도는 그런 책이 읽어야 한다. 멘토가 될 책들이다. 요즘 논어 같은 책이 그런 게 될 수 있다. 한구절 한구절 음미를 할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니까. 어떤 것은 외워가며 읽기도 하면 좋다. 우리 시대에 사라진 것 중 하나가 낭독의 즐거움이다. 소리내 읽는 독서 습관이 없어졌다. 그냥 눈으로 좍 읽어내리고 마는 경우가 많은데, 글의 결을 익히거나 할 때 좋은 글을 소리내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다산이 제일 강조한 것은 초서(抄書)다. 베껴쓰면서 읽는 것이다. 내가 어제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가면서 급하게 박사 논문 하나를 가져갔다. 버스 안에서 필요한 대목을 밑줄 치면서 읽고는, 그날 밤 회식 후에 숙소로 들어와서는 밑줄친 부분을 노트북에 타이핑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마저 하고 나니 책 한 권의 주요 부분이 다 입력됐다. 그러는 동안 무수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집적이 된다. 다산이 즐겨 찾던 강진의 정원에 관한 글을 쓰는 중이었는데, 그 논문을 참고한 것이다. 그 논문의 전문성과 내가 가진 구체적인 콘텐츠가 결합해 강력한 새로운 글이 나온다. 암튼 책도 종류에 따라 읽기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 소리내 읽기와 베껴쓰기의 중요성, 이 세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정작 어떤 책을 흘려 읽고 어떤 걸 정독해야 하는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뭘 기준으로 삼아야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것들을 정독해야겠지. 역사를 반복해서 살아남은 책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증을 써준 책이니까. 고전이나 일생에 멘토가 될 만한 책 몇 권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어야 한다. 내가 어떤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책 중에서도 손때 묻은 책을 사랑한다고. 어떤 책에서도 하도 읽어서 거기만 손때가 새까맣게 묻은 게 있다. 지금 내 경우엔 한국사 연표라는 책이 그렇다. (손바닥만 한 소책자를 들고 와서 보여준다.) 이게 연구실과 집무실, 집에 한 권씩 있다. 여기 손때 묻은 지점이 18세기다. 이게 전문가라는 표시다. 어떤 책들은 그런 게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사 연표 말고 반복해서 보는 책이 있나?

    "나는 연암이 제일 좋다. 연암이나 이덕무, 다산 같은 분은 텍스트가 워낙 많아서 한곳에 손때 묻을 겨를이 없다."

    -그나저나,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왜 중요한가?

    "나는 여기 앉아서 도장을 찍거나 업무를 볼 때는 내가 소진된다는 느낌이 든다. 정말 그렇다. 그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이니까. 하지만 글을 쓰고 책을 보고 할 때만 나는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책 속에 있거나, 글이 될 때는 내가 즐겁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고, 글이 안되거나 막히면 괴롭고 힘들다. 사람들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자리나 회의 같은 것은 그냥 나를 소진시키고 죽이는 느낌이 든다. 나를 살리는 일을 해야지. 왜 나를 소모시키는 일을 하겠나. 그렇게 보면 글을 쓰고 읽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힘을 주는 에너지 공급원이라고 할까. 사유를 멈추는 순간 생명이 끝나는 것 아닌가. 학자가 사유가 멎고 지적 생산이 정지되면 즐거울 수가 없다."

    -요즘 다른 볼거리, 즐길 것도 많다. 그래서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고 있다. 일반인이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뭔가?

    "일종의 삶의 가닥을 잡아주는 하나의 마지막 보루라고나 할까.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의 차이는 워낙 크다. 그 차이는 겉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아주 치명적인 차이다. 책을 놓은 사람, 안 읽고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책을 통해 자기 삶을 보듬어 가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 그 차이가 얼마나 막강한지 잘 모르니까 안 읽는데, 그걸 알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다. 뭔가 자기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장치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 교수는 지난 여름 자신의 칼럼에 옛 사람들의 독서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의 글과 책 읽기에 대한 생각의 정수가 담겨있다. 함께 싣는다.

    삼심양합 (三心兩合) /조선일보 ‘정민의 세설신어’ 8월 5일자

    근세 중국의 기재(奇才) 서석린(徐錫麟·1873~1907)은 독서에서 삼심양합(三心兩合)의 태도를 중시했다. 먼저 삼심은 독서할 때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이다. 전심(專心)과 세심(細心), 항심(恒心)을 꼽았다. 전심은 모든 잡념을 배제하고 마음을 오롯이 모아 책에 몰두하는 것이다. 세심은 말 그대로 꼼꼼히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훑는 자세다. 그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대목이나 좋은 구절과 만나면 표시해두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부친에게 나아가 물어 완전히 안 뒤에야 그만두었다. 항심은 기복 없는 꾸준한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날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하루만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만 안 읽으면 머리가 고프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 한 뜻과 같다.
    양합(兩合)은 두 가지 결합과 연계를 말한다. 첫째는 독서와 수신양덕(修身養德)의 결합을 강조했다. 그는 책상 위에 직접 제갈공명의 '계자서(誡子書)' 중 다음 대목을 써놓았다. "군자의 배움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길러야 한다. 담박함이 아니고는 뜻을 밝게 할 수가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먼 데까지 다다를 수가 없다(夫君子之學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고요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향상시킬 때 독서의 진정한 보람이 있다. 내면의 성찰 없는 독서는 교만과 독선을 낳기 쉽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면 못쓴다. 둘째로 그는 독서와 신체 단련의 결합을 중시했다. 공부로 잔뜩 긴장한 머리는 산책과 체조 등의 활동으로 한번씩 풀어주어 독서에 리듬과 탄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욱여넣기만 하면 효율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그저 읽고 벌로 읽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 성호(星湖) 선생 식으로 말하면, 흑백을 말하면서 희고 검은 것은 모르고 말을 하지만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데 지나지 않아 실컷 먹고 토하는 것과 같게 된다. 건강을 해치고 뜻마저 사납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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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21/2014112101629.html#csidx066008fd456b17784ef49fac7fa31c4   



    2014.11.22 | 조선비즈 | 다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