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1장 행복도 자업자득 불행도 자업자득 - 1. 사바세계의 실상

2013. 8. 3. 16:09경전 이야기

 

1. 사바세계의 실상

 

                                                                        장휘옥 著/불교시대사/자료입력:김수남

 

불교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원하는 일이 아무리 애써도 잘 안 될 때는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당하고 보면 운명이란 우연히 결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만나면 미신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고, 아무튼 운명에 대해 뭔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확신이 없으니까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이런가 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런가 하고 그래요." 라고 대답한다.

 

사실인간의 운명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건 인간의 운명이건 할 것 없이 일체의 모든 존재는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설한다. 한 예로 《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이 미륵보살과 여러 대중을 모아 놓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왜 고통을 받고 사는지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재물때문에 생기는 고통

 

부처님께서미륵보살과 천신과 인간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경박해서 하잘 것 없는 세속 일로 서로 다투느니라. 그들은 세상의 모진 죄악와 고통 속에서 오직 자신의 생활만을 영위하기 위해 허덕이고 있느니라.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 애를 쓰니, 있는 이나 없는 이나 그 시름은 마찬가지니라. 

그러므로 항상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얽히고 쌓인 욕심과 근심으로 쫓기고 방황하나니, 잠시도 마음 편할 새가 없느니라. 논밭이 있으면 논밭 때문에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 때문에 걱정하며, 소나 말 들의 가축이나 노비나 금전, 의복, 음식 등 여러가지 재산을 가진 사람은 또한 그것 떄문에 근심 걱정으로 시름과 두려움이 끊이지 않느니라.

그런데재물이란 뜻밖에 수재나 화재를 만나 불에 타기도 하고 물에 떠내려가기도 가며, 도적이나 원한이 있는 이나 빚쟁이들한테 빼앗기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재물이 흩어지고 없어지면 답답하고 분한 생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날이 없으며, 옹졸한 마음에서 헤어날 수 없느니라. 

이렇게 해서 마음이 멍들고 몸이 허물어져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귀한 사람이나 부자나 매한가지니라. 이와 같이 갖가지 근심과 두려움과 애타는 괴로움은 끝이 없으니, 그 고통은 마치 얼음이나 불 속의 괴로움과 같으니라. 

 

가난하고천한 사람은 항상 군색하여 불만이 그치지 않느니라. 그들은 논밭이 없으면 논밭을 가지려 애쓰고, 집이 없으면 집을 가지려 애쓰며, 소나 말 등의 가축이나 돈, 의복, 음식 등 재산이 없으면 또한 이를 가지려고 안달하며 괴로워하느니라. 한 가지가 있으면 다른 한 가지가 부족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부족하여 애써 이것저것을 다함께 가지려 하며, 어쩌다가 모두 갖추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괴로워하며 다시 찾아 헤매지만 얻을 수 없으면 부질없이 마음만 태우고 몸도 마음도 지치고 피곤하여 안절부절 못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항상 근심과 괴로움이 끊이지 않고 그 고통은 마치얼음이나 불을 품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러한 괴로움과 근심 때문에 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나니, 평소에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진리를 배우거나 공덕을 쌓지도 못한 채 몸을 버리고 허무히 홀로 돌아가 , 결국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만 그 선악의 업보의 길마저도 모르고 가느니라."

 

인간의마음을 더럽히는 세 가지 번뇌를 탐욕(貪)과 성냄(瞋)과 어리석음(癡)이라 하고,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나쁘게 물들이는 독극물과 같다고 해서 삼독(三毒)이라 부른다. 위의 내용은 이 삼독 가운데 탐욕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과 과보를 설한 것이다.

 

인간의욕심은 끝이 없다. 하나의 욕망이 성취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는 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아무리 악을 쓰고 재산을 모아 본들 인연이 없으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삼풍백화점 사고를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수천억 원의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날려 버릴 줄 알았겠는가. 욕심을 덜 부렸다면, 처음부터 재산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험한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스의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소망을 묻자,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때 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한다. 부와 권력을 모두 소유한 대왕이 오히려 '무소유'의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한 것이다. 없는 사람은 대문을 열고 자고, 많이 가진 자는 몇 겹 담장을 치고도 불안해 한다고 하지 않는가. 모든 탐욕이나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그렇다고 전혀 소유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우리의 짧은 인생을 재물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 하지 말고, 정직하게 올바른 생활을 하면서 주위에 고통받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小欲知足)'을 강조한다. 욕망을 줄이면 여유가 생긴다. 여유는 물질적으로 풍부하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얻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그것이 내세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식에게 물려 주었을 때 자식이 제대로 인간 노릇을 못 하면 그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나 올바른 정신과 신체로 인간답게 사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내세를 결정짓는 요인이며, 이렇게 사는 방법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 최대 재산이라는 것을 경전은 가르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생기는 고통

 

"세상사람들은 부모와 자식, 형제나 부부, 가족, 일가 친척간에는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결코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있는 것 없는 것을 서로 주고받아 탐내거나 인색하지 말며, 항상 상냥한 말과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대하여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혹시다투어 분한 마음이 남으면 비록 이 세상에서의 원한은 적다고 할지라도 다음 세상에서는 큰 원수가 되고 마느니라. 왜냐하면 이 세상일이란 서로 미워하고 괴롭혔을 때 당장은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마음 속으로 독을 품고 분한 마음을 맺어서 풀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자라서 사라지지 않으니, 결국에는 사후에 모두 같은 세상에 태어나 서로 앙갚음을 하게 되느니라. 

 

인간은 이 세상 애욕의 바다에 홀로 태어나 홀로 죽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과 쾌락의 장소에서도 자기가 지은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는 스스로 받고 스스로 감당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선악의 과보에 따라 각기 태어날 곳을 달리하여 착한 일을 행한 사람은 행복한 곳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재앙이 많은 곳으로, 업에 따라 엄연히 정해진 처소로 나아가는 것이니라.

 

멀리 떨어진 다른 처소에 태어나면 이승에서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서로 만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금생에 지은 선악의 행위와 내세에서 받는 고락의 과보는 변함없는 자연의 도리로서, 각기 지은 소행에 따라서 태어날 뿐이니라. 가는 길은 멀고도 어두워 서로 오랜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서글프고 아득하여 다시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느니라.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어찌하여 덧없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젊고 건강할 때에 열심히 선을 닦고 정진하여 고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진리의 대도를 구하려 하지 않는가? 도대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어떠한 즐거움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 가운데, 성내는 습관은 내세에 원수를 만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간혹 있다. 분명히 원한 맺을 일을 한적이 없는데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있다. 이러한 일이 생기면 우연이라 해야 할지 필연이라 해야 할지 가슴만 치는 경우가 많은데, 경전에서는 이것을 모두 자신의 업이 만든 결과라 해석하여 '이 생에서 사소한 원한이라도 풀지 않으면 내세에는 원수로 만난다.'고 한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습관적으로 성내는 마음이 이렇게 원수를 만나는 악연(惡緣)의 과보로 돌아올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부부의 연을 악연이라 하거나, 혹은 자식을 빚 받으러 나온 빚쟁이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생에서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나거나 자식으로 태어날 수 있는 인연이란 무한 겁 동안 쌓아온 선(善)한 인연의 힘이다.

 

이것은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일 두 사람이 악연으로 만났다면 처음 만났을 때 벌써 상대방을 해치거나 상처를 주었을 것이며, 미운 생각만 나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에서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혼하거나 부부 사이에 사이가 심각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처음에는 서로가 좋아서 결혼했다고 한다. 선한 인연은 선한 인연끼리 모이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선한 인연으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아이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에서도 어마어마한 비율인데, 어째서 빚 받으러 나온 사람으로 해석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런 말들은 부부싸움으로 마음이 상하거나 자녀가 말썽을 일으켰을 때 나온 것이 겠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악연이 아니라 이 생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 

 

부부싸움에는 싸우는 원인이 있고, 자식의 말썽에도 말썽을 피우게 된 근본 원인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근원적인 원인을 분석해서 그렇게 된 원인 속에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참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에 불과하다. 이렇게 섣불리 내뱉은 무책임한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은 결국 이 생에서 자신이 지은 업(신·구·의 삼업)이 되어, 이 생에서 좋았던 선한 인연들이 내 생에는 악연이 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 악업으로 인해 내세에는 재앙이 많은 곳에 태어나 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또한 경전은 이러한 악업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업의 과보는 자기 스스로 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죽은 후에 천도해 주면 극락왕생한다는 생각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렇다고 49재와 같은 천도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식은 이미 우리의 고유문화와 전통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은 불교의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49재를 지내는 것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적인 전통과 풍습이 융화된 불교의식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내세에 대한 희망과 안도감을 줄 뿐 아니라, 불교교리적으로 볼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선업을 쌓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에 결코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교경전에서 자신의 업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사는 동안에 선행을 쌓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잘 지내고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돌아가시고 나면 부모는 그들 각자가 이 생에서 지은 업대로 과보를 받아 각자의 길로 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고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내세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생에서 현재의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 것을 권한다.

 

 

인과관계를믿지 않은 사람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선을 행하여 안락을 얻고, 진리를 닦아 불도를 성취하는 도리를 믿지 않느니라. 또한 사람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과 은혜를 베풀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선악 인과의 엄연한 사실을 믿지 않고, 세상 일이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잘못 생각해서 끝내 올바른 가르침을 믿으려 하지 않느니라.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오히려 이것을 더욱 옳다고 고집하고 우기는 것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 마찬가지니라. 그래서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그릇된 생각을 대대로 이어받아 부모는 자식에게 도리어 그것을 교훈으로 가르치느니라. 따라서 선배나 조상들은 선을 닦은 적이 없고, 도덕을 몰라 자손의 행동은 어리석고 정신은 더욱 혼미해져 마음은 막히고 옹졸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죽고 사는 생사의 이치와 선악 인과의 도리를 알 수도 없으며, 그에게 말해줄 사람도 없느니라. 그러나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과의 도리에 따라 어김없이 스스로 받는 것이니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 되느니라. 

 

인간이 죽고 사는 생사의 법칙은 언제나 변함없는 도리로 영원히 이어나가는 것이니라. 부모는 자식을 잃고 슬퍼하고, 자식은 부모를 잃고 통곡하며, 형제간·부부간에도 서로 죽음을 당하여 애통해 하느리라.

 

그런데 죽음에는 늙고 젊은의 차례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이것이 무상(無常)한 일생의 실상이니라.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이러한 무상의 도리를 깨우쳐 주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너무나 적고, 그러는 사이에 생사는 돌고 돌아 잠시도 그칠 사이가 없느니라.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어리석고 반항적이어서 성인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고 멀리 앞을 내다보는 슬기도 없으며, 오직 각자의 쾌락만을 탐하느니라. 그래서 애욕에 미혹되어 도덕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애착과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치 승냥이처럼 오직 처자 권속과 재물만을 아끼고 탐할 뿐이니라. 그러므로 생사를 여의는 대도(大道)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져 생사윤회가 끝이 없나니,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기 그지 없느니라.

 

인생이란 어떤 때는 한 가족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부부간에 누군가가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은 못내 슬퍼하고 못 잊어 하느니라. 그 은혜와 사랑으로 마음이 얽매어 쓰라리고 그리운 심정은 가슴에 사무치고,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도 맺힌 마음은 풀릴 길이 없느니라. 참된 도리를 말해 주어도 그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사람과의 정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은 혼미하고 답답하여 더욱 어리석은 미망에 덮이게 되느니라.

 

그래서 깊이 생각하여 헤아릴 아량도 없고, 마음을 돌이켜 오로지 불도에 정진할 만한 결단도 없으며, 끝끝내 덧없는 세상일을 단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한세상 허둥지둥 헤매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나니, 이미 목숨이 다하면 진리의 길은 닦을 수도 얻을 수도 없으니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느니라.

 

세상은 혼탁하여 인심은 어리석고 어지러워 애욕만을 탐하니, 인생의 길을 헤매는 사람은 수없이 많고 진리를 깨달은 이는 지극히 드무니라. 그러니 세상일이란 부질없이 바쁘고 어지럽기만 하여 믿고 의지할 아무것도 없느니라.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어른이나 이이 할 것 없이 모두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지만 어쩌다 서로 이해가 충돌하면 원수같이 미워하나니, 그 사납고 표독한 마음은 마침내 불행한 재앙을 일으키느니라.

 

이렇듯 천지의 올바른 도리를 거스르고 인간의 참다운 본심을 따르지 않아 저절로 그릇된 악업은 앞뒤를 다투어 거듭하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다만 그 죄업의 결과만을 기다릴 뿐 달리 어찌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미처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죄업의 힘은 별안간에 그의 목숨을 빼앗아 악도에 떨어뜨리고 마니, 몇 생을 거듭하며 지독한 괴로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느니라. 사나운 악도 가운데서 돌고 돌며 몇천만 겁의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올 기약이 없고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나니,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일이니라."

 

어리석어 인과관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과보에 대해 설한 것이다. 세상 만물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생긴다는 인과관계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인과관계를 믿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여 결국은 그 악업으로 인해 악도에 떨어져 기약 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이치를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업장이 두꺼운 사람'이라 한다.

 

'업장이두껍다' 란 과거에 저질은 악습이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뒤덮고 있어 좋은 말을 들으면 이 악습이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그 순간뿐, 결코 믿고 실천하려 하지 않으며 돌아서면 다른 짓을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쇠 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바로이런 것이다.

 

경전에'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과의 도리에 따라 어김없이 스스로 받는 것이니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불법의 도리를 믿고 선업을 쌓아 돌고 도는 육도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믿는 목적이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염화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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