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차문화의 쇠퇴원인 고찰과 발전 가능성 모색

2018. 4. 13. 00:15차 이야기



      떡차문화의 쇠퇴원인 고찰과 발전 가능성 모색 멍중모색 / 멍멍수다

2010. 6. 8.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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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차문화의 쇠퇴원인 고찰과 발전 가능성 모색

 

- 목 차 -

1. 떡차의 의미

2. 역사상 떡차의 음용사례

1) 중 국

2) 한 국

3) 일 본

3. 한국에서 떡차문화가 쇠퇴한 이유

1) 차문화의 쇠퇴

2) 명나라 포다법의 영향

3)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

4) 해외 유학생의 신문화 유입

5) 커피 다방의 등장

6) 화로 문화의 쇠퇴

4. 떡차문화의 가능성

1) 소비자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차문화의 다양성 모색

2) 제다의 자동화로 복잡한 공정 처리

3) 다양한 외형의 제품

4) 친환경 음료

5) 관광상품으로서의 떡차

5. 결론

 

 

1. 떡차의 의미

 

차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외형으로 분류할 경우 크게 덩이차와 잎차로 나눌수 있다. 덩이차는 연고차, 고형차를 말하며, 만든 모양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다. 떡차(병차), 월단, 단차, 천지차, 벽돌차, 전차(돈차), 기석차, 돈차 등이 이에 해당하며, 가장 흔한 형태가 병차, 혹은 떡차이므로 우리말로 ‘떡차’를 통칭하여 부르기도 한다. 본 글에서도 덩이차의 형태를 가진 차를 ‘떡차’로 일괄하여 쓰기로 한다.

< 떡차의 종류 >

* 떡차(餠茶) : 떡의 모양으로 만든 차

* 월단(月團) : 달 모양으로 만든 차

* 단차(團茶) : 둥글게 만든 차

* 천지차(天地茶) : 주먹 크기만 한 둥글고 편편한 모양의 차

* 돈차(錢茶) : 가운데가 구멍이 뚫어 만든 차

* 벽돌차(磚茶) : 벽돌 모양으로 만든 차

* 바둑돌차(碁石茶) : 바둑돌 모양으로 만든 차

* 다병(茶餠) : 병차와 구별되어 차떡의 의미로 사용

* 곶차(串茶) : 꼬치에 꿰어서 건조 보관하는 차

* 강차(綱茶) : 새끼에 꿰어서 건조 보관하는 차

* 긴압차(緊壓茶) : 눌러서 덩어리로 만든 차

 

역사상 문헌으로 볼 때 떡차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최근 떡차 형태로 수입되는 중국의 보이차를 제외하고는 떡차를 보기 어렵다. 떡차가 보기 힘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살피고자 한다. 먼저 역사상 문헌에서 나타난 제다방법을 중심으로 떡차의 음용 사례를 살펴보고, 이어 떡차문화가 사라진 배경과 떡차문화의 부활 가능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역사상 떡차의 음용 사례

 

1) 중 국

 

차에 관한 중국의 고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육우의 『다경』이 있다. 다경에서 나타난 제다공정을 보면 ‘따서(採), 찌고(蒸), 찧고(搗), 두드리고(拍), 불에 쪼이고(焙), 뚫어 꿰고(穿), 밀봉하는(封)’ 일곱가지 과정을 거쳐 건조(乾)시키는 공정으로 보아 육우의 차는 떡차임을 알 수 있다. 두드리는(拍) 과정이 떡 모양으로 만드는 공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육우 이전에는 떡차가 없었던 것일까? 육우 사후 30년 뒤에 태어난 피일휴가 지은 『다중잡영록(茶中雜詠錄)』을 보면 떡차의 제조법은 육우의 발명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후 병차의 형식과 음다법에 대해 육우 이전의 제다와 관련된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중국 베이징대학교 동군교수는 『차에서 다도로』라는 저서에서 육우보다 1백년 전의 맹선의 『식료본초(食療本草)』에 나타난 ‘차는 (중략) 그 날 만든 것이 좋다. 쪄서 찧고는 하룻밤을 넘긴 것은 만든 차는 (후략)’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제다 공정 중 찌고(蒸), 찧는(搗) 두가지 공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 공정이 육우의 제다칠공정(製茶七工程-採,蒸,搗,拍,焙,穿,封)으로 계승되고, ‘그 날 만든 것이 좋다(當日成者良)’라는 구절도 함께 이어진다고 본다.

찻잎을 최초로 먹은 것은 생엽의 형태로 먹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찻잎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고 저장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을 때 찻잎을 찐 후에 말려서 보관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말릴 경우 변질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후 떡차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육우에 이르러 정형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한 국

 

우리나라에서 제다 관련 문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의의 『다신전』과 『동다송』을 들고 있었으나, 최근 정민교수에 의해 발견된 『부풍향다보(扶風鄕茶譜)』가 최초의 제다 관련 저서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의 다서로 한재 이목의 『茶賦』가 있으나 제다 등 실제 부분은 제외하고 정신적․사상적인 면을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이운해의 『부풍향다보(扶風鄕茶譜)』에 소개된 제다 방법으로 ‘여린 싹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들고 불에 굽는다(採嫩芽, 搗作餠, 並得火良)’라고 말하고 있다. 즉, 최초로 알려진 다서에서 제다방법으로 떡차의 제다 방법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떡차 음다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750년대에 쓰여진『부풍향다보(扶風鄕茶譜)』보다 1610년대에 쓰여진 『동의보감』이다. 『扶風鄕茶譜』에 언급된 제다방법(採嫩芽, 搗作餠, 並得火良)이 동의보감에서 변화없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떡차를 마신 흔적으로는 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돈차가 있다. 일본의 차 학자 아오키 마사루 박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되었다는 원형의 소형박편 병차를 표본으로 가지고 있다. 지름 4㎝ 정도의 돈 모양으로 중량은 5푼 가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리상 중국과 밀접한 관계로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였던 역사로 볼 때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떡차문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묵화무늬 찻사발(사진)이 지름 16~8센티미터, 높이 6~5센티미터로 가루를 내어 다선으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떡차 음다 방법에 적당한 크기임을 감안할 때 당시 떡차를 음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떡차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774~850)비문에 나타난 ‘누가 한명(漢茗)을 보내오면 그것을 돌가마에 넣고 섶을 때서 삶으며, 가루를 만들지 않고 달였다’라는 구절로 보아 가루를 내서 마시는 떡차 음다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일반적으로 가루를 만들어 마셨으나, 가루를 만들지 않고 그대로 끓여(煮) 마시는 음다법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일 본

 

중국차문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비해 일본차문화에 대한 소개는 매우 미미하여 그 자세한 역사를 알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가루차가 국내에 수입되는 예가 많고, 최근의 행다법이 일본풍을 따르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본의 차문화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가루차는 말차음다법으로 찻가루를 찻사발에 담아 물을 약간 부은 다음 다선으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방법으로 떡차를 가루내어 마시는 음다법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의 차는 떡차로 만들지 아니하고 생엽을 쪄서 말린 상태에서 곱게 가루를 내어 마시는 것으로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홍인 5년(814) 사가천황이 한원에서 읊은 차시에서 ‘시를 읊으니 향기로운 차 찧기에 싫증이 나지 않고(吟詩不厭搗香茗)’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누노메 박사는 ‘찧기(搗)’를 육우의 다경에 적혀 있는 떡차 만들기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육우의 다경이 발간된 이후 중국에서는 떡차 문화가 유행하였고, 당나라 문물을 수입한 일본이 떡차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잎차만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잎차를 달여 마시기도 하고(煎茶), 우려마시기도 하고, 거품을 내어 마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새 가지의 싹과 어린 잎을 따서 시루에 찐다음 손으로 문질러 비빈 것을 배로위에서 비비면서 말리는 일본식 잎차는 나가따니(1681?~1778)에 의해 고안되어 매다옹 시바야마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이후로 떡차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떡차 문화의 쇠퇴 원인

 

1) 차문화의 쇠퇴

 

조선 임진왜란 무렵까지는 차문화가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로 전반적으로 차문화가 쇠퇴하였다고 한다. 장유(1587~ 1638)는「南草之用於世殆將如中國之茶」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국의 차는 ‘오늘에 와서는 드디어 천하의 백성들이 매일 쓰는 필수품이 되어 물이나 곡식처럼 되었다(至於今日 遂爲天下生民日用之須 與水穀同用)’고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임진왜란 무렵에는 차가 매우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차문화가 쇠퇴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선의 불교 억제정책으로 차문화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사찰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왜구의 침입등 전란의 피해로 생활이 피폐하여 차를 마실 여유가 없었다고도 한다. 이현숙 교수는 석사논문 <조선시대 차 산지 연구>에서 임진왜란 이후 시작된 소빙기로 인하여 기온이 낮아져 차를 재배할 수 없게 되어 차산지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차문화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의 好川海堂은 조선의 불교 배척과 유교주의 정책으로 쇠퇴하고 일반적으로 말하는데 대해 조선이 상류사회에만 문화가 있고 중류이하에는 미치지 못하여 쇠퇴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김명배는 편견일 따름이라고 잘라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견해가 있으나 이현숙의 소빙기의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이 차문화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사료되며, 이로 인하여 떡차문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초의와 다산이 활동하던 시절에 이르러 소빙기가 끝나고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차산지가 증가함에 따라 차문화도 함께 발달하였을 것으로 본다. 다산은 1830년 강진 백운동 이대아(李大雅)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須三蒸三曬, 極細硏, 又必以石泉水調勻, 爛搗如泥, 乃卽作小餠然後)’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우를 뛰어넘는 제다법의 혁신을 이루어, 백운옥판차에 이르기까지 떡차의 맥을 이었으나 활성화되지 못하고 잊혀져간 데에는 또 다른 사유가 있을 것이다.

 

2) 명나라 포다법의 영향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은 집권한 지 23년 만에 복건 건안의 團茶 제조를 금지하였다. 이 조치는 간단한 것이었지만 실로 차 역사에 혁명이었다. 검소하고 농민의 마음을 잘 아는 농민의 아들인 홍무제가 차를 만드는 백성들의 노고를 측은하게 여겨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음다 방법에도 혁신이 일어난다. 차를 우려마시는 포다법(泡茶法)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잎차에 비해 훨씬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 단차시대의 종료는 농민들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켰고, 보다 쉬운 제다공정과 음다법은 차문화가 부흥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떡차는 자연스럽게 비중이 감소되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당나라의 떡차가 사라진 자리에 운남의 보이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로 다마무역을 위해 이민족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보이차가 남송 시절에 유입된 것이다. 미생물 발효에 의해 오래될수록 맛이 좋아지는 보이차는 조선에도 전해져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실린「죽로차(竹露茶)」란 장시에 보이차가 보인다.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瀋肆普茶價最高 一封換取一疋絹)’,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보림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다(除煩去膩世固不可無 我産自足彼不羨)라고 말하며 보이차가 차인들의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다산이 만든 보림사 떡차에 대해 그 우수성을 말하고 있다.

 

3)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

 

조선 후기 다산과 초의라는 걸출한 차인이 등장하여 제다법과 음다법은 물론 정신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일대 혁신을 이루었지만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일제강점기를 맞게 된다.

강점 초기 일본 천황과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황국 신민을 만들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펴다가 3․1 운동을 전환점으로 문화정책을 펴게 된다. 학교를 늘리고 일본식 교육방법을 택하였으며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조선을 깊이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 중에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인물은 우리나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역사관과 심미관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 대명물로 추앙받고 있는 이도다완에 대한 그의 글은 우리의 차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도예사가 이도다완으로 지탱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도다완에 대한 그의 찬사는 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심미관은 치명적이다. ‘기자에몬 오이도를 보다’라는 글에서 ‘이도(井戶)가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에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야말로 그 고향이다’라는 말로 조선인의 심미관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도다완에 대한 관심은 커졌고 이도다완에 의한 행다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일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이도다완은 말차음다에 사용되는 찻사발로 일본의 음다법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앞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일본의 말차음다는 떡차를 가루내어 마시는 방법이 아니라 잎차를 가루내어 마시는 음다법으로 일제강점세력의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시대는 『조선의 차와 선』에서 조사한 떡차가 사라진 시대과 엇비슷하다. 이로 볼 때 일본의 문화정치가 떡차 쇠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해외 유학생의 신문화 유입

 

일제 강점기에 젊은이들이 갈 곳은 강제 징집되었던 학병이었다. 일본은 중국 침략과 진주만 습격을 일으켜 세계 정복의 과욕을 부렸고 그 결과는 원자폭판으로 인한 처절한 패배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많은 학생들이 군대에 징집되었고, 부유층은 징집을 면하기 위해 유학을 택하였다. 그리고 일제 앞잡이가 되거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유학생은 이른바 지식인이었고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유학길에서 선진문화를 배우며 다양한 음식은 물론 다양한 음료를 맛보게 되어 차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였고 차를 마시더라도 떡차가 아닌 잎차를 선호하였다. 특히 일본의 문화정치에 편승한 일본 유학생이 많았던 만큼 잎차를 가루내어 마시거나 우려 마시는 일본식 다법을 익히게 되었다.

외형상 세련되지 못한 떡차는 외면받기에 딱 알맞았다. 특히 약용으로 겸하여 마시던 떡차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약용으로서의 떡차는 시골의 5일장 구석에서나 겨우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마저 점점 사라져갔다.

 

5) 커피 다방의 등장

 

1610년 터키를 여행했던 영국인 조지 샌더스는 커피에 대해 ‘땟국물처럼 시커먼’ 음료라고 표현했지만 조선의 보통사람들은 근접하기 어려운 전통 한방의 보약색깔이었다.

1890년대 들어 ‘개화’와 ‘근대’의 바람을 타고 커피가 조선에 상륙한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다.

일제 강점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명동의 진고개에 깃사텐(끽다점:喫茶店-찻집을 뜻하는 일본어)을 지어넣고 커피 장사를 시작한 이래 최초의 전업다방으로 1923년경 충무로3가의 ‘후다미(二見)’가 세워졌고, 1927년에는 종로구 관훈동 입구에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최초의 다방 ‘카카두’가 세워졌다.

처음에는 유학파 문인이나 화가, 소수의 일본인 청년들이 손님의 전부였으나 차차 예술가의 삶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소설가 이상(李箱)도 다방의 단골이었고, 금홍이라는 여자와 함께 ‘제비다방’을 연 이래 수차례 다방을 개업하였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만다.

1947년 11월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서울 시내에 100여개의 다방이 있었고, 매일 드나드는 사람의 수가 350여명으로 무려 매일 3만여명이 다방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1959년 11월 조선일보의 기사는 대폭 증가한 다방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시내 다방은 820여개로 늘어났고, 열달 동안 4천만여잔의 차를 마셔 2백만 서울시민이 모두 다방출입을 하다고 치더라도 시민 한 사람이 평균 20번은 다방에 드나들었다는 셈이 나온다.

가난한 서민층은 다방에 드나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난하더라도 사람들을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식자층에 속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주요 활동무대이자 연락거점이었다. 과거의 ‘사랑방’을 ‘다방’이 대체한 셈이다.

또한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부대에는 미국의 각 커피회사에서 시험용으로 제공한 인스턴트 커피가 넘쳐났고 미군부대 밖으로 커피가 흘러나와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

이처럼 커피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설탕의 달콤한 맛과 씁쓰름한 커피맛의 조화가 조선인을 거쳐 한국인이 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 성분은 차에 포함된 주된 성분인 카페인과 같은 성분으로 차에 익숙하던 입맛이 커피로 돌아서는데 별다른 저항이 없었을 것이다.

 

6) 화로문화의 쇠퇴

 

우리나라는 온돌문화로 비교적 따뜻한 실내생활을 하였다. 추운 겨울에는 불을 땐 아궁이에서 숯을 화로에 담아 방안에 들여놓고 훈훈하게 하였다. 화로는 방안을 따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먹을 거리를 굽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떡을 굽기도 하고, 고구마를 굽기도 하였다.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이기도 하였다. 물을 끓이면서 그 안에 차를 넣어 끓였던 것이다.

『돈차 청태전』의 저자들이 현지답사한 자료에 의하면 장흥군 관산읍, 용산면, 장흥읍 등에서 구술자들은 화롯불에 단지나 약탕기, 냄비등을 올려놓고, 떡차(돈차)를 끓여 마시거나 끓인 물로 우려 마신 것으로 구술하고 있다.

하지만 성냥의 대중화, 석탄과 석유의 공급등으로 방안에서 화로가 점차 사라짐에 따라 떡차도 자취를 감추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수긍하기 어렵다. 석탄과 석유가 난로 형태로 실내로 들어왔던 만큼 오히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물을 끓이는 것이 필수였을 것이고, 주전자나 냄비 등으로 물을 끓이기가 화로에 비해 훨씬 쉬워졌던 것을 감안하면 화로문화의 쇠퇴가 돈차의 쇠퇴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4. 떡차문화의 발전 가능성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화와 근대의 시기에 외국문물의 급속한 수립으로 우리 전통문화는 침체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우리 차문화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차문화의 한 기둥인 떡차문화도 떡차가 보관에 편리하고 오래될수록 좋은 맛을 내는 장점, 약용에 유용한 측면도 있으나, 제다공정이 어렵고 사람들의 기호의 변화로 차문화의 쇠토와 함께 몰락 수준의 길을 걸어야 했다.

최근 들어 웰빙의 바람을 타고 음다문화도 급성장을 하고 있다. 최고 수준의 연예인을 모델로 삼은 녹차 광고에서도 그 성장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녹차나 홍차의 성장세는 두드러지지만 떡차는 더딘 걸음이다.

결국 떡차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의 유물이 되고 말 것인가. 하지만 희망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떡차의 일종인 중국의 보이병차가 국내에서 확고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이병차를 즐기는 인구는 증가하는 추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이차가 후발효차인 것은 녹차나 발효차인 우리 떡차와는 엄연한 경계점이 있지만, 이것은 떡차 문화에 거부감이 없는 계층으로 우리 떡차를 즐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우리 떡차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모색해보고자 한다.

 

1)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차문화의 다양성 모색

 

2009년 6월 초에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티월드페스티벌에서 음다문화의 뚜렷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수년간 녹차 일변도의 차문화에서 발효차가 현저하게 증가하였던 것이다. 이 것은 소비자의 기호가 변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차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떡차의 개발은 한국차문화를 다양화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갖고 있다.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를 맞추기 위한 측면에서 떡차의 개발은 필요하다.

 

2) 제다의 자동화로 복잡한 공정 처리

 

명나라 홍무제가 단차의 제조를 금지한 것은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복잡한 공정과 많은 시간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수작업으로 그 공정을 처리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제다인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최근 제다의 자동화가 이루어지고 있어 수작업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떡차를 만드는 공정의 자동화는 떡차 문화의 쇠퇴 원인 중 중요 원인이었던 복잡한 공정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3) 다양한 외형의 제품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떡차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 전통의 다식판은 다식이나 떡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냄으로써 단지 먹기에만 중점을 준 것이 아니고 여유와 예술적인 면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양한 떡차의 모양은 소비자의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4) 친환경 음료

 

커피가 크게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가 테이크아웃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워킹커피’나 ‘패션커피’로 불리우는 테이크아웃은 도시민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기에 떡차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인다. 커피를 꺼려하는 층이나 커피문화에 질린 소비자를 대상으로 테이크아웃이 가능한 떡차는 가능성이 보인다.

차한잔을 우릴 수 있는 적정 용량의 떡차는 휴대가 용이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워킹티’나 ‘패션티’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또한 용기를 재사용이 가능하게 한다면 친환경산업이라는 시대적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다.

 

5) 관광상품으로서의 떡차

 

최근 소득의 향상으로 여행이 증가하고 있다. 단순한 유명 관광지 여행을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의 여행도 증가하고 있으며 오지탐험을 즐기는 마니아층도 형성되고 있다. 여기에 각 지역 특성을 살린 떡차는 관광상품으로서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결 론

 

이상으로 한중일 삼국의 떡차문화의 흔적과 떡차문화의 쇠퇴 원인, 떡차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오랜 기간 떡차문화를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제다 공정, 개화시기 신문화의 유입, 커피의 수입 등으로 여러 원인으로 떡차 문화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하지만 차문화의 다양성, 다양한 외형의 개발, 친환경산업의 측면에서 개발의 틈새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잎차(녹차나 홍차)와 대별되는 떡차의 우수성을 알리고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떡차문화의 발전가능성은 충분하고, 아울러 친환경, 녹색 산업의 관점에서 시대적으로 떡차문화의 발전은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 참고 문헌 >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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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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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석사논문 <한국의 차 산지 연구> 2001.


[잡지]

동군(중국 베이징대학) <고형차에서 산차로 바뀐 원인에 대해서>

- 월간 『다도』2009년 10월호에 실린 『차에서 다도로』

정민, 인터넷홈페이지(http://jungmin.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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