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文化의 遺蹟地(유적지) 한송정(寒松亭)에서 커피는?

2018. 4. 22. 02:36차 이야기



       

茶文化의 遺蹟地(유적지) 한송정(寒松亭)에서 커피는?| 문학의 산책 




운봉(雲峰:밀양) | 조회 55 |추천 0 | 2006.07.13. 14:50

                                                                                    한송정

   차문화 유적지.....한송정 (寒松亭)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에 자리한 한송정(寒松亭)은 동해가 한눈에 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있다. 화랑의 차문화 유적으로 유명한 한송정(寒松亭)에는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우물과 차를 끓이는 돌부뚜막이  있어 중국과 일본의 차인들까지 한번쯤 찾아오고 싶어 하는 곳이다

경포대와 한송정(寒松亭)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한다. 다만 사선(四仙) 즉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 네 국선의 전성기인 진흥왕(眞興王.540~575)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그의 파한집에서


         한송정(寒松亭)


까마득한 옛적에 사선 노닌 곳

푸르른 소나무 우뚝 서 있네

차샘 속 달만이 그때 그 시절

어렴풋 하나마 생각케 하네


라고 노래해 한송정(寒松亭)이 옛적에 사선이 놀던 곳으로 그를 따르던 무리 3천명이 심은 소나무가 지금도 창창하여 마치 구름 같다고 했다. 지금 울울 창창(鬱鬱蒼蒼)한 소나무의 조상이 바로 옛 사선들인가 싶다. 


   이곡(李穀.1298~1351)이 쓴 동유기(東遊記)에는 

...한송정(寒松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곳 또한 사선이 놀던 곳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한송정에 유람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이를 귀찮게 여긴 나머지 집을 헐어 버렸다.소나무 또한 들불로 타버리고 오직 석조, 석지와 두 개의 돌우물만이 그 옆에 남아있었는데 역시 사선의 다구(茶具)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훗날 석지조의 이름만 듣고 두 돌덩이를 보지 못한 후세인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덧붙힌 <묘련사 석지조기>에서 

 " ...그 길로 한송정(寒松亭)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개 옛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돌덩이는 두 군데가 오목한데 둥근데는 불을 두는 곳이고

타원형은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인데 합하여 이름하기를 석지조라 하였다. 이에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백설처럼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가 황금빛 움차를 달였다... "

고 했다.


   이 돌화덕과 돌못은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독특한 우리만의 차 도구이다.

비슷한 것으로 중국의 육우가 <다경>을 저술한 해인 758년에 구리나 쇠를 부어 주조한

풍로라는 다구가 있으나 석지조 보다 200년 가량 뒤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한송정(寒松亭)은 아름다운 경치와 화랑들이 사용하던 돌화덕과 돌못이 남아있는 민족문화유산의 유서깊은 차 유적지이다


다음은 다조를 노래한 시이다.


푸른 돌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 초당 앞에 있구나

반쯤 다문 고기 목 같은 아궁이엔 불길 깊이 들어가고

짐승 귀 같은 두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갈고 매화꽃잎 걷어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앞으로는 단로(丹爐)를 만들어 신선 되는 길 배워야겠네.


                        
                                                           다조(차 끓이던 곳)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에

                                        홍장(紅粧), 기생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에 경포대에 물결 잔제

유신(有信)한 백구는 오락가락 하건마는

어떻다 우리의 왕손(王孫)은 가고 아니 오느니.

 

         

                                               홍장암(사랑을 속삭이든 곳 )


 

한송정(寒松亭) 달빛타고 흐르는 애모(愛慕)의 노래


1. 한송정에 떠오르는 다섯 개의 달


   열엿새 기망(旣望)의 둥근 달이 정자 위에 둥실 떴다.

강원 감사 박신이 이튿날이면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어 이를 축하 하고자 강릉 한송정에서

송별연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초가을 저녁.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사방을 비추는 달빛 아래 강릉부사 조운흘은 술잔을 들어 가운데 앉은 박신에게 권한다. 술잔을 받아든 감사는 물끄러미 술잔을 들여다 본다. 얼굴이 밝지 못하다. 강릉 부사 조운흘은 그런 감사의 심정을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너희들은 떠나는 감사영감을 위해 권주가나 한곡 부르라." 

조부사의 말이 떨어지자 곁에 있던 농월(弄月)이 가야금을 뜯는다. 청아한 소리가 정자를 공중에 둥실 띄운다. 멀리 여울지며 동해바다로 퍼진다. 가야금 소리와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여흥을 돋운다.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술잔을 높이 든다. 그러나 박신은 여전히 말이 없이 술잔만 들여다본다. 


빈산엔 나뭇잎 지고 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옛 사람의 풍류가 이제는 적막쿠나

슬프다 한 잔 술을 다시 권키 어려운 것을

아! 옛 노래의 곡조가 오늘 새삼 새롭구나 

그래도 박신의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감사 영감. 무얼 그리 물끄러미 보시는 게요?"

"아, 아니오. 술잔에 뜬 달을 보는 중이오."

박신은 엉겹결에 둘러댄다. 옆에 있던 선옥(仙玉)이 토를 단다.

"감사 어른, 이 한송정에서는 동시에 달을 다섯 개를 볼 수 있답니다."

"아니, 달이 하나지 어찌 다섯씩이나 되느냐?"

"모르사와요?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그래라. 어서 가르쳐 다오."

"그러나 그냥은 안됩니다. 가르쳐 드린 값을 내셔야 합니다."

"허허, 무엇으로 값을 낼꼬? 내가 너의 머리를 얹어 주랴?"

"저는 그런 자격은 없구요. 가르쳐 드리면 그 값으로 노래하나 부르세요."

"그래라, 네가 내 노래 듣는 게 소원인게로구나!"

"한송정에 오르면 달이 다섯인데요.

하나는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 또 하나는 경포대에 비친 달, 다른 하나는 지금 영감님께서 보고 계신 술잔에 뜬 달, 다른 하나는 앞에 앉아 있는 제 눈에 비친 달, 그리고 마지막 달은 뭔지 맞춰 보세요."

"허허, 넌 참 유식한 애로구나. 나는 짐작도 못하겠다."

"마지막 달은요, 영감님 마음에 떠 있는 달이에요."

"하하하..."

좌중이 박장대소한다.

아, 그러니까 감사영감의 기분이 우울한 것은 그 '마음의 달'이 보이지 않아 그러시는 게로구려." 조부사가 술잔을 들어 권한다.

구름 속에 가렸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경포호의 수면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옛부터 '경포영월(鏡浦迎月)'은 관동팔경 중에 으뜸으로 꼽는다. 멀리 둘러선 울창한 장송들이 환히 보일 만큼 달은 밝았다.

 


                                                                            경포호

 

2. 경포호에서 부르는 사랑의 연가 

   박신은 자(字)를 경부(敬夫), 호를 설봉(雪峰)이라 하며 본관은 설봉으로 공민왕 11년에 태어나서 세종 26년까지 산 사람이다. 포은 정몽주 밑에서 수학하였고 고려가 망하기 7년 전 인 1385년 문과에 급제,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 형조 정랑을 지냈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승추부좌승지로 발탁되어 관로가 트이기 시작하여 1404년 개성유후, 한성부윤을 역임하였으나 한때 대사헌이 되어 언사로써 왕의 비위를 거슬려 아주현에 귀양가기도 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선공감 제조로 있을 때 선공감 관리가 저지른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13년 동안이나 통지현에 유배되었다가 1432년 풀려났다.

   그가 강원 감사로 있던 기간은 비록 짧은 것이었으나, 그곳에서 만난 홍장과의 관계는 실로 깊은 애정 그것이었다. 박신이 서울로 떠나게 되면 어차피 서로 잊어야 할 처지라고 생각한 조부사가 일부러 이별의 슬픔을 못 이긴 홍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했을 때 너무 놀라고 그 충격은 실로 컸다. 자신에게 향한 홍장의 사랑이 이토록 깊고 큰 줄을 몰랐던 터라 자기와 헤어지는 슬픔을 차라리 죽음으로 택한 그 애정이, 그 곧은 정절이 너무나 고맙고 한편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조부사의 송별연에서도 한없이 침울한 마음을 달랠 길 없이 홍장의 웃음 띤 모습만이 술잔에 어른거렸을 뿐이었다.

   그때 그림배 하나가 소리없이 호수에 떴다. 정자 위의 시선들이 모두 하얀 달빛 아래 한 여인이 거문고를 뜯고 있는 배에 쏠린다. 박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자 위에서 뛰어 내려배를 타고 여인이 뜯는 거문고 가락에 홀린 듯 그림배를 따라 다가간다.

   놀란 것은 박신. 배 위에서 거문고를 타는 여인은 홍장이 아닌가! 조부사가 죽었다던 홍장이었다. 죽은 홍장이 다시 살아났다니. 취기가 가셨다. 박신은 홍장을 끌어 안았다. 볼을 비벼본다. 분명히 산 사람. 그것도 그렇게 보고 싶었던 홍장 바로 그녀였다. 이때 다른 배를 타고 따르던 조부사 일행의 웃음 소리가 호수의 수면에 번졌다.

   서거정의 <동인시화>에 박신과 홍장의 애틋한 사랑에 대한 이런 기록이 담겨 있다.

고려 우왕 때 강원 감사 박신이 강릉 기생 홍장을 사랑하였는데, 박신이 만기가 되어 떠나려 할 때, 강릉 부사 조운흘이 짐짓 홍장이 죽었다고 하였더니 박신이 몹시 슬퍼하였다.

하루는 조부사가 박감사를 초청하여 경포대로 뱃놀이를 나갔다. 문득 그림배 한 척이 앞에

나타났는데, 그 속에선 미인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지라, 박감사는 '이는 진정 신선이로다'하고 감탄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홍장이라. 배에 탔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와 같은 박신과 홍장과의 관계를 정송강은 <관동별곡>에서 이렇게 읊었다.

   석양무렵에 현산의 철쭉꽃을 밟으면서 경포호로 내려가니, 십 리까지 뻗은 잔잔한 수면을 당기고 다시 끌어 당겨서, 낙락장송이 울창한 속에 마음껏 펼쳐져 있으니,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구나. 호수 속의 모래를 헤아리겠구나. 외로운 배를 매어 놓고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어 그 옆이 동해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호의 수면이여, 멀리 넓게 펼쳐진 동해 바다여! 여기보다 경치가 더 잘 갖춰진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옛날 박신과 홍장의 고사가 야단스럽기도 하구나!

이렇게 서로가 떨어지기 어려웠던 사랑하는 두 사람. 떠나려던 박신이 홍장과 더불어 경포대에서 며칠을 더 머물면서 정염을 불태웠지만 그러나 박신은 결국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홍장이었다.


울며불며 잡은 사매 떨떨이고 가지마오.

그대는 장부(丈夫)라 도라가면 잇건마는

소첩은 아녀자(兒女子)라 못내 잇씀네라

                                   -작가미상-


이렇게 보낸 박신이었다. 그를 보낸 홍장은 그 날로부터 박신의 음신(音信)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하였으나 한 달, 두 달 소식이 없자 초조하다 못해 그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3.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기다림/ 작자가 미상


한자 쓰고 눈물지고 두자 쓰고 눈물지니

자자행행이 수묵 산수 되거고나

져 님아 울며 쓴 편지ㅣ니 휴지삼아 보시소



춘수(春水) 만사택(滿四澤)하니 물이 만아 못오더냐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하니 산이 놉하 못오던가

추월이 양명휘(揚明輝)어를 무삼 일노 못오던가


편지야 너 오는냐 네 임자는 못 오든냐

장안도상 널은 길에 오고 가기 너뿐일다

일후란 너 오지말고 네 임자만 오거라


              
 

                                                                기다림의 꽃 말 (동백꽃).


   작자가 미상이나 멀리 있는 남자정인을 향한 그리움과 소식을 묻는 여인들의 하소연이 담긴 시조들로 오가는 소식을 전하는 음신으로도 더 이상 성에 찰 수 없어 이제는 눈으로 보고 싶고 손으로 만지고 싶고 가슴으로 안고 싶은 그런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홍장이 박신을 기다리고 그리워 하는 경지가 이에 미치고도 남았으리라.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의 경포대(景瀑臺)의 물결 잔잔(潺潺)

유신(有信)한 백구(白鷗)는 오락가락 하건만은

어떠타 우리의 왕손(王孫)은 가고 아니 오는고   (홍장(紅粧)


   잊으려 한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미워해 보아도 미워지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참고 기다리자고 마음을 다질수록 그리움은 더한다. 

기녀라는 사회적 신분에 매인 자신의 처지가 새삼 뼈아프게 아팠다. 한 여인의 사랑을 용납 못하는 사회의 제도적인 모순을 뼈저리게 아파하면서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홍장은 고려 때의 명기 동인홍(動人紅)이 기생의 신세를 한탄하여 지은 시를 뇌어 본다.


娼女與良家  其心問幾何

창녀여양가  기심문기하 

可憐栢舟絶  自誓矢靡他

가연백주절  자서시미타 

기생과 양갓집 규수 사이에

묻노니 그 마음 다를 게 있오.

슬프다 송백같이 굳은 절개로

두 마음 안 먹고자 맹세한다오. 

   주변의 갖은 유혹 앞에 이기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이런 고매한 정신 자세로 마음을 다 잡으며 살아 왔던 홍장이었건만, 때로는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이런 자신을 조소하기도 했다. 차라리 한 남자에게 깊은 정을 주지 말 것을…

   때로는 불타는 성숙한 여인의 정염을 못 이겨 몸부림치고 또 어떤 때는 그리는 정에 독수공방의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며 아무나 넓고 따뜻한 남정네의 품에 안겨버릴걸 하는 회한이 머리를 들곤 하여 그만 무너져 내리고 싶었던 밤들은 그 얼마였던가? 

업는 정 꾸며다가 잇는더시 단장헌들

그일니 오래숀가 삽시간에 나져질걸

구타여 심여올 허비허여 죠흘나 무삼허리 <작가미상> 

   끝내 소식이 없어도 홍장은 굳게 절개를 지키면서 박신을 기다렸다. 치근대는 취한이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덤벼드는 한량들에게 홍장은 오직 자기에게는 박신 뿐이라며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마음의 흔들림을 누르고 지켰다. 

   조선 시대는 축첩제가 공인되고 또한 많은 여성이 기생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두 가지 제도는 모두 양반 남성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피 지배계층 여성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반이나 한량들의 가무 음주 자리에 불려 나온 기생들에게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이런 시절 버젓이 남편이 있다고 우겨댄들 기생의 정조를 인정치 않던 치한들로부터 홍장이

박신을 향한 절개를 지키고자 몸을 눕히지 않고 또는 마음을 열지 않고 가무음주 자리에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박신에게로 향하는 그리움은 걷잡을 길 없었다. 그런 그리움을 잘 나타낸 매창(梅窓)의 시가 있다.

相思都在不言裏  一夜心懷髮半絲

상사도재불언리  일야심회발반사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圍

욕지시첩상사고  수시금환감구위 

그리워 말 못하는 애타는 심정

하룻밤 괴로움에 머리가 센다오.

얼마나 그리웠나 알고 싶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오.<매창(梅窓)>


   두견이 피를 토하며 울어대는 장장추야 달 밝은 밤.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드는 불면의 밤을 눈물로 고독을 달래는 나날들… 갚은 밤 잠 못 들어 읊어보는 단장의 하소연은 탄식이 되고 시가 된다.


비는 온다마는 님은 어니 못오는고

물은 간다마는 나는 어이 못 가는고

오거나 가거나 하면 이대도록 그리랴 <작자미상>


   끝내 소식이 없는 박신을 두고 그러나 홍장은 그가 틀림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큰 그리움을, 그 못 견딜 고독을 참자고 마음 다진다. 그러나 참자고 마음을 다질수록 그리움은 더한다.


山中相送能  日暮掩柴扉

산중상송능  일모엄시비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

춘초년년록  왕손귀불귀 

산중에서 서로 보고 헤어진 당신

해는 져 사립 밖이 어둑하구려

봄풀은 해마다 또다시 푸르건만,

떠나간 당신은 다시 오지 않는구려. 

당나라 때 시인 '방우(方于)'가 느꼈던 그리움도 이런 것이었을까?


4. 사랑이여 ! 꿈이여 !


거울에 빗쵠 얼굴 내 보기에 꼿 것거든

허물며 단장(端粧)하고 님의 ?例? 뵐 ?Ю肩?

이 단장 님을 못 뵈니 그를 슬허 하노라<작가미상 >


   거울 앞에 혼자 앉아 단장한 자신의 아름답던 얼굴이 나날이 그리움이 쌓여 수색이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언제 한양 가신 그립고 보고픈 사람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아줄까 하고 초조감이 쌓이던 그리움의 1년이 지난 이듬해 여름.

박신이 순찰사가 되어 강릉에 들르게 되어 홍장의 일편단심과 굳은 절개를 알고 더욱 사랑하게 되어 홍장을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측실을 삼았다.

한결같이 사랑에 목을 매었던 홍장의 염원은 이뤄졌다. 그 수 많은 기생들의 로맨스가 아쉬움으로 점철되거나 아니면 일방적인 기생의 희생과 주는 사랑으로 막을 내리는 것과 달리 이 두 사람은 행복한 사랑을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다.

박신과 조운흘은 동문수학하던 사이였고,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친교가 두터웠다. 박신은

경포대의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었던가. 노경에 이루러 그때 일을 회상하는 시를 조운흘에게 보낸 것이 남아 있으니 곧 <증조석간운흘박혜숙신(贈趙石磵云屹朴惠肅信)>이 그것이다.


少年時節接關東  鏡浦淸遊入夢中

소년시절접관동  경포청유입몽중


臺下蘭舟思又貶  却嫌紅紛笑衰翁

대하란주사우폄  각혐홍분소쇠옹


내 일찍 젊어서 관동에 갔던 그 추억

경포호의 놀던 모습 꿈 속에도 완연타오.

그곳에 배를 띄워 또 한 번 놀고 싶소만

아가씨들이 늙은 나를 웃을까봐 두렵소.


   이 시를 썼을 때의 박신은 이미 늙었고 그래서 홍장의 얼굴에도 주름살은 세월의 사연처럼

얽혀있었던 듯, 젊은 시절 노닐었던 그 경포호에서 젊은 기녀들과의 뱃놀이를 그리워하는

걸 보면…


 

cafe.daum.net/295295/KDt/204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