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렴의 차(茶) 시배지는 구례 주변 지리산이다 / 鄭英善

2018. 4. 22. 02:54차 이야기



       


대렴의 차(茶) 시배지는 구례 주변 지리산이다 ― 鄭英善
여명 (soonin47) 06.05.31 08:40
대렴의 차(茶) 시배지는 구례 주변 지리산이다 ― 鄭英善

<삼국사기>에는 “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이라고 씌어 있다.
즉, 9세기에 신라의 사신인 대렴이 唐에서 가져온 차나무의 씨는 흥덕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어졌고
이로 인해 음다풍속이 성해졌다는 내용이다.

호남과 영남에 자리 잡은 거대한 지리산의 어디쯤에 대렴의 차씨가 심어졌는지는 오늘날 다인들의 관심거리이다.
더욱이 경남 화개의 쌍계사 입구에는 ‘김대렴공 차시배추원비(金大廉公茶始培追遠碑)’가 있고,
또 근래에는 ‘茶始培地’ 비석도 세웠으니, 어떠한 사료나 근거에 의한 유적지 표시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논쟁이 생겨났으면 합당한 결론을 얻어 따르고 서로 협력하여
우리 자신과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이 시대의 우리 모습을 남겨야 할 것이다.

그 차씨는 왕명으로 심어졌던 만큼 이 땅에서 잘 자라서 계속 씨를 퍼뜨려 신라 음다풍속의 대중화에 기여했고,
1200년가량이 지난 오늘날도 그 유종이 지리산 자락 혹은 다른 곳에서도 야생차로 자라고 있으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茶나무 잎으로 만든 마실거리가 이 땅에서 생활 속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대렴보다 약 200년 전인 7세기였다.
위에서 “茶는 선덕왕(재위 632~647) 때부터 있었다.”
고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이 내용은 신라의 茶 생산을 뜻할 수도 있고, 왕실의 음다풍속을 뜻할 수도 있다),
가야국 종묘 제수의 茶, 사선(四仙)의 전다구(煎茶具), 보천과 효명의 헌공다례, 고구려 무덤의 돈차,
통도사 사적기, 다인 원효, 그리고 설총의 화왕계(花王戒) 등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한국 茶文化> 너럭바위, pp.36-100) 대렴 이전의 자생차에 관해서는,
661년에 김해의 본가야 시조인 김수로왕의 명절제사에서 茶를 제물로 썼다는 점과
통도사(通度寺, 양산군 하북면 영취산 소재)의 사적기 내용을 참작하면,
7세기 중엽에 적어도 경상남도 지방에 자생 차밭이 있었다는 점이 확실하다.
음다풍속이 정착한 지 2세기 가량이 지난 9세기의 전기에는 당시의 우리 토산차와는
맛이 조금 달랐을 중국차의 차나무 씨를 가져와 심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차를 심고 만들며,
기호음료로 끓이는 일이 나름대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은 자명하다.

대렴은 흥덕왕 3년인 서기 828년 음력 12월에 당에서 돌아왔으므로 이듬해인
829년 봄에 (한 자루 정도 될지도 모르는) 차씨를 심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데나 차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차가 잘 자랄 수 있는 토양과 기후를 지닌 지리산을 택하였던 것이다.

(1) 제다 장소는 지리산 밑에 형성된 민가(民家)

차씨를 국가정책(왕명)으로 심고자 함에는 찻잎을 따서 법제할 인력과 교통 등의 여건을 고려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차는 양력 4․5월에 해뜰 때 따러 나가서 산속이 어둡기 전에 어느 정도 따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라야 하므로,
민가에서 먼 거리일 수는 없다.
또한 따온 차는 바로(달빛이 없는 경우에는 이튿날) 제다를 시작해야 한다.
신라와 고려 전기에는 고급 유단차(乳團茶)가 성했으므로, 여기에는 시루와 솥과 아궁이, 절구, 떡차 만드는 틀과 말리는 배로, 그리고 포장 기구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통도사사적기>의 내용에서도,
절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마을에 제다기구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즉, “북쪽 동을산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는 ‘所’이다.
절에 바치던 차 부뚜막과 차샘이 지금도 아직 남아 없어지지 않고 있다.
(北冬乙山茶村 乃造茶貢寺之所也. 貢寺茶烟茶泉 至今猶存不漏.”
(원본: <한국 茶文化> 도45)라고 했다. 여기서 차 부뚜막은 제다용 솥을 거는 곳이거나 배로(焙爐)이다.
차샘을 중시한 것은 차를 끓여서 절에 바치기도 했음을 방증하므로 민간마을인 다소촌(茶所村)과 통도사는 지척 간임을 추측할 수 있다.

   절에서 차를 따서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나,
신라의 승려는 조선시대와 달리 귀족층이자 최고의 지식계층이었으므로 앞에서 ‘造茶貢寺之所’라는 말이 증명하듯이,
전문적 제다는 절 주변에 있는 민가가 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민가가 형성될 수 있는 요인은 우선 논밭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찰과 가까운 곳 또는 특정품을 생산하는 ‘所’가 있다.
인구가 적던 당시에 지리산 아래의 민가도 농사짓는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 있었을 것이 당연하므로
그 촌락은 오늘날까지 논밭을 중심으로 터전을 지켜왔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대렴이 가져온 차씨를 심은 곳은 지리산 아래의 민가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논밭에 인근한 산 쪽임이 분명하다.


(2) 차 시배지는 사찰 주변과 전답 사이

   거대한 지리산에는 맹수들이 있었고 숲이 울창하므로,
사람 다니는 길이 나 있는 곳은 높은 산이 아니며 숲이 깊은 산자락도 아닐 것이다.
당시에는 산에서 사람의 왕래가 있고 길이 나 있는 곳은 절 주변이므로,
차 시배지는 절 아래 촌락의 논밭과 가까운 곳임이 틀림없다.
또한 사찰은 차의 수요가 많은 곳이므로 제다 장소인 민가와 가까운 것이 편리하다.

   후기 신라시대에 차의 주된 소비계층은 왕실·귀족·승려·군민이었다.
특히 승려나 사찰의 茶 수요가 무척 컸으리라는 것은 7세기 이래의 신라 승려다인들의 기록과,
앞에서도 보았듯이 절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茶村’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9세기 중엽 지리산에서 나는 차의 주된 수요처는 당시에 지리산에 있던 사찰이고 그 차를 만든 곳은 절 주변의 민가이며, 차밭은 사찰 주변의 촌락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3) 9세기 초에 있던 지리산의 절

   대렴이 귀국했을 때 지리산에 주변에는 촌락이 형성됐을 만한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가 핵심 논지가 된다.

829년 당시 지리산에 있었던 절은 화엄사와 연곡사, 란야(蘭若), 운수원(칠불암)이다.
여기에 혹자는 본래 이름이 옥천사(玉泉寺)인 쌍계사를 추가해 넣고 있다.

우선 옥천사에 관해 살펴보면,
<국사대사전>(삼영출판사) ‘쌍계사’에는 “723년(성덕왕 22년)에 삼법이 창건했으며 처음에는 옥천사라 하였다.”
고 하였고, 같은 책 ‘혜소’에는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고 씌어있다.
그리고 <한국인명사전>(신구문화사) ‘혜소(慧昭)’편을 보면,
진감 혜소가 830년 귀국한 후 “지리산의 삼법화상의 옛 절터에 절을 짓고 …
그 뒤에 남령 기슭에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조계 육조의 영당을 세웠다.”고 하였다.
또 옥천사(쌍계사)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22년(723)에 혜조(慧照)가 지었다.”
(<새우리말 큰 사전> 삼성출판사)라고도 하였으며,
<불교사전>(동국역경원) ‘쌍계사’조를 보면, 하동군 지리산의 쌍계사는 “723년(신라 聖德王 22년)에 삼법(三法)이 창건했다.”
고 적혀 있고, 같은 책 ‘혜소(慧昭, 774~850)’조를 보면,
진감 혜소가 중국에서 돌아와 “화개곡의 삼법화상(三法和尙) 란야(蘭若)의 옛 터에 절을 짓고 있었다. …
뒤에 남령에 절을 짓고 옥천사라 하고 육조의 영당을 세우다.”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지리산에는 723년에 삼법이 지은 절과 930년 이후 혜소가 지은 절이 있었는데,
삼법의 절은 혜소 당시에는 옛 터만 남아 있었던 란야였고, 진감 혜소는 지리산 남령에 옥천사(쌍계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삼법 란야는 먼저 지었지만 후세에 옥천사의 일부 또는 부속 말사로도 인식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진감 혜소가 란야의 옛 터에 절을 지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9세기의 화개곡 란야는 폐허상태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란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한가롭고 고요하여 비구의 수행에 적당한 空間處를 뜻하므로 선방이나 암자라는 불가의 보통명사이다.
따라서 란야가 옥천사의 전신이라 하더라도 대렴 당시에는 폐허거나 작은 암자였음이 확실하다.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사료가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화개의 암자로 유명한 칠불암(七佛庵)은 본래의 이름이 운수원(雲水院)인데,
신라 유리왕 22년(AD. 45년) 옥보고(玉寶高) 선인(仙人)이 창건하였고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으로 전해진다.
칠불암은 이름 그대로 院이거나 암자이다.

茶 시배지는 왕의 명령을 따른 점으로 보아,
당시의 오래된 대사찰인 화엄사와 연곡사를 제외하고,
인적이 드문 작은 암자 부근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란야와 운수원은 여기에서 제외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연곡사(燕谷寺, 구례군 토지면 소재)와 화엄사(華嚴寺, 구례군 마산면 소재)는 544년(진흥왕 5년)에 연기(緣起)가 창건했으므로, 대렴 당시 285년이나 된 고찰들이었다.

   연곡사와 달리 화엄사는 대렴 이전에 역대 왕들이 크게 중시한 절이었고,
자장이나 의상 등의 대덕이 신라의 불교 진흥정책을 받들어 실행하던 곳이다.
화엄사는 644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慈藏)이 증축하여 석존사리탑과 석등롱 등을 세웠으며(ꡔ국사사전ꡕ 三榮출판사, p.1769),
경덕왕 13년(754년)에는 왕명으로 절을 개수하였다.
(<불교사전> 동국역경원) 그뿐만 아니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의상(義湘, 625~702) 국사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하였는데, 이로 인해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화엄사를 개수한 경덕왕은 765년에 충담이 끓인 향기로운 차를 마신 기록이 있다.
따라서 차 파종지 선정에서 왕명을 받들었다면 당연히 화엄사 쪽을 중시하였으리라고 보아야 한다.

<朝鮮の茶と禪>에는 다산 정약용이 쌍계사 시배설을 주장했다고 썼는데,
혹시 없어진 <東茶記>에 기록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렇다면 초의가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에 차나무가 40~50리에 걸쳐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 다전의 넓이가 이보다 넓은 곳은 없다.”고 한 내용과 연관해서 다산이 잘못 속단을 내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서유구의 차 시배설

18·9세기의 실학자인 서유구(徐柔榘, 1764~1845)는 대렴의 차씨가 호남에서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된 서유구의 <행포지(杏蒲志, 大阪府立 도서관 소장본)> 卷三의 내용은,
대렴이 호남쪽 지리산에 차씨를 심었다고 보는 최초의 글이다.
이 글의 원본은 <農書> 36(한국학 문헌연구소 編, 서울: 아세아문화사 刊, 1986, pp.193-194)의 영인이다.

“우리나라 호남의 고을에서는 때때로 차가 생산된다.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르기를,
신라 흥덕왕 때에 사신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차씨를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때에 가져온 것이 (중국의) 어느 산지의 것인지 알지 못하나, 지금 호남의 차가 요컨대 그 남겨진 종자이다.
잎이 거칠고 크며 굳다.
그것을 달이면 기미(氣味, 약효와 맛)가 한결같아 연경의 가게에서 구입해 온 황차(黃茶)와 같다.
(찻잎을) 따서 찌고 불에 말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영·호남의 바닷가 고을에 지극히 높은 곳은,
중국의 강절(강소성과 절강성)과 양회(강소성과 남북 회강) 등에서 명차가 나는 지방과 비교하여도
그리 손색이 없고 지기(地氣)와 춥고 따뜻하고 서늘함이 또한 차이가 없다.
혹자가 이르기를 풍토가 맞지 않다고 함은 헛된 소리이다.
진실로 좋은 종자를 구득하여 심고 기르며 또한 열에 말려 만드는 제다법이 올바를 수 있다면,
석화자순차 같은 명품을 애초부터 우리나라에서 얻을 수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서유구가 대렴의 차씨가 지리산 자락 호남쪽에 퍼뜨려졌다고 보는 것은 화엄사나 연곡사 주변의 파종설로 볼 수밖에 없다.

 서유구는 예조판서·대사헌·대제학 등을 역임했으나 학자이고 18·9세기의 농정가(農政家)로서 <林園經濟志>를 썼으며,
중국의 많은 다서를 참고하여 茶에 관한 글들을 상세히 남겼다.
그는 초의 장의순(1786~1866)과 동시대 사람이다.
초의는 화개 차밭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품질이 지극히 우수하다고 했는데
서유구는 호남을 주요 생산지로 여긴 점은 당시의 교통과 지리적 제한성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두루 답사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5) 구례 주변 지리산이 차 시배지

   화엄사와 연곡사는 거의 동시에 지어졌고,
큰 사찰이며, 모두 지리산 밑 구례마을에 연하여 있다.
더욱이 대렴 당시에 삼백년 정도 된 고찰이 두개나 있었던 구례는 논밭,
교통 등의 여건도 좋았을 것이다. 화엄사와 연곡사의 茶 수요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도 자명하다.

   추측컨대 당시의 차밭은 구례의 오래된 촌락을 중심으로 절을 향해 걸어서 1시간의 반경(半徑) 내에 있는
지리산 자락 밭이나 인근한 산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에 대한 연구는 古지리학자나 역사가,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일찍이 화엄사 시배설을 주장한 사람을 살펴보면,
정병헌(鄭秉憲, 1890~1966)은 “흥덕왕이 또한 이 곳(화엄사 긴 대밭)에 차씨를 심도록 분부하였다.”
(김명배 <다도학> 학문사, p.180)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40년에 지은 <朝鮮の茶と禪>에서 家入一雄은 말하기를,
“흥덕왕 당시에 지리산 기슭에는 사찰로는 화엄사 하나뿐이고…
쌍계사는 대렴의 사후에 창건된 절이므로 쌍계사의 차를 대렴이 옮겨놓은 차 종자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 하며, 화엄사의 장죽전을 대렴의 차 종자 시배지로 보았다.
그러나 찻잎의 최대 수요자는 절이 아니라 촌락이므로,

   화엄사와 연곡사와 논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례마을에서 산 쪽으로 향한 밭
(예전에는 산이었으나 지금은 개간되었을지도 모르는)이 9세기 신라의 정책적 중국종 차씨 파종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천년 전이나 이제나, 예술을 보는 눈이나 인간의 상정은 같고 상식 또한 같다.
쌍계사가 파종지가 아니라고 봄은, 사료 이외에 상식적 근거도 기초로 한다.


(6) 지방 특유의 사적과 문화 보존 필요

모로오까 다모쓰(諸岡存, 1879~1946)는 화엄사를 ‘조선 차의 발상지’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805년에 최징(最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차씨를 가져와
일길다원(日吉茶園)에 심어 전파되었다(<日吉社神道秘密記>)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보다 이십 여년이 앞선 차나무 도래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땅의 茶 발상지는 대렴 중심의 화개도 구례도 아니다.
오히려 김해의 본가야나 통도사 쪽으로 관심이 돌려져야 한다.
사적이 확실한 울산의 평교다촌(坪郊茶村)은 일부나마 복원되어야 하고,
8세기 충담과 경덕왕의 찻자리였던 귀정문(歸正門) 터 부근을 찾아
세계 최초의 즉석 풍류다회 모습을 되새길 표지(標識)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한송정과 경포대에 사선(四仙)의 다조(茶竈)와 찻자리를 복원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화개는 고려시대에도 고급 茶 산지로 유명했던 곳으로,
실제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차밭으로 자랑할 만하다.
육우의 <다경> 一之源에는, “차나무는 난석(爛石)에서 나는 것이 상품(上品)이다.”고 했고,
<만보전서>에는 “(차나무는) 골짜기에서 자란 것을 上品으로 친다.”고 했는데,
초의도 “화개동 다전은 모두 골짜기이면서 난석이다.”라고 칭찬했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여 표상(表象)을 세우고 자긍심을 갖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7) 비석 철거의 타당성

   현재 하동군 화개면에는 한국 차인연합회가 1981년에 세운
‘김대렴공 차시배추원비(金大廉公茶始培追遠碑)’와 쌍계사 입구 차밭에 ‘茶始培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추원비는 추모하여 공경을 나타내는 비석이므로 아무데나 세워도 무관할 수 있다고 하나,
이는 대렴추원비를 서울 남산에 세워도 좋다는 말이 되며 또한 조상제사를 아무 곳에서나 지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김대렴공’이라 이름 붙인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사신인 대렴이 진골일 가능성이 크다해서 김씨로 추정하였으나 최씨나 박씨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신라에 大氏는 없었다고 하며 승려가 사신으로 갈 가능성도 없다고 봄이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여기에는 신라 使臣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公’은 작위를 뜻하므로, 대렴 뒤에 붙는 것은 역사성과 사실성을 흐리게 한다.

   대렴이 가져온 중국종 차씨가 쌍계사 주변에 심어지지 않았다는 데 대해 이론(異論)이 없다면,
차 시배지 관련 비석들은 마땅히 철거되어야 한다.
(더구나 차 시배지 비석의 모양은 일본의 萬福寺에 있는 賣茶翁의 ‘茶具塚’과 아주 흡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만약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는 비겁하거나 죄를 짓는 것이며,
우리는 삶의 기(氣) 마저 상실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후인들에게 우리는 거짓말쟁이 차꾼들이 된다.

   여기에는 표지를 세운 이들의 자존심 상실과,
지방문화의 진작과 함께 경제적 득실이라는 문제가 얽혀 있을 수 있으나,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협력하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과 내일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어제 일의 흔적은 그 자체가 우리의 모습을 담은 거울이며 또한 교본이다.
대충 적당히 살고자 한다면 茶人들이 굳이 茶를 권하고 사랑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거짓되고 보기 싫은 것을 치우지 않고 외면하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면, 훗날 아름다운 우리 강토를 기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쓴이 : 鄭英善)

※ 이 글의 제목이 단정적으로 씌어진 것은, 이견이 나와 활발한 논의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주를 달지 못한 것은 지면 탓도 있거니와 훗날 정식 논문이 발표될 것을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연구지에 이 글에 대한 반론을 쓰실 분은 2004년 1월말까지 본연구소에 원고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2003년 6월 1일부터 인터넷 홈페이지 http ://www.teaculture.co.kr 또는 http://예다학당 에 실립니다.

자료출처
http://www.teaculture.co.kr/